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5 아. 백기완 선생님.

거리의 투사. 민중의 친구. 통일 운동가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선생님은 1932년에 태어나셨다. 향년 89세. 삼세대를 살다 가셨다. 나는 선생님이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을 때 연설 듣겠다고 쫓아다닌 기억이 가장 크게 남는다. 1%의 득표율에 눈물 흘린 기억도. 나는 그때 어렸고 목소리 높이면 세상이 쉽게 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잘 몰라 그렇지 백기완 선생님은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하셨다.

그곳은 남북이 하나된 세상이면 좋겠다.
그곳은 차별 없는 평등 세상이면 좋겠다.
그곳은 웃음 가득한 세상이면 좋겠다.
그렇겠지.

선생님.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https://youtu.be/PI6NA3L62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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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시라는별 11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 The Negro Speaks Of Rivers​
- 랭스턴 휴스 Langston Hughes​
                                 
​나는 강들을 알지:
이 세상만큼 오래되었고 인간의 혈관에 흐르는 피보다 더 오래된 강들을 나는 알지.

내 영혼은 강처럼 점점 깊어졌지. 

동이 틀 무렵 나는 유프라테스강에서 목욕을 했지,
콩고강 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지. 
나는 나일강을 바라보며 그 위로 피라미드를 올렸지. 
에이브러햄 링컨이 뉴올리언스로 내려왔을 때  
​미시시피강이 부르던 노랫소리를 들었고, 
​강의 진흙 가슴이 황혼의 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지. 

나는 강들을 알지:
고대의, 거무스름한 강들을. 

내 영혼은 강처럼 점점 깊어졌지. ​

The Negro Speaks Of Rivers
- Langston Hughes

​​​I‘ve known rivers:
I‘ve known rivers ancient as the world and older than the
flow of human blood in human veins.

My soul has grown deep like the rivers.

I bathed in the Euphrates when dawns were young.
I built my hut near the Congo and it lulled me to sleep.
I looked upon the Nile and raised the pyramids above it.
I heard the singing of the Mississippi when Abe Lincoln
went down to New Orleans, and I‘ve seen its muddy
bosom turn all golden in the sunset.

I‘ve known rivers:
Ancient, dusky rivers.

My soul has grown deep like the rivers.


​1920년 여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덟 살의 랭스턴 휴스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멕시코행 기차를 탔다.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닐 수 있는 학비를 아버지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휴스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싫어하지 않았을뿐더러 흑인들을 좋아했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는 이상하리만치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했다. 휴스는 그 이유가 늘 궁금했다. 기차가 세인트루이스 근처에서
석양에 물들어가는 미시피 강을 건너가고 있을 때였다. 휴스의 머릿속으로 흑인들의 과거와 연관이 있는 아프리카의 콩고강과 나일강, 남북전쟁과 관련 있는 미시시피강과 노예 해방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온 링컨 대통령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는 펜을 꺼내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갔다. 그 글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분 안팎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The Negro Speaks Of Rivers‘ 라는 시이다.

고작 열여덟의 나이에 유장하게 흐르는 강을 바라보다 고대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국 흑인의 역사를 한 편의 짧은 시에 담아 내다니, 훗날 ‘흑인 문학의 외교관‘이자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릴 만한 싹수를 간직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휴스는 이 시를 백인 사회에 대한 강경한 투쟁적 입장을 보였던 듀보이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바쳤다.˝고 한다.(#랭스턴 휴스 / 현대문학 /옮긴이의 말 중). 

휴스의 저 시는 현대문학에도 실려 있으나 번역문을 그대로 싣지 않고 내맘대로 고쳤다. 제목 역시 ‘흑인이 강을 말하다‘보다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 쪽이 작가의 의도에 더 부합된다고 판단돼(역시 자의적 해석이다) 그렇게 옮겼다.

이 작가를 더 알고 싶어 책을 검색하다 실천문학사에서 1994년 출간된 <<랭스턴 휴즈>> 전기를 발견했다. 품절 도서라 중고로 구입했다. 이 책은 내게로 오는 중이고, 현대문학 휴스 단편선 대출 도서는 내 수중에 있다. 서사가 있는 페미니즘 글을 곧잘 쓰는 작가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에는 휴스의 시 ‘꿈‘이 실려 있다. 이 책은 구입을 목하 고민 중이다. ​​그나저나 휴스, 휴즈, 어느 쪽이 맞는 표기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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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5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Dreams ~ Langston Hughes

Hold fast to dreams
For if dreams die
Life is a broken-winged bird
That cannot fly.

