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기분 좋게 대해 주지 않고 계속 거리를 유지하면 종종 가당치도 않게 군다니까요.

"아! 남자들은 그런 허세를 부리곤 해요. 남자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허풍쟁이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안다니까요. 아, 참! 그런데 수백 번도 더 생각했으면서도 당신한테 물어본다는 걸 이렇게 까먹어요. 혹시 남자들의 얼굴색 중 어떤 걸 좋아해요? 잘 태운 검은색, 아니면 뽀얀 색?"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두 남자와 마주칠 염려 없이 갈 수 있을 텐데요."
"정말로 난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남자들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런 관심이 남자들의 버릇을 망치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마당에 캐서린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소프 양이 자신의 자립성을 보여 주고 남성의 오만을 꺾어주겠다는 단호한 결심에 따라, 그들은 가능한 한 빠른 걸음으로 두 명의 젊은 남자를 따라잡기 위해 즉시 출발했다.

그는 중키의 건장한 젊은이였는데, 평범한 얼굴에 경박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는 단정한 복장을 하지 않으면 너무 잘생겨 보일까 봐 두려워하며, 정중해야 할 곳에서는 편하게 굴고, 편하게 굴어야 할 곳에서는 뻔뻔하게 굴지 않으면 신사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보다시피 쌍두마가 딸려 있고, 좌석과 트렁크, 칼꽂이, 흙받침대, 램프, 은테 장식하며 모든 게 구비되어 있어요. 쇠로 만들어진 부분은 새것이나 진배없어요. 아니 새것보다 더 나아요. 그런데 50기니를 달라더군요. 그 자리에서 돈을 던져줬고, 마차는 내 것이 되었죠."

그래서 밀섬 거리에서 그녀의 기분을 거슬렀던 두 젊은 남자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세 번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여동생의 안부를 물으면서 둘 다 점점 더 못생겨진다고 한마디 했다.

캐서린이 좀 더 성숙했거나 허영심이 있었더라면, 그런 공격에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어린 데다 소심한 면까지 있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말과 무도회 파트너로 일찌감치 낙점된 것이 주는 매력에 홀랑 넘어가지 않을 만큼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우돌포』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조하면서도 한껏 신경이 곤두서고 겁에 질리게 만드는 상상력의 사치를 맘껏 누렸다.

가는 도중에 떠오르는 온갖 이야기들을 서로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애정에 찬 미소와 꼭 쥔 손으로 말을 대신했다.

캐서린은 약간 실망했지만 반대하기에는 성격이 지나치게 좋았다.

사실 타인의 불미스러운 행동 때문에 자신이 비참해진 이런 상황이야말로 여주인공에게 전형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런 상황 아래서도 꿋꿋한 모습이 그녀에게 품위를 부여해 주는 법이다.

틸니 양은 아름다운 몸매와 예쁜 얼굴, 호감 가는 얼굴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눈에 띄는 가식도, 소프 양처럼 두드러지게 유행을 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훨씬 더 우아했다. 그녀의 태도는 양식 있고 교양 있게 자란 표가 났다. 지나치게 수줍어하지도 부자연스럽게 대범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젊고 매력적이었으며, 무도회장에서 주변으로부터 주목받으려고 안달하지 않았고, 과도한 기쁨을 과장하지도 않았으며, 사소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한없이 초조하게 굴면서 짜증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집안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주장과 뻔뻔한 거짓말, 과도한 허영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집안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소프 씨가 정확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태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때 본질을 더욱 모호하게 하는 데 오히려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남들의 높은 평가와 권위 있는 판단에 상당한 반발을 느끼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운수가 나빴다고 통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드라이브는 결코 재미있지 않았고 존 소프 씨는 정말 불쾌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보다 더 분명해졌다.

개인적인 자만심을 뽐내지 않고 소박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드문 장점이었다.

옷에 그처럼 신경 쓰는 것이 마땅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옷은 어쩌다 눈에 띌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원래의 의도를 망치는 법이다.

