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역경을 역경이라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몇 달이 지나도록 엘리자베스의 근성은 계속해서 도전받았다. 그녀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은 극장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가끔은 실망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재밌다는 평이 도는 오페레타 「미카도」의 표를 샀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도 없이, 보면 볼수록 전혀 재미가 없었다. 노랫말은 인종차별적이고 배우는 죄다 백인이며 여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전부 뒤집어쓰고 비난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연구실에서의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이제 디페닐아민 아르신의 에어로졸 분산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군요. 아무도 영향받지 않았으니까요."

"캘빈, 문제가 뭐냐면요,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이 쓰이지도 않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연구를 완수할 만큼 물품을 지원받지 못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문제는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자들이 대학에 간다 해도 케임브리지 같은 곳은 못 다녀요. 그 말은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고, 따라서 동등한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죠. 여자들은 맨 아래에서 시작하지만 더는 높이 올라가지 못할 거예요. 임금차별은 두말할 것도 없어요. 이건 모두 애초에 여자들이 남자들만 받아주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어서 생긴 문제예요."

시스템을 굳이 뛰어넘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싫었으니까. 애초에 시스템을 바르게 만들면 안 되는 거야?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것도 정말 싫었다. 호의란 결국 꼼수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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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일단 화가 나면 원한을 심하게 품는다는 것이었다.

원한을 품는 성미에 이은 또 다른 단점은 급한 성질이었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단점을 언급하자면, 그는 조정 선수였다.
조정 선수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조정 선수들은 재미없는 인간이다. 항상 조정 이야기만 하려 드는 바람에 대화에 조정 선수가 둘 이상 끼면 그 자리는 일이나 날씨 같은 정상적인 화제에서 벗어나버린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캘빈의 멍청함은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캘빈은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싶어 했는지라 더 문제였다.

물론 아주 괜찮은 점도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치아였다. 미소를 지을 때 곧고 하얀 치열이 드러나서 얼굴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달라 보일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엘리자베스 조트와 사랑에 빠진 다음부터 캘빈은 언제나 미소를 짓고 다녔고,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남자는 겉모습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이로군. 그녀가 보기에 그건 케케묵은 고정관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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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 2014-2018 황현산의 트위터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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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자 트위터 글에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감정을 자제하는 글을 읽으며 여러가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분의 모든 생각에 공감하진 못하지만, 마지막에 본인의 번역서를 완성하고 쓴 글은 이 책을 통해 느낀 그분의 성품이 가장 잘 느껴졌다. 더 이상 그분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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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화학이고 화학은 삶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꾸는 능력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변화에는 항상 적절한 시간과 열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사람들은 60년대에 시

민운동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때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그 뒤로도 60년이나 그 운동을 질질 끌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못됐어.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 네 생각이 맞아."

어린아이는 보통 글을 못 읽는다. 읽어봤자 ‘개’나 ‘고양이’, ‘가다’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매들린은 세 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다섯 살인 지금은 찰스 디킨스 소설을 이미 대부분 독파했다.

매들린은 특이한 아이였다. 그런 애들 있잖은가. 바흐의 콘체르토를 흥얼거릴 줄은 아는데 신발 끈은 못 매고, 지구의 자전은 설명할 줄 아는데 틱택토 게임은 못 하는 애들 말이다.

어린아이가 천재적인 음악 소질이 있으면 반드시 찬사를 받고 유명해지지만, 책을 척척 읽어대면 별 관심을 못 받는다.

책 읽기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다른 애들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제일 먼저 글을 떼고 책을 읽는 게 뭐 대수겠는가. 주변 사람들 짜증이나 나게 할 뿐이지.

매들린에게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눈에 띄지 않게 묻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다. 그 점에 대해 아이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자기 엄마가 어떻게 되었나 보란 말이다.

우정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매들린의 일일 영양 섭취량은 최적의 발육을 위해 정확히 계산된 것이었기에,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남자도 도시락은 쌀 수 있습니다, 파인 씨.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의 뇌를 일깨우고 가족을 단합시키고 미래를 결정하도록 도와주는 촉매제가 음식이라는 점은 모두가 아는 바죠.

그녀의 요리는 그녀만큼이나 있는 그대로였고, 아주 현실적이었다.

"얘들아, 상을 차려라. 너희 어머니는 이제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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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람들에게 함부로 자폐니 뭐니 이름을 붙이고 자기 멋대로 분류하는 것도 폭력이다. 사람은 사람마다 그 깊이가 있고 그것은 쉽게 짐작할 수 없다.

