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칠 전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로 신발을 사러 갔었다. 예전에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곳인데 많이 바뀌었더라. 대형 구조물들이 공사 중에 있었고 못보던 쇼핑몰 빌딩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혹시나 싶어 헌책방 거리로 가봤는데 헌책방들이 변함없이 그곳에 죽 늘어 서 있다. 천천히 걸으며 아이 쇼핑을 하다가 할머니 주인장한테 끌려 들어갔다. 딱히 살 책이 있는 게 아니라서 서가 이곳 저곳을 목표없이 두리번거리는데 파란색의 익숙한 장정이 눈에 확 들어왔다. 꺼내 들고 보니 최재희 번역의 "실천이성비판". 한번도 펼쳐 보지 않은 듯 깨끗했다. 살 책이 생겨서 기뻤고 할머니, 할아버지 주인장에 면목이 서서 또 기뻤다. 1992년에 16000원 정가를 달고 중판으로 나온 책. 할아버지 주인장이 8000원을 불러서 쾌히 책을 사들고 서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실천이성비판", "철학서설(프롤레고메나)" 등 칸트의 주저와 칸트 철학의 이해를 위한 묵직해 보이는 논문들이 합본되어 있었다. 이걸 횡재라고 해야 하나!

요즘 주로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칸트의 비판철학을 살펴 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는 시간을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반면 연장은 정신 밖의 무한한 실재다. 예를 들면 보통의 물체는 3개의 차원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규정성을 갖는다. 연장이 무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연장이 무한 차원을 갖는다는 뜻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연장은 무규정적이다. 그런데 이 말은 연장이 보통의 물체와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다면 연장을 일종의 범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장도 정신의 구조물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스피노자는 이런 고민을 했을까? 그에게 어떤 것은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어떤 것은 실재라고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든 의문들이다. 혹은 칸트를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들이다.

"프롤레고메나"는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 격이라고 한다. 잘 되었다 싶어 머리말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최재희 번역이 초판을 찍은 것이 1975년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는 옛스러운 문장들 사이로 철학사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는 칸트의 터질 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말은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고 그에 대해 숱한 비판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러한 비판들에 대한 칸트의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칸트는 칸트이고 그러므로 철학자인지라 그러한 비판에 대한 감정적 반응들을 보편적인 통찰로 바꾸어 머리말에 가득 실어놓았다.

"[소위] 학자는, 이성 자신의 샘에서 길러내려고 노력하는 철인이 할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이후에 철인이 한 일을 세간에 보고하는 순번이 학자에게 생긴다."

(아, 철학책을 읽으면서 웃음보를 터뜨릴 수 있다니! 이렇듯 날키로운 냉소를 고급한 통찰인 듯 말할 수 있다니!)

"사실 형이상학의 나라에서는 심원한 지식과 피상의 요설을 준별할 확고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딴 방면의 일에서도 무지한 자가 결정적인 단안을 내리는 불손이 있다."

(음...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정색을 하게 되는 나.)

"형이상학에 대한 인간의 소질은 도저히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의 일반적 이성이 형이상학과 아주 밀접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평심하게 말하는 듯 하지만 심원한 통찰. 나는 자세를 바로 잡는다.)

"준재(흄 - weekly의 주)는 여기서 사변적 이성의 월권적 요구를 억제함에서 얻게 되는, 소극적 효과에만 착안했고, 인류를 사도에 인도하는 끝없는 집요한 논쟁을 완전히 폐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 효과 이상의 적극적 손해를 간과했다. 이 적극적 손해는 의지에 그 전노력의 최고 목표를 제시할 수 있는 유일의 가장 중요한 희망[전망]을 이성에서 박탈할 때 생기는 것이다."

(칸트의 진지함 혹은 무거움 혹은 깊음.)

"무릇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못하는 일을 타인에게 요구하고, 자신이 그보다 더 잘하지 못하면서 남을 비난하며, 자신은 어디서 그것을 발견해야 할지 모르는 일을 타인에게 신청함에 의해서], 자신은 마치 독창성이 있는 천재인 척 하는 그런 사치스럽고 과장적인 인간이 흔히 하는 일이다."

(강조는 칸트 자신이 한 것이다. 나는 칸트에게 심하게 야단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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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화집을 보러 서점엘 갔다. 정물화. 어제 처음 펼쳤을 때의 그 강렬한 색감이 주는 충격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그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배제하고 기법에만 주의해 찬찬히 살펴 보았다. 어제는 세잔의 저 정물화에서 확고함과 단단함을 보았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상식의 예상을 이리 저리 깨고 있더라. 나는 실험이 단호함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가슴이 쿵꽝 쿵꽝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바로 화집을 닫았다.