옷이란 여성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따름이다. 어떤 남자도 옷 때문에 어떤 여자를 더 많이 흠모한 적이 없으며, 어떤 여자도 옷 때문에 그 여자를 더 좋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남자들에게는 단정하고 유행에 맞는 옷이면 충분하고, 여자들에게는 초라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지한 성찰들이 캐서린의 평정한 마음을 교란시키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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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KH마리아 미첼Maria Mitchell은 낸터킷 Nantucket 섬의 베스털가 1번지에 있는 작고소박한 집의 거실에 서 있다. 훗날 미첼의 말대로 "꾸밈도 없고 예쁘지도않은 곳이지만 가족의 애정이 묻어 있는 집이다. - P51

열두 살인 마리아는 우주의 웅장함과 수학의 견고한 확실성에 매혹되어있다. 그 번득이는 지성은 시대와 장소의 한계에도 빛이 흐려지지 않는다. - P52

그날 밤 마리아 미첼의 마음이 가득 차오른 것은, 그리고 남은 수십 년의생애 동안 마리아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준 것은 국왕의 메달도 아니었고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성도 아니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의 순수한설렘, 미지의 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석에서 지식의 작은 조각을 직접깎아낼 때 느껴지는 희열이었다. 이는 모든 참된 과학자를 이끄는 근본적인동기이다. - P53

명예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의 빛에 비하면 메달은 사소한 것이다." 훗날 미첼은 쓴다. "이 세상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인데, 그것은 바로 선량함이다." - P55

마리아의 감춰진 지성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회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뚫고 솟아오른다. "삶에 별빛을 섞으십시오." 마리아는 훗날 여성 천문학자들을 위한 첫 수업이 열린 배서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그러면 하찮은 일에 마음이 괴롭지 않을 겁니다." - P56

그녀를 키워낸 곳은 어디인가? 한 사람이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도록 허락해준 곳, 미첼이 감히 그 시대의 문화가 강요하는 모습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준 곳은 어디인가? 어떻게 무로부터 무언가가 출현하는가? 이 질문은 우주에 대해서 던질 때도 당혹스럽지만 자아에 대해서 던질 때는 완전히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만들어진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아 미첼은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그리고 타고난 과묵함과 고집스러움으로 그 앞에 놓인 문화적 장애물들을 묵묵히 헤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미첼은 또한 타고난 본성 말고도 여러 요소가 빚어낸 산물이기도 했다. 보기 드물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성장했고 보기 드물게 박식한 어머니가 있었으며 보기 드물게 가족과 함께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특히 미첼을 지적으로 동등한 상대로 대우해주었다. 미첼은 수학이저 높은 곳에 있는 추상적 도락이 아닌, 항법에 반드시 필요한 실용적인 도구였던 바닷가 마을에서 성장했다. 또한 퀘이커교도있는데, 퀘이커교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천문학이 길고 지루한 겨울밤을 보내는 즐거운 놀이로 자리 잡은 고립된 섬에서 자랐다. 인생의 말년에 미첼은 자신이 업적을 이룰 수 있던 원천을 타고난 수학적 소질에 아버지의 꾸준한 격려가 더해진 결과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 장소가 지닌 분위기 또한 내 정신을 여기로 이끄는 데 큰 영향을미쳤다. - P57

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혜성처럼 다가오는 기회와 조수처럼 밀려오는 환경안에서 우리를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만드는 자아의 해안선이 형성된다. 우리는 앞을 가로막는 장애에 모든 비난을 덮어씌울 수 없듯이, 우리가 이룬위업에 대해 모든 공을 독차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요소에 어떤 것이 행운이고 어떤 것이 불운인지 구분하는 일은 종종 까다롭다. - P58

마리아의 이름은 그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던 마리아 에지워스Marianagewonh를 따서 지은 것이다. 선구적인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로 진보적 정치 관념의 바탕 위에 과학을 살짝 곁들인 사실주의적 아동문학을 쓰는 작가이다. 에지워스는 잔 다르크Jeanne Arc와 사포 sappho, 그리고 몇몇 성녀와 함께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가 편찬한 <실증주의자 달려 Le CalendrierPositiviste>에 이름을 올린 및 안 되는 여자 중 한 명이다. <실증주의자 달력>은 세계를 뒤바꾼 558명을 다룬 기념비적인 문화적 전기로 유클리드Euclid와 피타고라스 Pythagoras에서 시작하여 케플러, 갈릴레오, 베토벤, 밀턴 Milton을 아우르는 "전 시대와 국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실증주의자 달력》은 그레고리력을 대신하여 "실증적인" 태양력을 만들려는 콩트의 계획에 따라 지어졌다. 28일로 구성된 열세 달이 1년이며 각각의날에는 종교 성인의 이름 대신 세속적 문화의 영웅, 즉 과학자, 시인, 철학자, 화가, 발명가, 탐험가의 이름이 붙어 있다. - P59

