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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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1

《이 폐허를 응시하라》 리베카 솔닛/정해영/펜타그램(2012)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

나는 리베카 솔닛의 애독자다. 내 책꽂이 한 칸의 한 귀퉁이는 솔닛의 책들로 채워져 있다. 애독자라지만 완독한 책은 한 권뿐이다. 솔닛의 책들은 그저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준다. 그리고 태평양 건너 아주 멀리 사는 그녀를 가까운 존재로 느끼게 해준다. 그것이 작가가 가진 힘일 것이다.

솔닛 본인이 뽑는 듯한 제목들에는 일관된 맥락이 있다. 역설이다. 《멀고도 가까운》, 《어둠 속의 희망》, 《길 잃기 안내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ansplain》, 그리고 오늘 얘기하려는 《이 폐허를 응시하라 A Paradise Built in Hell: The
Extraordinary Communities》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16년 6월이다. <<멀고도 가까운>>에서 저자가 풀어내는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가랑비처럼 나를 적셨다. 그래서 내쳐 읽은 것이 이 책이었다. 4분의 1정도 읽다 도서관에 반납하며 언젠가 다시 읽을 날을 기약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한 후 그 기세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라디오프로며 팟캣이며 여기저기서 이 책이 자주 거론되었다. 기억의 소환. 이번에는 알라딘 중고로 책을
구매했다.

표지 디자인을 보라. 지진이 일어났는지 땅이 쩍쩍 갈라져 있다. 처참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땅 끝에 서 있는 높고낮은 건물들은 금 간 데 없이 멀쩡히 서 있다.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 리베카 솔닛이 말하려는 천국은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고 정신적 고통이 사라진 천국이 아니다.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혹은 유토피아)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이다.˝(13)​

사실 솔닛이 그리는 재난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인간이 어디 그리 선하던가. 물론 솔닛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많은 것이 파괴돼 아무것도 피어나지 못할 것 같은 폐허 속에서도 새싹 하나가 단단한 바닥을 뚫고 올라와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역사성이다. 그녀는 재난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다섯 가지의 사례를 통해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와 깊이 있는 통찰로 풀어나간다.

내가 솔닛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느 독자가 얘기했듯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통념의 벽에 구멍을 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은 머리와 가슴에 동시에 망치질을 한다. 정신이 번쩍 들고 지성이 반짝 켜진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기 전에 완독할 수 있을 것 같다. 재앙의 형태는 다르지만 코로나 19와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의 반응에 대해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재난에 대한 반응은 어느 정도는 우리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 언론인은 장군과 다른 의무를 지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우리 믿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윌리엄 제임스(실용주의 철학자. 헨리 제임스의 형)의 철학의 주된 관심은 진실이 무엇인가보다 어떤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이다. 즉, 믿음이 어떻게 세계를 형성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임스는 많은 것을 믿고 많은 것을 생각했으며, 지진이 그의 생각에 연료를 공급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지진은 그가 생각해온 많은 것들에 영향을 끼쳤다.˝ (82)

우리 각자는 현재의 재난에 어떤 믿음으로 어떤 대응을 하며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묻고 답하는 책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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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개정판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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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이후(2002)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에세이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은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2008년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궁리)를 읽고 나는 이분의 철학과 걸어온 길에 감탄하며 속으로, 내 멋대로 ‘내 인생의 스승‘ 같은 존재로 삼아버렸다. 1922년에
태어난 하워드 진은 2010년 1월 27일에 생을 마감했다. 향년 87세. 심장마비였다. 그의 부고 기사를 신문에서 접하고 나는 또 속으로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더 나은 세상, 더 평등한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많은 책을 쓰고 많은 일을 해준 것에 감사하면서.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하면서.

그러나 내가 읽은 이 저자의 책은 단 두 권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교육을 말하다>>로부터 4년 뒤인 2012년에 읽었다. 나는 내 책꽂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이 두 책을 나란히 세워놓고 내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아야지 생각했다.

