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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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신

 

인편으로 보내주신 차는 잘 받았습니다. 서찰에 말씀하신 것보다는 조금 늦게 도착하여 답신이 이리 늦었습니다. 염려해주시는 덕분에 아내의 건강에도 조금씩 차도가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보고서 건과 관련해서 위원장님 면담을 수차례 신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편집 회의를 한번 더 열 수 있을까 해서 찾아뵌 것입니다만, 위원장님이 제 면담 신청을 거절하는 제가 모르는 이유가 혹시 있겠습니까? 제가 듣기로, 최종 편집 회의에서 결정된 편집 방침은 전임 편집장 토마슈 씨가 극렬히 반대하였음에도 관철되었고, 그 이유로 토마슈 씨가 사퇴한 자리에 후임으로 제가 추천된 것이라던데요. 물론 저도 정해진 편집 방침이 있음을 알고서 수락한 것이긴 하지만, 편집장인 제가 단 한 번의 편집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고서 작성을 지휘하는 것이 과연 온당하겠습니까. 근거 자료 확정 시한은 점점 다가오는데, 이대로라면 그냥 묻혀버리고 말 아까운 자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개별 증언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습니까? 대중에게 일부라도 공개하는 방향은요? 토마슈 씨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의 편집 방향 아래에서는 보고서 작성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게 불가능하다면,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료들만이라도 공개하여 다른 형식의 책이 출간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거라도 해야지요. 반드시 말해져야만 하는 것들이 형식과 입장에 재갈 물려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우리가 두고만 봐야 한다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저들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편집 회의 개최가 어렵다면 선생님께서 고문 자격으로 저 대신 위원장님께 의견을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시일이 촉박합니다. 급한 대로 몇 개의 녹취록을 첨부합니다. 손에 닿는 대로 골라낸 것입니다. 요청하시면 자료는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많습니다. 그리고 면담 결과가 나오면 최대한 빨리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내의 요양 겸 같이 떠나기로 한 휴가처는 위원회 본부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정했습니다. 사실 휴가라는 것 자체를 즐길 수가 없는 마음입니다. 선생님의 답신에 따라 가닥이 잡히겠지요. 봉투에 적힌 주소가 저희 부부의 휴가처입니다. 모쪼록 선생님께서도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녹취록 1

 

내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부농이었어. 부농. 나는 아직도 그게 정확히 뭐였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분명 우리 가족에겐 땅이 있었고 가축도 몇 마리쯤 있었지. 곳간에는 우리가 먹을 곡식 말고도 다음 농사를 위한 종곡種穀도 있었고. 그렇지만 그게 다였어. 끼니는 놓치지 않았지만 끼니와 끼니 사이에 늘 배고플 정도로만 먹을 수 있었거든. 난 그게 늘 불만이었어. 그땐 알 수가 없었거든. 배고픔과 배고픔 사이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배고프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냐고. 끝나지 않은 배고픔 같은 게 있을 수 있고, 그 끔찍한 게 곧 찾아올 거라는 것을 말이야.

 

부농이라고 낙인찍힌 내 아버지는 강제이주 명령에 저항하다가 재빠르게 처형당했지. 그때 마을엔 우리 집 것보다 곱절은 넓은 외양간에 가축을 가득 채우고서도 부농이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부농이라는 죄로 추방을 당했던 찢어지게 가난한 가장도 많았어. 부농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건 땅이나 가축이 아니라 사람이었거든. ‘트로이카라 불리는 놈들이었는데, 그놈들에게는 사형이나 추방형을 마음대로 내릴 힘이 있었고, 우리에게 항소권 같은 건 없었지(64). 많이 죽었어. 많이들 쫓겨났고. 내겐 형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 그 자리에서 형을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해버렸지. 무슨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 간 형은 벨로모르 쪽으로 운반됐고 거기서 운하를 파는 작업에 동원되었다나 봐(66). 나중에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거기엔 무슨 일이 있든, 여기 오지 마. 우린 여기서 죽어가고 있어. 숨거나 차라리 거기서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긴 오지 마.”라고 쓰여 있었지(75). 형과는 그게 끝이었어. 아마 죽었을 거야. 선생도 알잖아, 수용소라는 데가 어떤 데인지.

 

? 나는 끌려가지 않았어. 보시다시피 나는 다리가 불편하지. 이건 그때도 그랬거든. 그래서 위대한 트로이카 나리들이 보시기에 나는 신성한 노동수용소에 발탁될 만한 인재가 못 됐던 거야. 대신에 가축과 농기구를 싹 다 빼앗기고 집단 농장에 합류해야 했지. 우리 땅도 더는 내 것이 아니었어. 농장에는 당 관계자와 경찰 놈들이 득시글거렸고, 거지 같은 음식이나 주면서 그것조차 농장의 두목한테 받아먹으라더군(68). 그 악마 같은 공산당 놈들은 이 세상에도 저세상에도 신 같은 건 없다는 천벌 받을 소리를 퍼트리고 다녔어. 그러니까 뭐 하나 우리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거야. 그래서 우리는 싸우거나 도망쳤어. 싸우는 사람들은 총도 없이 용감했고, 폴란드로 도망친 사람들은 제발 폴란드가 우리나라를 침공해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탄원할 정도로 용감했지(71). 잠깐이지만 그게 먹히기도 했어. 모스크바의 스탈린이라는 작자가 집단 농장은 자기 실수였다고 말했다더군. 그놈은 무슨 하느님 비슷한 거였나 봐. 그의 말 한마디에 집단 농장은 생겨날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지. 우리는 가을밀을 수확했고, 다시 돌아온 우리 땅에 작물도 심었지(74). 다 끝났다고, 짧은 지옥을 지나왔다고 생각했어. 진짜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겨울이 오자 죽은 줄만 알았던 집단 농장도 함께 돌아왔지. 놈들은 훨씬 교묘해졌어. 자영농들은 집단 농장에 합류할 때까지 무시로 세금을 두드려맞았고(74), 강제추방으로 사람들이 사라지는 속도가 그전보다 훨씬 빨랐어(75). 마침내 집단 농장 놈들이 종곡을 마음대로 쓸어갈 수 있게 되면서 우리 싸움도 끝났지. 생각해 봐. 땅을 지키고 가축을 지키고 농기구를 지켜서 뭣하겠어. 그 땅에 뿌리고 경작할 것들을 이미 다 뺏겼는데.

 

이런저런 일은 있었지만 30년 그해는 농사가 꽤 잘 됐거든. 여름 날씨도 유난히 좋았고. 대풍작에 가까웠지. 게다가 추방당한 사람들이 연초에 뿌려놓았던 밀을 남은 사람들이 거둘 수도 있었어. 문제는 공산당 놈들이 30년 생산량을 보고 31년의 징발량을 정했다는 거지(76). 그건 정말 터무니없었어. 처음부터 우리는 모두 그게 안 될 일인 걸 알았어. 공산당 놈들조차 알았지. 하지만 우리가 나쁜 날씨와 해충, 추방의 위협과 싸워가며 일하는 동안 스탈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징발량을 맞추기 위해 종곡까지 거두어들이라는 거였어. 정말 미친놈만이 할 수 있는 소리였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었어. 우리는 31년 말부터 제대로 굶주리기 시작했고, 32년이 되자 심을 곡식도 없었어. 32년 흉작이 31년 흉작보다 더 심해질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지(77). 카자흐스탄에서 100만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더구먼. 하지만 스탈린은 굶주림 같은 건 없다고 계속 말하면 진짜 굶주림이 없어진다고 믿는 머저리처럼 굴었어. 지역 공산당원들은 그래도 우리가 굶고 죽어 나가는 걸 눈으로 봤으니, 위에다가 계속 그 상황을 보고했거든. 소용없었어. 스탈린은 그들에게 식량 대신 총살을 선물했지. 그때 그놈은 흑해 쪽에 있는 소치라든가 하는 곳에서 휴양을 즐기는 중이었다는데, 그 휴양지까지 스탈린이 타고 간 기차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했다고 하더라고(82). 그런데 그놈의 열정적인 입은 휴가지에서도 쉬지를 않았나 봐. 또 스탈린이 뭔가 말했고, 그건 즉시 법이 되었어. 그 법이 말하기를, 우리가 수확한 모든 곡식은 나라 것이므로 우리는 식량을 소지하기만 해도 범죄자가 될 수 있었지. 그러니까 너무 배가 고파서 얼마 전까지 내 땅이었던 곳의 밭고랑에서 감자 껍질을 주우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었던 거야(84). 밭에는 감시탑이 세워졌고 수색단원들이 식량 숨긴 게 있나 집집마다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 그놈들은 데우고 있던 저녁 식사를 포함해서, 음식처럼 보이는 건 모조리 쓸어갔어(85). 혼자 사는 여자들은 곡물 압수를 핑계로 밤마다 강간을 당하는 게 일상이었고, 일이 끝나면 식량까지 빼앗겼지(86). 위대하신 스탈린 나리의 법과 나라가 거둔 승리란 그런 거였어.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없는 곡식이 솟아나지는 않거든. 그 미친놈들이 그걸 몰랐을까?

