교보 문고에 갔다. 얼마만이던가. 깔끔하고 산뜻했다. 천장을 덮고 있던 유리가 사라진 덕분인 것 같았다. 천장의 유리는 서점을 두 배는 더 사람들로 북적여 보이게 만든다. 교보 문고 사장이 원한 게 그런 것이라면 나는 세 배는 더 북적여 보이게 만들 방법을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상식으로 돌아와줘서 감사.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를 손에 들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를 주제로 하는 책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라고 생각해 왔다. 책은 거의 600 페이지에 가깝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채울 수 있는 분량은 아니다. 적어도 "비트겐쉬타인은 왜?"와 같은 엉터리 책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롤로그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19 페이지.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분쇄되고 난 후라면 과연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를 서술한다. 그는 낡은 신학이 신뢰를 잃어버린 시대에 어떻게 행복과 덕을 찾을 것인지 그 수단을 처방한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 종일 이 책을 읽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이 책은 훌륭하다. 특히 9장부터는 탁월하다. 나는 스피노자에 대해 매튜 스튜어트처럼 이야기해 주는 저자를 기다려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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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라가는 길에 읽으려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을 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감명 깊게 본 기억이 났다. 저녁녁. 고속 버스의 실내 독서등이 켜지지 않는다. 커튼을 열고 저물어가는 하루의 빛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대사가 마땅치 않다. 전날 헤밍웨이를 읽은 휴유증이 남았나 보다. 날은 어두워지고 나는 그만 책을 내려 놓는다. 테레비젼에서 뭔가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이폰을 들여다 보지만 밧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창 밖을 본다. 노란 불빛들을 옹기 종기 모아 놓은 마을이 보인다. 그 너머로 투명하고 파랗고 선명한 외곽선이 땅의 경계를 짓고 있다. 마을은 급격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잎들이 그것을 대신한다.

차가 휴게소에 들어서자 실내등이 켜진다. 덩달아 내 자리의 독서등도 켜진다. 전기를 아끼느라 독서등을 꺼 두었었나 보다. 그 세심한 마음씀에 감탄. 다시 출발하려고 기사 아저씨가 인원 파악할 때 나는 손과 눈에 힘을 주고 책을 붙들었다. 봤겠지? 봤다. 차가 출발하고 실내등이 꺼지자 나는 독서등을 켰다. 노란 불빛이 책장에 떨어진다. 작은 활자들이 희미한 몸짓을 한다.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글자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피곤한 눈을 차창 너머로 옮겼다. 기하학적이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작은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차는 내가 살던 마을을 지나왔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일하던 공장을 지나왔을 것이다. 처음 거제에 들어갔을 때 일했던 공장을 지나왔을 것이다. 바다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 거제와 작별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놓쳤다. 나는 나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부끄러웠다.

이제 톨게이트다. 앞에도 옆에도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를 태운 차는 한번 멈추지도 않고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나는 내가 "세월"이라는 작품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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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테고리는 류비셰프를 따라 내가 일한 시간을 기록하고 분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게을러져서 업데이트를 통 안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류비셰프 방법에 대한 사용(후)기를 간단히 적어보기로 한다.

장점: 일하게 한다. 생산적이게 한다. 분석가능하게 하고 예측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효율적이게 한다.

단점: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한다. 예를 들면 책 한권을 읽는 것보다 두권을 읽는 것이 더 생산적으로 보일 것이다. 한 시간 공부한 것보다 두 시간 공부한 것이 더 생산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일 수 있다.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책, 즉 좀 더 가벼운 책쪽으로 나를 유혹한다. 책 한권을 읽고 소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적어도 한번 읽은 것은 읽지 않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책 한권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다른 책으로 손을 뻗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는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때 가장 활발할 수 있다. 나같은 경우엔 걸을 때가 그렇고 책을 덮고 누웠을 때가 그렇다. 그러나 이런 시간들은 시간 기록에서 제껴 놓아야 하는 시간들일 경우가 많다. 책을 덮고 누웠을 때 나는 타이머를 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기록상으로는 아무 시간도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이다. 최근에는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쓰기를 마치려 한다. 더우기 쓴다는 것은 시간 기록상으로는 완전한 실패로 보일 때도 있다. 즉, 몇 시간 동안 쓴 것을 결국 폐기해야 했을 때. 이걸 기록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시간 기록에 극도로 게으르고도 마음에 별 가책을 받지 않고 있다.

