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만의 알라딘 등판인지 잘 모르겠다. 글은 닷새 만에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올린 글이 가슴에 관한 글이군. 제목에 가슴 두 개가 떡허니 박혀 있어. , 니가 하는 게 그렇지.

 

 

 

2

 

봄이 오는 것 같다.

 

 

 

3

 

이런 저런 사정과 이런 저런 마음이 만나 조그만 다짐이 되었다.

 

2019년은 탈백수를 해 볼 작정이다. 다짐만 있지 조짐이 있는 것은 딱히 아니지만.

 

 

 

4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니까.

 

 

 

5

 

안 읽으려 하는데,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매번 실패했다.

안 쓰려 하는데, 그건 잘 될지도 모르겠다. 읽어도 잘 안 쓰는 판인데, 안 읽으면 금상첨화(?).

 

 

 

6

 

같이 읽기로 약속한 것들, 쓰기로 약속한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까지는 천천히 한발 한발 걸어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한동안은 의무감으로 읽거나 쓰는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사실 아무도 준 적이 없는 의무를 혼자 받아 설친 꼴이라 관두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뭐 정말 읽고 싶어서 몸부림쳐지는 책은 참지 말고 읽고, 정말 쓰고 싶어 칼부림 날 것 같은 날에는 참지 말고 쓰기로 하고,

 

 

 

7

 

2월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3월에는 아마 이런 월말 결산 페이퍼를 올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할 것이고. 결산 페이퍼를 다시 쓸 날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

 

사실 이런 공지도 아니고 일기도 아닌 글을 쓸 때마다 생각한다. 꼴값, 이게 당최 무슨 돼먹지 못한 자의식 과잉인지.

 

 

 

8

 

그만하고 가서 공부를 시작하자.

 

 

201902 : 35

 

1.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 고대사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굉장히 치열한 모양이다. 많이 들여다보지는 않아서 언급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재미있는 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어떤 논점을 두고 대립하는 양쪽이 사실은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저놈도 다 알면서 모종의 이유로 그걸 모른 척, 사료를 조작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 중이라는 태도만큼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syo는 고조선의 위만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백제가 요서에 진출할 만큼 강력한 해양세력이었는지, 발해가 말갈족의 나라인지 고구려인의 나라인지, 가야에 왜놈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위의 사실들이 어떻게 결론이 나건, 그게 오늘 내가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그들만의 저 치열한 전투가 정말로 어느 한쪽의 의도적 왜곡으로 인해 벌어진 싸움판이라면, , 굳이, 무엇하려 왜곡씩이나 하는 건지, 그 마인드, 혹은 그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어떤 이권의 맥락이 훨씬 더 궁금하다.

 

2. 몰입 / 패티 스미스 지음 / 김선형 옮김

: 글쓰기를 운명으로 감고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을 발견하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좋아하면서 질투하고, 부러우면서 다행이다 싶고.

: 글쓰기에 대한 소명의식을 드러내는 단단한 목소리를 마주하는 일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깨워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런 글을 열심히 찾아 읽는다. 아름답기까지 하면 감사한 일이다. 감사하다.

 

3. 전락 / 알베르 카뮈 지음 / 유영 옮김

: 스물 두 살의 syo이방인을 읽고 어쩐지 잉잉 울어버린 습한 추억이 있는데, 하등 울 일이 아닌데도 어쩐지 잉잉 울어버린 것인데, 그때부터 카뮈를 더 읽었다가는 울보가 되어버릴까 봐 십년이 훨씬 지나도록 더는 카뮈를 읽지 않았다는 거짓말 같은 거짓말이 전해지는데......

: 이번엔 안 울었다. 후후. 이제 카뮈를 읽어도 되겠군.

: 카뮈는 살아생전 말을 얼마나 잘했을까. 게다가 국가급 외모에 탈국가급 글빨.... , 이 사람 이거...... , 잠깐, 지금 이거 눈물인가??!!!!!(깨달음) 으어허허허(해탈)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딴소리)

 


4.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이현우 지음 / 조성민 그림

: 처음 이 책을 읽으며 로쟈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러시아 문학에 손을 댈 때가 오면, 프롤로그 느낌으로 이 책에서부터 시작하자고. 자 이제 러시아문학을 시작할 때가 왔도다!

: , 이 책을 다시 또 읽는 불상사가 더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대채 몇 번째 시작이냐. 마르크스건 도스토예프스키건, 너는 어째서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느냐, 아이고 syo, syo.....

 

5. 맑스주의 역사 강의 / 한형식 지음

: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통사로는 이만한 게 있을까. 명쾌하다고까지 할 바는 아니지만 쉽고, 균형 감각이 쩐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가려 받아들일 만은 하고, 늘 그렇듯이 함량이야 부족할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부족하겠지만, 대체로 이 정도면 넘치지 않나 싶기도 하고.

 

6. 돈 후안 외 / 티르소 데 몰리나 지음 / 전기순 옮김

: 재미? 없다.

: 의미?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들면 찾아지긴 하는 법이다.

 


7.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지음 / 안장혁 옮김

: 페터 한트케는 헤맨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순탄한 상황이라면, 내면의 오래 묵은 찌거기를 왕창 뒤집어 엎어서라도 기어이 헤매고야 만다. 누구도 재현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조차도 반복할 수 없는 그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방황이 어째서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일까?

 

8.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 마이크 곤살레스 외 지음 / 이수현 옮김

: 사실 전기를 읽으면 좋은데, 만만치가 않다. 마르크스만 해도 종류도 다양하고 두꺼운 건 1000페이지. 레닌 평전은 4권짜리고, 트로츠키 평전도 두껍한 책 3. 룩셈부르크의 경우 거의 절판이라 구하기도 어렵다. , 있는 건 너무 있고 없는 건 너무 없다. 결국 이런 요약서를 통해 간이나마 볼 수 있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간이나 보고 말아야 하는 것을 슬퍼해야 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기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고 만다.

 

9. 불교입문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 입문서 빠돌이가 입문서 떠돌이가 되어 결국 불교입문에까지 흘러들어왔다.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놔서 얼마나 알찬 책인지는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지만, 형식으로만 보자면 그냥 평범한 입문서다. 특별히 재미도 없지만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만큼 지루하지는 않다.

 


10.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지음 / 정영목 옮김

: 야하다. 히히.

: 이 짐승의 마음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말빨이 되게 좋긴 한데, 별로 설득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이쪽도 별로 설득될 생각이 없다. 아마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야한 할아버지가 나왔던 이야기로만 기억될 것 같다.

 

11. 전락 / 필립 로스 지음 / 박범수 옮김

: 야하다. 히히히.

: 이 짐승의 마음은 조금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죽어가는 그 짐승에 비하면 말빨이 별로긴 한데, 오히려 묘하게 설득되는 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야한 할아버지가 나왔던 이야기로 기억될 것 같다.

: 결국 오래 지나면 두 짐승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한 가지 차이는 있다. 죽어가는 짐승은 살았고 안 죽어가는 짐승은 죽었다...... 스포일러 죄송합니다만, 어차피 둘 다 첫 페이지부터 오늘 내일 하는 인간들처럼 보이는지라,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체는 스포일러가 되지도 않는다구요. 그저 왜 죽었고 왜 안 죽었는지가 중요합니다.

: 그리고 이 두 짐승을 만들고 돌아가신 필립 영감님은 정말 글을 너어어어어어어어무 잘 써. 지나쳐. 지나쳤어.

 

12. 물고기들의 기적 / 박희수 지음

: 1년도 더 전에 읽고 좋은 평을 남겼었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띠꺼운 표정으로 띡띡 페이지를 넘기다가 휙 던져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오늘의 내가 망한 것일까, 그때의 내가 멍한 것이었을까?

 


13. 카모메 식당 / 무레 요코 지음 / 권남희 옮김

: 일단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 쪽이 더 좋았다는 사실.

