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 상
마루야마 겐지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절판


풍성한 색감의 봄밤이 제 마음 가는 대로 한없이 펼쳐저 있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연둣빛 풀에는 넓고 큰 사랑이 담겨 있다.
광대한 유채꽃밭의 노란빛에는 쉽사리 발길을 돌릴 수 없는 유혹이 있다.
황야에 흩어져 핀 산벚꽃은 천차만별의 행복을 하나로 뭉뚱그리고 있다.-38쪽

긴지는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기막힌 밤을 누리고 있다.
이토록 치유력이 풍부한 밤을 독차지하는 행복한 사람이 과연 이 지구상에 몇이나 될까. 천국에도 뒤지지 않을 이런 아름다운 밤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행운아가 긴지 외에 또 있을까.
가늘게 빛나는 은하수는 바다와 들판 모두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달은 마음속의 구름을 맑게 거둬줄 만큼 비추고, 별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허식을 벗어던질 수 있게 도와준다.
살과 영혼에 더할 나위없이 부드럽게 엉겨드는 바람이 대지의 자전을 따라 살랑살랑 불어온다.
하얀 모래를 하염없이 닦아주는 파도 소리. 그 소리는 낡은 과거의 추억 속에 잠들었던 상큼한 일들만을 골라서 떠올리게 한다.
마음에 걸릴 일 하나 없는 이 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항상 먼 정신계와의 교감이 부쩍 가깝게 다가온다.-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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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 Graham의 저작 및 관련 논문을 번역한 [음양과 상관적 사유](이창일 옮김, 청계, 2001) Yin-Yang and the Nature of Correlative Thinking (Singapor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1986)를 읽었다. Disputers of TAO로 오래전부터 동양학도들에게 회자되던 유명 학자의 몇 안되는 국내 번역물 중의 하나인지라 당연히 읽어야겠다고 벼르고벼르다 이번에야 읽게 된 것인데, 책을 들고 있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독자들이 원문의 난해함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매끄러운 번역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지 못할 정도로 알쏭달쏭한 한국어(?) 문장들은 나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한국어의 문장 구조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기괴한 문장들이 "연속체"를 이루며 출몰하는데다, 조사의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기본적인 문법적 오류까지 더하여서 가히 악역의 대표 사례라 할 만 한 책이 탄생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편집 과정에서 조금만 신경 써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이건만, 편집에 있어서 역시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오,탈자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편집자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출판사는 제발 편집의 ABC도 모르는 사장이 편집까지 말아먹는 구질구질한 짓 좀 그만하고 제대로 된 편집인이나 고용하기 바란다. 그럴 능력이 안 되면 외주를 주든가... 그럴 능력마저 안 되면 편집을 좀 공부해서 구질구질한 짓이나마 깔끔하게, 티 안나게 하시길.     

영어권 번역가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근자에 참으로 보기 드문 이 악역 덩어리를 배짱 좋게 번역물이랍시고 내놓으신 번역자님도, 좋은 번역가의 자질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의 자신에게 그 자질이 있는지를 한 번쯤은 숙고하시고, 대학원 수업 듣다가 찔끔찔끔 늑장 부린 것을 무슨 자랑 마냥 늘어놓기 이전에 자신의 번역물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개정판을 내어 주시기 바란다.  

200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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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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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개인의 영혼 속에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혁명에 끝이 있다고 보인다면 진정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4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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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주커브의 소울스토리
게리 주커브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11월
절판


협동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놀이처럼 쉽다. 그것은 돈을 벌거나 대통령을 뽑거나 가족을 부양하는 등의 공동 목적을 갖고 그냥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외부적인 힘들이 공유하는 목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 그들의 목표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 목표를 달성하면 사람들은 다른 공동 목표를 찾거나 아니면 각자 다른 길을 간다.

하지만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협동은 놀이다. 사람들이 협동하는 이유는 ‘같이 있고 싶기 때문’이지 공동의 목표를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먼저고 목표는 그 다음이다.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할 일을 생각해낸다. 마치 아이들이 놀잇감을 생각해내듯이.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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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wo Worlds

