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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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예수의 모습이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의 팍스로마나는 이민족에게 관대하고 세련된 로마인의 지적인 천년제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데 

로마제국시대의 변방 식민지 팔레스타인지방에서 유대민족의 해방운동을 하던 정치범 예수가 사형당한 사건은 매우 유명하고

죽음에 이른것이 예수하나 였던 것도 아니며, 

오죽하면 골고다언덕은 십자가형에 처해진 수많은 정치범들이 시체조차 수습되지 못하고 공개된채 말라가고 썩어거던 언덕일까. 

저 수많은 학살이 이민족에 대한 로마식 세련된 관대함인가. 


예수한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메시아와 혁명가들이 죽음을 당한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와 전쟁을 시작한다. 

73년 마지막 진압될때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되었고 주민들은 모조리 학살되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1,000명 정도. 

제국 로마에서 십자가 처형 뿐 아니라 떼로 죽이는 학살이 참 흔하다. 



2. 

프롤로그가 56년 대제사장 요나단 암살사건의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제사장이 왜 학살의 대상이 되는지 

왜 유대의 인민들이 대제사장을 적으로 생각하게 되는지 

팔레스타인 땅 유대 민중들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 흥미롭다.


예수는 일주일에 엿새,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왕의 도시에서 고된 작업에 시달렸을 것이다. 낮에는 유대 귀족들을 위해 대궐같은 집을 짓고 밤에는 진흙과 벽돌로 지은 허름한 집으로 돌아와, 터무니 없는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점점 늘어나는 빚에 짓눌린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급속도로 심화되는 것도 직접 보았을 것이다. 

2000년 전에도 지금이랑 얼추 비슷하군.

터무니없는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겁나 심화된 사회라니 말이다. 


폭력과 예수의 관계도 흥미롭다. 

예수가 무난한 하느님나라, 영적세계의 주인인지 

땅위의 억압을 넘어 유대인들의 왕이 되고자 했는지 


주요한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된 1세기 말이 되자, 로마(특별히 로마에 사는 지적 엘리트층)가 기독교 선교의 핵심 표적이 되었다. 이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위해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정도 창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삶에서 혁명적 열정의 흔적을 모두 제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대한 로마인들의 책임을 완전히 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과격한 유대인 혁명가 메시아가 어떻게 보편적 평화주의 설교자로 바뀌는지  


예수를 죽인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려 2000년에 걸친 기독교 반유대주의의 토대가된다는 설명은 설득력있다. 

물론, 그렇다해도, 2000년동안 방랑하며 박해받은 유대인들이 2차대전후 팔레스타인 땅으로 몰려가 

땅주인들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짓이 100년이 되도록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뀔뿐 2000년동안 파괴와 폭력과 학살이 반복되고 있다니. 

인간들 참 징그럽다. 



3. 

예수가 혁명가였다면, 그의 추종자들 

십자가 처형후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왔다는 주장을 한 베드로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의 배짱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주장을 할 생각을 했을까. 

비천하게, 모욕적으로 공개처형당해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다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으로 되었다니 

그래서 이 왕은 더이상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니. 

인간의 몸을 입은 하느님, 죽음으로 부터 해방된 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죽은자가 살아난다니.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 가졌던 간절하고 열정적인 신념의 근원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런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신념을 간절하게 갖게 되었을까. 

추종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은 재산을 모두 헌납하고 함께사는 공동체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따로없는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신념이 아니었을까.


예루살렘의 유대이들은 예수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성서의 상식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매달린다면 이미 메시아가 아니다.

그래서 예수 추종자들의 열성적인 신념은 오히려 그리스, 로마 문화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나 이교도들에게 전파되었고

유대의 신이아니라 로마의 신을 닮아갔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좋게 말하면 무식한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이단으로 여겼다.  

예수가 죽은후 지독교가 보편적인 종교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드라마가 흥미롭다. 