: 그렇지만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건, 영화만 보는 케이스와 영화와 이 책 둘 다 보는 케이스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는 것.

 

14.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이병훈 지음

: 좋은데, 도스토예프스키 사진을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든가(세상 그 어떤 인간이 그 앞에서 떳떳할 것이냐는 변을 달아놓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버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년에 살았다는 집에 방문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하는 대목은 좀 과하게 간지러운 데가 있다......

 

15.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 / 한민 지음

: 박학한 동시에 말에 재간이 있는 이와 나누는 이야기는 즐겁고 유익하다. 이런 친구가 주변에 한둘 있으면 왕왕 만나서 3900원짜리 커피 한잔 맥이고 39900원짜리 이야기를 듣고 오고 싶다. 대체로 그런 이들은 이야기할 기회를 마다하지 않던데.....

: syo가 빌린 책만 그런 거겠지만, 48쪽 다음에 81쪽이 불쑥 나오기에 어어, 하며 읽어갔는데 96쪽까지 읽었더니 그 다음이 65쪽이다...... 결국 49쪽부터 64쪽까지는 오리무중이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얼마나 위대하냐면요.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었다.....



16.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 / 임미진 외 4인 지음

: 이 지혜롭고 아는 것 무한한 양반들조차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심지어 4차라고 불러야 되는지 아닌지도 합의 불발 상태)의 특징이 아닐까. 그래도 인터뷰 대상자들의 네임 밸류가 워낙 떠르르하여, 어쩐지 손쉽게 마음을 열게 되는 책이다. 내 마음 자동문과 같이 활짝 열리니, 그대여 천천히 오오..... 제발 천천히 오오......

 

17.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지음 / 김인순 옮김

: 근래 들어 읽은 책 가운데 단연 가장 많이 베껴 적은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래란 반년 안짝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놓고 볼 것인지는 아직 좀 더 망설일 필요가 있겠다. 그러니까 산도르 마라이는 현역 시절 되게 현란하면서도 뜻깊은 플레이를 펼쳤던 전설적인 축구선수이며, 현재 그의 모든 기술을 내게 전수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데, 정작 내 꿈은 농구선수인 상황 비슷하달지.

 

18. 슬픈 인간 /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 정수운 옮김

: 나쓰메 소세키가 마음먹고 웃기려 들면 나란 놈은 별 수 없겠구나.

: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마음먹고 쓸쓸하게 하면 나란 놈은 꼼짝 못하겠구나.

: 고바야시 다키지가 마음먹고 현실몽둥이로 후려치면(사실 그는 매번 그런다) 나란 놈은 고추짬뽕 먹은 늙은 쌈닭처럼 볼품없는 깃을 세우고 깝치겠구나.

 


19.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

: 고골의 웃긴 미친놈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슬픈 미친놈은 차이가 있다. 그 중 어느 미친놈을 더 아끼느냐는 짜장면 짬뽕 수준의 인식론적 칼날로 독자의 성향을 가른다. 그러나 결국 좀 더 읽다보면 웃기게 미친놈이 슬픈 놈이고 슬프게 미친놈이 웃긴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웃지도 슬프지도 못하고 미치겠다. 그럼에도 syo가 보건대, 도스토예프스키는 애를 써도 고골만큼 쓰리게 웃기지 못하고, 고골은 애를 써도 도스토예프스키만큼 선명하게 비참한 인생을 빚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다행이다, 둘이 같은 운동장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두 운동장이 그리 멀찍이 떨어져 있지는 않아서.

 

20. 사양 / 다자이 오사무 지음 / 유숙자 옮김

: 이 인간 군상들의 마음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 뒤표지에는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페미니즘적 작품이라고 쓰여 있지만 난 이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

: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해한 척하고 싶은 충동에 못이겨 대충 얼버무리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이름값 높은 작가/작품들. 다자이 오사무도 이름 값으로 보면 충분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해하는 척 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 책이다.

 

21. 나의 사랑, 매기 / 김금희 지음

: 이 책 바로 직전에 나온 김금희의 다른 책에 대한 평을 달면서, 나는 언젠가 김금희가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할 당시에는 언젠가는 그럴 것이라는 어렴풋한 느낌, 기대와 당위 사이에서 애매하게 줄타기하는 흐릿한 감정에 기대어 예언 같은 방언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권을 더 읽고 나자, 어쩐지 김금희가 모두를 이길 수 있는 이유를 조금 감지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앞으로 두세 권을 더 읽고 나면 또렷한 정신으로 당당하게 떠들고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은 김금희가 이긴다.

 


22.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지음

: 첫 번째 시집으로 박준은, 박준의 시는 이런 것임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 두 번째 시집으로 박준은, 이런 것은 박준의 시임을 세상에 각인시키려한다.

: 세 번째 시집으로 박준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반쯤 기대한다. 나머지 반쯤은 피곤하다.

 

23.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 용경식 옮김

: 코 흘리던 시절(정말 오래도 흘렸다, 그놈의 코)syo가 이 책을 읽고 생각건대, 와 이 모모 되바라진 어린노무식혜 참 몹쓸 놈일세, 하였다. 그걸로 땡. 고만고만한 책이네, 이러고는 상실의 시대연금술사니 뭐 이런 것들을 읽으러 후다닥 달려갔겠지. , 그랬던 코흘리개 걔가 코 닦고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24.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 이수은 지음

: 한눈에 알아보았다. 만약 이 사람이 알라딘에 나타난다면, syo는 그길로 장사 접고 은둔해야 한다....


 

25.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이경덕 옮김

: 이런저런 입문서를 불필요할 정도로 중복해서 읽는 것으로 알라딘에 이름이 떠르르한 syo가 보건대, 우치다 선생님은 정말 최고시다, 무대를 다 뒤집어놓으셨다......

 

26.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 하상복 지음

: 지난 번 읽었을 때 그랬다. 이번에는 푸코 때문에 읽었지만 다음 차례는 하버마스라고. 1년도 더 전이었다. 그랬으나 이번에도 역시 푸코 때문에 읽었다. 하버마스로 나아가기는커녕 그나마 알고 있던 푸코조차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다. syo 이 못난 놈.....

 

27. 지하에서 쓴 수기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김근식 옮김

: 골방 생활자들을 싸잡아 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나도 그리 다른 인간은 아니기에), 자기만 인정하고 자기에게만 인정받은 자기만의 사상을 잔뜩 키워놓고서는 그 되먹지도 못한 걸로 횡설수설 세상을 가르치거나 고려치려 하고, 그게 성공했다고 혼자 착각해서 도취되었다가, 그게 아니었단 걸 깨닫고 나면 이 미친 세상이 또 나를 배신했다는 한탄과 함께 침 한번 퉤 뱉고는 사실 내가 처음부터 이럴 줄 다 알았다고 자위하면서 다시 골방으로 들어가는 패턴. 그런 패턴을 반복하는 인간은 솔직히 피하고 싶다.

: 언제나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찌질이 멘탈 묘사는 설득력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찌질이 찌질이 상찌질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까지 현실적이다. , 극사실주의라 어쩐지 더욱 정 안 가는 찌질이들....

 


28.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 차은정 옮김

: 그다지 쉽지만은 않다. 도표들은(특히 레비스트로스 파트에서) 별로 쓸모가 없다. 다른 프랑스 현대철학 개론서들과 비교해봤을 때, 굳이 흐름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박아넣을 만큼 특출나게 흐름스러운데는 없다.

 

29. 수학의 감각 / 박병하 지음

: 수학, 물리(중에서도 양자역학), 그리고 건축. 이런 분야에 몸담아 사상을 갈고 닦은 이들의 손에 어느 정도의 글솜씨까지 주어지면, 그들은 늘 독창적인 방식으로 syo를 무장해제 시킨다.

 

30. 오래된 연장통 / 전중환 지음

: 저자의 신작 진화한 마음을 어쩌다보니 구입하게 되어, 프리퀄 느낌으로 한 번 읽어 보았다. 진화심리학에 흥미는 있으나 애정은 없고 신뢰하지만 신임하지는 않는지라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겠다.

