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그렇지 않았을까. 봄부터 여름까지 광화문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싱싱하게 저항할수 있는지 확인하는 모르는 얼굴들이 정겨웠다. 입시학원과 서열화에 찌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10대들의 거침없는 발언은 어찌나 상쾌하던지. 어깨도 안아주고 싶고 손도 잡아보고 싶었다. 유모차를 끌고나온 어머니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줌마의 힘으로 경찰의 폭력을 무력화 시켰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막혀 밤새도록 싸우는 새벽이면 경찰이 퍼부어대는 물대포에 “더운물”을 달라고 외치며 군중들은 권력의 폭력을 조롱했다.

도대체 청와대에 가서 뭘하려고 이렇게 아우성인 걸까? 옆에선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일단 명박이 보고 나오라고 해서, 얘길 해봐야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냐고 큰소리치는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상상을 해보면 우리가 모두 청와대 안뜰에 가서 이명박 대통령보고 나오라고 하고, 잠옷을 입고 나온 이명박 대통령이 졸린 눈을 비비면 “광우병 걸린 미친소는 너나 먹어!” 이렇게 말하고 나온다는 건가?

그렇게 온 몸의 에너지를 자유롭고 발랄하게 표현하는 군중을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다. 마땅히 춤추며 기꺼이 그 군중의 한명이 되어야 할 나는 그러나 그럴수 없었다. 
나는 발랄하지 않았고, 나는 즐겁지도 않았다.

광화문 그 뜨거운 광장에서 발랄한 군중들이 너무너무 부러워서, 슬펐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초라한 농성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너무 많은 사업장에서 올라간 크레인과 철탑과 굴뚝의 외로움이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단식을 하는 동지에게 밥을 먹으라고, 우리가 싸움에서 패했으니 그만하자고 말할수가 없어 입 다물고 가슴을 치는 억울함이 돌덩이처럼 징징 울었다. 
비정규직 싸움을 하는 우리는 왜 외로울까? 그리고 심지어 불쌍할까?

광화문 촛불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이후 마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좌파에게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허기지다.
그동안 상상력이 없어서 비정규직 투쟁이 고립되어 외로웠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동안 가장 좌파적인 상상력으로 투쟁해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발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는 것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면 주는대로 받고, 해고되면 찍소리없이 나가라고,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숨죽여 살아도 아무 때나 해고되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싸워도 아무 때나 해고되어 길고 지루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해서 살아낸 후에도 여전히 길거리 천막에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밖에 살수 없어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물론 발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무엇인지 알지못했고 비정규보호법이 어떻게 현실에서 비정규직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해고될 위협에 처해 할수 없이 만든 노동조합. 하루이틀은 아니지만 한달두달이면 싸움이 끝날거라고 생각했던 가난한 노동자들이 설마 쉽게 끝나지 않아도 내년여름까지 싸우기야 할까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끈질긴 투쟁을 서로의 야윈어깨에 기대어 지난 몇 년처럼 오늘도 싸운다. 어째서 경찰은 거짓말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은 우리에게 그토록 성내며 위협하는지, 어째서 법은 늘 회사의 편인지, 알고보니 우리는 사람도 아니었구나!

그렇지만 상상한다. 어제까지 단식하던 동지가 작업복을 입고 라인에서 일하면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경쾌할지 상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 자동차를 만드는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이 어깨걸고 싸우는 것을 상상하고 배 만드는 노동자들, 전기를 다루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죽지 않는 것을 상상한다.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화물연대 트럭을 타고 시민들과 함께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로 질주하는 상상을 한다. 청와대 안뜰에 모여앉아 이명박을 세워놓고 술을 마신들 어떠랴!

그런날은 없다고 하겠지.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위해 유연화된 노동위에서 더많은 이익을 얻는 것들이 술잔을 들며 계란으로는 절대 바위를 깰수없다고 잘난척하며 코웃음치겠지.