Hold fast to dreams
For when dreams go
Life is a barren field
Frozen with snow.
꿈을 재빨리 잡아라.
꿈이 없으면
인생은 날개 없는 새가 되어
결코 날지 못하리.


꿈을 재빨리 잡아라.
꿈이 사라지면
인생은 눈으로 얼어붙은
황량한 들판만 남으리

-꿈 ~ 랭스턴 휴즈

행복한 책읽기님 월요일 활기찬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2-15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scott 님 고마워요. 님 덕에 랭스턴 휴스를 알게 됐어요. 천천히 좀 더 깊이 그를 알아가보려구요. 근데 scott님은 모르는 작가가 손에 꼽힐 듯요 ㅋ 이번 한 주도 잘살아 보아요~~~^^

초딩 2021-02-15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영시 좋네요~~~ dusky 가 문장에서 써인거 올만에 봤어요 ㅎㅎㅎ 멘날 아이티 영어만 가끔 봐서요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2-15 22:24   좋아요 2 | URL
그죠. 휴스 시는 대체로 길이가 길지 않고 쉬운 언어로 쓰여 있는 듯해요. 난해한 말은 가라!! 머 이러는 것 같은 ㅋ
근데 초딩님 아이티 살아요?? 아이티 영어만 보시다니오??? 😲😲😲

초딩 2021-02-15 23:16   좋아요 1 | URL
집에 오니 생일 그리고 축복이 왔어요~~~~
생각보다 두툼해서 또 좋았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나!!
아 영시라니~~~ 아주 좋습니다

초딩 2021-02-15 23:17   좋아요 1 | URL
아 IT....

ㅎㅎㅎ 농담에 진담으로 받은거 같지만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2-15 23:20   좋아요 2 | URL
ㅋㅋㅋ IT 럴수럴수. 제가 시대를 못읽는군요^^;;; 시도 좋구요. 장샘이 글도 말랑말랑 따끈따끈하게 쓰신답니다. 훈훈해지실 거예요^^

scott 2021-02-16 10:07   좋아요 1 | URL
ㅋㅋ초딩님과 행복한 책읽기님
아이티 영어 ㅋㅋㅋ
It
킹선생 소설이리고 생각한 1人

희선 2021-02-16 01: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여덟살에 저런 시를 썼군요 저는 그때는 책 같은 건 읽지도 않았습니다 교과서나 봤네요 책을 몰라서... 교과서도 잘 본 건 아니군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2-16 01:57   좋아요 3 | URL
ㅋㅋㅋ 희선님 요 댓글 웃겼음요. 지두 열여덟에 비슷했습니다요.^^ 잘 자요~~~^^
 

20210210 #시라는별 10

어머니가 아들에게 
- 랭스턴 휴스 Langston Hughes

아들아, 내 말 좀 들어보렴.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다. 
거기엔 압정도 널려 있고 
나무 가시들과 부러진 널빤지 조각들,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도 많은 
맨바닥이었단다. 
그렇지만 쉬지 않고 
열심히 올라왔다. 
층계참에 다다르면 
모퉁이 돌아가며 
때로는 불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을 갔다. 
그러니 얘야, 절대 돌아서지 말아라. 
사는 게 좀 어렵다고 
층계에 주저앉지 말아라. 
여기서 넘어서지 말아라. 
얘야, 난 지금도 가고 있단다. 
아직도 올라가고 있단다.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는데도. 

Mother to Son 

Well, son, I‘ll tell you:
Life for me ain‘t been no crystal stair, 
It‘s had tracks in it, 
And splinters, 
And boards torn up, 
And places with no carpet on the floor. 
Bare. 
But all the time 
I‘se been a-climbin‘ on, 
And reachin‘ landin‘s, 
And turnin‘ corners, 
And sometimes goin‘in the dark 
Where there ain‘t been no light. 
So, boy, don‘t you turn back. 
Don‘t you set down on the steps. 
‘Cause you finds it‘s kinder hard. 
Don‘t you fall nowㅡ
For I‘se still goin‘, honey, 
I‘se still climbin‘, 
And life for me ain‘t been no crystal stair. 

