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wo Worlds

 먼저 이 책 『빼앗긴 자들』(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02)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저자 르 귄은 갖가지 환경의 사람들의 사고와 문화를 치밀하게 가상하여 그려낸 일련의 작품들로 미국 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휴고 상, 네뷸러 상 등 기라성 같은 상을 휩쓴 과학 소설 작가이다. 이 책은 헤인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작품군의 한 권으로, 한 때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 시작하는 두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성 우라스(Urras).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으며 고도로 발달된 문명 체제를 가진 인종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문명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과 고혈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 터. 산업화된 소유 경제의 정점에 선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계속 긴장 상태와 전쟁을 반복하고 있다. 소유를 위한 지배욕은 사회 구조에도 반영되어, 남자는 여자를 억압하고 소유하고,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착취하고 부려먹는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어떤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비록 소설 속에 따로 ‘테라’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지구인들이 나오지만.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 풍족하게 갖춰진 우라스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행성 아나레스(Anarres)의 사람들, 즉 외부에서 주어진 체제와 억압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지배욕구가 이루어낸 구조 자체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그들은, 우라스에서 수용될 수 없었고, 이들은 결국 우라스의 형제 행성인 아나레스로 이주당한 것이다. 뭍짐승들마저 생존을 포기해버린 황량한 사막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들이 도착한 세계는 ‘온통 먼지투성이에 메마른 언덕뿐’(p. 317)인 곳이었다. 우라스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충분히 존재했던 공기, 풀, 비, 바다, 음식, 건물, 공장, 책, 음악 등의 모든 것이 결핍된 곳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원이 풍족한 고도화된 문명 상태(즉, 우라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형성된 자유인들의 억압받지 않는 연대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메마르고 헐벗은 적대적인 땅에서 먼저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따분하고 안락한 온실 속이 아니라,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유를 쟁취해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기관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는 차별성을 가진다. ‘국가의 신화를 밀어놓고서야 진정한 상호 관계와, 사회와 개인간의 상호 의존이 뚜렷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사회만이 안전과 안정성을 줄 수 있다고는 해도, 도덕적 선택의 힘, 생명의 필수기능인 변화의 힘을 지닌 것은 오로지 개개의 사람들뿐이기에.’(pp 458~459) 이러한 자유인들의 연대 속에서 ‘개인의 의무는 어떤 규칙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자신의 행동의 주체가 도는 것,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사회도 생동하고, 변화하고,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p. 494)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원칙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 협력이라는 하나의 원칙 외에는 어떤 법률도 없’고, ‘자유로운 유대라는 하나의 원칙 외에는 어떤 정부도 없’는 사회이다. ‘국가도, 국민도, 대통령도, 국무 총리도, 장관도, 장군도, 두목도, 은행가도, 지주도, 임금도, 적선도, 경찰도, 군인도, 전쟁도 없’다. 그들은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자들’이며, 유복하지 않고 강력하지도 않다. 오직 ‘고통 속에서, 굶주림 속에서, 가난 속에서, 희망 속에서’ 나눔의 의미를 깨닫고 그 속에서 형제애로 뭉친 것이다. 세계를 기본적으로 고통으로 인식하는 주인공 쉐벡의 세계관 속에서 서로에게 손을 뻗어 서로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pp 414~415에서 부분인용)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두 세계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주인공 쉐벡의 말을 들어보자: “당신네는 가졌고 우리는 가지지 못했소. 여긴 모든 게 아름답지. 얼굴들만 빼고. 아나레스에는 아무것도 아름다운 게 없어. 얼굴들을 빼면. … 우리에겐 그것밖에 없소, 오직 서로밖에. 여기 당신들은 보석을 보지만 거기서는 눈동자를 봐요. 그리고 그 눈속에서 장려함을, 인간 영혼의 장려함을 보는 거요. 우리의 남자와 여자들은 자유롭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유롭소. 그리고 당신들 소유자들은 소유당하지. 모두들 감옥 속에 있어. 각각이 외롭게, 고립되어, 소유하고 있는 쓰레기더미와 함께.”(p. 318)