예수의 제자들, 12명의 사도들과 바울에 관해 생생한 캐릭터로 보여준다.  

신약성서의 각장 복음서와 편지들의 관계, 씌어진 시기, 편집의도 등등의 전체 맥락을 읽어주는 것도 재밌다. 

그러게 종교 또한 정치와 권력의 산물이라니까. 


그래도, 예수의 죽음이후 부활이라는 창조적인 발상을 했던 그의 추종자들의 간절하고 열정적인 신념이 끝내 살아남은 것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여 용케 로마의 지식인층을 포섭했기 때문이아니라 

예수의 뜻을 이어받아 현실에서 실천하며 살아낸 예수의 동생, 의로운 사람 야고보 같은 후계자들의 활동 때문이다.  


야고보서에 대해 가장 먼저 거론할 내용은 이 편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극진한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어떤 전승이든 야보고를 비곤한 사람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는가? 야고보가 세운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긴다는 원칙하게 세운 공동체라는 사실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모인 예수 추종자들이 자신들 집단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는 증거도 있다. 

한국의 예수 추종자들이 쫌 배웠으면 싶네.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말이야. 얼마나 멋지냐구. 

더 부자될려고 교회가는거 말구. 



4. 

2000년이 흐른 오늘날, 바울이 만든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린 셈이다. 이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로 갈릴리를 배회하던 혁명적 젤롯에 대한 기억, 로마의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한 민족주의자에 대한 기억은 역사의 뒤편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레자는 말한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 만큼이나 카리스마가 넘치며 찬미받을 만 하다는 사실을 

NO. 인간예수가 더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친다. 날 때부터 신의아들에게 뭔 카리스마가 있남. 원래 신의아들인디. 


재밌다. 

예수의 죽음이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던 바울과 본토 유대인 사도들 사이의 공방도 극적이고 

결국 유대전댕으로 이스라엘이 초토화되고 본토의 교회가 폐허가 된 후 

디아스포라 예수의 후예들이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로 로마를 판정리한 후 200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성서를 앞세운 권력쟁탈과 피의 역사거든. 

노예들의 종교가 지배자들의 종교가 된 순간, 더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섬지지 않아.

나사렛 예수가 무덤 속에서 보고 있다면 엄청 화딱지 날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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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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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굳이 뉴라이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균형잡힌 역사서를 보기어렵다. 특히 현대사는. 

여성의 역사와 노동의 역사가 복원되고 있지만 통사로 정치와 문화, 사회를 모두 살펴 

진상규명할 수 있는 실력이 되는 현대사학자가 몇명이나 될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역사학자가 또 있을까. 

광주에서 몇월 며칠날 몇명이 죽었는지, 사실을 밝히는 것을 넘어 

마지막으로 도청을 사수한 사람들의 마음

산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이 내려놓자고 하는 총을, 죽은 이들을 위해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 

그 마음을 통해 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마르지않는 양심의 샘물이 된다.


세월호의 침몰을 통해 대한민국의 침몰을 경험하고 있는 요즘

저 무능력하고 폭력적인 권력의 뿌리와 참모습이 어떤지 

저것들이 계승하고 복원하여 마침내 만들고 싶은 나라가 어떤 꼴의 야만과 천박함인지 알기위해 

유신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성찰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이정도로 의미있게 정리해낸 한홍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또한 70년대 유신을 두려워했던 젊은이이고, 광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양심이거든. 


저렇게 죽었는데, 30년만에 다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다니. 

모욕적인 세월이다.  



2. 

1969년 9월 문을 연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은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500여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은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을 정부 주도 아래 설립된 '군대창녀 주식회사'라 부른다. 


빌어먹을 국가. 

떠난다는 미군의 바짓가랑이 잡느라고 별짓 다한다. 

'양공주'에 기생한 국가포주제도. 

기가 찬다. 


<이제는 말할수 있다>에서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출한 유현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볼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암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재밌다. 진심이다. 

