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 Joan K. Rowling 지음 / Scholastic / ★★★★★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걸렸다. 책 나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는 열혈 독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새 책들 챙겨보며 해리와 그 친구들의 모험을 뒤쫓아 왔는데 그것도 이제 끝이라니 아쉽기는 하다. 스타워즈도 끝나고, 반지의 제왕도 끝나고, 매트리스도 끝나고, 이젠 해리포터마저 끝나버렸다. 한동안 시리즈물 기다리는게 유행처럼 연례 행사가 되곤 했는데, 이젠 딱히 뭘 기다릴만한게 안 보인다. 유행이 지났나.

7권은 아마도 지금까지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는 호그와트에서의 학교 생활이라는 축이 이야기 흐름에 여유를 더한 반면, 마지막 권에서는 계속되는 추적과 탈출이 롤러코스터처럼 이어지며 시종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덕분에 읽다 보면 조금 지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마지막 권이니 이 정도는 화끈하게 가 줘야 아쉬움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동안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들에게 나름의 완결성을 부여하려면 그에 걸맞는 많은 사건들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약간 무리다 싶은 설정도 있지만, 뭐 크게 불평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대체적으로 무난한 결말이라는 평에 나도 동의.

아는 분이 책을 읽고 있는 날 보더니 해리 포터 시리즈가 전세계적으로 기록적인 흥행을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불후의 명작 이라서.. 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고, 솔직히 어떤 문학적 성취를 말할 소설은 아니라고 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계속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사실 첫 권이 사람들에게 줬던 신선한 충격을 능가하는 무엇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작가는 꾸준히 그 수준을 유지하는데 성공했고, 그로 인해 한 번 마법의 세계에 발을 담근 사람들이 딱히 해리 포터 시리즈를 외면할 이유가 없이 지금까지 끌고 온게 아닐까 싶다. 상상의 세계를 다룬다는건 사람들에게 그만큼 상상할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에, 이 상상력을 중심으로 자기 증식하는 팬덤이 존재한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상상력. 사실 나는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를 자처한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아.. 이런게 있음 좋지 않을까"라고 상상하곤 하는 것들을 적절하게 마법의 세계에서 짚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건 어른에게건 상상력은 자신의 욕구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그런게 어딨어", "그런건 불가능해"와 같은 반응은 일종의 자기 검열과 같이 작동해서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은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도 해리 포터와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게 할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Seattle Times 에 실린 아래 만평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끝내는 내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Goodbye Harry, Hermione, 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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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2-07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 포터의 가치에 대해 쓰신 '상상력...'으로 시작하는 저 부분 읽으면서 아, 그렇겠구나, 깨우치고 갑니다.

turnleft 2011-02-08 03:35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게 아니라, 거꾸로 저런 식으로 스스로의 상상력을 억압해 온 타입인지라..;;
 

어둠의 속도
-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 

"자폐"라는 증상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레인맨] 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였던 톰 크루즈와 함께 출연해 연기력의 차이라는게 어떤건지 확실히 보여주었는데, 그 연기가 인상적이었던만큼 자폐증에 대한 나의 인식도 그 선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집중력과 천재성을 보이는 정신지체인.. 이라는 이미지로 말이다. 이 이미지는 영화 [큐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는데, 이게 자폐인에 대한 내 경험의 전부인 셈이다. 실제로 자폐인을 만난 적이 없으니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게 사실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대부분 자폐인 루 애런데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책을 읽으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기존의 자폐인에 대한 기존 이미지와 일치할지언정, 루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내면은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많은,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자폐인들의 내면은 저럴까? 모른다. 아직 아무도 자폐인의 머리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자폐인이 스스로의 의식세계를 서술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책 말미의 인터뷰에서 루가 오늘날의 전형적인 자폐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고, 책에 등장하는 자폐인들은 어린 시절 치료(아마도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한)를 통해 어느 정도 사회적 적응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말하는 자폐인들은 허구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 대해 자폐인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해 또 다른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비판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로 자폐아동을 입양해 20년이 넘도록 키워온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어떤 자폐아의 부모도 자폐증을 낭만적으로 말하거나, 자폐증이 아이와 아이가 살아가는 사회에 얹는 부담을 축소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폐인을 괴물(당황하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벽에 머리를 부딛혀 자해를 하는)처럼 묘사하는 기존의 시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폐인도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고,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욕망과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저자가 자폐인 아이를 키우면서 교감해 온 경험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자폐인의 내면의 시각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외견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적인 원리와 설명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둠의 속도]가 자폐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자폐인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은 자폐인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효과도 있지만, 동시에 자폐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 즉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일종의 소격효과, 낯설게보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분류하는 사람의 행동들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정상'적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예컨데,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돈의 행동은 극도로 방어적이 되어 모든 것을 우선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게 아닐까 고민하는 자폐인들과 대비가 되는데, 과연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정당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담론의 권력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 속에서도 뇌과학의 이름을 빌어 자폐인들을 끊임없이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의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담론에 기대어 자신들을 정상으로, 그리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분짓는다. 하지만 자폐는 루의 한 특징일 뿐이다. 담론에의 의존이 심한 사람일수록 루라는 존재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뿐이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항상 마찬가지의 함정이 존재한다. 우리는 상대를 항상 우리가 아는 만큼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은 만큼만 재단하여 보기 때문이다.