 

스탈린의 입만이 모든 걸 죽이고 살리는 진짜 입이었지. 아니지, 살리지는 않았군. 우리가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소문이 실제로 굶어 죽어가는 우리 귀에까지 들어왔어. 우리 죽음이 사회주의의 적들이 펼치는 공작이라더군(88). 글쎄, 그놈이 우리가 죽는 걸 직접 본 적이 없는 건 사실이지. 그러면 직접 본 놈들은 어땠을까? 공산주의자 놈들은 스탈린의 말과 자기가 눈으로 본 풍경을 어떻게든 일치시켜야 했지.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자신과 가족들을 굶기는 것으로 목숨 바쳐 사회주의를 해치려 든다는 결론을 내렸어(89). 벌거벗은 임금님이 입지도 않은 옷을 입었다고 했고, 아랫것들은 그 옷이 너무나 화려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라며 자신들의 아부로 그 옷의 존재를 증명한 거지. 그런 걸, , 제기랄, 이념이라고 부른다더구먼. 이념. 그걸로 배를 불릴 수 있었으니 그놈들은 그걸 한 거고, 우린 아니었던 거지.

 

그리고 미친 11월이 왔지. 193211. 잊을 수도 없어. 소련은 모든 잉여 농작물을 거둬가고, 곡물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가축을 거둬가고, 그래도 목표량을 달성 못 하는 집단 농장은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한 달 할당량의 열다섯 배를 빼앗아갔어. 당원 놈들, 경찰 놈들이 떼로 몰려와서 가져갔지. 할당량을 달성하는 농장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결국 전부 다 가져간 거야.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식량 공급도 중단, 보급도 중단, 다른 지역과의 거래도 중단, 모든 게 다 중단이었지(91-92). 그러니까 사는 걸 통째로 중단시킨 거야. 살려면 도망쳐야 했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았어. 33년이 되자 국경은 봉쇄됐고, 농사꾼들이 도시로 가서 구걸한다고 도시도 폐쇄됐지. 우리에겐 장거리 기차표도 팔지 않았고. 도망치다 체포되면 고향마을로 이송되어 다시 굶어야 했어(94). , 그리고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 선생도 여기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잖아. 아니야?

 

1933년에, 우리는 다 죽었어. 반란, 도덕, 인간에 대한 관심 같은 건 모조리 사라지고 그 자리를 범죄, 광기, 무기력 같은 것들이 대신 채웠지. 그건 다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어. 어떤 일이 있었냐고.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일이 있었지. 살아있는 사람들도 시체나 다름없었어. 걸어다니느냐 누워 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야. 봄에는 하루에 만 명씩 죽어 나갔어. 애어른 가릴 것도 없었지. 어떤 소녀에게 음식을 조금 나눠준 적이 있었는데, 이러더군. “이렇게 좋은 걸 먹었으니, 이제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어요.”(98)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반 친구의 잘린 머리를 낚아 올린 남자애들도 있었어. 온 가족이 다 죽은 아이였지. 우린 궁금했어. 몸통은 어디로 갔을까? 정확히 말해서, 그걸 누가 먹었을까? 모르지. 하지만 그때는 그런 의문이 흔해 빠진 거였어(101). 자기 자식을 죽이고 먹은 부모가 셀 수 없이 많았거든. 애들이 그 가족의 가장 약한 식구였으니까. 자신과 딸의 식사를 위해서 아들을 잡아서 요리하는 어머니라든가, 며느리를 죽이고 머리통은 돼지밥으로 준 다음 몸뚱이는 구워서 잔치를 벌이는 가족 같은 게 잔뜩 생겨났지(102-103).

 

글쎄, 선생이 지금 한 말은 결국 나도 살아남으려고 사람을 먹었느냐는 질문을 점잖게 바꾼 거잖아? 이 집 문을 나서면 선생은 다시 나 같은 노인들을 들쑤시고 다니겠지. 그 자료인지 뭔지를 만들겠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 질문은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선생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천 권의 책을 뒤져 꺼낸 가장 점잖고 멋진 말로 금칠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질문만큼은 하지 마. 알겠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런 거야. 그런 시절에 살아남는 건, 배고픔을 견디는 게 육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뼈에 새기는 일이지. 선생,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알아? 나는 지금도 그걸 잘 모르겠어. 아직 식인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기도를 시작하지만, 기도가 끝날 때쯤에도 그럴 수 있을지 몰라서 기도하는 내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있었지. 밀가루를 위해 몸을 팔지 않는 사람은 굶어 죽어야 했어. 훔치지 않는 사람도 그랬고. 시체를 뜯어먹지 않는 사람들은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갈 다음 시체가 될 운명이었어. 인육을 사고파는 시장이 생기는가 하면(104), 자기 자식들을 먹기를 거부하고 죽어 자식을 고아로 만드는 부모나, 자기가 죽으면 자기 몸을 먹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는 부모들도 있었어(105). 혼란스럽지 않아? 뭐가 뭔지 선생은 이해할 수 있겠어?

 

우리가 괴물인 거야? 나는 1933년과 그 이후에 찾아왔던 크고 작은 지옥을 거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묻고 또 물었어. 어제도 물었지. 지금도 묻고 있어. 그리고 내가 선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래. 우리가 괴물이라면 우린 각자가 다른 괴물이었을 거야. 우리가 희생자에 불과했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우린 각자 다른 희생자였어. 우리는 모두 지옥 같은 굶주림을 겪어냈지만, 그건 저마다의 지옥이었어. 백만 개의 죽은 지옥과 천만 개의 살아남은 지옥이 있겠지. 거대한 지옥을 처음 만들어낸 건 스탈린이라는 큰 악마일지 몰라. 하지만 그것을 겪어내고 엮어낸 것은 우리 각자란 말이야. 그런 건 스탈린이 죽고 소련이 무너졌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한번 열린 지옥문은 수십 년이 지나도 말끔하게 닫히지 않는 거거든. 선생은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거야.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먹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이 굶주려 죽어 나가는. 선생이 볼 때 그 시절이야말로 지옥에 가장 가까운 순간일 테니까. 그런데 과연 내게도 최악의 지옥이 그때 그 순간일까? 배고픔이 가장 심했던 때가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을까? 우리 옆집에 사는 노인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또 그 옆집은? 선생, 선생이 만든다는 보고서인지 뭔지가 뭐 하는 물건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 같긴 해.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어. 나는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아. 내가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지옥이 모든 지옥을 대표하지 않는단 말이야. 선생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 건가. 쪼개고, 비슷한 것끼리, 시간 순서에 따라 묶은 다음 표지에 금박을 두른 두꺼운 책을 만들 건가? 지옥을 소화하기 쉽게 전시할 건가 이 말이야. 아니, 이건 그냥 묻는 거야. 나는 그런 건 그것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기록하려거든 내 이름도 적어가. 지금 선생이 들은 이 길고 지루한 지옥의 이름을 적어가란 말이야. 받아적게, 내 이름은…….

 

 

 

녹취록 2

 

술은 줄이는 중입니다. 완전히 끊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나이도 있고, 이제 와 사는 모양을 바꾼다는 게. , 오늘은 한 잔만 마셨습니다. 믿어주십쇼. 혀도 잘 돌아가고 이야기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 그런데이야기를 해 드리면 돈을 조금 받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까? , ,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하면 되나요?