그러나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배고픈 비정규직 투쟁은 전복의 상상력이다. 우리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고 싶다. 발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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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합리적으로 유태인들을 ‘청소’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인다고 표현하지 않았고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고 학대한다고 표현하지도 않았다. 장애인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유태인들을 모아서 합리적으로 소모되도록 하기 위해 공장에 가두어 일을 시키며 체력이 극한으로 떨어지면 마지막에는 가스실로 보냈다. 합리적으로 옷을 벗기고 체계적으로 안경과 겉옷과 속옷을 분리하고 정연하게 줄 세워 머리를 삭발시키고 죽음의 공장으로 보내 연기로 소멸시켰다.

내가 경험한 경찰과 감옥은 여러 면에서 아우슈비츠를 닮았다. 사람들은 우리사회의 경찰과 감옥이 비인간적이고 파렴치한 아우슈비츠를 닮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아우슈비츠 보다 느리게 천천히 소모시킬 뿐, 직접 가스실로 보내지만 않을 뿐 감옥은 사람을 죽인다.

처음 감옥으로 옮겨지면 신체검사를 한다. 옷을 다 벗으라고 요구한다. 폭력이나 마약의 혐의가 아니라도 모든 수용자에게 옷을 벗고 알몸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폭력이고 모욕이다. 나의 신체를 타인이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으로 익히도록 하는 것은 이후 벌어질 감옥 안에서의 모든 불합리함을 너는 그저 참고 견뎌야한다는 협박에 다름 아니다. 물론 벗으라고 할 때 거부하면 된다. 내가 갇혀있다고 해서 나의 몸을 교도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는 것을 말하면 된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아무도 수용자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며 단지 “벗어” 라고 명령하니 몰라서 당할 뿐이다.

방을 배정받으면 하루 종일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잘 때를 빼고는 누워있지도 못하게 한다. 방안에서 앉아있건 서있건 그것도 내 마음이다. 배식을 할 때는 서있지 말라고 소지들이 소리 지른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방에서 앉는 것, 눕는 것, 서는 것을 일일이 허락받길 요구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그게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교도관이나 소지는 없다. 불편할 때마다 내가 싸워야 할 뿐이다.

지금 일어나서 걸어보라. 가로 다섯 걸음 세로 여섯 걸음이다. 그만한 네모 안 한구석에는 이불이 개켜져 자리를 차지하고 한쪽에는 작은 싱크대가 자리를 차지한다. 가로 다섯 걸음, 세로 여섯 걸음 그 안에 다섯 사람이 하루 종일 앉아있어야 한다. 누가 면회를 오거나 일이있어 방밖으로 나가려면 적어도 세 사람은 허리를 숙이거니 엉덩이를 틀어 길을 내주어야 한다. 잠잘 때는 네 사람이 세로로 누우면 한사람은 머리위에 가로로 누워야 한다. 많은 사람을 거쳐 간 이불을 뒤척이는 겨울이면 갈 곳 없는 먼지가 코를 통해 기관지와 폐에 쌓이는 느낌이 든다. 일 년 내내 꺼지지 않는 전등 밑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나는 아침이면 등이 아프다. 자는 내내 긴장한 근육이 풀어지지 않는다. 소모된다. 재판을 하는 내내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소모된다.

처음 교소도에 들어갈 때 알몸 신체검사를 하는 것과 함께 가장 많이 아우슈비츠를 닮은 것은 사람을 번호로 부르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소모되어 청소되어야 할 사람에게 번호를 매기고 그 번호를 몸에 낙인으로 찍었다.
나는 70번이었다.
“70번 면회”
“70번 편지”

감옥에 들어가면 제일먼저 옷을 벗고 지급되는 수의로 갈아입는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하지 못하는 알몸 신체검사를 당하고 아직 남은 수치심을 미쳐 수습하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가면 번호표를 주며 왼쪽 옷 위에 바늘로 꿰매라고 한다. 70번을 내 가슴에 달게 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더 이상 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힘 있는 교도관들의 명령에 따를 의무만 있는 ‘70번’ 일뿐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인 냥 관철시킨다.

