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드는, 범죄로 뼈가 굵고 삭은 남자들의 이야기가 과연 한 편 더 필요할까?

인물의 젊은 시절을 그리는 데에 제 나이의 배우에게 기회를 주면 될 일이지 구태여 후반작업에 거액을 들여 노년 배우들을 디지털 회춘시키는 것은 테크놀로지 발전이 낳은 영화적 낭비 아닐까?

마지막으로 나는 영화보다 먼저 지치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이리시맨>은 다른 누구도 아닌 <비열한 거리>(1973)와 <좋은 친구들>(1990)과 <카지노>(1995)를 만든 감독이 유작인 양 만들어야만 하는 영화였다.

209분은 정당할뿐더러?좋은 음악이 그러하듯?한자리에 앉아 단숨에 겪어야 가장 짧고 매끄러운 시간이었다.

지미 호파(알 파치노)가 이야기에 입장한 다음부터 나는 전신을 내맡긴 자동 비행모드에 진입했다. 등을 받쳐주는 감독의 믿을 만한 손을 느끼며.

<아이리시맨>은 희한하게도 제목을 스크린에 띄우지 않는 영화다.

스코세이지가 엘레지를 바치는 대상은 프랭크 시런이라는 실패한 사내 개인이 아니다. 아니, 프랭크뿐 아니라 그 누구의 운명도 <아이리시맨>에서 서스펜스를 자아내지 않는다. 스코세이지는 실존했던 갱이 마초적 허세를 부리며 프레임에 입장할 때마다 영화를 멈추고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글로 묘비명을 새기듯 주석을 단다.

무시무시한 남자들은 모두 시시하게 죽을 것이다.

영화 개봉 당시 로버트 드니로와 조 페시는 76세, 알 파치노는 79세였다. 한 인물의 삼십대부터 팔십대까지를 칠십대 배우가 연기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아이리시맨>의 디지털 디에이징 효과는 얼굴에 국한된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배우들이 얼굴에 모션캡처사물에 센서를 달아 그 움직임 정보를 영상에 재현하는 기술로, 이때 대상에 부착한 마커를 통해 데이터를 영상에 표현한다 촬영용 마커를 잔뜩 붙이고 연기하는 상황을 바라지 않았고 <아이리시맨>의 테크놀로지는 ‘디지털 메이크업’에 가깝다.

수십 년 전 갱스터영화의 대표작에서 위협적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이, 디지털 분장을 하고 혈기왕성한 범죄자를 재연하지만 영 뜻대로 되지 않는 모습 자체가, 패자의 회고록 같은 이 영화에 어울려버리고 만다.

그래도 알 파치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번에도 웅변을 즐기는 외골수를 연기하지만 오버액팅으로 보이진 않는다. 지미 호파가 워낙 거물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와 연출이 배우의 스케일을 잘 파악해서다. 알 파치노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터지는 분통을 다스리려 애쓰는 모습은 <아이리시맨> 최고의 코미디다.

장편, 그것도 209분짜리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프랭크는 특이한 인물이다. 영웅은커녕 안티히어로도 못 된다. 이 남자에겐 주변 인물과 비교해 주체적 의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프랭크는 의지 없는 핀볼로서 역사 속을 돌아다닌다. 그는 언제부터 이랬을까? 영화 초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시절 그가 상사의 명에 따라, 포로에게 구덩이를 파도록 시키고 사살해 곧장 떨어뜨리는 광경을 보여주는 플래시백은 희미한 힌트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최근 뉴욕 관객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싸이코>를 거듭해 볼수록 유명한 샤워 신 말고 평범한 장면의 프레이밍에서 ‘시네마틱함’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아이리시맨>은 절정에서 오히려 호흡이 느려진다. 느림은 행위에 대한 생각을 낳고 생각은 비애로 이어진다.

<아이리시맨>은 종착점에서 기다리는 죽음과 회한의 인력으로 나아간다.

프랭크는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좋을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아니 실패조차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체력과 지력을 잃어간다.

"<덩케르크>는 영화가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의 양과 질을 ‘조작’할 수 있는 예술임을 입증한다."

영화는 감정과 캐릭터 조형에 서투르고 많은 경우 여성 인물을 어떻게 다룰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놀런이 시간을 재편하기 위해 도입한 트릭과 메커니즘, 과학 이론을 구구절절 해설하는 사용설명서 같은 대사를 수반했다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사연이 드러나기는커녕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않는다.

영화가 궁극의 타임머신이고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의 양과 질을 ‘조작’할 수 있는 예술임을 입증하는 역사상 가장 값비싼 실험이다. 동시에 제일 순수한 형태로 증류된 놀런 영화일 것이다.

결국 편집된 하나의 시퀀스 단위에서는 시간이 단속 없이 흐른다는 착시가 가능해진다. 이는 어쩌면 영화의 주제에 봉사한다.

전쟁의 달력은 어제와 그제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내일과 모레는 비슷하게 아득할 것이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라는 격언은 <덩케르크>가 감상성을 피한 방법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생각하는 ‘덩케르크 정신’은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자의 위치에서 감각한 전쟁의 총합. 그러고 보니 내가 <덩케르크>를 처음 본 날 ‘기념비’라는 단어를 떠올린 까닭은 ‘기념비적’이라는 예찬의 의미가 아니라, 영화가 무수한 돌로 쌓아올린 무명용사 참전탑 같은 모뉴먼트를 닮았다는 인상 때문이었다.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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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커피처럼 쓴맛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사이코패스, 자아도취, 마키아벨리즘, 사디즘 성향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단다. 나는 오래전부터 인간을 단순화하는 이런 식의 연구를 믿지 않지만, 박근혜가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다.

