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 행동에 관여하는 그 부위는 바로 전뇌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사람을 비롯한 영장류들이 공유하고 있고 그 기원이 오랜 옛날 포유류 및 파충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부위이다. 영장류가 아닌 포유류와 파충류의 관습적 행동이나 과시 행동도 이 부위가 조절하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파충류에 기원을 둔 이 영역에 손상을 입으면 관습적 행위 이외의 다른 자동적 행동들, 예를 들어 걷기나 달리기 같은 행동에도 장애가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과 지배라는 두 기능이 동일한 신체 기관계와 관련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음경을 드러내는 과시 행동은 집단의 지배 서열에서 가장 효과적인 사회적 신호로 여겨진다. 이 행위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 되어 ‘내가 주인이다.’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는 성적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지금은 생식 활동에서 분리되어 사회적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음경을 드러내는 행동은 성적 행동에서 유도된 의식이지만 생식 목적이 아닌 사회적 목적으로 사용된다."

인간의 이타적 행동이 변연계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을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실제로 몇몇 드문 예외(주로 사회성 곤충들의 사례)를 제외하고 자신의 새끼를 보살피는 데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생물은 포유류와 조류뿐이다. 그것은 오랜 적응 기간을 통해 대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된 포유류와 영장류의 뇌의 이점을 십분 활용한 진화적 발달이다. 사랑을 처음 발견한 동물은 아마도 포유류인 듯하다.9)

개는 우리가 신에게 느끼는 종교적 도취감을 사람에게 느끼는 것은 아닐까? 우리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동물들이 느끼는 강렬하거나 미묘한 감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볼 때 성교와 같이 복잡한 포유류의 활동에는 삼위일체의 뇌의 세 가지 요소 ? R 복합체, 변연계, 신피질 ? 가 동시에 관여하는 것이 틀림없는 듯하다.(우리는 이미 R 복합체와 변연계가 성적 행동에 작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해 왔다. 신피질이 관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내적 성찰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물고기도 전뇌에 손상을 입으면 스스로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나 조심성 등이 사라지게 된다.

신피질의 추상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상징적 언어 활동, 특히 읽기와 쓰기와 수학이다. 이러한 활동은 측두엽, 두정엽, 전두엽, 그리고 아마도 후두엽의 협동을 통해 수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상징 언어가 신피질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피질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벌이 정교한 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벌이 춤을 통해 먹을 것이 위치한 곳의 방향과 거리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곤충학자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가 처음 발견했다. 벌의 춤은 사실상 과장된 몸짓 언어, 벌이 먹이를 발견했을 때 실제로 보여 주는 활동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냉장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하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으로 배를 두드리거나 문지르는 행동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어휘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기껏해야 몇십 개의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인간의 어린이들이 긴 유년기에 하는 학습은 거의 전적으로 신피질의 기능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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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필연적으로 의심이라는 조작을 거쳐야 한다.
의심도 해보지 않고 믿었다는 건 엄밀히 말해 행위로서의 성립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일탈이며, 그런 점에서비난받아 마땅하다. - P103

친구는 자녀가 아니다. 부모도 아니다. 남편도 아니다. 형제자매도 아니다. 연인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을말하는가. 친구로부터 의견과 감상을 요구받기 전까지그들의 삶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친구라는 입장에서 그의 성공과 건강을 남몰래 기도하는 것으로 족하다. - P105

나는 오늘날까지 세상의 오해와 잡음에 시달리는 사람들 곁에서그들과 우정을 맺어왔다. 인생은 매순간 대가를 요구한다. 세상에 보기 드문 개성 강하고 똑똑한 친구들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다. - P106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귀머거리‘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청각장애자를 차별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적의나 차별 없는 말과행동이더라도 상대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치욕스런 상처가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의도치 않은 말과 행동에 상처받지않도록 강해지는 방안을 생각해내야 한다. - P108

우리의 일생에서 타인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나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힘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당도할 수 없었다. 거부당하고 미움받고 괴롭힘을당하고, 때로는 사랑받고 구원받으며 칭찬받았기 때문에현재의 내가 있다. 그들 속에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 P109

파괴적인 사상과 실천은 세상이 없어지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기호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사상과 행동에 휘말려 원래의 나‘를 잃곤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찾아왔듯이 바라지 않았던 나쁜 일에 휘말리는 횟수가 쌓여삶을 이룬다. 인생에 좋은 일만 가득하다면 아마도 인간의 성격은 지금처럼 복잡하고 현명하게 완성되지 못했을게 분명하다. - P110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는 성격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으로는 한없이 나약하다는 점이다. ‘나는 나‘ 라는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을 안고 있다. - P111

다른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이 나만의 방식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 P113

그 믿음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이 뒤얽힐수록 서로 성가시러워진다. 살다보면 나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생긴다. 어머니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싶다.
서로의 신상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금물이다. 신상을털어놓는 그 순간부터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착각이피어나기 때문이다. - P120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를 갖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마법이며 동시에 훌륭한 해결책이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 경우엔 조금 거리를두고 떨어져 있으면 세월과 더불어 그에게 품었던 나쁜생각들, 감정들이 소멸되고 오히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궁금함이 밀려온다. - P121

