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각종 참고서적, 영어로는 Reference Book을 사계(斯界)에서는 흔히 공구서라 불러왔다. 전통적으로 소학(小學)이라 불리는 범주에 포함되는 문자학, 음운학 등의 서적들인데, [이아], [강희자전], [옥편], [사해], [사원], [설문해자], [동국정운], [홍무정운] 등이 다 이 범주에 속한다. 
 

 

 


 

 

 

 

 

 

나의 경우, 십여년 전에 장만한 동아 [새한한사전]을 (오자를 잡아가면서..) 아직까지 쓰고 있는데, 요즘의 새 사전들을 보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일단 [새한한사전]만 해도 중국어 발음 기호를 웨이드-자일 식에서 한어병음부호로 바꿔 [백년옥편]이란 이름으로 새 판이 나오지 않았겠나.

 



 

 

 

 

그 몇년 뒤에 나온 것이 민중서림의 [한한대자전]이 되겠다. 옛날에 일본 사전 그대로 세로쓰기로 나왔던 책을 요즘에 맞게 편집을 새로 한 것인데, 동아 사전보다 표제어는 약간 많았지만 들고 다니기에는 약간 무겁고, 그렇다고 집에 놔두고 보는 사전으로는 약간 모자라, 한마디로 좀 어중간한 사전이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였다.

 


 

 

 

 

 

 

 

 

 

 

 

 

 

그런데... 요즘 주변의 자문도 있고 해서 둘러보다 최근에 나온 [한자사전]을 보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였다. 일단 사이즈는 기존 [한한대자전]의 최대 단점인 휴대성을 보강하여 [백년옥편]보다 약간 작은 정도로 만들어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

표제자는, 물경(勿驚) 31000자라고 한다. [백년]이나 [대자전]보다 두배나 되는 글자수이다. 물론 이런 엄청난 표제자를 상재하기 위한 희생은 따르는 법. 대신 단어 설명 부분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즉, 오직 낱개의 글자 설명만 있는 전통적인 자전 체제로 돌아간 것이다. 뭐, 사실 단어 설명은 그리 활용도가 높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때 표제자를 위한 이 정도의 희생은 그닥 아쉬울 것은 없는 부분이다.

대신 기존 [대자전]에서 약했던 일본어 음과 훈이 대폭 보강되었고, 설문해자 등의 전통 공구서의 직접 인용이 많아 단어 이해에 매우 도움이 되었다. 설문해자를 바로 인용했다는 말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냥 영한사전이 아니고 영영한사전이라는 말 되겠다. 게다가 구하기가 약간 까다로운 설문해자나 기타 전통 공구서들이 인용의 형태로 들어 있으니 떡을 먹으라고 입앞에 대어주는 꼴이 아니겠는가.

아, 난 한동안 [한자사전]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꾸욱 참고 고색창연한 웨이드-자일식 영문 표기를 자랑하는 문제의 [새한한사전] 초판이나 뒤적이다, 거기에 안 나오는 한자는 서가 한 칸을 온통 차지한 [대한화사전]을 힘겹게 뒤적여야 할 것이다! 날로 학인들의 수요에 맞는 공구서가 출판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나, 때늦음은 한탄할 일이다.

 

200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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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 수도 있다. 처녀작으로 권위있는 문학상을 움켜쥐며 화려하게 등단한 신예작가도 가끔은 조야한 상상력에 기반한 별 볼일 없는 장르소설을 써내거나 -[오분후의 세계]- 거울을 보다 어느덧 내려앉은 세월의 더깨를 느끼며 '아, 나도 이제 중년이구나'라고, 길게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것일게다.

 

 

 

 

 

 

 



암으로 아내를 사별한 중년남성 아오야마 시게히루(靑山重治)가 문득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7년만에 드디어 재혼이란 것을 해볼 생각을 한다. 문제는 방법. 그는 친구 요시가와의 제의로 여배우 선발을 가장한 마누라 오디션을 꾸미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눈길을 끄는 제목의 전말이다. 오디션에서 만나 홀딱 반해버린 '묘령의 여인' 야마사키 아사미(山崎麻美)와 사귀게 되면서 인생의 봄이니 하는 것까지 다시 느끼게 되는 남자.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중년남성이여, 힘내라'류의 소설이다. 오디션을 통한 아내 구하기란 소재도 '예쁘고 머리 좋고 집안도 좋은, 고전적인 훈련을 쌓은 천사같은 여자 열명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모습을 상상'(p.30)하고픈, 남정네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환타지를 자극하는 그 무엇이 있다.