"좋은 대통령은 역사를 만들고 저열한 대통령은 역사책을 바꾼다"는 전우용 선생의 말은 명언집에 올라가야 할 말이기에 표절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온 소설들을 읽다보면 전체적으로 어휘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각급 학교의 국어 교과서에 나온 낱말들, 영어 교과서를 한국어로 옮길 때 사용하게 될 낱말들로 한정된 듯. 한국말이 고사하고 있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메밀로는 강원도 평창이 잘 알려져 있지만, 메밀은 제주도와 경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제일 큰 메밀밭은 전북에 있다 한다. 이효석의 소설이 없었다면 도시인들이 메밀꽃 따위는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말의 임팩트를 만드는 것이 문학의 기능이기도 하다.

조선일보가 중국 노총각들 때문에 한국 노총각들이 국제결혼에 위협을 맞게 되었다는 기사를 올리며, ‘진검승부’라는 말까지 쓰고 있다. 시대의 속악함이 정점에 닿은 듯하다.

창경궁에 동물원이 있던 60년대에 한 사내가 담을 넘어가 사슴의 목을 잘랐다. 그 녹용을 달여 먹고 코끼리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가 남북통일을 할 계획이었다고. 그는 남의 박정희 북의 김일성 같은 강고한 국가민족주의자들의 민화적 캐리커처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소라소리’에서 『파리의 우울』 낭독을 들었다. 글에는 글 쓴 사람이 상정한 리듬이 있다. 『파리의 우울』의 번역에도 물론 내가 상정했던 리듬이 있다. 성우 윤소라님이 그 리듬을 그대로 재현해주셨다. 번역자로서 행복하다.

새누리당이 김을동을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장에 앉혔다는 것은 까다로운 논의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다. 지극히 섬세하지만 명백한 문제를 놓고, 반지성주의와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가.

고종석 선생은 한 트윗에서 외국어로 말을 하면 뻔뻔한 것이 덜 뻔뻔하고 오글거리는 것이 덜 오글거린다고 한 적이 있다.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외국어는 혼의 밑바닥에 물질적으로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영어 공용을 주장하는 것이 의아하고 안타깝다.

카프카, 베케트, 이미륵, 시오랑, 아고타 크리스토프 등은 모두 외국어로 글을 쓴 사람들이다. 그들 글쓰기의 공통된 특징은 초중등 국어책처럼 글을 쓴다는 것. 그들의 글은 투명하고 깨끗하다. 그들이 말하는 태도는 초대받은 손님의 태도와 같다.

『어린 왕자』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다섯 번을 재번역하여 출간하면서 한국어판 『어린 왕자』 결정본을 만들려 했으나, 번역에 결정본이란 없다. 유익한 한국어 텍스트 하나가 나왔다는 정도로 평가를 받았으면.

오늘의 운세. ‘흉함 중에 길함이 있고 길함 중에 흉함이 있다.’ 뭔 말인지.

제 생각도 아니고 누구 말을 듣고 이거다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안 바뀌는 사람들이 있지. 가까운 사람들 괴롭히고, 권력을 잡으면 온 나라를 절망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신경림).―무식하다고 해서 아첨을 못 하겠는가……

영화 〈마션〉의 제목에 대해 트윗을 올린 적이 있는데 뒤늦게 그와 관련해 댓글을 단 사람이 있다. 〈마션〉에서는 유머 코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 핵심에 제목이 있다. 그 코드가 미국에서는 ‘마션’으로 한국에선 ‘화성인’으로 살아난다.

사학자들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고 갈릴레오는 악마의 지령을 받아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말했다.

요즘 택배 회사는 물건을 배달할 때 보안을 위해 수신인의 이름에서 글자 하나를 별표로 가린다. 오늘 배달된 택배 포장에는 내 이름이 ‘황현산 선생○’이라고 찍혀 있었다.

무리하거나 무례한 사고는 늘 농담의 형식으로, 다시 말해서 토론을 피해서 발설된다. 그것은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걸로 인격을 따지면 안 되지만, 공부를 잘못해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도 있다. 김무성이 "학문도 너무 자율로 가면 안 된다"고 했다는데,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저런 말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11월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 금색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거기에는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어떤 대결이 있다. 11월은 아름답고 모질다.

지금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획책하는 자들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금서로 묶어두었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만든 교과서 아래서 어떤 교육 방법론이 가능하겠는가. 게다가 수능이라는 제도의 호위를 받는 교과서는 그 방법까지 규정하고 제한하기 마련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어도 제 하기 나름이다. 그걸로 이것저것 많이 먹으면 된다. 누가 이런 소리를 하면 뺨을 맞아야 되는 거 아닌가.

역사나 교육이 문제되면 둔감해지기 쉽다. 이와 똑같은 말을 해놓고 지식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많다.

학술 발표회에서 바보 같은 발표에 아무도 지적하지 않으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바보가 된다.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는 조기 타결을 목표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이 말을 성과인 양 말하면 국민 전체가 바보가 된다.

민주 국가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보 같은 정부 때문에 바보가 되지 않는 국가란 뜻도 된다.

역사책이 박정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국민이 자긍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님을 박근혜에게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을까. 노예가 족보를 사면 자긍심을 갖게 되나. ‘우리 집안은 세조 때부터 관노였다’라고 말하면서 자긍심 가득한 장인을 본 적이 있다.

양장한 책의 실밥이 터지면 책장이 흩어져 불편하고 안타깝다. 내가 서툰 바느질로 책 한 권을 수선했다. 보기는 흉해도 책은 단단해졌다.

누가 나더러 관글당 살아온 이야기를 쓰라고 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관글이 없어지기를 하늘에 기도했더니 결국 없어졌다. 간절하게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더니 이런 일 정도는 도와주는구나.