얼만 전 scott님이 올린 페이퍼에서 랭스턴 휴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흥미가 당겨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단편선을 상호대차 신청했다. 책은 아직 받지 못했다. 이성복 시집을 내려놓고 파시클에서 출간된 에밀리 디킨슨 시집을 다시 펼쳤다. 읽다가 장영희 선생님이 디킨슨의 또 어떤 시를 번역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망할!) <<생일 그리고 축복>> 의 목차를 읽어 내려가는데 . . . 눈에 딱 띈 이름. 랭 스 턴 휴 스
!!!! 뭥미? 이 시집에 랭스턴 휴스도 있었음? 그랬던 거임? 오 마이 갓. 이 시집을 꼼꼼히 읽지 않았으니 이름도 모르는 휴스의 시는 읽지 않았던 것 같고, 설령 읽었다 해도 기억을 못할 작가이자 제목이었다. 꺼이~~~~ 이제는 기억하겠노라.

​랭스턴 휴스는 1902년에 태어나 1967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등학교 시절 사회주의자들이 발행하는 잡지에서 흑인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당대의 진보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던 문학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를 처음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만든 시는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
The Negro Speaks of Rivers‘였다고. ‘흑인 문학의 외교관‘이자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렸다는 이 시인의 삶과 글 세계를 들여다보아야겠다. 그런데 흑인 민중의 시인으로 유명한 휴스의 시집이 국내에는 왜 출간되지 않았을까?

위의 저 시는 아들이 좀 더 크면 들려주고 싶다. 설명이 불필요한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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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10 0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핸드폰으로 찍으신 건가요? 야경이 제법 잘 잡히네요!
스콧님의 영향력♡ 저는 바그너 책 찜해놨어요!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2-10 09:49   좋아요 2 | URL
ㅋㅋ 글게 말여요. scott님 사람 잡아요. 이것저것 자꾸 파게 만드네요.^^ 지는 좋은 사진기 들고 다닐 팔힘이 없어 늘 핸폰으로만~~~^^

초딩 2021-02-10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시 너무 좋네요~ 써서 벽에 걸어둘까봐요~
혹시 두 시집이
영문과 한글이 같이 있나요?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2-10 10:31   좋아요 1 | URL
넹. 같이 있어요. 장영희샘 저 책 아주 좋아요. 영미시 아는 척하기 딱 좋은 ㅋㅋ 번역도 훌륭하답니다 ^^

초딩 2021-02-10 10:59   좋아요 1 | URL
바로 주문했습니다~ 미리 보기로도 좀 봤는데 좋네요 ㅎㅎㅎ

초딩 2021-02-10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야경~
인위적으로 밝게 하는 것 보다 이렇게 어두운건 어둡게 나오는게 좋은거 같아요~ 보고 있으니 왠지 시원하네요~

scott 2021-02-10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배병우 사진작가보다 흑백에 조화 비율이 잘묘하게 포착하신 행복한 책읽기님! 사진은 명品 이시 저는 캘리그라피로 써서 안국동(전문가에게 맡김 ㅋㅋㅋ) 인사동에서 액자 맟줌 제작해서 벽에 단단히 박아둠 ^.~(현대문학 랭스턴에 이시가 들어있는지 확인을 안해봤어요알라딘에서 검색되는 번역서가 이책뿐이여서 제가 갖고 있는것과 달라서 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2-10 10:36   좋아요 1 | URL
역쉬 명불허전 갓 scott님. 액자까지. 지두 그럼 딸아들 독립할때 액자 만들어 줘야겠음요. 현대문학 책 오늘 받을건데 지가 확인해볼게요~~^^ 랭스턴 휴스를 만나게 해준 스콧님 또 감사~~~^^

희선 2021-02-11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사람 시가 한두편이면 그거 기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이제라도 《생일 그리고 축복》에 랭스턴 휴즈 시가 실린 걸 알게 돼서 좋은 거지요

행복한책읽기 님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명절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2-11 01:14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복된 한 해 되시길요. 이달의 리뷰 축하드려요. 매번 되시는듯. 짱!!!^^

scott 2021-02-12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2021년 신축년 새해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福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 /
.*˝ ☆˝*. ..
( + 福 + )

