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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눈물이 난다

읽기가 고통스럽다.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을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7년 민주노총 총파업을 거쳐 2008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더욱이 서평을 부탁받은 책을 무려 석 달이 넘게 읽었다.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 5년째에 접어들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허전했던, 불법파견투쟁의 패배 이후 정규직과의 연대는 그 어려움만을 확인한 채 답보상태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패배의식에 갇혀 오히려 정규직노동조합에 더욱 의존하고 있는 현장 상황 속에서 연초부터 사내하청업체의 폐업으로 인한 투쟁을 속절없이 패배한 이 겨울, 그래서인지 책을 손에 들고 몇 줄 읽기만 하면 준비된 눈물이 자꾸만 났다.

 

 

 

 

고단한 삶의 기록들, 모두 기억해야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는《아름다운 연대》라는 구로동맹파업 백서와 함께 나온 쌍둥이 책이다. 구로동맹파업 백서를 정리하며 그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구술한 것을 정리해 얻은 일종의 부록이랄까. 물론 내용적으로 《아름다운 연대》에 기대어 있는 것도 아니고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라는 부제처럼 각각의 다른 위치에서 파업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기역사 쓰기, 자서전쓰기이다.

자서전형식으로 씌어져 좋은 점은 한 사람의 삶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서움도 없이 빛나고 뜨겁게 투쟁했던 딱 그때만을 쓴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태어난 동네와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순이, 공돌이로 취직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그때는 모르고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그 중요한 구로동맹파업을 했던, 그리고 패배의 상처, 잘 감당되지 않는 무거운 시간을 버티어 살아낸 후,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기억을 썼다.

이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

운동에 있어서 의미나 성과보다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삶이 더 고단했던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수많은 조합원들. 역사적 의미로 평가되는 그 행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해명되지 않는 울분과 한숨과 절망까지 우리는 통째로 다 기억해야한다.

또한 역사는 투쟁을 조직한 지도부 몇 명만의 것이 아니므로 구로동맹파업 역시 몇몇 명망가의 배경으로만 기억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사업장의 다양한 위치에서 참여했던 여러 사람의 다른 이야기들이 반갑다. 그런 철학으로 기획된 책이라 반갑다.

투쟁에 대한 책임이란 무엇인가

비정규직 투쟁을 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책임질 거냐?’이다. 구로동맹파업의 역사적 의미를 현실에서 살리도록 노력하자고 하면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만 아마도 그런 투쟁을 지금 현실에서 조직하자고 하면 이런 소리를 할 것이다.

“질게 뻔한데, 그 다음 수는 뭐냐? 어떻게 책임질 거냐? 수천 명 조합원들의 생계를 어떻게 할 거냐?”

노동조합 투쟁이 다 그렇지만,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더욱 그렇다.
단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현재 자본의 통제전략과 딱 맞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 양보하지 않는다. 공공사업장인 KTX 승무원들의 투쟁이 그렇고 이랜드ㆍ뉴코아 투쟁이 그렇다. 그리고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사내하청노동조합에도 그렇다. 자본은 사내하청노조가 요구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들어줄 때도 결코 사내하청노조와 협상하지 않는다. 정규직 노조와 협상하고 우리의 요구를 들어준다. 사내하청노조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는 싸움만 할까? 민주노조 운동의 후퇴로 현재 비정규직들의 삶은 마치 노예와 같다. 수십 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거둔 성과를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로 통째로 넘겨주었다. 이기고 싶다. 제발 이겨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기는 싸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기는 싸움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본은 우리가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미래의 어떤 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결국 현재 벌어지는 생존권 투쟁을 최선을 다해서 조직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기는 싸움을 위한 준비이고 책임이다. 그 속에 조합원들의 피해가 있다. 해고되고, 가끔은 수배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도록 한다. 그 삶에 대한 책임을 왜 감히 소수의 지도부가 다 지려고 하는가?

