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끊임없이 현실을 파악하고 바꾸는이 모든 것은 138억 년 전 한 점에서 폭발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우주의 시작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을 여는 음표보다 조용했고, 자아(1)의 대좌에서 내려와 작아진 나(1) 위에 떠 있는 점보다 작았다. - P14

거미가 잎사귀를 돌리려고 계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잎사귀가 거미줄에 걸리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다. 단지 거미줄과 잎사귀라는 목성의 위성을 궤도에 잡아두는 것과 똑같은 힘으로 회전하는 진자가 우연히 만들어졌을 뿐이다. 아름다움도 모르고 의미에도 관심 없는 영원불멸의 우주 법칙이 빚어내는 한순간의 기적적인 광경은 당혹감에 휩싸인 채 이를 보는 인간의 의식에는 아름다움과 의미로 가득해 보인다. - P15

우리는 평생 우리 존재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나머지 세계가 어디에서시작되는지 알고자 애를 쓰며 살아간다. 우리는 존재의 동시성에서 삶의 정지 화면을 포착하기 위해 영원, 조화, 선형성이라는 환상에 고정된 자아와이해의 범위 안에서 펼쳐지는 인생이라는 환상에 기댄다. 그러면서 줄곧 우리는 우연을 선택이라 착각한다. 어떤 사물에 붙인 이름과 형식을 그 사물자체라 착각한다. 기록을 역사라 착각한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판단과 우연의 난파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에 불과한데도. - P15

아름다움 같은 어떤 진실은 상상과 의미 부여라는 빛을 슬쩍 비출 때 가장 명확하게 보인다. - P15

삶이란 다른 삶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인격, 행복, 불멸의 위업을 빚는 요소는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관습과 불합리한 집단주의의 흐름에 맞서 주체성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는가? 천재적재능이 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명성을 얻으면 충분한가? 사랑이 있다면 충분한가? 두 차례의 노벨상으로도 검은 연구복을 입은 여자의 사진에서 뿜어 나오는 구슬픈 애수는 보상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성공은 충족감을 보장하는가? 혹은 혼인서약처럼 미덥지 못한 약속에 불과한가? 시작과 끝이 무로 장식된 찰나적인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존재의 완전함에 도달하는가? - P16

아름다운 삶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 P16

세월이 흐르면서 배는 점점 낡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배의 부품이 하나씩 교체되었다. 판자를 새로대고 노를 새것으로 바꾸고 돛을 새것으로 바꾸니 결국 원래 배에 있던 부품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묻는다. 이 배는 테세우스가 탔던 배와 같은 배인가? 견고하고 고정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습관, 신념, 사상은 살아가는 동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사회적 환경 또한 변화한다. 우리 몸의 세포 또한 대부분 교체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으로 남는다. - P21

가장 먼 곳을 보는 예언자일지라도 자신이 속한 시대의 지평 너머까지볼 수는 없지만, 인간의 정신이 외부로 시선을 돌려 자연을 이해하고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기존의 사실에 의문을 품는다면 그 하나하나의 변혁이쌓이면서 지평선 자체가 변화한다. 우리는 자연과 문화로 팽팽하게 조인 확실성이라는 체로 세계를 거르지만, 아주 가끔 우연의 결과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는 망이 느슨해지면서 변혁의 씨앗이 그 사이로 빠져나오기도 한다. - P22

세 세기 후 월트 휘트먼은 정신이 얼마나 육체에 신세를 지고 있는지 주목한다. "재능과 윤리의 순위가 위장의 순위보다 얼마나 뒤떨어지는지 결정하는 것은 위장이라네." - P23

재산을 잃는 것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과 소명이 나에게 운명지운 일을 성취할 기회를 잃는 쪽이 나에게는 훨씬더큰문제다. - P24

현재 내 양심 상태로 그 분야에 갇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큰 불안과 염려로나를 고문하는 일은 없다. - P24

현실에 새로운 진실이 자리잡으려면 문화의 톱니바퀴가 몇 차례나 돌아가야 할까? - P25

Pr케플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잊곤 하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해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낼 때 우리가 지닌 가능성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 P27

"일단 대중 앞에 시가 발표되고 나면 시를 해석할 권리는 독자에게 넘어가게 돼요." 세세기 후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말한다. 하지만 그 해석은 예외 없이 해석 대상보다 해석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 P33