권수정이 아니라 70번으로 불리는 것은 수갑과 포승에 묶이는 것만큼 모욕적이다.
내가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결정하고 부르면 나의 동의여부와 무관하게 나는 70번이 된다.

반대로 먹고, 자고, 싸고, 씻고 모든 것을 감시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자들에게 그들이 감시해야 할 사람의 번호를 부르도록 하는 것은 효과적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먼저 사람에게 이름을 뺏고 번호를 주어 통제하고 죽이는 것을 ‘청소’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이유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나는 죽이는 일을 한다."고 말하기 싫은 것이다. 사람을 가두어 폭력을 행하고 인권을 무시하는 일을 교도관들이 한다고 말하기 싫은 것이다. 번호 붙인 죄인을 교화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웃긴다.

정말로 수용자를 교화하려면 70번이 아니라 ‘권수정씨’ 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야 나와 니가 인간으로 존중하는 관계라는 신뢰가 생긴다. 나를 70번이라고 부르며 사람취급하지 않는 교도관을 왜 내가 사람으로 보겠는가? 내가 아니라 나를 가두고 사람취급하지 않는 일을 하며 밥 벌어 먹고살며 부끄러운 줄 모르는 니가 짐승이다.
나는 70번이 아니라 권수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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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안에서 겨울도 거의 다 보낸 어느 날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지가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면회를 왔다. 진아, 예린이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밖에서 같으면 일단 안아주고 뭐든 웃으며 말했을 텐데, 장소가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말을 잘 안한다.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던 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이모, 정말 콩밥먹어요?”
ㅎㅎㅎㅎ
“아니, 쌀이랑 보리랑 섞여있는 밥 먹어. 궁금하니?”
“네. 사람들이 그러는데 콩밥 준데요. 저는 콩 싫어하거든요.”

징역 산다는 말을 콩밥 먹는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일이야 어디서나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인 법이다. 감옥에서도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먹는 일이다. 요즘은 콩밥을 주지는 않는다.

아침은 6시 40분경, 점심은 11시 30분경, 저녁은 17시 30분경에 배식을 한다. 1식 3찬이고 소지들이 손수레에 음식을 담아 싣고 다니며 방마다 배식을 한다. 식사시간이 되면 방안에 상을 펴고 둘러앉아 플라스틱으로 된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들을 펼쳐놓고 식구통을 통해 배식을 받는다.

수용자들이 스스로 가장 짐승처럼 느껴지는 시간 중 하나가 배식시간이다. 밥과 물, 반찬을 받는 방식이 그렇다. 방과 복도 사이의 벽 아래쪽에 뚫린 가로, 세로 20cm 정도의 구멍을 식구통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나무문으로 막혀있고 배식을 할 때는 작은 문을 열고 그릇을 내주고 받으며 음식을 받는다. 뜨거운 물을 받을 때는 손에 물통을 들고 내밀면 밖에서 주전자의 물을 손에 들고 있는 통으로 부어주는데 잘못하면 화상을 입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배식을 받는 것도 요령이고, 그래서 보통 방에서 고참들이 담당한다.

식구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릇을 구멍으로 내주고 담아주는 밥을 받고, 다시 다른 그릇을 내주어 차례차례 국과 반찬과 물을 받는 것은 참 모욕적이다. 식당에서 식탁에 앉아 먹는 것도 아니고, 배식을 받을 때 문을 열고 주는 것도 아니다. 식구통은 편지를 전해 받거나 다른 온갖 필요물품을 살 때마다 적어서 내주고 받는 통로이기도 하고 심지어 아침마다 쓰레기를 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쓰레기를 내주는 구멍과 밥을 받는 구멍이 같아서야 되겠냐고 항의했더니 쓰레기를 버릴 때 방문을 열더군. 거 참.