둘 중 하나다. 위의 단점은 류비셰프 방법 자체의 단점이든가, 내가 운용을 잘못한 탓이든가.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도 얼마간 의혹을 던질 수 있는 것이 류비셰프에게서 비슷한 증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류비셰프는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쓰던 것과 같은 류의 업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급 업적이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집중도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류비셰프는 툭 하면 새로운 주제로 튀어 나갔다고 한다. 산만하게 방대한 영역을 휘젖고 다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산만함의 이유를 그의 시간 통계 장치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어 시간 주업무에 집중하고 나면 누구나 피로를 느낀다. 다른 학자들이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주업무에 복귀하는 순간에 류비셰프는 다른 부업무에 빠져 들었을 수 있다. 또다시 피로가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류비셰프는 또다른 업무로 스위치 했을 수 있다. 물론 류비셰프는 하루 중 상당량의 시간을 주업무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그 시간과 에너지는 다른 부업무들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배분된 것일 수 있다. 즉, 기록된 만큼보다 덜 집중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류비셰프도 하루 8시간 동안 5 페이지의 진척을 보였다는 기록보다는 다양한 항목에서 다양한 성취를 얻은, 그러니까 좀 더 긴 기록을 좋아했을 수 있다. 그것 역시 다양한 관심사로 그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관심사에 대해서건 그에 투여한 시간과 업무 항목은 그를 충분히 만족시켰을 것이다. 시간 자체는 차이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이렇게 쓰고 보니 단일하고 집중된 일을 하는 경우에는 류비셰프의 방법이 적당치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은 하루에 열 페이지를 쓰는 걸 작업 규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만약 스티븐 킹이 류비셰프의 시간 통계를 사용한다면 그의 시간 통계 내역은 무미건조할 것이다. 류비셰프의 경우라면 평균 업무 시간량만 나와준다면 어제까지 하던 작업을 거침없이 제쳐 두고 딴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이 나와 버렸다. 베드로 앞에 두툼한 시간 통계 장부와 수많은 영역에 걸친 수많은 성과물을 자랑스레 펼쳐 보이는 것보다는 내가 가장 잘 하는 영역에서 높은 순도로 이루어진 성과물을 내놓는 것이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

이로써 나의 게으름에 대한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면죄부가 작성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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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2 2012-06-0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방금 놀랍다는 댓글쓰고 또 한번도 쓰고...다시한번 쓰게 만드시네요ㅋㅋ;;
저는 글로 작성하신 그런 케이스를 "내 열정" 혹은 편집증(강박), 여튼 병적인거라고 생각하고있었는데...미적인 결과물이나...기타 등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반복패턴을 합리화 했더라지요...사실 아직도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이 카테고리 안에는 스피노자의 저작들에 대한 나의 번역이 들어갈 것이다. 지금 품고 있는 야심은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신, 인간 그리고 행복에 관하여", 그리고 "지성개선론"까지이다.

일차적으로 이 번역들은 스피노자를 깊게 읽고자 하는 나의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스피노자 자신이 표현한 대로의 스피노자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의 실현일 것이다.

아다시피 스피노자의 철학은 쉽지 않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스피노자의 문제 의식, 즉 스피노자에게 흘러 들어간 사고들, 그렇게 해서 발아된 사고들, 그렇게 해서 배척된 사고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의 사상의 맥락이 매우 두텁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스피노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즉, 철학 고유의 영원한 문제들. 덧붙여 스피노자의 독특한 표현 방식도 이유 중 하나로 들 수 있겠다.

여기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첫번째 항목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부록으로 실린 "형이상학 단평"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저작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스피노자 당대의 신스콜라 철학자들과 직접 연결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중세 철학으로의,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의 소급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또, 스피노자 철학의 완성태는 "에티카"이므로 에티카에 대한 포괄적이고 심도 있는 선이해 안에서 이 저작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등등...

이쯤에서 자명해지는 것은 시작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런데 어쩌면 니체의 말 한마디를 내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시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다음에 나온다. -이런 데 와서 고생하는 니체에게 미안.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작할 것이다. 일단 시작하고 고쳐나가는 방식, 즉 신이 작업하던 방식(진화)을 따를 것이다.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스피노자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스피노자를 최대한 이해될 수 있는 한국어 문장으로 바꾸어 놓으려 노력할 것이다. 스피노자가 의미있는 것은 그가 다룬 문제들이 현재에도 의미 있기 때문일 것이므로 나는 스피노자라는 빛으로 현재를 조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스피노자를 주석하는 데 아무 거리낌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카테고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나의 이해를 깊게 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자, 이 정도면 충분히 거창하다. 그러니 이제 몸통과 꼬리를 내놓아 보아라!

기본 대본은 아래와 같다.
Edwin Curley,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Samuel Shirley, SPINOZA COMPLETE WORKS

(참조 가능한 판본과 언어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 또한 나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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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거제 해금강에 다녀왔다.
스티븐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5장, 6장까지 읽고 책을 책장에 꽂아 두었다.
컬리판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중 "형이상학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스티븐 베이커의 "뉴머러티"를 읽고 있다.

1.
곧 이곳 거제를 떠난다. 떠나기 전에 거제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싶어 해금강에 다녀왔다.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이 좋았다. 유람선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해금강은 바다 색깔부터 달랐다. 신선대의 괴암들을 바라보다 문득, 저것들이 어떻게 생성되었을지 궁금해 졌다. 신선대는 화성암(맞나?)인 것 같은데 부위 별로 색깔이 달랐다. 또 두꺼운 편리(맞나?) 같은 게 겹쳐 있었다. 생성 기원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언어가 없어 답답했다. 지질학 공부를 하고 싶어 졌다. 시어리어슬리.






