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달 전 한국에 있을 때 은사님을 찾아뵙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작정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다. 교수님이 플라톤 전공이셨던지라 이런 대화가 오고가기도 했다.
나: 박종현 번역의 국가를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 유려한 번역이라면 도저히 원전에 충실한 것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 아냐, 아냐. 박종현 교수님 번역은 원전에 아주 충실한 번역이야. 그러면서도 가독성이 아주 좋지. 그래서 박종현 교수님이 탁월하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잘 읽힐 수 있게끔 번역해내기가 힘들어...
교수님과 나는 계속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번역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의 질이 뛰어나지는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는 박종현 교수님 수준의 대가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그에 얽힌 얘기들...
(그때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도 참으로 아름답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려하여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번역은 박종현 교수님의 것이 아니다. 박종현 교수님의 훌륭한 번역에서 많은 계발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전적으로 내 인상에 불과하지만...)
2.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은데 일반 독자들은 전혀 그런 느낌을 받는 못하는 번역서들이 왕왕 있는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학문적으로 아주 충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번역본의 일부를 원문과 비교해서 살펴 본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일반화해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면, 전공자들이 학문적으로 충실하다고 말하는 번역은 거의 원문에 대한 축자 번역이라는 것이다. 즉, 원문을 옆에 펴놓고 나란히 읽어 갈 때 도움이 되는 번역을 전공자들은 좋은 번역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런 번역이 가장 나쁜 번역처럼 여겨질 수 있다. 심한 경우 그런 번역은 거의 기계 번역과 같은 수준으로 보일 테니까(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 번역이 적절한 예가 되겠다).
3. 나의 경우 한국어 번역본을 고르는 기준은 무조건 가독성이다. 중역이 아닌 원전에 대한 번역, 학적으로 정선된 술어의 선택 등등은 내게 부차적이다. 순수이성비판 번역이 새로 나왔다 해서 둘러 본 적이 있었다. 역자의, 문장 구조 하나까지 충실히 옮기려 했다는 말에 내 속은 쓰려졌다. 구역과 신역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펴들고 맨 마지막 문장을 비교해 보았다. 구역은 관계대명사절을 안고 있는 문장을 두 문장으로 잘랐고, 신역은 그대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신역이 무엇을 얻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렇게 해서 신역은 가독성을 잃었고 판매 부수를 하나 잃었다는 것이다.
4. 철학 서적 번역에 대한 비평의 많은 부분은 개념어를 얼마나 적절하게 한국어 단어로 옮겼는가에 집중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비평을 게으른 비평이라고 여긴다.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것은 책을 읽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비평이라는 것!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누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로 옮겼다고 하자. 아마 철학에 조금만 조예가 있는 일반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엉터리 같은 번역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판의 칼을 들이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자. 존재와 실존은 어떻게 다른가? 실존 대신 존재로 옮기면 안되는 건가?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쓸데없는 걱정들 말라고. 사르트르가 그의 책에서 하는 일이란 결국 존재(실존)라는 말에 대한 다양한 맥락들을 제공하는 것이지 않은가? 설사 어떤 비전문가가 실존이라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말 대신 존재라는 말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단어의 쓰임에 대한 전체 맥락이 제공된다면 독자가 사르트르의 명제를 오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내 말의 요지는, 특정 개념들에 집착하고, 원문의 축자적 의미를 따라가는 번역보다는, 맥락을 잘 풀어주는 번역이 훨씬 의미있다는 것이다.
5. 해석가들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의 의미를 한정지으려 한다. 그러나 그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고안한 용어들에 한가지 분명한 뜻만을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낱말들은 놓여지는 맥락마다 진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은 서로를 향해 똑같은 문장을 사용하여 비판을 한다. "당신은 ~라는 말을 여기 저기서 부주의하게, 부적절하게, 혼란스럽게, 때로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런 비판을 받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 그때 내가 좀 실수를 했지요...")
6. 여기서도 다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개념어에 대한 확고한 대용어를 한국어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정력의 소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 개념이 그 맥락에서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 훨씬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축자 번역(그리고 개념어 번역에 대한 과도한 집착.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은 맥락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려는 아주 적절한 핑계라는 것(물론 해석적 중립성을 내세우지만). 앞서 이야기한 가독성이란 결국 역자가 원문을 읽고 앞뒤가 맞게 잘 이해한 것을 한국어로 풀어줄 때 나타나는 현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반면, 축자 번역에 특징적인 것은 이해를 아주 희소하게만 담고 있다는 것.
7. 이러한 맥락 드러냄이 없는 철학서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분은 한국어판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는 거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영어판을 읽으니 이해가 잘 되더라, 그러나 다시 한국어판으로 돌아와 읽으니 또 이해가 안되더라, 그러나 아무래도 이건 역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와 독어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일 것이다... 라고 말하더라. 비슷한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번역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읽으면 이해할만 한데 한국어로 읽으면 그야말로 형이상학이 된다! 이걸 고전 그리스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극이 커서 그렇다고 양해해 주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박종현 교수님이 충분히 증명해 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독어와 한국어 사이에서만 그 간극을 인정해야 할까?
8.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어가 영어에 비해 많이 추상적인 언어라고 생각했었다. 영어를 옮긴 글들이 원문에 비해 추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나는 비슷한 말을 들었다. 라틴어 문헌을 번역하는데 있어 영어가 라틴어의 생생한 구체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우리가 바보가 아니라면 라틴어>영어>한국어 순으로 각 언어가 구체적 현상을 제대로 포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사유가 시작된 곳에 생생함의 권리가 놓여 있다. 사유가 전달되는 과정이 곧 추상화의 과정이다. 추상화되지 않으면 사유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가 추상화의 외피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사유가 아니다. 즉, 그것은 고유의 생생함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때 "고유함"이란 사유가 처음 발생했던 그곳의 고유함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지금 이곳, 그 사유가 전개되고 있는 바로 이 맥락에서의 고유함이 그 사유가 드러내야 할, 그리고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 생생함이다. 만일 이 명제를 긍정한다면 철학서들이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자명할 것이다. 즉, 축자적 번역을 지향한다는 말은 철학적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