반지성주의가 지배하는 독재 국가에서 가장 일상적인 고통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지당한 소리처럼 날마다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누가 2+3=7이라고 날마다 말하는데, 당신은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내가 공부 잘하는 학생을 높이 평가하는 투로 말을 한 적이 있나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순응주의자라는 것일 뿐이라면서 아침부터 내게 욕을 퍼부은 사람이 있다. 이 말만 해두자. 누가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면 그건 그가 순응주의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졸업생이 많이 왔다. 모두들 자기 자리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얼굴만 봐도 알겠다. 선생으로서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강원대 불문과, 영원하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이상한 소설이다. 내가 예전에 뽀르뚜가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재제의 상상 속 인물이라는 트윗을 올렸더니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를 저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제에게 과도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

한번 박힌 생각이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 사람들은 좀비와 같다. 걸음걸이나 말하는 투도 좀비와 같다. 몸은 움직이는데 혼은 없다. 같은 생각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그것을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의 바보들은 그것을 확고한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파리에 테러가 일어났다니 거기 가 있는 제자들이 걱정이다. 나만 안전하고 우리만 안전한 세계는 없다.

20세기의 30년대에, 그것도 서구에서 어떻게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는지, 온갖 설명을 다 들으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에서 강의한 후 강의료 수령에 필요한 서류에 서명을 하고 왔다. 그런데 주민증과 통장 사본을 보내라고. 주민증이나 주민번호는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고 통장도 벌써 무통장 계좌가 많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변하는 것이 없다.

무접종 아이가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건 다른 아이가 모두 접종을 하기 때문, 도시에서 불 켜지 않은 차가 운행할 수 있는 건 다른 차들이 모두 불을 켰기 때문, 어버이연합이 그 정도라도 숨쉬고 사는 건 다른 사람들이 민주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어제 만난 택시기사. 서울 근교 농촌에 산단다. 마을 사람들이 분류만 하면 수거해갈 비닐 깡통 등을 들판에서 태우고, 타지 않은 것들은 개울에 처박는단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당신 일이나 잘해" 하면서 면박을 준다고. 습관이란 무섭다.

포천시 일동면 어느 온천탕의 맥반석 사우나실. 장교로 퇴역했다는 50대 남자가 현역 장교인 듯싶은 청년에게 큰 소리로 설교중. "옛날 장교들은 군인정신이 충만했는데, 지금 장교들은 성추행이나 하고…… 내가 이런 입바른 말을 해서 진급도 못했지만."

옆에 있던 백발 남자가 한마디했다. "선생같이 훌륭한 분을 입바른 소리 좀 했다고 진급시키지 않은 것을 보면 그때도 군인 정신이 개판이었던 것 같소." 끊임없이 떠들던 퇴역이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중국이 학생들에게 미세먼지를 모두 마시게 해 공기를 정화한다고,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단다. 과학적 사고와 민주주의는 늘 함께 간다.

나는 이제까지 ‘메타몽’이라는 말이 트잉여의 아이디에 들어 있으면, 그게 ‘meta夢’일 거라고 혼자 짐작하고 꽤 철학적인 개념어라고 평가했다. 포켓몬스터가 뭔지를 몰랐으니.

자식의 머리에 능력 제일주의를 심어놓은 부모가 ‘돈만 있으면 능력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동시에 심는 경우가 많다.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이 혼란이 극우의 정신 상태를 만들기 십상이다.

시위할 때는 복면을 금지해야 한다면서 역사책을 쓸 때는 복면이 필수 조건인 나라가 있다.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실 것이다.

박성우 시인의 『창문 엽서』. 시 그 자체인 박성우 시인의 사진과 시 그 자체인 박성우 시인의 삶을 동시에 보고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임신중인 젊은 여인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다. 남자 노인이 그 앞애 서서 자신이 월남전까지 참전하며 고생한 사람인데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5분간 호통을 쳤다. 여자가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앉으세요. 이 자리에 앉으려고 전쟁까지 치르셨는데."

안철수는 고비고비에서마다 뜸을 들이다가 가장 나쁜 선택을 한다. 논리 그 자체를 상대하는 일은 해보았지만 사람을 상대로 일한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정치하는 사람들의 엉뚱한 발언과 나쁜 처신 뒤에는 늘 그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보이는 모호한 태도도 그 역사를 부인하는 데서 비롯할 것이다.

옛날에 올렸던 트윗이 리트윗되어 뒤늦게 나돌아다니면 기묘할 때도 있고 민망할 때도 있다. 내 말 같지 않아서 기묘하고, 이런 소릴 다 하다니 싶어서 민망하다. 아무튼 지난 시간은 기묘하고 민망하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이런 스티커도 다른 차의 운전자나 사고시 구조원들에게 부탁하는 말에 해당한다. 왕자님, 공주님이 타고 있어요, 이런 말은 듣기에 민망하지 않은가. 물론 가장 민망한 말은 ‘어르신이 운전하고 있어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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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회에서 보들레르의 여성 혐오에 관해 질문을 받았는데, 길게 대답하지 못한 게 아쉽다.

의견이 다르면 다르다고 말하고,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면 될 텐데, 인신공격부터 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른 의견을 만날 때마다 분노를 하는 습관. 이게 촌스러운 게 아닌가.

지금 트위터에서의 토론과는 관계없이 하는 말이지만, 나는 특별히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우간다 어린이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커피 두 잔’의 카피에 아주 적은 돈을 기부한 적은 있다. 죄책감 때문은 아니고.

여성은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굳건한 동맹자였다.

산업사회 이후 예술가들은 여성이 부르주아지의 장식품이 되었다고 배신감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 한탄은 문예의 세속화와 상업화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만만한 여성들에게 전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사전을 찾아보니 ‘객정’은 나그네의 외로운 감정이라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깝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별표로 평점을 준다. 책에 오자가 하나 보인다고, 표지의 붉은색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책이 두껍다고 별표 하나를 준 사람이 있다. 인간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이런 분노는 어디서 올까. 긍지와 자신감의 부족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passion이라는 말이 감정의 수난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 늘 ‘정념’ 대신 ‘정염(情炎)’을 써왔는데, 국어대사전이 ‘정염’을 욕정의 뜻으로만 설명하고 있음을 오늘 알았다. ‘객기’가 있으니 ‘객정(客情)’이란 말을 쓰고 싶지만, 통하지 않겠지.