 이런 정도의 모습이 춘추전국이라는 혼돈과 격동의 시대 속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깊이 통찰했던 한 현인이 말한 이상향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대의 복잡다기한 문명의 상황 속에서, 각종 사상의 실험이 이루어진 뒤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근사치는 되지 않을까 싶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모든 인위의 산물을 제거하고 남는 것은 평등의 땅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한 자유인들의 느슨한 연대가 될 것이기에. ‘小國寡民’을 끊임없는 동사적 상태로 볼 때 그 궁극에는 어떠한 국가의 조직도 거부하는 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 또한 당연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가지는 자율적이 개인만이 남을 수 있을 것이기에. (김용옥이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시경의 한 싯귀를 분석해가며 설파했던 里制論이 고대 중국의 이러한 소규모 공동체의 한 근사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노자의 사회상과 차이가 있다면 아나레스의 사회는 지방 분권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각각의 공동체는 필수적인 산물을 즉각 취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연스레 규모가 제한되어 있으나, 모든 공동체는 통신과 이동 수단으로 연결되어 원하는 곳에서 상품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노자가 이웃 마을간에도 서로 왕래가 없는 폐쇄적인 원시 자급자족 사회를 상정했다면, 아나레스는 서로의 연대와 소통을 최우선시하기에 황량한 자연환경 속에서 드문드문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공동체들이지만 도로와 통신의 연결이 마을의 건설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된다. 인간이 단순히 원시상태로 회귀할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런 상호 유기성을 가진 전체로서의 사회상이 더 생태계와 유사하고, 타당해 보인다. 그것이 ‘스스로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물론 아나레스 공동체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지, 관료기구, 지배자 등이 없는 평등한 것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지 않는 관료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p. 137)
 관료기구 대신에 인간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 자원배분 컴퓨터가 자원과 사람들을 배치하고, 누구나 뽑힐 수 있는 위원회에서 공동체의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지만, 그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이지 않는 권력의 집중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혁명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법률에 기초한 국가의 백성이 아니라 혁명에 근거한 사회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기에, 끊임없이 자체의 오류와 모순들을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은 개인의 영혼 속에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혁명에 끝이 있다고 보인다면 진정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p. 494 : 최초의 혁명가 오도의 말) 주인공은 바로 이런 아나레스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고, 투쟁해 나가고 있다. 또다른 혁명을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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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 민해연의 말처럼, 대개 서너 권 이상, 심지어는 열 몇 권은 되어야 좀 썼네, 하는 소리를 듣는 무협소설계에서 단편이라... 게다가 그 단편들을 모아서 책으로 낸다...  

척박한 한국의 장르문학계에서 일견 무모하게까지 보여질 수 있는 기획이건만, 버젓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온 단편집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어떻게? 바로 진산이니까. 

작가는 그 명성에 걸맞게, 빼어난 필력과 치밀한 구성을 양념 삼아 독특한 향취를 풍기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 무협소설의 감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확인이다. 무협소설이라는, 크게는 장르소설이라는 범주는 다만 소재와 배경을 위한 틀일 뿐, 그것만으로 규정짓기 곤란한 수준 높은 주제 또한 보여주고 있다. 武의 추구가 그 궁극에서 道의 경지와 합일하듯.  

正과 邪를 나누고 딱지 붙이는 시정 잡배들의 속좁은 구분은 되려 그 본질을 못 보게 할 뿐, 이미 경계를 넘어선 대가에게 그것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계속 훨훨 날아다니며 춤추었으면 좋겠다, 그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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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림자처럼 드리운 병인 비만, 그리고 이것이 여성의 상품화 및 외모지상주의와 결부되면서 벌어지는 신체 학대의 현장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그대의 차가운 손」이 있었지 아마. 내가 한국 문학계의 미래를 짊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 한강이 쓴 책(한강 선생으로서는 이런 가당찮은 소설과 같은 자리에서 언급된다는 것조차도 불쾌하실 수 있겠다. 널리 용서해주시길 바란다).  

반(反)한의학 진영에서 만든 찌라시 뒤꼭지에 참고도서 중의 하나로 나와 있길래 뭔가 싶어서 찾게 된 이 책, 「반인간」도 다이어트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약간은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물론 그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 똑같은 소재를 다루면서 어떻게 이렇게 격차가 날 수 있는지, 문창과 수업시간에 한 번 다루어봄직도 하다. 물론 반면교사로. 

'동양의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겠노라는 나름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쓴 소설인만치, 군데군데 들어간 의학사의 뒷이야기들은 호사가들의 흥미를 자아낼 만 하고, 건강상식 수준의 잡설들은 들어두어 나쁘진 않은 수준. 게다가 장편이지만 나름대로 긴장감도 유지하는 것이, 행여 독자들이 흥미라도 잃을까봐 심어놓은-따라서 소설의 주제와는 상관 없는- 겉가지 이야기들이 틈틈이 튀어나와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에피소드들과 소재주의에 기대다 보니 주제의 깊이있는 추구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수억 원에 가까운 명품 다이어트의 실상이 반인간적인 엽기 행각의 소산이라는 식의 (무슨 사람고기 넣어 만든 만두 이야기가 단골로 나오던 무협소설도 아니고... 이게 뭐니!) 식상한 설정도 문제려니와, 이런 엽기적 행태는 굳이 한의학을 걸고 넘어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호소력을 잃은 어거지로 전락해 버린다.  