:진화한 마음은 과연 여기서 얼마나 진화하였는지, 설레는 마음으로 책꽂이에 꽂힌 그 책을 바라만 보고 있다. 원래 멀리서 바라만 볼 때 가장 설레는 법이지......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댄~ “영원히내 모습 볼 수 없나요..... 설마 영원히 안 보진 않겠지???? , 그러고 보면, 사기 전에는 탐내다가 사서 꽂아놓으면 읽지 않는 심리의 진화심리학적 해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 책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



 

31. HOW TO READ 푸코 / 요하나 옥살라 지음 / 홍은영 옮김

: HOW TO READ 시리즈에 자리 잡은 책들을 소개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을 또 반복하지만, 얘네들은 결코 입문서가 아니다. 굳이 말하면 난이도를 낮추지 않은 요약서에 가깝고, 그 중에는 저자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대상 철학자들을 재해석한 책들도 속속 있다. 애 책의 경우 푸코의 재해석이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겠으나, 이 책으로 푸코를 시작하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똑똑치 못한 선택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입문서 두어 권쯤 꼼꼼히 읽고 돌아와 이 책을 만나면, -하고 장탄식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가 대충 다 그렇다. 1학년은 모르고 2학년은 아리까리한데 3학년은 갑자기 감동의 눈물이 난다.

 

32. 세상을 바꾼 화학 / 원정현 지음

: 내가 애들 보는 책 그만 뺏어 보라 그랬지!?

 

33. 작은 수학자의 생각실험 / 고의관 지음

: 뭐왜뭐, 애들 보는 책이 뭐가 어때서!?

 


34. 권력 / 스기타 아쓰시 지음 / 이호윤 옮김

: 얇은데도 의외로 내실이 있어서 놀랐다. 작년에 다섯 쪽만 읽고 반납했었는데......

: 각자의 권력론을 전개한 사상가들이 밤하늘 별처럼 많은데 그 중 누구든 다섯 명 정도만 먼저 숙지하여 카시오페이아자리를 미리 찍어놓고 그걸 기준점으로 하여 이 책을 시작하면 좋겠다. 사실 꼭 그렇지 않아도 죽 읽어나갈 수 있을 만한 책이긴 하지만 밑천이야 언제나 넘치면 넘칠수록 좋은 것이니까.

 

35.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 홍일표 지음

: 처음 다섯 수를 읽으면서, 기교가 승하다고 생각했다.

: 다음 다섯 수를 읽으면서, 기교라도 이 정도면 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 다음 다섯 수를 읽으면서, 정말 이게 그저 기교일 뿐인지 의심했다.

: 다음 다섯 수를 읽으면서, 더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 다음 다섯 수를 읽으면서, 더는 뭐가 뭔지 알 필요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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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2-27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기다리다 읽게 된 글이라 좋아요~ 를 누르지만.... 난 반댈세!!!!

syo 2019-02-27 21:5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의 반대에 나도 찬성하지만,
인생이란 참 무엇일까요.

어허허허허허.

북다이제스터 2019-02-2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겹치는 책이 한 두 권 보여 반갑습니다.
그 중 하버마스에 공감합니다.
현실적으로 그의 말이 실현되길 어렵지만, 그의 말이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올해 원하시는 바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syo 2019-02-27 22:03   좋아요 1 | URL
입문서를 통해 만나면, 하버마스는 너무 순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이게 바로 입문서의 대표적인 폐해겠죠? 후려치기......

언제 한번 하버마스를 꼼꼼히 읽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응원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2-27 22:08   좋아요 1 | URL
입문서만 읽은 제 폐단이군요. ㅠ
그의 원본을 읽을 실력은 아직 안 되고...
조만간 그의 깊이에 빠져들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syo 2019-02-27 22:12   좋아요 2 | URL
북다님께 원전 읽으시라고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저도 입문서 밖에 못 읽었는데 그렇게 보였다는 말씀이었어요 ㅠㅠ

저도 말로는 ‘언제 한번‘ 이라고 폼나게 해놨지만 사실 엄두가 안나요......
그냥 폐단 속에 평생 살까 싶은 지경입니다;;;;

이렇게 써 놓고 제가 쓴 댓글 보니까 저 진짜 싸가지 없네요 ㅋㅋㅋㅋㅋㅋ ‘언제 한번‘ 이라니 ㅋㅋㅋㅋㅋ 미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폐가 많았습니다;;

다락방 2019-02-2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하다 히히

하는 거 귀엽다 히히 🤗

syo 2019-02-27 22:0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야한 게 좋은거라,
제가 아마 키보드로 ‘히히‘ 치면서 현웃으로 히히 그랬을 걸요? 안 봐도 비디온데 봤어.

카알벨루치 2019-02-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군 역쉬 만세!!!🍗

syo 2019-02-28 00:5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 닭다리 잘 먹겠습니다.

잠자냥 2019-02-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저도 야하다 히히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말입니다....

syo 2019-02-28 01:0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 대목이 눈에 잘 들어오긴 하나봐요ㅎㅎㅎ 것참, 어쩐지 쑥스럽습니다.

이하라 2019-02-2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신 책 중에 불교입문서가 있길래 권해 드리고 싶은 책이 언뜻 떠오르는군요.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이해>라는 책과 범일스님의 <수트라 여시아독>이라는 책입니다. 불교에 입문하기로는 역시 초기불교이고 초기불교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는 책들입니다.

수트라라는 책은 저도 아직 읽고 있는 중입니다만 저자이신 범일스님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법이 딱 syo님과 맞는 부분이 있을듯해서 적극 권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안 읽고 안 쓰겠다고 선언하셨는데 이렇게 과감하게(?) 권하는 이유는 syo님께 독서와 글쓰기를 끊는다는 건 숨 안쉬고 오래 참기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참고로 숨 안쉬기(?) 기네스 기록이 30분이 넘는다더라구요. 그래도 결국엔 숨을 쉬어야 했겠지요^-^;

syo 2019-02-28 01: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당장이 되진 않겠지만 두 권 다 반드시 읽어보겠습니다.
이하라 님께서 권하시는 건데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숨을 엄청 오래 참고, 아주 잠깐 쉬고, 다시 엄청 오래 참는 식으로라도 버텨 볼까 싶습니다^-^

psyche 2019-02-2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syo 2019-02-28 01:02   좋아요 0 | URL
올해는 탈백수하여 떳떳하게 내 돈 주고 책 사 읽어보겠습니다!

2019-02-28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8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9-02-2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맑스,에밀 아자르등 또한 카모메 식당을 책으로도 읽어야 할 것인가?
김금희 나도 좋아하긴 하지만,저렇게 대놓고 편애하다니???
궁시렁대면서도 늘 눈에 들어오는 책들 많았어요.결국 언젠간 읽어보고 싶도록 만드는 마력이 있어요.
얼마전, 서점에서 나도 모르게 필립 로스 책 한 권 사들고 와서 읽고 있더라는~~^^
야하다고 추천해준 대목 때문만은 아녔.....는데 야한 대목은 확실히 야했습니다.
야하면서 글을 잘 쓰는 작가!
님의 표현이 맞았어요.
묘하게 설득되어 다음 책을 찾게 되더라는~~~
이런 페이퍼 자주 볼 수 없다는건 아쉽겠지만...늘 건투를 빕니다^^

syo 2019-03-01 00:54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야한 할아버지도 감사합니다ㅎㅎㅎㅎ

저는 이제 덜 읽겠지만, 책나무님의 굳건한 독서생활을 기원할게요^-^

목나무 2019-02-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보는 syo님 글에 앞으로는 syo님 글을 더 보기 힘들거라 하니... 기운이 쫘악 빠집니다. --;;
그래도 탈백수를 향한 syo님의 다짐 멀리서나마 응원할게요! ^^
간간이 소식은 전해주실거죠?