이게 〈The Godfather〉의 대사라는데, 이런 경우에 왜 ‘절대’를 집어넣어 번역을 할까. 말의 인플레. "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그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거야."

트윗은 140자로 제한되어 있지만, 모아쓰기 하는 한글로는 알파벳보다 두세 배 정도 더 긴 글을 쓸 수 있다. 트위터 본부에서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문학 번역자인데 자기는 한국 문학은 읽지 않는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났다. 문학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사고방식, 감정 처리법, 감수성의 향방 등에서 만국 공통 문법을 가르친다. 그게 번역 역량의 8할을 차지한다. 그 사람이 번역을 잘할 리 없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쓸데없는 소비가 많다. 기호품들은 그렇다 치고, 아이패드만 해도 두 개나 된다. 큰 것, 작은 것. 그러나 이런 낭비가 다른 ‘건전한’ 삶을 위로하고 지탱해주기도 할 것이다. 애들한테 ‘아빠는……’ 소릴 듣긴 하지만.

어제 낭독회에서 서서 낭독하고 설명했던 게 좀 무리였던 것 같다. 오른쪽 허리가 아프다. 오늘 넘기면 괜찮아지겠지. 시를 낭독하다가 흥분하는 버릇은 세월이 가도 여전하구나.

중요하지만 난삽한 텍스트를 번역할 때, 특히 『초현실주의 선언』 같은 책을 번역할 때, 이게 50년 전에만 번역됐더라도……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50년 전이면 내가 스무 살 때다. 좋은 번역으로 그 책들을 읽었더라면 아마 내 삶이 달라졌으리라.

아이를 나무라면 아이의 기가 죽는다고 말하는 부모들이 있다. 받들어주어야만 살아 있는 기를 기라고 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기는 떳떳함에서 온다.

커피 두 잔 값 운운하는 구호가 후진 것은 사실이다. 커피 두 잔의 가격을 제시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본다. 그러나 누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너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자고 한다면 역시 커피 두 잔 값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다.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으로서의 절대 권력이란 늘 한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권력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본 망초는 실망초로 사실 우리 마을에선 이름조차 없는 풀이었다. 꽃이 초라했을뿐더러, 묵정밭이나 폐가에서 많이 자랐다. 험한 자리에서 빈약하게 피는 이 꽃은 가난 그 자체였다.

당신은 착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당신이 갑자기 전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면, 당신은 현명한 제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거나 더 지옥이 될 것이다.

좋은 나라는 장애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사는 나라라고 했더니 그 안내원이 알아듣지 못했다.

나 죽은 후에 미래가 어찌되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 미래를 말하는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좋은 미래가 나 죽은 다음에야 온다고 해도 좋은 미래에 관해 꿈꾸고 말하는 것은 지금 나의 일이다. 그것은 좋은 책을 한 권 쓰고 있는 것과 같다.

르클레지오가 "한글이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보다 훨씬 논리적"이라고 말했다는데, 어떻게 글자와 언어를 비교한다는 말인지. ‘세계 한글 작가대회’라는 것도 이상하다. 한국어 작가라면 말이 되겠지만, 나랏돈을 가져다 누가 이런 이상한 사업을 하는지.

오랜만에 만년필을 쓰려고 하니, 펌프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잉크가 들어가고 어느 쪽으로 돌려야 잉크가 나가는지 모르겠다. 지난번에도 이러다 포기했던 것 같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의 악은 그 자체가 악에 대한 성찰이거나 그런 성찰을 촉구할 때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성찰과도 연결되지 않는 지저분한 악의 진열은 자주 우리의 힘을 별 필요도 없이 낭비하게 한다. 아무튼 나쁜 서사는 그 자체가 낭비다.

"무릇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저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본의 아닌 표절.

최상도님이 올려주신 〈쿵푸 팬더〉의 대사, "과거는 역사요 미래는 신비다"에 해당하는 사학계의 격언은 ‘과거는 필연이요 미래는 우연이다’. 오늘이 선물인 것은 과거의 믿음을 딛고 열린 가능성 앞에 서 있기 때문. 그 가능성을 넓히려는 노력을 진보라 한다.

『파리의 우울』의 번역 저본인 코프Kopp판 『산문시집』. 오른쪽은 그 보급본인 포에지/갈리마르판 『파리의 우울』.

그는 ‘영원한 여성’ 같은 걸 운위하는 후기낭만주의 예술관에 익숙했다. 그는 여성이 영원한 미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한탄했지만, 그걸 구현할 것은 저 자신이 아닌가.

트윗에 ‘잔뜩’이란 말을 쓰고 사전을 찾아보니 ‘한도에 이를 때까지 가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번역에서도 이 말을 쓸 만한 데가 많은데, 왜 번역할 때는 생각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번역에 관해 한국의 뿌리깊은 미신의 하나는 전공자가 번역을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전공자가 주석을 더 잘할 수는 있다. 누구를 20년 전공했다는 사람 중에 문학 일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한국어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사한다’는 말 대신 ‘선물한다’ ‘보낸다’ 같은 말을 쓰면 될 텐데, 그렇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것을 감추어줄 말, 사실상 폭력적인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성급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참을성 많은 사람들도 없다. 그 불편한 액티브엑스를 쓴 것이 몇 년인가. 그걸 개선해야 할 사람들이 짬짜미를 하고 있으니 바뀔 리가 없다. 국민 저항 운동이라도 일어나야 한다.

