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맞닥뜨린 답답함은,
마블이 선택한 연속형 서사의
태생적 제약이다."

"저희 마블이 생각하는 슈퍼히어로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민간인 보호입니다."

솔직히 나중에는 "훌륭한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이만하고 진도를 좀……"이라고 부탁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슈퍼히어로 액션영화의 중대한 태생적 딜레마 하나는, 슈퍼파워를 가진 캐릭터끼리 대결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대량 인명 살상 스펙터클이 오락성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생각하게 만든다. ‘revenge’도 마찬가지지만 동사 ‘avenge’의 직접목적어는 남에게 입은 상처나 피해이지 그것을 끼친 가해자는 아니다. 또 ‘revenge’와 달리 ‘avenge’는 개인적 증오가 아니라 그릇된 힘에 균형을 잃은 상태를 수평으로 되돌리려는 의지가 동기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공격 아닌 방어를 위해서만 포스를 사용한다는 제다이의 교전 수칙처럼, 조스 휘던 감독은 어벤져스를 차별화하는 ‘영웅 헌장’을 각인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촬영 현장에서 인터뷰 기회를 얻은 나는 휘던 감독에게 <어벤져스>와 <캡틴 아메리카> 연작에 거듭 등장하는 "인간은 복종하도록 창조된 존재다" "자유로부터의 자유"라는 표현이 장기적 복선으로서 갖는 의미를 물었더랬다. 조스 휘던의 답은 명료했다.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면서 파시즘을 피해 가긴 어렵다.

(…) 슈퍼히어로들은 그 물리적, 도덕적 힘이 우월하고 리더십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으니 그냥 자기들이 인류에 명령을 내리는 게 맞지 않을까 자문하게 된다. 파시즘으로 통하는 안락함의 유혹이다. 그런 유혹을 반박함으로써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가 인간성을 질식시키는 완전무결한 질서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블 슈퍼히어로영화는 마지막 30~40분의 전면전 클라이맥스를 포함한 3~4개의 액션 세트 피스를 포기할 수 없다.

결국 관객인 내가 맞닥뜨린 답답함은, 마블이 선택한 연속형 서사serial storytelling의 태생적 제약이다.

결과적으로 헐크뿐 아니라 어벤져스 전원은 마음의 병에 짓눌린 환자처럼 보이게 됐는데, 과거에 얽매인 군상이란 그리 매력 있지 않다.

블랙 위도우에게 헐크의 스토리를 줬다면 자기 힘을 혐오하는 여성이, 캡틴 아메리카의 몫을 줬다면 통제 강박에 빠진 여성이 될 것이다. 호크 아이에 대입하면? 뭐니 뭐니 해도 가정이 우선인 여성 캐릭터가 돼버린다. 블랙 위도우는 유일한 여성 주역이기에 성정치학의 리트머스지가 될 수밖에 없다.

영구적 상실은 없다고 보장된 싸움이, 연대기의 전개와 더불어 관객의 몰입도 심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충분히 즐겼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나의 반응은 무수한 덫과 함정을 무사히 통과한 ‘선방’에 대한 안도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2015. 5.

"여럿인 덕분에 여자들은 매사에
한 편일 필요가 없다.
때로 양은 질만큼 중요하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각본에도 참여한 <블랙팬서>는, 식민지배의 흉터 없이 자랑스러운 전통을 보존하며 번영한 가상 국가 와칸다와 착취와 차별로 고통받아온 미국의 아프리칸 디아스포라에 양발을 나눠 디딤으로써 균형을 잡는다.

백인과 맺는 관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흑인의 정체성이 저울의 한쪽이고, 백인을 고려하지 않은 "본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머지 한쪽에 올려진다.

고립 속에 번영한 아프리카 국가의 왕자로 귀하게 자라 왕이 된 티찰라는 수많은 아프리카계 인구가 여전히 고통받고 그 고통이 어느 때보다 전 지구적으로 직결된 세계에서, 와칸다의 국가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미국 오클랜드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차별을 겪으며, 미국의 패권주의를 해외에서 실행하는 비밀요원으로 훈련된 킬몽거에게 답은 자명하다. 불평등과 압제를 해소할 길은 오직 무기이고, 와칸다는 전 세계 아프리카계인의 병기창이 될 수 있다.

그는 패하고도 개과천선의 형식으로 신념을 버리지 않으며, 어디에 묻히느냐를 중시하는 와칸다의 문화를 조소하듯 탈출 노예처럼 수장되길 원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열여덟 번째 엔트리라기보다 새로운 유니버스가 통째로 더해진 기분으로 극장을 나섰다.

히어로 영화로서는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를 짊어진 <블랙팬서>는 고전적인 틀을 택했다. 서사의 모델은 <라이온 킹>, 액세서리는 <007> 시리즈에서 빌렸다.

내가 제일 쾌재를 부른 순간은, 본드걸풍 빨간 드레스로 위장했던 오코예 장군(다나이 구리라)이?못 해 먹겠다는 투로?집어던진 가발이 적의 얼굴을 후려치는 찰나였다.

말을 이어가자면, <블랙팬서>는 인종뿐 아니라 젠더의 균형도 적절한 방식으로 회복한 블록버스터다.

조지 루카스의 프리퀄이 심지어 혈중 미디클로리안 농도로 포스의 서열을 정했던 것을 상기하면 지각변동이다.

7편의 부제에서 ‘깨어난 포스’는 그저 이번엔 제다이 쪽이 서브권을 가졌다는 이정표가 아니라, 은하계의 모든 이름 없는 자들에게 잠재된 포스의 각성이 도래했다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제다이들은 원칙상 결혼하거나 아이를 갖지 않았으므로 포스는 유전될 수 없다.

레이는 <블레이드 러너2049>의 K(라이언 고슬링)와 더불어, 선택받은 한 사람을 중심에 둔 이야기로 지탱되어온 할리우드 SF 판타지가 드디어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고많은 은하계의 무명씨 가운데 레이가 광선검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은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와의 연도 없이 오직 자력으로 생존해온 고아로서 잃을 게 없다는 점이다.

레이는 원래 살아가는 것 외의 목적이 없었고 선택된 자의 소명 의식에도 속박되지 않는 백지상태다.

전설적 존재인 루크 앞에서도 레이는 맑고 곧게 믿음에 집중한다.

