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름을 바라보려는 ‘세계로의 열려 있음’, 그리고 우리의 학통과도 어떤 이음점을 찾아보려는 지향과 모색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옛 서원들이 경관 좋은 곳에 그대로 서 있건만, 대체로 내용이 다 비어버린 모습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걸 포섭하면서도 우리 시대를 담아넣는 길이 없을까 하는 꿈을 나름으로 좇아왔지요.

어딘가에 해가 될 일은 없을 듯싶었습니다. 자금이 넉넉하여 돈을 쏟아부어 한 일이 아니고, 지원을 받거나 세금을 써서 벌여놓은 일도 아닙니다. 그저 뜻이 있기에 어찌어찌, 정말이지 하늘이 도와, 조금씩 이루어진 시설들입니다.

외롭고 고단한 주경야독이 수반되지만 시간이 가다보니 귀한 사람들이 찾아오고(먼 곳에 있는 책 집을 우정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 귀한 사람들이지요), 꽃과 나무들이 자라고, 건물도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지속적인 굳은 뜻이나 마스터플랜 없이 지어지는 과시적 시설들에 대한 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집 안에서 젊은이들에게?그저 ‘꿈을 가져라’가 아니라?실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크는가. 둘째, 그런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어 생각하는 가운데 계획이 조금씩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지을 집들을 채울, 방대한 괴테의 글을 열심히 옮기는 중입니다. ‘한 손에서 나온’ 괴테전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괴테의 작품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아직 그 누구도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낸 일을 해가고 있는 중이지요. 그 많은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길 수야 없고, 선별조차도 이제야 겨우 가능해져서 벌이게 된 일입니다.

이제 와서 찾을 명리名利야 없습니다. 그러나 익히는 데 평생이 걸린 글들을 저만 혼자 읽고 그냥 들고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많이 해두려 합니다.

방황에 빠져 허우적이기도 하는 젊은 날, 겨울산을 오르며 자신의 운명을 헤아려보는 성찰이 두드러진 시편입니다. 이 시는 문득 절로 터져나온 듯한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매처럼,
무거운 아침 구름 위에
부드럽게 날개 펴고 가만히 뜬 채로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떠돌아라 나의 노래여.

하지만 저기 외따로 가는 자 누구인가?
그가 걷는 길은 덤불숲 속으로 사라진다
그 뒤에서 덤불들이
다시 얽히고
풀이 다시 무성해지고 이윽고
황야가 그를 삼켜버렸다

그대의 현금을 퉁겨
사랑의 아버지여, 음音 하나라도
그의 귀에 들리게 해서 그 마음에 생기를 주소서!
흐린 시선을 열어
황야의
목마른 자 곁에 있는
샘물을 보게 하소서!

심지어 사람 사는 동네 이름이 ‘비참Elend’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척박했으면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축복 받았어라, 세상 앞에서
증오 없이 자신을 닫는 이

어디서든, 장엄한 자연 속이면 더더욱, 자신을 만나는 순간은 아름답습니다.

기나긴 생애 동안, 아침 5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글을 쓰고 그 이후에 다른 활동을 시작했지요. 이 어수선한 시기에 사기꾼 이야기 『대大 콥타』를 쓰고 그 바로 전에는 "마흔이 되기 전에 공부 좀 해야겠다"며 이탈리아를 찾아갔고, 거기서 평생작 『파우스트』의 상당 부분을 쓰고 화해의 드라마 『이피게니에』를 마무리하고, 돌아와서는 「로마의 비가」가 쓰이고 식물 및 동물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식물변형론』을 쓰고, 프랑스 왕립 학술원에서 발표된 논문 「악간골顎間骨 연구」의 초안도 잡힙니다. 산업의 중흥에 매진하여 방적 산업을 장려하고 광산을 관리하고, 교육에 힘썼습니다. 예술과 학문을 바탕으로 작은 공국 바이마르를 정신적으로도 이끌어올리고자 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두들 코로나에 경제 문제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뉴스에서 눈을 못 떼고 지낸 요즈음 그 먼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는 건, 그때까지 지방문학이라는 인식을 면치 못했던 자국의 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렸고 정말 많은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그 초인적 성취의 원동력이 어쩌면, 그만큼 컸던 시대에 대한 고뇌가 아니었던가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크게 소리는 못 내는 채로, 한마디 말이 내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바로 "손 놓지 말고"입니다.