서로 끌어당기는 이 힘은 두 물체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보다 가까이있을 때 더 커진다. 그러므로 서로 가까이 있을 경우 두 물체는 떨어지는 일에 한층 강하게 반발한다. 810405 - P41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최초로 인간의 자만심에 도전장을 내민 위대한 사상이다.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세계 질서가 여러 차례 새롭게 편성되는동안 인간의 자만심에 대한 도전은 진화론부터 시민권, 동성결혼까지 수없이 많은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이 모든 도전에 사회는 케플러의고향 주민들이 보인 것과 비슷한 수준의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우주의중심이든 권력 구조의 중심이든, 중심에 있는 것은 그 대가로 진실을 희생할지언정 계속해서 중심에 남아 있어야 한다. - P45

어머니를 불학무식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본성이 아니라 의세계에서 결정한 사회적 위치였다. 이 세계가 지적인 깨달음과 자아실현의기회를 하늘의 별만큼이나 불변의 자리에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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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속가능한 나이듦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정희원 지음 / 두리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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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를 보여주면서 노화/노쇠/노년/나이듦에 대한 접근과 진료를 하는 경험을 들려주는 것은 좋았지만,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그만큼 미치지 못했던 같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노인학이 굳건하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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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와 동행한 4명의 대원이 4대의 차량과 약 10명의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충분치가 않다. 나는 그녀의 상황에 너무 깊이 말려드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휘관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나는 충격으로 넋이 나간 채 길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묻는다.

"저 좀 도와줄 수 있으세요?" 내가 묻는다.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면서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어떨 때는 돕고자 하는 열망과 아드레날린으로 가득 찬 너무 열성적인 구경꾼들이 구조 작업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우리는 ‘골든아워’ 원칙에 따라 일을 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난 후 한 시간 이내에 모든 부상자들이 병원에 이송되도록 조치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응급 처치는 첫 한 시간 이내에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데, 이미 사고가 일어난 지 15분이나 지났다.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15분 거리이므로, 30분 이내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차의 잔해에서 꺼내 구급차에 실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본능적으로 대응해야 하고, 내 직관을 믿어야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가슴에 공기가 차서 폐를 압박하는 기흉으로 천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적절한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 확인된 후 느끼는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시 내 손에 있던 퍼즐 조각들에 기초한 판단일 뿐 아니라 사고의 큰 그림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게드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서 거기 인력을 집중했으면 그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 빠르고 직관적인 의사 결정을 했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서 최선의 행동 방식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내 직감에 의존한 것이다. 앞 장에서 나는 퍼즐의 그림 전체를 고려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까지 예측해서 결정을 내리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만한 정신과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때도 있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가 보태질 때마다 직감과 직관에 의존해서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다.

그 작업은 연구를 하는 우리에게뿐 아니라 지휘관들에게도 도움이 됐다. 그중 한 지휘관은 영상에 나오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얘기했다. 스스로 생각했던 자신의 이미지와는 큰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차분하고, 신중하며,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상에 담긴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얼마나 초조한 몸짓을 하는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상을 본 후, 그는 자신의 태도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는커녕 더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유능하고 근면한 소방관이었던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소방서의 모든 지휘관들이 카메라를 장착한 헬멧을 쓰고 각자의 경험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지휘관들은 80퍼센트의 비율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전의 경험을 활용한 본능적이고 직감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압박감이 큰 상황에서 얼마나 잘 결정을 내리느냐는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분석적 경로와 직관적 경로, 둘 중 어느 쪽을 따르는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두 경로는 두뇌의 매우 다른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분석적, 이성적 결정은 뇌의 신피질, 즉 생각하는 영역과 연결되어 있고, 직관과 연상 작용에 의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변연계와 같이(진화학적 관점에서 볼 때) 더 오래되고 더 감정적인 뇌의 영역과 관련 있다. 양쪽 모두 저마다의 유용한 기능이 있고,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이전의 경험, 기억, 그 순간 마주한 특정한 압박감과 그것에 대한 대처 능력 등 다양한 요인에 기반한다.

둘 다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가장 덜 나쁜 선택지’가 어느 쪽인지를 판단해야만 했다.