종일 세잔의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척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엘 들렀다. 오늘은 세잔이 내게 그닥 강한 존재감을 주지는 못했다. 대신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세잔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 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잔이 나를 부지런하게 만드는 구나. 어제 본 그림 몇 장을 또 보기 위해 나는 길을 돌아 이삼십 분을 더 걸었다. 길 양편으로 드리워진 처마들의 구도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벽에 붙은 전시회 광고 내용을 암기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세잔의 단단하면서도 어설퍼 보이는 붓터치는 내게 뭐든 맘껏 휘둘러 봐, 라고 속삭인다. 피카소의 그 무궁한 작품들, 나를 기겁하게 한 그 무지막지한 창의의 생산물들은, 피카소야말로 스피노자의 그 신임을 증명한다.

스피노자의 단호함은 나의 게으름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존에 관한 이론 또한 가지고 있다. 즉, 실존이란 표현된 것의 총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표현될 수록 더 많이 실존하는 것이며, 더 완전한 것이며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이라는 이론. 사실 이 이론은 신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신에 있어 실존과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실존과 본질이 분리되어 있다. 인간은 본질에 관한 장에서 주로 논해진다. 아다시피 인간의 본질은 코나투스, 즉 삶에의 맹목적 욕구다. 다시 피카소를 떠올려 본다. 스피노자는 피카소의 관점에서, 피카소의 환경에서 읽혀져야 한다. 왜? 지금은 21세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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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에 부딪혔다.

"Everyone can clearly see this if only he attends to the following point, that if God had wished to make infinite our faculty of understanding, he would not have needed to give us a more extensive faculty of willing than that which we already possess in order to enable us to assent to all that we understand."(IP15S)

"바보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이 우리에게 무한한 이성 능력을 주길 원했었다면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무한한 의지는 아예 처음부터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1. 지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오류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데카르트의 오류 이론. 오류는 인간의 이성은 유한한데 의지(선택, 판단)는 무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주장.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이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이렇다. 그러므로 이성이 무한하다면 (무한한) 의지는 불필요한 것 아닌가! 조금만 더 나가자자. 그렇다면 무한한 이성을 갖고 있는 신에 있어 의지란 무의미하거나 (수사로 멋지게 표현하자면) 이성과 동일한 것 아닐까!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유령처럼 바로 옆에 서 있다.

조금 아래를 보자.

"when we perceive a thing clearly and distinctly, we cannot refrain from assenting to it, that necessary assent depends not on the weakness but simply on the freedom and prefection of the will."

"사물을 명석 판명하게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허약함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의지의 완전성 때문인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설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유 이론이 거의 모습을 드러낸 채 숨어 있다.

보다시피 스피노자의 이론은 강력하고 무자비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에서 개진된 이론은 데카르트의 것이라고 연막을 쳤지지만 송곳같은 스피노자의 이론을 꼭꼭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스피노자의 이론은 진리인가? 우리는 여기서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주저함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지성은 유한한데 의지는 무한하다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실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피노자의 답변은 이렇다. 한 이론을 배제하는 다른 이론들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들 사이의 힘이 팽팽하기 때문이라는 것. 즉, 한 관념의 진리성이란 그 관념의 힘의 크기를 말해 주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들의 함의는 너무도 풍부하다. 그리고 그렇게 헤매다 보면 결국 "에티카"로 수렴하게 된다. 나도 "에티카"로 돌아갔고 지금 제2부를 읽고 있다. 당분간 스피노자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기보다는 스피노자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한국어판 미출간 저작을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번역하겠다는 나의 계획이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한 변명을 이 참에 쓱 끼워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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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있는데 내가 말끝마다 스피노자를 들먹이자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내가 읽어본 스피노자 입문서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소피노자라는 한 인간을 소개해 준 책을 그 친구에게 선물해 주기로 했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친구는 곧, 책을 선물한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반응으로 나를 흐뭇하게 했다. 편하게 누워서 윌 듀란트의 스피노자 장을 읽다가 곧 책상으로 옮겨 갔고 급기야는 연필을 쥐고 줄을 쳐 가면서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세잔을 언급했다. 그 친구는 세잔을 좋아한다. 세잔의 무엇을? 오, 이런 식의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친구는 내가 스스로 세잔의 그림을 찾아보고 세잔에 관한 책을 읽어 보기를 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어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잠시 내려 놓고 세잔의 도판이 가득한 책들을 살펴 보았다.