그리고, 소설의 수준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음에도 굳이 이 책을 찾아 보게 만든 전공자를 힘빠지게 할 만큼 동양의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것 또한 가소로운 수준이다. 진짜 한의학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비판보다는 누군가의 실수나, 학계의 잘못된 관행(허민 선생의 동의보감 번역본 문제 등)을 잡고 늘어지거나, 논리적 설득력이 없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한의학이 제대로 된 의학이라면 한의학이 발전한 한국의 평균 수명이 한의학을 폐지시킨 일본보다 낮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식의 주장이 그것인데(그런 식으로 따지면 서양의학이 제일 발전한 미국의 평균 수명이 일본보다 낮은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반론 따위는 굳이 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들을 때는 맞장구를 치게 되는데 돌아서면 말이 안 되는 이런 식의 독설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비판적 고찰'의 '조악한 실상'이렸다. 
 

저자는 '허다한 고의서들, 관련 저서들, 심지어 근래에 나온 동양의학 박사 학위 논문들까지 두루 구경하였다'며 작품을 위한 사전 작업에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과시하던데, 문학작품의 감동은 그 소재의 풍성함에 있지 않음은 상식 아닐까.  

딴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파사현정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무리수를 두게 한 듯 하거니와, 다음 작품에서는 이런 식의 선정적 소재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치밀한 문제의식을 보고 싶다. 진정 인간과 반인간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영혼의 형상화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보여달란 말이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서양의학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할 생각'이라 하니, 더더욱 기대가 크다! 

좋은 소설은 쓰기도, 찾아 읽기도 어려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준 책. 

(마지막으로 주의 드린다. 근래 찾아보기 힘든 괴작이다. 무려 등단 씩이나 해서 문단에 이름을 얹은 작가가 어쩌다 이런 지경으로까지 떨어졌을까. 그리고 정상적인 출판환경의 정상적인-곧, 자신의 출판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경영인이라면 감히 낼 엄두를 못냈을 조잡한 원고가 대체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버젓이 출판까지 되는 만용이 저질러졌을까. 더구나 수준 높은 세계문학 작품들을 소개해온 탄탄한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말이다. 불가사의다. 불순한 목적을 위한 특정세력의 숨은 의도가 끼었더라, 정도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힘들지 싶다. 허니 이 책을 꼭 봐야 할 불가피한 상황(그런 불행한 상황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기를!)이 아니시라면, 애써 찾아서 보지 않으셔도 좋겠다. 괜한 호기심에 이 책을 펴들었다가는 피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르니. 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혹시 구매씩이나 해서 본 거라면 돈이 아까워서...)

200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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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을 처음 들고 나왔을 때의 이 아자씨는 아전인수와 독설에 찬 글들을 쏟아내는 삼류 학자였다(당시의 내가 보기에). 그 뒤 [나는 오랑캐가 좋다]를 읽으면서는 '뭐, 이 정도면 괜찮은데?'가 되었고.

대한교과서에서 한번 나왔던 책을 손 본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갑골문 연구에 바탕을 둔 "原典主義" 번역을 읽는 맛이 쏠쏠하다. 수천년 동안 쓰이며 진시황의 저 유명한 분서갱유나, 한대의 금고문 논쟁, 송학의 이데올로기 등을 거치며 갖은 수난을 당한 결과물이 현재의 사서삼경,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체계이다. 여기에 씌워진 때 하나하나를 벗겨내고 처음 구성되었을 때의 원의에 다가가기 위해 갑골문에 의거한 해석을 펼치는 저자의 원전주의(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原字主義"?)는 상당하 유의미한 작업이다.

그 결과, 논어에서는 거의 (역시 기존 주석가들에 얽매이지 않는 역사학자 출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거침없는 번역에 버금가는 창발적인 작업이 나왔고, 대학, 중용등도 발랄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재구성되었다. 

  

 

 

 

 

 

 



반면 시경부분에서는 십여전 전에 나왔던 원형갑의 [시경과 성]과 비슷비슷한 논의가 나올 뿐이고(그럴 수 밖에 없나, 하긴?!) 주역 부분에서는 뭔가 현재 통용되는 경문의 오류를 匡正한, 아주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듯 하다가는 그렇고그런 점술 비판으로 끝나고 말아 버린 점이 아쉽다. 왠지 저자가 말을 아끼는 것이 주역에 대한 독자적인 저술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상(혹은 희망사항)을 받긴 했지만. 

아시다시피, 갑골문이란 것이 원래 왕들이 점을 치는데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 연구는 곧 고대의 점술을 연구하는 것. 야심찬 갑골문 연구자라면 큰 꿈을 품어볼 만도 하다. 
 