"나는 나쁜 남자인 당신을 바꿔놓을 수 있어"라는 로맨스 서사의 요소를 읽는 관객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암흑과 빛의 신세대 기수인 두 인물의 공통점은 과거와의 절연이다. 그러나 둘의 동기는 정반대다.

레이는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외부에 의지하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가진 레이는 불안하지 않기에, 로즈의 대사처럼 대립하는 대상을 없애지 않고 필요한 바를 취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것을 지키면 족하다.

충성스런 팬이라서 화가 났다고 믿지만 실은 백인 남성 중심 서사에 깊게 동일시해온 교집합도 있겠다.

"모조리 없애버려라!"라는 헉스 장군(도널 글리슨)의 엄포는 하도 여러 번 반복돼 나중에는 별로 무섭지도 않다.

작은 불만들에도 불구하고 <라스트 제다이>는 <스타워즈>가 박물관에 속한 프로젝트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관객은 궁금증을 되돌려받았고, 시리즈는 미지의 미래를 선물 받았다.2018. 1.

"시퀄 3부작은 일명 포스타임 장면을
애장 기념품으로 남긴 채
타투인 행성 지평선 너머로 저물었다."

"포스는 선택받은 자한테만 있거든?" "지금이 몇 세기인데. 아니거든?" "맞거든?"

라이언 존슨은 경멸할 만한 인간이 너의 뿌리라 해도 그 사실이 네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새 세대의 어린 관객에게 타전한 것이다.

레이의 남다른 힘은 그의 정직성과 용기, 관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에게 물려받은 상속재산이다(공교롭게도 라이언 존슨이 <라스트 제다이> 직후에 만든 살인 미스터리 <나이브스 아웃>은 물려받은 재산을 상속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해로운 악으로 그린 바 있다).

카일로 렌의 대립항이자 파트너가 되려면 ‘아무나’로는 부족한 것이다! 레아 오르가나 장군이 레이에게 준 "네가 누군지 두려워하지 마라"는 조언의 의미는 변질됐다.

일단 시퀄 3부작은 사랑스런 드로이드 BB-8와 레이와 카일로 렌의 근사한 ‘은하계 페이스타임’, 일명 포스타임 장면을 애장 기념품으로 내게 남긴 채 타투인 행성 지평선 너머로 저물었다.2020.1.

"관객의 이익이 디즈니의 그것과 일치하란 법은 없다.
나는 비교 열위인 실사판을 최초의 <알라딘>으로 만나는
어린이 관객이 조금 불운하다고 생각한다."

파가니니의 악마적 명인기를 방불케 하는 로빈 윌리엄스의 지니 연기는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의 키네틱한 역동성 위에서만 구현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윌 스미스는 로빈 윌리엄스를 극복하는 대신 유쾌한 래퍼 지니가 되기를 택했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와 마블 슈퍼히어로를 접수하고 20세기 폭스사까지 흡수한 지금, 디즈니는 현대의 설화를 독점 공급하는 공장이나 다름없다.

1억 달러(한화 약 1300억 원) 이상을 들여 과거 영화의 낡은 오류를 수정한 리메이크를 굳이 만드느니, 동시대적 발상으로 새롭게 쓴 서사를 쌓아가는 편이 관객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이다.

디즈니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가부장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디즈니 고전을 사랑해 무수히 리플레이한 어린이들이었다.

영화의 수용은 극장 안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언제나 아이들과 토의할 수 있고, 불완전한 영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문제를 의식할 수 있다.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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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저 지랄 맞은 시는 언제 번역한다? 날도 추운데 오늘 트윗은 여기서 끝!

시 번역에서 행갈이의 문제. 원문 순서 따라 구문 도치하기보다 우리말로 잘 읽히게 순치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정보 제공의 순서가 문제다. 그때그때 다르고 그때마다 불안하다. 옛날엔 담배를 피웠는데 이젠 트윗에 들어온다. 오늘은 한 번만 들어왔다. 힘들다.

알려지지 않은 피해, 의식되지 않은 피해를 말할 때는 피해자의 관점이 필요불가결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피해, 누구나 의식하는 피해는 서술이나 관찰에 피해자의 관점은 사실상 불필요할 때가 많다. 가해의 양태는 다양한데 피해의 양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 이간질에 넘어간 건지, 이간질을 이용하자는 건지.

모든 범죄에는 권력관계가 있다. 국가 권력 젠더 권력 같은 상시 권력도 있지만, 무기와 빈손, 노리는 자와 방심한 자 간의 일시 권력도 있다. 가족 내 권력, 젠더 권력 범죄는 은폐 용인되기 쉽지만,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되는 계기의 고찰이 은폐를 돕는 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가난한 동네를 그린 화가의 말, 가난한 동네에서 새누리당 찍은 사람은 자기가 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민주당 찍은 사람을 무시한단다.

용어를 겉핥기로 배운 사람일수록 그 용어를 물신화하기 쉽다. 모든 사안이 그 용어로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의 말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으면 화를 낸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안 다니는 사람에게 화를 내듯이.

다들 핵가족으로 살면서도 풍속 의식은 여전히 대가족 제도에 매어 있다. 그래서 핵가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가장 심각한 것이 육아 문제. 애를 맡기려 시가 친정 헤매고 다니던 제자들 중 여럿이 공부를 포기했다.

애를 최소한 반은 공공으로 키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한, 나라는 현재의 농촌처럼 노인만 남을 것이다.

여당을 지지해야 세게 보인다는 가난한 동네 노인들의 의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이론서의 복잡한 문장이 이상하게 번역되는 것은 ‘은는이가’의 쓰임이 서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잘 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어에 관계절이 생기기 전까지는.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 비해 랭보의 시가 어떻게 중요한지 설명하긴 참 어렵다. 감각의 전면적, 장기적, 합리적 착란이라는 말은 어떤 체험에 대한 묘사이지 시법은 아니다. 사람들은 랭보가 애로서 시를 썼기에 깔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군복무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포기한 젊은이가 많다. 그러나 징병제의 모순은 남자들만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법의 이름으로 감춰지는 모순은 최약자들을 속죄양으로 삼는다. 여성과 장애인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예비역들이 불법 면제자들을 영웅시하는 경우도 있다.