나는 우리가 의존하는 두뇌의 자연스러운 작동 과정을 인정하고 실제로 두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반영한 사고틀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우리 뇌의 작동 원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북돋는 기법 말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결정 제어 프로세스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분석을 거친 후 내리는 결정과 직관적 결정, 두 가지 모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법이다.

직감에 의존할 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의사 결정 과정의 함정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나는 그것을 돕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의식적으로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결과를 예상해보고, 내리려는 결정에 따른 이득과 위험을 이성적으로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련의 프롬프터들을 제시한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그것이 분석적이든 직관적이든) 그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지휘관들에게 스스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빠르게 던져보게 하는 것이다.

?목표 - 이 결정으로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측 - 이 결정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이라 예측하는가?
?위험 vs. 이득 - 이득이 위험을 얼마나 능가하는가?

결정을 내릴 때 직감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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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배려해주었던 친구 에리카. 그녀는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 밭을 내게 보여주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온 힘을 다해 걸었다. 그리고 꽃을 지고 가는 내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 자신은 골수암 말기 환자로 며칠을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무엇일까, 마지막 문턱 앞에서 사람에게 그런 초인적인 배려와 아름다움을 부여한 힘은.

삶 자체로 기쁨이고 선물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든든한지. 그들의 아름다운 삶을 전하고 싶은 욕심,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딸에게 마라톤을 시킨 어머니. 하나 뿐인 자식이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시류에 따른 고액의 음악 사교육을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을 병 깊은 어머니는 딸에게 세상을 헤쳐갈 힘을 길러주기 위해 마라톤을 시켰다. 세상을 떠날 어머니가 딸에게 길러주고 싶었던 것이 마라톤 기술일 리 없다. 머지않아 자기처럼 엄마 없이 살아야 할 딸에게,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두 발로 서서 삶을 헤쳐가 달라는 간곡한 당부였고, 아무런 힘도 없는 엄마가 해줄 수 있었던 마지막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딸은 마라톤 하던 힘으로 빛나는 음악인이 되어 지금 전 세계에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다.

물론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이 있을 리 없고, 해서 살인적으로 살았다.

무슨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젊은 시절 나는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진다.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진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거쳐 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

책만 보면 일일이 한지에다 필사를 하여 그것이 낱장이 되어 흩어지도록 읽어 다 외우셨던 어머니의 그 간절한 필사본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책이 그토록 귀하게 읽혔던 전통을 알려주고 싶다.

언젠가 몸져누운 내게 열한 살 딸이 쓴 편지("저는 어머니께서 어려운 일도 맡은 일이라면 건강도 잊고 열심히 하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어머니 마음속의 시, 바로 좋은 착한 마음 때문이에요.").

"맑은 사람들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詩를 위하여"
그것이 맑은 사람들의 집, 여백서원의 모토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자신만의 문체에 담아낸 작가이다.

카프카는 수많은 편지와 일기를 남겼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그의 문학작품 못지않은 밀도를 지닌 글들이다.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과 진가가 있다. 하지만 찾아질 리 없는 그 인형 편지가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편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그런 ‘한순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카프카가 도라와 함께 지내던 시절, 그는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어린 소녀 하나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았다. 아끼던 인형을 잃은 것이었다. 한참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프카가 다가가서 말했다.
"네 인형은 말이야, 그냥 여행을 떠난 거란다."
놀라 쳐다보는 소녀에게 카프카가 덧붙였다.
"나한테 편지를 보내서 그렇게 말하던걸."
"잘 있대요? 편지는 어디 있죠?"
"편지를 마침 집에 두고 왔구나. 내일 다시 여기로 오면 내가 가져다주마."

그날 밤 카프카는 인형의 편지를 썼다. 다음 날 같은 자리로 가서 아직 글을 못 읽는 소녀에게 그 편지를 읽어주었다. 3주일이 넘게 이 만남은 계속되었다. 인형이 사랑에 빠지고, 약혼식을 하고, 결혼식을 하고, 신혼살림을 꾸리고, 마침내 소녀에게 다시 만나기가 어렵게 된 데에 이해를 구하는 것으로 편지는 마무리되었다.