구로동맹파업의 성과가 그 당시 투쟁을 조직한 지도부 뿐 아니라 함께 했던 조합원 모두의 힘으로 가능했다면 그 책임 또한 조합원들과 함께 지는 것이다. 오만하게 소수의 지도부가 그것을 다 책임지려하는 순간 비겁해지고 싸움은 해보지도 못하고 끝없는 후퇴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 마땅히 해야 하는 투쟁을 제때 하지 않아 싸움 해볼 기회조차 조합원들에게서 빼앗고 후퇴하는 것을 지도부는 책임져야 한다.

누가 감히 구로동맹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 할까

그런 의미에서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에서 선배들이 말해주는 목소리가 반갑다. 투쟁의 패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 후 운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남루한 삶을 힘겹게 살아야 했던 것까지 포함해서 그 책임을 지도부에 돌리고 있지 않다. 열심히 살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자라는 말에 자부심을 알게 됐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록 패했고 그 뒤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긍정하며 우리가 올바랐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당연함에도 고맙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독재국가의 통치전략과 딱 부딪히던 시기. 그저 임금인상 요구와 단협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라고 내몰리던 시기에 지역총파업을 했던, 어찌 보면 그 무모한 싸움을 ‘당연히’ 생각하며 했던 선배들의 패배한 투쟁의 역사위에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고 90년대의 민주노총이 있다. 누가 감히 구로동맹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삶, 잊히기 전에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값진 책이 나왔으니 부디 과거의 한때에 대한 회고만으로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투쟁에 대한 고민으로 많이 읽히고 고민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아직 기록되어야 할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 80년대부터, 혹은 90년대부터 이 땅의 노동자로 살다보니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크고 작은 싸움을 통해 단련되어온 많은 선배 동지들이 부디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 뿐 아니라 기쁨과 행복했던 순간까지 동지들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때론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며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이 잊혀지기 전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과거와 현재의 노동자 투쟁의 경험들이 온전히 기록되어 빛나야 한다.
그 기록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을 현실에서 이루는 길의 소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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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다 아는 구전 동화 하나

옛날옛날 하늘나라에 옥황상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옥황상제에게는 어여쁜 딸이 있었는데 베를 잘 짜서 이름이 직녀였답니다. 직녀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니 소를 잘 키우는 목동 견우였습니다. 봄날 꽃같은 사랑을 나누던 견우와 직녀가 그만 베 짜는 일과 소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견우와 직녀의 마음을 저는 알 것도 같습니다만 옥황상제는 사랑 놀음에 일을 게을리 한 두 사람에게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 만날 수 없는 벌을 내립니다.
다만 일 년에 한 번 칠월칠석날,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지요. 그러니 일 년에 한 번 사랑하는 견우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려 사랑하는 직녀를 만난다 해도 강 건너 아스라이 손짓 하고 있으려니 통곡하는 울음이 멈추지 않을 밖에요.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이 폭포가 되고 강이 되어 하늘아래 땅위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홍수 때문에 당최 여름만 지나면 먹을 것이고 뭐고 쓸어가 버려 살 수가 없던 동물들이 대책회의를 합니다. ‘이 일을 우찌하면 좋으냐.’ 이때 까마귀와 까치가 ‘우리가 저 위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겠다’며 총대를 멥니다. 이름하여 오작교입니다. 견우와 직녀는 칠월칠석날이면 은하수 오작교 위에서 지난 일 년 동안의 그리움을 풀어 끌어안고, 황혼이 질 무렵이면 다시 헤어져 있는 일 년 동안 건강하라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꼭 잡고 놓기 싫은 손, 놓아주며 눈물이 흐르니 아직도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아침저녁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들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립니다.

“선배노예들의 뜻을 절대 잊지 말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이야기에는 그것을 구전한 공동체 사람들이 동의하고 승인한 매력이 있는 법이다.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옥황상제면 하늘나라의 왕인데 그 딸이 베를 잘 짜서 직녀이고, 옥황상제의 딸이면 공주인데 그 공주의 사랑하는 연인이 귀족이나 높으신 양반이 아니라 소치는 목동이라니.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봄볕처럼 화사하다.

