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지음 / 이순희 옮김 / 부키 / ★★★★★

책을 읽은건 6월 말 즈음이었는데, 리뷰가 늦다보니 묘하게 시류를 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이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도서' 목록에 포함된 덕분이다. 군대에서 서적 검열을 한다는 사실 자체야 그닥 새삼스러울게 없었다만, 일단 이런걸 그리 자랑스럽게 보도자료를 내놓는다는게 웃겼고(정권 코드 맞추랴 생색 내랴 바쁘신 국방부 관계자께 경의를!!), 둘째로는 도서별 불온서적 선정 이유가 웃겼다. 예를 들면, 삼성 왕국을 비판한 책은 "반자본주의"라서 안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이 책은 "반정부, 반미"라서 안된단다. 종종 얘들은 이렇게 어이 없는 자충수를 둔다. 별 실효성도 없는 일을 벌이느라 보다 중요한 비밀, 자신들이 공공이 아닌 몇몇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실토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게 다 무식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제발 이 책이라도 읽고 (들키면 쪽팔릴테니 다른 책 커버 씌워서 보도록)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삼성이 자본주의 기업의 한 양태(사실, 오히려 반자본주의적인 "세습" 집단이지만)에 불과하듯, 신자유주의 역시 자본주의 사회가 취할 수 있는 정책 중 하나일 뿐이다. 인류 역사라는 지평에서 볼 때 그리 길지 않은 자본주의의 역사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다양한 경제정책들이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저마다의 경제 정책들이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릿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장하준 교수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신자유주의는 부를 이루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 신자유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의 눈에 이 책이 불온하게 느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몸 바쳐 일하는 바로 그 '누군가'의 거짓말을 들춰내고 있으니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자체는 낯설지 몰라도, 그 정책들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특히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IMF 가 강요한(사실, 이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이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 제반 정책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골자를 이룬다. 해고와 감원을 손쉽게 하는 노동 시장 유연화 정책과 전면적인 상품/금융 시장 개방, 전방위적으로 벌어진 기업 인수 합병과 공기업 민영화 등은 한국 사회를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은 사건들이었다. 그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삶의 기반을 파괴당해 극빈층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해고의 위협에 마음 졸이며 허리띠를 졸라 맬 것을 강요당했다. 고통 분담이라는 미명 하에 말이다. 그 때도 그랬다. 위기를 벗어나 더 부유해 지려면 어쩔 수 없다고.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장하준 교수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를 증명하는 근거는 바로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선진국들 자신의 역사에서 나온다.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선 나라들의 공통점은 산업 발전 초기에 어김없이 극단적 보호주의 정책과 정부 개입으로 경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유럽의 제반 국가들은 물론이요, 오늘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강요하는 첨병인 미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 국가들은 자국의 산업이 상대적으로 열악할 때는 보호 장벽을 높게 쳐서 산업 육성을 이끌었고, 반대로 상대적으로 강해졌을 때는 어김없이 자유무역 쪽으로 돌아섰다. "요컨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p.119)"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 교수는 전세계적인 무역 자유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부유한 나라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규정한다. 보호 무역이라는 사다리를 딛고 부유해진 나라들이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 차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자유 무역은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해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 버렸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한 80년대 이후 세계 경제 현실은 이를 분명히 증언한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본산인 시카고 학파를 경제 전면에 내세웠다가 재앙에 가까운 경제 몰락을 경험했다. 한 때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리웠던 신흥 공업국들도 80년대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경제 성장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새롭게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등장한 중국은 강력한 무역 장벽을 보유한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물론 전면적인 자유무역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더 많은 시장과, 따라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부의 비결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 시장이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리는 것처럼 물 반 고기 반의 황금어장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미 이 시장은 몇몇 강력한 포식자들에 의해 선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은 이들의 홈그라운드이다. 이들의 높은 기술과 막대한 자본이라는 홈 어드벤티지에 맞서 가난한 나라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값 싼 노동력과, (운이 좋은 경우는) 천연자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당연히 일방적인 경기가 진행된다.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의 값 싼 노동력과 풍족한 자원의 혜택을 맛보는 동안,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저개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의 실상이다. 사실상 방점은 '공정한'이 아닌 '경쟁'에 찍혀 있다고 봐야한다. 공정을 가장한 경쟁이야 말로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를 착취해 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자, 동시에 그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된다. 신자유주의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기존의 불평등한 질서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세계 질서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각 국가와 사회 단위 곳곳으로 스며들어 불평등의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서 피착취의 입장에 서게 되는 가난한 나라의 지배 계급이 되려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나서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의 사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권력이 군사 정권으로부터 시장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그 흐름은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후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변용과 좌절, 재구성의 역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김영삼이 외치던 '세계화'라는 구호와, 재벌 기업들이 일제히 기업 로고를 새로 만들며 무한 경쟁을 외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해고를 '세계 수준'으로 쉽게 만들어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려던 노동법 개정 시도는 97년 초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변변한 방어 장치도 없이 무작정 개방한 금융 시장은 한국을 국제적 투기 자본의 놀이터로 만들어 외환 위기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외환위기는 다름 아닌, 한국의 지배 계급이 시도하던 신자유주의적 질서 재편이 실패한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외환 위기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더욱 가속했다. IMF 를 필두로 한 외부의 힘이 한국의 지배 계급이 스스로는 극복하지 못한 두 가지 장벽, 전근대적인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자 한 지배 계급 자신(특히 재벌들)의 저항과 노동 계급의 저항을 일거에 무너트리며 질서 재편을 강제한 덕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재벌이 무너지고 몇몇 기업들이 외국 자본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한국의 기득권 세력에게 이건 사실 그다지 큰 손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87년 이후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 계급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체념에 가까운 심정으로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한 것은 그들이 잃은 것을 훨씬 넘어서는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시대적 과제(87년이 남겨준)에는 비교적 충실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렇기에, 최초의 민주적 정권 교체는 사다리 위쪽의 권력 지형에 변화를 가져았을 지언정, 사다리 아래의 사람들에게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팍팍한 현실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한 쪽에서는 '잃어버린 10년' 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사실상 그 10년은 정치 엘리트 간의 밥그릇 위치 외에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더욱 공고해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한나라당이냐 민주당이냐 (혹은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냐 진보신당이냐) 하는 선거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자리잡은 이 신자유주의라는 틀을 어떻게 깨어버릴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와 나는 만나고 다시 어긋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조목 조목 비판하는 장하준 교수의 논리는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이론적 무기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철저하게 자본주의 경제학이라는 프레임 안에 머무를 뿐이다. 그의 관심사는 아마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보다 공정하면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해주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찾는데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모색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저자가 담보하지 못하는 고민은, 그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에게 관세 등의 장벽을 통해 경제적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다소 나이브하다. 이윤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그와 같은 '윤리적' 요구를 통해 통제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국내의 기득권 세력에게 순순히 기득권을 양보하기를 요구하는게 씨알도 안 먹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 모르겠다. 촛불은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건 이 책이 채워주지 못하는,그리고 아직은 그 어느 책도 채워 주지 못하는 내 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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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웅
- 귀도 크노프 지음, 이동준 옮김 / 자작나무(송학) / ★★★★

