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 아이가 입대를 하여 군에 가 있다. 제대하기 전에 뭔가 소포로 보내주고 싶어 생각하다 최병현 교수의 <징비록> 영역본이 떠올랐다. 지난 번 한국에 갔을 때 이 친구가 <사기 열전>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학으로 피아노와 기타를 익힌 친구이기도 해서, 지금 전공은 전혀 다른 것을 하고 있지만, 국학에 딱 맞는 재질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풍진 세상에 태어나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는 훌륭한 방도 중의 하나가 고전 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더구나, 유럽의 도시 곳곳에 한국 가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기는 이 한류의 시대에, 한국학이란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아닌가? 물론 이 의도를 그 친구에게는 꼭꼭 가리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징비록> 영역본이 어제 도착해서 오늘 아침에 이리 저리 둘러 보았다. 그러다 한국학 주제로 영어로 출간된 책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쪽 영역이 아직 미개발지라고 생각하여 징징대곤 했었는데 순간 창피해졌다. 그렇게 알게 된 저자 중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한국미술사학자 김성림 교수의 책 하나를 주문했다. 조선 후기 미술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다음 주 중에 올 것 같다. 개요를 잠깐 읽었는데 흥미로왔다. 조선 후기는 흥미로운 시대다. 적당한 단어가 없으므로 그 시대를 세속화의 시대라고 칭하도록 하자. 초기 자본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시대에는 상승하는, 도드라지는 사람들의 무리, 즉 계급이 나타나야 하는데, 조선에서는 중인이 그 역할을 맡았다. 중인은 스스로를 표현한다. 혹은 이렇게 저렇게 표현된 것들을 총칭하여 중인이라 한다. 그 표현된 영역 중 하나가 예술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김성림 교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후기의 미술, 그 미술의 대상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마자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네덜란드 미술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김성림 교수가 그 시기 네덜란드 미술에 대해서도 언급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국을 모르는 제삼자에 있어 저 책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즉, 조선 후기 미술이 전체사라 불릴 수 있는 공간의 일정한 곳에 좌표지어져서 다른 문화권의 미술과 비교될 수 있고, 그 일반성과 독특성이 아울러 평가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 말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 전체사라는 공간은, 근대화, 세속화, 자본주의화 등등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을 것이지만, 본질은 그 안에 일정한 단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여튼 나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을 맛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라는 갑갑하고 상투적이고 게으른 말에 만족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아래는 유튭에서 찾은 김성림 교수의 인터뷰다. 같은 인터뷰를 하나는 1분 짜리로 짧게, 다른 하나는 십 여분 이상으로 길게 편집해 놓았다. (김성림 교수의 책에 대해서는 알라딘에 검색하니, 아마 책거리 전시 도록만을 판매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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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러저러한 현상학 저작들에 대해 문의하시는 분들이 있다. 아래는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다... 


학부 졸업반 때 저자 직강으로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 강의를 들었었다. 졸업반이다보니 다들 수업보다는 취업 정보 등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의는 거의 파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전숙 교수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수강 학생 전원을 강의실에 불러 모으셨다. 


한전숙 교수님은 큰 키에, 조용한 학자 스타일이셨다. 서두에 이러 저러한 꾸지람을 하셨고 이어서 철학과 학부 4학년 학생이라면 응당 알고 있어야 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어떤 개념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 아무도 대답을 않자 (아마도 홀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을) 나를 지목하셨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조용한 학자 스타일의 명예 교수님이 천둥과 같은 소리로 화를 내셨다. 그 천둥과 같은 꾸지람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철학 학부 4년 내내 나는 그러한 열정에 목말라 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러한 상기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먹고 사느라 바쁜 세월을 보내다 어찌 어찌 영국에 오게 되었을 때 나는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 책을 짐짝에 꾸려 가지고 왔다. 이미 여러 번 읽은 터였다. 다른 이러 저러한 책들, 예컨대 후설, 브렌타노, 하이데거 등의 현상학적 저작들도 꽤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후설이나 하이데거는 일급 철학자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상학 연구자 일반은, 꽤나 저명한 연구자들을 포함해서, 이류나 삼류에 불과한 것 같다. 내가 현상학의 질곡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현상학의 문제들은 한없는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블랙홀과 같다. 거기서 벗어나기도 어렵고 거기서 어떤 포지티브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이라는 책의 서문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한전숙 교수님은 수십년 동안 거의 후설만을 줄기차게 읽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얄팍한 참고서에 불과한 <현상학>이라는 책이 당신이 현상학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고 했다. 물론 그 말씀에는 겸양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겸양 등등의 가치를 높게 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말씀을 한전숙 교수님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분은 누구보다 성실한 학자셨을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철학적 통찰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현상학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작은 활자로 수 백 페이지 짜리 책 수 십권이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간행되고 있다. 그것들을 읽고 정리하고 소화해내고, 그리하여 그것들을 넘어설 것을 기획하는 것은 합리적인가? 만일 그랬다면 후설이 그 일을 했을 것이다. 후설의 전체 철학 경력이란 무한한 암중 모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후학들이 후설을 연구한다고 해보자. 후학들은 그 무한한 암중 모색에서 일정한 원리들을 추려내고 그것들로 정합적인 체계를 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다면 후설이 직접 그것을 해놓았을 것이다. 현상학은 무한한 미궁에서의 암중 모색이다. 거기에 출구가 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다룬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 등등>에 대해 이러 저러한 문의를 해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 중 한 분은 학부에서 철학과를 지망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정보 등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찜찜함, 혹은 일종의 죄책감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현상학을 멀리 하세요. 차라리 칸트를 읽으세요. 그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예요. 그러나 나는 오지랖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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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뉴스를 잘 안보기 때문에 얼마 전에야 조국이 신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놀랐다. 조국이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조국의 신당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윤석열 정권이 조국에게 한 일을 국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이 젊은 인턴 의사들에게 하고 있는 것도 똑같이 국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당시 한국의 언론들, 국민들이 조국 일가에 대해 벌인 행위, 즉 인격 살인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황은 이해한다. 문제는 조국 등이 파렴치범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 개혁을 두고 온 나라가 두 편으로 쪼개져 대결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으니까. 문재인 정권의 검찰 무력화를 막아야 한다는 테제는 조국이 파렴치범이어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여야 했다. 잘 아는 것처럼 그 싸움에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패배했다. 