징병제는 모병제로 바뀌기 전까지 젊은이들의 자기 발전에 크게 차질을 줄뿐더러 늘 여성 차별의 기제로 남기 쉽다.

보들레르는 연애 관계에서 더 사랑하는 쪽은 환자와 같고 비교적 덜 사랑하는 쪽은 의사와 같다고 말했다. 랭보와 베를렌의 동성애 관계에서 베를렌이 자주 찌질하게 보이는 것은 더 사랑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더 많으면서……

문재인에게 ‘노동 개혁 입에 담지도 말라’는 김순덕의 칼럼은 중남미의 정치적 타락과 권력의 착취 등은 말하지 않은 채 모든 잘못이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거짓말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매끄럽게 잘 써진 문장으로.

서사에서, 어떤 개별 주제가 보편성을 띤다는 말은 그 작품이 비슷한 주제의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개별 주제가 보편성의 이해에, 또는 재정의에 어떤 힘을 발휘했느냐일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말에서 어떤 재능을 느끼거나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다고 생각하면 팔로잉해왔으며, 내 말을 귀찮아하면 블락했다. 내가 블락한 사람 가운데는 내 트윗을 개소리라고 한 사람도 있고 그걸 퍼나른 사람도 있다.

학부 때 교수 가운데 한 분이 수녀셨다. 다른 프랑스인 수녀와 그분의 대화 중 성테레사의 환희와 같은 환희의 체험담을 엿들었다. 지금도 두 분 수녀님의 환희의 고백과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의 환희의 비판, 양쪽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을 하면서 가능한 한 글자를 줄이고 있는 나를 본다. 트윗의 심각한 후유증이다.

나도 글씨를 잘 쓰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손글씨는 보고 있기가 괴롭다. 어떤 문체가 마치 음치의 노래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때처럼.

달필은 늘 보기 좋지만 악필이 항상 보기 싫은 것은 아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모씨의 원고를 본 적이 있다. 악필 중의 악필이었지만 어떤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친구 하나는 초등학생처럼 글씨를 쓰지만 그 글씨에 분명한 기품이 있다.

『적과 흑』은 사회 소설이지만 뛰어난 연애 소설이기도 하다. 좋은 연애 소설은 사회적 의식개혁의 시발이 된다. 『위험한 관계』 『마농레스코』 『파리의 노틀담』 『감정교육』 『사랑의 한 페이지』…… 이광수의 『무정』도 거기 들어간다.

내가 작년에 알라딘과 예스24에서 『어린 왕자』만 37종을 구매했구나. 내 번역은 그렇고, 김화영 선생, 전성자 선생 번역이 역시 좋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프랑스에서 처음 상영했을 때 파리의 한 신문이 한국인들도 서구인들만큼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썼다 한다. 국내의 한 신문이 이를 칭찬의 말인 것처럼 전하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갑자기 원문을 확인하고 싶은데 어렵겠지.

서울에 와서 종종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전라도 사람도 좋은 사람은 참 좋아요’였다. 이동진씨 말을 이런 종류의 말로 받아들여야 할지 나로선 판단이 어렵다. 다만 연애 서사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를 얻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책을 한 권 쓸 수도.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공적으로 말할 땐 자기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거의 그렇게 생각했다. 초현실주의 작품이라는 말에 면허를 낸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초현실적이라는 말은 브르통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우리 세대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남자들이, 또는 여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온갖 몸부림을 다 치면서 최상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설렁설렁 일을 하면서 거의 한 번도 실수 없이 최상에 가까운 작업을 한다. 양쪽이 서로 부러워한다.

고양이들이 떼를 쓰며, 나를 사료 그릇 앞으로 끌고 와서 밥을 먹는다. 딴생각을 하다보니 나만 사료 그릇 앞에 앉아 있다.

한국어로는 어려운 책을 읽은 적이 없는데 유학 가서 외국어로 어려운 책을 읽고 온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번역한 책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트윗에서 ‘매우 납득했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장난기를 담은 문장이지만, ‘매우 쳐라’가 있으니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겠다.

단편 하나에 ‘꼬신다’는 말이 다섯 번도 더 나오는데, 읽기에 거북하다. 유혹한다, 작업한다와 어떻게 다를까. 상대를 ‘얕잡아보면서’라는 뜻이 덧붙여지는 게 아닐까.

2014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지 않아 이제야 정산을 하니 기백만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단다. 기간 내 신고를 했으면 오히려 40여만 원을 환급받았을 텐데. 그때 나는 수술을 받고 갓 퇴원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내 사정일 뿐이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들이 많은 것 같다. 누가 고양이에게 욕을 하니, 지나가던 낯선 사람, 누구에게 늘 개 취급을 당하던 사람이 자기에게 욕을 한 것이라며 다짜고짜 화를 낸다. 지금 그런 트윗이 나와 내 글을 알티한 사람에게 동시에 날아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니 원고 하나 마감을 넘겼다. 긴 글도 아니고 써야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연휴라 마음이 편하다. 원고를 쓸 시간이 왔다는 생각. 직장을 가졌던 사람의 오래된 습관이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같은 가격에 서비스의 질은 낮다. 너나 나나 똑같은 처지에 무슨 서비스냐는 생각 탓도 있고, 업소의 주인이 좋은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경우도 있다. 대신 밥이나 국을 한 그릇씩 더 준다든지 그런 것은 있다.

보통 논문이 말하려는 것은 보편성이 갖는 현재성이고, 비평이 말하려는 것은 현재성이 지향하는 보편성이다.

책을 좀 읽은 학생이 작품 분석 수업에 심하게 저항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특별한 감동이 보편성에 흡수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 학생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그 보편성이 늘 흔들린다는 것이다.

출간한 지 상당한 기간이 지나지 않은 작품은 수업이나 논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 작품의 보편성을 의심해서이기도 하지만, 인기 있는 미혼이 결혼을 미루는 것과 같은 이유도 있었다.

90년대부터 기부금 입학 제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여론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수도권의 이름난 대학에는 부자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 마치 사람마다 지닌 다양한 재능으로 대학 갈 수 있을 것처럼 속이면서.

고려대를 마지막으로 입시에서 논술 고사가 없어질 전망이다. 수능 시대에, 부자들에게 논술 고사는 돈을 들여도 그만큼 성과가 나지 않아 대비하기가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다.