빛은 앎, 어둠은 무지(無知)라는 상징은 다소 구태의연하지만, 저자는 이 상징을 통해 우리의 무지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어둠의 속도라는 것은 non-sense 이다. 어둠은 존재가 아니라 단지 빛의 부재요, 따라서 빛의 속도는 있을지언정 어둠, 존재하지 않는 것의 속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 어둠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빛이 비추어진 부분과 그 순간일 뿐, 우리는 언제나 무지라는 조건 속에서 앎을 찾아 나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길 때, 우리가 가진 빛에 자만하기보다 더 큰 어둠 앞에 겸손할 수 있지 않을까.

루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자폐 치료를 받기로 결정한건 그 때문일거다. 그는 자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치료가 성공해 더 이상 자폐인이 아닐 때, 그 때의 루는 더 이상 예전의 루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료를 택한다.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더 많은 세계를 알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루는 항상 어둠이 더 빠르다는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려 할 때,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갈 것이라는걸 알았던 것이다. 그를 이끈건 바로 어둠의 속도였다.

잊지 말자. 비록 내 눈은 빛만을 느낄지라도, 어둠은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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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
- 함민복 지음 / 풀그림 / ★★★★★ 

올해로 직장 생활 8년차다. 월급쟁이 프로그래머가 수입이래야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높아지면서 수입도 같이 늘었다. 수입이 늘었다는건 단지 월급통장에 찍히는 급여액이 늘었다는 산술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소비에 능숙해지고, 또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사고(책도 그렇고), 더 맛난 음식을 찾고, 더 맵시나는 옷을 입으려 하는게 그 증거이다. 어김없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물론 소비가 죄악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가지는 비가역적 속성이다. 아이러니 같지만 가진게 많을수록 버리기가 힘들어진다. 지금보다 '덜' 벌었을 때 사는게 힘들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지금 예전만큼 벌어서 먹고 살라고 하면 암담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도 일종의 중독이다. 중독된 사람을 통제하기는 쉽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 풍요와 편리함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어찌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으며 우선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작가의 존재 양식 역시 그/그녀의 의식을, 작품을 규정할 것이라고. 함민복 시인의 글이 주는 다른 종류의, 다른 깊이의 울림은 거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강화의 작은 어촌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시인의 삶에 군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난하지만, 그에게 가난은 결코 결핍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잉여를 남기지 않는 마음, 자연이 자신에게 허락한 만큼만 지니고 사는 간결함에 가깝다. 그의 글도 그만큼 담백하고 청초하다.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국밥 한 그릇의 온기가 이리 넉넉하게 느껴지는건 그 국밥 한 그릇의 의미를 시인이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밥벌이를 말하더라도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의 위대함"이 어쩔 수 없이 "난 이 정도 벌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오만함을 풍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의 밥벌이는 겸허함,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집 앞 고욤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뻘에 들고 나는 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리고 이웃의 술잔을 받아들며 보내는 시선에도 항상 겸허함이 묻어난다. 제 한 몸 먹고 사는게 저가 잘나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비로서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고맙고, 또 미안하다.

종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이듯, 다양한 글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한 사회의 의식세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수도권 거주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작가군이 한국 문학을 주름잡고 있는 현실에서 함민복 시인의 글은 차라리 신선한 청량감을 준다. 아파트 숲 속에서 사는 작가들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라는게 꼭 사는게 힘들다는 넋두리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들, 세상의 체온 같은걸 알려주는 따뜻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매몰되어 있었던 물질의 세계 안에서 나를 일깨운다. 더 갖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는데 물질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왜 책을 읽는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의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 ps. 이젠 벌써 월급쟁이 12년차입니다. 세상에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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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2-0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턴님도 적은 나이가 아니겠군요.
이런 얘기하면 싫어할텐데...ㅋ
미안해요. 저 마지막 말씀만 안 하셨어도
그냥 지나갔을텐데...ㅠ

turnleft 2011-02-06 13:02   좋아요 0 | URL
므허허허허허허허어엉.. ㅠ_ㅠ

사실 나이보다도 일을 12년 동안 했다는게 더 실감이 안 가네요. 앞으로 30년은 더 일해야 한다는 것도 암담하구요 -_-;
 