사실, 내가 원했던건 이게 아니었다.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던건 영화 <아버지들의 깃발들(Flags of our Fathers)> 이었고, 영화의 주 소재라고 할 수 있는 아래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보다 깊이 있게 풀어나가는 글을 원했다. 국가가 국민을 전쟁으로 동원하기 위해 어떻게 "영웅"을 만들어 내는지, 사람들은 왜 영웅에 열광하는지, 그 상징 조작의 과정에서 사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의 실제 내용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저기서 얻은 단편적 지식들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 <전쟁과 영웅> 이라는 제목이 책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니, 일단 여기서 별점 하나는 까먹고 들어가야겠다.



이와지마 섬의 스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들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은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역사를 만든 사진>을 책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찾아보니 저자로 나와 있는 귀도 크노프(Guido Knopp)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며 저널리스트다. 하지만 그의 저서 목록에도 이 책에 대한 정보는 없고, 정확히 어느 다큐멘터리를 옮긴 것인지도 잘 검색되지 않는다.(그의 주 관심사는 히틀러와 제 3 제국이다) 현재로서는 책의 정확한 정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적어도 이 책의 원제목은 <전쟁과 영웅>이 아니라는 거다. 이 제목은 번역되면서 국내 출판사가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히도 <전쟁과 영웅>이라는 키워드로 묶을만한 내용은 겨우 두어 개의 장에 불과하다.