syo 2019-03-01 00:52   좋아요 0 | URL
그럼요, 살아 있는 티는 내려고 생각중이에요. ㅎㅎㅎㅎㅎ
그러고보면 작년에도 이렇게 설레발은 쳐놓고 엄청 읽고 쓰다가,

망해서 올해의 제가 되었지요.....-_-

stella.K 2019-02-2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치고 빠지는군요.ㅠ
하긴 저도 장사를 좀 하게될 것 같아 예전만 같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예스24에서 미션 수행하면 4만원씩 주는 파워블로그 활동도 이번 달로 쫑내기로 하고.
3월은 뭘 다시 시작해도 좋은 달 같습니다.
뭘 하던 다 형통하길 빕니다. 스요님은 잘 할 겁니다. 응원합니다.^^

syo 2019-03-01 00:52   좋아요 0 | URL
장사를 하신다구요? ㅎㅎㅎㅎㅎ
뭔가 신변정리를 하시는 분위긴데, 스텔라님도 새로운 도전 흥하시기를!! 저도 응원합니다 ㅎㅎ

독서괭 2019-02-2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결산페이퍼 참 좋아하는데, 앞으로는 보기 힘든 건가요.. ㅠㅠ 두세달에 한번이라도 올려주시는 건..?
그래도 syo님의 결심이니 응원하겠습니다. 너무 참다가 병나지는 않게 조절하셔요~~

syo 2019-03-01 00:50   좋아요 0 | URL
결산페이퍼를 쓰려면 적어도 달에 스무 권은 읽어 줘야 하는건데, 그렇게 되게 두지 않으려구 해요 ㅎㅎㅎ
뜨문뜨문 읽다가 두 달이 됐건 세 달이 됐건 얼만큼 쌓이면 써 올리긴 할건데, 얼마나 읽게 될지....

응원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2-28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이 빠질 뻔 하다 읽은 책 이야기 새 소식은 ...울지 않을테다. syo님의 결심과 시작 모두 응원합니다. 이제 (syo님 덕에 느지막히 깐)북플 앱 켜고 새로고침 하는 일도 줄어들 듯...엉엉

syo 2019-03-01 00:48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울지 않을테다 재밌어...... 알아뒀다 써먹을테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구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들어와서 글 남기지 않을까 싶어요. 책을 안 읽을테니 책 이야기는 거의 못할 테고, 그냥 잡설 같은 거......

사실 잡설이 본분이니 그렇게 따지면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군요;

tintin2506 2019-03-0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책을 읽으시는 데 전부 구매하시나요? 도서관도 이용하시나요? 꾸준히 서재글 올려주시는 데, 이렇게 다독 및 감상평을 통해 얻고자하는 바,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syo 2019-03-05 03:34   좋아요 0 | URL
1. 안녕하세요, tintin2506님, 반갑습니다^^

2. 정말 많은 책을 읽는다고 까지 할만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 권 페이스입니다.

3. 저는 백수여서 제가 읽는 책의 1할 정도만 구매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 도서관 덕이구요. 정말 슬프기 그지 없는 일이네요 ㅠㅠ

4. 꾸준히 서재글, 올리지 못할 것 같은 요즘입니다...... 흐규ㅠ

5. 제가 이 서재질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손에 꼽기에는 너무 많지만, 부차적인 것들을 다 쳐내고 나면 결국 제일 원하는 건 아마도 ‘관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답변이 만족스러우셨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19-03-0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카뮈 <전락>은 순전히 얇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
네요.

먹고사니즘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을까요 ㅇㅇ

syo 2019-03-20 20:35   좋아요 0 | URL
세상에 두 주나 지나서 댓글을 확인하네요 ㅠㅠ 죄송합니다...
이런 사태야말로 먹고사니즘의 어마무시한 폐해군요....

- 2019-03-1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왔는데...어디가셨어요? ㅠ_ㅠ

syo 2019-03-20 20:34   좋아요 1 | URL
여기요, 여기......
그러나 이제 곧 다시 저기, 저기로..... ㅠ_ㅠ
 

 

사슴가슴가슴사슴

 

 

1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

 

언젠가 이 고요함을 그리워 할 날이 오기도 하겠으나.

 

 

 

3

 

하루 종일 활자와 더불어 뒹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활자들이 줄지어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라도 차례차례 한대씩 후려쳐주고 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자음은 왼싸대기로, 모음은 오른싸대기로, 구두점들은 턱주가리로 출정한다. 집결지는 인중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뭉쳐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이다. 알겠나, 제군들. 살아서 인중에서 다시 만나자. 무운을 빈다.

 

 

 

4

 

바람도 조류도 없고 보이는 거라고는 수평선 밖에 없는 소금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이런 평화, 당혹스럽다. 사랑하는 이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사슴 같다 말하려 했지만 무심결에 가슴 같다 말하고 만 속셈 빤한 빙충이마냥 당혹스럽다. 인간은 분주할 때 평화를 그리워하고 평화로우면 분탕질을 치고 싶은 동물인가. 아닌가. 나만 그런가. 어허허.

 

 

 

5

 

그러고 보면 김진영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강의 중에 '사건'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입에 올렸던가그런데 그것들은 모두가 책에서 읽고 들은 풍문이고 코드들이었다사건은 그런 책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그건 위기를 만난 마음속에서 태어나는 '사건들'이다이 사건들은 놀랍고 귀하다정신과 몸이 함께 떨리는 울림이 울림은 모호하지 않다종소리처럼 번지고 스미지만 피아노 타음처럼 정확하고 자명하다더불어 글이 무엇인지도 비로소 알겠다그건 이 사건들의 정직한 기록이다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도 알겠다그건 백지 위에 의미의 수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 마침표처럼 정확하게 음표를 찍는 일이다마음의 사건-그건 문장과 악보의 만남이기도 하다.

김진영아침의 피아노, 53 


활자들이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를 때리진 않았으나 걔네한테 맞았다면 아마도 지금 이런 기분일 것이다. 아무 사건이 없었으니 무엇도 억지로 쓰면 안 되겠다. 인중이나 문지르면서, 사슴 따위랑은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가슴에 대해서나 생각하면서, 이 미친 고요함이 지나가기만을 대차게 기다릴 밖에.

 


  새벽 네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도시가 폭격을 맞았다눈길이 닿는 곳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모든 것이 물속에 잠긴 듯저녁에 기이한 적막이 도시를 뒤덮었다폭격기들도 침묵했다.

  저녁 무렵 도시에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교외의 집 몇 채와 불가사의하게도 폭격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종탑만이 온전했다시내 중심가의 유서 깊은 아름다운 옛집들과 대성당은 파괴되었는데종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래서 종지기는 저녁마다 그랬듯이 138개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 청동으로 주조한 종을 쳤다종소리가 시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종지기는 자신이 맡은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그런데 때로는 그런 행동이 전혀 의미가 없다상징도 아니다도시가 멸망하면 상징들도 그 의미를 잃는 법이다그러나 종소리는 울려 퍼졌고폐허 위를 맴돌았다부상당한 자와 죽음을 앞둔 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그들은 평상시에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상했으며도시의 유일한 의미는 벽이 무너져도 침묵하지 않는 그 소리였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물론 종지기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종지기에게는 월말에 돈을 받는 것만이 중요했다그래서 걱정을 하며 이를 악물고 종을 친 것이다그러나 새카맣게 그을린 돌 틈 사이에서 종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진 탓에도시는 폐허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그것을 이해해야 한다종을 울리자.

산도르 마라이하늘과 땅, 122-123


  "농담이 아니에요." 발터가 헐떡이며 웅얼거렸다. "나는 졌습니다항복이에요."