 

그러니까 저는 1937년에 지역 내부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습니다. 맞습니다, 비밀경찰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일은 아니었지요. 그땐 젊었고, 젊을 때는 쉽게 어리석잖아요. 그랬던 거죠. 생계가 달려 있기도 했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심에 걸리는 일도 많아서. 33년 그 대기근 때, 인민위원회 대표였던 발리츠키가 이 대규모 기아는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는 간첩 도당의 도발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놈들이 우크라이나에 침투해 수확을 훼방 놓고 기근을 일으킨 다음 굶어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선전용으로 사용했다고요(166). 그때부터 소련에서는 폴란드인 솎아내기가 시작되었죠. 35, 36년만 해도 10만이 넘는 폴란드계 농민들이 추방당했어요.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는 명분은 공산당 내부 권력 다툼에도 이용되었죠. 심지어 그 말을 만든 발리츠키조차 거기에 얽혀 축출되고, 예조프라는 사람이 권력을 잡았지요.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의 손에서 37년의 명령 00485가 태어난 겁니다(171). “폴란드 군사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이 그 명령의 목표였는데, ‘폴란드 군사 조직의 실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예조프 말고는 누구도 모른다는 점에서 보면, 그건 일종의 박해 면허나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우리 같은 말단 장교들은 폴란드 계나 폴란드와 관련된 다른 소련인들, 폴란드 문화나 로마 가톨릭교처럼 폴란드라는 민족적 특성을 지닌 것들을 모조리 박해해야 했어요(173). 심지어 시청의 옛 기록을 뒤져서 폴란드식 이름의 흔적을 찾아내면, 그걸 들고 그 사람을 박해하러 가는 장교도 있었죠(174쪽). 그때의 일은 끔찍해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 그런데 저도 인민위원회의 장교였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릴 끔찍한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라고 좋은 일만 한 것은 아니고 또 제가 한 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지만, 어쨌든 저는 아니었어요. 저는 사람을 고문하지도 죽이지도 않았고, 그냥 죽은 사람을 묻는 일만 했었어요. 정말입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 혹시 한 잔 마시고 이어나가도 될까요? 이야기에는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게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어서.

 

우리에겐 자백 기법이라 불리는 일종의 집단 고문 방법이 있었어요. 공공건물 지하 같은 데 폴란드계 용의자들을 잔뜩 몰아넣고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 명을 고문하죠. 고문받은 사람이 자백하면 다른 용의자들도 자백해서 고통을 피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야 고문을 멈췄으니, 결국은 집단 전체가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빠르게 얻어낼 수 있는 겁니다(174). 그렇게 받아낸 자백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거기에 사형시킬지 수용소로 보낼지 우리 의견을 적어요. 그러면 그 보고서는 인민위원회 대표와 검사에게 올라가고, 그들은 또 그 보고서로 앨범을 만들어 모스크바로 보내는 거지요. 그러면 모스크바에서는 그 앨범들을 대충 훑어본 다음 예조프와 주 검사 비신스키의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 겁니다. 승인은 거의 자동이었으니 결국은 용의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최초 수사관이었던 거죠. 그렇게 하루에 2만 명의 사형이 확정된 적도 있었답니다(175). 폴란드 문화나 가톨릭교에 대해 호의를 보이면 그게 곧 첩보 활동에 동참했다는 증거였지요. 경범죄도 경범죄가 아니었어요. 묵주를 가지고 있으면 수용소 10년형, 설탕을 충분히 생산하지 않으면 총살되기도 했죠. 예조프는 이걸 폴란드 박멸 작전이라고 불렀는데 스탈린에게 그 성과를 보고하자 그가 그랬다는군요. “아주 잘했어! 더 캐내게. 이 더러운 폴란드 쓰레기들을 싹쓸이해버리는 거야. 우리 소련을 위해서는 그놈들의 씨를 말려버려야 하거든.”(175-176) 참 재미있는 말이죠. 수령이 신이 났으니 말단 장교들은 더 신이 날 밖에요. ? , 제가 재미있는 말이라고 했나요?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슬픈 일이었어요. 슬픈 일.

 

? 저요? , 저는 그저 보거나 들었을 뿐입니다. 저는 고문한 적도 총살에 참여한 적도보고서요? , 그게, 그렇지, 저 같은 경우에는 좀 운이 좋았던 게, 제 주변 장교들이 워낙 열정적으로 당의 명령을 수행했던 터라 우리가 담당했던 지역에서는 늘 많은 수의 폴란드 간첩들이 검거되었거든요. 제가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할당량을 다 채울 만큼이었지요. ? , 맞아요. 간첩이 아니라 희생자들이죠. , . 맞습니다. 저기,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이거 참 목이 타네요. 저는 언제나 저 무서운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꼭 기록해주십쇼. 선생께서 어쩐지 저를 좀 의심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저를 보시는 게. 정말 제가 저지른 일이라면, 뭐가 자랑스럽다고 이 끔찍한 일들을 이리 상세하게 말하고 있겠냐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사례비 더 받자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다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죄송합니다. 자꾸 술에 손이 가는군요. 어디까지 했더라? , .

 

작은 마을일수록 상황은 더 심했어요. 그런 곳에는 법적 절차 같은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인민위원회 전담반은 갑자기 들이쳐 현장을 포위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을 고문했죠. 그리고 처형했고. 체포도 처형이나 마찬가지였고요. 체포된 사람들은 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184). 남편이 총살당하면 아내는 추방되고 자식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죠. 폴란드 아이들로 키우면 안 됐거든(185). 38년쯤 되면, 이제는 그냥 우리 세상이었어. 모스크바에서는 그냥 서명만 하는 건데도 앨범이 처리되는 속도보다 도착하는 속도가 더 빨랐단 말입니다. 앨범 기법도 번거로운 일이 된 거지. 그래서 결국 해당 지역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특별 트로이카가 생겨난 겁니다(186). 이제 지역에서 앨범을 검토하고, 판결하고, 총살하고. 하루에 수백 건씩 사건을 검토하고, 모스크바에서도 포기한 밀린 일을 6주 만에 처리했거든. 6주 만에 몇만은 잡아냈을 걸? 그때 우리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뭐였냐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폴란드 간첩만 찾아내는 일이지만, 나중에 다른 소수민족 간첩을 색출하는 작전의 모델이 될 거라는 생각? 결국 그게 그렇게 됐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25만 명쯤 죽었다더군요(188). 간첩이 그렇게나 많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 쓰레기들은 죽여도 죽여도…….

 

아뇨, 아니라니까! 나는 죽이지 않았다고. 몇 번을 말해. 말실수야. 술 마시면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뭐야, 당신이 뭔데 자꾸 그런 눈으로 나를 봐. ? 내가 죽였다고 누가 그래? 푸줏간, 푸줏간 그 새끼로군! 거짓말! 그 새끼는 거짓말쟁이에 폴란드 놈이야! 만약 내가 누굴 죽였다면, 그건 그놈들이 진짜 폴란드 간첩이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래, 그래서 그랬어. 다 인민을 위해 한 일이었어. 나 같은 사람이 대신 피를 묻히지 않았다면 소련은 진작 무너졌을 거야. 나치 놈들이 폴란드 것들한테 업혀 들어와 모스크바까지 집어삼켰을 거라고. 폴란드 놈들이 간첩이 아니었다고? 인민의 적이 아니었어? “폴란드 군사 조직이란 게 없단 말이야?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뭐 하는 거야,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가려거든 약속했던 그 푼돈 쪼가리를 내놓고 가라고! 약속을 지켜야지! 약속은 지켜져야 해! 약속을 어기는 놈들은 폴란드 새끼들이랑 마찬가지야. 전부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고(165). 돌아와! 돌아오라고!

 

 

 

녹취록 3

 

, 그 자리에 자네가 발탁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수집해 놓은 자료들을 자네한테 바로 보내려다가 마음을 바꿔 위원회로 넘겼지. 지금쯤이면 대강은 다 훑었겠군. 그래 어때, 일은 할 만한가? 나한테까지 증언을 들으러 올 줄은 몰랐지만, 자네라면 충분히 생각할법한 일이지. 내가 이래서 늘 자네를 좋아한다네. 그래서 더 복잡한 기분이야.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내가 박차고 나온 자리에서 내가 겪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우면서도, 그래도 자네라면 내가 찾지 못한 해답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 그래,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대화가 자네에게는 자료가 되겠지만 내게도 어떤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어. 나는 그때 마주친 문제들과 아직도 씨름하고 있거든.