하긴 이 책에 실린 16 개의 꼭지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하긴 하다. 이들을 한 권의 책으로 경계 짓는 기준이 주제가 아닌 컨셉(?)인 탓이다. 각 장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유명한(?) 사진을 화두로 삼아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 나간다. 사건의 성격이 제각기 다른 만큼 초점을 맞추는 부분도 제각각이다. 때로는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속 인물들의 후일담을 쫓기도 하며, 때로는 사진에 담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나처럼 제목에 낚여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과 같은 내용을 기대했다간 다소 어리둥절 해지기 쉽상이다.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책보다는 방송, 그것도 시리즈물에 더 적합한 컨셉으로 보인다.

덕분에,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는 독자마다 크게 다를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느슨한 역사 다큐멘터리이니 뒷담화 읽듯 재미로 읽어 나가도 무방할 것이고, 필이 꽃히는 특정 에피소드를 파고 들어도 좋겠다. 아니면 이 참에 (맥은 좀 빠지지만) 책의 컨셉에 맞춰 '사진과 진실' 이라는 주제를 따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경우들만 보더라도 사진의 역할은 극과 극을 오간다. [사이공의 처형 집행인]이나 [벌거벗은 베트남 소녀] 와 같은 사진들은 사람들이 체감하지 못했던 전쟁의 참혹성을 각인시켜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고, 거꾸로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처럼 가짜 진실을 유포해 전쟁으로 국민들을 동원하고자 하는 국가의 상징 조작에 이용되기도 한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기록한다는 통념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러한 다면성은 흥미를 돋군다.


Vietnam.gif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놀라 도망치는 베트남 소녀
책에서는 이 때의 화상으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는, 이제는 중년의 여인이 된 이 소녀를 인터뷰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진은 피사체에 반사된 빛을 렌즈를 통해 모아서 필름 혹은 다른 형태의 매체에 기록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물리적 과정은 너무나 즉각적이고 자명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믿음의 주된 근거도 여기에 있다. 물론 사진의 역사를 보면 종종 조작이 사례들이 등장한다. 가짜 피사체를 모델로 세우고 고의적으로 흐릿하게 찍은 고전적인 사례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산물까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사례들은 적지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조작의 사례들도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조작은 정황 증거나 양심 선언 등으로 조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런 사례들은 사진의 신뢰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최소한 조작한 사진만 아니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조작이 사진이 보여주는 진실이라는 문제를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 단순화시킨 셈이다.

허나,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은 그러한 믿음을 뒤엎는,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조작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 경우 사진 자체는 아무런 변형을 겪지도, 연출해낸 장면을 찍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사진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지 "않는"가이다. 문자와 대비되는 사진의 시각적 선명성은 사람들의 시선을 오직 보여지는 피사체로만 집중시킨다.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요구에 코끼리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사진은 사진에 찍힌 피사체로 자연스럽게 주제를 한정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진은 세 가지 차원에서 극도로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첫째, 순간을 기록함으로써 전후의 맥락을 생략하며, 둘째, 프레임 밖의 모든 것을 생략하고, 셋째, 프레임에는 담겼어도 공개되지 않는 모든 사진들을 생략한다.

즉, 우리가 보는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의 반영이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고도의 판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판단은 종종 미학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규정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결국 문제는 사진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가 아니다. 사진은 그 성격상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우리는 사진이 "어떻게" 주관적이냐의 문제로 접근을 해야한다. 사진을 그 자체로만 평가할 수 없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실의 전달이 아닌 다른 목적이 개입된 사진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사례에서는 국가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수구 언론이 그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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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자 <중앙일보> 2면. ⓒ중앙일보


결국 사진의 진실이라는 문제도 윤리의 문제로 돌아간다.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진실이란 없다.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 사진 또한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사진을 통해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역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로 보장될 수 있는 성질이라기 보다는 사진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의 윤리 의식을 강화할 때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는 사진가의 윤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진을 보도하고 유통하는 언론의 도덕성은 더 많이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다. 부도덕한 정권의 언론 장악 기도를 막아야 하는 이유도, 도덕적으로 건강한 언론을 키워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낙관론에 기대기엔 돌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ps. 사실 별점은 3개 반이다. 내 기준으로 3개는 좀 박하고, 그렇다고 4개는 좀 너무 후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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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 

나는 책을 통해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 내가 겪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나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책은 바깥 세계로의 통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 속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책에 담긴 지식과 사물과 타인의 삶에 비친 나라는 존재의 한 조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건 나만의 경험은 아닐거다. 같은 텍스트를 읽고도 저마다 다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까닭은 책 속에서 찾게 되는 저마다의 조각이 다르기 때문일테니.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건 나 자신을 읽는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대성당>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두려움'이다.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그래서 가족으로부터도 멀어져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삶의 모습들은 내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부유한 삶에 대한 희망은 일종의 판타지일 뿐, 어떤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실패한 삶은 약간의 불운만 겹쳐도 충분히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나만의 두려움, 악몽은 아닐테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두려움이며, 본질적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 소외된 노동으로 강제하는 기본 장치이기도 하니까.