  "졌다라." 라우레아노가 휘 한숨을 쉬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수두룩하게 졌지만 저는 이제 둔감합니다저는 맨날 지지만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브루나 아르파이아역사의 천사, 388-389 


 

 

 

--- 읽은 ---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 이수은 지음

How to read 푸코 / 요하나 옥살라 지음 / 홍은영 옮김

오래된 연장통 / 전중환 지음

세상을 바꾼 화학 / 원정현 지음

 

 

--- 읽는 ---

권력 / 스기타 아쓰시 지음 / 이호윤 옮김

자본론 함께 읽기 / 박승호 지음

작은 수학자의 생각실험 / 고의관 지음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 홍일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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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2-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의 피아노, 읽어야겠당!
읽어야겠어요. ㅎㅎㅎㅎㅎㅎ
이건 속마음 토크 아님.

syo 2019-02-22 13:0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중요한 건 마음이 아니라, 정말 읽으시느냐 하는 것이지요!

2019-02-2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9-02-22 13:05   좋아요 0 | URL
악. 오프라인에서도 제가 자주 하는 실수입니다...... 고인께 이 무슨 무례를;;
지적해주신 덕에 정정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2-2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 매일 변화 있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

syo 2019-02-22 22:03   좋아요 0 | URL
와 ㅎㅎㅎㅎ 저는 무언가 매일 변화 없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중인데, 역시 인생 알 수 없군요......ㅠㅠ

- 2019-02-25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책읽고 싶당 ㅠ

syo 2019-02-27 21:28   좋아요 0 | URL
이 대사 어쩐지 조만간 나도 치게 될 것 같다......
 

 

비를 기다리는 밤

 

 

1

 

나는 밤을 편애하는 사람들이 사는 별에서 왔다. 어둡고 추운 밤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들에 어둠이 자욱하면 총을 든 나는 도화지처럼 서서 밤이 내 몸에 그림 그리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밤이 들고 오는 크레파스는 사실 매일 조금씩 다른 검정색이었다. 1월의 크레파스가 보기에는 가장 좋았다. 차갑지만 쨍한, 총을 쏘면 맑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은 검정이었다. 하늘과 땅이 한 색이었다. 이 밤을 사랑하면 세상의 모든 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견뎌낼 수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눈동자가 비교적 검은 아이에서, 머리칼이 유난히 검은 어른으로 자랐다. 밤은 자꾸 나를 덧칠하고, 나는 밤을 사랑하고 닮아갔다. 사랑은 밤에 깊어지고, 나는 밤이면 사랑을 자꾸 덧칠한다. 낮에는 읽지만, 밤에는 읽고 쓴다. 낮에는 잠들지만, 밤에는 잠들고 꿈을 꾼다. 밤은 내게 더 많은 숙제를 떠안긴다. 밤이 없는 나는 불완전하다. 나는 밤에 더 많이 내가 된다.

 

그럼에도 가끔은 밤이 무거워 마음이 결린다. 밤의 독서는 생의 어두운 면과 조응한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불안과 불행을, 아픔과 슬픔을 탐지하는 눈을 크게 뜬다. 낮이라면 언뜻 지나쳤을 불안과 남의 것인 불행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채고, 등장인물의 아픔 위로 나는 넘어져 그들의 슬픔을 세심히 번역한다. 그렇게 지어진 글들이 실은 죄 남의 것들이다. 번안된 노래가 심장에 명중하기가 어렵듯, 그렇게 만들어진 글들은 먼지로 만들어져 부유하고, 쌓이고, 부패하고, 잊힌다. 현명한 사람들은 달빛 아래서 쓴 글은 햇볕에 말리기 전에는 내놓지 말라고 권한다.

 

그럼에도 밤에 무엇인가를 끄적대는 일은 내게 있어 혈족의 계보 같은 것이라, 거절하고 거절해도 도달하고야 마는 하구 같은 곳이라, 나는 오늘도 무던히 그 길을 간다. 조금 지나면 비가 내릴 것이라 한다.

 

사흘의 낮을 지나면 나흘의 밤이 이어지는 일주일로 만들어진 우주에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별이 은하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별이 가끔 그립다.


나는 어째서 이토록 그 강을 사랑하는 것일까 .탁하게 흐리고 뜨뜻미지근하던 그 강물에 왜 이리도 알 수 없는 그윽함을 느끼는 것일까나 자신도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다만 오래전부터 이 강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말로 설명하기 힘든 위안과 고요를 느꼈다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어져그리움과 추억으로 만들어진 나라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나는 세상 무엇보다 스미다강을 사랑한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나의 스미다강

 

겨울비 박준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2



한참을 달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아서어느 집 대문 그늘 아래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들 뒤에 앉았다나는 울지 않았다더 울 필요도 없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창피한 마음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는 상상 속의 경찰을 불러냈다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경찰을그는 다른 경찰들에 비해 백만 배는 더 큰 덩치에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방탄차까지 몇 대씩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그와 함께라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그는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터였다그가 책임을 져줄 것이므로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그는 아버지처럼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면서 내게 그렇게 여러 발의 총을 맞았는데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병원에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일을 처리해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그리고 내게 제일 좋은 방법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상상 속에 많은 친구를 두고 살던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이면 이불 덮은 마음이 늘 왁자지껄했다. 새우처럼 웅크리고는 서늘한 이부자리가 체온으로 차츰 덥혀지는 것을 몸이 감각하는 동안, 마음은 친구들의 출석을 불렀다. 꿈결의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 줄 다정한 친구들이 모여들어 밤으로 나를 칭칭 감았다. 작은 빛 하나 없는 방, 어둠은 바다였고, 나는 배였고, 나는 파도였고, 나는 조개였고, 나는 선원이었고, 나는 노래였다가, 내가 다시 내가 되면 어둠은 썰물처럼 물러가고 이름 모를 아침 새가 우는 소리로 창문을 두드리곤 했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 나는 받아쓰기를 하고, 곱셈과 나눗셈을 배우고, 올챙이의 뒷다리를 관찰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읽게끔 소략하게 줄인 프랑스 작가의 소설책을 읽고, 강아지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주고, 막 숟가락질을 배우기 시작한 동생의 손놀림을 지켜보며 저녁을 먹고, 작은 빗자루와 쓰레기를 들고 건성건성 방을 치우고 나면 다시 이부자리는 펼쳐진다. , 슬슬 친구들이 올 시간이야.

 

마지막 친구를 죽였던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쯤 나는 친구들보다 <수학의 정석>을 한 페이지라도 더 많이 푸는 일이나,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영어 단어를 외우는 일이나, 가본 적도 없고 가보고 싶지도 않은 나라의 토양의 특성에 대해 공부하는 일에 많이 신경 쓰는 아이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아이에게 상상 속의 친구를 굶겨 죽이는 일 같은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일이 다 그렇듯이, 한번 떠난 친구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3



갈비뼈

 

  그렇다면 당연히아니 무엇보다도 그녀를 새로이 창조해야 할 것이다어쨌든 내 갈비뼈로 그녀를 만들지 않았던가하느님은 원형이 혼자서 너무 외롭고 불완전한 것을 알아차리시고 말씀하셨다.

  "그래여자가 하나 있어야겠어."

  그래서 심심풀이로덤으로그러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가볍게 손을 놀려 그녀를 창조하셔서 원형에게 붙여주었다원형은 그녀와 함께 행복해지는 것말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그래서 그들원형과 갈비뼈피조물과 덤남자와 부산물은 함께 살았다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동안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었다분명 남자가 할 일이 많아서 그것에 주의할 시간이 별로 없었으리라그래서 부속품덤은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오만불손해졌다이런 것을 전부 이해하고 능력껏 받아들여야 한다그러나 남자들이여우리가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에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그녀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정육점 주인이 살에다 뼈를 덤으로 얹어주듯이하느님이 조각을 떼어내 손바닥으로 몇 번 쳐서 그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이제 이 뼈를 교육시키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아주 별 볼일 없는 여자도 자신이 동등한 줄 알고 온갖 일에 참견을 하기 때문이다그렇다그녀를 새로이 창조해야 한다그러니 우리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산도르 마라이하늘과 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쩐닼ㅋㅋㅋ적당히 깝치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니 우리 작은 것부터 시작하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뭔 똥폼을 또 저리 쿨하게 잡고 앉았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고 배야.

