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 3천 명의 팔로워가 언팔을 했다. 물론 그 이유를 안다. 3천 명 내지 5천 명이 더 빠져나갈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지만.
일의 결정권을 쥔 사람들이 비판을 받으면 대안을 제시하라고 말한다. 바판을 받으면 자기가 대안을 찾아내야지, 자기 일을 비판자에게 미루다니.
어떤 인연으로 의학도들의 수필을 읽었다. 하나같이 건전하고 착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 몸을 맡길 수 있겠는가. 아니 몸만 맡기는 것이 아니구나.
도망간 사람은 나를 두고 얼마나 뒷담화를 까댈까. 암울한 세상이다.
4대강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여유만만한 것 같다. 어떻게 되겠지, 이러고 있는 것만 같다. 엄마가 다 해결해줄 거야, 늘 이렇게 생각해온 것처럼.
푸틴이 정상회담에 또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늦게 들어왔다. 알아서 가라는 뜻이 아닌가. 한국인의 끈기를 보여줄 데가 따로 있지.
결국 애가 쓴 시일 뿐인 랭보의 시가 왜 중요하냐고 누가 방금 물었다. 좋은 시는 늘 실패담이다. 그런데 아주 비장하고 순결한 실패담이 랭보의 시다. 그래서 중요하다.
제 집 개도 밖에 나가서 당하고 오면 속이 상하게 마련인데.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자다움’에 대한 기대가 여성 혐오라는 내 말에, 남초 사이트에서 ‘그럼 남성다움에 대한 기대는 남성혐오겠네’라고 비아냥거린다고 한다. 내가 간단하게 대답해준다.―그것도 대개의 경우 여성 혐오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의 8, 90%는 상투적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자기 글에서 단 한 문장도 상투적인 문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글에서 상투어구는 바둑의 속수와 같다. 속수를 두고 이기는 기사는 없다.
글 쓰는 사람도 상투적인 문장을 상투적이 아닌 방법으로 쓰기도 하지요. 당연히 수준 차이지요.
좋은 작가에게는 상투적 문장이 없다는 말을 이상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오정희 문장은 쉽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있는가. 없다. 이문구는 충청도 사람같이 말하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있는가. 없다. 박완서는 말하듯 썼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있는가. 없다.
비록 불법 시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물대포로 쏴서는 안 된다. 법치 국가에서 가장 엄하게 그리고 가장 먼저 다스려야 하는 것은 공권력의 불법이다.
상투적인 문장을 쓰지 말라는 말을 이상한 문장을 쓰라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노인 학교 같은 데서 한글을 배운 할머니의 글, 한국어를 갓 익힌 외국인의 글, 이런 글에는 상투적인 문장이 드물다.
서울 근교에 욕쟁이 할매라는 간판 단 밥집이 있다. 물론 불친절하고 상차림 형편없는데 늘 손님은 많다. 왜 사람들은 욕먹는 걸 좋아할까. 친절은 가짜고 욕은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유머는 자주 용감하지만 너스레는 자주 비열하다.
온천탕 대기실에서 어떤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나는 그걸 보고 그 사람이 영수증을 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지폐를 꺼냈다.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그 사람은 그럴 수 있지만 나는 뭐야.
생각은 자기만 해야 하고 남이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애하는 남자가 그런 사람이면 여자를 납치하고, 대통령이 그런 사람이면 자기와 똑같은 생각으로 일치단결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사실 생각이 없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Le Rayon Vert〉는 ‘녹색 광선’으로 번역되었다. ‘초록 광선’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 열 편을 골라보다가 든 생각이다.
쿨한 것처럼 들리는 사투리를 쓰면 자기가 정말 잘난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다.
문학상은 많고, 많아서 좋기도 한데, 꼭 문제가 많은 사람들만 골라서 주는 상도 있다. 문인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으로 어떤 품성이 길러지지 않는다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나가 없으니 모든 것이 없다"는 라마르틴의 시구가 있다. 이번 2박 3일 목포 일정이 그렇다. 충전기 하나가 없어 모든 계획이 박살났다.
문학 번역을 비롯한 인문학 번역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임시 텍스트나 대체 텍스트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각이 어떤 언어를 통해 발생하고 전개된 과정을 우리말로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수입하는 것과 번역하는 것의 차이.
원래 우리말에서 ‘씨’가 붙는 말은 다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신분 제도가 무너지면서 이 ‘씨’를 누구에게나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진심으로 높이지는 않으면서 높임말을 쓰게 되면 그 말이 천해진다. 타의에 의한 근대화의 상처는 말이 가장 크게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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