사치도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사치에 대한 욕구는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인간 정신의 불멸성에 관한 증거다.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생존 밖으로 넘치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삶이 삶이다. 하다못해 연필이라도 좋은 것을 사서 써야 한다.

옛날에 올린 트윗이 리트윗되고 있으면, 항상 민망하다. 매미가 제 허물을 볼 때도 이런 기분일 것이다. 매미한테도 기분 같은 것이 있다면.

『말도로르의 노래』를 번역하는데 ‘보람 없는 해방작업l’operation de la delivrance negative’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미 죽었는데 그 시체를 애써 끌어내기. 몇 년 전이었더라면 이 정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5원소〉나 〈스타워즈〉를 보면서 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그 절대악이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게 절대라서 만든 사람들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오늘 아폴리네르 강의를 끝으로 시민행성 강의가 모두 끝났다. 강의중 초기 자유시의 걸작인 「앙드레 살몽의 결혼식에서 읊은 시」를 성우 윤소라 선생이 읽어주셨다. 사람들이 다 감동을 받았다. 낭독의 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날카로울수록 너그러운 정신을 갖게 된다. 날카로울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보는 척한다는 말이 아니라 헛된 표준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신 없는 눈이 표준에 의지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언어 고찰은 탁월했다. 내가 번역에 어떤 이론 같은 것을 만들 때, 에코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자문해본 적이 많다. 『장미의 이름으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의문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비극은 억압적이며 희극은 해방 지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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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그 주체를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토드 필립스는 선을 넘지 않았고, 호아킨 피닉스로 말하자면 원래 관객의 호감을 자본 삼아 연기하는 부류의 배우가 아니다.

토드 필립스의 시나리오와 연출이 논란을 부르는 까닭은, 아서가 파괴적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하기 위해 지나치게 열심이기 때문이다.

연신 울리는 옆방의 전화벨은, 공무원 인력 축소를 보여주는 기능을 넘어 관객의 신경을 갈아댄다.

잘 맞물리지 않거나 지나치게 노골적인 플롯을 대신해 인물의 변화를 비언어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흔히 말하는 대문자 A의 액팅이다.

호아킨 피닉스는 만화적 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음의 병이 든 상태에서 어떤 외부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위험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는 전력투구한다. 높은 개런티를 보장하는 프랜차이즈 영화에 잠시 나들이한 태세가 아니다. 과거 조커들도 그렇고 이번 영화에서도 조커가 깡말라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상의를 벗고 웅크린 그의 골격은 뒤틀린 고목이나 해저생물을 연상시킨다. 견갑골 연기라는 새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커>를 정치적인 영화로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가 있다. 하지만 각 사건의 인종적, 계급적 맥락을 떼내고, 주인공의 곤경과 타락의 계기로 사건을 재배열한 시나리오는 결과적으로 <조커>를 사회 드라마로서 더없이 공허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회는 항상 나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어떤 혼란이건 혼란은 다 똑같다고 뭉뚱그리는 탈역사적 관점을 드러낸다.

<조커>에는 기묘한 도치들이 있다. 최초의 살인 전까지 아서와 접촉해 모멸감을 주는 인물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비백인이다.

현실에서 사회적 박탈감으로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은 힘을 가진 대상보다, 주변의 본인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예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말을 루퍼트의 몽상으로 해석하건 아이러니한 현실로 보건 영화는 병들고 상처 입은 정신을 가진 주인공과 일정 거리를 두고 그를 미국 사회 안에서 조망한다.

아서를 조커가 되도록 떠민 억압 가운데 보편화할 수 있는 변수는 공공의료 서비스의 폐기와 빈부격차 정도이고 나머지는 매우 특수한 가족사와 정신질환에 돌려진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은 방아쇠만 주어지면 쉽게 연쇄살인을 범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라는 편견도,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영화의 대성공과 함께 더 널리 퍼질 것이다.

<조커>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호아킨 피닉스의 아서 플렉 외에는 어떤 인물에게도 관심이 없다.2019. 10.

노쇠한 로건/울버린(휴 잭맨)은 더욱 노쇠한 멘토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를 ‘봉양’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길 희망하나 다음 세대 뮤턴트 로라(다프너 킨)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피투성이 여정에 오른다.

모든 영화가 앞뒤 영화의 ‘브리지’ 구실을 해야 한다는 태생적 한계가 불가피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행적은 축적되지 않고, 시간 여행과 유전자 복제라는 장치에 힘입어, 상실도 죽음도 다음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마블 슈퍼히어로물들은 영구적 팽창과 탈역사를 도모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울버린의 노화는 치유력이 치명적 상처를 커버하지 못하는 상태로 표현되고 찰스의 그것은 치매성 착란과 타인의 마인드를 움직이는 능력의 둔화로 드러난다.

제임스 맨골드는 혹시나 관객이 영화적 인용을 창의성 부족으로 오인할까 봐 불안해서인지, "우리 지금 오마주 중"이라고 과하게 티를 낸다. 찰스와 로라가 함께 호텔 객실에서 마침 <셰인>을 시청하며 대사를 곱씹는 신은, 기우의 소산으로 보인다.

<로건>은 우아한 염동력 말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제 손으로 사람을 찌르고 베어 온몸을 피 칠갑해야 생존 가능한 정당방위형 ‘연쇄살인자’가 장년에 이르렀을 때 직면할 환멸과 역겨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울버린은 세포가 재생될지언정 매번 고통을 느낀다. 육체의 통증이 가시면 눈앞에 산을 이룬 시체의 무게가 고스란히 죄책감으로 남는다.

살생의 업에 대해 번민하는 영화치고 <로건>의 연출에서는 <셰인>과 <용서받지 못한 자>가 보여준 절망적인 회의를 찾아볼 수 없다.

스스로가 쌓은 살인의 악업을 떨쳐낼 수 없다는 고백을 한 로건에게 영화는 이 이상한 ‘정당방위’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맨골드 감독은, 아마 로건이 반성을 하기엔 너무 지쳤다고 판단했나 보다.

고뇌만이 사람의 진정은 아니다.

내겐 늙은 로건의 회한만큼, 젊은 로건의 심술궂은 조크와 냉소도 울버린의 본질이다.