행복한책읽기 2021-02-12 21:16   좋아요 1 | URL
와. 감사감사. 완전 예쁜 복주머니. 올 한 해 이 복주머니 차고 다니겠음둥^^ 지는 이제야 제 일상으로 돌아올 준비를 합니다. scott님도 새해 즐건일 가득하기를요. 복을 알아 잘 챙기시는 듯해, 님이 하는 일 그저 주섬주섬 주워담기만 해도 그 복 같이 누릴 판이어유.~~^^

scott 2021-02-14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설연휴 가족들 한테 봉사 ㅋㅋ 하시느라 고생 고생
쵸코 사탕 주렁주렁 놓고 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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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행복한책읽기 2021-02-14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아~~~~~진짜 주렁주렁. 완전 감동. 피로 다 풀리는 중. 사랑 넘치는 scott님 고마워요~~~~^^
 
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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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반납일이 임박하여 지난 일요일에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다 읽었다. 일주일 전 30페이지 가량을 읽었지만 두어 가지 에피소드 외에 기억이 나지 않아(요즘은 읽자마자, 아니 읽는 그 순간부터 까먹는다 ㅠ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첫 단락에서 나는 감지했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기법. 거리 두기 작법.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퐁투아즈 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 요양원에 들어간 지 두 해째였다.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왔다. <모친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10시쯤이었다.(7) 

작가는 분명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 위주로 글을 썼는데, 나는 이 첫 문장을 시작으로 읽는 내내 눈물을 흘리고, 훌쩍이고, 코를 풀어야 했다. 책 한 권을 내내 울며 읽기는 처음이다. <한 여자>는 맘 잡고 읽으면 앉은 자리에서 두어 시간이면 뚝딱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다. 총 110쪽. 그러나 책의 무게가 꼭 쪽수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무게는 제목 그대로 '한 여자'의 인생 무게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한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 치매 환자였다."(18)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19) 

나는 아니 에르노의 글을 처음 접했다. 특이한 글쓰기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것도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인생을 이만큼 떨어져 서술할 수 있다니. 작가 스스로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있는 글이라 칭하는 작법. 감정은 밀어 놓고 있었던 사실들을 충실히 따라가는 자기분석적 글쓰기. 

나는 내 인생에 딱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었던 사람이다. '싶었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못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열여섯에 내 어미가 들려준 엄마 인생의 한 귀퉁이. 고작 귀퉁이만 들었을 뿐인데 내게는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언제고 엄마 이야기를 써야지.

이 책을 읽다 저자의 어머니의 삶과 성격이 내 어미의 삶과 성격과 너무나 닮아 있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물론 내 어미는 책, 음악, 영화 따윈 모르는 분이었고 대신 저자의 어머니처럼 한때 가게를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 다 버려두고 어미는 혈혈단신으로 첫 남편의 집을 도망치듯 나왔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전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51) ​

 

내 어미는 내게 조금도 살갑지 않은 엄마였다. 완벽주의자적인 기질이 있어 나의 엉성함과 미숙함과 가벼움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내 뒤통수에다 대고까지 지겹도록 잔소리를 해대는 어미였다. 나는 내 엄마가 티비 속 다정한 엄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교회도 안 다니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도무지 싫기만 한 내 어미를 나는 이십대 중반 무렵부터 저자처럼 개인사와 사회사를 엮어 한 인간으로 이해해 보려 애썼다. 그때 내가 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너가 엄마같이 살았다면 지금의 엄마만큼 끈덕지게, 의연하게, 살았겠냐고. 답은 '아니오'였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의 삶을 존중하게 되었고 어미를 존경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부분만큼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군가 너를 열두 살에 공장에 처넣어 버렸다면 너도 그렇게는 못할 거다. 넌 네가 누리는 행복을 몰라.> 그리고 또, 종종 나에 대한 분노 섞인 생각. <저런 물건이 사립 기숙 학교엘 다니다니. 다른 것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건만.> / 어떤 순간들에는 자기 앞에 있는 딸 속에 계급의 적이 있었다.(65) 

내 어미의 말은 이랬다. "내가 니년만큼 공부했으면 판검사를 하고 있거나 청와대 들어가 있었을기다!" 그랬을 것도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억척스럽기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했던 어미가 팔순 생일을 기점으로 생을 부여잡은 손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녀는 변했다. . .  소소한 불편 거리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말이지 신물이 나>라고 말했다."(89)​