안타깝게도 지배계급이 판정리해서 남기는 역사는 베 짜는 아낙네도, 소치는 목동도 남기지 않았다. 왕들이 뭘 했는지, 귀족들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잘났는가만 기록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핏줄로 면면히 세습되는 권력의 독점. 그 오만한 논리의 반복적 배열이 역사이다. 또한 역사는 아무나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에서는 왕실의 사관, 서양에서는 신의 영광을 살아있는 교황에게 바치는 수도원의 수사들이나 ‘기록’이라는 신성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글을 배울 만큼 한가한 사람들, ‘천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지배계급이었다.

가끔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조선 초기 세종이 왕실의 정당성을 위해 만든 《고려사》의 <최충헌전>은 ‘만적의 난’을 기록하고 있다. 무인정권으로 집권한 최충헌의 노예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슬로건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어찌 노예라고 채찍 아래서 천대만 받겠는가!’였다. 만약 당시 반란에 참가한 노예가 이 일을 기록했다면 마땅히 ‘난亂’이 아닌 ‘노예해방투쟁’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비록 패한 투쟁이지만 비천한 노예로 사느니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꿈과 결의는 비장했다. 적들에게 어떻게 교란당했는가! 동지들의 싸늘한 시체를 뒤로하며 후퇴한  발걸음의 억울함과 한을 담아, 부디 살아남은 노예들은 그 뜻을 결코 잊지 말고 반드시 복수해 주자. 저 높은 신분 질서의 장벽 아래 다시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말자. 우리 비록 쓰러져 죽어갔지만 해방의 날 꽃으로 피어 만나자.”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정신을 기리며 해마다 전투했던 들판, 선배들의 피로 물들였던 땅을 딛고 만나 해방을 이루기 위해 먼저 가신 노예선배들에게 묵념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결의를 하진 않았을까?


남기고 싶은 것

-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


얼마 전 막스 갈로의 로마인물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입맛이 쓰다.

막스 갈로라는 작가를 잘 모르는데 기특하기는 하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새로운 로마’를 나날이 정복한 제국.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거느린 로마의 황제나 귀족이 아니라 노예를 그 시리즈의 첫 번째로 선택한 만큼의 양심이 그에게 있다. 또한 다음 시리즈 책들의 주인공인 네로에게는 ‘비밀’을 티투스에게는 ‘승부수’라는 단어를 주었으면서 스파르타쿠스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짝지어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유인즉슨 말하는 짐승으로 원형경기장에서 서로 죽일 때까지 싸워야하는 비참한 노예로 살 수가 없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싸운 스파르타쿠스는 죽음으로써 이름을 남겨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막스 갈로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죽음은 곧 삶이었다고 말한다.

나름대로 양심적이고 진보적일 수 있으나 오히려 교묘하게 입맛이 썼던 가장 큰 이유는 스파르타쿠스만 있고 노예반란은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수백만 노예들이 2년이 넘도록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휩쓸며 전쟁을 하는 장면들에서조차 다른 노예들은 대부분 그저 스파르타쿠스의 뛰어남을 확인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쓰일 뿐이다. 참으로 제국 로마스러운 서술이 아닌가 말이다.

만약 스파르타쿠스의 노예해방투쟁에 함께 한 노예가 역사를 남겼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싸우다 죽어갔는지, 그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감히 거대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결의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기록할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의 아주 많은 고민이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폭발했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마지막 한 명의 전사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로 등을 보이지 않았으며 기어코 무릎이 꺾이고 쓰러질 때까지 적을 향한 칼날을 놓을 수 없었던 동지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눈물겹게 고맙고 소중했겠는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그 징글징글한 전투에 대한 기억을 저주하게 만들고, 단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보기만 한 노예까지도 다 죽여서 기억을 없애려고 했다는데, 이 싸움이 어찌 뛰어난 스파르타쿠스 하나의 이름으로 끝날 것인가 말이다. 