인간의 고통에 눈 밝기에 거짓말인 그런 글을 쓰는 황당한 사람 한 명이, 또 그런 글과 그런 인간이 소중한 줄 알기에 몇 장의 종잇장을 찾아 헤매는 황당한 사람 한 명이 이 삭막한 세상에 빛을 밝힌다.

허구로써 현실을 감내해 보려는 것, 그것이 문학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또 그런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 인문학의 진면목일 것이다.

물론 문학시장이라는 난장亂場 너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종잇장을 찾아 헤매는 이득 없는 일에 연구비까지 대는 한 사회의 정신적 여유 속에서 빛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세상은 이런 미친 짓으로 잠시 빛나는 게 아닐까.

매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그 와중에서도 아이들은 커갔고 그러다 보니 나도 확실한 직장까지 갖게 되었다. 그것도 남 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한 직장을 말이다.

뒤늦게 취직을 하여 내 연구실까지 생겼다.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치러야 할 ‘방값’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해야 하는 일은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았다. 내 공부도 절대로 대충 할 수 없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이니 그 어떤 경우에도 힘과 마음을 모두 다 쏟을 수밖에 없었다.

한 스무 해가 그렇게 가고 났을 때, 나는 몹시 피폐해 있었다. 무엇보다 내 글을 쓸 수 없어서,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어서 황폐해 있었다

어쩌다 기회가 있을 때면 탄식 겸 소망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글을 쓸 수 있는 오두막이 하나 있었으면, 개집만 한 것이라도, 드러누울 수는 없더라도 소반 놓고 쪼그리고 앉아 오로지 나를 위한 글만 쓸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그토록 나만을 위한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땅도 집도 나의 소유는 아니지만, 글 쓸 곳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너무도 기쁘고 감사해서 이 작은 마을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텔레비전과 동네 스피커에서 나오는 유행가 말고도 세상에는 훨씬 더 고운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시를 읽고 책을 읽는 모임이 되었으면 했다. 마을에 아이들은 적었지만, 그래서 더 소중했다.

선생님의 작은 집 근처의 그 작은 시골 카페에서 멋진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고(······) 혼자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그 연주자들이 독일어를 배우는 의대생들인 것을 알고 더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전문 연주자도 아닌 사람들이 그토록 멋진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진짜로 최선을 다해 연주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떤 피아노 연주자가 정말로 멋지고 아름답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자리에 미래의 위대한 피아노 연주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가볍고 쉽게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대단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한 줌 보잘것없는 청중을 위해서 그토록 혼신의 힘을 쏟던 모습이 어떻게 잊히겠는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의 모습 중 하나이다.

블로그에 글을 썼던 사람도 바로 그것이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업무 자세라면서, 지금 자기를 쳐다보고 배우는 사람도 있을 텐데 "어떻게 대강대강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으로 글을 맺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 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내 시골집을 찾아왔었다. 엄마 아빠를 빼닮은 아이가 얼마나 예쁘고 영특하던지. 견실하고 견고한 사랑으로 쌓은 한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들이 다녀가고 나서도 오래도록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이야말로 빛나는 별이다. 별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도 빛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별들을 하나씩이라도 기억에 품은 우리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다 조금씩 빛나고 있는 것 아닐까.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아이들 키우는 일 말고도 참 많은 일을 함께 해야 해서 늘 내 몸이 여러 개였으면 했다. 그래도 내가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틈이 나는 대로 함께 책을 읽었고, 아이들이 자기 전에는 꼭 책을 읽어주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 시간이 나에게도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아이들이 좋아했던 이야기들은 지금껏 나에게조차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도 무슨 일인가가 죄다 틀어져 주저앉고만 싶을 때는 그 옛날 아이들 책에서 보았던 말이 떠오르곤 한다. 힘껏 지어놓은 둥지가 부서져 울고 있는 엄마새를 아빠새가 위로하며 했던 말, "괜찮아, 부서진 둥지는 다시 지으면 되잖아."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책 가운데서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은 아직 글을 못 읽는 어린 아들이 아빠새를 흉내 내며 한껏 의젓한 억양으로 "괜찮아, 부서진 둥지는 다시 지으면 되잖아" 하던 목소리가 고스란히 함께 들리기 때문이다.