마리아 에지워스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은 것은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낸 리디아 미첼 Lydia Mitchell의 깊은 학문 수준을 생각할 때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리디아는 낸터킷섬에 있는 읽을 수 있는 책을 모조리 독파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섬에 있는 두 공립도서관의 장서는 물론이고 도서관이라는 사치를 누릴 만큼 부유한 가문의 개인 장서에 이르기까지 섬에서리디아가 손을 대지 않은 책이 없었다. 리디아는 심지어 도서관이 보유한장서를 모조리 읽어치우기 위해 도서관 두 곳 모두에서 사서로 근무하기도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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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8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진리의 발견 읽기 시작하셨군요. 이 책 좋더라구요. ^^

라로 2022-11-09 00:17   좋아요 1 | URL
넵! 예전에 (아마 올 1월??^^;;) 사두고 처음 읽다가 너무 좋아서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좋은 것을 지금 읽으면 나중에 어떻하지? 뭐 그런 웃긴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이젠 읽을 때가 된 것 같아요. 문장들이 다 황홀합니다!!^^

바람돌이 2022-11-09 07:39   좋아요 1 | URL
라로님 귀여우셔라.... ^^

라로 2022-11-09 12:58   좋아요 0 | URL
헤헷~ ^^;;
 

그녀는 언제나 도리를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알았다.

죽기 전날 그녀는 상상과 열정이 충만한 시를 썼다. 그녀가 자기 의지로 했던 마지막 말은 간호를 맡아주었던 의료진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이 없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난 그냥 죽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가진 개인적인 매력은 상당했다. 키는 진정 아담하여 정확히 중키 정도 됐다. 자세와 행동거지는 조신하고 우아했다. 생김새는 특히 수려했다.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뤄 누구보다 유쾌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자비로운 모습이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진정한 성격이었다. 그녀의 용모와 피부는 탁월했다. 적당히 통통한 그녀의 볼은 혈색 좋은 붉은 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로 부드러웠다. 정확한 발음과 능변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녀는 성급하고 어리석거나 가혹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그녀의 기질은 재치로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녀는 소심하지도, 뻣뻣하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평온했고 대화를 나눌 때 무례하게 끼어들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책이나 사람에 관한 태도를 바꾼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야비한 것들을 정말 싫어했다. 성격이든, 재치든, 유머든 도덕적이지 못한 것과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다정하고 주의 깊고 지칠 줄 모르는 간호사인 내 여동생이 여러모로 힘을 썼기 때문에 병이 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동생에게 빚진 바가 많아요. 이 점에서는 사랑하는 모든 가족의 염려 어린 애정에 난 그냥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네요.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 가족에게 더더욱 사랑을 베풀어주십사 하고 기도할 뿐이랍니다.

내가 점점 불평이 많아지고 있어요. 아무리 사소한 원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거나 그것은 신의 뜻이었습니다.

당신은 ____ 대위가 그다지 예의가 없다고 했지만, 그가 대단히 존경스럽고 좋은 뜻을 가졌으며 그의 아내와 동생들 모두 사람 좋고 의무감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나는(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면) 지난해보다 좀 더 긴 페티코트를 하나 장만했으면 해요.2)

서적상으로서는 출판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 작품을 두고서 사들일 필요가 있을까 고민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과 더불어 저자든 독자든 13년이 경과하는 동안 어떤 부분은 비교적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중 독자들은 이 작품이 마무리된 지 13년이 지나 출판되었고 집필에 착수한 지는 그보다 휠씬 더 오래전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하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 세월 동안 장소, 시기, 예법, 책들, 의견들이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점을 유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시절 캐서린 몰런드를 한 번이라도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녀가 소설의 여주인공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 것처럼 세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든지 하는 일은커녕, 아이들이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그 후로도 여섯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그녀 자신도 매우 건강하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흔히 즐기는 좀 더 여주인공다운 행동들, 즉 동물을 보살펴 주고, 카나리아에게 모이를 주며, 장미꽃에 물을 주는 것들에도 관심이 없었다.