<로건>은 두껍게 그려진 유화다. 화법?法이 다른 그림이다.

나는 우리가 아는 엑스맨들이 이미 죽었다고 전제한 <로건>을 보는 동안, 그들 각자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개별 감독의 분방한 해석을 담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좀 잔인하고도 실현 가능성 없는 상상에 빠졌다. <에릭> <레이븐> <쿠르트>……. 아, 취소다. 슬퍼서 못 견딜 것 같다.2017. 3.

"미국 코믹스의 초인 영웅들 대다수의 목표는
현존하는 체제를 수호하고 지지하는 데에 있다."

배우 크리스 에번스는 하루 종일 촬영장에서 캡틴 아메리카를 연기하고 나면 "나한테도 농담 대사가 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적에게서 몸을 은폐하고 보호하는 기능보다 "초심으로,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정신을 만천하에 천명하는 일이 이 캐릭터에겐 더 중요하다.

<졸업>의 마이크 니컬스 감독은, 영화의 도입부가 이야기 전체의 메타포가 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는데, 이런 맥락에서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는 모범 사례에 해당한다.

70년을 건너뛴 시간 여행자로서 이 남자가 별안간 현실이 된 미래에 적응하는 방법은 아주 수공업적이다. 캡틴은 스포츠맨으로 치면 장거리 육상선수 유형이다.

개인의 자유냐 안보냐 저울질하는 질문은 9.11 이후 할리우드영화가 현실 사회와 자주 접맥하는 지점이다.

2014년 작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에는 과거 데이터를 잘 분석하면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을 충분히 골라낼 수 있다는?"오늘날 세계는 디지털 북이야"라는 대사도 있다?2천만 명을 희생시켜 70억 인구를 구해야 옳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캡틴은 원작 코믹스에서도 히틀러에게 직접 한 방 먹인 대표적인 반파시스트 영웅이었다고 하니 국기 유니폼을 입었다고 함부로 넘겨짚을 일이 아니다. 역시 옷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슈퍼히어로 서사는 본성적으로 파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구도가 불가피하게 파시즘에 대해 사고하도록 밀어붙인다는 의미다.

개중 노골적인 예는 사적 소유의 엄청난 부와 무력으로 사회악을 척결하는 백인 남성인 배트맨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는 개별 범죄에 대응하는 자경단원을 넘어 부패로 취약해진 공권력의 비리까지 손본다.

가장 ‘무지막지한’ 영웅 다크 나이트가 영화관을 나온 관객이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과 슈퍼히어로 서사를 연관된 이슈로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영웅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세련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에서 번뇌는 영웅들의 필수품이다.

만약 내일 당장 전경련이나 국회의사당에 망토와 가면을 두른 정의의 사도가 등장할 때 우리가 휘말리게 될 갈등과 논란을 <다크 나이트> 연작은 시적으로 과장한 형태로 보여준다.

현실 사회의 이슈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다크 나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슈퍼히어로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이다.

인종차별에 맞서 소수자의 힘과 도덕적 우위를 보여주는 일로 활약하는 엑스맨의 궁극적 목표는 기존 사회를 안정화하는 게 아니라 충격하고 뒤흔드는 데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지배적 가치관을 뒤집어야 한다.

친밀한 타인이라고는 심리적으로 유사성을 가진 숙적들밖에 없는 배트맨과 대조적으로 같은 마이너리티로서 동료들과 이익집단, 정치적 결사를 결성한다.

두 슈퍼히어로는 반대 경로를 밟아 우리를 동일한 장소, 현실 정치로 데려간다.

나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맨>에는 첫눈에 반했지만 <다크 나이트> 2편과 3편에 대해서는 갈팡질팡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위험스러워 보였다. 이 영화가 월가 시위를 정확히 상기시키는 스펙터클을 통해 반反자본주의적 저항을 야만적 폭동으로 축소한 다음, 고결한 엘리트 단독자의 희생에서 해결책을 찾았다는 해석에는 변호할 여지가 없었다.

클라이맥스 한복판에 들어앉아 있던 민란의 스펙터클, 시스템을 보존하려면 악당과 공유한 뿌리를 감추지 않고 초법적 행위가 필요하다는 신념을 뻔뻔하게 표명한 강성 히어로의 초상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조율된 서사에 최후 20여 분의 전투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세련된 슈퍼히어로영화의 단잠에 안온히 빠져 있고 싶은 나를 불쾌하고 두려운 악몽처럼 흔들어 깨운다.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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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치는 않더라도 감독과 작가 스티브 클로브스는 몇몇 보석 같은 캐릭터들에게 짧지만 빛나는 모멘트를 허락했다.

그리고 스네이프, 세베루스 스네이프! 모든 비밀이 밝혀진 후 우리는, 어절을 하나씩 씹어뱉는 그의 못된 말투가 자신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진심이 아닌 말들을, 하나하나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임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다.

제작 총지휘를 맡은 데이비드 배런이 밝힌 대로 <죽음의 성물2>가 구사한 3D의 99퍼센트는 관객 앞쪽으로 돌출하는 대신 스크린 뒤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방향을 취해 액션보다 미장센의 효과를 강화하고 있다.

예이츠는 그러나 사실적인 TV 미학을 대폭 도입함으로써 영화에 ‘머글’스러운 기운을 불어넣었고 때마침 그것은 시리즈가 필요로 하던 수혈이었다.

1편 <비밀의 방>이 제작될 무렵 조앤 K. 롤링은 5편 <불사조 기사단>을 쓰고 있었다. 이후 독자는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책을 읽었고, 관객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염두에 두며 영화를 보았고 출연 배우들조차 향후 몇 년간 본인이 어떻게 살게 될지 알기 위해 서점에 줄을 섰다.

지금 <죽음의 성물2>가 불러일으키는 잔잔한 안도감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진정 결말다운 결말, 대문자로 진하게 쓰인 ‘끝’에 목말라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발달한 기술이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게 만드는 반면 중대한 결단은 한없이 유예시키는 우리 시대에 장엄한 종지부는 희귀한 성물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후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는 무너진 호그와트의 교각 위에 나란히 손을 잡고 서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낀다. 마치 관객이 눈으로 그들을 사진 찍기 원하는 것처럼. 그래, 거기 가만히. 찰칵. 너희에게도 우리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안녕.2011. 7.