표지를 보면 노학자의 앞모습과 뒷모습의 사진이 찍혀 있다. 다르게 보기. 사물도 사람도 세상도 어떤 방향에서,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될 수 있다. 표지 디자인이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책에서 저자는 ˝인류의 잔인한 행위들에 대한 관례적인 나열과는 다른 역사 읽기˝(10)를 시도한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몇몇은 이 은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어떤 학생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미를 자세히 분석해 보기까지 했다. 다른 학생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챘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마한다는 사실을.˝(16)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무릎을 쳤다. 객관성이라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언론이 객관성이라는 허울 아래 내놓는 팩트 체크들. 그러나 팩트는 선별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객관성에서 멀어진다. 선별에는 고른 자의 주관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기에 저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인지한 세상을 객관성으로 치장하지 않고 소외된 이들의 입장에서 편파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역사들도 다 사실들이다. 다만 물 속 깊이 감춰져 있던 그 사실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만 천하에 알렸을 뿐이다.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잔혹함의 역사가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우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최악의 것들만 본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 . /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행동을 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가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는 현재들의 무한한 연속이며,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현재를 산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승리가 될 수 있다.˝(289)

그는 자신의 저 말대로 한평생을 살다갔다. 내가 이분을 더욱 존경하게 된 일화가 있다. 부산에 있는 청소년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의 청년들이 2009년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 대학 연구실로 날아가 하워드 진과 긴 인터뷰를 했다. 평생을 사회정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며 저항하고 투쟁해온 이 분에게 젊은이들이 꼭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 분이 한 대답은 자유니,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 가치는 ˝Kindness(친절함)˝였다고.

하나의 죽음을 놓고 얼마나 많은 설왕설래가 이어지는지. 죽음도 이후의 분분함도 그저 참담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자고, 관대하자고
한 이 분의 말씀이 더욱 생각났다. 따스함이 결여된 비판은 보편성과 지속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은 201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표지 디자인이 노학자의 주름진 얼굴 캐리커처로 바뀌었다.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사람과 세상을 향한 이분의 선한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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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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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09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사회학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쓰다  / 기시 마사히코/ 김경원 옮김/ 이마(2016)

올해 <<진리의 발견>> 다음으로 애장하게 될 것 같은 책이다. 표지 사진은 어느 건물의 일부이다. 제목을 따라가자면 저 표지에서 어떤 사회를 그릴 수 있을까. 대도시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고 2,3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지는 않는 소도시일까.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사회학자이다. 좀 남다른 사회학자이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활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 . / 통계 데이터를 활용하거나 역사적 자료를 뒤적이거나 사회학적 이론 틀로 분석하는 것이 내가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일은 분석할 수 없는 것, 그냥 그곳에 있는 것, 색이 바래서 잊혀 사라지는것이다.˝ (머리말)

​평론가와 해석이 난무하는 시대에 저자는 제삼자인 인터뷰어가 남의 인생을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 것이냐고 자문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사회학
이론이나 자신의 협소한 판단으로 재단하지 말고 삶 그 자체, 사람 그 자체를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대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이런 견해에 적극 공감한다. 내가 내 어미를 존중하게 된 계기도, 그녀가 삶을 근사하게 살아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숱한 역경과 절망과 허무함의 늪에서도 그 늪을 어떻게든 빠져나와 살아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게 찾아든 감정은 ‘연민‘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정보가 난무하지도 난해한 문구가 가득하지도 않은 대신, 이 책은 사람 이야기와 저자의 ‘사색‘으로 넘실거린다. 시를 읊듯 조근조근 풀어나가는
저자의 사색은 마음의 눈과 귀를 활짝활짝 열어준다. 이따금 입가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아, 그래, 나도 이런 생각했는데, 난 왜 이렇게 근사하게 말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질투감이 동시에 든다. 가령 이런 생각,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이를테면 행복을 믿은 탓에 행복에서 길을 벗어나 버렸을 때는 이미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경우가 있다.˝(108)
˝우리는 고독하다. 뇌 속에서는, 우리는 특히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뇌 속에까지 놀러와 주지는 않는다.˝(132)

애장하고 싶은 만큼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우리는 해석, 혹은 평론이란 미명 하에 누군가를 깎아내린다. 아니면 비방, 억측, 침소봉대로 누군가를 죽여버린다. 말이 칼이 되고 있는 세상. 이 책은 그대들, 제발, 쫌, 그러지 말라고 조용히 질책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나의 이런
해석(^^)에 뜨아해할지도 모르지만.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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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 노승영 옮김/ 사월의 책(2015)

나는 전업주부로 살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삶이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상황상 3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살림과 양육은 해도 티가 안 나는 데 비해 안 하면 티가 엄청 난다. 대단한 일은 별로 없지만 자질구레하게 손가는 일이 정말 많다. 전업주부가 하는 일은 다른 집에서 하면 비정규직 노동이지만 자기 집에서 하면 무료봉사다. 들여다볼수록 부당한 면이 많아 보이는 전업주부. 그런 의문들 덕에 눈에 띈 책이 <<그림자 노동>>이다.

