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향의 SF를 찾는 것이 어렵더라.
너무 현학적이거나
중세적 마초들의 우주전쟁이거나
어슐리 르귄도 내게는 좀 난해하고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 여성이라는데
직설화법의 선동이 멋지다.
바다로 가기 전날 밤
에어컨 켜고 침대에 누워 종일 그녀를 읽었다.
진정한 휴가란 이런것이다. 흡족하다.
그녀를 더 읽어봐야 겠네.

다양성을 포용하라.
단결하라-그러지 않으면 그대를 먹잇감으로 보는 자들에 의해
분열당하고,
약탈당하고,
지배당하고,
죽임당한다.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으면
멸망당할 것이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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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반짝이다 - 공장에서 거리에서 만난 조금 다른 목소리 : 금속노조 여성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지음 / 나름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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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책이 나왔다. 노동자인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많은 여성이 읽어 반짝반짝 빛이나면 좋겠다. 더 많은 남성이 읽어 노동자의 길이 넓어지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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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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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처럼 시작되는 어느 가담자의 수기는 슬프다. 

소비에트 문명, 나는 소비에트 문명의 흔적을, 소비에트의 익숙한 얼굴을 서둘러 기록한다. 

모든 인간을 호모소비에트쿠스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실험이 필연적인 실패로 끝난후 알렉시예비치는 쓴다. 


우리 세대는 자유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세월이 얼마 흐르지 않은 지금 우린 자유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등이 굽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것이라고는 자유를 얻기 위해 죽는 방법 밖에 없었다. 

우리도 자유를 배운적이 없다. 자유를 위해 죽는 방법도 배운 적이 없다. 늘 복종을 배웠고, 대학만 가면 된다고 했지. 


자유란 알고보니 러시아에서 줄곧 모욕당해왔던 속물근성이 회생한 것이었다. 자유란 '위대한 소비전하'의 등장이었고 '어둠의 왕'의 출현이었다. 

소비에트 붕괴후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해지길 기대했는데, 

지금은 가난한 것도 부끄럽고 취미로 운동하나 안 하는 것도 부끄러운 시대요. 한마디로 쫓아가기가 벅차지. 

구조정으로 정리해고되고 상점에는 물건이 넘치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느 것을 알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었소. 돈이 있으면 인간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법칙을 

호모 소비에티쿠스, 그게 자본주의예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가지 이념이 있었던 세상과 자본주의만 있는 세상은 모두 비참하구나. 


사회주의는 강제노동수용소, 밀고, 철의 장막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에요. 그 안에는 자기 주머니만 채우는 데 여념이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정의롭고 밝은 세상, 즉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통을 이겨나가는 그런 세상이 있던 말이에요...... 삶은 돈과 어음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일 뿐이고, 자유가 곤 돈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말들을 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은 10원짜리 한개의 값어치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공산주의자였고 앞으로도 공산주의자로 남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공산주의를 믿었냐고요? 거짓말 안하고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구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어요. 이미 말씀그렸지만, 지금도 그러게 믿고 있어요. 


한 곳에서 어떤 물건을 산뒤 다른 곳에서 3코페이카 더 비싸게 파는 사람이 영웅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다고요. 지금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로 세뇌하고 있잖아요. 

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정말 정확하게 표현한다. 

소비에트 붕괴이후 태어나서 수십년을 맑시즘을 학습하고, 변증법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대신에 정글의 법칙이 들어왔어. '너부다 약한 자를 물어뜯고 너보다 강한 자에게는 무릎을 꿇어라.'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그 법칙이......


평범한 춤조차 우리는 저급하다고 생각했어. 춤을 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판도 열렸고, 춤을 추고 여자친구에게 꽃을 선물한 콤소몰들에게 벌을 줬어, 심지어 난 춤 관련 재판위원회 위원장도 했다니까. 난 내가 가졌던 그 마르크스적 신념 때문에 결국 지금까지도 춤을 못 춰. 나중에는 후회를 했지. 아름다운 여성과 한번도 춤을 추질 못했다니까. 미련 곰탱이!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들이다.  

내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읽고 번개를 맞은 느낌일때 1990년대 초, 소비에트는 이미 망한 후였다. 

그것이 내게 충격은 아니었지만, 내내 궁금했다. 

이 빛나는 사상을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고, 숨쉬어온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며, 어떻게 살까. 

유물론과 계급론으로 무장하고 역사발전의 법칙, 그이상을 신념화한 사람들이 정말 있었을까. 

모두들 독재자가 지긋지긋하고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불평등한 체제 따위는 쉽게 받아들여 졌을까. 