"영화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매체이지만
서사의 우주에 공헌하기를 멈춘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에 복수할 것이다."

부모가 다정히 침대 맡에서 이야기를 읽어주는 광경을 뒷날 미국영화에서나 본 세대인 나는, 누워서 혼자 동화를 읽다 눈치껏 전등을 끄는 아이였고 어둠 속에선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뒤치며 중얼중얼 이야기를 지어내다 잠이 들곤 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을 때 적용된 단어다. 배트맨이 존재하는 세계의 평면을 아예 바꾼?새로운 <배트맨> 3부작의 본질을 함축하는 조건절은 "이것이 현실이라면"이다

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충분히 즐겼다. 샘 레이미의 첫 <스파이더맨>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를 기다리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번 착안에는 재해석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흥분이나 안달은 숙면에 해롭다. 끝을 아는 이야기의 끝없는 재연, 그것이 주는 퇴행적 안도감이 아이들을 잠들게 한다. 그런데 나는 극장에서 안온히 잠들기 원하는가? 인정! 반쯤은 그렇고 반쯤은 그렇지 않다.

끝이 기약 없는 연작이 대세를 이루다 보니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가 안겨준 쾌감에는 작품에 대한 만족뿐 아니라 할리우드가 마냥 유예하기만 하는 ‘대단원’의 도래를 오랜만에 목도한 감개무량함도 적지 않았다.

장황한 예시의 결론은 할리우드는 이제 투자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두 줄의 문장으로, 30초 안에, 시놉시스를 설명할 수 없는 영화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라는 기계는 관객이 이미 아는 스토리라는 보증서 없이는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한때 무슨 이야기를 보게 될지 모른 채 두근대며 영화관에 가던 시절이 있었지"라고 아들딸에게 회고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할리우드의 20세기 마지막 10년간 흥행 상위 10위 중 6편이 오리지널 아이디어에서 나온 기획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21세기의 창작 시나리오는 저예산영화에 집중되고 있다.

배우 존 큐잭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더 이상 할리우드는 없다. 일군의 은행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줄리아 로버츠와 톰 행크스(<로맨틱 크라운>)도 조니 뎁(<투어리스트>)도 리즈 위더스푼(<하우 두 유 노우>)도 흥행을 약속하지 못하고 감독의 이름은 더욱 희미해졌다.

리안,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같은 개성 있는 작가에게 주류 할리우드가 문호를 개방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 결과는 그들이 주류 영화를 변화시켰다기보다 감독들의 마니아 취향을 스튜디오가 섭취하고 커리어 중 짧지 않은 세월을 프랜차이즈가 점유하는 그림에 가까워진 인상이다.

<가디언>의 데이비드 콕스는 할리우드가 2010년 제작한 영화의 60퍼센트는 여전히 오리지널 기획이지만 스크린을 차지하는 영화는 나머지 40퍼센트라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

2억 달러(한화 약 2600억 원)를 갖고 자기 스타일의 복합적인 사이코 스릴러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배짱을 과시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런 정도를 제외하면 과연 이 감독들이 합당한 프로젝트에 재능을 쏟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배틀쉽>을 보는 동안 내가 받은 충격은 보드게임을 영화로 각색했다는 전제가 아니라, 이 특정한 게임의 규칙이나 개성이 구체적인 액션 어드벤처의 서사로 어떻게 해석되고 변환됐는지 전혀 함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피터 파커가 10년에 한 번씩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그야말로 ‘할리우드 괴담’일 것이다.

기약 없는 속편의 벨트로 이어지는 영화 문화는 허황되게 영생을 꿈꾸도록 부추기거나 죽음과 상실을 외면하는 집단 무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시리즈화는 할리우드의 유서 깊은 전통이다.

결국 충실한 영화 리뷰를 쓰려면 『시학』보다 코믹스 우주의 계보와 『브랜드 하이재킹』 같은 책을 서둘러 읽어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매체이지만 서사의 우주에 공헌하기를 멈춘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에 복수할 것이다.

"‘싸움이 공정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어떤 여성 관객은 이 대사의 중의적 교훈을 새기며
‘예, 언니!’라고 복창할지도 모른다."

어이없게도 공적영역의 성비가 훨씬 기울어진 한국에서 살아온 27년간은 당연시한 나머지 무감했던 그림이었다. 머리로는 불평등을 인지했지만, 사고를 작동하기 전에 눈이 먼저 소스라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원더우먼>은 우리가 결여하고 있었으나 결여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던 이미지를 커다란 스크린에 펼치는 것만으로 심박수를 펌프질한다.

다이애나를 포함한 아마존 전사들의 액션에서 중요한 테크닉은, 먼저 공격하고 때려눕히기보다 상대방의 힘의 반동을 이용하고 정확하게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싸움이 공정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모인 안티오페 장군(로빈 라이트)이 방심한 다이애나의 허를 찌르고 경고할 때, 어떤 여성 관객은 이 대사의 중의적 교훈을 새기며 "예, 언니!"라고 속으로 복창할지도 모른다.

BBC와 인터뷰에서 원더우먼의 액션 디자인에 관해 패티 젠킨스는 "최소한 원더우먼은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유형의 히어로는 아니라는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확실했다"라고 밝혔다.

영화는 진실과 정의에 관한 다이애나의 천진한 믿음이 뜻밖의 돌파구를 뚫고 경험 많은 남자들을 설복하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그가 금녀 구역인 정치 회합에 끼어들고 다국어 능력을 발휘하고 남자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할 때 객석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분위기 파악 못 한 괴짜 여자가 아니라 개명 못 한 당대 남자들이다.

性이 종종 나약해지는 계기로 작용하는 여성 인물에게 있어 섹슈얼리티를 스스로 컨트롤하고 즐기는 모습은, 히어로에 걸맞은 강인함을 완성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일 수 있을 테니까.

<글래디에이터>에서 두 남성 라이벌 캐릭터와 삼각관계의 꼭짓점을 이뤘던 루실라 공주 역의 코니 닐슨과 <프린세스 브라이드>에서 원형적 프린세스 버터컵 역을 맡았던 로빈 라이트가 원더우먼 다이애나의 양육자라니 자못 훈훈하다.