이 슬프고 억울한 시대를 읽으며 재밌는 이유는 저런 문장의 생생함 때문이다. 

한홍구는 역사를 시간순으로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 대표적인 장면들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몇년도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사실 네이버가 검색하면 다 나온다. 


고은이 서문에서 

정사와 야사의 구차한 변별 따위를 가차없이 뭉개버린 생동의 역사서술이 한홍구의 전위사관에서 체현된다. 라고 쓴다. 

옳다. 

살아움직이는 역사서술이고 유신공주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2014년 침몰하는 청와대와 맞닿아 있는 역사서술이다. 


사실 한국 현대사는 읽기 어렵다. 

서승의 옥중19년이 어찌나 읽기 힘들던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억울함과 슬픔을 잊지 못한다. 

한국 현대사는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져 억울한 사람들의 피눈물이 너무 많아 읽기 고통스럽다. 


한홍구는 사실에 근거해 쓰면서도 행간에 유신의 기획자들, 유신에 빌붙어 떵덩거리며 먹고산 자들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그의 이런 서술이 시대의 답답함에 숨구멍을 열어주고, 슬픔과 고통으로 부터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권력앞에 인간의 오만과 비겁과 정의가 모두 어쩌면 이렇게 극명한지.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바닥까지 드러내게 만드는것 자체가, 그런 시스템은 그 자체가 악이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 버렸다. 

이런 서술은 절묘하다. 

우리와 상의없이, 우리 출생의 의미를 한꺼번에 아도쳐서 선포해버리는 권력을 조롱한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것에 동의한 적 없다고! 

내 삶의 의미를 왜 니가 결정하냐고. 

이런면에서 한홍구는 여유있고, 유신 일당들에게 까칠하다. 

유신이라는 시대의 어두운 무게에 눌리지 않으며 솔찍하게 깐다. 

내공이다.  



3.

유신을 쓰며, 70년대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여성노동자들을 살피고, 

'강주룡의 을밀대, 김진숙의 크레인' 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다. 

철학적 일관성을 이정도로 관철시키며 시야를 확보한 현대사학자가 한홍구 말고 또 있을까. 


강주룡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겨우 2층 높이에서 단지 여덟 시간 버텼지만, 조선8도가 뒤집어졌다.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저 높은 곳에 올라 다른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것을 그냥 보고 있을수 있느냐며 사람들이 힘을 보태 임금 인하를 막아냈다. 

강주룡이 행한 최초의 고공농성은 지금부터 80여년전의 일이다. 한국 경제가 비교가 안되게 발전한 사이, 강주룡의 손녀들은 그 시절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더 높이, 더 멀리 올라 오랫동안 버텨야 한다. 김진숙은 아득한 40미터 위 85호 크레인에 올라 300일을 버텨야 했다. 


유신시대 여성 노동자들의역사는 여러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나지만, 한편 그녀들의 투쟁은 참으로 씩씩하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같이 어용을 담당한 남성들은 폭력적이고, 찌질하게 여성노동자들을 개무시할까. 

그러고, 그리고 유신시대를 지나 30여년이 지나서도 왜 아직도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눈물이 날까.  


지식인들은 비참하게도 '단 한번의 승리'를 외치지만, 그 최후의 승리는 민중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작은 승리를 통하지 않고는오지 않는 법이다. 

매우 당연한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일상을 조직해야 승리의 날이 온다는걸 모른다. 

또한 매우 당연한 이 문장에 기대어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는 '지식인'들도 많이 봤다.



4. 

박정희의 병영국가 운영의 폭력성과 천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정당한 평가를 해 주어야한다. 

전쟁을 반대할 자유, 타인을 죽이는 훈련을 하기 싫다는 양심조차 없는 국가다. 지금까지. 


더욱 황당한 것은 그렇게 강제로 끌려가서 대한민국 군인은 외부의 적과 싸우다 죽는게 아니라 

군대 내에서 죽는다는 거다. 