그들의 뜻에 부디 인내와 끈기가 더해지길 빌어봅니다.

젊은 날 세종의 면면이 저랬을 것만 같습니다. 들은 말을 경청하고, 들은 바를 되짚으며 질문함으로써 배움을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한껏 예의를 갖추면서도 또한 깊은 이해에다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피력함으로써, 신하인 스승에 대하여 군주로서의 체통도 지켜나가며 인간과 지식의 총화를 이루어내는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날이 그러했기에, 노련하게 대화합과 창의의 정치를 펼쳐가는 장년과 노년의 현군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주여 마음에 들어하소서
이 작은 집을.
더 크게 지을 수야 있겠지만
더 많은 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제가 서원에 지은 이 작은 집은 소박하지만 거기서 비롯된 기쁨과 의미가 정말이지 너무나 커서, 더 크게 짓는다고 해서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너무도 큰 희생 위에서 쟁취된 것들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다시 무너지기도 하고, 여전히 언제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가 올 것 같기도 합니다.

나중에 도서관 문 닫을 때 허겁지겁 가방과 우체국에서 사둔 짐 꾸릴 종이 박스를 챙겨 들고 있는데, 그 사물함 앞에서 관장님을 또 마주쳤습니다. 서로 쳐다만 보다가 둘 다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그러다 그 사람이 "마지막 일 초까지……"라고 해서 웃고 말았습니다.

괴테의 집 가까이 제 방이 있다는 것도 기쁘지만, 그 집에 머물면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되는 그곳의 문화계, 예술계의 마법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앞으로 살아갈 길의 방향을 만들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사례로 드신 괴테의 행적을 보면 자기가 모든 세상을 고민하고 자기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저도 그 부분을 정말 닮고 싶더라고요. 자긍심과 능력은 그에게 있어서 상호 고양적인 힘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선순환에 오를 수 있을까 동경해볼 때도 많고요."

"의도하지 않게 선생님의 좋은 일을 거든 셈이 됐나요.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때로는 고되면서도 그래도 힘이 나고 감사하고 보람된 일인 것 같아요! 아닌 한밤중에 늦게까지 선생님께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럽고 동경이 되기도 하네요. 그 청년분도 차 한잔에 담긴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다시 힘내서 어려움을 헤쳐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큰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 생의 감각을 가장 치열하게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 같은데, 그걸 포기하도록 요구받던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 길의 입구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가 해요."

각자 자기 일을 성심껏 해가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걸음도 뗄 줄 아는 우리가, 우리의 뜻에다 꾸준함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자기 안의 등불을 켜는 시간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분노는 요즘같이 역행하는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시국에 필요한 것이되, 그것이 삶의 모든 부분을 잡아먹게 둬서는 안 된다, 자기 삶은, 나머지 영역의 세상은, 또 그 나름대로 굴려가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이 축복받은 평화의 집에서 겨우 사흘을 보냈는데,
나는 마치 벌써 세 주일은 보낸 듯합니다.
그토록 내가 채워졌습니다.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고, 겪은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것으로.
고맙습니다, 전영애!

그 발소리가 작지 않고, 그 발걸음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귀합니다.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래도 몇몇만은 붙들어봅니다.

온 식구가 하나같이 날씬하고, 몸 가볍고, 강인하고, 다정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 가까워지면, 제가 곧 떠난다는 걸 사람들이 벌써 다들 알고 있습니다. 책을 신청하면, 담당 직원은 아직도 또 신청하느냐고 묻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독일 속담을 빌려 "원래 게으름뱅이는 날 저물 때 가장 부지런하잖아요" 하면서 웃곤 합니다.