 

33, 37, 40, 41, 그리고 42. 끔찍한 일들이 있었지. 물론 이 해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갔지만. 1400만이라네. 독일과 소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점점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와중에 죽어 나간 사람의 수가(671). 우리가 블러드랜드라고 부르는 곳,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권력 열망이 역사적으로 중첩되면서 일어난 일이지(673).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웠고, 수백만의 목숨을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걸 입증하는 데 사용했어(683). 자네도 알겠지만, 이 길고 거대한 학살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전제들이 서로를 보장해줄 때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지(693). 어떤가, 자네는 나치와 소련이 저지른 일련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말이 된다고 생각하네. 말이 되더란 말일세. 자료를 모으고, 거기서 도출되는 동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게 아닐세.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길을 잃은 거니까. 옳지 않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단 말일세. 내가 스탈린이고 히틀러였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옳지 않은 선택을, 아니지, 절대 해서는 안 될 악의 극치에 가까운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 나는 과연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세. 차라리 그들이 괴물이었고, 그런 이유로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 여겨질 권리를 빼앗는(681),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을 그들은 서슴없이 저질렀으며, 그래서 내가 그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걸세. 그랬다면 나는 스스로를 희생자와 동일시하며 범죄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편리한 주장을 할 수 있었겠지. 우리가 블러드랜드의 범죄자들과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일세(701-702). 바로 그게, 우리가 원하고 또 위원회가 이 조사를 통해 도출하려는 결론이 아니겠는가?

 

이런 고민에 사로잡혀 한동안 조사에 진척이 없자, 위원장이 나를 불러들였어. 그리고 말하더군. 숫자. 숫자 위주의 연구를 하고 숫자가 들어 있는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나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였어.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네. 머리 아픈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거든. 몇 주 후, 내 선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들여다본 후 나는 위원회에 1400만을 제시했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편집 회의가 소집되었지. 위원장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어. 토마슈 편집장, 수고 많았소. 수고 많았는데, 그렇게까지 수고할 건 없었던 것 같소. 위원회는 전체 희생자 수를 900만으로 결정했거든.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이건 시장바닥에서처럼 흥정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말일세. 나는 대답했다네. 위원장님,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위원장이 말했지. 편집장이 알고 모르고는 하나도 중요치 않소. 중요한 것은 숫자요. 아시겠소? 편집장이 알아야 할 것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숫자가 중요하다는 사실뿐이오. 하지만 위원장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오,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게 될 것이오.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숫자가 숫자인 동시에 정치고 외교이며 국익이기 때문이오. 이 건에 대해 더 길게 말하는 건 온당치 않은 것 같군. 사실 편집장이 찾아낸 그 숫자 역시 말과 글에 의존해 발굴한 것이 아니오? 그 숫자가 정말 실제 숫자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그 숫자라고, 편집장은 맹세할 수 있소? 그제야 나는 숫자를 말하는 것이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이며, 동시에 더 거대한 정치적 행위에 복무하는 요소 행위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네. 위원장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야. 나는 내가 조사한 자료를 통해 숫자를 말하겠지만, 그 숫자가 진짜 숫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 나는 신이 아니니까 말일세. 그러나 내가 찾아낸 숫자가 외교적 목적이나 국가 수반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지는 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뭐겠는가. 듣지도 않는 사람들을 향해 그 숫자는 내 숫자가 아니라고 계속 말하는 것 말고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숫자의 문제는 단지 그뿐만이 아닐세. 설령 내가 구한 숫자가 진리고, 거기에 하나의 정치적 더함도 뺌도 없는 상태로 세상에 드러난다고 해보세. 그렇다면 중요한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인가? 물론 숫자는 중요하지. 하지만 숫자는 너무 중요해서, 우리가 숫자의 중요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숫자에서 멈춰서게 될 걸세. 숫자에서 슬퍼하고 숫자에서 분노하면 그 숫자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가야 할 것들은 어디서 다시 가져오겠는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숫자라면, 숫자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말일세.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일을 관두었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친구여,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일, 외치고 또 외치는 일(681) 말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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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5-11 18:4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좋네요 ㅎㅎㅎㅎ 허허허

stella.K 2021-05-1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의 그 리뷰군요! ㅎㅎ
근데 제가 좋아요도 하지도 않았군요. 민망해라...ㅠㅠ
축하해요.^^

syo 2021-05-11 19:00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고맙습니다.
좋아요 하지 않으신 건 그저 발견하지 못하셔서 그런 거고,
발견하고 읽으셨다면 당연히 좋아요 해주실 거라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제가 스텔라 님한테 그렇거든요 ㅎㅎㅎ
그러니 민망은 넣어두시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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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최대한 무해한 욕망

 

 

 

1

 

토요일, 더덕단 친구들(5인 이상 집회 금지 규정 준수)과 일자산을 등반했다. 등산 모임은 물론 아니었다. 치킨 모임이었다. 등산이란 치킨의 풍미를 위해 내 몸에 내가 치는 양념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해본 것이다. 우리는 운동을 위해 모이는 그런 불건전한 건전집단(?)이 아닙니다. 더덕단은 맛집 탐방 모임……이 아니라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이었지, , 맨날 헷갈려.

 

하여간 우리는 장대한 포부를 가지고 일자산을 향했는데, 일자산, 이거 생각보다 작고 귀여운 산이어서 산책길처럼 설렁설렁 떠들떠들 걷다 보니 어느새 정상. 그곳에는 날쌔고 귀여운 청설모도 있었지만 피트니스 센터에나 있어야 할 헬쓰보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괜히 산 정상까지 와 가지고 뭐 턱걸이를 합네, 데드리프트를 합네 설쳐대며 젊음과 파워를 뿜뿜, 배 나온 늙은이 마음에 공연한 열등감을 심어주는 중이었다. 일자산 등반을 통해 syo가 얻은 것은 그러니까 드넓은 호연지기, 그리고 젊고 몸 좋은 것들을 향한 강도 높은 미움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건 오늘의 이야기를 위한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운동이 치킨을 위한 조미료에 불과하듯이.

 

 

 

2

 

작년 이맘때쯤인가, 한 멤버의 집에서 음악과 댄스가 어우러진 한바탕 폭식 파티가 열렸다. 그때 여42이 모여서 먹어 치운 것이 치킨3, 피자2, 떡볶이2, 아이스크림 케이크……. , 또 먹는 이야기네, 이게 아니라,

 

그때 우리는 그달 읽기로 했던 책을 들고 모였다. 여섯 권의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사진을 찍었는데, 이거다.


syo는 몇층에 사는가

 

우리는 책 주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풍경을 놓고 한참을 웃고 떠들 수밖에 없었다. , 그러면 각 층에 거주하는 책 주인들의 증언을 한번 들어보자.

 

- 1층 입주민: 좋은 대목에는 플래그를 붙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쉽게 붙여주진 않지. 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거든?

- 2층 입주민 : 우오와, 좋아! 여기도 좋고! 저기도! 붙이자! 붙이고 또 붙이자! 풍년일세 풍년이야. 이 책 쩐다!

- 3층 입주민 : 뭘 붙이냐고 귀찮게, 그냥 귀퉁이 접으면 될걸 가지고.

- 4층 입주민 : 책을 접는다고. ! 그리고 저 자잘한 플래그들은 또 뭐야. 조잡하게스리. 플래그는 두꺼워야 제맛이지. 그래야 손가락으로 집고 그 페이지로 바로 찾아가기 쉽다고.

- 5층 입주민 : 그냥 줄을 그어요. 어휴, 옆구리 너덜너덜하게 왜 저래.

- 6층 입주민 : 플래그와 너덜너덜이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는 부당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군. 플래그의 위치를 조금만 공학적으로 제어한다면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지. 