세잔의 일생에 대해 읽고 나자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프루스트였다. 둘 다 심약하고 여린 품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잔이 오전 10시면 해가 진다고 말했듯이 한낮의 시간이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간은 늦게 시작되었고 그 끝은 없었다. 프루스트도 세잔도 글을 쓰다 죽었고 그림을 그리다 죽었으니까. 그들의 세속적 삶은 문장들 사이, 터치들 사이에서 겨우 존재했다. 그들은 과학자처럼 세계를 관찰했고 종교인같은 한결같음으로 그것을 원고자 위에서, 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했다. 프루스트는 밤새껏 작업하여 원고 여백과, 풀로 덧붙인 종이장을 추고로 가득 메운 것에 만족하며 아침에 잠이 들었다. 세잔은 끊임없이 작업했지만 작업 속도는 경이적으로 느렸다. 마지막 남은 터치 하나에 걸릴 시간을 어림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일 구름이 걷히면 적절한 색조를 얻을 수 있을지, 아니면 적절한 색조를 얻지 못하여 전체를 다시 칠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절대성이나 완벽성의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보기에만 좋은 졸작에 만족하고 만다."(세잔)

내 앞쪽 벽에는 2 X 4 m 정도 크기의 유채화가 걸려 있다. 어제도 걸려 있었지만 오늘에야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저 그림에서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원근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을 썼다. 가까운 쪽은 짙고 먼 쪽은 옅다. 왼쪽 상단의 거대한 수풀과 균형을 맞추고 공간감을 창출하기 위해 오른쪽 아래에 나무 하나를 그려  놓았다. 그런데 멀리 왼쪽 상단에 그려 있는 수풀 속의 나무와 크기가 같다. 순간, 저 화가분은 소심한 분일 게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크고, 과장되고 확고한 나무 하나를 원하고 있었나 보다. 왼쪽 상단의 녹음이 무척 짙다. 그 짙음을 오른쪽 아래에서 받아주고 있다. 그런데 왼쪽의 짙음들 사이로 흐르는 강은 어떠해야 할까? 짙게 해야 할까? 옅게 해야 할까? 화가는 옅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난 그 부분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화가도 고민을 했을 것이고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필시 만족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출처: 내가 직접 찍음)

내가 알기로 세잔은 회화에 있어서의 어떤 선험적 구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인 것 같다. 예컨대 전통적인 원근의 표현. 시선을 한 촛점으로 유도하는 직선들이나 농담들. 그 이론들은 우리의 눈의 구조에서 연역된 것들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실 체험을 받쳐 주는 구조들은 아닐런지 모른다. 예컨대,우리는 원근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안다.


(출처: http://mtcha.com.ne.kr/korean-photo/sosun/photo8-gimhongdo%20jagpum.htm)

세잔이 선택한 것은 주로 색조와 구도였다. 세잔은 그것을 통해 인상주의풍 그림들의 표면성, 가벼움을 극복하고 깊이와 풍부함, 즉 강한 존재감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색조의 배열, 대비 그리고 그 밖의 기법들을 통해 화면 전체가 강력한 무게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평면적이지 않고 깊이를 가질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세잔의 감각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연구하고 실험하고 알아낸 것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감각.


(출처: http://cicnig.com/laughing-paul-cezanne-lesson-plans/)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어느 정도의 테크닉과 손재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색조를 표현하고 인상들을 훌륭하게 조화시키는 일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세잔)

세잔은 그에서 성공했을까? 그것은 세잔의 그림을 직접 보고서야 판단할 수 있는 일이리라.

그런데 세잔의 주관심이 색조와 색조들 사이의 대비나 구도가 되면서 그의 그림의 주인공은 '표현된 어떤 것'이 아니라 '표현' 자체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세잔의 인물화들의 일관되게 경직된 포즈들, 무표정한 표정들을 보면서 거기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그것들은 정물화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듣기로 세잔 앞에서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세잔의 작업 속도가 느린 탓도 있지만 세잔은 모델이 조금만 움직여도 투덜댔기 때문이라고).


(출처: http://www.wikipaintings.org/en/paul-cezanne/madame-cezanne-in-the-greenhouse)

말년의 대작들, 예컨대 목욕하는 사람들의 디테일이 생략된 나신들에서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그런데 내게는 그 군상들이 묘하게 보인다. 그 군상들이 세잔의, 때로는 천진스런 개성과 어긋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말년의 세잔이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열정을 쏟았는지 조금 의아스럽다. 일상적인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들에 비해 그것들은 다소 상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잔의 그림 앞에 직접 서 보면 알 수 있을까?