 

산도르 마라이가 아니라 톨스토이에 괴테가 살아 돌아와도 이런 글을 소설 등장인물의 말도 아니라 그냥 에세이로 써 제끼면 오랑캐 소리 면하기 힘든 법이다...... 20세기 인간을 21세기 관점에서 평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인간이 syo인지라 아이구 송구스럽습니다요.

 

 

 

--- 읽은 ---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 용경식 옮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이경덕 옮김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 차은정 옮김

수학의 감각 / 박병하 지음

 

 

 

--- 읽는 ---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 이수은 지음

How to read 푸코 / 요하나 옥살라 지음 / 홍은영 옮김

오래된 연장통 / 전중환 지음

세상을 바꾼 화학 / 원정현 지음

권력 / 스기타 아쓰시 지음 / 이호윤 옮김

자본론 함께 읽기 / 박승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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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2-19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도르 마라이... 뭐죠? 오만년전에 산도르 마라이 하나 읽었었는디...... 아웃이다 아웃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욕 쓰고 싶지만 제 서재가 아니므로 건너뛸게요. 후훗

syo 2019-02-19 09:52   좋아요 0 | URL
저게 한 300페이지쯤에 나오거든요. 그 전까지도 읽는 중에 어어, 어어어, 요것바라? 어어 이럴 때가 가끔 있었는데, 갑자기 저게 뽝!!!!

하아...

뒷북소녀 2019-02-1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흘의 밤이 지나면 나흘의 밤이라... 그렇다면 72시간 연속 근무해야 되는데도요?ㅋㅋㅋ
이건 웃자고 드리는 말씀이구요... <비를 기다리는 밤> 이 글 너무 좋네요.
저도 어제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어죠.

syo 2019-02-19 13:4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사람이 한치앞만 보는 법인지라, 근무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백수라서.....

사실이지만, 웃자고 드린 말씀입니다 ㅎ

저도 빗소리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빗소리 들으면서 일어났구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02-1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덤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욕 대신 우아하게 배열된 ㅋ의 위치와 개수가 적절해 보입니다. 밤과 비와 책이 키운 아이가 쓴 글을 읽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일기장에 꽁꽁 숨겨 놓지 않고 펼쳐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syo 2019-02-19 14:58   좋아요 1 | URL
이쪽이야말로 늘 감사합니다. 언제나처럼 좋게만 봐주시는군요. 열심히 살아도 산도르 마라이 같은 필력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 살아서 산도르 마라이 같은 품성을 가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라캉 입문서만 들입다 파다가 배운 것

 

 

1

 

타인의 욕망이 필요하다.

 

 

 

2

 

요즘처럼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면, 조금쯤은 변해 있곤 했다. 소소하고 시시한 변화들이지만, 어쨌든 그런 시간들이 한 움큼씩 모이고 쌓여 천천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참 어리고 어리석을 적 이야기다.

 


 

3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그저 딱 한 뼘만 더 자라고 싶다는 고백 속에 들어있는 작은 욕심은 참 순박하고 귀여워, 만나면 머리를 쓱쓱 쓰다듬거나 어깨를 도닥여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너는 아직 훌륭하구나, 너는 아직 단단하구나, 너는 아직 반짝반짝하구나.

 

 

 

4

 

하지만 그게 너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이 되면 나는 그저 아슴아슴할 뿐이다.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그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밖에 없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내가 계단을 오를 때 내 눈도 거길 함께 오르는 법이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아닐까 싶을 때, 나는 네 가지 가능성을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하나, 내 눈은 한 뼘 나아갔고 내 발은 두 뼘 나아갔다. , 내 눈은 멈춰있고 내 발이 한 뼘 나아갔다. , 내 발은 멈춰 있는데 내 눈이 한 뼘 물러났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 내 발이 한 뼘 물러났는데 내 눈은 두 뼘 물러났다. 하나이거나 하다못해 둘만 되도 좋겠는데, 알고 보면 셋일 수도 있고, 심지어 넷이 아니라는 법도 없잖아.

 

 

 

5

 

라캉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그저 타인이라고 하지 않고 대타자/대문자 타자라고 했던 것이 후려쳐 퍼져 있는 건데, 그 뜻을 새겨 생각하는 것이 점점 의미를 더해가는 것 같다. 오늘의 짧은 앎일 뿐이라 언제든 정정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입장에서 단언컨대, 저 말은 결코 그러므로 남의 시선이 강요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진짜 내가 바라는 것을 찾고 추구하자로 바꿔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그나마) 정상적이고(그 경우 신경증에 걸려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그 경우 정신병이나 도착증에 걸린다).

 

세상의 어떤 도 태어나면서부터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아기 때 주어진 다양한 장난감들(타인의 욕망이다) 중에 우주선 장난감(타인의 욕망이다)에 유독 흥미를 가진다. 낮보다 밤이 좋고(타인의 욕망이다) 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하늘을 보며(타인의 욕망이다) 별자리(타인의 욕망이다)를 가리키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타인의 욕망이다)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각종 발사체(타인의 욕망이다)가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타인의 욕망이다) 장면에 심장이 뛰고, 우주를 다녀온 사람(타인의 욕망이다)의 인생에 관한 책(타인의 욕망이다), 우주에 대한 지식(타인의 욕망이다)이 들어 있는 책(타인의 욕망이다)을 읽느라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날 생각한다, 나는 우주인이 될 거야. 그게 내 꿈(꿈이라는 용어, 꿈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조차 타인의 욕망이다)이야. 미안한데 아이야, 그건 타인의 욕망이란다.

 

어색하게 읽힌다면, 그것은 철학적 용어인 라캉의 대타자를 일상용어인 타인으로 무지막지하게 치환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실제 대타자는 내게 특정 생각을 강요하는 타인이나, 다수가 유익하다고 믿는 단 하나의 가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닌 것 같다(물론 그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음에도). 라캉에 대한 긴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자격도 없어서 멈추겠으나, 어쨌든 라캉의 저 말을 진짜로 네가 바라는 걸 하라는 단순한 자기계발적 조언으로 치환하는 것은 굉장한 기만이고, 그 자체가 누군가의 욕망이다. 나의 욕망은 나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것, 남의 욕망을 나쁘고 억지스러운 것으로 치환하는 이분법적 사고다. 네 욕망을 결코 너 혼자 만들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땡겨 쓰나. 그냥 라캉이 그랬다는 말 같은 거 하지 않고 네가 바라는 일을 하라라고 주장하면 충분할 것을, 왜 전문가의 권위를 빌려오려고(타인의 욕망이다), 전문가의 말을(전문가의 욕망이다) 마음대로 조리(이게 당신의 욕망인가)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분별한 의 강조는 나는 나라는 생각을 불필요할 정도로 강화한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미친 생각을 머릿속에 심어 넣는다. 나는 결코 나를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나 말고는 누구도 모르는 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알아도 나이기 때문에 결코 나만큼은 알 수 없는 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이 필요하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거울이 필요하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그저 모든 거울이 거울을 대주는 사람의 욕망을 포함한다는 피치 못할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에 따라 거울의 각도와 곡면, 조명의 조도를 조절하여 나를 비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거울을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도 욕망 때문이다. 나 역시 내 이미지를 받아들면 나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는 또 다른 타인의 욕망)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포토샵을 가동한다. 사실 자아포토샵은 의식의 부팅과 동시에 자동으로 실행되며 심지어 '종료하기'메뉴도 없는 아주 괴랄한 어플리케이션이다.....