남기고 싶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함께 투쟁을 결의한 헐벗은 동지들 외에 아무리 둘러봐도 아군은 없고, 고립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를 악물고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계급은 죽어도 모른다.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노동자가 기록해야

그러므로 우리가 써야 한다. 노예반란을 노예가 기록하지 못했지만,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노동자가 기록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노동자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투쟁의 역사와 삶의 역사를 우리는 부지런히 써야 한다. 늘 중요하다고 말만 하면서 막상 날마다  날마다 벌어지는 투쟁의 현장에서 바쁜 우리는 기록해서 남기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투쟁이라는 것을 자꾸 까먹는다.
이러다가 천 년 뒤 우리의 후세들이 2008년을 검색해 이명박과 박근혜, 노무현만 알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화가 나서 땅속에서도 벌떡 일어나 ‘아니야!’라고 바락바락 소리지르고 싶어질 것이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나와 내 아이들이 살 이 땅위에 굳건하게 건설하기 위해 우리의 투쟁을 쓰고 읽자.

노동자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책,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는 그래서 값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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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교때 나는 수학과 영어시간에 수업을 들은 기억이 없다.

수학이나 영어시간이면 만화책을 읽든지 '하이틴 로맨스'류의 책을 읽었다.

아마도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들은 우리의 딴짓을 알았을 것이다. 

 

언젠가 나이 많은 선배와의 이야기 도중 하이틴 로맨스가 화제에 오른적이 있다.

그 가볍고 어처구니없이 천편일률적인 신데렐라 이야기가

선배는 혐오스럽다고 했던 것 같다.

 

"선배, 하이틴 로맨스는 책이 아니야. 생필품이야."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나에게 하이틴 로맨스라는 생필품은

더이상 효용가치가 없어졌지만

그시절,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음에도

'학교수업'에서 소외되어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던 많은 우리들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그런 드라마에 익숙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드라마는 하이틴로맨스 수준이다.

드라마 또한 생필품이다.

 


 

 

 

 

2.

흔히 스카페타 씨리즈라고 불리는 퍼트리샤 콘웰의 법의학 시리즈들.

 

'케이 스카페타'

매력적인 여성, 똑독하고 날씬하고 예쁘고

짙은 감색과 회색의 정장을 즐겨입고 최고급 차를 몰고다니는

성공한 법의학 의사

 

그러니까 드라마 같은 구조다.

개성적인 캐릭터의 사람들

거기에 법의학이라는 전혀 보통 사람들이 알지못하는 지식과

추리소설 자체의 사건발생과 극적인 진행이 관건인데

 

재밌다.

한번 손에 들면 내일이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겨야 하는 중독성

스카페타와 마리노의 티격태격 서로 헐띁으며 하는 애정표현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나이를 먹고 스카페타의 똑똑하던 어린 조카는 대학을 가더니 일을 함께하고

씨리즈를 더해 갈수록 함께 나이먹는 느낌까지 더해져 더욱 좋다.

 

반드시 봐야하는 주말드라마는 있는게 좋은 것인지

없는게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불길한 중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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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의 규방철학 / 사드

 

 

 

 소돔 120일 / 사드

 

1.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사드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쾌락과 금기 -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인데, 나는 이것이 동일한 말로 교육된 사람이다. 쾌락은 그 자체로 추구하면 안되는 금기이다. 왜 그럴까?

사드는 도대체 어떤 글을 썼길래 쾌락을 섬기는 자들의 신이되는 한편에서는 늘 금서로 묶여 있어야 했을까? 그가 넘어선 금기읜 선은 도대체 어디일까?

2. 읽어봤더니

'금서로 하지 않았으면 신이되지 않았을 것' 이라고 단언한다.

못하게 하고 못보게 하니까 궁금한거지, 반복되는 묘사와 행위들은 그것이 금기이건 아니건 그저 역겹고, 역겨움의 반복은 지루하고 지겹다. 스토리 자체가 다음페이지를 넘겨야 할 이유를 주지 못한다.

금서가 아니었으면 누구나 몇페이지 넘기고 말 것이다. 또한 극단적인 인간의 육체에 대한, 혹은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멸과 무시가 없었다면 사드가 이렇게 집요하게 폭력적 성에 대해 집착했을까 싶다.

물론 인간의 감성은 천차만별이고 그중에는 채찍으로 때리고 맞아야 욕망이 충족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그건 그저 개인의 감성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편에서는 금기로 만들고, 한편에서는 마치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라도 있는듯이 사드를 평가하는 양자 모두에 동의할 수 없다.