바람은 먼 숲으로 지나가고
꽃들은 이울어 다시 피지 않으니
이제는 그대와 나 같이 살 날이 없네.
?18세기 소설 속에 이런 시구가 있다.

하룻밤 자려고 만리장성 쌓는다는 잘 알려진 말. 많은 사람의 인생이 다 그런 것 같다. 그 하룻밤이 거기 이르기까지의 삶을 지켜주기도. 오늘을 즐기라 외치는 사람들조차 그렇다. 저 하룻밤이 오늘의 모델이다. 그 밤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지만.

트윗에 쌀 알레르기 있는 아이에게 강제로 밥 먹여서 아이 병원에 가게 만든 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남자다운 것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고 믿는 아버지들이 아직도 많다.

새희망씨앗의 전화를 나도 받은 적이 있다. 자선 단체를 내걸고 전화하는 사람이 많은데 대개 사기꾼들이지만 불우 아동 등을 내세우고 있어 전화를 끊기 어렵다. 이럴 때는 ‘나는 이런 전화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다.

닭을 친환경적으로 기르면 계란값은 1000원 이상이 된다고 한다. 소비자들은 요구하는 수준이 높은데, 그만큼의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중국이나 일본이 망해서 우리에게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설사 좋을 일이 있다 한들 남이 망하기를 바란다는 게 옳은 일인가.

음악인 조동진씨가 별세했다. 조동진씨의 가사에는 한 편도 허투루 쓴 것이 없다. 그의 시에는 진정한 의미의 ‘전’이 있다. 감정의 반전은 스토리의 반전보다 더 심각한 어떤 것이 있음을 그 가사가 보여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말했다, 설명했다, 주장했다…… 같은 말을 언어학에서 전달사라고 한다. 요즘에 이런 전달사를 아무렇게나 입에 씹히는 대로 붙이는 기사들이 많다. 글쓰기의 능력이 없어서도 그렇고 마음을 비워놓지 못해서도 그렇다.

개나 고양이의 죽음이 다른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개나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작별 인사 같은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욕탕에서 일하는 허리 굽은 노인이 거울을 깨끗이 닦아놓고 흐뭇해서 바라본다. "주인집 빨래를 해도 내 발꿈치 희어지는 재미로 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어디서나 자기를 실현할 기회를 찾지만 존중되어야 할 그 열망이 자주 착취되기도 한다.

못 써도 고결하고 아름다운 글씨가 있고 잘 쓴 것 같은데도 무언가 마뜩지 않은 글씨가 있다. 나는 내 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글씨가 달라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컴 세상이 오지 않았으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스트레스 없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것인데.

살아 있는 것 같은 책들이 자주 출판된다. 『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 저자 이주영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낯선 곳에서 자기를 확인하려는 용기가 아마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내 고향 말에 ‘새수가리 없다’는 표현이 있다. 어떻게 된 말인지 늘 궁금했다. 아마도 새수가리는 소갈머리를 뜻할 것이다. 그러니 새수가리 없다는 ‘속없다’ 곧 ‘생각에 줏대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별게 다 생각나서.

예술이 지향하는 이상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우면서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쓸모없다는 것은 ‘지금은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의 쓸모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기도 하다.

아내는 홈 쇼핑에서 자기가 이미 구매한 상품의 광고를 보기도 한다. 신상품을 구입한 직후 매우 행복하지만 구입하기 직전만큼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취준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미래에 없어질 직업에 첫번째로 번역가를 꼽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번역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하겠지만, 영혼 없는 번역들이 이런 생각을 부추기기도 했을 것이다.

뜬금없이 장기판과 장기말을 샀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로 깎은 장기말을 본 것이다. 장기를 두게 될 시간은 끝내 오지 않겠지만.

한국 방송에는 코미디언들이 잠시 군인이 되어 온갖 바보 노릇을 다 하는 프로그램이 많다. 한국 군대 그 자체가 코미디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말도로르의 노래』를 출판하기 위한 모든 일을 다 끝냈다. 『현대시학』에 연재하다가 중단했던 번역을 끝냈고, 그 번역을 수정했으며, 책 뒤에 붙여야 할 해설도 썼다. 이 책의 쓸 만한 한국어 번역본이 이제야 나온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밤이 선생이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이후 제가 쓴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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