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갔다. 그곳의 커다란 창문 앞에 늘씬한 몸매의 인물이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여인은 백작이 다가오는 소리에 몸을 돌리더니 살포시 옷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옷이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가 은은히 새어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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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손을 잡은 자들이 미처 손도 잡지 않은 독불장군을 몰아내고 함께 사는 곳이 자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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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 모든 게 순조로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없이도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위안을 얻었다

정확하고 깔끔한 체호프의 작품들은 우리를 어떤 별개의 시간에 어떤 가정의 한 구석으로 초대하는데, 그곳에서 적나라한 인간 조건이 갑자기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게 되죠. 무척 가슴 아프게 말입니다.

톨스토이가 있어요. 당신은 『전쟁과 평화』보다 시야와 범위가 더 큰 작품을 생각해낼 수 있나요? 배경이 응접실에서 전장으로, 다시 전장에서 응접실로 능란하게 옮아가는 작품을 생각해낼 수 있어요? 어떤 식으로 개인들이 역사에 의해 형성되고, 역사가 개인들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그토록 철저히 탐구한 작품을 생각해낼 수 있느냐 말입니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앞으로도 문학의 알파와 오메가인 이들 두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작가는 없을 겁니다.

"젊은 여성이 상심해서 죽는 건 소설에서만 나오는 얘기예요, 찰스. 누이는 성홍열로 죽었어요."

그러나 타국 대신자기 나라로 추방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국 추방은?시베리아로 보내든 ‘6대 도시 금지’형에 처하든 간에?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부식되어 흐릿해지거나 시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시킨 문학 애호가, 알렉산드르의 옹호자, 눈에 띄는 모든 베갯잇에 수를 놓았던 이, 너무 고운 마음씨로 너무 짧은 삶을 살다 간 옐레나를 위하여."

역사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기념이 될 만한 사건들을 짚어보는 일이다.

받는 사람 칸에는 백작의 성과 이름이 고스란히?무심한 듯 단정하고 비교적 쓸쓸하며 가끔은 시비를 거는 듯한 필체로?쓰여 있었다.

수줍음과 기쁨이 있는 마리나의 수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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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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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하루에 다 읽긴 요즘 불가능인데 저녁 시간 빼고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개인적인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 책을 읽으며 웃다가 울다가 반복, 진정한 블랙 코미디! 사투리도 쨩, 우리의 아픈 과거를 다시 돌아보았던 시간, 영화로도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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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러니 우리 집안에 유머가 있었다기보다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 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웃기긴 했다.

그 여인네는 인물로나 몸매로나 차림새로나 작은어머니감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여 어머니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다. 그 여인은 말하자면 민중의 전형과 같은 생김새였고 나는 취향마저 빼도 박도 못하게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에게 다소 실망하여 찬바람에 진저리를 치면서 냉큼 문을 닫았다.

인물은 박색이었으나 방물장수의 목소리는 갓 지은 찰밥처럼 좌르르 윤기가 흘렀다.

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행여 손님이 들을세라 어머니는 아버지 귓가에 다소곳이 속삭였다. 신기(神氣)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의 예민한 감각으로 국방군의 포위 직전 아지트를 빠져나와 곡성군당을 살렸다는 전설 속의 혁명가 아버지는 국방군이나 경찰이 포위하지 않는 한 조심성이란 눈곱만큼도 없어 어머니가 귓전에 속삭이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귀를 쓱쓱 비비고는 큰소리로 받아쳤다.
"우리 집이 방이 왜 없어? 야랑 자먼 되잖애?"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본인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내 첫 기억에서부터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니 잔꾀를 써서 망태에 새끼줄을 연결하고는 그걸 허리에 질끈 묶은 채 질질 끌며 우리 집으로 왔다.

그날 나는 이장 집에 가서 조선일보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작은 단신 하나를 찾아냈다.
"지난7월15일 미국의 유명 아나운서 크리스틴 처벅이 방송 도중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에 쏴서 자살했다."
처벅은 퍼벅이 되고 퍼벅은 펄벅이 되었다. 작은아버지가 처벅이라고 했는지 퍼벅이라고 했는지 펄벅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명한 작가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사실이다.