3. 그래서 하는 생각인데, 부디 사드가 궁금하면 사드를 읽어보면 된다. 사드에 대해 해설한 책들은 사드의 성욕에 대한 집착 만큼이나 엉뚱한 집착들이 많아서 오히려 사드에 대한 독서를 방해 할 뿐이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 마광수

 

4. 이에 비하면 마광수는 애들 장난이다.

대한민국 법원이 애들장난을 가지고 어찌나 설레발치며 띄워놨는지,

그저 심심풀이 땅콩으로 '선데이 서울' 류의 책을 보고 쓰고 대학교수가 그러면 안된다고? 왜?

그래서 참으로 천박한 수준의 대학교수의 장난이 금기에 맞서 싸우는 지성이 되었다.

 

 

 

 

 아임 소리 마마 / 기리노 나쓰오

 

5. 이건 좀 다른 형태인데,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책을 다 읽어야 평을 말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좀처럼 드문 경우인데, (위의 세권도 다 못읽었다. 지루해서) 이 경우는 토할 것 같아서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었다.

기리노 나쓰오가 옳바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감성은 나의 감성과 안맞는 거겠지.

생각만 해도 지금도 기름이 목에서 올라온다.

단순히 폭력적인 행위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 좀 더 정리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싫다. 생각도 하기 싫다. 이런 경우는 그냥 밀쳐두기로 한다.

살다보면 잘 모르는 것도 있는 거지뭐. 알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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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향 2008-06-1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꺼 읽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던게... 다들 리뷰가 이런식이더라구요.. 대단하긴 하지만... 뭔지 좀 역겹다는...

팥쥐만세 2008-06-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읽어보시죠. 음----, 모험해볼 가치는 있어요.
범상치 않아요. 뭔가 있어요.
좋아하시는 분들은 엄청 좋아하기도 하고.
별아님이 읽어보시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신다면 나도 다른 작품으로 다시한번 시도를...
나는 회피했지만, 오히려 마음 넓은 분들이 적절할지도..^^
 

1. 아우슈비츠, 나찌는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빌롯한 유럽 곳곳에서 나찌가 유태인을 학살한 사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한 사람의 집단이 다른 사람의 집단을 지구상에서 씨를 말리려고 했다는 것. 그들을 절멸 시키고 최종해결하기로 한것. 다름아닌 그들 모두를 가장 '합리적'으로 죽이려고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스스로 조직된, 그 악마같은 민족이 독일이라서가 아니라 '인간' 이 그럴수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냉정하고 정확하게 그때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는 아렌트의 고통이 느껴진다. 단 하나도 회피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그 사건을 주시한 아렌트의 뛰는 고통에 나의 심장도 뛴다.

우리는 이 조직된 악마들이 다시는 인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다름아닌 사람의 자식이 스스로 성실한 악마가 되어 만족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려운, 기술의 발전이 곧 사람을 더 많이 더 쉽게 죽일수 있는 방식의 발전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수 있는걸까. 두려운.

 

2. 지금, 팔레스타인에서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때 피해자로 학살되던 유태인들은 지금 가해자가 되어 학살한다. 과거 2차대전당시의 피해자의 심지어 순결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헐리웃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실제로는 2000년동안 살던 사람들을 그곳에서 총칼로 몰아내고 여전히, 병원과 학교, 민간인들의 머리위로 포탄을 쏟아부으며 지금,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인다.

미친것들이라고 소리치고 싶다. 우리 모두.

 

 

 

 팔레스타인의 눈물

사실은 그들의 글을 읽기 위해 첫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주저했었다.

폭력앞에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너무 힘관계가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 거대한 미국과 이스라엘 자본을 상대로 죽어도 싸울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글이라면

그들의 힘겨운 삶에 손톱만큼의 연대도 하지 않는 내가 그들의 아픈 현실에

너무 무겁고 가슴이 아플까봐 그런데

독특한 유머와 위트와 재치가 그 숨막히는 공간을 갈라 햇살이 된다.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끈기, 지금 비참함 현실에 발딛고 있음에도 미래를 낙관하는

희망적인 인간의 모습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 슬프고 재미있는.