그 궁금증이 풀렸다. 

고통이었구나. 호모 소비에티쿠스, 이제 멸종을 강요한단 사람들. 


'모스크바는 말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쿠즈네초프 교수가 트로츠키에게 한 말에 대해)

'그 정도로는 배가 고픈 것이라고 할 수 없소.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때 유대인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을 먹었다오. 내가 당신들의 어머니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들을 먹게 하거든, 그때 내게와서 배고프다 하시오.' 트로츠키, 1919

망할 인텔리겐챠같으니라고. 트로츠키.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니.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들을 먹게 되는 때에 너에게 간다면 배고프다고 말하러가는게 아니란다. 

네 목을 치러 가는 것이지. 


소비에트연방시절 수용소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얘기가 가장 슬프다. 

이제 막 태어난 꼬마 아이들부터 3살까지는 엄마와 살고, 4살에는 기숙사에서 산다. 5살이되면 고아원으로 보낸다. 

엄마와 떨어진 4살아이를 어쩌면 좋으냐.  

소비에트, 어떻게 이런 짓을 한거야.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2. 

세르게이 표도르비치 아흐로메예프. 소련 대통령 군사고문이었던 최고위층 

크렘인에 있을때도 그는 어색해 했습니다. '고고한 학'. '뼛속까지 군인' 이었던 그는 크렘림의 삶에 길들여지지 않았어요. "사욕없는 진정한 동지애는 군대에만 있다."라고 말했었죠...... 그는 17년 동안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흐로메예프가 크렘림으로 거처를 옮긴 후, 몇매나 많아진 월급을 거절했어요. 그때까지 받아왔던 월급이면 충분하다면서요. 이쯤되면 누가 돈키호테인가요?...... 500루블 ㅇ상의 외국 선물의 경우 의무적으로 국가에 제출해야한다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법령이 발표되었을때, 아흐로메예프 원수는 제일 처음 그 명령을 수행한 사람이자, 그 명령을 수행했던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소련이 무너지자, 아흐로메예프는 사무실에서 목메어 자살한다. 

1923년 태어나 소비에트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그는 소비에트가 아닌 나라에서 살수 없었던 것이다. 

평생을 이념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배운적이 없으니까. 

돈, 속물적인 삶을 경멸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돈을 벌기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탱크와 로켓에 의해 정복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일 강하다고 자부했던 것, 바로 우리 영혼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무너진 겁니다. 체제가 썩었고 당이 부패했던 겁니다. 어쩌면 이것도 아흐로메예프가 삶을 포기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는 사관생도에서 시작해 군의 최고봉까지 올랐습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최고 칭호인 소련군 원수, 영웅별 훈장, 레닌상...... 부유한 상속자가 아닌 어느 지방 벽촌,평범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에게 말입니다. 소련은 그와 같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가난하고 작은 사람들에게요. 그래서 그들은 소련을 사랑했습니다. 



3. 

유대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강한 바람이 불때 가장 높이 떠오르는 건 쓰레기다.'

맞네. 사회가 불안하고 변화가 많을때, 가장 높이 떠오르는 것. 

강한 바람이 불어도 떠오르지 않고 묵묵히 바닥을 지키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실패한 소비에트의 꿈이 아직도 가치있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자본주의 사회 고통속에서 살며 사회주의를 꿈꾸는데, 아직도, 

나는 한번도 본적없는 호모소비에티쿠스 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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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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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인간 사이의 연결을 침해당한 결과이다. 생존자가 단지 수동적인 목격자가 아니라, 폭력적인 살인이나 잔학 행위의 적극적인 참여자였다면 특히 더 위험하다. 전투 외상은 폭력적인 살인을 보다 높은 가치나 의미로 더 이상 합리화시킬 수 없을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는 목표가 이미 불가능해 졌을때, 시신의 수를 세는 등 죽이는 그 자체가 성공의 기준이 되고 말았을때, 군인들은 뿌리깊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지속적인 심리적 손상 앞에 취약해진 이유는 단지 죽음에 노출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들이 부당하고 의미 없는 파괴행위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참전한 미국 병사들의 얘기다. 

내가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니. 끔찍하다. 


대한민국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경험을 명예로운 일로 편집한다. 

공산주의와 전쟁의 일선에 섰다는 거지. 태극기 집회를 하고, 남북 화해의 움직임을 반대하면서 

여전히 동원되어 반공을 외치며 이용당한다. 잔인한 일이야. 