정전 이후 60년동안, 6만명. 매년 1000명 꼴로 죽은셈이다. 

이건 미친짓이다. 

죄없는 젊고 어린 남자들을 대려다가 가둬놓고 사람죽이는 훈련시키다가, 죽이는 거다. 멀쩡한 애들을. 


박정희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교활함으로 승부하는 입지전적인 인물.

그때그때 힘있는 쪽으로 붙는 것도 잘하고, 참 가벼워.

권력을 잡은 뒤에는 왕이 되고 싶었던 거야. 20세기에. 참 가벼워.

참을 수 없는 그의 가벼움에 권력이 생기니 재앙이었다.

유신을 선포하여 지맘대로 하면서, 또 후계자는 인정하지 않아요. 

그의 핵심측근 입장에서 보면 감히 후계자의 자리를 꿈꾸지 말고 기양 대충 넘버 10안에서 많이 해처먹을 일이다. 

후계자가 되는 것을 경계하지 않고 감히 거론되었다가는 한방에 훅 간다. 

박정희의 측근들이 차례차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행사하다가 몰락하는것도 흥미롭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한홍구의 판단도 재밌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실무담당한 행동대장 윤진원의 마지막 양심,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김대중을 살려 한국으로 보낸 에피소드 끝의 이후락과 박정희의 표정이 골때린다.



5.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이 사형당했으나 그 판결문에서 조차 인혁당은 실체가 없다. 

이들이 처형되고 딱 30년 후인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 사무실에서 이 이해할 수 없는 판결문을 읽다가 나는 울어버렸다. 


한홍구는 역사와 현실이 어떻게 만나는지 직접 주어가 되어 진술한다. 

역사학자라고 해서 현실에서 떨어져서 어깨에 힘주며 평가질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한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 자신 유신의 역사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직접 보여주는것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유신을 모를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남의 얘기가 아니고,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고. 


박근혜 정부는 유신을 계승하여 현실에서 다시 꽃피우고 싶어하거늘. 

나는 두렵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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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실기 한길그레이트북스 113
박은식 지음, 이종란 옮김 / 한길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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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케우치 미노루의 절대지식 중국고전을 보며 양명학이 유학의 품에서 나왔으나 매우 급진적인 평등사상이라는걸 알고 놀랐다.

쉽게 해석된 관련 책이 있을까 했는데 

1910년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일때 박은식이 쓰고 최남선이 소년지에 실었더니 

불온서적이라고 판매를 금지했을뿐 아니라 소년지를 폐간해 버렸다네. 

일제시대의 불온서적이 100년후 완간되어 나왔다. 

박은식이 왕양명의 삶과 사상을 조선의 소년들에게 알려줄 목적으로 쓴 책 


양명학이 평등한 사상을 갖고있다고는 하나 

박은식이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하나, 역시 유학 

더욱이 조선시대 선비, 사대부들이야 제나라 팔아먹은 계급 아닌가. 무능이든 탐욕이든 용서하기 싫은디 

저 잘못은 반성안하고 잘난척 하는 양반아닐까, 의심하며 읽었다.

 


2. 

왕양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말미에 '나의 생각' 이라며 박은식의 생각을 달았다. 


박은식이 소개하는 왕양명의 삶은 당췌 날 대부터 뛰어난 잘난 인물이라 평면적이고 재미없다. 

교과서 위인전의 모양새다. 

태어날태부터 시시콜콜 비범한 자들은 평범하게 태어난 인민들을 기죽인다. 

다만 어렸을때부터 도교, 불교에 심취했다가 병법을 연구해 난을 평정하는 군사전략가의 면모도 있고 

실무 행정가에 정치가에 문장가이고 유교의 이론가이니 

적어도 호기심많고 실사구시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있다. 