 먼저 이 책 『빼앗긴 자들』(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02)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저자 르 귄은 갖가지 환경의 사람들의 사고와 문화를 치밀하게 가상하여 그려낸 일련의 작품들로 미국 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휴고 상, 네뷸러 상 등 기라성 같은 상을 휩쓴 과학 소설 작가이다. 이 책은 헤인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작품군의 한 권으로, 한 때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 시작하는 두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성 우라스(Urras).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으며 고도로 발달된 문명 체제를 가진 인종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문명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과 고혈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 터. 산업화된 소유 경제의 정점에 선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계속 긴장 상태와 전쟁을 반복하고 있다. 소유를 위한 지배욕은 사회 구조에도 반영되어, 남자는 여자를 억압하고 소유하고,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착취하고 부려먹는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어떤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비록 소설 속에 따로 ‘테라’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지구인들이 나오지만.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 풍족하게 갖춰진 우라스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행성 아나레스(Anarres)의 사람들, 즉 외부에서 주어진 체제와 억압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지배욕구가 이루어낸 구조 자체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그들은, 우라스에서 수용될 수 없었고, 이들은 결국 우라스의 형제 행성인 아나레스로 이주당한 것이다. 뭍짐승들마저 생존을 포기해버린 황량한 사막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들이 도착한 세계는 ‘온통 먼지투성이에 메마른 언덕뿐’(p. 317)인 곳이었다. 우라스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충분히 존재했던 공기, 풀, 비, 바다, 음식, 건물, 공장, 책, 음악 등의 모든 것이 결핍된 곳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원이 풍족한 고도화된 문명 상태(즉, 우라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형성된 자유인들의 억압받지 않는 연대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메마르고 헐벗은 적대적인 땅에서 먼저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따분하고 안락한 온실 속이 아니라,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유를 쟁취해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기관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는 차별성을 가진다. ‘국가의 신화를 밀어놓고서야 진정한 상호 관계와, 사회와 개인간의 상호 의존이 뚜렷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사회만이 안전과 안정성을 줄 수 있다고는 해도, 도덕적 선택의 힘, 생명의 필수기능인 변화의 힘을 지닌 것은 오로지 개개의 사람들뿐이기에.’(pp 458~459) 이러한 자유인들의 연대 속에서 ‘개인의 의무는 어떤 규칙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자신의 행동의 주체가 도는 것,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사회도 생동하고, 변화하고,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p. 494)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원칙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 협력이라는 하나의 원칙 외에는 어떤 법률도 없’고, ‘자유로운 유대라는 하나의 원칙 외에는 어떤 정부도 없’는 사회이다. ‘국가도, 국민도, 대통령도, 국무 총리도, 장관도, 장군도, 두목도, 은행가도, 지주도, 임금도, 적선도, 경찰도, 군인도, 전쟁도 없’다. 그들은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자들’이며, 유복하지 않고 강력하지도 않다. 오직 ‘고통 속에서, 굶주림 속에서, 가난 속에서, 희망 속에서’ 나눔의 의미를 깨닫고 그 속에서 형제애로 뭉친 것이다. 세계를 기본적으로 고통으로 인식하는 주인공 쉐벡의 세계관 속에서 서로에게 손을 뻗어 서로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pp 414~415에서 부분인용)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두 세계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주인공 쉐벡의 말을 들어보자: “당신네는 가졌고 우리는 가지지 못했소. 여긴 모든 게 아름답지. 얼굴들만 빼고. 아나레스에는 아무것도 아름다운 게 없어. 얼굴들을 빼면. … 우리에겐 그것밖에 없소, 오직 서로밖에. 여기 당신들은 보석을 보지만 거기서는 눈동자를 봐요. 그리고 그 눈속에서 장려함을, 인간 영혼의 장려함을 보는 거요. 우리의 남자와 여자들은 자유롭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유롭소. 그리고 당신들 소유자들은 소유당하지. 모두들 감옥 속에 있어. 각각이 외롭게, 고립되어, 소유하고 있는 쓰레기더미와 함께.”(p. 318)

 이런 정도의 모습이 춘추전국이라는 혼돈과 격동의 시대 속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깊이 통찰했던 한 현인이 말한 이상향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대의 복잡다기한 문명의 상황 속에서, 각종 사상의 실험이 이루어진 뒤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근사치는 되지 않을까 싶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모든 인위의 산물을 제거하고 남는 것은 평등의 땅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한 자유인들의 느슨한 연대가 될 것이기에. ‘小國寡民’을 끊임없는 동사적 상태로 볼 때 그 궁극에는 어떠한 국가의 조직도 거부하는 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 또한 당연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가지는 자율적이 개인만이 남을 수 있을 것이기에. (김용옥이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시경의 한 싯귀를 분석해가며 설파했던 里制論이 고대 중국의 이러한 소규모 공동체의 한 근사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노자의 사회상과 차이가 있다면 아나레스의 사회는 지방 분권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각각의 공동체는 필수적인 산물을 즉각 취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연스레 규모가 제한되어 있으나, 모든 공동체는 통신과 이동 수단으로 연결되어 원하는 곳에서 상품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노자가 이웃 마을간에도 서로 왕래가 없는 폐쇄적인 원시 자급자족 사회를 상정했다면, 아나레스는 서로의 연대와 소통을 최우선시하기에 황량한 자연환경 속에서 드문드문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공동체들이지만 도로와 통신의 연결이 마을의 건설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된다. 인간이 단순히 원시상태로 회귀할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런 상호 유기성을 가진 전체로서의 사회상이 더 생태계와 유사하고, 타당해 보인다. 그것이 ‘스스로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물론 아나레스 공동체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지, 관료기구, 지배자 등이 없는 평등한 것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지 않는 관료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p. 137)
 관료기구 대신에 인간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 자원배분 컴퓨터가 자원과 사람들을 배치하고, 누구나 뽑힐 수 있는 위원회에서 공동체의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지만, 그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이지 않는 권력의 집중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혁명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법률에 기초한 국가의 백성이 아니라 혁명에 근거한 사회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기에, 끊임없이 자체의 오류와 모순들을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은 개인의 영혼 속에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혁명에 끝이 있다고 보인다면 진정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p. 494 : 최초의 혁명가 오도의 말) 주인공은 바로 이런 아나레스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고, 투쟁해 나가고 있다. 또다른 혁명을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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