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회에서 보들레르의 여성 혐오에 관해 질문을 받았는데, 길게 대답하지 못한 게 아쉽다.
의견이 다르면 다르다고 말하고,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면 될 텐데, 인신공격부터 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른 의견을 만날 때마다 분노를 하는 습관. 이게 촌스러운 게 아닌가.
지금 트위터에서의 토론과는 관계없이 하는 말이지만, 나는 특별히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우간다 어린이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커피 두 잔’의 카피에 아주 적은 돈을 기부한 적은 있다. 죄책감 때문은 아니고.
여성은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굳건한 동맹자였다.
산업사회 이후 예술가들은 여성이 부르주아지의 장식품이 되었다고 배신감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 한탄은 문예의 세속화와 상업화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만만한 여성들에게 전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사전을 찾아보니 ‘객정’은 나그네의 외로운 감정이라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깝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별표로 평점을 준다. 책에 오자가 하나 보인다고, 표지의 붉은색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책이 두껍다고 별표 하나를 준 사람이 있다. 인간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이런 분노는 어디서 올까. 긍지와 자신감의 부족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passion이라는 말이 감정의 수난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 늘 ‘정념’ 대신 ‘정염(情炎)’을 써왔는데, 국어대사전이 ‘정염’을 욕정의 뜻으로만 설명하고 있음을 오늘 알았다. ‘객기’가 있으니 ‘객정(客情)’이란 말을 쓰고 싶지만, 통하지 않겠지.
이게 〈The Godfather〉의 대사라는데, 이런 경우에 왜 ‘절대’를 집어넣어 번역을 할까. 말의 인플레. "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그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거야."
트윗은 140자로 제한되어 있지만, 모아쓰기 하는 한글로는 알파벳보다 두세 배 정도 더 긴 글을 쓸 수 있다. 트위터 본부에서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문학 번역자인데 자기는 한국 문학은 읽지 않는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났다. 문학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사고방식, 감정 처리법, 감수성의 향방 등에서 만국 공통 문법을 가르친다. 그게 번역 역량의 8할을 차지한다. 그 사람이 번역을 잘할 리 없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쓸데없는 소비가 많다. 기호품들은 그렇다 치고, 아이패드만 해도 두 개나 된다. 큰 것, 작은 것. 그러나 이런 낭비가 다른 ‘건전한’ 삶을 위로하고 지탱해주기도 할 것이다. 애들한테 ‘아빠는……’ 소릴 듣긴 하지만.
어제 낭독회에서 서서 낭독하고 설명했던 게 좀 무리였던 것 같다. 오른쪽 허리가 아프다. 오늘 넘기면 괜찮아지겠지. 시를 낭독하다가 흥분하는 버릇은 세월이 가도 여전하구나.
중요하지만 난삽한 텍스트를 번역할 때, 특히 『초현실주의 선언』 같은 책을 번역할 때, 이게 50년 전에만 번역됐더라도……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50년 전이면 내가 스무 살 때다. 좋은 번역으로 그 책들을 읽었더라면 아마 내 삶이 달라졌으리라.
아이를 나무라면 아이의 기가 죽는다고 말하는 부모들이 있다. 받들어주어야만 살아 있는 기를 기라고 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기는 떳떳함에서 온다.
커피 두 잔 값 운운하는 구호가 후진 것은 사실이다. 커피 두 잔의 가격을 제시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본다. 그러나 누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너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자고 한다면 역시 커피 두 잔 값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다.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으로서의 절대 권력이란 늘 한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권력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본 망초는 실망초로 사실 우리 마을에선 이름조차 없는 풀이었다. 꽃이 초라했을뿐더러, 묵정밭이나 폐가에서 많이 자랐다. 험한 자리에서 빈약하게 피는 이 꽃은 가난 그 자체였다.
당신은 착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당신이 갑자기 전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면, 당신은 현명한 제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거나 더 지옥이 될 것이다.
좋은 나라는 장애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사는 나라라고 했더니 그 안내원이 알아듣지 못했다.
나 죽은 후에 미래가 어찌되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 미래를 말하는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좋은 미래가 나 죽은 다음에야 온다고 해도 좋은 미래에 관해 꿈꾸고 말하는 것은 지금 나의 일이다. 그것은 좋은 책을 한 권 쓰고 있는 것과 같다.
르클레지오가 "한글이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보다 훨씬 논리적"이라고 말했다는데, 어떻게 글자와 언어를 비교한다는 말인지. ‘세계 한글 작가대회’라는 것도 이상하다. 한국어 작가라면 말이 되겠지만, 나랏돈을 가져다 누가 이런 이상한 사업을 하는지.
오랜만에 만년필을 쓰려고 하니, 펌프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잉크가 들어가고 어느 쪽으로 돌려야 잉크가 나가는지 모르겠다. 지난번에도 이러다 포기했던 것 같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의 악은 그 자체가 악에 대한 성찰이거나 그런 성찰을 촉구할 때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성찰과도 연결되지 않는 지저분한 악의 진열은 자주 우리의 힘을 별 필요도 없이 낭비하게 한다. 아무튼 나쁜 서사는 그 자체가 낭비다.
"무릇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저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본의 아닌 표절.