샘터출판사에서 나왔던 《장화 신은 고양이》가 그런 책인데, 그 동화집을 엮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세상을 헤쳐가는 용기와 슬기였다.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옮긴 이야기들에 〈세 가지 소원〉을 넣은 것은 헤벨이라는 작가가 매우 현명하게 이야기 끝에다 정답을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정답이어서 누구든 이 글을 읽는 이는 잠시 멈추고 스스로 정답을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얼른 세 가지 소원을 말하기가 쉽질 않아서 노부부의 고충도 좀 이해가 되고, 자신이 겨우 찾은 답을 정답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작가 헤벨이 주는 정답은 이렇다. 천사가 당신에게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줄 경우 답해야 할 첫째 소원은,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 둘째 소원은 무얼 빌어야 할지 물어서 알게 된 그 소원을 비는 것. 마지막으로 빌어야 할 세 번째 소원이 중요한데, 바로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천사가 내게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줄 일은 현실에서는 없다. 내가 천사노릇까지 해야 할밖에 없다. 무엇을 빌어야 할지, 어느 길을 가야 할지 아는 지혜를 누가 내게 주겠는가. 결국 내 스스로 얻은 인식과 경험과 삶에 대한 통찰이 그 지혜이다. 또 빌어야 할 소원을 비는 것이란 온갖 수렁에 빠져가면서도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것, 인생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후회란 얼마나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인가. 마지막 소원이야말로 삶의 지혜 중 지혜인 것 같다.

헤벨의 정답에다 한 가지쯤 사족을 달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인지라 때로 택해서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후회가 아주 없을 수야 없다. 그래도 온 지혜를 모아서 어렵사리 한 선택, 혹은 한때 좋아했던 추억이 묻어 있는 선택, 혹은 정말이지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던 저 어려웠던 선택을 기억하며 견뎌가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또 그래야 사람이 단단해지고 사회도 단단해진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고등연구원에서 제안한 초빙수석연구원직은 꿈조차 꾸어본 적 없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좋은 예우에다 넓은 연구실, 깔끔한 숙소, 조교를 제공하면서 강의를 하려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꿈같은 그러나 무서운 조건이었다. 절대로 대충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는 오랫동안 전체 연구원을 통틀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왜 저런 깍두기를 끼워주었는가 하는 소리를 안 듣자면 논문 몇 편 쓰고 말 일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살인적으로 일을 했다.

이야기 끝에 자신이나 자기 주변 사람들은 일을 해서 돈은 벌지만 배움이 없다면서 연구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조그만 나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을 드러냈다. 그 후로 내가 밤을 새우고 아직 연구실에 있는 것 같으면 내 방은 살짝 지나가고, 내가 없는 날은 연구실 청소를 말끔하게 해놓고 가셨다.

내 일, meine Arbeit 혹은 my job. 사실 내가 독일에서 가장 자주 듣고 감탄하는 말이다.
세상의 일은 다 어렵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면서, 이를테면 내가 죽지 못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제 일인걸요" 하면서 성실히 임하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일의 성과도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다를 것이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지금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까.

그분들에게서 나는 삶의 지혜 한 가지를 배웠다. "제 일인걸요." 그 말을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고 또 말해보니까 무슨 일이든 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어느 아침에 겪은 일이다. 아이에게 온갖 것 다 가르치고 예의까지 가르치려 분주하던 그 젊은 엄마의 허겁지겁하던 모습이며 그 아이의 지쳐빠진 얼굴,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잊히지 않는다. 교육 문제란 남이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쉬워도 부모가 되면 정신이 없다. 누구든 나름으로야 최선을 다한다. 남 하는 대로 하려고 애쓰느냐 힘들지만, 실은 남 하는 대로 안 하고 기다려주기가 제일 힘들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게 부모가 할 일인 것 같다.

벌써 저렇게 지쳐빠진 아이가 과연 엄마가 바라는 대로 가줄까. 어린 시절을 저렇게 보내고 어디서 스스로 의욕이 나서 공부할 힘이 나겠는가.

놀아야 할 때 놀지 못했으니 공부할 때 공부하고 싶겠는가. 일할 때 일인들 하고 싶겠는가. 저렇게 하는 공부에 무슨 재미가 나겠으며, 친구인들 생겨나겠는가. 남을 배려할 틈이 있어야 친구도 있고, 세상도 돌아간다.