취미는 독서
- 사이토 미나코 지음 / 김성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

이 책을 구입한건 책의 부제 "21세기 일본 베스트셀러의 6가지 유형을 분석하다!" 때문이었다. 음, 좋아. 이런 유형의 부제는 "훗, 너는 이미 다 간파되었다. 뻔한 녀석 같으니라고"를 강하게 암시하지 않는가. 라는게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째서 저 문장을 그렇게 냉소적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베스트셀러에 대해 갖고 있는 냉소가 선입견으로 작용했을거다.

막상 주문한 책을 받고 나니, 내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번역출판한 곳 이름이 좀 수상하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라니. 책날개에 적힌 역자서문(들어가며) 발췌는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책을 만드는 사람 처지에서는...(중략) 이럴 때 누군가가 좀 알려줬으면 싶기도 하다. 여기에 매우 맞춤한 책이 있다."

라니. 오 마이 갓. 혹시 이거 베스트셀러 만들기 교본 같은 책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를 현혹시킨 부제는 원본에는 없고, 번역출판사에서 넣은 것이다. 이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혼란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자의 의도와 이렇게 어긋나는 책은 처음 본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자 사이토 미나코가 잡지에 연재했던 "백만인의 독서"라는 칼럼을 모은 것이다. 칼럼의 기획 의도를 간단히 정리하면, "어떤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상당수는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건네들은 정보로 하는 말들이다. 그렇다고 뒷담화나 하려고 책을 일부러 사서 보라고 하기 뭐하니, 내가 대신 읽어보고 소감을 말해주겠다." 정도가 되겠다. 베스트셀러들을 유형별로 분류한 것은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편의상(?) 분류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대충 글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대해 맘 먹고 달려들어 분석한 글이 아니라, 대상이 베스트셀러들로 제한된 주관적인 서평집일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몇 권의 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도 보여주지만) 대개의 경우는 "도대체 왜 이런 책이 잘 팔리는거야?"라는 비명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그리고나서 "이래서 팔린게 아닐까?"라는 자문자답을 하는데, 그 답을 유형별로 분류한게 6가지가 나온거다. 때문에 이 유형 분류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이렇게라도 이해해줘야지"라는 비아냥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책은 상당히 재밌다. 너무나도 일본어스러운 문체와, 저자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시니컬한 말투를 보고 있으면 계속 낄낄거리게 된다. 특정 책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꼭 균형잡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날카로운 관점들은 그녀가 결코 가볍게 책을 읽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녀의 시각 역시 하나의 입장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읽으면 상당히 경쾌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 된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일본 베스트셀러 중에는 한국에서도 히트친 책들이 여러 권 있으니, 한국적 상황과 접목해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결론은? 재밌는 책이다. 번역출판사가 전혀 다른 의도로 붙인 부제 덕에 이 책을 사게 됐으니 고맙다고 해야할까. 역자 양반,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본 나고야에서 생활하고 있"다는데, 어째 월급 받으며 살려다보니 대충 아전인수격으로 책 의미를 뒤틀어 번역한게 아닐까도 싶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이런 요소들을 잘 버무린 책을 만들면 베스트셀러가 되겠군!" 이라고 외치는 출판 기획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런 얼빠진 기획자가 있다면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며 말리고 싶다. 이 책은 그냥 한 권의 만담집에 가깝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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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짧은 동거
- 장경섭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 

한 남자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사과를 우적거리며 책을 보고 있다. 그의 너머로 어스름히 보이는 싱크대 앞에서는 펑퍼짐한 몸매의 '그'가 설겆이를 하고 있는게 보인다. 잠시 후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뭐야? 또 깬거야?"라며 다가가 다친다며 깨진 접시를 치우는 '그'의 손을 잡지만, '그'는 남자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고 한 번 째려본 후 다시 설겆이를 계속한다. 남자는 자신이 요즘 소흘했다며 바닷가나 같이 다녀오자며 '그'를 달래려한다. 익숙한 풍경이다. 단 하나, '그'가 바퀴벌레라는 사실만 빼고.