글만 읽는 분들은 병법을 잘 연구하지 않을 뿐더러 말을타고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난민을 진압하러 나갈수도 없을 터이고 

불교, 도교에 심취했던 까닭에 양명학에는 그 영향이 있다. 


양지는 앎이다. 순수하고 자연적인 하늘의 기운이기도 하고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재밌는 사람인데, 박은식은 재미없게 썼다. 


또한 양지는 변하여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우주안에 고정된 위치가 없다고 하네. 변증법이 생각나더구만. 

맞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은 없다. 

하나의 원칙만 고수하여 변화에 따른 융통성없는 폐단이 있기도 하지. 사람이란. 



3. 

날대부터 서열이 정해져있어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유고의 '예'는 재수없다. 

왕양명도 박은식도 그런면에서 고리타분해. 

박은식은 유학자이고 그가 마흔넘어 독립운동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왕조가 아니라 공화국이 무엇인지 알고 동의했을까.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하나의 원칙만 고수하여 변화에 따른 융통성 없는 폐단을 그는 극복하였을까. 

이 책에서 그는 그저 유학자이다. 

나라 팔아먹어 인민을 고달프게 한 왕을 계속 섬기라는 것은, 그렇게 팔아먹은 사대부, 선비들을 섬겨달라는거고

이 양반이 여태 정신 못차리고 있구만, 싶기도 하고 


왕양명은 귀양살며 병든 제자들과 하인들을 위해 익살그런 노래를 지어 불러 위로할줄 아는 사람이다. 

재밌는 사람이야. 

양명학의 선언은 여전히 매우 급진적이고 평등한 사상이다.  

성인의 도는 내 본성만으로 족하다.

알것 같아. 

나의 본성만으로 성인의 도를 이룬다니. 인간에 대한 존중이 깊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므로 앎또한 어질다. 

동의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믿어 순하게 살고 싶어, 

야만적인 폭력의 세상을 살더라도.   


봉건적 유학자말고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의 해석으로 양명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은디. 

일단은 그래도 박은식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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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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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제자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에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처음 속지에 이렇게 써있다. 



1.

법륜스님의 인간붓다가 좋았다. 

붓다의 고민과 깨달음과 실천이 어떤 의미인지 알수 있어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깨달음, 행복, 평등한 사상과 실천, 모두 좋았다. 

길에서 깨닫고 길에서 시체를 덮는 천을 얻어 옷을 입고, 걸식을 하여 주는대로 먹고 길에서 죽었다. 


여래 如來 이 말이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 이라네. 

불교 경전의 단어와 문장들은 시적이다. 

한문이 시적이라 더 그런것 같어. 


여러 일화들이 그냥 이야기로도 참 재미있다. 이만한 소설이 있을까. 

성서도 그렇다. 

2000년 넘게 인민의 마음을 움직인 진리에는 평등사상 뿐 아니라 극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인민을 설득하는 재밌는 이야기라는 말. 



2. 

수행자가 입는 옷인 가사는 본래 시체를 버리거나 화장할때 시체를 엎는 천 조각을 말합니다. 

이것을 분소의라 한다. 

수행자는 시체를 덮은 천 조작을 주워입고, 소유한 것은 분소의와 발우하나. 

탁발해서 얻어벅고 때되면 자고, 옷을 빨고, 일어나고, 산다. 

너무너무 많이 소유하고 복잡하게 살아서 문제라고, 그러고 보면 법정스님은 딱 부처님처럼 살고 싶었나 보다. 


이 책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래나 어쩔라나, 분별심이 생기네. ^^

책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기로 했는데 

분소의와 발우하나만 갖고도 살아가는 검소함과 비움이 부러우면서도 

이책이 갖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갖고 싶다, 안갖고 싶다의 분별심을 버려야 하는것 아닌가, 생각나 웃었다. 