그걸 안다고 달라지는건 없다. 아니, 사실 알면서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는게 가장 큰 비극이다. 팍팍한 현실에 돌파구가 없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타인에 대한 경계, 적대감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그게 힘 없는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버지가 동구에게 늘상 강조하듯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 사는게 삶의 유일한 지혜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나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안이 되더라.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몸 안의 독소가 빠져나가듯 가슴 속 덩어리 하나가 슬그머니 풀리는 것 같더라. 통쾌한 사건도 없고, 눈물 쏙 빼 놓는 신파도 없다. 그저 삶의 흐름에 휩쓸려 맥없이 흔들리는 부초 같은 삶들만 있을 뿐이다. 앞서 말했던,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남루한 삶 말이다. 그런데, 그 소설들을 조용히 읽어 나가다 보면 오히려 어떤 안도감이, 마치 한참 운 후의 후련함 같은 차분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건, 두렵다고 움츠러 들지 말라고, 적의로 가득찬 것처럼 보이는 저 사람도 너처럼 그저 세상이 두려운 또 한 명의 외로운 이일 뿐이라고 속삭여주는 카버의 목소리 덕이다.

그랬다.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고, 때로는 공격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이 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럴까 싶어 짜증이 나고, 심지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힘겹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 사람에게도 내가 힘든 세상살이에 얹혀진 또 하나의 짐 같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적대감이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면 그들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지친 얼굴과, 그 지친 얼굴이 품은 갓 구운 따뜻한 롤빵 같은 가슴을 만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도 생겨난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의 빵집 주인처럼 말이다.

나는 아마도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의 주인공 같은 사람일게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고 인생을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가까운 사람들과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나에게 카버의 소설은 주인공을 찾아온 맹인 같은 존재다. 소설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그저 머리 속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함께 그려주는, 인도해주는 손이 되어준다.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손길이 느껴진다. 세상을 다시 그리는 내 손 위에 올려진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 두터운 온기를 말이다.

올 여름엔 그의 무덤에 들러 하아얀 꽃 한 송이 놓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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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들고 파리를 가다
- 린다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로드 / ★★★★★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 파리 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 이야기도, 유명한 패션쇼 이야기도 없다. 에펠탑 이야기는 나왔던가? 나왔다해도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을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파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풍성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저자들이 파리를 세련됨, 낭만 등과 같은 추상적 이미지들의 종합선물세트가 아닌 구체화된 역사적 실체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여행의 키워드는 "혁명"이다. 파리는 근대국가의 출발점이 된 프랑스대혁명의 성지이다. 우리에게 혁명이란 어떤 가능성인 반면, 프랑스인들에게 혁명은 역사적 경험이다. 저자들은 파리에서 그 경험의 흔적들을 쫓아가면서 혁명의 의미를 되짚는다. 이 여행 경험이 씨줄이 되고 역사적 지식이 날줄이 되어, 책이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의미의 그물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성지순례를 하듯 프랑스대혁명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중국의 지식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저자들 역시 혁명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민중들의 집단 광대극 같은 모습이 배어있음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이념의 순수한 구현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가당착과 모순의 역사였다.(혁명의 끝에 민중들은 나폴레옹 '황제'에 환호하며 혁명을 종결시킨다) 허나 그 혼란을 통해 인류가 한 걸음 진전한 것 역시 사실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혁명이 내세운 거창한 이념의 아우라가 아니라, 혁명을 통해 저지른 잘못들과 숭고한 희생 양쪽 모두에서 배워야 할 교훈들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책 한 권"은 프랑스대혁명의 배경으로 한 위고의 "93년"이다. 하지만 실제 책 내용에서 위고의 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93년"도 읽어봐야겠지만, 일단은 이 책에 대한 만족감을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파리에 갈 때 이 책 한 권을 들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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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1-02-15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죠 ^^ 근데 턴님은 책 몇 권 들고 미국에 가신겁니까 ㅋㅋ 한국책 참 많이 읽으시네용 ^^

turnleft 2011-02-16 03:04   좋아요 0 | URL
분명 미국 올 땐 빈 손으로 왔는데, 어느새 책장엔 200권 가까이 꽂혀 있네요. 다들 어디서 나타나..쿨럭;;
 