 

플래그가 옆으로 길게 튀어나온 책을 책장에 꽂았다가 꺼냈다가 반복하면 이내 플래그 귀퉁이가 이리저리 접히고 구겨진다. 그렇게 되면 뭐랄까, 술 취한 말미잘의 촉수 같달까, 무지개색 겨드랑이 털 같달까, 하여간 그런 식의 현란하고 심란한 비주얼이 도출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syo는 플래그를 아주 바짝 붙이는 편이다. 양장본은 표지의 가로 길이가 내지보다 당연히 길고, 반양장의 경우에도 책날개가 꺾이는 부분이 내지보다는 1mm 정도 돌출되어 있다. 그래서 플래그를 붙일 때 그 끝이 내지보다 1mm 정도 돌출되게 바짝 붙이면 제아무리 책을 꽂고 꺼내도 플래그가 접히는 일은 거진 없다. 물론 처음에는 몇 번을 붙였다 떼었다 하며 길이를 조절하는 일이 생기긴 하지만, 숙련도가 오르면 절로 해결될 문제기도 하고, 또 양손을 사용하여 신중하게 붙이는 일에는 일종의 변태적인 즐거움조차 뒤따른다. ‘여러모로 완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syo는 다들 이렇게 하는 줄만 알았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인간이란, 불을 사용하는, 도구를 만드는, 언어로 소통하는, 생각하는, 그리고 플래그를 바짝 붙이는 동물 아닙니까? 호모 플래그바짝붙이리우스.

 

아니었다.

 

,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는 서로의 존재를 처음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문명의 조우가 언제나 그렇듯 결과는 전쟁이었다. syo는 그날 책 귀퉁이를 접는 사람보다 더 크게 규탄당했고, 특출나게 집요한 인간이라는 멍에를 썼다…….

 

 

 

3

 

플래그에 얽힌 비슷한 사건도 있었다. 재독 삼독을 하다 보면 이전에 붙여놓았던 플래그를 떼어낼 일도 생긴다. 이 플래그라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돈 주고 살 때는 희한하게 비싸다는 느낌이라 늘 재사용을 시도하게 된다. 어디 붙여놨다가 떼서 다른 책에 붙이는 것.

 

역시 더덕단 채팅방에서 이 재사용 플래그의 보관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인간의 다양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붙이는 위치 하며 방법 같은 게 정말 제각각인 것이다. 다른 친구들의 방식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지만, syo의 눈에 그것은 혼탁한 카오스에 한없이 가까웠다고만 말해두겠다. syo는 책 읽는 테이블에서 손만 뻗으면 닿는 냉장고 옆면에다 붙여놓는데, 그렇다고 손만 뻗어서 틱 붙여놓는 건 아니고, 이렇게 붙여놓는다.


우리집 냉장고 옆면의 사정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넌 역시 집요하다며 박수를 치며(안 봐도 UHD) 좋아했지만, syo는 사실 저 플래그들의 오와 열이 완벽하게 맞지 않다든가, 색깔별로 정렬되어 있지 않다든가 해서 늘상 마음이 불편하다…….

 

 

 

4

 

플래그에 얽힌 이런 일련의 사건에서 친구는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그리고 그 흥미는 그의 놀라운 선물 센스와 어우러져 이런 생일선물로 표현되었다.

 

치킨 말고 3시 방향

 

저 한 통의 플래그는 40이 다 되어가는 syo의 평생 받아본 생일선물 가운데 센스와 만족감에서 아주 손꼽히는 선물이었다. 이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이 치킨집에서 우리 테이블에 앉은 우리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이 웃음 포인트였다. 환장해서 책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누가 플래그 한 통을 생일선물로 받고 좋아할 것인가. 환장해서 책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누가 플래그를 한 통 선물하면 받는 사람이 좋아할 거라고 예측하고, 그렇게 예측한 자신의 미친 센스에 스스로 감동할 것인가. 또 환장해서 책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누가 필통을 굿즈로 받겠다고 책을 한 바구니 주문하고, 그렇게 구한 필통이 마음에 썩 안 들던 찰나에 좋은 필통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가 선물로 받은 저 플래그 한 통이 탐스러워 눈을 떼지 못하고 그러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서로의 마음을 찰떡같이 이해하겠는가 말이지…….

 

읽는 사람들의 물욕이란 이렇게 귀엽고 안온하다. 이것만 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5

 

참 그리고, 그 눈빛, 점 봐주시는 분이 그 눈빛만 쏴주면 남자들이 다 넘어간다고 했다던, 그래서 어디 한번 보자고, 나한테 해보라고 내가 청했던 그 눈빛, 그래서 마지못해 한번 해보던 그 눈빛, 그 눈빛을 마주 본 내 눈빛이 눈으로 침 뱉는 눈빛이었던 거 사과합니다. 시켜놓고선 그랬네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먹히지 않은 거라고 우리는 서둘러 합의했지만, 사실 내가 뱉은 침-눈빛도 최선을 다해 뱉은 가래침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우리가 눈빛으로 할 수 있는 맥시멈이 어디인지 다 확인하지 않은 거잖아요. 정말 다행이죠?

 

 

--- 읽은 ---

 


140.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오지원 옮김 / 유유 / 2019


- 일독(190828)

- 재독(210424) 


책에 대한 신뢰가, 정확히 말해서, 책의 번영과 위대성에 대한 신뢰가 아직 살아 있던 시대의 지식인에게 책이란 어떤 것일지 가늠해 보곤 한다. 아무리 내가 책을 사랑한대도 그들의 책과 나의 책은 다를 것 같다. 어쩌면 같은 단어조차 아닐지 모른다. 오늘 우리가 책의 생존을 이야기할 때면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자연스럽다. 종이책의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낙관적인 사람조차 사라지진 않을 거야라는 말끝을 선택한다. 그야말로 가장 비관적인 낙관이다. 애초에 여기가 누구도 책의 위엄을 의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라는 말이 태어나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 웅장하지만 슬픈 파문을 던지는 일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운동은 과연 책에 기초하는가?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운동 역시 책에 기초하는가?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라는 제목에 매력을 느끼고 이 책을 꺼내 드는 사람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책에 기초해 운동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책의 존엄 증명이 불필요하고,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증명이 작동하지 않는다. 늘 그게 슬픈 일이다.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지만, 읽으면 읽고 읽지 않으면 읽지 않는다. 읽지 않음은 어떻게 읽음이 되는가. 읽지 않음과 읽음 사이의 경계선은 때로는 한달음에 넘을 수 있는 도랑처럼 작고 얕은데, 때로는 대륙과 대륙을 나누는 산맥처럼 높고 험난하기도 하다. 신비롭다.

 

나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측량할 수 없는 광활함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것이 주는 환희에 나를 맡기는 법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겪는 모든 확장의 중요한 부분, 소위 말하는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갈망', 우리 본질의 가장 훌륭한 점인 이 모든 거룩한 갈증은 늘 새로운 체험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고취하는 책의 기지에 빚지고 있다.

_ 슈테판 츠바이크,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141. 위험한 법철학

스미요시 마사미 지음 / //소 옮김 / 들녘 / 2020

 

철학 비전문가 혹은 비전공자, 그러니까 철학으로 밥을 벌지 않는 아마추어 독서가가 철학을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를 정말 오래 고민했다. 아무래도 폼난다는 게 제일 큰 소득일 듯. 왜냐하면 사람들은 철학을 잘 안 읽으니까. 사는 게 좀 쉬워지는 효과가 있지만 매사가 그렇지는 않다. 쥐뿔만큼 나은 인간이 된 것 같긴 한데, 철학 말고 다른 어떤 장르라도 이만큼을 읽었으면 이 정도는 되는 게 당연하겠다. 어쩌면 그쪽이 더 나았을지도. 철학이 그러할진대, 심지어 철학이라는 장르는 취미 독서가에게 무슨 효용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런 게 있긴 할까?

 

저자는 법철학이 상식이라는 썩은 연못의 물을 퍼내는 삽 같은 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글쎄, 다 읽었지만 그게 과연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한 설득력이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가볍고 재미있다. 그렇게 쓰려고 애쓴 흔적이 눈에 띈다. 개그 욕심도 있다. 그 욕심은 언제나 좋은 욕심. 일본 사람들은 빵빵 터졌다지만, 또 그 정도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의존하며, 그 안에 자신들의 욕망, 악의, ()을 던져 넣어왔던 것, 그것이 바로 상식이다. 상식이라는 웅덩이는 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투기해온 자기에게 불리한 것의 축적에 의해 탁해지고 더러워지고 악취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려 하지 않고, “다 그런 거지 뭐.” 하며 손을 대지 않은 채로 두었다.