옛날이야기. 6·25 후 미국이 한국 낙도 어린이 한 명당 선물 한 박스씩을 보냈다. 낙도 어린이인 나도 그 선물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선물은 한 학급에 박스 하나. 박스 속 물건이 학생 수보다 적어 제비뽑길 했고 나는 바늘 하나를 받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간단하다. 세상에 어떤 이치가 있다고 믿고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를 바라면 공부 잘한다.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의 경건함과 깊이를 유지하지 않고는 그 평등함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저 말의 전제는 무엇일까. 저 사람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저 말을 할까,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일 터이다. 창의적인 생각도 대개 그런 절차를 통해 나왔던 것 같다.

덕성도 재능의 일부분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시와 기억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 시를 설명한답시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달달박박 이야기까지 거론하는 비평도 있었다.

시는 누가 교육해도 잘하기 어렵다. 교육은 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시도 예외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험 치고 대답하는 형식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좋은 시이면서 시험에 잘 적응하는 시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만큼이나 희귀하다.

공자가 시로 풀이름, 나무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풀 이름, 나무 이름만 염두에 두었겠는가.

저자가 죽었다는 말은 표절하라는 말이 아니라 쓰던 도구의 사용법을 바꾸거나 다시 찾으라는 뜻.

누가 낭만을 말하면 낭만을 찾던 제 국어 선생이나 생각하고, 덕성을 말하면 덕성 찾다 망한 제 선배나 들먹이지 말고. 새로운 것은 없어도 새로운 의문은 있다.

퇴계던가 율곡이던가, 한쪽 눈을 감고 책을 읽다가, 누가 물으니 눈을 쉬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데, ‘과학자들’이 비과학적인 이야기라고 난리를 쳤었다. 짝눈인 사람이 늙으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함부로 ‘과학’거리지 말아야지.

남녀 인연도 의식과 의식, 마음과 마음의 관계인데, 그 관계 속에서 자기를 중심에 놓고 ‘저 마음만 바꾸면’ 식의 망상을 품기 시작하면 불행이 따르기 마련. 여성을 생각이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는 또하나의 망상이 덧붙여지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온다.

남녀 관계에서 상대방의 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현실을 폭력으로 바꾸거나 부정할 수 없다. 제 엄마에게 떼쓰는 게 버릇이 된 아들이라면 달래서 될 일이 아니고 더 엄격하게 다뤄야 하는 것이 맞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데, 계속 전화를 걸다가 세상을 박살 내겠다고 작정하는 것도 ‘하면 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숙한 사람이 되는 일은 간단하다. 그때 전화기를 호주머니에 넣으면 된다.

내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고구마는 해남 물고구마다. 굽거나 쪄놓으면 엿물처럼 단 노란 물이 흐르는 고구마. 이 고구마는 이제 씨가 없어지고 맛없는 개량종 고구마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난 애석한 일 가운데 하나다.

‘눈에 고패를 지른다’는 지금은 잊힌 말이 생각났다. 고패는 쇠코뚜레 같은 걸 만들려고 생나무 때 열을 가해 서서히 구부린 원형이나 반원형 나뭇가지. 위아래 눈시울에 작은 반원형 고패를 질러 눈만 뜨게 한다고 잠을 막을 수 있을까.

말라르메 『시집』을 번역할 때, ‘겹살이꾼’이라는 낱말을 썼다. 사전에 없는 말. 실은 ‘꼽사리꾼’이라고 쓰고 싶었는데, 당시 사전에 이 말이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에 찾아보니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 한국어사전에 모두 나와 있다.

원문의 단어는 partageur,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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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소이하게 반복되는 세계의 얇은 표면에 숨겨져 있는, 우리를 더 큰 자유와 조화로 인도할 신호들이다. 저 반딧불 같은 빛을 내가 정말 본 게 맞을까? 어리둥절하며 눈을 껌벅이는 찰나, 수원의 거리에 종이 울린다. 눈이 내린다.2015. 10.

"<패터슨>은 굳이 분석할 것도 없이 영화 자체가 7연의 시다.
기상, 산책, 식사 같은 정해진 일과가
기본적 압운을 이룬다."

미국 뉴저지 패터슨시에 사는 노선버스 기사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일상은 대다수 노동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대동소이하다. 다만 그는 시를 쓴다.

짐 자무시 감독은 통상 영화가 못 되는 시간들을 아주 사랑한다

<패터슨>도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짐 자무시가 편애하는 예술 형식인 변주의 향연이다.

<패터슨>의 관객은 주말을 제외하면 어슷비슷한 일과를 다섯 차례 지켜본다. 그러다 토요일에 이례적 사건이 한 가지 일어나고 일요일의 패터슨은 사건의 여파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조용히 회복한다.

마법은 아니다. 이야기가 예술가의 촉을 건드린 결과 열어젖혀진 감각이 세계에 잠재돼 있는 패턴을 예민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실존 미술가 가운데 로라에게 영감을 줬을 법한 인물은 장 뒤뷔페. ‘아르브뤼Art Brut’의 옹호자였던 뒤뷔페는 훈련받은 프로 예술가보다 어린아이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 등 소박한 정신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이 위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패터슨>이 선택한 노선버스 기사라는 직업은 그런 면에서 시인에게 최적으로 보인다. 일단 패터슨의 일과는 틀려서는 안 되는 시간표에 맞춰져 있다.

버스 차고지와 집 사이를 터벅터벅 걷는 동안, 버스를 운행하는 동안 패터슨은 세상의 흐름을 조용히 내면에 들인다.

휴대전화도 없고 이어폰을 끼고 다니지도 않는 패터슨의 감각은 세계와 매개 없이 직접 접촉한다.