평생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 만드는 길이 그것이려니 하면서 성심껏 읽고 쓰고 가르치며 살았는데, 문득 나라가 마냥 진창인 듯, 쪼개질 듯 느껴져 허탈하고 기성세대로서 젊은 사람들한테 미안한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글을 쓴 분은, 괴테가 38년간 감독으로 있었던, 바이마르의 유서 깊은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관장 미하엘 크노헤 씨입니다. 몇 년 전 독일 도서관 학회에 가서 제가 우리의 첫 도서관인 규장각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독일에서 유사하게 중요한 도서관 관장이신 크노헤 박사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저는 저대로 국내에서 기회만 있으면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을 알려왔습니다. 그러다 그분이 한국에 오셔서 규장각을 직접 둘러보고, 규장각과 한국학 연구소 같은 곳에서 좋은 강연들을 해주시는 일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우리 규장각의 연구원들 여럿이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을 견학하는 식으로 전문인들의 교류가 이어져 역관으로서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서울에 오신 기회에 여백 ‘벗의 집’에도 머무르면서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여기서 만나 서로 다투듯 재빠르고 몸 가볍게 함께 일하며, 함께 밥 지어 먹는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가끔씩 뭉클해서 눈시울이 젖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버려졌던 니나가 이룬 너무나도 따뜻한 가정, 정말 잘 커준 세 자녀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그렇고, 또 니나가 항암치료를 끝내고 곧바로 찾아온 곳이 이 땅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선발대 혹은 후발대로 이곳저곳에서 달려왔으리라 짐작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도 제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 우정에 방문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사람들의 환한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봅니다.

무엇을 시작하든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세상을 걱정하며 잡았던 서로의 뜨거운 손을 놓지 말고, 무엇보다 누구든 제자리에서 하던 일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일, 즉 뜻 있는 젊은 사람들이 도약하는 발판이 되는 것, 그게 여백서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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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평생, 하던 일을 새삼 돌아본다는 건 어디에 부딪쳤거나 가던 길이 가팔라졌을 때의 증상입니다. 가팔라진 길이 위를 향한 것인지 아래를 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봄꽃 그늘 아래서 한번, 온 길과 갈 길을 돌아보곤 합니다.

모두가 그 한 가지에 전념했던 옛 학문을 요즘에 그 높이로 해내기는 뜻이 있어도 어려울뿐더러, 현대 학문 역시, 가늠할 수조차 없이 넓혀지고 세분화된 그 저변을 아우르면서 동시에 어떤 높이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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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던 이의 눈 앞으로
이걸 썼던 손길에게로―
언젠가 뜨거운 갈망으로
기다리고 받던 것
그것들이 솟구쳤던 가슴에로
이 종이들은 돌아가거라.
늘 사랑에 가득차 거기 있던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의 증인들.

번역을 하는 동안, 또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열려 오는 듯했습니다.

그런 온갖 헤메임들 덕분에, 그 귀한 글의 번역을 조금은 더 자신을 가지고 마무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한 공을 들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물을 떠나서 무엇보다 저 자신이 배운 게 너무 많았지요. 극동과 유럽 사이, 특히 조금은 아는 듯도 한 인도와 유럽 사이, 완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던 거대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문학 등등이 갑자기 동영상처럼 살아나 움직였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번역만 공들여 한 게 아니고 그에 관한 연구서를 그사이 한국에서 한 권, 독일에서 한 권, 그렇게 두 권이나 펴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 한 권의 책이 있었으니, 그 책이 바로 『서·동 시집』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그 많은 사연이 얽힌 귀한 책, 『서·동 시집』 초판본은 지금 제가 지키는 여백서원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 그 고마운 책을 위해 나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동 시집』을 옮겼고, 수없이 다듬었고, 연구서들을 펴냈고, 지금 여러분들을 위해 이 글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꿈을 가지라는 그런 추상적인 말 대신, 뜻을 가지면 사람이 어떤 높이와 넓이에 이를 수 있는지, 또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물 예 하나를 젊은이들을 위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해왔습니다.

제아무리 아쉬울 때도 어디다 손 벌려보지 못하면서 평생 살아온 제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순간이 여럿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귀한 뜻이 그렇게 저절로 모이는데, 제가 물러설 수는 없어서, 요즘은 아주 작은 숲속 마을을 만드는 일을 차츰차츰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큰 생애 하나가 보는 이에게 선명해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오는 시설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는 아주 작은 숲속 ‘책 오두막’ 몇 채가 그 내용입니다.