이거 심상치 않은 만화다. 아니, 그저 바퀴벌레가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농담(?)이야 수많은 자취생들이 울궈먹은 레파토리겠지만, 이 농담같은 설정을 존재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이끌어가는 능수능란함은 작가가 보통의 내공을 지닌 이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고수가 나타난걸까.

웹에서 장경섭이라는 이름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은 그가 창비에서 나온 인권만화 "십시일反"에 참여한 10인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나도 그의 만화를 분명 보았을텐데,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 외에는 10년전(1996년) 어느 독립만화잡지에 실었다는 [장모씨 이야기]가 그의 짤막한 이력의 전부다. 10년 전에도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내공을 일부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두어줄로 요약되는 짧은 이력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아마도, 작가는 많이 방황했나보다. 만화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고민하는 모습은 그의 작품세계 곳곳에서 묻어난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즐거운 나의 방"이나, 미래의 나를 만나는 "히말라야에 가보셨나요"와 같은 단편들을 통해 작가는 만화를 생업으로 삼은 자신의 선택을 끊임없이 반추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으로 봐서는, 그 길었던 갈등의 시간들이 그에게 헛되었던 시간은 아닌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인 성찰과 고민은 그의 속에서 제대로 숙성이 되어 이렇게 진국으로 흘러넘치고 있지 않은가. 오랜만에, 느리지만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작가를 만난 것 같다.

어쨌거나, 다시 '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선 "'그'와의 짧은 동거"에서 처음 느껴지는 인상은, 이것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장모씨가(어느 모로 보나, 장모씨는 작가의 페르소나다) 어느날, 정도를 지나친 외로움에 지쳐 덜컥 바퀴벌레인 '그'와의 공존을 인정해 버리면서 시작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온 싸늘하게 불꺼진 자취방 속에 담긴 그 공허함. 방바닥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잡동사니 사이에 비집고 앉아 있자면 울컥 밀려오곤 하는 그 서러움.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바로 그 외로움에, 장모씨는 그동안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무시했던 타자에게 마음을 연다.

장모씨가 마음을 연 타자가 바로 '그', 바퀴벌레다. 설정상, 만화 속의 사회에서 의인화된 곤충들은 낯선 존재는 아니다. 사람들은 곤충과의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인간'사회의 철저한 타자일 뿐이다. 곤충들을 인간사회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만화는 기본적으로 알레고리로 읽힐 수밖에 없다. 곤충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느 해석이건 그네들이 실제 우리 사회의 "타자"들 중 하나(혹은 전부)를 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들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장모씨가 이중의 의미(개인/사회)로부터 타자인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고, 때문에 타자와의 만남은 개인적인 변화를 넘어 사회적인 함의를 갖도록 확장되게 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중의 타자와의 만남은 간단치 않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보이는 권력관계(설겆이하는 '그'와 사과를 먹는 장모씨)는 기실 사회가 타자를 대하는 권력관계의 반영이며, 애초에 이 두 동거인(?)들의 관계는 그 권력관계 속에 규정되어 있었다. 타자와의 만남에 필연적인 어긋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변화를 강요받는 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장모씨는 "내가 그의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그를 내 쪽으로 끌여들여 주거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을 뿐이다.

이 권력관계를 뒤집는건 "의수"의 존재다. 장모씨의 여자친구인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함으로써 타자이기를 거부한, 애초부터 적응을 택한 쪽이다. 하지만 장모씨, 그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결국 날개를 펼치고 비행을 시작한다. 본능을 거부하고 공존을 위해 인간에게 맞추고자 했던 '그'와 타자로서의 삶을 당당히 택한 의수. 이 대비 속에서 '그'의 좌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우리가 타자에게 강요하는 선택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말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우리는 그렇게 타자와 스쳐 지나가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잊고 살아가야 하는걸까? 아니다. 비록 슬픈 결말일지라도 타자와의 만남은, '그'와의 짧은 동거는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그'와 의수 모두를 떠나보낸 장모씨는 겨울이 찾아오자(그의 옥탑방에 뽀얗게 눈이 내린 장면 - 눈을 잔뜩 짊어진 나무가지처럼 툭 꺾어지는 스탠드 - 은 인상적이다) 동면에 들어간다. 고치 속에서 그는 벌레의 형상을 하고 웅크린채 겨울을 보낸다. 봄이 되어 고치 밖으로 나온 장모씨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없지만, '그'를, 그리고 의수를 가슴 속에 품은 그의 내면은 탈피를 끝낸 성충처럼 한층 성숙해 있을거다. 그는 더 이상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을거고, 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거다. 타자는 자아의 거울이고, 모든 성찰은 바로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면서 시작됨을 깨달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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