애덤 드라이버가 액션이 아니라 온전히 리액션을 통해 패터슨이라는 인물을 구현했다는 짐 자무시 감독의 칭찬대로 이를 실감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버스 안 장면에 있다.

저녁 산책길에 겪은 소동을 이튿날 아내가 맥주 향을 맡으며 물었을 때에야 주섬주섬 털어놓는 장면은, 그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자기가 들어앉아 있는 비눗방울을 터뜨리지 않는 남자임을 암시한다.

요컨대 패터슨은 사람들의 영향에 자기를 열어두면서도 내밀한 세계를 지키는 예술가다.

영화 속 성취는 세상의 인정으로 완수된다.

짐 자무시의 시인 패터슨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이웃 사람들에게 예술의 재료와 형상화의 영감을 구한다.

명성과 불멸은 패터슨이 예술을 통해 얻는 희열과 멀리 떨어져 있다. 자무시에게 예술가의 고독은 훨씬 개방적이고 겸허한 무엇이다. 동시에 장세니슴 수도자가 추구할 법한 금욕과 정진에 가까운, 오히려 한층 완고한 예술관이기도 하다.

짐 자무시는 패터슨 출신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5권 길이의 서사시 『패터슨』의 도입부에서 영화를 착안했다고 밝혔다.

소아과, 산부인과 의사로서 평생 3천 명의 아기를 받고 서민들을 치료하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윌리엄스처럼 일상과 예술을 병행하는 시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윌리엄스와 그를 잇는 뉴욕파 시인들의 이상 역시 패터슨처럼 주변의 평범한 사물에 대한 감흥을 묘사하고, 불특정 다수가 아닌 가까운 특정인에게 말을 걸듯 쓰는 시였다고 한다.

짐 자무시는 리얼리티를 제거하지는 않되 어디까지나 영화의 중심을 인물 내면에 두고 현실의 위협은 노이즈 수준으로 제어한다.

패터슨의 생활에도 위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물새처럼 수면에 파문만 남기고 스쳐간다.

<패터슨>은 무엇보다 현실의 잦은 바람 속에서 자기 안의 고요를 확보하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이상하고 슬픈 세상을 견디게 만드는 언어가 시를 포함한 예술이라고 믿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2017. 12.

"C에게 집은 이야기로 가득 찬 특별한 상자다.
옛날 사진의 인화지 모양과도 비슷한 프레임은
영화를 휘감고 있는 노스탤지어와도 조화롭다."

놀랍게도 데이비드 라워리 감독이 택한 유령의 형상은, 유년기에 우리가 떠올리곤 했던 유령의 원초적이고 약간 코믹하기까지 한 이미지, 즉 두 개의 눈구멍이 뚫린 흰 시트다. <고스트 스토리>의 지극한 아름다움 가운데 큰 몫이 이 과감한 디자인에서 나온다.

<고스트 스토리>는 여러모로 작아짐으로써 커진 영화다.

모든 단순화가 성공적인 추상화에 이르지는 않으며, 가장 구상적인 예술인 영화가 추상화를 통해 풍성한 결과를 낳는 일은 더욱 어렵다.

개인의 멜로드라마에서 출발해 삼라만상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우화로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영화의 앞과 뒤에 북엔드처럼 들어간 천공의 이미지는 <고스트 스토리>의 승화를 오직 살짝 거들 뿐이다.

무심한 흰 천에 감정을 투사하며 드라마를 읽어내는 <고스트 스토리>의 관람 체험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없는 실버스크린에 떠오른 이미지의 유령을 통해 관객이 서사를 구성하는 시네마에 대한 제유提喩다.

<라스트 홈>의 부동산업자(마이클 섀넌)는 "집은 그냥 상자야. 정 붙이지마. 그냥 상자를 팔아서 더 큰 상자를 사는 거야"라고 설파한 바 있는데, <고스트 스토리>의 부동산 철학은 정확히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아무런 형상을 그리지 않고 캔버스를 예리하게 칼로 가른 폰타나의 작품은, 관람자가 화면 뒤쪽의 ‘무無’를 직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찌 보면 <고스트 스토리>는 그러한 직면에 이르는 여정이다.

<고스트 스토리>를 보기 전까지 나는 애도란 죽음 뒤에 살아남은 자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감독은 아름답고 슬프게, 냉철하고 간혹 유머를 담아, 한밤중 집에서 나는 정체 모를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고 설득한다.

대신, ‘거기 당신, 괜찮아요?’ 속으로 묻게 만든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아무도 없게 된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 영화가, 올해 나의 마지막 영화임을 감사한다. 굿 나이트, 굿 럭.2017. 12.

"<로마>는 지극히 내밀한 자전적 회고이면서도
자전적 예술이 빠지기 쉬운
자아도취의 웅덩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처럼 과거와 기억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발끝부터 적시며 차올라 어느새 사방을 둘러싼다.

<로마>는 지극히 내밀한 자전적 회고이면서도 영화의 관점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전적으로 부여한 희귀한 경우다.

<로마>는 자전적 예술이 빠지기 쉬운 자아도취의 웅덩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삶에서 몹시도 중요한 일을 나에게 해주었으나 그것을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람이다. <로마>는 그런 이에게 쓰는 늦은 러브레터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사랑받았지만 어렸기에 그 사랑을 당연시했고 그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편한 존재로만 바라보았던 아이가 중년의 예술가로 성장해 예술의 힘으로 시간을 건너고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당신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경건한 시도다.

<로마>에서 감독 본인은 캐릭터가 아니라 카메라의 시선으로 현존한다.

아침이면 노래를 불러 깨우고 밤에는 사랑한다 말하며 재운다. 소피아와 그의 어머니 테레사 역시 클레오가 임신한 사실을 털어놓자 두말없이 검진과 출산 준비를 돕는다.