(출처: http://www.steveartgallery.se/sweden/picture/image-27926.html)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이 글은 미술 평론 비슷한 어떤 것이 절대 아니라 일기 비슷한 어떤 것이다. 세잔을 보면서 든 생각들을 간단히 스케치한 것일 뿐이다. 앞으로 계속 발전시켜 볼 여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볍게 버려질 단상일 뿐인지 나도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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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 철학의 진로를 바꾼 17세기 두 천재의 위험한 만남
매튜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17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의 작은 하숙집에서 만나 철학을 논한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소재임에는 틀림없는데 불행하게도 저자는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 철학보다는 소설에나 어울릴 듯한 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공허하고, 윤리적으로는 무책임하다는 평을 해주고 싶다.

저자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를 분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쏟아부은, 그러나 정작은 그 자신 스피노자주의자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라이프니츠는 "...로크의 <인간 지성론>, 뉴턴의 물리학,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루이14세의 정치, 중국 철학의 역사 등에서 그의 경쟁자(즉, 스피노자--인용자의 첨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517페이지) 감지하고 그것을 분쇄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주장의 파격성에 걸맞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저자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죽고 난 후 얼마 있다가 갑자기 데카르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가 열거한 데카르트의 오류 중 하나는 "... 물질이 가능한 모든 형태를 잇달아 취한다..."인데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의 것으로 간주한 이론(가능한 모든 것이 존재한다)과 비슷해 보인다..."(이상 모두 399페이지)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자면 저 이론은 스피노자가 분명하게 오류라고 지적한 바 있는 데카르트의 이론 중 하나다. 즉, 그것은 데카르트의 이론이지 스피노자의 이론이 아니다. 게다가 스피노자에게서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사실은 답신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프니츠의 절친한 친구 취른하우스였다. 라이프니츠 역시 스피노자의 답신 내용을 알고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의 저 명제가 바로 라이프니츠의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의 한 계기였을 거라는 게다. 결론을 다시 말하면 라이프니츠의 데카르트 공격은 라이프니츠-데카르트 사이의 문제이며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철학을 형성해 가는 한 과정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고 스피노자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당대의 기계론자, 유물론자, 진보론자, 이성론자들을 다 스피노자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같으면 저런 무리들 중의 하나로 스피노자를 끼어 넣었을 텐데 말이다. 저자의 이런 인식은 저자가 스피노자 철학의 섬세한 부분에 대한 감각은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것 같다. 물론 이 자리는 그에 대해 논할 자리가 아니므로 논의는 생략하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을 소설처럼 구성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엉뚱한 강조, 철학 이론을 억지로 비틀어 댄다는 느낌들을 감내하면서 책을 읽다보면 그러한 강조와 비틈이 일종의 복선이었다는 것을, 책의 구성을 유연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엉뚱한 강조나 비틈은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기 마련일 터이다. 나로서는 다만 저자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길 뿐이다. (스피노자가 자신보다 철학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어떤 경멸적인 몸짓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저자가 계속 발전시키는 과정을 보라. 스피노자의 nature를 "본성"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라. 전부 스피노자-라이프니츠라는 무대를 위해 만들어 놓은 강조이고 비틈이다.)

책의 저자로서는 자신이 애써 쓴 책이 오래 살아남고 또 반복해서 읽히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값싼 기교를 포기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두번 읽었다. 첫번 읽을 때는 약간의 미심쩍음을 압도하는 찬탄 속에서 읽었다. 그러나 두번째 읽을 때는 페이지 도처에 "stupid!"라는 문구를 적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한번 읽고 말았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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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7-11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weekly 2011-07-17 11:31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이 책의 장단점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단점: 스피노자-라이프니츠의 대결 구도를 만들기 위해 라이프니츠의 적들에 전부 스피노자의 꼬리표를 달아놓았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너무 너무 지나치다는 것 등등.

장점: 이 책을 읽고나면, 특히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 접근할 때 느끼게 되는 황당함과 기이함이 상당 부분 줄어들리라는 것.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을 만들 때 무엇을 얻으려 했고, 무엇을 피하려 했는지 하는 맥락을 이 책은 잘 짚어준다는 것 등등.

리뷰 쓸 때 이런 것들을 좀 더 아울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앉은 자리에서 너무 급하게 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고칠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