캐서린의 능력은 꽤나 특이했다.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혼자 배우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가르쳐주는 것마저도 때로는 익히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거의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가끔씩은 정말로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캐서린의 어머니는 딸아이가 음악을 배웠으면 했다. 캐서린은 자기가 음악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오래 내팽개쳐 두었던 낡은 스피넷 건반을 두드리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1년 동안 배웠지만 아이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몰런드 부인은 재능도 없고 취미도 없는 것을 딸에게 억지로 시키려 들지 않았으므로 음악을 그만두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녀가 세상 무엇보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집 뒤편에 있는 푸른 언덕 위에서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며 노는 일이었다.

흙에서 뒹굴며 놀기 좋아하던 성향이 사라지면서 몸치장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영리해졌고 자기 몸을 깨끗이 가꾸었다.

"어여쁜 처녀가 거의 다 됐어요."라는 표현은 태어날 때부터 예쁘다는 칭찬을 줄곧 들어온 여자아이들보다 인생의 초반기 15년 동안 그저 평범한 외모였던 여자아이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말이었다.

그녀가 전혀 마다하지 않은 책들은 유용한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거나, 이야기만 있고 성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종류들이었다.

톰슨의 시구로부터는 "풋풋한 생각이 싹트게 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즐거운 일"6)이라는 것을 배웠다.

셰익스피어의 시구로부터 그녀는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공기처럼 가볍고 사소한 것도, 질투에 빠진 자들에게는 성경처럼 확실한 증거가 된다."7)거나 "우리 발밑에 밟힌 가엾은 딱정벌레, 그런 미물 또한 거인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8)는 것, 그리고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성은 언제나 "인내의 기념비처럼 슬픔에 젖어 미소 짓는"9)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현재로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스케치를 해줘야 할 연인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숙녀가 여주인공이 되려고 할 때면 사방 사십 리 내 가족들이 아무리 심통을 부린다고 해도 그녀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그녀 앞에 영웅적인 주인공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부탁이니, 캐서린, 밤중에 파티 장소에서 나올 때면 언제나 목을 따스하게 잘 감싸고 다녀라. 네가 쓴 돈은 언제나 기록했으면 한단다. 그럴 용도에 쓸 수첩을 주마."

(체통 있는 집안 출신의 젊은 아가씨라면 열여섯 살이 될 동안까지 자기 이름 한번 바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행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미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앨런 부인은 너무나 사랑하므로 자기와 결혼해 달라는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인 그런 수많은 여성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도 않았고 영리하지도 못했다. 교양이나 예의범절도 없었다. 다만 숙녀다운 분위기, 대단히 조용하고 얌전하며 좋은 품성에 약간 변덕스러운 마음 같은 것들로 인해 앨런 씨와 같은 지각 있고 지적인 남자를 고를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젊은 아가씨를 사교계에 소개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인 인물이기도 했다. 젊은 아가씨들처럼 그녀 자신이 어디나 가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최고 관심사는 드레스였다. 그녀는 멋진 옷을 차려입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남들로부터 흠모의 시선을 받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인파가 움직이면서 매 5분마다 그녀의 매력을 뽐낼 자리를 비워 주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약간의 찬사와 더불어 시선을끌었다. 그녀의 귀에 두 명의 신사가 예쁜 처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찬사는 당연히 효과를 발휘했다. 오늘 저녁 무도회가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겸손한 허영심이 만족되었다.

그녀의 매력을 노래하는 열다섯 행의 소네트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여주인공의 자질에 합당하겠지만, 이 단순한 칭찬만으로도 그녀는 찬사를 보낸 두 젊은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기의 몫으로 이 정도의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다.

바스에 머물면서 앨런 부인의 최대 소망은 여전히 지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매일 아침 새롭게 확인할 때마다 그녀의 그런 소망은 되풀이되었다.

