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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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어떻게든 . . . 다 읽었다 ^^

2021년 3월 3일에 시작해 3월 22일에 마치다.  

​​읽는 내내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 . . 거의가 모르는 작품들 리뷰라 뒤로 갈수록 힘이 딸렸다. 

​​"옳든 그르든 간에 나는 따분하고 서툰 스타일은 곧 사고의 빈한함이나 불완전함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다윈의 정확하고 폭넓고 탁월한 지력은 그의 명료하고 강하고 활력 있는 글로 표현된다고 본다. 그 글의 아름다움이 곧 지성이다."(10쪽)

​르​ 귄이 찰스 다윈의 글에 대해 한 이 품평을 르 귄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겠다. 르 귄의 리뷰는 명료하고, 선명하고, 시원하고, 활력 있고, 무엇보다 지적이다. 나는 리뷰 읽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르 귄의 글은 그가 말한 좋은 서평의 정의를 따르게 한다. 그러니까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달려가게 만들고 디지털 세대에 맞게 온라인 매체에 터치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 주겠어! 라는 다부진 포부를 밝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르 귄 덕에 모르는 작가들을 정말로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다 읽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란 사람이 지금껏 왜 SF 장르를 밀쳐두고 살아왔는지 이 책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SF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르 귄은 똑부러지게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지루하다."(10)

그랬다. SF는 내게 지루했다. 그 지루함이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내게 그 장르를 이해할 만한 지적 토양이 없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단지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 달 았 다. 이 지점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아쉬우냐, 하면 뭐 그렇지는 않다. 세상 모든 분야의 책을 사랑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 아이의 엄마라는 직업과 작가라는 직업을 양립해 나가면서 어느 쪽도 희생시키지 않고 그 둘을 조화롭고 풍요롭게 일궈왔다는 작가의 내공에 감탄했다. 문학의 성차 문제를 서늘하고 날카롭고 시원하게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 의식과 용기에 박수 쳤다. 상상력이 글쓰기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 짓는 수단이라는 통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읽기는 "다른 누군가의 정신과 교감"(26쪽)하는 행위이고 문학은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27쪽)라는 저자의 견해에 깊이 공감했다. 돌아보면 일가친척 하나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서,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 등등의 무수한 근본 질문에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눠준 것이 책이었다. 책은 내게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에 대한 리뷰만으로 독자에게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르 귄의 글은 훌륭하다.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글보다 그 작가의 삶, 사라마구가 걸어온 길을 사랑하는 독자였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르 귄의 리뷰를 통해 주제 사라마구의 삶과 글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를 더욱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올해는 사라마구의 작품을 모조리 읽고, 아니아니, 이제 이런 무리수 공약은 난발하지 않으리^^, 몇 권 집에 들여다 놓고 그와 좀 더 친해지고 싶어졌다. 켄터 하루프도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을 읽은 후에 든 마지막 생각은 여기 수록된 책과 상관없이 어쨌거나 나는 르 귄 언니가 말한 대로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독자로 살다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면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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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23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독자로 살다 백세까지 장수를 !!
sf물은 영상부터 보시고 원작을 읽으신다면 재미 두배!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0   좋아요 2 | URL
백세!!! 무섭슴다. 저 숫자는 ㅋ 저는 sf 영화는 나름 잘 봐요. 신기해서요. ㅋ 책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이나, 르 귄과 웰스는 올해 도전해보려구요^^;;

미미 2021-03-23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축! 저 <어둠의왼손>사놨어요! 언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르귄 쌤 때문에 읽어보고싶은 SF늘고있음ㅋㅋ 고집스럽게, 저도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3   좋아요 2 | URL
축하 고마워요 미미님. 저는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먼저 읽으려구요. 지인이 <어둠의 왼손> 읽다 내려놨대요. 낯선 용어들로 가득해 난독을 겪었다고 해서. ㅋ 암튼 우린 올해 르귄 언니네로 놀러갑시다요~~~^^