  법철학은 그 상식이라는 웅덩이를 전부 퍼내고 그곳에 인간사회의 음지 부분을 찾아낸다. 상식 위에서 전개되는 법철학은 말하자면 인간사회의 양지 부분밖에 비추지 않는다. 그러나 깨끗한 것더러운 것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성적인 인간이 합리적인 계약에 의해 국가사회를 만들고 합리적인 법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옛날이야기의 뒷무대, 언터처블한 음지의 세계를 직시하고 갇히지 않은 두뇌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법철학의 진면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_ 스미요시 마사미, 위험한 법철학

 

 

 


14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

 

syo는 내가 좋아하는 글이면 남들도 다 좋아할 거라고는 착각하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진짜 엄청, 겁나, 미친 듯이, 아주 그냥, 좋아서 환장하는 글이면 남들도 다 좋아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을 만큼 철 안 든 녀석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신형철 별로던데-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진심으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 신형철 선생님이 호불호를 탄다고? 이 아름다운 글이? 진짜? 그건 왜냐하면 내가,

 

신형철 선생님의 글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진짜 엄청, 겁나, 미친 듯이, 아주 그냥, 좋아서 환장했기 때문이다. 모든 글이 다 좋아서, 어느 한 대목 짚어 감탄하지 않고 그냥 끝나는 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사랑하면 그런다. 내 새끼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객관적으로, 내 새끼 너무 예쁘지 않냐? 라는 말을 100% 진심으로 하게 된다. 이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이뻐할 수밖에 없다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된다. 이런 건 인간의 한계라기보다 그냥 인간의 생김인 것 같다.

 

작가 같은 게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되는 계기는 정말 다종다양하다. 너무 잘 쓴 글을 만나서 내 것이 짜쳐 보일 때마다 그런 마음을 굳혀 나가는 게 주된 양상이지만, 신형철 선생님의 경우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쐐기를 박게 한다. 이런 것이다. syo가 쑥과 마늘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 착한 곰처럼 꾸준히 읽고 쓰고 그러다 운까지 따라준다면, 내 나이 50에 이르러 35세의 선생님이 쓰셨던 정도의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도 계속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반복한다면 내 나이 80쯤 이제 50세의 선생님이 쓰신 것과 나란히 놓을 만한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그러나 그런 선생님조차 신형철 별로던데-’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거라면, 나란 인간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게 될 것인가! , 세상에 나가지 말자. 쑥 꺼져, 마늘 치워…….

 

저런 내적 북치고-장구치고와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선생님의 글을 너무 사랑한다. 좋은 글을 지어 올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능력들의 신체적 은유, 그러니까 눈, , , , 엉덩이, , 가슴 같은 모든 쓰기-기관들에 관해서 생각하건대, 나는 선생님의 그 기관들을 몽땅 훔쳐 와서 내 안에 채워 넣고 싶다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무례한 욕심을 종종 부린다.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_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읽는 ---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

심신 단련 / 이슬아

읽는 직업 / 이은혜

열과 엔트로피는 처음이지? / 곽영직

200년 동안의 거짓말 / 바버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내가 사랑한 공간들 / 윤광준

물리가 쉬워지는 미적분 / 나가노 히로유키

나의 첫 파이썬 / 에릭 마테스

스스로를 아는 일 / 앙드레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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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4-26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환장해서 책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누가 플래그를 한 통 선물하면 받는 사람이 좋아할 거라고 예측하고, 그렇게 예측한 자신의 미친 센스에 스스로 감동할 것인가.˝ 나 이 글 읽고 쥐고 있던 마우스 내던졌어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넘 웃겨,,,,근데 우리 쬐끔 비슷한 구석이 있어 괜히 허탈하네...

syo 2021-04-26 10:41   좋아요 1 | URL
비슷한데 왜 허탈해요 ㅋㅋㅋㅋㅋㅋ 싸우자, 그리고 이기자, 우리 집요한 사람들이여!

수이 2021-04-26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여워 ☺️ 라고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고 말았다 이 귀여운 사람들 보소 라고

syo 2021-04-26 10:4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혹시 사돈이세요? 왜 남말하세요?

페넬로페 2021-04-26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층 입주민이면서, 은근히 플래그 비싼데, 그래도 천 원샵에서 파는건 좀 품질이 안좋고~~소중한 내 책에 붙이는 건데 메이커 있는 제품을 사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1인입니다.
신형철님에 대한 글,
격하게 공감하며 넘 재밋게 읽었어요😊😊

syo 2021-04-26 10:43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맞습니다. 플래그는 아무래도 삼엠이지요....

그리고, 맞아요, 일자산은 언덕이지요! 격하게 공감합니다.
고치셨지만, 이미 늦었어요! 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04-26 11:09   좋아요 2 | URL
아니, 페넬로페 님은 일자산이 언덕이란 걸 아시는 분이란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4-26 11:12   좋아요 1 | URL
그럼요!
딱 치킨 먹기 좋은 곳이죠^^

syo 2021-04-26 11:17   좋아요 2 | URL
그러고 보니, 작년에 올림픽 공원 다녀온 글을 썼을 때,
페넬로페님께서 그때 거기 계셨다는 댓글을 다셨던 게 기억나네요^-^

다락방 2021-04-26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기다린 보람이 있는 글이네요. 이 부장님이 바쁜 와중에도 글 올라왔나 자꾸 들락거렸다규요!! 이제 편한 마음으로 일해야겠다. 그럼 부장은 이만 가요. 안녕!

syo 2021-04-26 10:44   좋아요 1 | URL
아, 부장님이라니, 거듭 생각해도 정말 어마어마한 친구란 말이지? ㅎㅎㅎ

잠자냥 2021-04-26 12:52   좋아요 1 | URL
아니, 다 부장님, 부장님답게 치킨 한 여섯 마리는 쏘셨어야죠. 섭섭합니다.

다락방 2021-04-26 13:58   좋아요 1 | URL
아시다시피, 저희가 입이 짧아서요..

=3=3=3=3=3

라파엘 2021-04-26 1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플래그를 붙일 때 너덜거리는 게 싫어서 표지 사이즈 안쪽으로 붙여요. 그리고 쇼님이 냉장고 옆에 붙여두는 것처럼 저는 책상 한쪽에 나란히 붙여두지요. 그런데 쇼님과 마찬가지로 책상에 붙여둔 플래그가 균일하지 않은 게 신경쓰여서, 언젠가부터는 북다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ㅎㅎ

syo 2021-04-26 11:19   좋아요 2 | URL
라파엘 님의 간증(?) 말씀에 힘이 납니다. 역시 호모 바짝붙이리우스들!!
하지만 북다트는 너무 비싸요... 어흑ㅠㅠ

라파엘 2021-04-26 11:34   좋아요 1 | URL
북다트가 비싸기는 하지만, 사용할수록 점차 접착력이 떨어지는 플래그와 달리, 북다트는 반영구적으로 재활용하며 사용할 수 있기에... 인생을 길게 보고 북다트를 구매합니다 ㅋㅋㅋㅋ

syo 2021-04-26 23:41   좋아요 1 | URL
그렇게 보니까 그러네요. 설득력 있다.....
저도 저 선물받은 플래그까지만 소진하고 다음에는 북다트를 이용해볼까 봐요.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4-2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래그를 쓰는 사람이 많군요. 신세계네요. 포스트잇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만 써봤는데~ 치맥이 가장 눈에 들어오네요 ㅎㅎ

syo 2021-04-26 23:4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치킨은 어떻게 찍어도 크게 나오니 이것 참 신비로운 일이지요.

2021-04-26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엄청 꼼꼼하시네요!ㅋㅋ 암튼 영업당해서 집에 있는 사랑의 정확한 실험이었나 그 책 읽어봐야겠어요. 맛점하세요^^

syo 2021-04-26 23: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오랜만의 영업활동이었네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단발머리 2021-04-26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요 ㅎㅎㅎ
호모 플래그바짝붙이리우스님! 오래오래 건필하세요!

syo 2021-04-26 23: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2층 주민이셨던가요?