돌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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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 

티벳의 독립운동과 중국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한참 국제사회가 시끄럽다. 중국의 향상된 정치/경제적 지위 앞에 국제사회가 슬그머니 침묵하는가 싶더니, 다행히 올림픽 개막식 불참이나 성화 봉송 거부 등의 형태로 항의를 표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얼마 전 유럽의회가 소속 국가들의 개막식 불참을 검토할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확실히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는 이럴 때 은근 장점이 있다. 국가 대 국가로 항의를 할 때 발생할 외교적 마찰을 유럽연합이라는 대표성을 통함으로써 피해 가고 있으니까. (아, 이건 국가건 개인이건 마찬가지 같다. 행패부리는 동네 깡패한테 혼자서는 차마 맞짱 못 뜨는 대신, 동네 사람들이 단체로 항의하면 되는 것과 비슷하달까?) 프랑스가 티벳 유혈진압을 비판하자 까르프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던 위대한 중국 인민들께서도 유럽연합이라는 거대 블럭 앞에서는 마땅한 대응책을 못 찾고 계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장점으로 유럽연합의 의의를 축소해서는 안될 일이다. 저마다의 이익을 쫓는 분리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경제 수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통합을 이뤄낸 유럽연합의 존재는 차라리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통합이 무조건 좋고 분리주의가 무작정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통합이냐 분리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판단도 담보해 주지 않는다. 강요된 통합이 초래하는 억압과 폭력은 제국주의의 전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으며, 그 중 한 제국이 붕괴하면서 촉발된 동유럽권의 내전과 인종학살은 방향성을 상실한 분리주의가 가져오는 맹목과 증오의 폐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유럽연합의 역사가 존경스러운 것은 단순히 통합을 이루었다는 외면적 결과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 체제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일방적이지 않은 공존의 조건을 창출해 냈다는, 그리고 내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당위로서의 통합이 아닌 그 과정과 방식의 총체로서의 통합이다. 가깝게는 남북한의 통일이나,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생각해보면, 이 공존의 지혜는 더욱 절실하다. 굳이 유럽연합과 같은 단일 공동체로의 통합은 아니더라도, 상호 신뢰 하에 공존할 수 있는 관계 구축은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 체제 정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오늘날 남북간의 반목과 한중일 간의 상호 견제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그만한 수준의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뢰는 커녕 불신과 증오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소설 <돌뗏목>이 발표된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가입했다. 때문에, 두 나라가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가 통째로 유럽에서 떨어져나가 대서양을 떠돈다는 소설의 설정은 그저 상상력의 산물로만 보이지 않는다. 지리적 조건은 유럽공동체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상상으로나마) 이 필요조건을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이 바로, 통합을 위한 충분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될 것이다. 어쩌면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는 유럽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유럽 대륙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제외하고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공동체로 여길 것인가?

작가의 반응은 일단 부정적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떨어져 나갔을 때 겉으로는 걱정을 하지만 다소 안도하는 듯한 유럽 각국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그런 유럽 주류 사회의 반응에 반발해 "우리도 이베리아인이다" 이라며 시위를 펼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유럽의 젊은이들이 진짜 이베리아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스스로한테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씨니컬하게 읊조린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스페인, 포르투갈)들이 하나의 유럽으로 묶일 때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거부감 같은 것들이 형성되고 표출되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쩌랴. 반도가 속수무책으로 대서양을 향해 흘러가듯, 유럽의 통합도 이미 현재진행형이 된 것을.

자, 여기부터 작가는 빙 둘러가기 시작한다. 사실, 반도가 떠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여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 소설에서는 간주곡 정도일 뿐이다. 소설은 온전히, 반도의 분리와 동시에 기이한 경험을 하기 시작한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다. 그렇다고 이들이 반도의 운명을 책임지는 영웅들인 것은 아니다. 개인은 그저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찬 개인들일 뿐. 이들의 기이한 체험은 이들이 반도의 운명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관계는 명확하지 않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이 체험은 그저 다섯 인물들이 한데 모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유럽의 통합이 어떤 식으로든 유럽 곳곳에 사는 평범한 개인들을 "유럽인" 이라는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 묶이게 했듯이 말이다.