작은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신문을 열심히 읽지만 뭔가를 잘못 읽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꼭 낭패를 보았고, 그 낭패를 다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다.

탓을 하는 인생은 이미 루저다,라고 아버지 닮아 냉정한 고등학생쯤의 나는 판단했고, 그 이후 작은아버지를 소 닭 보듯 보았다.

작은아버지는 지금쯤 빈속에 깡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것이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는 세상이 두려워서.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차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램 한나 읎는 가난뱅이들헌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남의 상갓집 갈 때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얼마쯤이어야 당신과 나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줄까. 다른 사람이 얼마나 내는지 은근슬쩍 알아봤고 보통이면 그 정도, 좀더 마음이 있으면 몇만원 더, 평생 볼 사람이면 잊을 수 없게 많이, 나는 그렇게 살았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사회주의자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 부모는 어린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흘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울다가 별수 없이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도 없다. 이게 바로 빨치산의 딸의 본질인 것이다.

고 봐라, 가시내야. 믿고 살 만허제? 영정 속 아버지도 나를 비웃는 듯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인간을 신뢰했다. 보증을 서줬더니 말도 없이 야반도주해버린 먼 친척도 아버지는 원망하지 않았다.

비록 국졸이긴 하나 구례서 어머니처럼 지적인 사람은 흔치 않았다. 차분하고 음전한 데다 깊은 눈빛에 교양 있는 말솜씨 하며, 판검사나 작가라고 해도 수긍할 만한 분위기였다. 늘 책을 끼고 사는 어머니를 교장쯤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매일 아침 등굣길에 나를 데리러 오던 국민학교 선배의 첫사랑도 바로 어머니였다.

이데올로기란 것이 돈이나 모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구나,

아버지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서늘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노려보더니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 혼차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남을 위해 천이백만원을 기꺼이 지출할 수 있었던 아버지 본인에게 필요한 돈은 하루 사천원이었다.

내가 외면한 것은 하동댁이 아니라 위대한 혁명가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 뻔한 남성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위스키라면 환장하는 내가 한달 동안 입맛을 다시며 상전 모시듯 고이 모셔두었다가 아버지에게 준 이유는 술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평생 먹어본 술이란 게 고작 막걸리와 소주뿐인 인생이 안타까워서였다.

걱정이든 잔소리든 말 많은 건 아버지 닮아 딱 질색이었다.

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변죽 좋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 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워찌나 청산유순가 쎗바닥에 신이 내렸는 중 알았당게. 말문 터질라먼 예수 믿어야 쓰겄대."

"아이, 겡희야. 생각이란 것은 월매든지 바뀔 수 있니라. 긍게 니도 찬찬히 잘 생각해보그라. 온 시상 과학자들이 다 진화론을 주장허잖애? 그 사램들이 다 핫바지겄냐? 긍게 교회 말만 듣지 말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함시로 하나님 말고 니 머리로 잘 생각해보란 말이다. 그러라고 사램 머리가 달레 있는 것잉게."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신념이 아니면 지키기 어려우니까.

늘 시끄럽고 어수선한 언니의 마음이 손톱만 닿아도 짓무를 농익은 수밀도 같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죽음 앞에서도 용서되지 않는 죄란 무엇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나중에 그 친구가 그랬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한 게 우리 아버지가 처음이라고. 어쩐지 아버지 말에 지금까지의 모든 설움이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고.

노란 머리만 보고 노는 아이라 함부로 판단한 게 미안했다. 고 봐라. 내가 뭐랬냐? 믿으랬제?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분명 그렇게 꾸짖을 것이다.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버지는 자신의 과오조차도 감추는 법이 없었다.

전향을 하고 안 하고, 자수를 하고 안 하고가 한 사람의 생 전체를 판단할 좌표와 같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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