슈퍼히어로영화의 또 다른 프리퀄을 보고 싶어지다니 믿을 수 없지만, 안티오페와 히폴리타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나는 두근거리며 극장으로 달려갈 것이다.2017. 6.

"상담사는 아서에게 말한다.
‘그들은 당신 같은 사람에겐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인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예요.’"

DC 유니버스와 연결고리를 짓는 대목을 제외하면 ‘분노의 피에로’나 ‘선동자’ 같은 제목을 붙여 심리 스릴러나 호러로 개봉해도 통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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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에 험한 말로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어도 내 뜻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제는 그런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말없이 블락한다. 어제와 오늘 33개의 블락을 했다. 별로 많은 수도 아니다.

한국어에서 쌍점(:)이나 쌍반점(;)은 앞말과 붙여 쓰고 뒷말과 띄어 쓴다. 그러나 모아쓰기 하는 한글에서 쌍점, 쌍반점을 붙여 쓰면 그 존재감이 약해진다. 영어 용법을 따른 것인데, 같은 로마자라도 철자 부호가 많은 프랑스어에서는 양쪽을 모두 띄어 쓴다.

당신은 자신이 착하고 순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돌쇠 철학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게다가 당신은 그렇게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스스로 우둔함을 드러낼 뿐인 빈정거림들.

성실한 번역자라면 그의 번역에 오류가 있건 없건 그의 선택을 일단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한동안 종적이 묘연하던 김이듬 시인과 연락이 닿았다. 프랑스 거처서 슬로베니아에 들어가 그곳 대학에서 한국 시를 강의하고 있단다. 여기서는 강사 자리 하나라도 누굴 밀어내고 들어가야 하기에, 헬조선을 피해 자진 망명중이라고. 춥고 외롭다고 한다.

최승자, 김혜순, 최정례, 김소월, 윤동주, 마당 등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그걸 슬로베니아 학생이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번역도 하고 있단다. 슬로베니아에 한국 시가 이렇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는 듯.

이럴 수가! 『어린 왕자』 번역이 또하나 나온 것 같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지금 받아보니 필사 다이어리 북이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게 있다. 상대에게 유일한 선택만을 허용하다가 마침내 궁이 피할 수 없게 몰고 가는 수. 그런데 유일한 선택밖에는 할 수 없는 외골수에 스스로 빠진다면. 학문이나 예술에서는 그 길이 위대한 길이 될 수도 있지만, 정치에서는?

온도가 낮다는 뜻이 아니라 상쾌하다는 뜻이다. 불쾌감을 날려버리고 훤하게 트인 느낌, ‘시원하다’가 특히 음식에 적용될 때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한국 사람만 그 감을 잡을 수 있다.

서구어로 된 시를 번역하는 중에 호격 명사 뒤에 수식이기도 하고 서술이기도 한 관계절이 두세 개 붙어 있을 때, 물론 번역가에게는 여러 가지 처방이 있지만, 어떤 처방도 그의 막힌 숨통을 터주지 못하고, 제 직업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막아주지 못한다.

난 〈스타워즈〉 볼 때마다 광선 검이 형광등처럼 보여서, 저게 언제 깨지나 걱정하느라고 몰입을 못한다.

상징주의와 관련된 텍스트에서 영어의 beauty나 불어의 beaut? 같은 말은 고유 명사나 다름없다. 한자를 쓸 때는 ‘美’, 최소한 ‘미(美)’라고 옮겼는데, 이제 ‘아름다움’이라고 쓰려니 허전한 마음이 없지 않다.

옛날 제자 하나가 불우한 처지에서 시를 쓴다고 해서 내가 주관하던 잡지에 발표 기회를 주었지만 시가 더 좋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잡지 편집인도 아닌 내게 발표를 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과 협박의 전화를 내내 걸어와서 차단했다. 마음이 좋지 않다.

문단에서 어느 문인이 잘나가면 그건 누가 뒤를 봐줬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문인은 원망으로 평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문인 생활을 접어야 한다. 문학에서도 행운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행운이 올 때 잡을 수 있는 능력이다.

노년에 들어 외워야 할 숫자가 바뀐다는 것도 인생의 불행 가운데 하나다. 새 우편번호는 끝내 외우지 못하고 말 것 같다.

"예절과 환상, 미학에 대한 고려가 없이 글을 쓰는 방식, 이 방식이 곧 인간관이 된다." 이런 메모가 수첩에 있는데, 누굴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카드는 남을 위해 쓰는 것이다, 30분만 지나면 나도 남이다.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이렇게 배웠지.

말하지 않은 생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지극히 하찮은 생각이라도 그래서 생각에는 늘 의무가 따르고 그 의무는 귀찮거나 버겁다. 평행 우주에 관해서들 말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평행 두뇌도 있겠지. 그러나 그 두뇌도 평행하기 귀찮고 버겁겠다.

‘이철수의 집’에서 날마다 보내주는 이메일 엽서, 오늘은 잎 떨어져 앙상한 대추나무 그림인데, 그게 꼭 낡은 집 벽의 균열처럼 보인다. 생명은 우주에 난 균열인지도 모르겠다.

소라넷에 관한 인터넷 글들을 살펴보았다. 성이 억압된 사회일수록 남자의 성범죄를 여자의 책임으로 돌리기 쉽다. 소라넷 폐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성을 상품화하고 폭력 대상으로 삼는 일을 성의 해방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선 요리를 잘했지만 입에 대지 않으셨다. 비린내를 탓했지만, 실은 그게 기분좋은 비린내와 함께 목을 넘어갈 때의 쾌감, 그 쾌감이 불러오는, 섹스를 포함한 온갖 육체적 관능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50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성에 대한 억압은 젠더 권력을 내면화한다.

10억 엔. 좀 오래된 농담에, 트럭 뒤에 숨어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트럭이 후진하는 경우를 ‘당황스럽다’고 하고, 전진해서 빠져나가버린 경우를 ‘황당하다’고 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트럭이 후진하는 척하다가 앞으로 달려가버린 경우와 같다.

쉽게 설명하면 소승은 택시나 자가용으로 혼자 가는 것이고 대승은 기차나 버스로 함께 가는 것이다. 어디를? 깨달음의 길을. 위안부 문제에 소승 대승이 왜 나와. 한 나라 외교부가 쓰는 말이라면 대충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경우에 딱 맞는 말이어야 한다.