"정말, 정말로요!" 과장되게 놀라는 척하면서 그가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죠?"
"왜요, 참!" 어느새 그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가씨 대답에 무슨 반응은 보여야 할 테고, 놀라는 척하는 게 가장 쉬우니까요.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적절한 반응이기도 하고요. 이제 그럼 계속하지요. 예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없던가요, 아가씨?"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알아요. 내일 당신의 일기에 난 노력은 했지만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묘사될 것 같군요."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매일 교환한 정중한 인사와 찬사를 매일 저녁 일기장에 적어놓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럴 테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입었던 각양각색의 드레스들은 어떻게 기억하죠? 특히 당신의 얼굴색, 다양하게 묘사될 수 있는 당신 머리카락의 결들은 일기를 계속 들춰봄으로써 알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호감을 줄 수 있는 글쓰기 재능은 특히 여성들에게 필요하다고 다들 이구동성으로 말하니까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일기를 꾸준히 적으면 근본적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대체로 여자들 사이에서 쓰는 편지 쓰기의 스타일은 세 가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흠잡을 데가 없어요."
"그게 뭔데요?"
"전반적으로 주제 의식이 모자라고, 마침표에 신경 쓰지 않고, 문법을 흔히 무시한다는 점이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편지를 더 잘 쓴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는 점을 강조한 거지요. 여자들은 듀엣으로 노래를 더 잘한다거나, 여자들은 풍경화를 더 잘 그린다는 일반적인 평가들처럼요. 모든 면에서 그런 것들이 취미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남녀의 성별에 따라 누가 무엇을 더 잘하는가는 꽤나 뚜렷이 나뉘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남자들은 대체로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지요. 제 남편인 앨런 씨는 이 옷과 저 옷조차 구분하지 못하거든요. 선생님의 여동생은 정말 좋겠네요." 앨런 부인이 말했다.

"아시겠지만 부인, 모슬린은 언제나 다용도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몰런드 양은 그걸로 손수건, 모자, 망토 같은 걸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모슬린은 버릴 게 전혀 없거든요. 여동생으로부터 그 말을 골백번도 더 들었죠. 천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샀거나 부주의하게 잘못 잘라 못 쓰게 되었을 때마다 동생이 되풀이했던 소리니까요."

유명한 작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16)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자가 먼저 그녀의 꿈을 꿨는지를 채 알기도 전에 젊은 아가씨가 남자의 꿈을 먼저 꾼다는 것은 부적절한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스는 얼마나 즐거운 곳인지 몰라. 여기서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앨런 부인은 피곤할 때까지 광천수 홀을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시계 곁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절망만 되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며, 지치지 않고 부지런히 하다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던가. 앨런 부인이 지치지도 않고 날마다 똑같은 소망을 되풀이하다 보니 마침내 그녀의 소망은 응답을 받았다.

자녀들이 많은 소프 부인이야말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 훨씬 유리했다. 재능 있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와 미모의 딸들에 관해 상세히 이야기하면서─아들과 딸들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과 입장에 관해 이야기를 했을 때─존은 옥스퍼드에 재학 중이고, 에드워드는 머천트 테일러 상업 학교17)에 다니고 있고 윌리엄은 선원이라고 했다. 아들 모두는 딸 세 명에 비해 각기 다른 영역과 지위에서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앨런 부인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는 물론이거니와, 기꺼이 들으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친구를 솔깃하게 만들 만한 자랑거리마저 없었던지라, 친구가 뿜어내는 어머니로서의 자부심이 담긴 이야기들을 그저 입 다물고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예리한 눈길에 포착된 친구의 펠리스 망토18)가 자기 것보다 초라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온갖 주제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젊은 두 여자들 사이에 친밀감을 갑작스럽게 높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바스의 무도회와 턴브리지의 무도회를 비교할 수 있었다. 런던의 패션과 이곳의 패션을 비교할 수도 있었다. 유행하는 의상을 언급한 많은 기사들에 관해 새로 사귄 친구가 갖고 있는 의견을 수정해 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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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엔 유달리 강력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아니죠. 그러면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최 형사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노트북 전원을 켰다. 봄이니까. 봄이니까. 최 형사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창밖에선 또 한 번 난분분,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 뜬금없이 강된장과 치커리 쌈 따위를 떠올렸다.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나는 좀 화가 났고, 또 어이도 없었지만, 그것보단 서글픈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사업 자금 때문에 친구를 인부로 쓰다니. 하지만 이미 닭볶음탕도 먹었고,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친구는 어떻게든 사업 자금을 얻어내려고 하는 판국이니…….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물어보았다.
"그래, 일당은 얼만데?"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가끔씩 창문 밖 풍경을 오롯이 바라보는 표정에선 뭐랄까, 함부로 오를 수 없는 높다란 담장 위에 핀 백목련의 기품과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반달가슴곰들의 키는 세 마리 다 그의 어깨 높이 정도였고, 그래서 모두 다 중학생들처럼 보였다. 중학생들이 구걸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TV를 보다가 어느 순간 슬쩍 베란다를 바라보았는데, 아내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 이런 말 하는 제가 참 괴롭지만…… 사실 전 처음엔 아내가 베란다 너머로, 그러니까 12층 아래로 뛰어내린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좀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우리 집 막내는 제 엄마가 빨래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사라지고 난 베란다엔 아무런 흔적 없이 아내가 평상시 집에서 입던 목 부위가 늘어난 티 한 장만이 건조대 위에 초라하게 널려 있었거든요.