라로 2021-03-23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리수 공약도 가끔은 필요한 거 같아요. 암튼 저보다 늦게 읽으시고 먼저 완독 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저도 그녀가 알려준 책 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중에 와이오밍의 카우보이가 30년 동안 말 안장 속에 넣고(넣고만 다닌 건지 읽은 건지는 모르지만,ㅎㅎ) 다녔다는 아이반호는 읽고 싶어요. 물론 우리 같이 읽기로 한 애트우드 여사의 책은 언젠가 읽어야죵??ㅋㅋ 읽을 책이 쓰나미로 몰려오니,,,이럴때일수록,,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책은 쌓아 놓아야 맛입니다요, 저는.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9   좋아요 1 | URL
라로님은 교차 읽는책이 원체 많잖아요. 저는 원래 한권만 파는 스타일이었는데. 알라딘 서재가 제 독서 습관을 바꿔 놓았어요. 우왕좌왕 중입니다요. ㅋ 라로님 저 애트우드 <시녀이야기> 시작했어요. 언제 완독할진 몰겠지만. ㅋ 근데 도덕적 혼란과는 딴판이라 더디 읽힙니다. 낯설어요 ㅡㅡ

희선 2021-03-24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소설 저도 별로 못 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어릴 때 본 영화 같은 게 거의 과학소설이 원작이더군요 그런 걸 나중에 알다니... 그렇다고 그걸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과학소설은 어렵지만 재미있는 것도 있더군요 얼마 안 보고 이렇게 말하다니... 저도 앞으로도 책 읽을까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거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0:02   좋아요 1 | URL
희선님이랑은 겹치는 책이 없는데 같이 읽음 것도 잼나겠어요.^^
 

슬프도록 야문 길

20210322 #시라는별 21 

조문(弔問)
- 안도현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아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묵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을 잠시 내려놓고 얼마 전 구입한 안도현 시인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펼쳐 들었다. 2008년 출간된 이 시집은 안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시인이 ‘내가 사랑하는 시‘라며 묶어 펴낸 시집 제목처럼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 물씬 느껴진다. 100편의 시들 중 오늘 내 마음에 쑤욱 들어온 시는 뒷집 할아버지의 죽음을 노래한 ‘조문(弔問)‘이었다.

안 시인에게 한 사람은 하나의 사람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돌아가시는 순간 ˝길도 돌아가시고˝ 만다. 그러나 앞사람의 발자취는 어디에나 남아 있는 법이고, 찾으려는 눈들에겐 언제고 발견되기 마련이다. 시인의 눈이 그런 눈이리라.

사람은 나서 짧든 길든, 좁든 넓든 길을 내며 산다. 조성배 할아버의 길은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을 만큼 길었고, 이 길 저 길과 엮여 넓어지기도 했다. 소매 걷어붙이고 마을 대소사 쫓아다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다 보니 할아버지는 어느새 ˝동네의 길이˝, 그것도 ˝슬프도록 야문 길˝이 되었다. 그런 분 떠나는 길에 문상조차 못한 것이 죄스러워 시인은 할아버지가 오르내리던 비탈을 바라본다. 오래오래.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은 아려서 
 나도 아프다.˝ (‘시인의 말‘ 중) 

안 시인이 올라탄 후회의 막차는 오래도록 남을 조문(弔問)의 궤적을 남겼다. ˝슬프도록 야문˝ 궤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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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22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비온뒤 말게 개인 하늘 !
진달래 꽃이 화알짝!
향기가 화면을 뚫고 나올것 같은
봄의 전령은 비를 내려 겨울내 잠든 생명들을 이렇게 하나둘씩 화려함을 뽐내게 만드네요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은 아려서
나도 아프다‘
맞습니다, 항상 후회 하면서 막차타기 일보 직전에 탑승해도 후회만 한가득 ㅜ.ㅜ
비탈길 무서워 하는 1人
행복한 책읽기님 사진속 비탈길 올라 가셨으리라 !!
월요일 한주 시작 행복한 책읽기님의 시로 시작합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03-22 18:37   좋아요 1 | URL
그죠. 어제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요. 대신 바람은 겁나 불었답니다. 산이 아니고 바다에 온 듯했어요. ㅋㅋ 저는 scott님 올려주는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하죠. 안도현님의 시로 scott님 한 주가 봄꽃들처럼 화사하기를요 ^^