내 어머니의 생선 요리와 육체적 관능에 대한 트윗을 올렸더니, 그게 ‘주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농담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육체적 관능에 대한 성찰과 자각이 예술적 감수성 함양의 시작이다.

트친들의 여망을 받아들여 새해애도 오타를 간간이 흘리겠습니다. 새해 행복하세요. 행복이 없는 시대일수록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답니다.

얼마 전 트윗에서 황씨 문인들을 열거하고, 자랑스럽게 이게 모두 황인데, "황교안 황우여도 황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어떤 분이 새벽에 그 트윗을 인용 알티하며, 같은 황씨라고 황교안을 두둔한다며 마구 욕을 퍼부었다. 비문해가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

서쪽 끝 섬 격렬비열도의 이름이 들어간 가장 아름다운 말은 박정대 시집 제목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시집에 그 제목의 시는 없지만, 격렬하고 비열했던 청춘의 회한은 많고, 「음악」이라는 시에 바로 그 말이 들어 있다.

무언가 켕겨서 시집을 찾아 열어보니 시의 제목이 ‘음악’이 아니라 ‘음악들’이다.

박목월의 「윤사월」에 관해 트윗을 올리자 표절 트윗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황당하다 생각했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나이를 생각하니.

미국에서 아구찜을 할 때 watercress를 미나리 대신 넣는단 트윗 보니, 랭보의 「골짜기에 잠든 사람」에 나오는 cresson이 생각난다. 두 사전을 찾아보니 모두 ‘물냉이’다. 그런데 물냉이는 국어사전에 없다. 요즘 한국에서 재배도 한다는데.

화살로 바위를 뚫는 사람을 반신(反神)이라고 하는데, 편집증 환자라는 뜻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컴에서 뭘 찾다보니 옛날 저장해놓은 2001도판 〈소오강호〉가 나온다. 클릭을 하니 닳고 닳은 이야기가 화면에 뜬다. 보는 둥 마는 둥 몇 회를 보고 있다. 시간을 그저 버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허핑턴에 결혼 생활 36년 36 깨달음이라는 내용의 글에 그 항목 가운데 하나로 이혼하자 대신에 ‘짜증난다’라 말하라고 하는데, 나더러 선생질을 한 번 더 하라고 하면 짜증난다 대신에 ‘속상하다’라고 말하라고 하겠다.

어제야 비로소 새로 정리된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을 가보았다. 한없이 넓은 느낌. 시내 한복판에 이런 책방을 가지고 있고, 서적에 전문 지식을 지닌 직원들이 거기서 일하고 있고, 책을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서울의 자랑거리다.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은 늘 악의를 동반한다.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 자체가 상상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진 소리를 상상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 재능의 부족을 말할 뿐이다.

역서에 "그는 성공적으로 옷을 벗었다"는 문장이 있다. ‘차례차례’겠지 하고 원문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successivement이다. 번역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 말이 안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둘째, 사전 찾아보기.

오늘이 금연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금연 보조제도 다른 기호품도 없이 독한 마음만으로 결국 성공했다. 중간의 큰 수술이 사실상 도움을 주었고, 트위터의 공고가 퇴로를 차단했으며, 이 정부에 담뱃세 내지 않겠다는 결심이 백배의 용기를 주었다.

어떤 비평가가 잡지에 좋은 시의 기준에 관해 길게 썼다. 요약하자면 지가 이해하면 좋은 시고 저한테 이해 안 되거나 낯설면 나쁜 시다. 그는 분명 동성애는 지 취미에 안 맞으니 나쁜 거고 페미니스트들은 지 엄마와 다르니 나쁜 여자들이라고 생각하리라.

내가 손은 자주 씻는 게 좋다고 했다고 나를 꼰대라고 부르고 블락을 통고한 사람이 있다. 블락이야 자기 맘이고 통고할 일도 아니지만, 이런 경우 꼰대라는 말은 명백한 혐오 발언이다.

문학이건 다른 예술 장르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도, 어느 길로 가야 한다는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개개의 작업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게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것이다.

어떤 번역본들을 보면 핵심 문장을 잘못 파악해서 그 이후는 오직 혼란이다. 번역한 사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두운 저승길을 헤메면서도 본인은 아마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어떤 위선적 정신 구조가 이런 레버넌트를 만드는 것 같다.

어쩌다보니 토요판 한겨레 시 기획을 오늘 아침에야 읽게 된다. 선정위원씩이나 되면서.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심보선의 70행 넘는 시를 생략 없이 전재했다. 소리 내어 읽으면 좋은 시. 산울림의 노랫말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도.

익명은 예술적 재능과 연결될 때 현실에서 벗어난 조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트윗에서는 무슨 권력과 같다. 익명이라도 자기가 받은 모욕엔 불같이 화를 내고 남에게 상처를 주었을 땐 명백한 잘못을 알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예술가는 아니니까.

낭만주의니 사실주의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게 낭만주의고, 이런 경우에 엄마에겐 이런 방법이 있다, 또는 아무 방법도 없다, 이게 사실주의다.

한국 음식이 너무 달고 짜고 매워졌다. 방송이 추천하는 음식에도 그런 음식이 많다. 음식물 섭취는 인간이 사물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인데, 몇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눌러버리면 물성에 대한 파악이 그만큼 제한되고 상상력이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 교육에 가장 시급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 살림하고 조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전시회 같은 것도 해야 한다. 물론 남녀 구분 없이.

이제 대답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내가 〈쓰르라미 울 적에〉를 좋아한 것은 치유 기능과는 관계가 없다. 이야기 하나를 여러 가닥으로 펼쳐가는 서사의 복수성 때문에 관심을 가졌고, 거기서 비평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고…… 한두 번 글에 쓰기도 했다.

부천 아동 시신 훼손 사건. 아들을 때려죽인 아버지는 일종의 자살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저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아들을 대신 희생으로 삼은 것이다. 나 어릴 적에 이런 종류의 부모들 많이 보았다. 부모들이 애들한테 죽여버린다는 소리를 일상사로 했으니.

분노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노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사용법도 알아야 한다. 분노에 먹혀버린 나머지,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이해하려고 하기도 전에 화부터 낸다면, 분노를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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