잠자냥 2021-04-26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 님이 6층 입주자죠? 아니 저렇게 붙인단 말이에요?! 그리고 여기 입주자분들은 플래그 다 옆면에 붙이시는구나.... 그것도 놀라워요. 전 책 위쪽에 붙이거든요. 그리고 저도 플래그 왠지 아까워서 재활용하는 사람인데요. syo님은 냉장고에 저렇게!!!! ㅋㅋㅋㅋ 놀라워라. 전 그냥 책 맨 앞장에 붙여둡니다. 가끔 그걸 확인 안 하고 알라딘 중고에 책 팔러 가면 점원이 책 확인하다가 그 플래그 뭉텅이 발견해서 친절하게 ˝이건 처리해 드릴게요˝하면서 냉큼 버리는데... 아아앗! 다시 돌려주세요 하기도 뭐하고 그저 참 아깝습디다. ㅋㅋㅋ

syo 2021-04-26 23:47   좋아요 0 | URL
저도 누워서 책 보다가 플래그 떼면 책 앞장에 붙여놓습니다.
그러다 날 잡아서 다 냉장고로 옮기지요 ㅎㅎㅎ
저런 작은 것들이 이상하게 아깝단 말이지요? 사람 심리 알 수 없다니까요 정말.

반유행열반인 2021-04-2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층에 사는 애이름 syo라지요 S.Y.OOO

syo 2021-04-26 23:45   좋아요 1 | URL
아, 어린 시절 동요 테이프에서 듣던 정겨운 노래 🐶

Angela 2021-04-26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래그는 위에 ㅎㅎ

syo 2021-04-26 23:45   좋아요 1 | URL
깃발이라는 것은 옆으로 펄럭이는 것입니다 ㅎㅎㅎㅎ

공쟝쟝 2021-04-26 14: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3층 주민이올시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저 3m 선물 누구예요!? 정말 센스 쩔어서 내친구였음 좋겠다!! 으흐흐

syo 2021-04-26 23:46   좋아요 0 | URL
그러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슬프게도....
그럴 수 있다해도 그건 그거대로 또 슬프다.

공쟝쟝 2021-04-26 23:48   좋아요 0 | URL
...... 맞네... 그건 그거대로 슬프다.... 쓱쓱(눈물을 훔친다)🤧

바람돌이 2021-04-26 16: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여긴 3층 주민이 대세인듯..... 음 저는 2층 주민입니다. 뭐든지 일단 붙이고 보자. 그러면 무언가 하나는 건지리라라고 할까? ㅎㅎ syo님의 6층 입주보다 냉장고 옆면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오늘 알았네요. 우리 친해지기는 힘들듯해요. ㅠ.ㅠ

syo 2021-04-26 23:47   좋아요 1 | URL
집요한 스타일 싫어하시나 봐요? 왜요? 왜 싫어해요? 왜?(집요)

바람돌이 2021-04-27 00:31   좋아요 1 | URL
저런거 줄세워서 붙여놓으면 막 떼서 겹쳐놓는거 취미예요. ㅋㅋ

syo 2021-04-27 11:37   좋아요 0 | URL
아.... 안녕히 계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4-26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우리 윗집 청년은 어쩜 이렇게 글을 맛깔나게 쓸까? 플래그 다 씹어먹을 뻔했네~ 저는 플래그란 무엇인가?에 한 표인 5층 입주민입니다. 책 한 번 읽으면 중요 문장이랑 페이지 이런건 그냥 외워지잖아요? 독서토론 할 때 누가 얘기하면 아~ 그 125페이지 넷째줄? 그러잖아요. 하하!
-호모플래그바짝붙이리우스에 대항하는 호모허세관종데우스가

syo 2021-04-26 23:49   좋아요 2 | URL
만날 일 생기면 플래그 하나 꼭 드릴게요.
힘내세요, 툐툐님....😥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뒷북소녀 2021-04-2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여드릴 수 있다면 제가 플래그를 재사용하기 위해 떼놓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저렇게 질서정연하다니. 세상에!!!

플래그를 보면 6층 아니신가요? (플래그를 아주 바짝 붙이는 편이다!)
2층은 다이소 플래그 같은데...
syo님 냉장고에 붙여져 있는 플래그는 3M이 많은 것 같고...

syo 2021-04-27 11:5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저는 최상층 거주자입니다. 으하하하하.
그리고 저 냉장고 사진도 제 눈에는 무질서의 발현으로 보입니다....🙄

레삭매냐 2021-04-2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치킨에 비루만 눈에 들어옵니다.

syo 2021-04-29 22:3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려했던 바입니다.

하나의책장 2021-04-30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번에 한 박스씩 사 구입하고선 따로 선물하거나 나눔하지 않는 이상 그대로 책에 붙힌 대로 놓고 있거든요. 냉장고 옆 빼곡하게 줄지어 놓고 재사용하는 것도 나름의 아이디어네요^^ 아! 그리고 저도 syo님 말에 동감하는 게 색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뭔가 개운한? 느낌이 없어서 syo님처럼 마음이 살짝 불편해요ㅎ 아마 제 성격엔 색별로 흐트러짐없이 정렬시켜 놨을지도ㅎㅎ

syo 2021-04-30 09:21   좋아요 0 | URL
이런 건 이래저래 피곤한 성격입니다.
특히 흐트러지는 인간과 같이 살다보면 고통받는 건 늘 이쪽, 편한 건 늘 저쪽 같고....
그럼 이쪽은 잔소리를 하게 되고, 저쪽은 ‘괜한‘ 잔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내탓이오, 내탓이오....
 

 

 

 

 

1

 

. , .

 

봄이라는 건 비나 바다처럼 글감으로 팔아먹기 좋아서 누린내 날 때까지 우려먹을 작정이었다. 꽃 이야기하고 사랑 타령하고, 봄비 이야기하고 사랑 타령하고, 강남 갔다 돌아온 제비 이야기하고 사랑 타령하고, 완전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랬는데, 우와, 잠깐 방심하는 사이 여름이 와 버렸다! 꽃은 다 졌고 비는 깔짝거림으로 증발했고 아, 제비가 웬 말, 날벌레만 집안에 득시글거리는 탓에 syo는 하루종일 박수 치면서 나날이 건강해지고 있다. 망했다. 이러면 결국 사랑 타령하고 사랑 타령하고 사랑 타령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랬다간 파멸이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서재 이웃 취소하는 마우스 클릭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 야속한 봄. 너는 왜 이렇게 해가 갈수록 날씬해지니.

 

굿바이 스페셜로 한 번 더 팔아봤다. 마지막 단물까지 쪽쪽 빨아먹고 너를 보내니, 봄아, 내년에는 모쪼록 천천히 와서 처언천히 놀다 가.

 

 

 

2


 

새로운 자료가 쌓이면서 의사들은 신속히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중년 여성은 매력이 없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병적이기조차 하다는 명백히 비과학적인 관점이 역사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다면, 과연 의료 전문가가 매우 제한된 연구에 기초해 HRT를 채택하고자 애당초 그렇게 열성적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의사들이 HRT를 처방하도록 제약회사가 부추기기는 했지만 여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런 거대하고 무모한 실험에 제약회사를 끌어들이는 데는 분명 의사들의 검증되지 않은 편견이 일조했다.

_ 바바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200년 동안의 거짓말

 

여성은 열등한 존재라는 멸시의 관념을 의식 혹은 무의식에 고착시킨 사람들이 그 관념을 추종하기 위해 과학과 연구를 빙자해 다양한 편견을 양산하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편견들을 격파하는 데 과학과 연구의 힘을 다시 이용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관념을 타격해야 끝날 일이다. 어차피 실제로 연구 결과를 만드는 것이 과학이 아니라 편견이라면, 관념이 존재하는 이상 편견은 무한히 생산되고 끝없이 변주될 것이라서 그렇다. 반면, 이미 형성된 편견들을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인 다음, 그 편견을 믿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편견들을 덧대어가며 관념을 형성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편견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관념을 건드릴 수 없다. 실제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성의 속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틀릴 수 없는 인간이라는 확신이다. 이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는다. 관념도 편견도 모두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3

 


구석기시대인이 바위에다 짐승을 한마리 그렸을 경우 그는 진짜 짐승을 한마리 만들어낸 것이라 믿었다. 허구와 가상의 세계, 예술이나 단순한 모방의 세계는 현실의 경험과 분리된 독자적인 영역을 뜻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세계를 상호 대립시켜 생각하지 않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의 직접적인 연속이라 보았다.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인류학자 레비브륄의 책에 나오는 어떤 쑤(Sioux)족 인디언의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었을 게다. 이 인디언은 어떤 탐험가가 들소를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우리네 들소를 여러마리 자기 책에 넣어간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현장을 보았으니까. 그후로 우리는 들소 구경을 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_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원시인은 아니지만 원시인이 보면 너 참 남부럽지 않게 사는구나 하고 칭찬할 만한 모양으로 사는 중이다. 하루에 두 끼를 챙기고 두 번의 잠(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을 잔다. 매달 못 해도 서너 차례의 섹스를 하고 마음과 때가 맞으면 더 하기도 한다. 몸은 늘 잘 맞아서 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요인은 아니다. 잘 먹는 것, 푹 자는 것, 잔다고 하면 무난할 것을 굳이 먹는다는 몹쓸 말로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저러나 아름다운 그 일에 부지런 떠는 것. 사실 원시인이 아니라 미래인이 와서 봐도 그닥 나빠 보이지 않는 생활. 그렇다면 이 원시적인 필요들이 몽땅 충족되는 호화로운 일상 속 syo에게, 읽고 쓰기란 대체 무엇일까? 구석기인이 그린 그림은 그의 생필품인 것 같은데.