2.
스티븐 나이들러의 "스피노자"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나지 않는다.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보겠지 싶어 책장 안으로 퇴장시켰다. 간단한 리뷰를 여기에 쓰기로 한다. 좋은 얘기를 하게 될 거 같지 않아 따로 리뷰 카테고리에 리뷰를 쓰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번역 상태가 좋지 않다. 굉장히 서둘러 번역한 느낌이 난다.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 부분을 서술하는 부분에 약점이 많다. 그냥 그러려니 하다가 역자의 프로필을 보고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역자는 이미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 "정치론"을 번역해 낸, 말하자면 나름 스피노자 권위자다. 그런데 마치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처음 대하는 사람인냥 번역을 해놓았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미스테리를 느낀다. 악역으로 이름 높은 "새로운 과학 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필을 보면 역자는 바슐라르에 대한 논문과 책을 쓴 바슐라르 전문가다. 그러나 번역된 책을 보면 마치 바슐라르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번역을 해놓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화가 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해서 지적 호기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편집적인 부분을 보자.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스피노자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번역 대본은 "Spinoza by Steven Nadler"로 되어 있다. 나는 스티븐 내들러가 "Spinoza: A Life" 외에 "Spinoza"라는 제목의 또 다른 책을 썼나 싶어 잠시 혼란을 느꼈다. 한국어판 책 제목을 달리 하더라도 원 대본의 서지 정보는 정확히 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중에는 나같이 바보같은 독자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소한 부분 몇 가지를 더 말하자. 책 앞 부분에 도판이 몇 개 있다. 올덴버그도 있고 므나세도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 책에는 스피노자의 초상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쪽수 번호가 책 안쪽 접히는 부분에 적혀 있다. 색인과 해당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다보니 그게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 방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한번 물어 보자. 도대체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란 말이 무슨 뜻인가?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니 탈주자니 전복자니 하는 수식어로 광고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내게는 그저 말장난으로 들릴 뿐이다. 스피노자에게 저런 타이틀을 붙인다고 책이 얼마나 더 팔릴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정치적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레인스뷔르흐, 포르뷔르흐, 레이든 등지에 은둔해, 암스테르담에서 그를 지지했던 '스피노자 서클'과 함께 지하 활동에 들어간다. 발리바르의 표현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민족 해방 투쟁의 후계자이자 시민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 지식인의 자율성을 옹호한 투사였다." 제발!! 이러지 말자.

이제 원저작자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자. 솔직히 내들러의 책은 지루하다. 일반적으로 철학자의 전기는 철학자의 사상에 접근하기 쉽도록 짜여진 입문서 역할을 한다. 철학자의 개인사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역학 관계, 철학자가 영향을 주고 받은 지적 환경 등등이 적당히 버무려져서 철학자의 사상에 맥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들러의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서술과 유대 관련 자료가 과도하게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편집자라면 적어도 1/3은 잘라내려 했을 것이다. 내들러가 섭렵한 자료들의 방대함, 그 철저한 고증에는 거의 경외감마저 들지만 정작 중요한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의 변증법은 대체로 평면적이고 생기없게 취급되고 있다. 요는 내들러의 관심과 기획이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내들러의 편집자는 어떻게 했는가? 나같은 독자는 뭣 모르고 내들러의 책을 구입했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책을 읽다가, 의무감에서 읽다가, 결국 치워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태를 내들러의 편집자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들러의 편집자는 어떻게 했는가? "철학을 전복한 철학자"라는 아무 알맹이 없는 수사로 어떻게 해서든 눈먼 독자들의 지갑을 열려고 했을까? 책 맨 앞부분을 보면 양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참으로 부러웠고 그러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다음은 (아마도) 이 책의 편집자가 이 책에 대해 소개한 글이다. 맨 첫 페이지에 있다.

"이 책은 각종 언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전기 중 최초의 완전한 전기이며, 상세한 기록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고 스피노자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히 열거하지 않는다. 이 책은 17세기에 유대인이 살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중심부로, 그리고 유대교에서 발생한 스피노자의 추방 사건을 포함한, 초기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요하는 정치적, 사회적, 지적, 종교적 세계의 한 가운데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 책은 철학자들, 역사가들, 유대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 유대 역사, 17세기 유럽의 역사 또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독자 대중을 위해 쓰였다."

정확하고 솔직한 소개글이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이 양식이라고 본다.

3.
컬리판 "스피노자"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부록으로 달려 있는 "형이상학 단평"을 읽기 시작했다. 내 느낌에는 스피노자를 이해하는데 부록"들"만큼 적당한 분량에, 상대적으로 쉽고 명료한 서술을 하고 있는 문헌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첫 장을 읽었지만 스피노자의 명료한 사고와 논리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다. 번역을 해서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만한 실력이 되기만 한다면. 이제 시간은 핑계가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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