가끔씩 통장을 볼 때마다 놀라는데, 얼마 전부터는 보낸 이가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 입금내역이 통장에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입금자 칸에는 이름 대신 ‘건축의 경험’ ‘타인의 해석’ ‘백 년의 고독’ 같은 단어들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수소문해봤으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누가 알 리 없었습니다. 궁금해하던 중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천사의 자발적인 실토가 있었습니다.
"통장에 찍힌 것은 제가 읽은 책의 제목들입니다. 그다지 활발히 활동하지도 못하고, 여백서원에 자주 가서 뵙지도 못하지만, 많은 분들의 기여로 더 멋진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그곳에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도 당연히 큰 액수를 쾌척하고 싶지만 그럴 형편은 아닌 만큼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읽은 책의 가격만큼이라도 꾸준히 송금을 해보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직장생활하고, 결혼하고 "어떻게 보면 안정적이고, 어떻게 보면 따분할, 크게 변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는 게 공허하다거나 재미가 없지는 않다"면서, 20년 전에 제게 들은 수업에서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 같은 가치를 찾아내는 방법을 터득한" 덕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순간들의 특별한 의미에 감동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여백서원과 같은 공간이 번창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에서,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읽은 책 정가만큼이라도 송금하고, 독후감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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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을 몽땅
그대로 가져가거라, 내가 살아온 대로.
사람들은 취기를 잠자서 깨우는데
나의 취기는 종이 위에 적혀 있다.

쓰고 있는 글에다 그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을 그만큼 쏟아부었다는 뜻일 겁니다. 언제든 그 순간에, ‘현재’에, ‘지금 여기’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하나의 이미지로 모아서 문제를 선명하게 파악하고, 늘 그런 식으로 그 한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생애 중 실의로 주저앉았던 한 대목에서 괴테는 썼습니다.

눈은 무엇보다 내가 세계를 포착하는 기관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화가들 사이에서 살았고, 대상들을 예술과 연관시켜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내가 나 자신과 고독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긴 지금, 절반은 선천적으로 절반은 후천적으로 이 재능이 나왔다. 어디를 바라보든 나는 그림/이미지 하나를 보아냈으며, 내 눈에 뜨인 것, 나를 기쁘게 한 것을 붙잡아두려 했다. 그리하여 서툴게 그리기 시작했다.

글로 쓴 그림, 그것이 예로부터 시詩 아닌가요.

세상의 문제가 회피해서 해결될 리 없습니다. 정면으로 대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답이 찾아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문제에 원천적으로 답은 없습니다. 답이 있고 해결책이 쉬이 있으면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얼른 답을 내려고, 답을 내어 그것을 벗어나려고 모두 노력하지만, 때로는 발버둥을 치지만, 쉽게 찾아진 답은 장기적으로 계속 답이 되기 어렵고 그래서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의 전모를 바르게 파악하면, 기이하게도 생겨나는, 문제를 감당해가는 힘. 그 힘이, 답은 없지만 그중 답의 근사치일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모색이 이루어지며, 그 길에서 쌓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슬기가 생기기도 하고, 문제 쪽에서 슬그머니 알아서 풀리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괴테는 때로는 정말로 취한 사람처럼 쓰기도 했습니다. 젊은 날에도 노년의 끝머리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물증들도 남아 있습니다.

괴테는, 적어도 글을 쓸 때는 늘 취해 있었던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평생 젊었던 것만 같습니다.

경탄을, "놀라움"을 잃지 않은, 굳어지지 않은 사람은, 굳이 괴테 아니어도, 연령과 상관없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나누어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몽땅 가져가라니! 그저 유쾌하게 받습니다.

언젠가 열 살 조금 넘은 나라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초청장을 받았을 때 스팸메일인 줄 알고 지울 뻔했지요. 이름마저 너무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이름은 에스토니아입니다. 그곳에 가서 겪은 일들을 그때 나는 조금 기록했고, 그 기록이 저의 책 『시인의 집』의 첫 장이 되었습니다.