내가 걱정스럽게 그 소년 이야기를 했더니 제자 중 한 학생이 그랬다. 교보문고 원서 코너에서 책을 고르는데, 어떤 엄마가 만화책을 고르려는 아이를 비난하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골라주는 걸 보고 놀랐다고. 사실이 아니기만 바란다. 엄마 자신이 그 책을 단 한 장이라도 열어보았다면 그런 일은 세상에 없었을 테니까.

어릴 때, 이제 어느 언어로든 책을 좀 읽어야 할 시기에, 들들 볶아 가르치는 짧은 외국어는 자라야 할 생각을 다시 퇴행시키는 폐해도 있다. 그렇게 몇 년을 배운 영어는 사실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본인이 필요를 느끼면 빠른 시일에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는 양이다. 그거 몇 마디 가르치겠다고 아이들에게서 하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배우려는 마음을 빼앗아버리면 그 마음은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경험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정지해 문이 열리고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유모차에 앉은 아이를 보니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데 두 엄지로 화면을 밀어대는 손놀림이 너무나도 능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타고 나서도 일말의 흔들림 없이 폰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섬뜩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화면만 들여다본 아이들이 자란 세상은 생각만 해도 조금 무섭다. 그 아이는, 화면이 아닌 현실 속에서 또 얼마나 허약할까. 무엇이든 자신의 시선을 끄는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만져보고, 먹어보고, 움직여보며 세상의 이치를 터득해 갈 시기의 아이였다. 내 아들이 그만할 때 뭐든 먹어보는 통에 나는 약을 감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언젠가 가위를 보고 어린 아들의 눈이 반짝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사태를 간파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종이를 잘라가며 가위 쓰는 법을 가르쳤다. 가위 쓰는 법을 배운 뒤 슬며시 방으로 들어간 아들은 나중에 보니 커튼이며 이불을 다 거덜내놓았다.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 나중에 유치원에 갔을 때 아들은 가위로 오리기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인자였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때 놀아야 한다. 놀아야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고 주위를 살피며 세상 이치도 깨닫고, 무엇보다 심심해서 이것저것 해보는 가운데 진정한 창의력이, 생각이 자란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이 때 아이노릇 잘 해야 학생 때 학생노릇 잘 하고 어른 때 어른 노릇 잘 하는 건 자명한 이치이다. 아이 때는 공부하고, 어른 되어서는 남의 눈치나 보며 그저 놀고 싶어 하고, 저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좀 더 늙어서 회사원 아저씨 같은 아이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만 만지는 아이들을 뛰어 놀게 하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이를 보내줄 부모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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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생은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걸고 기다려야 한다.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살아온 의미에 대한해답은 정해지지 않는다. - P70

상식의 힘으로 불행을 이겨내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불행에 굴복하지 않는 상식을 갖게 되리라고 믿는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눈이 갑작스레 보이게 - P72

되었다는 건 기적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불행 속에서 그 불행을 이겨내고도 남을 만큼의 축복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진짜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73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내온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순간과 운이 없었던 날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음에 동감하게 되었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과 싸워온 세월들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서 부와 권력과 행복이 뒤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게으르고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밑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소소한 발견의 재미를 알아나가는 것도 지혜라고 해야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인생은 좋았고, 때론 나빴을 뿐이다. - P74

"그렇게 뒤섞여 뿌려도 쑥갓은 쑥갓으로 자라나고,
청경채는 청경채로 자라나고, 유채는 유채로 자라나잖아요. 우리네 같은 보잘것없는 인간은 사상적으로 타협해서 유채를 심었는데 쑥갓으로 커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관찰은 매우 훌륭했다. 식물은 이것저것 뒤죽박죽심어놓아도 자기 자신을 잃는 법이 없다. 그걸 보면서 나는 식물보다 인간이 훨씬 비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9

우리는 타인의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우리가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보여줄 때도 많다. 무책임한짓을 저지르고는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며 억울해할 때도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평가는 언제나 다르다. 그래서 신이 필요하다. 인간이 나를 오해해도 신은 나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는 위로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신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진실을 알고 있다. 세상에서 그 진실을 알고있는 이는 나와 내가 믿고 있는 신뿐이다. 그러므로 가장두려운 것은 나를 억압하는 세상이 아닌 내 안의 진실을알고 있는 그분뿐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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