당신들의 삶이 인간다워지기위해 당신들의 투쟁이 승리하길 바란다.

 

3. 미국인 중에도 존중할 만한 사람이 있구나!

 

 

 

 팔레스타인 / 조 사코

러시아 혁명당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존리드가 미국인 기자였다.

나는 북한에는 다 나쁜 사람만 사는 줄알았다가, 그 다음에는 미국에는 다 나쁜 사람만 산다고 쉽게 생각했다.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그저 저절로. 천박한 더많이 갖으려는 욕망덩어리, 자본주의의 천국이니까 당연히 거기 사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닐거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조사코 때문에 미국인중에도 존중받을 사람이 있다고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는 냉정하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벌어지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을 도와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현실에서 리얼리즘이란 그래야 한다.

단한번도 그들을 위해 자기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불쌍하다고 말하지 않고,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아이들, 젊은이들, 아줌마들, 노인들의 삶이 더 또렷하게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4. 레비, 내가 유태인을 싫어하지 않게 해줘.

너무 쉽게 똑같은 오류를 반복한거다. 북한과 미국에 이어 이렇게 쉽게 사람들의 한집단 전체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 유태인이 싫다.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 프레모 레비

 

그러니 레비,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참착하고 현명하게 증언하기 위해 살아낸

그리고 자살한 당신의 죽음이 아우슈비츠를 벗어나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의 기억까지 모두 기억하기 위해 그래서 곱씹어 다시 말하고

다시 그 의미를 현재에 옮기기위해 천형같은 일을 한 당신의 삶이 눈물겨운데,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의 유태인 학살을 우리는 어떻게 용납할 수 있냐구,

과거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다시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직 더 많은 폭력으로 복수하며 살기로 한건가?

팔레스타인에서의 유태인의 폭력과 학살을 가장 큰소리로 비난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이다. 학살의 피해자로 살아남은 유태인들. 그렇지 않을 거면 더이상 과거의 피해를 말하지 마라. 그 입술에 지금 죽어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피가 거품 인다.

 

5. 동의할수 없어.  슐링크

 

 

 책읽어주는 남자

 

나찌의 다음세대 독일 지식인들이 이제 과거의 잘못을 핏줄이기때문에 용서한다네.

동의할 수 없어. 슐링크, 당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근데, 당신들이 한일은 단지 살인이 아니야. 한민족에 대한 몰살, 유태인 모두를 지구위에서 없애기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현한거야. 그것이 독일민족 만의 죄라고 말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이제는 그만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다고 말하지 마.

당신들은 단 한번도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어.

구경만했다고, 시켜서 했다고, 그것이 학살인지 몰랐다고

거짓말과 변명만 늘어놓았단 말이야. 합리적인 척하면서 실은 비겁하고 욕심많았던 거라고.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연민으로 용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6.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가. 정말?

 

 

 

 시대의 증언자 쁘레모 레비를 찾아서 / 서경식

우리의 현대사가 한 가족을, 그 구성원들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고 죄의식을 갖어야 한다.

서경식은 쁘리모 레비를 찾아간 여행에서 무엇도 명쾌히 답하지 못한다. 안개속에서 흑백사진을 손에 쥐고 알듯도 하고 모를듯도 한 삶을 바라만 본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레비가 그것을 세상에 전해주어야 하는 임무때문에 살아남은 레비가,

그러므로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굽힘없었던 레비의 자살앞에서 서경식은 허무할 수 만은 없는 인간과 삶의 근원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샘물을 보고 싶어한다.

국가시스템의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 알고 있던 서경식, 그의 존재와 사유는 이땅의 현대사를 알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불편하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 위하여 불편하다.

 

7. 서경식의 형들

 

 

 

 옥중 19년 / 서승, 서준식 옥중서한 / 서준식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다른 사람을 파괴한다. 소설보다 더 엽기적이고 더 비참하다.

그런 참혹한 세월을 정의롭게 헤쳐간 사람들의 빛나는 눈빛이 그나마 지금의 우리 사회를 요만큼 살만하게 했다고 믿는다. 누구나 그들처럼 반듯하고 정의롭게 굽힙없이 살수 없다면

적어도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옮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해야 한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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