‘노래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 독립의 이야기도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먼 극동에서 온 내가 들려준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지 그 글을 나중에 자국 학술지에 실었음은 물론, 영문이었던 강연문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명망 있는 스페인 학술지에 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세월이 가도 고마움이 새로워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할까 싶어 『시인의 집』을 조금 독일어로 번역해서 책과 함께 에스토니아로 우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감사 인사에 이어 또다시 초청장이 와서, 한번 더 가보게 되었습니다.

대학이 키운 사람들, 사람이 키운 대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곤 했습니다.

거대한 병풍처럼 산이 도시를 둘러 어디에서든 하얗게 눈 쌓인 장엄한 봉우리들이 보입니다. 시내 한 중심에서 톱니바퀴 전철을 잠깐 타고 한 차례 케이블카로 갈아타면, 도합 40여 분 만에 3000미터 정상에 올라 아득한 발밑의 아름다운 도시며 장엄하게 펼쳐진 시원의 알프스 설원까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그 고운 옥색 강을 따라 눈 쌓인 연봉을 바라보며 걸어서 학교에 가서 연구실 문을 열면, 또다시 눈 쌓인 봉우리들이 큰 창문이며 눈을 가득 채워옵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에 세상에 누가 그런 데를 올 생각을 할까요. 행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자문하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 그 ‘월요일 아침밥’은 벌써 6년째 늘 가득 차고 급기야 단체손님들마저 이어져, 못 들어오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이런 귀한 자리를 위해 무얼 준비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치하에서, 레바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황야에서, 몽골의 초원에서 글을 써온 사람들, 그러나 하나같이 시에서 정신의 자양을 취하고 험한 삶을 견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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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제품인 세몰리나* 빵, 통밀 빵은 물론이고 좀 더 정교한 것들도 인기가 있었다. 바삭바삭한 아마레티와 비스코티, 이름처럼 못생겨도 맛있는 브루티 마 부오니, 튜브 모양의 카놀리와 하얀 슈가파우더를 듬뿍 뿌린 리차렐리, 이탈리아식 타르트 크로스타타, 달콤하고 부드러운 파네토네, 꽃 모양의 카네스트렐리, 과일을 넣은 판포르테 케이크와 초콜릿을 얹은 피그놀라타 덩어리들, 속을 채워넣은 스폴리아텔레를 비롯해 크라코 특제 오사 데 모르티, 즉 ‘죽은 남자의 뼈’ 비스코티도 인기 품목에 속했다.

크라코는 머리 위로 앞치마를 벗어서 천성대로 곱게 접고는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말 털로 만든 브러시로 바지와 셔츠를 털며 밀가루 먼지가 공중에 날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젯밤에 그놈 뒤를 밟았어요. 밤새도록.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있는 리알토로 들어가더군요. 아시다시피, 거기는 아직도 <가스등>을 상영하잖아요. 벌써 몇 달째죠. 여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요. 어떻게 질리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잉그리드 버그만 얘기다.

머리색은 머피라는 사람과 딱 들어맞는 빨간색이었다.

머피가 주머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냈다. 그는 사과를 많이 먹었다. 하루에 두세 개씩. 브랜던은 그래서 머피의 뺨이 발그레한가 보다고 생각했다.

루카 크라코는 호박 파이를 먹었다. 커스터드에는 물가관리국의 엄격한 배급정책 덕분에 달걀이 충분히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대신 젤라틴을 쓴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세상에……. 물가관리국은 1943년 이후로 버터와 다른 지방류에 대해서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마가린 역시 목록에 올라갔다. 하지만 1년 전인 1944년 3월부터 돼지기름은 배급제에서 풀려났다. 크라코는 기름기가 입술에 배어나는 것으로 보아 파이 윗부분에 돼지기름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현듯 그는 어릴 적 어느 토요일 오후, 동생 빈센초와 어머니 옆에 서서 어머니가 밀가루와 버터로 페이스트리 반죽을 만들던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 생각났다.

"버터만 써야 한다."
어머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덕분에 아들의 빵집에서 만든 페이스트리는 양이 적었고, 더불어 아들의 소득도 적었다. 타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제가 좋은 빵을 만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칭찬 같은 건 듣지 않아도 됩니다."

진실은 결코 오만하게 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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