남편의 외도로 홀로 남겨진 소피아와 애인에게 버림받은 클레오는 무책임한 남자들 곁의 빈자리에서 아이를 지키는 입장을 공유하고 교감한다. 그러나 계급과 문화 차이로 말미암아 두 여자가 터놓고 대화하는 상황은 오지 않는다.

<로마>는 거대한 수익과 오스카 수상을 포함한 비평적 성과를 올린 <그래비티>(2013) 다음에 만든 영화다. 그러니까 감독이 동원할 수 있는 자본과 자원이 정점을 친 시점에 제작한 셈이다.

쿠아론은 <로마>를 어떤 전작보다 오래 찍었고 배우들에게 당일 촬영분 시나리오만 제공하면서 시간 순서대로 촬영하길 고집했다.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이투마마> 등 쿠아론의 영화에는 파가니니의 카덴차처럼 입이 떡 벌어지는 영화적 기교를 전시하는 장면이 있다.

<로마>의 촬영과 블로킹, 미장센과 후반작업에 투여된 명인적 기교는 너무나 빈번하고 은근해서 ‘가진 자의 여유’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안토니오의 마초적 자아를 대변하는 대형 세단의 극적인 쓰임새, 부모의 긴장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한 아이들이 깨뜨리는 유리창, 요가 달인의 자세를 유일하게 수월히 따라하는 클레오의 평정은, 가장 작은 단면으로 큰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적 제유법의 사례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비하인드 더 스크린>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로마>를 연출하는 동안 "모든 프레임은 한 치 한 치 정보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완벽주의 풍경 사진가 앤설 애덤스의 방법론을 염두에 뒀다고 밝혔다.

브뤼헐의 풍속화를 방불케 하는 크리스마스 시퀀스는 프레스코 벽화 같은 스펙터클 안에서 인물들의 동선을 달리해 계급의 구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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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베이 영화에는 흉내 내기 불가능한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단일한 장편영화의 형상은 아니다. 장면은 아무렇게나 시작해서 아무렇게나 끝나고, 시퀀스끼리는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으며 시간의 흐름을 헤아릴 수 없도록 밤낮이 널뛰는 와중에 약간이라도 감정이 섞인 장면에는 반드시 석양이 물든다.

마이클 베이 영화는 밤 장면에도 많은 광원을 배치해 환하게 밝혀지며, 빛을 반사하는 구슬 같은 땀방울로 더위를 강조한다.

그의 영화는 끝날 무렵 해가 지는 경우가 잦은데, 아무래도 이 설정은 해가 떠 있는 한은 내내 질주하고 때려 부숴야 한다는 믿음의 반영 같다.

마이클 베이 영화에서 말초신경의 흥분과 직접 관련이 없는 세부에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아무리 러닝타임이 길어도 낭비로 간주된다.

수학!"이라는 단어 두 개로 트랜스포뮴(트랜스포머를 이루는 무한 변형이 가능한 물질)의 조작 원리를 요약한다.

마이클 베이 영화에는 대체로 속도는 없고 속력만 있다.

사람은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파악해야 속도를 느끼는 법이다.

즉, 벡터는 없고 스칼라만 있다.

양만 충분하면 질은 무관하게 무엇이든 원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트랜스포뮴은 그러므로 마이클 베이 우주의 에센스로서 아주 적절한 물질이다.

그러나 정말로 경외스러운 부분은 고집과 추진력이다.

마이클 베이는 열거한 난센스들이 상식이 될 때까지 커리어 내내 도끼질을 계속해왔고 대중은 거의 넘어갔다.

‘작가’ 마이클 베이가 견지하는 예술적 자부심의 든든한 근거는 공짜로 영화를 보는 저널리스트들의 리뷰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티켓을 사는 관객의 표결이다.

다른 영화에 없고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있는 것은 냉각기를 생략한 절정의 연쇄이며 관객의 신경을 향한 중단 없는 물리적 연타다. 게다가 이 쾌감은 극장 스크린에서만 얻을 수 있다. 한번 집으면 멈출 수 없는 팝콘과 탄산의 자극이 더해지면 체험은 완성된다.

마음의 평화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 베이 영화를 시네마가 아닌 무엇, 현대미술과 비슷한 현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남아 있다. 예컨대 상표와 광고판을 관객의 코앞에 들이대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뻔뻔한 간접광고PPL를 앤디 워홀의 수프 깡통에 견주는 것이다.

팝아트는 일상성을 걷어낸 공산품 이미지로 대량생산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마이클 베이의 PPL은 상품을 정확히 상품으로 판다.

베이의 대학 스승인 영화학자 지닌 베이신저가 비슷한 노력을 했다. "잉마르 베리만은 모든 훌륭한 필름메이커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영화를 정의한다고 말했다.

마이클에게 시네마는 속도와 빠른 운동이다.

시간과 공간, 빛과 색채를 이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마이클은 추상주의 예술가이며 거의 실험영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매우 특정한 세계관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포함한다. 얼마나 파괴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파괴하고 그걸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다.

2001년 <필름 코멘트>에서 비평가 켄트 존스는 이렇게 요약했다. "마이클 베이 영화는 악당을 그냥 물에 빠뜨리지 않는다.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여 화학물질로 오염된 액체에 빠뜨린다."

"악당은 총탄 세례를 받는 걸로는 불충분하다. 지뢰밭에 떨어져 갈가리 찢긴 몸의 파편을 보여줘야 한다. 영구차가 카체이스에 말려들면 시신이 도로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뒤에 달려오던 차가 시신을 치어 사지가 떨어져나가는 걸 보여줘야 직성이 풀린다."

"타나토스의 의인화 같은 인물인 조는,
살아 있으나 동시에 지금 여기 온전히 있지 않다."

해결사로서 조가 일하는 방식은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본인은 거기에서 한 점의 카타르시스도 얻지 못하고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설정과 상징 등 여러 면에서 <택시 드라이버>와 어엿한 동시상영 프로그램으로 묶일 만하지만 변주라고 부른다면 과소평가가 될 것이다.