표지 그림 속 여인은 단정한 올림머리에 검정색 옷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찻잔과 접시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다. 아마도 가장인 남편에게 줄 간식처럼 보인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말한다. ˝그림자 경제의 출현에서 내가 주시하는 점은, 임금으로 보상받지도 못하고 시장으로부터 가계의 독립성을 지키는 데 기여하지도 않는 노역 형태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새로운 비자급적 가내 공간에서 주부가 행하는 그림자 노동이 좋은 예다. 이 새로운 종류의 활동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임금 취득자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그림자 노동은 근대의 임금 노동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이지만, 노동집약적 상품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자면 그림자 노동이 임금 노동보다 훨씬 근본적일 것이다.˝(9)

글이 쉽지 않다. 주부의 노동만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림자 경제‘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저자가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쳐 강연했던 원고들을 묶었다. 총 다섯 편이고 <그림자 노동>은 마지막 편이다. 이반 일리치의 글은 곱씹고 또 곱씹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어 자꾸 밀쳐두게 된다. 그러다 다시 머리말을 읽고, ‘이반 일리치 전집을 펴내며‘라는 편집부의 글도 읽었다. 어려운데 재밌다. 찬찬히, 거북이 걸음으로, 산책하듯, 읽어나갈 생각이다.

˝상품의 끝없는 생산 및 소비에 의존하는 경제 성장은 필연적으로 역생산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난의 현대화, 근본적 독점, 역생산성은 이반 일리치가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귀중한 통찰입니다.˝(사월의 책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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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0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자 노동.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감정노동하고는 또다른 영역인 것 같네요.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행복한책읽기 2020-11-06 23:08   좋아요 0 | URL
이반 일리치님 글은 읽기 쉽지 않지만 현실 인식. 사고 확장을 도와줘요. 저는 계속 읽어보려고 하는 작가 중 한명이에요. 그림자노동은 그나마 접근성 용이한 책이에요^^
 

2020710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케이틀린 도티/ 임희근 옮김/ 밤비(2020) ​

밤새 잠을 설쳤다.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인데, 많은 꿈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덟 살 소녀가 있었다. 쇼핑몰에 놀러갔다가 한 어린아이의 추락사를 목격한 후 죽음이란 무엇일까에 천착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소녀는 화장터 업체에 취직해 날마다 수십 구의 시신을 대면하며 죽음도 산업화되는 사회를 목도한다. 이 책은 6년간 장의업계에서 일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표지 그림. 관인지 무덤인지 같은 곳에 인간의 해골이 놓여 있다. 해골 머리 위에 그려진 나뭇잎들이 멀리서 보면 새들 같다. 땅에 묶여 있던 인간은 몸뚱이 부셔져서야 훨훨 날 수 있다. 표지 그림을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바니타스(덧없음, 무상함).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장 2절)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죽음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시신을 강철 문 뒤에 두고,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병실에 몰아넣는다. 죽음을 너무나 잘 숨기는 바람에, 우리가 죽지 않는 첫 세대라고 거의 믿어도 될 지경이 되었다.˝(저자의 말)

묵직한 주제와 달리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유쾌한 쪽에 가깝다. 유쾌하나 가볍지는 않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없는 듯, 모르는 듯 외면하는 죽음 자체에 대해,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세밀하, 생생하게, 심지어 감동적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부패나 해체는 우리의 죽음 방식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현대의 시신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방부제로 처리한 다음 매장하는 것, 그러면 부패는 영원불멸로 가는 도중에(아니면 적어도 시체가 뻣뻣해지거나 미라처럼 오그라들기 시작할 때까지) 잠시 지나치는 과정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사체를 재와 먼지로 변하게 하는 화장이 있다. 화장이나 매장이나 둘 다 인간이 해체되는 과정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226)˝

​지금의 장례 문화가 죽음의 의식을 치르는 게 아니라 ˝죽음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183)이라는 의견, 공감이 많이 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사뮈엘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다.˝ 그 말은 여자는 ˝아기를 낳을 때마다 한 생을 창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도 했다˝(245) 그러니까 우리가 얻은 삶에는 죽음이 담보되어 있다. 반백년을 살고 보니(어느새) 죽음이 훌쩍 가깝게 느껴진다.

날마다 누군가가 죽는다. 귀하게 태어난 것처럼 귀하게 죽기를 바란다. 누구나 그런 행운을 거머쥐진 못하지만. 한 번도 손 잡아 본 적 없지만 손 잡아 본 것처럼 느꼈던 사람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 분이 홀로 걸어간 그 길이 가슴을 저미게 했다. 그래서 꺼내 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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