  

 

 

 

 

 

  

 

 

 

 

 

 

 

  

 

(일본 동양학계의 대석학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저서들이 최근들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헌데 고만고만한 개설서만 나오고 있는 느낌이다. [문자강화]는 언제쯤 완역되려나? 김경일 선생의 저서도 볼만 하다.)

이 책, 아주 좋다. 얼마전 블로그 및 싸이 열풍을 다룬 어느 신문기사에서 신문사 서평에서는 떴는데 블로그 서평에서 별 인기가 없어서 "조용히 사라진" 책의 하나로 이 책을 꼽았던데, 이 점에서는 블로그 서평객들이 약간 게으르지 않았나... 라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뱀발 : 한자 훈독에 뻔질나게 나오는 오자는 쩜 그러터라... '저'로 읽는 諸는 모조리 '제'로 읽었고.

200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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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그러나 아무도 읽지는 않았던) 고전 [동방견문록]은 유럽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메인 '윈도우'라 할 수 있었던 작품이요 그들의 동양관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촛불아래 바로 이 책을 펴 놓고 가슴 속 깊이 희망을 간직한 채 탐험의 여정을 짜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작 그 동방의 '카울리'(한국의 당시 표현)에서는 이제껏 '시팡고' 사람들의 번역서를 중역하는 수준에서 그치다가 서기 2000년이 다되어서야 권위있는 번역서가 나오게 되었다. 마르코와 카울리가 제대로 만나는데 700여년이 걸리다니, 좀 심한듯도 싶다. 역자는 그간 중앙아시아학을 고독히(혹은 독보적으로) 연구해 오시던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 
 

 (김호동 교수가 번역한 라시드 앗 딘의 몽골제국사 시리즈)    

 

 

 

 

 

 

(김호동 교수의 중앙아시아 역사 관련 논저 및 번역서)   

 

 

 

 

 

 

(이번에는 이슬람 역사 관련 서적들)

 

 

 

 

 

 

이 책은 정본이 없이 약 200여종의 판본이 내려오는, 판본학상 많은 문제를 가진 책의 하나이기도 한데 김 교수는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프랑스 지리학회본을 비롯한 3가지 판본을 중심으로 원고를 모으고 재구성하여 결정본을 만들어 내었다. 비록 서구의 방대한 '마르코 폴로학'에 비하면 아직 일천하다고 하겠지만 이 정도 번역본이나마 가지게 되었으니 후학들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실 '東方見聞錄'이란 제목은 일본인들이 번역하면서 갔다붙인 것이고 원래의 제목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라고 한다. 직접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폴로는 정말 당시로서는 온세계를 서술해 놓았고, 그 이름값 하기에 손색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랍 세계, 중앙아시아, 원나라,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인도 대륙...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이 장장 500여 쪽이 넘게 이어지지만 폴로와 함께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쯤엔 아쉬움이 밀려옴을 느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 걸 받아적은 형식이라 그런지 화롯가에서 구랏발 좋은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먼나라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라고 할까. 왜 이 책이 유럽에서 성서 다음가는 베스트 셀러였는지를 설명해주는 근거의 두번째 쯤은 마르코 폴로의 입심 덕이라고 말해줘도 될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중국작가 여추우(余秋雨)의 [중국문화답사기]와 이 책을 거의 동시에 보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 묘사되는 강남지역의 풍경과 마르코 폴로가 본 13세기 元代의 강남을 비교하는 것도 꽤나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세계의 서술], 꼭들 보시라 ... 살아 펄떡이는 古典의 비릿한 내음을 맡으실테니.   

함께 볼 만한 책들로는 역시 가을비 선생의 [중국문화기행]을 먼저 꼽아본다. 원래 [중국문화답사기]로 나왔었다.  

 

 

 

 

 

 

마르코 폴로 말고도 중국 및 아시아로 향하는 기약없는 여행길에 올랐던 방랑자들이 있다. 그들의 여행기들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그 안에는 샘물들과 강과 잔디밭이 많다. 대카안은 그곳에 각종 짐승들, 즉 숫사슴과 영양과 노루 따위를 키워서 그곳 새장 안에 기르고 있는 해동청이나 매에게 먹이로 준다. 200마리 이상의 해동청이 있어 그는 매주 한 번씩 그것을 직접 보기 위해 새장을 찾는다. 그리고 대카안은 담으로 둘러싸인 이 정원에서 종종 말을 타고 다니는데, 말 엉덩이에 표범 하나를 묶어서 데리고 다니다가 생각이 나면 그놈을 풀어주어 숫사슴이나 영양이나 노루를 공격하게 한 뒤, 그것을 새장 안에 있는 해동청에게 먹이로 주곤 한다. 

 

200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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