사귄지 몇달 만에야 드디어 둘만의 밀월 여행을 떠나는 그 남자, 그 여자. 하지만 날카로운 첫날밤의 추억을 끝으로 그녀는 사라지고 만다... 그 뒤의 결말이 문제인데, (아직 책을 읽지 아니한 분들을 위해 세세히 말하는 것은 삼가토록 하겠다) 결말 자체도 의외인데다 그것이 별다른 개연성 없이 갑작스레 전개되면서 독자를 몰입시키지 못하고 겉돌게 만들고 있다. 독자를 소설의 분위기에 빠져들게 할 수 있는, 여자의 행태를 설명해 주는 세부적인 심리묘사가 너무나 부족하다. 아니, 아예 전무하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어서 뜬금없기조차 하다.



소설의 전반부와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이러한 후반부의 뒷심 부족 때문에 소설은 작가가 말하는 '무서운 여자'를 형상화하지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깊이있게 탐색하지도, 사랑의 다른 면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로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류의 어정쩡한 일본식 괴담소설이 되어버렸다.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와 심리에 대한 통찰에 기반하여 야마사키 아사미의 트라우마를 좀더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였다면, 이 작품은 어쩌면 빼어난 문제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흥미나 자극하고 괴상하고 예측키 어려운 결말으로 독자를 놀라게 만들기나 하는 센세이셔날리즘에 그치는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말이다.

 

 

 

 

 

 

 

200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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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rror, the horror!

 

흔히 이 책은 실제로 기선의 선장으로 아프리카 콩고 강 유역을 거슬러 올라간 콘라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에서 수탈과 착취를 일삼고 있던 19세기 당시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책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수용되고 있다. 뭐 발표되었을 당시에야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의 눈으로는 그다지 대단한 제국주의 비판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에야 자신의 작품이 저항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제대로 이해될 수 있었다는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조심스레 참조하며, 일단 모든 형태의 단정을 피한 채로 이 작품을 해석하자.



소재의 면에서 이 작품은 말로가 상류의 주재소까지 배를 몰고 가 그곳의 커츠라는 사람을 찾아가고,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말로는 어릴 때부터 알지 못할 매력을 느껴왔던 오지에 가보고자 그곳에서 무역업을 하는 상사에 선장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주재소에 도착한 그는 상류로 올라가면 빼어난 상아 수집 실적을 자랑하는 커츠라는 인물을 만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배가 상류의 주재소에 다가갈수록, 말로는 주재소나 상아와 같은 목적보다 커츠만이 자신의 항해의 목적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주재소에서도 그는 커츠가 죽기 직전 며칠간만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기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만난 신화적 존재가, 주인공과의 짧은 해후만을 한 채 죽어버리는 것이다. 주인공 말로는 물론이거니와 커츠의 인물 됨됨이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소설을 읽어가던 독자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구성을 취한 이유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평상시에 말도 안 통하는 흑인 부족들도 따르게 하고 그 족장들마저 그 앞에서 설설 기게 만들었던 커츠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평소 천둥이나 번개처럼 원주민들의 위에 군림하며 상아를 긁어 모아왔던 커츠마저도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지 않았을까. 커츠 자신은 심지어 원주민들의 사교(邪敎)의식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혼을 맡기면서까지 모종의 것을 추구한다. 커츠가 추구했던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뭇 사람들을 휘어잡던 위대한 인간인 그 자신마저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로가 커츠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모종의 깨달음을 얻는 그 유명한 장면, 이 소설의 마지막 절정을 이루는 장면을 잠시 보자 : “마치 베일이 찢어지면서 어떤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 그 상앗빛 얼굴에서 나는 음침한 오만, 무자비한 권세, 겁먹은 공포, 그리고 치열하고 기약 없는 절망의 표정이 감도는 것을 보았거든.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한 순간에 ... 낮은 목소리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The horror! the horror!>”



말로는 자신은 말할 수 없던 삶의 최종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커츠의 모습, 그의 마지막 순간의 눈초리에서 모종의 깨달음, 곧 삶은 죽음과의 질 수 밖에 없는 다툼이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사실에 대한 정직한 직시를 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된 말로에게 더 이상 세상은 이전에 보던 세상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면서 “서로의 돈을 훔치거나, 그 맛없기로 악명높은 음식을 삼키거나, 건강에 해로운 맥주를 꿀꺽꿀꺽 삼키거나” 하며 삶의 진정성을 깨닫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그냥 낭비할 뿐이다. 이렇게 커츠의 죽음을 지켜본 말로에게 세상 사람들의 덧없고 의미없는 삶은 더욱 부각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차마 말할래야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검은 대륙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정신의 고양을 이끌어주는 한 인간을 만나고, 그의 죽음이란 절대적 사건을 겪으며 생의 비의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이기에, 마지막에 “명상에 잠긴 부처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말로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이렇게, 마지막에 묘사된, 커츠가 본 ‘무서움’의 실체와, 그것을 겪은 말로의 모종의 깨달음에 무게 중심을 옮기면 『암흑의 핵심』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장님처럼 모순에 가득찬 존재인 인간이 그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의식의 고양을 그리며, 그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묘사한 작품으로 파악하게 된다.