최상도님이 올려주신 〈쿵푸 팬더〉의 대사, "과거는 역사요 미래는 신비다"에 해당하는 사학계의 격언은 ‘과거는 필연이요 미래는 우연이다’. 오늘이 선물인 것은 과거의 믿음을 딛고 열린 가능성 앞에 서 있기 때문. 그 가능성을 넓히려는 노력을 진보라 한다.
『파리의 우울』의 번역 저본인 코프Kopp판 『산문시집』. 오른쪽은 그 보급본인 포에지/갈리마르판 『파리의 우울』.
그는 ‘영원한 여성’ 같은 걸 운위하는 후기낭만주의 예술관에 익숙했다. 그는 여성이 영원한 미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한탄했지만, 그걸 구현할 것은 저 자신이 아닌가.
트윗에 ‘잔뜩’이란 말을 쓰고 사전을 찾아보니 ‘한도에 이를 때까지 가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번역에서도 이 말을 쓸 만한 데가 많은데, 왜 번역할 때는 생각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번역에 관해 한국의 뿌리깊은 미신의 하나는 전공자가 번역을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전공자가 주석을 더 잘할 수는 있다. 누구를 20년 전공했다는 사람 중에 문학 일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한국어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사한다’는 말 대신 ‘선물한다’ ‘보낸다’ 같은 말을 쓰면 될 텐데, 그렇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것을 감추어줄 말, 사실상 폭력적인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성급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참을성 많은 사람들도 없다. 그 불편한 액티브엑스를 쓴 것이 몇 년인가. 그걸 개선해야 할 사람들이 짬짜미를 하고 있으니 바뀔 리가 없다. 국민 저항 운동이라도 일어나야 한다.
옛날이야기. 6·25 후 미국이 한국 낙도 어린이 한 명당 선물 한 박스씩을 보냈다. 낙도 어린이인 나도 그 선물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선물은 한 학급에 박스 하나. 박스 속 물건이 학생 수보다 적어 제비뽑길 했고 나는 바늘 하나를 받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간단하다. 세상에 어떤 이치가 있다고 믿고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를 바라면 공부 잘한다.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의 경건함과 깊이를 유지하지 않고는 그 평등함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저 말의 전제는 무엇일까. 저 사람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저 말을 할까,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일 터이다. 창의적인 생각도 대개 그런 절차를 통해 나왔던 것 같다.
덕성도 재능의 일부분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시와 기억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 시를 설명한답시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달달박박 이야기까지 거론하는 비평도 있었다.
시는 누가 교육해도 잘하기 어렵다. 교육은 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시도 예외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험 치고 대답하는 형식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좋은 시이면서 시험에 잘 적응하는 시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만큼이나 희귀하다.
공자가 시로 풀이름, 나무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풀 이름, 나무 이름만 염두에 두었겠는가.
저자가 죽었다는 말은 표절하라는 말이 아니라 쓰던 도구의 사용법을 바꾸거나 다시 찾으라는 뜻.
누가 낭만을 말하면 낭만을 찾던 제 국어 선생이나 생각하고, 덕성을 말하면 덕성 찾다 망한 제 선배나 들먹이지 말고. 새로운 것은 없어도 새로운 의문은 있다.
퇴계던가 율곡이던가, 한쪽 눈을 감고 책을 읽다가, 누가 물으니 눈을 쉬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데, ‘과학자들’이 비과학적인 이야기라고 난리를 쳤었다. 짝눈인 사람이 늙으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함부로 ‘과학’거리지 말아야지.
남녀 인연도 의식과 의식, 마음과 마음의 관계인데, 그 관계 속에서 자기를 중심에 놓고 ‘저 마음만 바꾸면’ 식의 망상을 품기 시작하면 불행이 따르기 마련. 여성을 생각이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는 또하나의 망상이 덧붙여지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온다.
남녀 관계에서 상대방의 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현실을 폭력으로 바꾸거나 부정할 수 없다. 제 엄마에게 떼쓰는 게 버릇이 된 아들이라면 달래서 될 일이 아니고 더 엄격하게 다뤄야 하는 것이 맞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데, 계속 전화를 걸다가 세상을 박살 내겠다고 작정하는 것도 ‘하면 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숙한 사람이 되는 일은 간단하다. 그때 전화기를 호주머니에 넣으면 된다.
내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고구마는 해남 물고구마다. 굽거나 쪄놓으면 엿물처럼 단 노란 물이 흐르는 고구마. 이 고구마는 이제 씨가 없어지고 맛없는 개량종 고구마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난 애석한 일 가운데 하나다.
‘눈에 고패를 지른다’는 지금은 잊힌 말이 생각났다. 고패는 쇠코뚜레 같은 걸 만들려고 생나무 때 열을 가해 서서히 구부린 원형이나 반원형 나뭇가지. 위아래 눈시울에 작은 반원형 고패를 질러 눈만 뜨게 한다고 잠을 막을 수 있을까.
말라르메 『시집』을 번역할 때, ‘겹살이꾼’이라는 낱말을 썼다. 사전에 없는 말. 실은 ‘꼽사리꾼’이라고 쓰고 싶었는데, 당시 사전에 이 말이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에 찾아보니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 한국어사전에 모두 나와 있다.
원문의 단어는 partageur,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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