한 해 두 해 시험에서 떨어지고, 7급에서 9급으로, 노량진에서 다시 동네 공공 도서관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고 또렷해진 단어는 오직 하나, 낙오자, 글씨 모양새마저도 강파르고 야박해 보이는 단어,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또 한편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립기도 했다. 그는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예전에 TV에서 봤는데, 해수욕장엔 여자들 등에 오일 발라주는 아르바이트도 있대. 이걸 그냥 막 바르기만 하면 돈을 주는 거지.

춘길이의 말에 덕진이는 입을 딱 벌리기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잘못이 크다……. 나라도 그때 정신을 차리고 친구들을 말렸어야 했다. 여기가 무슨 지중해 연안이라고 오일 발라주는 아르바이트가 있을까? 왜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오일이라곤 프라이팬에 식용유 쳐본 것이 전부인 처지에…….

나는 어쩐지 좀 눈물이 날 거 같았다. 해변엔 사람들이 손대면 델 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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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겪어보니 비겁한 얼굴도 있었다. 나 - P83

쁜 사람이니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따뜻하고 온순한 표정을 감추고 있는 경우도 흔한 것이다. - P84

사람은 노력에 의해 타고난 가능성이 확대되는 수도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하면 된다‘고 말하는 속내에는 건방진 자부심이깃들어 있다.
인간에게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는 비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생애를 살아가게 될는지는 그의 간절한 소망과 더불어신이 부여한 사명에 달려 있다. - P85

저도 즐거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필연처럼 안고 있는 한계를 인정했을 때 기대를 밑도는 서로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 P86

사람들은 남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소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한다는 게 진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주 가까운 주변 사람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자녀에 대해서도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아내를 모르고아내는 남편을 모른다. 하물며 한 지붕 아래 살지도 않는타인의 실상을 무슨 수로 알아낸단 말인가. 그런데도 인간은 예사로 타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다. - P91

상대방을 위해 나의 희생을 감수하며 수고한 일이더라도 그가 고마움을 모른다고 해서 서운해한다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럴 수도 있음을 인식하며미리 각오해둬야 한다. - P93

오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관계가 틀어진다. - P93

소문의 밑바닥에는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는 요소가포함되어 있다. 그의 불행한 가정사나, 그가 숨기고 싶어하는 내면의 어둠을 소문으로 끄집어내 그를 구렁텅이에빠뜨리고 싶다는 사악한 욕망의 표출이다.
이 욕망의 뿌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고 나보다 열등한존재로 비하함으로써 나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것 같은착각, 다시 말해 자신감을 되찾아 행복해지고 싶다는 조작된 심리에 지나지 않다. - P94

슬프게도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것이다. 따라서 나에 대한 오해와 억측이 당연하다고 미리 마음먹는 것이 중요하다.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며, 때론 싸움도 불사해야 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산다는것은 따뜻하게 이해받음과 더불어 함부로 무시되고 오해받는 고통이 번갈아 나타나는 현상임을 자연스레 알게된다. 만약 이런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보다 훨씬 유치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더 빨리 늙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 P96

칭찬받았다고 해서 나의 실체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듯 비방당했다고해서나의본질이 훼손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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