 

200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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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년소녀 문학전집 속에 끼여 있던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등을 몇 번씩 읽었던 기억이 있는 사람, 십여년 전의 TV시리즈 맥가이버에 열광했던 사람, 괜스레 일명 맥가이버 칼(스위스 육군용 칼)과 수도관용 테잎을 집구석에 보관하고 있는 사람, 잡지에 등산 용품 광고가 나오면 괜히 눈길이 머무는 사람, 어차피 출퇴근용으로 밖에 못 쓰면서 버젓이 4륜구동 SUV를 몰고다니는 사람, 도 닦는답시고 산중수도를 꿈꾸는 한의대생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현존 최고의 특수부대로 알려진 영국 SAS의 생존술 교범이다. 일상 용어에서 '그놈 완전 FM이야', 'FM대로 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FM, 즉 Field Manual이 되겠다. 군대라면 지긋지긋한데 왠 FM을 '민간' 출판사에서 찍어내고 난리냐고?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우리나라에까지 소개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21세기 역사의 서장을 장식한 저 911 테러 사건일 것이다. 이후 테러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미국의 서점가에서 불티나게 팔렸던 책이 바로 미 육군 생존술 교범 (FM 21-76 Survival) 과 영국 SAS 생존술 교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 육군 교범과 이 책을 비교해 보면 체재나 기본 개념은 대동소이 하지만 (심지어 삽화까지 똑같은 경우도 있었다) 다루는 내용의 방대함에 있어서 미 육군 교범은 이 책보다 많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SAS 교범의 다이제스트 판이라고 할까? 이는 물론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특수부대와 전 육군용 교범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등산이나 야영, 해외 오지 탐험 같은 실질적인 목적에 참고하는 것 말고 '생존술'을 쓰게 될 일이 얼마나 되겠냐만-차라리 생존술을 쓸 일이 안생기고 무사히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흥미 삼아 보는 입장에서는 다다익선.

이 책은 흥미삼아 읽기 시작하더라도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문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대자연 속에서 나홀로 떨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위에 열거한 사람들 말고도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것일 터. 이 책이 제시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궁리해보는 두뇌 운동은 상당한 즐거움을 준다.

한편으로 잠잘 곳, 식수 구하기,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한 채집술 및 사냥, 낚시의 각종 방법을 냉정하고 자세히 묘사하는 부분들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이런 섬뜩한 일들을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 전율의 너머에는 대자연의 힘 앞에서 나란 존재는 아직도 무력한 한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을 터이다.

사실 영국 SAS와 함께 즐겁고 신나는 모험의 세계에서 지적 대리 만족을 만끽하기 위해 펴들었다가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자연 앞에서의 겸허마저 배우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인간 실존의 덧없음이나 자연과의 합일 등을 떠들어 대는 어떤 철학책 보다도 더 절실하게 말이다. 아무 말 않기에 오히려 더 절실히 다가온 교훈이랄까.대상 : 소년소녀 문학전집 속에 끼여 있던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등을 몇 번씩 읽었던 기억이 있는 사람, 십여년 전의 TV시리즈 맥가이버에 열광했던 사람, 괜스레 일명 맥가이버 칼(스위스 육군용 칼)과 수도관용 테잎을 집구석에 보관하고 있는 사람, 잡지에 등산 용품 광고가 나오면 괜히 눈길이 머무는 사람, 어차피 출퇴근용으로 밖에 못 쓰면서 버젓이 4륜구동 SUV를 몰고다니는 사람, 도 닦는답시고 산중수도를 꿈꾸는 한의대생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현존 최고의 특수부대로 알려진 영국 SAS의 생존술 교범이다. 일상 용어에서 '그놈 완전 FM이야', 'FM대로 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FM, 즉 Field Manual이 되겠다. 군대라면 지긋지긋한데 왠 FM을 '민간' 출판사에서 찍어내고 난리냐고?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우리나라에까지 소개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21세기 역사의 서장을 장식한 저 911 테러 사건일 것이다. 이후 테러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미국의 서점가에서 불티나게 팔렸던 책이 바로 미 육군 생존술 교범 (FM 21-76 Survival) 과 영국 SAS 생존술 교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 육군 교범과 이 책을 비교해 보면 체재나 기본 개념은 대동소이 하지만 (심지어 삽화까지 똑같은 경우도 있었다) 다루는 내용의 방대함에 있어서 미 육군 교범은 이 책보다 많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SAS 교범의 다이제스트 판이라고 할까? 이는 물론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특수부대와 전 육군용 교범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등산이나 야영, 해외 오지 탐험 같은 실질적인 목적에 참고하는 것 말고 '생존술'을 쓰게 될 일이 얼마나 되겠냐만-차라리 생존술을 쓸 일이 안생기고 무사히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흥미 삼아 보는 입장에서는 다다익선.