"일이 보배다"라는 말을 성경 말씀처럼 가슴에 품고 일을 보물단지마냥 끼고 살던 어미가 "사는 게 무재미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런 어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밥을 같이 먹는 것, 아이들 재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해주기 힘들어지는 날이 오리라는 건 예측하지 못했다.  왜. 내 어미는 언제나 강건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돈에 호기심을 보인다며 그들 전부를 싸잡아 비난하고 . . .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더러운 꼴 보기도 지겹다 지겨워.> 어머니는 형언할 수 없는 위협에 맞서느라 뻣뻣하게 굳어 버린 듯했다."(90) 

쌈짓돈이 없어졌다, 통장이 안 보인다, 도장이 사라졌다, 주민등록증이 보이지 않는다 . . . 도둑이 들었다 . . . 나와 옆지기는 졸지에 "칼로 배때지를 찔러 죽일 년놈"이 되었다. 나는 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졌지 팔순을 한참 넘긴 내 어미의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살피지 않았고,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다. MRI 촬영 사진 속 내 어미의 뇌는 해마가 많이 망가져 있었고, 전두엽도 쪼그라든 상태였다. 치매 판정과 함께 어미는 심장 부정맥 판정을 받고 스탠드 시술을 받았다. 어미는 점점 여위어 갔다.

"나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 나는 그녀를 먹이고, 만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 여러 번,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가 그녀만을 돌보고 싶다는 급작스러운 욕망, 그리고 곧 그럴 능력이 내게 없다는 깨달음. (사람들이 말하듯 <나로서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는 해도, 어머니를 그곳에 놔뒀다는 죄책감."(105) 

나는 어미를 겨우 6개월 돌보고 요양원에 모셨다. 요양원에 모신 첫 한 달은 많이 울었다. 죄책감에 날마다 한숨을 쉬고 가슴을 쳤다. 이런 전철을 밟아본 많은 사람들과 요양원 관계자들은 어미가 요양원에 정착할 때까지 보러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따랐다. 전화통에 불이 났다. 이런 경우 모든 치매 환자의 말은 거의 동일하다. "왜 나를 여기 놓고 갔어. . . . . ."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더욱 복받쳤다. 하여 나는 그네들의 말을 모두 무 자르듯 잘라버리고 날마다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랑 밥을 먹고 간식을 먹고 엄마가 부르는 노래와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안정을 찾아갔다. 다행히 어미는 기억만 시나브르 읽어갈 뿐 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잘 지내고 계신다. 어미는 여전히 나와 사위와 손녀손자를 기억하고 우리가 오면 반가워 하고 우리가 가져온 음식을 맛나게 드신다. 나는 아직은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110)를 잃지 않고 있다. 

나는 내 어미가 내게 허락한 시간, 내가 어미를 돌볼 수 있게 해준 시간에 감사한다. 켜켜이 묻어 두었던 말들을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 토해내 준  것에 감사한다. 그 말들은 내게 울음을 넘어 통곡을 끌어냈지만, 어미라는 한 여자를, 어미의 삶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로도 이끌었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함부로 가여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그런 상태로 여러 해를 사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모두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더 나았다. 그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확신이었다."(15) 

나도 저자와 같은 생각이다. 기억을 잃어간다고, 수족을 못 쓴다고, 누워만 지낸다고, 살 권리를 박탈 당할 이유는 없다. 그것을 결정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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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05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
이달의 당선 추카추카~
오늘 태어난 개굴군 🐸여기 놓고 감 ^0^

행복한책읽기 2021-03-05 16:17   좋아요 1 | URL
나보다 먼저 알고 축하글 남겨주는 scott님이 바지런함을 어쪄. 고마워요. 애들 개학하니 좀 정신없음요. 특히 둘째 땜에 ㅋㅋ 경칩이었다니. 아. 그래서 햇살이 이리도 좋았군요. 넘 따땃한 날이어요.^^ 난중에 스캇님 페이퍼 놀러갈게유~~~^^

희선 2021-03-06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사실 저는 그런 말 들으면 좀 창피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썼네요 이 글 봤을 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맞았네요 행복한책읽기 님 어머님이 기억은 잊는다 해도 건강하게 사시면 좋겠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06 14:05   좋아요 0 | URL
희선님 쑥스러움 누르고 축하글 남겨줘 고마워요. 희선님은 매번 당선되던대요. 책도 열심히 읽고 리뷰도 열심히 쓰고, 본 적은 없지만 뭔가 야리야리하실 듯한데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올까 궁금한 분이에요. ㅋㅋ 저희 엄마는 기억은 시나브르 잃어가지만 순간순간 즐겁게, 건강하게 살고 계세요. 다행히도요. 희선님이 기원을 해주니 넘 뭉클한 거 있죠. 고마워요~~~~^^

2021-03-18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19 19:05   좋아요 1 | URL
북사랑님 고마워요. 댓글 읽다 울컥했음요. 엄마 책 쓰고팠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
 

<<향모를 땋으며>>를 절반 정도 읽었다. 좋다. 정말 좋다. 강추가 ‘강강추‘로 레벨업 되었다.  