미미 2021-03-22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의 후회의 막차는 오래도록 남을 조문의 궤적을 남겼다. 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항상 잘 보여주시네요! 오늘 도서관 가는데 시집도 한 권 담아와야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2 18:38   좋아요 2 | URL
ㅎㅎ 미미님 도서관 서가서 담아온 시집도 올려주시와요. 미미님이 어떤 시집을 골랐을지 궁금궁금^^
 

20210319 어떻게든!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면 서평 쓰기는 좋아한다. 서평을 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 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 그러나 악평을 쓰는 즐거움은, 저자에 대한 동료 의식이며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긴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 등 온갖 죄책감 탓에 우울해진다. . .(12)

현재 시점 5분의 4를 읽었다.
르 귄 언니의 저 말대로 이 책의 리뷰들은 대체로 터치하고 달려가게 만든다. 선명하고 명료한 리뷰의 정수를 맛보는 듯하다.

터치로 구입했다.
보르헤스 전집 3 #알렙
로베르토 볼라뇨의 #팽선생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

달려가 대출했다.
조지 맥도널드의 #공주와 고블린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 리뷰는 감동적이었다. 특히 다음 문장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격려사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옳긴 한 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 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 . . . 수많은 소설이 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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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19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주만화>가 눈에 확 들어와요. 컬러도 제목도!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37   좋아요 1 | URL
ㅋㅋ 구매는 했는데, 칼비노는 넘 어려워서 언제 읽을까 모르겠어요. 표지만 보고 므흣므흣할지도 몰겠어요.^^;;j

새파랑 2021-03-19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줄지어 있는책 보니 또 귀가 흔들리네요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38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요즘 정말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셔서 아주 귀감이 됩니다. 하루프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

scott 2021-03-19 2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주와 고블린 찜!ヾ(๑╹ꇴ◠๑)ノ”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39   좋아요 1 | URL
어머. AI scott님이 안 읽은 책도 있단 말입니까.^^;;;

라로 2021-03-19 21: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팽선생!ㅎㅎㅎ
암튼 저보다 먼저 끝내시겠군요. 저는 도서관에서 빌린 오디오북들 기간이 만료된다고 해서 그것들 듣냐고 책 못 읽었어요.ㅠㅠ 여기 인간들이 오디오북을 열심히 듣는지 아니면 빌려놓기만 하는 건지, 다시 빌리려면 대부분 8주 이상 걸리고, 어떤 건 거의 6개월 기다렸어요.끙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41   좋아요 1 | URL
네. 요 책은 담주 화욜 마감이에요. 같이 읽는 책이라서요. 라로님은 오디오북 정말 잘 들으신다요. 근데 오디오북도 대기가 있다구요? 오호. 여기 신세계인데, 저는 조금 늦게 합류하겠어라. ^^

희선 2021-03-2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 사고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군요 책을 보고 읽고 싶은 책이 생기는 건 좋은 듯합니다 그때는 한번 보고 싶다 생각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는데, 행복한책읽기 님은 사고 빌리기도 해서 다 보시겠군요


희선
 

20210318 #시라는별 20 

위령의 날 Zaduszki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회한을 맛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그보다는 나뭇잎에 묻는 축축한 얼룩을 털어내기 위해서다, 
그래야 잎새가 훨씬 아름답고 가벼워지니까. 

싸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그저 미약한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 
바람으로부터 그 흔들림을 막아주기 위해서다. 

공간은 더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전나무와 과꽃 장식으로 
보기 싫은 무덤으로 덮어버릴 테니까. 

그 순간 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 위로 공포가 아니라 적막이 내려앉을 테니. 
그것은 수많은 시도가 깃든 적막일 테니. 

