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엘리자베스는 친구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이사를 많이 다녔고, 부모님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으며 오빠마저 잃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힘든 일을 겪어온 사람도 친구를 잘만 사귀는 경우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는 있었다. 어떨 때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남보다 친구를 더 잘 사귀는 것 같았다. 마치 역마살이 끼어 돌아다녀야 할 운명이라거나 깊은 슬픔 등을 겪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정착한 곳에서 인맥을 쌓는 게 매우 중요하단 걸 깨달아버린 것처럼.

여자들의 우정에는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었다.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비밀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걸 정확한 때를 맞춰 폭로하는 능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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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그 말에 터퍼웨어에서 공기를 뺀 다음 엘리자베스는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게 문제야. 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물론 그녀가 없어도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없다면 대체 제 기능을 하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4번에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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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행복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분에 넘치게 행복한 꼴을 보는 것보다 짜증나는 게 또 있을까.

그는 엘리자베스를 설득하려면 논리를 들이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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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수대 앞에 있던 엘리자베스와 우연히 부딪쳤다가 머리카락 향기가 훅 끼쳐왔을 때도 캘빈은 기절하지 않았다. 어떻게 머리카락에서 그런 냄새가 날까. 이 여자는 혹시 꽃으로 머리를 감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하지 않을 때도 일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창의성과 독창성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불을 붙이면서 말이다.

훗날 과학계는 두 사람이 이룬 업적의 어마어마한 생산성에 경탄했지만, 만약 그들의 업적이 대부분 벌거벗은 채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더욱 경탄했을 것이다.

타인의 어린 시절을 끝까지 파헤쳐서 쟤는 대체 누구 때문에 저런 사람이 되었는지 속속들이 파고들고 싶은 욕망은 다들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엄격한 부모님 때문이었구나, 항상 이기려 드는 형제자매 때문이었구나, 미친 고모가 있기 때문이었구나 하며 이런저런 판단을 내리는 게 사람의 습성이다. 두 사람 역시 그런 욕망이 있었다.

그리하여 가족 이야기는 마치 유서 깊은 고택을 탐방하다가 마주친 ‘출입 금지’ 방 같은 화제가 되었다.

네가 많이 힘든 환경에서 자라나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수도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부모님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꼭 그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어.

"캘빈,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풀 때 언제나 간단한 해결책을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걸 믿는 편이 훨씬 쉽거든. 실제로 보이고 만져지고 설명할 수 있는 걸 믿기는 오히려 어려워. 말하자면 실재하는 자기 자신을 믿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꾸준히 슬픔을 먹으며 자라난 사람은 다른 이가 자신보다 더 큰 슬픔을 먹고 살았다는 걸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어렸을 때 난 스스로 이렇게 말하곤 했어.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 힘내자, 내일은 달라질 거야. 뭐든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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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안개 속에서 그들 남녀의 목소리는 분수처럼 드높이 사라져 갔다.

도모기 마을 이래, 자신이 성직자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자 여기서의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은근히 원했다.

밤이 되자 신부는 어둠 속에 앉아 잡목림에서 우는 산비둘기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느꼈다. 맑고 인자한 눈이 위로하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조용했지만, 자신에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런 자세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무릎이 아파 진땀을 흘렸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관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채찍으로 맞았을 때 그리스도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를 열심히 생각하면서 무릎의 통증을 잊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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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13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큰 고통을 상상하는 것에 집중하면 현재의 통증을 덜 느낄 수 있겠어요.
비교해 봄으로써 고통의 크기를 줄이는 효과를 보게 되지요.

라로 2022-09-13 13:50   좋아요 0 | URL
맞아요!!저도 그런 경험 있어요. 물론 이 책처럼 그정도는 아니지만요.
페크님 이 책 일어보셨어요?? 문장도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