 

 

 

6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좌절을 수반할수록 건강해지는 것 같다. 아직 괜찮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괜찮은 사람일수록 자기가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기가 어렵지는 않을까?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이성을 미친 듯이 의심하고, 합리적인 사람일수록 나야말로 합리성의 기준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잘 인식하는 것처럼.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망한 것 같다고 느끼는 경험을 가끔씩이나마 하지 않고, 그저 순탄하게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주변 풍경을 둘러봐야 한다. 내가 주조할 수 있는 모든 나의 욕망이 실제로는 이런 저런 타인의 욕망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 만들어 낸 작품의 카탈로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타인을 더 많이, 더 넓게,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내 욕망을 내 욕망답게 만드는 일임을 알게 된다.

 

 


7

 

대체 왜 글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지 모르겠다.....  촉촉갬성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분노로 끝나는가.

 


 

  

 

--- 읽은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지음

나의 사랑, 매기 / 김금희 지음

지하에서 쓴 수기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김근식 옮김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 하상복 지음

 

 

--- 읽는 ---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이경덕 옮김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 차은정 옮김

How to read 푸코 / 요하나 옥살라 지음 / 홍은영 옮김

수학의 감각 / 박병하 지음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 황성원, 김민철 옮김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 용경식 옮김

오래된 연장통 / 전중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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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물고기 2019-02-16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캉 에크리가 나왔는데 가격이 무시무시하지만 주석이 없다고 하니 더 무서워서 고민중이네요 ㅎ

syo 2019-02-16 18:02   좋아요 0 | URL
저 같은 경우는, 제 비루한 지력으로는 어차피 죽을 때까지 에크리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였기 때문에 가격이건 주석이건 전혀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어요 ㅎㅎㅎㅎㅎ 안사안봐 랄지요.....

카알벨루치 2019-02-1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감수성, 감수성적 철학의 분위기... 자아포토샵 이란 말이 멋지네요

syo 2019-02-16 20:48   좋아요 1 | URL
보들보들한 걸 쓰려고 시작했는데 왜 저렇게 성토 분위기가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네요, 아아 ㅎㅎㅎ

AgalmA 2019-02-1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비행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닐 암스트롱은 그런 대타자 욕망이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비행기 장난감을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부모님이 인형이나 리본을 사줬으면 달랐을거다 해야 하나요ㅎ? 머리가 좋았고 엔지니어 일을 하다보니 비행기 조종사도 되었고 그게 또 당시 추진중인 우주 비행 일로까지 엮이게 된. 그가 하던 일들은 대부분 초창기라 대타자 모델이 없었죠. 내성적인 성격으로 치밀하고 냉정한 사고를 했는데 강한 내적 통제력이 그가 성공적인 우주비행사가 된 역할이 컸더군요.
그러니까 환경적인 여러 요인과 그의 성격이 그 사람을 이끈 것이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에서 ‘타인‘을 끌어들여 너무 이분법적 분석만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인간이 인간 사이에 있으니 그게 가장 큰 요인이긴 합니다만. 프로이트도 그런 한계를 느껴 말년에 문명, 원형(에로스와 타나토스) 같은 것도 고민한 것이었죠.
안 그래도 라캉 <에크리> 번역이 나와서 궁금이 요동쳐서 곧 살 거 같긴한데 이러한 제반의 한계를 그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음 싶네요.

syo 2019-02-17 18:04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이런 글을 쓸만큼 대타자라는 것에 대해 똑바로 알고 있지는 않다보니, 잘은 모르겠지만요. ˝우주비행사˝라는 자리 자체가 어떤 국가/사회/과학계의 커다란 욕망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닐 암스트롱이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어느 시점부터는 ‘그렇다면 우주비행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면, 그 생각의 근거나 이유, 그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만든 ‘우주비행사‘라는 자리의 이상적인 형상, 우주비행사가 되면 누릴 수 있는 경험에 대한 예측 같은 것들을 형성하는데 대타자의 개입이 없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그나저나 저는 에크리를 읽고 에크리를 더 모르게 될까봐 읽지를 못하겠어요.....

AgalmA 2019-02-17 18:21   좋아요 0 | URL
<퍼스트맨>을 읽어보면 그가 우주비행사가 된 건 그의 유능함이 마침 잘 맞았단 생각이 들더군요. 국가/사회/과학계의 욕망이 그를 원해서 그렇게 된 거다라고 결과론적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그가 ‘우주비행사 되기‘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우주비행사가 됐다고는 보기 어렵더군요. 그 프로젝트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이 수백명이었고 수시로 친구와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 고작 그런 욕망으로 그가 그 일을 한 건 아녔죠. 나는 예외다! 라고 생각한 오만한 인간도 아녔고요. 달 착륙 첫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매우 불편해하며 우주 비행 일 은퇴 이후 각종 스포트라이트와 인터뷰를 피한 것을 보더라도 그에겐 과시적 욕망이 없었어요. 그는 당시 그 일 자체에 굉장히 몰두해 있었어요. 우주비행사가 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해나가는 과정을.

syo 2019-02-17 18:48   좋아요 1 | URL
일단 닐 암스트롱에 대해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할 생각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전 제 욕망이 타인의 욕망이라는 사실 자체가 비난받거나 계도되어야 할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닐 암스트롱이 ‘과시적 욕망‘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아갈마님께서 지금 생각하시는 ‘욕망‘과 제가 생각하고 있는 ‘욕망‘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뭔가 하거나 되거나 가지기를 ‘원하게‘ 되는 정서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닐 암스트롱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우주비행사가 되기를 원했는지와 관련없이 ‘우주비행사가 되자‘는 생각을 품은 자체를 욕망이라고 보았어요. 그리고 그가 그 욕망을 품은 시점이 언제부터인지와 무관하게 욕망이 발생한 순간 그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에 포획되어 있는 상태로 태어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구요 ㅎㅎㅎ

국가/사회/과학계가 최종적으로 그를 원한것도 사실이겠지만요, 제가 말한 국가/사회/과학계의 욕망은 이를테면 우주 개발에서 러시아를 이기고 싶어한 미국의 욕망, 인간의 위대함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회의 욕망, 연구의 영역을 우주로 넓히고 싶어하는 과학계의 욕망 같은 것이었어요. 그런 욕망들이 ‘우주비행사‘가 어떤 일을 해야하며, 어떤 의미이고, 어떠한 차원에서 일종의 ‘위대함‘을 대표하는지 등등, 자기들의 욕망에 부합하도록 우주비행사에 대한 기본적 상을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닐 암스트롱이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은 시점에, 우주비행사가 어떤 것일지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그런 국가/사회/과학의 욕망이 작용한 것이고요.

닐 암스트롱 개인에 대해서 저는 하나도 몰라요. 아무래도 읽어보신 아갈마님의 말씀이 맞겠지요?? 하지만 아갈마님께서 말씀하신 데 제가 100퍼센트 동의한다고 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에 대한 결론이 달라질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AgalmA 2019-02-17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닐 암스트롱을 옹호하려는 입장에서 글을 쓴 게 아닙니다.
현대사회는 인간이 ‘타인의 욕망‘을 통해 많은 부분 자신을 형성한다는 것에 전면적인 반박을 하긴 어렵죠.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런 것들도 우리가 배운 것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논지는 외부의 요인으로써만 자아를 결정론적으로 판단할 때 간과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겁니다. 많은 것을 ‘욕망‘으로 포괄할 때 그게 어찌 보면 인간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위험이 있어서요. 구조주의가 그 때문에 비판당하는 것 아닙니까.

syo 2019-02-17 19:0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구조주의의 함정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제가 그런다고 뭘 알게 될 것 같진 않지만요 ㅎㅎㅎㅎ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일년 쯤 뒤에 이 글을 다시 보면......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02-1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욕망하고 있는 것들이 실은 누구의 욕망인지 궁금해지네요.

syo 2019-02-17 20:39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엔 아마도 끝내 그걸 알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부모가 어릴적부터 강요해서 변호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변호사의 욕망은 단지 부모 욕망의 복제품이 아닐 거예요. 언어, 윤리, 제도, 감정.... 수두룩빽빽한 욕망의 원천들이 총출동해서 내 욕망을 빚는거고, ‘변호사‘라고 후려쳐서 따지면 부모의 욕망이 내 욕망인 것 같지만 기실 그건 언어적 착각이지요.....