문체가 호수처럼 일렁인다. 산들바람이 풀밭을 쓸고 지나가는 문체이기도 하다. 저자 로비 윌 키머러는 과학을 시로 승격시킨 레이첼 카슨의 뒤를 잇고 있는 느낌이다. 이 책에는 네이티브 어메리칸,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불렀던 토박이 나무꾼과 나물꾼의 지식과 지혜, 전문용어로 생태적 윤리로 가득하다. 그들의 입을 빌어 키머러가 글로 전하는 이야기들은 아주, 아주 아름답다. 세상은 선물들로 넘쳐나고 감사할 것 투성이나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고 산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토착민들의 계율을 공유한다. 나는 저 지침에 따라 냉장고를 반만 채우고 살고 싶다. ^^  

​* 받드는 거둠의 지침(271) 


자신을 보살피는 이들의 방식을 알라. 그러면 그들을 보살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소개하라. 생명을 청하러 온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라. 

취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라. 대답을 받아들이라. 

결코 처음 것을 취하지 말라. 결코 마지막 것을 취하지 말라. 

필요한 것만 취하라. 

주어진 것만 취하라. 

결코 절반 이상 취하지 말라. 남들을 위해 일부를 남겨두라. 

피해가 최소하되도록 수확하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용하라 .취한 것을 결코 허비하지 말라. 

나누라. 

받은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취한 것의 대가로 선물을 주라. 

자신을 떠받치는 이들을 떠받치라. 그러면 대지가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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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8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2-08 23:07   좋아요 2 | URL
히히히. 지두 대출해 읽고 있는데 소장하고파요. 문체도 좋지만 내용이 새겨 읽어야할 것들 투성이에요. 물질 풍요 속 허함을 채워주는 삶의 철학이 녹아 있어요. ^^

scott 2021-02-08 2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겨두어야 할 구절이네요 받은것에 감사하고 자신이 취한것은 선물로 주고
[결코 처음 것을 취하지 말라. 결코 마지막 것을 취하지 말라.

필요한 것만 취하라.

주어진 것만 취하라. ]
이구절은 뷔페식 먹을때 나의 성향인데 ^ㅎ^

행복한책읽기 2021-02-08 23:10   좋아요 2 | URL
어머나. scott님은 저 지침들 중에서도 핵심을. 처음 것을 왜 취하지 말라고 하는지 궁금했는데 저자가 나중에 알려주더라구요. 듣고 아!! 했는데, scott 님은 뷔페에서 이미 실천을 ㅋㅋ

미미 2021-02-08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체가 호수처럼 일렁인다‘에서 어머머 저도 찜~♡

행복한책읽기 2021-02-08 23:11   좋아요 2 | URL
미미님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거임^^

희선 2021-02-09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자연과 함께 살려고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네요 그렇게 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군요 사람은 왜 그렇게 자신한테 있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지, 그건 없을 때를 생각해서 그런 거기는 하겠지만... 많은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살기도 하네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2-09 11:23   좋아요 1 | URL
ㅎㅎ 희선님은 더 많이 가지려 다투지 않는 사람으로 느껴져요. 본 적이 없어 그저 느낌으로만. 저 책을 읽으면 정말 아끼고 나누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계속 든답니다.^^

막시무스 2021-02-09 0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레벨업된 추천 기꺼이 받아 봅니다!ㅎ 정혜윤 PD님도 이 책 살짝 언급하여 잘 참았는데, 행복한책읽기님께서 또 한번 언급하시니 지갑 강탈됩니다요!ㅎ 즐건 하루되십시요!

행복한책읽기 2021-02-09 11:27   좋아요 1 | URL
정혜윤 PD님이 당근 좋아할 만한 책일 듯요. 이 분 레이첼 카슨 완전 팬인 걸루 알거든요. 저는 지갑 열지 않고 두 도서관서 예약과 상호대차를 오가며 읽고 있는데, 소장하고파서 조만간 지를 거예요. 막시무시님께도 애독서가 되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