3찬이라고 하지만 김치와 국을 빼면 다른 반찬은 한가지이다. 한 달이 시작되는 날 소지가 방마다 이번 달의 식단이 복사된 종이를 돌리면 그것을 보고 식단표를 만들어 벽에 붙여놓는다. 반찬은 요즘 유행하는 웰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체로 채식이고 가끔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나오는데 그럴 때는 항상 모자란다. 그냥 넘어갈 때도 있고 더 달라고 싸울 때도 있다. 밖에서라면 줘도 안 먹을 형편없는 음식을 식구통으로 소여물 주듯이 주면서 그나마도 부족해서 싸울 때면 참 기가 찬다.

관에서 배식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영치금으로 사먹기도 하는데 파는 반찬 또한 다른 교도소에서 수용자들이 만든 제품들이 많다. 김, 김치, 무말랭이, 고추장, 간장, 마아가린, 참기름, 훈제 닭고기, 과일 두 종류, 우유와 유제품, 커피, 빵, 오징어. 그 외에 과자 몇 가지.

먹고 난 그릇은 방에서 돌아가며 설거지를 한다. 보통 한방의 성원들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어떤 방은 영치금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담당해서 하기도 한다. 사람을 구속시켜 가두어 놓았으면 최소한의 생필품은 지급되어야 하는데 속옷 두벌이 지급되는 것의 전부다.
나머지 예를 들면 비누, 퐁퐁, 샴푸, 양말, 면티, 치약, 칫솔, 생리대, 휴지, 볼펜, 진통제, 노트, 편지지, 편지봉투……. 이런 것들은 영치금으로 개인이 사야한다.

문제는 영치금이 부족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하나도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치금 없는 사람의 생필품을 다른 사람이 대신 사주면서 대가로 설거지와 청소를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돈 좀 있다고 생색내는 인간들처럼 재수없는 경우도 없고, 반대로 교도소 안에서 돈 없어서 쩔쩔매는 것처럼 불쌍한 것도 없다.

노동운동 하다 구속되는 경우야 함께 일했던 주위 사람들이 워낙 잘 챙겨주니까. 나 같은 사람이 돈 많은 사람 축에 끼며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곳도 교도소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해고되어 수입이 없는 내가 언제 물질적인 것으로 남에게 베풀어 보겠는가 말이다. 거기가 교도소가 아니라면 어림없는 소리다.

배식되는 밥이나 반찬의 질, 숫자, 그리고 영치금으로 살 수 있는 물품들은 계속 더 좋아지는 과정 중에 있다. 커피, 샴푸가 허가된 것이 2004년부터이다. 반찬의 질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다만 아직 담배는 허가되지 않고 있고, 그래서 온갖 교도소 관련 비리 중 으뜸은 교도소 안에 돌아다니는 담배가 주종이다. 그 비리의 중요한 역할을 교도관들이 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확인되고 있는데 왜 담배를 금지하는지 모르겠다. 교도관들에게 몰래 숨겨서 들여보내주는 대가로 한몫 챙길 수 있는 길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 배식되는 음식들 맛은 어떠냐고? 조리를 하는 것도 수용자들인데 내 생각에는 최고의 요리사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대전교도소의 경우 5000명이 넘는 수용자가 있다는데, 형편없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맛은 좋았다. 그러나 맛있다고 먹는 내 옆에서 언니들이 “수정아, 너는 참 뭐든 잘 먹는구나.” 웃으며 감탄했던 걸 보면, 모든 사람에게 맛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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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감옥에 있었다. 아직도 두달 더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푸른빛 죄수옷을 입고 비좁은 감방 모서리에 앉아 자꾸자꾸 손꼽아 남은 날짜를 확인하다가 잠이 깼다. 땀에 젖어 잠을 깨보니 문득 감옥 냄새가 아직도 내 피부에 있는듯하여 토할 것 같았다.

꿈에 감옥에 있었다. 철창을 사이로 갇혀서 면회 온 조합원에게 인사하고 어두운 방으로 끌려갔다. 교도관 3명이 의자에 앉아 있는 곳. 마주 서서 나는 싸웠다. 그들이 뭔가를 나에게 요구했고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먹 쥐고 기를 쓰며 싸우다 꿈에서 깼다.

