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 Olika 만년필, 써보니까 괜찮다. 2,500원짜리 만년필이 Lamy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듯.
알고 보니 값싸고 성능 좋은, 거의 일회용에 가까운 만년필들이 많구나. 프레피, 파카 벡터도 써봐야겠다. 검은색이나 청색 잉크 만년필과 함께 붉은색 잉크 만년필도 필요하다.
한국에서 공부에 별 뜻이 없다가 외국에 나가 어떻게 박사학위를 얻어온 사람이 있다. 조심해야 할 사람이지만 특히 그 번역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내가 최근에 읽은 번역은 시종 한 문장도 맞지 않았다. 번역 전문가의 검증을 받는 게 좋으련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기 번역이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모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가 교수라도 되는 날에는 누가 그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변증법과 관련된 용어 가운데 하나인 ‘지양(止揚)’을 ‘벗어남’ ‘삼감’으로 순화했다는 것을 오늘 알았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느와르’는 프랑스어 noir를 발음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런데 문교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누아르’라고 적어야 맞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단어만은 ‘느와르’라고 쓰는지 모르겠다.
비판에 비평 개념은 없고 비난 개념만 있으면 그것도 지옥이다.
누구의 책을 비판하려면 최소한 그 책을 읽어라. 신문 기사를 자동인형처럼 반복하며 그게 자기 의견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
인간은 복잡하고 섬세해서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늘 타자화한다.
가을 소금, 여름 소금은 우리 어머니도 구분하셨다. 초여름의 소금을 가장 좋은 소금으로 쳤다.
구절판은 대갓집에서 아이들에게 젓가락질 연습을 시키기 위한 음식이라는 이야기도 그 집에서 들었다.
우리도 영미권처럼 방학중엔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칼럼이 있다. 방학에 월급을 주지 않는 나라는 다른 기간에 월급을 많이 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군. 연봉 개념이 익숙하지 않아선가. 이 나라 지식인들은 다른 직군에 대한 질투가 심하다.
원고 한 꼭지 마감했다. 한 번 읽고 보내야 하는데 읽기 싫다. 자고 나서 내일 보내기로 한다. 읽지 않아도 하루저녁을 묵혀둔다는 게 작은 위안은 된다.
나는 가끔 山林處士 선생의 트윗을 읽으면서 이거 고종석 선생 트윗 아닌가 의심할 때가 많다. 그 박식함하며, 그 문장의 또렷함하며, 그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증오하며.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말들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말들의 가짓수가 많기도 하다. 아이를 그렇게 먹물 단지 조심하듯 조심해서만 키우는 게 아이에게 꼭 이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도 걸러서 들을 줄 안다. 아이의 판단력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연한 인기를 권력으로 바꾸고 싶어하면 대개는 좋지 않게 끝나더군.
우리 선생님은 『악의 꽃』을 번역하다 돌아가셨다. 시 한 편에 100페이지 200페이지의 자료를 모으는 식으로 번역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루에 5편도 번역한다. 생각을 더 해도 덜 해도 결과는 같으니까. 일종의 포기.
옛날에는 전자 기기 사면 매뉴얼 다 읽고 그대로 했다. 그후론 매뉴얼 안 읽고 대충 했다. 요즘은 읽어도 모르겠다.
칠레에서 여친을 때리고 눈을 도려낸 범인을 대법원이 23년형에서 18년형으로 감형하면서 살해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 살해 의도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법이란 게 그렇다. 잔인성에 대한 죄도 있어야 한다. 인간성에 대한 모욕이니까.
(요즘은 농담에도 시비 거는 사람이 많아서.)
동네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남의 생활 공간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리는 사람은 자기에게 그럴 능력과 권력이 있는지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시를 읽을 사람은 공짜로 읽을 생각 하지 말고 시집을 사서 읽어라.
요즘 가나다라……의 순서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종이 사전은 사용할 수가 없겠다. 심각한 문제 아닌가.
한국은 연구자 시장이 좁다. 대학이 대학원생들을 1/3도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젊은 시절 미국에서 이력을 쌓는다. 쓸 만한 논문은 거기서 다 쓰고 지쳐서 한국에 온다. 한국의 입장에서 미국은 연구자들을 기르는 곳이자 걸러내는 곳이다.
인문계, 그중에서 문사철 교수는 미국에서도 시장이 좁다. 문사철 대학원생들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거의 열정만으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걸 또 착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왕좌의 게임〉을 복습하다 새삼 느낀 바지만 인간의 죄 중 비열함이 가장 큰 죄 같다. 그건 인간 전체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것이고 인간 자체를 모욕한 것이다. 비록 허위라 하더라도 용기와 신의에 열광하는 것은 인간이면 그렇게 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국 문학과 외국 문학의 관계는 특수성과 보편성의 관계와 같다. 외국 문학이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은 언어 국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현장 작품과 고전과의 관계도 마찬가진데 이제는 어떤 나라 문학도 자국 문학만으로 이 관계가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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