이제 중요한건 신기한 체험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 다섯이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며 겪는 여정이다. 서로 연인이 된 두 쌍의 남녀와 한 노인이 늙은 말 한 마리가 끄는 짐마차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날 때, 이들은 작은 운명 공동체를 구성할 수 밖에 없다. 마차를 준비하고, 여비를 충당하기 위해 도시에서 옷가지를 사서 시골에 가서 팔고, 돌아가며 마차를 끌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데는, 저마다의 삶의 이력과 경험이 각자의 몫을 한다. 가난한 농사꾼의 경험이 없이는, 책상머리에서 셈을 하던 샐러리맨의 능력 없이는, 나이 든 이의 현명한 조언이 없이는 이 공동체가 원활히 움직이는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나이도 성별도 문화도 국적도 언어도 넘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관계맺음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삶의 연대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허나, 이 공동체의 결속도 완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연인이 아니라 혼자라는 이유 때문에 항상 남들에게 더 많은 것을 양보하며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노인, 페드로 오르셰의 존재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지불식간에 승인하고 있는 불평등을 드러낸다. 물론 이 현명한 노인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준 늙은 개와 산책을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랠 뿐이다. 정작 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오는건 가진 쪽이다. 오르셰의 외로움을 눈치챈 여인들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노인을 위로하자, 연인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침해받았다고 느낀 남자들이 불만을 터뜨린 것. 개인적인 "관계"의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지만, 결국 이 공동체의 해체를 먼저 주장한 것이 기득권을 "침해받은" 쪽이라는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배타적 관계에의 욕구를 그저 버려야 할 기득권으로 몰아가는것 또한 부당하다. 타자와 구분되는 "우리"를 규정하고자 하는건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문제는 그 "우리"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대서양을 오르내리던 반도가 바다 한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멈추자,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주인공 두 여인을 포함한 반도의 많은 여인들이 일제히 아이를 갖는다. 이 새로운 세대의 탄생 앞에서, 남자들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썪고 있다. 도대체 저 아이는 자기 아이일까, 아니면 페드로의 아이일까. 혈통을 명확히 하고픈 이 욕구는 현실에서는 민족 혹은 민족국가라는 범주로 확장 가능하다. 유럽의 새로운 세대를 어떤 정체성을 갖도록 키울 것인가. 그들은 저마다 포르투갈인, 프랑스인, 이태리인, 독일인으로 남을까, 아니면 하나의 "유럽인"이 될 것인가.

유럽이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분리되어 있었던 과거가 무의미해 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국가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은 더더욱 성급하다. 민족 혹은 민족국가라는 범주가 갖는 강력한 구심력은 그것이 무의미하다 강변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허나 이 구심력이 유럽인들을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가능성 또한 분명히 상존한다. 소설의 남자들이 느낀 원심력 말이다. 이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오늘날 유럽인들이 고민해야 할 숙제 아닐까. 어쩌면, 남자들의 의문에 대한 여인들의 이 간결한 대답은 그 출발점을 말해주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건 우리 아이들이라는 거야"

이제 여행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반도는 바다 한 가운데 멈춰 섰고, 우리의 주인공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반도가 움직이면서부터 땅의 진동을 느껴왔던 페드로 오르셰에게 그 진동은 여전히 계속된다. 감각으로 느끼지 않을 뿐이지, 실은 페드로만 그런게 아니다. 사람들 모두가 이제 섬나라가 되고 동서남북이 뒤바뀌어 버린 이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한다. 삶을 뒤흔드는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삶의 한 조건이 된 것이다. 유럽의 통합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유럽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도 결코 변화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설 속 여정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듯, 통합 이후의 과정들이 오히려 통합의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힘, 그리고 통합을 지속시키는 힘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주인공들의 공동체를 이끌었던 원칙들은 그 힘의 출발점이다.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와 협업의 정신 말이다. 이건 체제나 이념, 경제 수준 따위로 사람을 재단해선 불가능하다.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바라보고,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북한 사람들을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으로 생각하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우리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인식,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연대의식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시 저 막막한 대양을 홀로 떠도는 돌뗏목과 다를 바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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