권수정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조립라인에서 자동차가 다 만들어지면 검사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2003년 노동조합 만들고 투쟁하다 그해 6월 해고된 이후로 2007년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3번을 감옥에 들락거렸다.

옥살이를 길게 하지도 않았고, 출소한 이후 다시 비정규직, 금속노조 투쟁의 전선에서 바쁜 나는 잊은 듯이 살다가도, 불현듯 꿈속에서 다시 갇혀 식은땀을 흘리며 깨는 아침이면 내 몸과 영혼이 격은 우울한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갇혀 있는 내내, 수갑과 포승에 묶일 때마다, 그리고 감옥의 모든 하루하루와 모든 시간을 나는 궁금했었다. 왜 감옥이 있어야 하는 걸까? 그것은 자본주의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 투쟁을 전개했을 뿐 죄짓지 않았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정당함과 억울함 때문만이 아니라, 비록 내가 인정할만한 죄를 저질렀다해도 형사재판을 받는 동안 감옥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 올바른지, 더 나아가 죄인으로 판결이 났다고 해도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고통을 주며 복수해서 우리 사회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검사와 판사와 변호사 소위 법조 3륜이라는 이 사람들이 과연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나 있는지, 더 근원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옳은지. 무엇이 죄이고, 죄인에 대한 사회적인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때로는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묻는 것이기도 한 이런 질문들을 그러나, 애써 무시하지 않아도 잘 잊으며 살만큼, 내 투쟁의 전선은 늘 바빴다.

더 미루지 않고 이제 나는 쓴다.
전체의 맥락을 완성된 상태로 쓰고 싶기도 하지만, 더 잘 쓰려고 하다가 오히려 미루며 못쓰게 될까봐 우선 경험했던 기억을 중심으로 그 경험을 통해 내가 했던 고민을 쓰려고 한다.
때로는 그런 경험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감옥에 갇혀 겪어본 사람들은 남세스러워 말 못해서 모르는 척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폭로가 되고 진실과 정의에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옥에 들락거리는 것을 보통 사람들보다 쉽게 생각하는 내 동지들뿐 아니라, 돈 없고 빽 없어서 감옥안에서 더욱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쓴다. 감옥 안이라고 해서 나의 몸과 영혼이 다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권수정의 감옥살이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가능하면 책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감옥안에서 한방에 살던 언니들과 함께였다.
날마다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수많은 비리와 범죄에 비하면 참으로 한심한 죄목으로 6개월부터 길게는 3년 4년을 살던 언니들의 고단한 삶의 꼭지점에 감옥의 경험이 있었다.
자기들이 지금 왜 감옥에 갇혀 이런저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의 해석이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해 자학하고 신음하는 그녀들에게 감옥에서의 생활은 제복을 입은 자들에 대한 공포와, 좁은 공간에서의 답답함을 오로지 옆에서 함께 사는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 밖에 풀지 못하는 시간이다. 이것은 이중의 자학이다.

감옥이라는 구조, 건물의 형태와 하루하루 일상의 시스템과 전체 운영체계가 사람을 위축시키고 폭력적으로 길들이기 위한목적으로 만들어져있다는 것, 돈 없어서 힘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거대한 국가권력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은 언니들 잘못이 아니다.

그녀들은 그저 견딘다.
더 힘들고 피곤해지지 않으려면 눈치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감옥 안에서의 처세라고 믿으며, 이것저것 생각하면 오히려 피곤하니까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먹고, 가족들의 면회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며 사는 언니들과 함께 살며 나는 가끔 소리 지르고 싶었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언니들의 잘못이 아니다. 죄가 있어도 감옥은 이따위로 사람을 사육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면 안 되는 거다. 말로는 교도소, 교화한다지만,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 이외의 교화내용을 본적이 없다. 결국 감옥에서 이정도로 억울한 것도 참았으니, 사회에 나가거든 감히 덤빌 생각하지 말고 참고 살으라는 것 외에 긍정적인 교화란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 우리사회의 감옥이다. 감옥에 갇혀 산 경험, 다시 갇힐 수 있다는 암시는 최고의 협박이며 그것이 감옥이 만들어진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도대체 누굴 위해 우리는 짐승처럼 사육되어 길들여져야 한다는 말인가.