여기서 시詩를 기다린 건 아니다; 
내가 온 건 
찾아내고,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서다. ​


​쉼보르스카가 타이프라이터로 남긴 원고에는 <위령의 날>을 쓴 해가 1946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쉼보르스카가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세계 각국의 출판사들이 그의 시를 번역, 출판하기 위해 저작권을 요청했을 때의 일이다. 쉼보르스카는 출판사들에게 한 가지 전제 조건만 지켜 준다면 자신의 시집을 출판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조건이란 1950년대 전반기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번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난 호에 말했듯이 쉼보르스카는 젊은 시절 자신이 쓴 시들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집 <<검은 노래>> 에 수록된 시들 중 미발간 원고들은 1950년 이전에 쓰인 것들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사회주의 사상 검열을 자기 검열하기 전이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열린 날이었다. 당시 쉼보르스카는 열여섯 살이었다. 사춘기 소녀 쉼보르스카는 창문으로 붕대를 감은 채 피 흘리는 부상병들이 짐수레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은 소녀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46년 쉼보르스카는 그날의 기억을 토대로 <9월에 관한 기억>이란 시를 썼다.

<위령의 날>은 쉼보르스카의 미발간 작품들 중 내 마음에 가장 스며든 시다.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고, 쓰고 있는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위령(慰靈)‘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함‘이다. 쉼보르스카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름 모를 전사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짐과 동시에 그 일로 상처 입고 아픔을 겪어야 했던 자신의 마음까지 위무한다.

여기서 시詩를 기다린 건 아니다; ​​
내가 온 건
찾아내고,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서다. ​

쉼보르스카는 시詩를 기다리지 않고 시詩를 썼다. 그에게 시는 절대 놓지 말아야 하는, 살게 하는 동아줄이었다. 어둠 속 빛이었다. 그랬기에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썼다. 묵묵히, 꾸준히 말이다. 에밀리 디킨슨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쉼보르스카를 검색해 보던 중 2018년 봄날의책 출판사에서 출간된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를 발견했다. 기쁘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
<아버지의 여행가방>에서도 쉼보르스카를 발견했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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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8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詩를 기다리지 않고 시詩를 썼다.

국가는 다르지만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도 모든이들이 구타 당하고 피를 흘리고 끌려가고 두번다시 살아돌아오지 못하는 시대에 시어가 자신에게 다가오기전에 간절하게 시대를 기억하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영혼을 애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를 썼데요.

죽음의 광풍속에서도 시를 포기 하지 않고 쓴 쉼보르스카,
역사속에 사라져버렸던 영혼들이 쉼보르스카 시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는것 같습니다.

행복한 책읽기님이 올려주신
위령의 날 시

전부 암보 할거 임 (*๓´╰╯`๓)ㅡ❥


행복한책읽기 2021-03-18 14:42   좋아요 1 | URL
안나 아흐마토바. scott님은 대체 뭘 모르심?? ㅋㅋ 고마워요. 저는 작년에 코로나와 나이로 우울감, 허무감이 화악! 파도처럼 덮쳐 오더라구요. 좀 무서웠어요. 저 원래 밝고 씩씩한 사람이거든요. ㅋㅋ 그래서 책꽂이 한 자리서 먼지 뽀얗게 쌓여 가던 시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어요.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음요.^^ 안나 아흐마토바 시집은 품절이군요. 도서관을 뒤적여보겠슴다요. scott님 덕에 모르던 시인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그런데, 암보가 가능하단 말입니까. 진정?? scott님 목소리가 들려주는 쉼보르스카 시. 넘 멋지겠어요.^^
 
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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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와 함께 어른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는 책. 책을 통한 교사와 소년원 소년들의 만남은 진정 뭉클하다. 예쁜 표지를 어루만지는 소년들의 등은 순하다. 너희들도 귀한 존재야, 그러니 환대 받아도 돼, 라고 몸으로 말하는 어른으로 더 살고 싶어졌다. 용기를 내준 저자에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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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7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소년들을 만났던 사계절을 담고 있네요.
정말 이책은 어른들 부모님들이 읽어야 함!!

행복한책읽기 2021-03-17 18:03   좋아요 1 | URL
많이 읽었음 좋겠어요. 소년들도 독방에 가두는 것이. 벌칙의 상상력이 이곳에도 필요해 보였어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