1999년 <쥐잡이꾼>으로 데뷔해 <너는 여기에 없었다>까지 린 램지 감독이 내놓은 네 편의 영화를 아우르는 공통점은 부서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수많은 영화의 중심 소재로 채택되는 가정폭력, 자살, 학살은 린 램지의 영화에서 이야기의 계기로만 다뤄진다. 린 램지 영화의 본론은 폭력이 개인 안에 초래한 강렬한 상태 혹은 그것이 2차 폭력을 낳는 과정이다. 그리고 램지는 이 모든 상태를 인과적 설명 대신 이미지, 사운드, 편집 등을 통해 묘사하고 암시한다.

"조는 아버지의 구타가 자신의 영혼을 지배해 마치 토템처럼 자의식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가학적인 아버지의 폭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 행위가 정당하고 아버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 믿음은 여전히 조와 함께했고 돌이킬 수도 없었다. 조는 아버지가 시작한 그 폭력행위를 끝내려고 거의 50년을 기다렸다."고유경 옮김, 프시케의숲, 2018, 29쪽

조에게 자살은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냐의 문제다. 이 남자에게 생사, 과거와 현재의 구분은 거의 의미가 없다.

"괜찮아 그냥 가면 돼. 넌 원래 여기 없었던 거야"라는 조의 내적 독백은, 린 램지의 시각적 연출 모티프이기도 하다. 타나토스의 의인화 같은 인물인 조는, 살아 있으나 동시에 지금 여기 온전히 있지 않다.

조는 운동하는 액션의 주체라기보다 그가 남긴 폐허들의 총합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오히려 소설이 영화보다 액션 장르물로 느껴지는 희귀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비교적 하드보일드하게 행위의 표면을 따라가는 소설에 비해 영화는 인물의 부서진 내면과 거기 투영된 현실에 집중한다.

영화에서는 카메라 앞의 살아 있는 인간이 반드시 연루되기에 소설에는 없던 요소가 생긴다. 유머와 육체성이다.

살아 있기에 발생하는 시시각각의 통증과 스트레스, 그리고 살아가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결하게 수반되는 유머가 소설에는 없고 영화에는 있다.

소설은 어린 조가 갈망했던 복수 대신 정의를 추구하게 되는 결말을 취해 다음 표적을 향해 움직이는 왕성한 운동 중에 끝나는 반면, 영화는 어머니와 니나가 포개지는, 죽음의 완결이자 부활의 시작인 영점零點에서 운동을 멈추고 종료된다.2018. 10.

"차이를 낳는 변수는 구조가 아니라,
미세하게 다르게 대처하는
인물의 말과 몸짓, 표정, 감정의 흐름이다."

홍상수 영화의 숙련된 관객이라 자부하는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듣게 될지 얼마간 ‘알고’ 객석에 앉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날 것이고, 아마도 구애의 시도가 있을 테고, 취기에 휩싸여 다르게 사는 법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편안한 롱테이크가 일정한 보폭으로 만드는 흐름에 온화한 패닝과 줌이 완급을 주고, 간소한 음악이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오붓한 거리를 간간이 일깨울 것이다.

감독 본인에게 그렇듯 홍상수 영화는 관객에게도 이미 아는 것들과 다시 만나 기적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는 여행이다.

상투성을 멀리하며 생의 체험을 영화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꿈, 영화, 일기, 편지의 형식이 초대되었다.

이야기를 온전히 장악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배제하는 태도, 지어낸 것보다 이미 주어져 있거나 매일 주어지는 현상을 영화에 귀하게 쓰는 원칙, 그리고 감독의 직관을 활발하게 유지하는 규율이 이 어려워 보이는 저항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경험과 감흥의 현저한 차이를 낳는 변수는 구조가 아니라,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미세하게 다르게 대처하는 인물의 말과 몸짓, 표정, 감정의 흐름이다. 말하자면 가장 물렁물렁하고 하늘하늘한 것들이 차이를 생산한다. 그래서 자세히 말할 수밖에 없다.

서운하다는 여인의 반응에 울면서 좋아하는 정재영의 연기는 올해 최고의 희비극 연기다.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나 그의 슬픔과 환희는 진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1부와 2부의 관계는 규정하기 어렵다. 제목이 부르는 착시와 달리 과거와 현재도 아니고, 따라서 인과일 수 없으며, ‘남루한 현실 vs. 소원 성취의 판타지’도 아니다.

홍상수 감독에게 두 이야기를 잇는 함수가 확정되는 것은 영화가 망하는 길이며, ‘두 나라’를 망가뜨리고 나아가 영화 바깥의 무수한 나라를 부정하는 일이다.

두 버전의 틀리고 맞음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다만 공기 중의 무엇이, 커뮤니케이션의 미미한 차이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약간 굵은 감정의 덩어리를 빚고 그것들이 얼기설기 쌓여 인물의 동선까지 조금씩 틀어놓는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완전 딴판인 결론에 이른다. 어디서 틀렸던 거지? 뭘 잘한 거지?

극 중에서 함춘수와 윤희정은 허튼짓을 조금 덜하고 마주한 타인에게 조금 더 정직해짐으로써, 조금 더 바람직한 결과에 도달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모럴리스트 에리크 로메르와 퍼즐의 대가 찰리 카우프만의 융합"으로 요약해온 일부 해외 평론가들이라면 "이번에는 로메르 쪽!"이라고 서슴없이 한쪽 깃발을 치켜들지도 모른다.

삶은 한번 갔던 자리로 돌아가는 일로 채워져 있다.

반복 자체는 두려워할 저주도 안전한 성도 아니다. 분명한 진실은, 우리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미덕과 결함을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행위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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