언니들은 나보고 글을 쓰라고 했다. 항소이유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경찰에 체포된 이후 이유 없이 협박하고 위협하는 경찰에게 어떻게 말하며 따져야 하는지, 감옥 안에서의 처우는 어느 정도가 법으로 보장된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알 수 있는지, 수용되어있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일을 당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감옥 안,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의 끝에서,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쓰라고 했다.

“그래도 재미있게 써라. 이 칙칙한 곳에서 책도 어두우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그걸 누가 보겠니. 이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읽고 도움이 될 것들을 써라. 수정이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이런 말들을 나에게 해주며 언니들은 웃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모든 감시와 구조화되어 뻔뻔한 폭력들, 그리고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날마다 다르다는 것을 함께 얘기하며 웃었던 언니들을 생각한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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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모닝’ 만드는 동희오토를 아십니까


100% 비정규직공장 동희오토를 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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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9 13시09분 권수정

충남 서산에 2004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동희오토라는 공장이 있다. 천여명의 사원이 근무하는데, 그 중 사무관리직 160명만 정규직이다. 나머지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850여 노동자들은 100% 비정규직이다. 모두 12개 업체로 나뉘어 주야간 10시간씩 ‘모닝’이라는 자동차를 생산한다.





여기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입사하면 시급 3,760원을 받고, 3개월이 지나면 3,780원을 받는다. 올해 최저임금은 3,770원이다. 1년이 지나면 다시 재계약을 해야 하고 그동안 입바른 소리라도 했다면 재계약이 되지 않는다. 2년이 지나도 최저임금보다 10원이 더 많고 3년이 지나도 최저임금보다 20원이나 30원이 더 많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소속된 하청업체가 사장이 바뀐다. 원청회사인 동희오토에서 하청업체와의 도급관계를 다른 사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순서는 이렇다. 먼저 동희오토에서 진양기업(실제로 작년 계약 해지된 업체)으로 보낸 도급계약만료 통보가 공고로 사무실 벽에 붙는다. 진양기업에서는 110명 소속 전체 노동자에게 1달 후에 계약이 해지된다는 계약해지예고 통보를 보낸다. 노동자들은 불안하다.

보름쯤 지나면 새로 온 사장이 누군지 소문으로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은 불안하다. 새로 온 관리자라는 사람이 110명을 한명씩 불러서 다음 달부터 일할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노동자들은 불안하다. 이 과정에서 작년 진양기업은 모두 7명의 노동자와의 계약을 거부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합법적으로 해고된 것이다.
노동자들은 불안하다. 그리고 서로가 밉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해고된 것을 두 눈으로 본 노동자들은 라인에 묶여 일을 하며 풀 곳 없는 화를 자신에게 돌린다. 먹고 살아야 한다.

한편 재계약에 성공한 노동자들은 어제와 똑같은 라인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 다시 신입사원이 되어 최저임금을 받는다. 전의 회사와 계약이 해지되었고 신입사원이 되었으므로 근속이 인정되지 않아 연차가 없어지고 월차와 생리휴가는 아예 없다. 월차도 연차도 없이 1년을 일하고 다시 재계약이 되면 그때서야 연차가 12개 발생한다.

2005년 이 공장에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동희오토 사내하청노조가 설립되었다. 설립초기 조합원이 300여명으로 급속히 빠르게 조직되었으나 조합원이 가장 많은 핵심적인 하청업체 ‘SA테크’를 동희오토 원청회사에서 통째로 도급계약해지 했다. 한꺼번에 50여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또한 11개의 다른 업체의 노동자들은 2004년 이미 신고 된 한국노총 소속의 노동조합이 하청업체마다 하나씩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동안 노동조합이 있는지도 몰랐고 위원장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각 하청업체에서는 노동자들을 한사람씩 불러서 면담을 했다.