그래서 저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요ㅎ

반유행열반인 2019-02-17 21:37   좋아요 1 | URL
그쵸...누구 밑에서 어떤 환경에서 자랄지는 순전히 운과 우연이 결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내가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결과일테니...그저 짐작만 할 수 있겠죠. (바람들을 계속 집요하게 파고들지 내려 놓을지는 순전히 내 탓!!)

syo 2019-02-17 23:12   좋아요 1 | URL
자유의지랄지, 확고한 자아랄지 이런 것들에 대해 제가 너무 경기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 아직 더 많이 읽어봐야겠고, 더 많이 살아봐야겠어요. 그래봐야 뭐 크게 깨친 인간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서도....

페크pek0501 2019-02-17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저를 포함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인간은 저를 포함해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것 같아요. 인간의 기억력은 저를 포함해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저를 포함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등등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요?

<지하에서 쓴 수기>는 참신한 작품으로 읽으며 반해 버렸던 경험이 있어서 재독할 책 10위 안에 드는 책입니당~~.

언제나 세상에는 책이 아주 많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시는 syo 님!!!

syo 2019-02-18 09:18   좋아요 0 | URL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저는 언제나 저를 잘 모르겠고, 제 생각이 맞는지도 항상 확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일정 정도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그저 샘이 났던 걸지도요? ㅎㅎㅎㅎ

몇년 전에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판으로 읽었을 때 정말 너무 지루하고 힘들게 읽어냈거든요. 금방 다 까먹었구요. 이번에는 창비로 읽었는데, 다른 번역이라 그런건지 그 사이 제가 좀 더 자란건지, 이번에는 읽을만하더라구요. 페크님의 말씀에 공감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ㅎㅎㅎㅎ

독서괭 2019-02-18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글이네요.
괜찮은 사람일수록 자기가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기가 어렵다는 말에 매우 공감합니다. 직장에서 보면 진짜 괜찮은 분들은 나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며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정작 욕심과 자만만 가득한 사람이 그 자리를 꿰차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ㅠ

syo 2019-02-18 09:22   좋아요 0 | URL
인간의 일이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완벽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처음 변해야 할 것도 역시 인간의 마음에 관한 것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기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나 불신이나 죄다 타인을 더 들여다보면서 고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슬쩍

 

 

망가진 온도계를 만져보는 일은 처음이라 조금쯤은 의아한 눈빛일 수 있었겠으나 막상 손끝이 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그마하게 자라나는 수은 기둥을 보니 정말로 의아하였습니다. 겨울은 끝도 없이 춥고 나는 이런 겨울은 처음인데 온갖 산 것들을 죽은 것으로 오해하기에 겨울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혹은 손끝을 가져다 죽은 것의 깊은 잠을 깨웠다고 다시 한 번 믿어 보기에도 모자라지 않았으니 제법, 제법 겨울이었겠습니다. 나박나박 눈 위로 눈 앉는 소리에 몸 뒤척이는 밤 위에 밤 쌓여 짙고 깊어질수록 아이들은 온도계에 관심을 가지는 듯했습니다.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슬쩍 만지고 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습니다. 슬쩍과 슬쩍이 참 많이도 모였을 테니 우리는 아마 우리가 숫자로 확인한 것보다는 슬쩍 더 추운 겨울을 보냈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조금 더 따뜻하다는 오해를 선물처럼 주고받으며 슬쩍 더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른 척 슬쩍 손을 잡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닌 척 슬쩍 안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무것도 에돌지 않고, 의아함도 오해도 없이 곧장 따뜻할 수 있었을 텐데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요, 우리는. 포옹 뒤에 입맞춤이 찾아올 것이 두려웠을까요, 포옹 뒤에 입맞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 두려웠을까요. 오해 위로 오해가 쌓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겨울에, 우리는 서로를 오해했을까봐 겁냈을까요, 오해가 아니었을까봐 겁냈을까요. 온갖 산 것들이 사실은 죽었을까봐 망설였을까요. 죽은 것들이 아직 살았을까봐 끝내 손끝을 거두었을까요.

 

그 겨울이 어떤 방식으로 끝나고 새봄이 왔는지, 오늘 우리의 회고 사이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조금쯤은 의아한 눈빛일 수 있겠으나, 그래도 나는 그 겨울에 오해하기 어려운 슬쩍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온도계가 망가져도 수은 기둥은 따라 망가지지 못할 테고, 그릇에 따라 생김이 바뀔 수 있겠으나 슬쩍 손끝이 닿으면 슬쩍 부풀어 오를 테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거나 알아채지 못하거나, 오해하거나 오해하지 못하거나, 잊었거나 잊지 못했거나, 죽었거나 죽지 못했거나, 이 모든 게 끝도 없이 추운 그 겨울의 탓이었거나 그렇지는 못했거나, 어쨌든 나는 이제 조금만 추워지면 덜컥 그 겨울의 슬쩍을 생각합니다.

 



사랑이라 썼다가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다자이 오사무 지음유숙자 옮김사양

 

언젠가 매기와 함께 여의도 역에 갔다가 이 역의 환승 통로가 이렇듯 깊은 이유는 강의 밑바닥을 팠기 때문입니다라고 쓴 안내문을 봤기 때문이었다그때 빡치는 사람이 많나봐매기가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오죽하면 한강물 탓이라고 써놨겠어했던 것이.

김금희나의 사랑매기

 

하밀 할아버지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 읽은 ---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

슬픈 인간 / 정수윤 엮고 옮김

사양 / 다자이 오사무 지음 / 유숙자 옮김

 

 

--- 읽는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지음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 황성원, 김민철 옮김

나의 사랑, 매기 / 김금희 지음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 용경식 옮김

인생교과서 부처 / 조성택, 미산, 김홍근 지음

수학의 감각 / 박병하 지음

지하에서 쓴 수기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김근식 옮김

 파이썬으로 시작하는 코딩 / 브라이언 칼링, 말리 아데어 지음 / 민지현 옮김 / 권갑진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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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2-1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캘리번 몇 쪽까지 읽었어요?
(지금 다른 책 읽고 있는 1人)

syo 2019-02-14 11:05   좋아요 0 | URL
1장이요.
저는 서론 포함해서 매 장마다 페이퍼를 하나씩 내놓을 생각인데, 1장은 좀 곤란하네요ㅋㅋㅋㅋㅋ
마르크스면 어떻게 좀 비벼 보겠는데, 제가 생각보다 푸코를 너무 모르네요 ㅋㅋㅋㅋㅋ 아, 재작년에 그렇게 푸코를 읽어댔는데?

다락방 2019-02-14 11:06   좋아요 0 | URL
우앙. 너무 멋진 생각이다.

나는 페이퍼를 쓸 수 없을 것 같다, 라고 생각했는데요 읽다가 딥빡오는 부분을 만났어요? 조만간 페이퍼로 돌아오겠습니다. 후훗.

syo 2019-02-14 11:30   좋아요 0 | URL
역시 다락방님 페이퍼는 딥빡 페이퍼가 제맛이지!

뒷북소녀 2019-02-1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모의 질문을 유심히 보게 되네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요?

syo 2019-02-14 14:01   좋아요 0 | URL
저는 저 장면을 보면서, 하밀 할아버지가 사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그냥 사랑할 땐 사랑 없이 살 수 없을 것처럼 사랑하고, 살 땐 사랑 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살면 되지 않을까요.

페크pek0501 2019-02-1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1번 째로 좋아요를 누르고 갑니다요... ㅋ

syo 2019-02-15 18:06   좋아요 1 | URL
올해의 칼럼니스트께서 41번째 좋아요를 박아주셨네요 ㅎㅎㅎ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