상을 놓고 견해를 내려놓겠다고 불법을 배우더니 결국 '상을 놓아야 한다는 상'을 하나더 보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겠습니다. 상을 놓았느니 못 놓았느니 하는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시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상, 진리라고 하는 잣대까지 내려놓아야 일체를 내려놓은 자유의 삶으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알듯 모를 듯 하다. ^^


세상이 공하다는 것. 

일체의 상을 버리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 

불법은 갖가지 괴로움에 시달리는 삶을 자유로운 삶으로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알듯 모를 듯 하다. 


위 없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원을 세운 사람은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수보리는 다시 한번 부처께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고, 그리고 그 모두를 열반에 들게 했어도 사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길의 출발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복을 받아 부자로 오래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어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이상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는 행복, 걸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것.

괴로움이 없는 행복, 걸림이 없는 자유로움이라니.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고, 그 모두를 열반에 들게 했어도, 사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을 위해 일체 중생이 열반에 들게 해야 하는거고, 그들 모두가 열반에 들어도 사실 내가 한것은 없는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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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도서관 - 여성과 책의 문화사
크리스티아네 인만 지음, 엄미정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1. 

이런 서문 좋다. 

군더더기 없이 경제적이다. 

이 책이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서술되었는지에 대한 짧은 안내 

이 책은 그림과 독서, 그리고 책 읽을 자유를 손에 넣기 위한 여성들의 여정에 경의를 표하는 작업인 셈이다. 

인만의 안내에 따라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는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느낌

실제로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은 여성들은 얼마나 갈증났을까. 

책의 재미를 알아버렸는데, 읽는것이 제한되었던 여성들 말이다. 

어쩌면 지금도 세상의 어느 곳에는 더 많이 읽고 싶어 갈증나는 여성들이 있겠지. 


스위치 올리면 전기가 밝혀지고, 수도꼭지만 돌리면 더운물이 나오는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정도의 풍요로운 나라일뿐 아니라 

여성이라도 자유롭게 책을 읽을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드문 순간이다. 



2. 

일부 역사가들은 이른바 독서 혁명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네덜란드 전통으로 자리잡은 관용과 자유주의 덕택에 이 나라에는 전 유럽의 지식인, 작가,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고국에서 머물렀다면 검열을 피할수 없었을 필사본들을 가지고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이토록 개방적인 환경에서 레이덴시는 도서인쇄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럽다. 그랬구나. 

관용과 자유의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면 좋을것 같아. 

이념을 핑계로 학살전쟁에 내몰렸던 전통이 살아 50년이 지난 다음에도 빨갱이 사냥이 횡횡하는 

공포와 협박을 정치라고 일삼는 천박한 자들의 대한민국 말고, 답답해. 


17세기 레이덴은 얼마나 활기차고 날마다 시끄러웠을까.

불온한 필사본들이 모여 독서혁명이 물결치는 

레이덴에서 숨, 쉬어 보고 싶다. 



3. 

책 읽는 여성들의 역사. 

책 읽는 자유, 지식을 추구하는 기쁨을 쟁취하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역사 

답답한 성차별속에서도 책읽고 쓰는 지적인 작업을 멈추지 않은 여성들의 역사

그리고 그것, 책읽는 여성을 표현한 그림의 역사 


인만의 철학에 대체로 동의한다.

기획이 좋은 책이고, 담백한 문장으로 잘써진 글이다. 


책 전체를 통틀어 한국의 예는 딱 한번 인용되는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다. 으아. 

독일 여성들이 보기에 한국 여성이 불쌍해 보일것 같어. ㅠㅜ 


1554년 그려진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의 자화상이 마음에 든다. 

초록색 배경은 정직하고, 그녀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난다. 

그녀의 열정과 자긍심. 

여자라도 주눅들지말고 나처럼 당당하게 어깨 쭉 펴고 살라고 선동하는 눈빛이다. 

씩씩한 그녀의 눈빛이 소박한 형식의 그림을 뚫고 나를 본다. 


인만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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