이미 이심에서 유죄를 받은 조국이 신당을 차리고 정치를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두 가지 원론적 관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의 조국의 권리다. 누가 거기에 뭐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런 원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지는 않다. 두 번째, 그러나, 이심에서 유죄를 받은 사람이 창당 등을 통해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정치를 퇴행으로 이끄는 것 아닌가? 왜 하필 정치인가? 정치를 일종의 방패로 삼는 것 아닌가?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 정치가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는가? 수많은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조국의 선택은 분명 퇴행적이다. 그러나 그 퇴행적 선택에 대해 조국에게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나는 그 퇴행의 거의 대부분의 책임은 윤석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은 단지 꿈틀거렸을 뿐이다. 


여론 조사 분석 기사 등을 보니 이번 총선도 민주당 계열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들 한다. 지방이 소멸되고 있고, 인구가 몰려드는 수도권은 민주당의 텃밭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총선들에서도 이변이 없으면 민주당이 승리할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동훈이 다음 대통령이 되어 검찰 정권을 연장하지 않는다면) 윤석열 정권은 한국 민주주의 퇴행의 마지막 커다란 에피소드로 기록될 것이라고 낙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의 민주 진보 세력에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패배의 댓가는 무엇인지를 뼈져리게 가르쳐 주었다고 본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문재인처럼 나이브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검찰을 함부로 믿지 말고, 기재부를 함부로 믿지 말고, 감사원을 함부로 믿지 말고 등등... 


결론적으로 이번 총선을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에의 여정의 시작점이라 한다면 조국 신당의 등장은 이미 그 퇴행을 넘어서는 충분한 의의를 갖고 있는 셈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조국 사태 이전의 조국을 싫어했다. 나이브하고 샌님같고 중2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인터뷰 등등을 보건대 그는 벼려졌고 강건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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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문제를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로 바라본다. 아주 고전적인 예가 되겠다.


윤석열은 박근혜 탄핵 사태때 과잉 수사와 기소로 사람들을 때려잡았다. 그리고 똑같은 과잉 수사 방식으로 조국을 때려잡았고 이재명을 때려 잡았다. 그리고 지금 인턴 의사들을 때려 잡고 있다. 다 똑같은 방식이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박근혜 사태때부터 잘못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일종의 혁명기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하자. 그때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 보이면 구속부터 시켜 놓고 보았다. 그러면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한국에서 구속이란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사법부 판결에 앞서 벌주는 것을 뜻한다.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국민들은 이러 저러한 사람을 구속 수사하라고 피켓팅을 한다. 윤석열은 전공의의 단체 행동을 주도하거나 사주한 사람을 구속 수사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런 판국이다. 윤석열과 국민 사이의 간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면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무엇을 해야 했나? 탄핵 국면에서 헝클어진 법치 체계를 수리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했나? 합법적으로 집권했고 단임 정권에 불과한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수사한다며 윤석열은 자기 조직을 대폭 확대해 달라고 요청했고 문재인은 그에 아낌없이 도장을 찍어 주었다. 윤석열은 아낌없이 과잉 수사와 기소를 했고 문재인은 거기서 일말의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민주주의 정부의 지도자로서 문재인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백낙청 교수는 문재인은 정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사태들은 단지 그 결과들일 뿐이다. 어쨌든 역사는 소수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한번 결정적 순간이 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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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아담슨의 철학사 시리즈(a history of philosophy without any gaps) 중 이슬람 철학사와 인도 철학사를 읽었다. 처음엔 이슬람 철학사만 읽으려 했는데 인도 철학사까지 읽게 되었고, 이제는 고전 그리스 철학부터 죽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분량이 적지 않으므로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철학사 첫 권이 분권으로 한국어 출간되어 있다. 그런데 품절이란다.)


저자는 아마도 중세 이전 서양 철학사와 이슬람 철학사가 전문 영역인 것 같다. 그렇다는 것은 서양 중세 철학도 그의 영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또 인도 철학까지 섭렵할 수 있었을까? 그의 철학사를 읽으면서 내내 경이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혹 중국 철학사까지 가능할까 하는 기대감도 가져보게 된다. 빈틈 없는 철학사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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