자녀는 철저하게 타인이다. 타인 중에 특별히 친한 타인이다. 특별히 친하다는 예를 찾아본다면 교도소를 출소한 그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이다. 자녀가 아닌다른 누구를 위해 이처럼 정성들여 대접하는 타인이 또있을까. - P122

결점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이상하게도 친구들이늘어난다. 사람들은 나의 장점에만 호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결점에도 큰 관심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내가지독히 말주변이 없더라도 나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방에겐 저절로 위안이 된다. 인간의 우월감을 자극하는 비겁한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넓게 봤을 때 이 또한 사랑의 표현 방식 중 하나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가장 큰 체력소모는 결점을 감추는 데소비된다. 타인에게 나의 결점을 감추느라 거짓말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것이 탄로나 서로 곤혹스러워진다. - P125

나는 내가 되어 살아간다. 인간의 운명이다. 개별적인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이상 인간은 서로 다름이 원칙이다. 굳이 무리해서 다름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타고난 유전자가 다르므로 살아가는 취향이 다른 것은당연하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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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다니고 있는 아내는 분명 휴가 날짜를 조정해보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아내의 섣부른 바람이었을 뿐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우리는 너나없이 고통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란다. 아아아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에게 속엣말을 했다. 고통 다음에야 비로소 가족의 이름을 부여받는 거야. 아아아아. 그래서 가족이란 단어는 들으면 눈물부터 나오는 거란다. 그는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되새겼다. 아아아아. 그는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아이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아아.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노모는 무겁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 놓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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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유리공을 가만히 손에 쥐어본다. 따뜻함이 느껴질 때까지 쥐고 있는다. 그녀는 마지막 문턱 앞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 밭을 내게 보여주려고 힘을 다해 걸었다. 꽃을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었다. 무엇일까, 마지막 문턱 앞에서 사람에게 그런 초인적인 배려의 마음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힘은?

"히? 히? 공부해야지······."
그런 일도 있었다. 작은 방 한 칸의 뮌헨 숙소, 욕실로부터 책상까지의 서너 걸음을 딛는 동안 저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한심하던지. 손에 든 책을 놓지 못해서 화장실을 못 가고 있다가 읽을 책이 몇 장 안 남자 문득,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고, 그제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잽싸게 화장실을 다녀오던 참이었다. 도대체 내 나이가 몇이던가.
그런 천치 같은, 쉰여덟 아낙이 읽고 있던 작은 책은 푸코의 《담론의 질서》였다.

글의 힘, 아직도 때로는 세상을 움직이기도 하는 글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는 지난 몇 년간 골똘히 생각해온 주제이다. 어떻게 그런 글들은 쓰여지는 걸까.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이제쯤은 가끔 그런 글을 스스로 쓸 수도 있어야 하건만, 이제야 가까스로 그런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읽기는 쓰기와 맞닿아 있는 것이어서, 편중된 읽기는 수상쩍다.

천성이 수줍어 글쓰기라는 표현예술에 매진할 용기가 없었다.

읽어야 할 책, 공들여 가르쳐야 할 보석 같은 제 학생들을 제쳐두고 남의 가게 기웃거리며 나다닐 염치도 없었다.

무엇을 얻을 생각이 무의식에조차 없는 채로, 써야 할 글을 쓰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허영심 없는 예술은, 적어도 내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삶과의 괴리만 적나라하다.

예컨대 경제관념이 없다. 또한 돈을 쓸 기회도, 가끔 학교식당에서 학생들에게 밥을 사주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더 벌어들일 시간이야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살아졌다. 그것도 남 보기에 썩 잘 살아졌다. 내 아이들은 저렇게 계산이 안 되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계산 없이 쏟아넣는 일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다. 저만큼 일을 하는 데는 무슨 무서운 속셈이 숨어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유추의 자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때마다 궁극적으로는 부족한 나를 돌아보고, 경계를 제대로 긋고, 내 일에 전념하는 기회가 되어 오히려 감사하기는 했지만, 참 아팠다.

간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돌아보면 글을 배워 좋은 글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 같다. 글을 만나고, 글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또 같은 글을 읽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도 되고······. 얼마나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는지, 그 사람들의 마음속이야말로 내 삶의 천상적 지분인 것 같다.

돌아보니 천치가, 세상에서 한 가지는 야무지게 해낸 일이 있다. 좋은 도서관들에 내 자리를 만든 일이다. 뮌헨에도, 베를린에도, 바이마르에도, 케임브리지에도, 잠시 들른 더블린에까지도 ‘G’자 어름의 서가 근처 창가 ? 근년에 Goethe(괴테) 연구에 몰두한 탓이다

예술과 학문을 지닌 자
종교도 가진 것이다.
그 둘을 소유하지 못한 자
종교를 가져라.

종교를 내려깎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한껏 높이는 말이다. 노년의 지혜가 배인 대시인의 과감한 단언을 내가 흉내 낼 수야 없지만, 그래도 예술 혹은 학문이 내게 무엇이겠는가를 이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정리될 것 같다.

학문 -- 이 천치의 종교. 이제, 그 밖의 모든 것을 거의 다 버린 이제야, 읽기와 쓰기가 내게서 시작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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