한 베트남 참전 군인은 상실된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왜 신은 선한 사람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수 없었다......나는 한명의 성직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신은 작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 둡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이 전쟁, 이 빌어먹을 것이, 내 주변에 죽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성직자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전장에 있어 본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전쟁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신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

왜 태어나서 왜 죽는걸까. 신이 뭘 알겠어. 살아본 적이 없는걸.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거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강렬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어려움 때문에, 생존자들은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과,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못하는 양 극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따라서 이 남자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다른 이들을 보호하려 했으며, 그 누구도 해를 입는다는 것을참지 못했다. 반면에 가족을 향해서는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과민하였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의 고뇌의 원천 중 하나였다. 

가정폭력의 가해자들, 이런 사람들 많이 봤어. 기본적으로 비열하다고 생각해. 

자기를 망가뜨린 국가폭력에는 복종하면서 힘없는 가족들 위에 군림하여 가해자가 되다니. 

더 큰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라 해서 힘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괴롭혀도 되는 것은 아니야. 

자기가 피해자였다면 더더욱 그 고통을 알아, 다른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성찰하고 노력해야, 인간이거든.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더 큰 폭력의 피해자라 해서 용서하기는 싫다고. 


강간범의 목적은 피해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지배하고, 모욕하며,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강간은 그 특성상 심리적인 외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적인 계획이다. 


외상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은 세계가 의미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사람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면, 공동체는 반드시 해악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인정과 배상이라는 이 두가지 반응은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생존자의 느낌을 재건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참전병사를 위로하는 기념비는 있지만 강간 생존자들을 위한 사회적 기념비는 없다. 

피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인정되지 않음으로 배상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녀의 몫이다. 


피해자가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다면, 두번의 학대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가 포로일때, 도망칠 수 없을 때, 그리고 가해자의 통제 아래 있을 때, 외상은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은 감옥, 강제수용소, 강제노동수용소 안에 부명히 존재한다. 또한 컬트 종교 집단, 성매매 집결지화 같은 조직화된 성적 착취 기관, 가정 안에도 존재한다. 

두려운 일이야. 


한 남성의 가정은 그의 성역이고, 그 가정이 여성이나 아이들에게는 감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한 근친상간 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커면 정액으로 가득차 있다. 만약 내가 입을 열면 그것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뱀이 번식하는 하수구의 진흙탕이 바로 나이다."

숨이 막혔다. 오래된 그녀의 고통이 막막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2. 

모르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는 느낌보다는 잘 알던것의 의미를 교통정리 했다는 느낌이다. 

트라우마가 어떤 병이고, 어떻게 병으로 이름붙이게 되었고, 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지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가정안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주디스 루이스 허먼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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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민중사
문익환 지음 / 정한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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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구약성서 해설, 히브리 민중 해방의 역사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가나안 농민해방군과 힘을 모아 해방을 이루는 이야기 

해방군들이 건설한 국가의 왕도 농민들의 고통위에 부정과 부패를 쌓고 타락하니

다시한번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해방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 를 읽다보니 


문익환은 스스로 선지자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의 땅이 해방되지만 남과북으로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 죽이고 

분단된지 40년이 되는 1990년 5월 그는 노예들의 신, 분노와 전쟁의 신 야훼를 부르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달라고 탄원한다. 


'히브리'가 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많은 기록에서 증명됩니다. 

천민의 역사란 해방의 역사, 투쟁의 역사일 수 밖에 없다. 

노예로 만족하여 계속 그렇게 살길 바라는 자라면 어떤 비천을 기록하여 남기려 하겠는가. 

천민의 탄원을 듣는 신이 정의롭다면 계속 노예로 살라고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등껍질을 벗기고 호의호식하는 압제자들에게 분노하고, 

싸워 이기는 정의를 약속하니 노예들의 신이고 정의의 신이다. 야훼는 그런 신이다. 


문익환은 스스로 선지자가 되어 야훼에게 통일조국을 탄원한다. 

21세기 한반도에서 압제에 시달리는 노동자농민이 주체가 된 해방전쟁을 위해

스스로 선지자가 되는 삶이란 엄중하다. 

실천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삶으로 확인시켜준 목사의 성찰이라, 그 영혼의 소리에 울림이 깊다. 


어쩌면 스스로 히브리인줄 모르고 사는 우리에게 

몇년전 교육부장관이 개돼지와 같다고 알려주었고, 한진일가를 비롯해 재벌들의 갑질 쇼를 보면

아, 저들은 우리를 존중해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분명 아는것 같다. 

우리가 히브리라는 것을. 


선지자 문익환의 히브리 해방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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