“사내하청노조를 탈퇴하고 우리업체의 노조로 가입해라.”
“소나기는 피해가는 법이다. 지금 계속 버티면 SA테크처럼 된다. 너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사내하청노조 조합원이 가장 많은 업체를 동희오토에서 짜른단다. 그럼 우리 모두 짤리고 SA테크처럼 된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냐.”
“한국노총 소속 노조에 가입해라. 그러면 동희오토에서 다 알아서 들어준단다. 이미 동희오토에서 각 업체 소장들에게 다 지시 내렸다. 자꾸 버티면 너만 해고당한다.”

날마다 수십 통의 탈퇴서가 날아왔고 그래도 버틴 사내하청노조 조합원들이 유인물만 돌려도 징계되었다. 어김없이 입사일이 다가오면 남은 조합원들은 계약이 해지되었다. 2008년 현재 조합원은 단 두 명이다.
그동안 어용노조 위원장들은 취업규칙 수준도 안 되는 단체협약을 맺고 매년 210원 수준의 임금인상을 회사와 합의했다. 해마다 오르는 최저임금은 최근 몇 년 동안 300원 수준이다. 어제까지 노조 위원장이던 사람이 오늘 하청업체 소장이 되어 조합원의 계약을 해지하기도 했다.

2005년 이래 단 한 해도 해고된 노동자가 없었던 적이 없는 동희오토에서는 올해도 해고자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동희오토 사내하청노조 조합원이 아니라 한국노총 어용노조 소속의 조합원 5명이 9월 추석 전에 한꺼번에 계약이 해지되거나 ‘위장취업’ 했다는 이유로 징계 해고되었다. 계약해지는 그렇다 치고 무엇을 위장했냐고 물어보았더니 졸업하지 않은 대학의 학력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희오토 경비가 1차 해고 통보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출입을 막고 있다



9월 19일 밤 동희오토 관리자, 경비 100여명의 1차 해고 통보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출입을 막았다


5명의 노동자들이 부당한 징계와 계약해지에 맞서 출근시간 정문에서 출근을 시도하면 원청과 하청 회사의 관리자와 경비 200여명이 나와서 밀어낸다. 9월 26일 현재 다섯 번의 출근을 시도했는데 그동안 한명은 발가락이 부러졌고 다른 사람들도 온몸에 멍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노동자들 마음의 멍까지 보이는 듯해서 눈물이 난다.

징계 해고되지 않고 10월초에 계약을 해지 통보를 받은 두 명의 노동자는 출근이 가능한데, 지난 24일 그 중 한 노동자가 점심시간에 식당 식탁에 올라가 부당함을 조합원들에게 호소하는 과정에서 경비와 관리자들에게 끌어내려져 온몸이 짓밟혀 의식을 잃고 실려 갔다. 다행히 의식은 찾았지만 경추염좌, 요추염좌, 뇌진탕, 다발성 좌상으로 전치 3주의 진단이 나왔다.

한편 식당에서 동료가 짓밟히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출입을 하지 못한 세 명의 해고자들은 동희오토 정문으로 달려가 동료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출입하겠다고 누워버렸고, 출동한 경찰이 미란다원칙을 고지하지도 않고 무슨 죄인지를 확인시키지도 않은 채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워 연행해갔다. 하루 만에 풀려났다. 여전히 정확한 죄명은 알 수 없고 ‘앞으로 조사하겠다’는 말만 들었다.

이 사건당시 회사에서는 정문에서 해고자 3명이 물류를 막았다며 라인을 20분 세웠고, 소장들은 5인의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총 20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니 이제 걔네들은 끝났다고 말했다. 1분에 1억씩 벌어들이는 구나.

동희오토 850명 하청노동자들이 피의 모닝을 만들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피의모닝이 아니라 노동하기 좋은 나라 ‘굿’ 모닝을 만들기 위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지금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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