이 책은 흥미삼아 읽기 시작하더라도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문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대자연 속에서 나홀로 떨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위에 열거한 사람들 말고도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것일 터. 이 책이 제시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궁리해보는 두뇌 운동은 상당한 즐거움을 준다.

한편으로 잠잘 곳, 식수 구하기,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한 채집술 및 사냥, 낚시의 각종 방법을 냉정하고 자세히 묘사하는 부분들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이런 섬뜩한 일들을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 전율의 너머에는 대자연의 힘 앞에서 나란 존재는 아직도 무력한 한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을 터이다.

사실 영국 SAS와 함께 즐겁고 신나는 모험의 세계에서 지적 대리 만족을 만끽하기 위해 펴들었다가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자연 앞에서의 겸허마저 배우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인간 실존의 덧없음이나 자연과의 합일 등을 떠들어 대는 어떤 철학책 보다도 더 절실하게 말이다. 아무 말 않기에 오히려 더 절실히 다가온 교훈이랄까.

 

 

200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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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우리 독서계에 불어닥쳤던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은 이제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정신적 시원을 찾자는 의미에서 무속 신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신화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너도나도 뛰어들어 책 한 두 권씩은 내었던 그리스 신화 붐의 학술적 기반은 너무도 허약했던 것이 숨겨진 현실이었다. 이 글을 쓰는 이 또한 학부 시절에 초급(!) 라틴어를 배웠단 이유로 고대 그리스-최소한 그리스어를 알아야 하는- 관련 서적의 교정을 맡아 보았던 황당한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번역자의 엄청난 오역에서 진을 빼다가, 하는 수 없이 (나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신) 어느 잔혹한 독서가를 찾아가 많은 지도를 받아가며 겨우 겨우 교정을 마무리했었는데, 참으로 고백하기 부끄러운 이 정도의 손질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사계의 현실이었다.

 

이 잔혹하리만치 꼼꼼한 독서가께서 드디어 사고를 한 건 치셨다. 서양 고대 문명을 다룬 각종 번역서의 오류와 오역을 세밀하게 지적하고, 원전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교정한 「잔혹한 책읽기」가 그것인데, 책을 읽다가 오자가 나오면 그걸 꼭 표시해 두거나, 심한 경우는 꼭 출판사에 전화해서 애꿎은 편집부 직원(그들이야말로 각종 사연을 가지고 출판사에 몸 담아, 박봉을 감수하며 출판 문화의 진작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문화의 파수꾼들이니, 너무 그들을 몰아세우지는 말자)을 붙잡고 세밀하게 일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책이다. 책 한 권이 온통 오역에 대한, 점잖지만 뼈아픈 지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여담이지만 저자의 문체는, 조용조용히 상대의 허를 찌르는 유럽식 위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한국어 문장의 한 가능성을 선보인다 하겠다. 절도 있지만 격렬함을 감춘 일합 속에 승부가 갈리는 펜싱 경기를 관점하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저자가 대표적인 부류이겠다.)

 

 

 

 

 

 

 

 

우리의 잔혹한 고전학자의 첫 저작은 서양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번역자들에 의해 반복 재생산 되는 각종 사항들을 지적하는 동시에, 옆에서 구경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 신화와 문화의 기초 지식을 차근차근 말해 주고 있어, 그 자체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오류의 염려가 없는-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직업으로서의 번역가를 꿈꾸는 이는 이 비정한 오역 사례집을 샅샅이 읽어 타산지석으로 삼는 동시에, 서양 고대 문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서적들의 개정 작업이 이루어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며,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번역서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 로마 문명에 관련된 책은 손을 안 대면 되지 않냐고? 심지어 기초 과학 및 의학 서적 등까지 포함해서, 그대가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번역이 가능한 서양 작품은 별로 없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 일이란 것이 어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직은 엉성한 우리네 출판계에서, 라틴어 좀 배웠다고 그리스 관련 서적을 출판해야 하는 일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캄캄한 황야를 헤매는 번역자들에게 아테네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200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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