 

 

 

4

 

누가 움켜쥐는 것처럼 뒷골이 아프면서, 마치 뒤통수에 쥐가 나는 것 같은 통증 속에 아침잠을 깼다. 최신형 혈관 공격식 알람인가. 종일 머리가 무거워 활자가 눈에 잘 안 발린다. 힘주면 10초 만에 통증 올라와서 케틀벨 못함, 푸시업 못함, 딥스 못함. 마스터베이션 못 함. 커피도 안 먹고.

 

생활은 자꾸만 밍밍해지는데,

 

 

 

5

 

산책길 녹색은 자꾸만 쨍해진다.

 

 

 

--- 읽은 ---



137. 화재 감시원

코니 월리스 지음 / 최용준 외 옮김 / 아작 / 2015

 

솔직히 리알토에서읽고 여기까진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표제작까지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양심의 소리에 올라타 묵묵히 전진 또 전진하여 화재 감시원에 도착했는데, 물론 좋았지만 또 와방 좋지는 않아서 애매해진 것이다. , 어쩌지, 내부 소행딱 한 개 남았는데 하필 걔가 제일 긴 애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어쨌든 읽기 시작했는데,

 

3시에는 잤어야 했는데 4시까지 읽고 말았다. 화재 감시원에서 오오, 했지만 뭐랄까 내부 소행의 경우는 우와와오오우오어아?! 했다고 할까. 다음 작품들은 어떨까. 리알토에서같은 식이라면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겠고, 내부 소행같기만 하다면야 눈꺼풀이 없는 인간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내처 읽겠지. , 그럼 이제 여왕마저도로 가자.

 

그녀가 그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짜라기에는 너무 훌륭한 게 있다면, 황녹색 대본을 들고 금빛 머릿결 위로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을 받고 서 있는, 킬디였다. 강령회 탁자 주변의 연보라색 방석에 웅크리고 앉은 얼간이들이 그런 뻔한 헛소리를 어떻게 믿게 되는지 항상 궁금했다. , 이제는 알겠다.

  왜냐하면 그 순간 거기 서서, 이 모든 게 사기라는 걸 알고 있는 순간에도, <헐크 4> 대본과 신용카드 명세서와 통화기록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얼마든지 조작되었을 수 있으며, 나 자신은 그저 두 사기꾼의 피날레를 장식할 전리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믿고 싶었다. 그저 영화 촬영차 조사 중이었다는 알리바이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H. L. 멩겐이 무덤에서 살아 돌아와 나를 도와서 사기꾼 박멸 운동에 나서고, 내가 대본을 쥐고 있는 저 손목을 붙잡고 킬디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 키스한다면 우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것까지.

_ 코니 월리스, 내부 소행

 

 

 


138. 인공지능 생존 수업

조중혁 지음 / 슬로디미디어 / 2021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대체 뭘 해야 하냐는 물음에 창의적인 일을 하라고 대답한다. 허어.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도 안다. 그러니까 뭘 먹어야 하냐구요. 당연한 말을 또 하나 들었지만 모른 척 꾹 참고 그렇다면 창의적 능력을 어떻게 키우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제일 처음 나오는 대답이 잠을 잘 자세요. 허어…….

 

이해한다. 뭐 뾰족한 수 있겠냐고.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편집과 교열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을 책 속에 이런 문장들이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 하지만 인공지능이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능 기술이 아닐 뿐더러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사람의 존속성에 대한 우려를 꺼내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사회적 존속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빅데이터를 통해 소프트웨어로 체계화하기 쉬운 영역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 창의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창의적 생각을 하기 위해 깊은 고민을 오랫동안 안 하기 때문이지 태어날 때부터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이야기한다.

 

- 인공지능의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가 데이터로 스스로를 학습하기 때문에 왜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했는지를 개발자도 모르기 때문에 원인 파악도 어렵다.

 

더 할 수도 있다.

 

조중혁 선생님은 무려 1996년부터 IT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한 전문가. 저자소개를 보면 이런저런 수상 경력도 떠르르하다. 그런 자리에 올랐다면 당연히 일반 독자들보다는 훨씬 많이 읽고 썼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필력과 독해력은 위의 저 비문, 혹은 어색한 문장, 혹은 비문이면서 어색하기까지 한 문장들을 못 알아챌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건 정성의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저런 대목들을 만날 때면 독자로서의 syo는 지나치게 못마땅해하는 경향이 있다.

 

 

 


139. 중국집

조영권 지음 / 이윤희 그림 / CABOOKS / 2018

 

도대체 내 글은 왜 이따위인가 하여 찬찬히 읽어보았더니 나는 시각적 표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애써 다른 감각 표현을 동원하려 해봤더니 청각까지는 어떻게 글자로 흉내라도 내겠는데, 후각이나 미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ㅇㅇ맛, ㅇㅇ냄새 같은 게으른 표현은 dog나 줘버리라지! 하여 맛 표현을 잘해 놓은 글 같은 게 있을까 싶어서 뒤적거리다가 찾아낸 제목, 중국집. 피아노 조율사 조영권 선생님이 방방곡곡의 중국집을 종횡무진하여 쓴 에세이라는 정도의 정보는 진즉에 알고 있었고, 출간 당시 알라딘에서도 가끔 눈에 띄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표현을 배우진 못했다. 문체가 미문은 아니어서 문장으로만 놓고 보면 욕심나는 데가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문 직업인으로서 하루의 일과를 담담하게 기록해나가는 태도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공무원이던 시절, syo 역시 이런저런 일과들로 이루어진 (지나치게 긴)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써보려고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글이 되지 않았을 거고, 결국 백지 위에 신세 한탄이나 연애 타령 같은 걸 갈겨 놓고는 드러누웠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때의 syo가 글이 되지 못하는 일상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을 글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건반의 움직임이 둔하고, 연타가 되지 않는 상태. 이럴 때 건반은 무척 무겁게 느껴진다. 여름이 오면 습도가 높아 더 심해질 듯하니 서둘러 잡아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케이스를 열고 건반을 하나씩 뽑았다. 키 플라이어로 프런트 홀(건반 뒷면의 천으로 싼 구멍)과 밸런스 홀의 구멍을 넓혀주었다. 건반의 움직임이 정상 속도로 돌아왔고, 88개 건반 모두 같은 방법으로 작업을 마쳤다.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다 하고 나면 개운하다. 가벼워진 건반처럼.

_ 조영권, 이윤희, 중국집

 

이런 문단은 작업일지의 한 대목을 건조하게 옮겨 온 것 같으면서도, 또 꼭 그렇지만은 않은 슴슴한 매력 같은 게 문장 사이사이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 작업 과정의 선명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더 아름다워질 여력도 있다. 언젠가 다시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일에 대해서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국 뭔가 배우긴 배운 것이다.

 

 

 

--- 읽는 ---

위험한 법철학 / 스미요시 마사미

흥미로운 베이지안 통계 / 윌 커트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읽자마자 수학 과학에 써먹는 단위 기호 사전 / 이토 유키오, 산가와 하루미

Chaeg 2021. 04 / ()(월간지)편집부

200년 동안의 거짓말 / 바바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우연에 가려진 세상 / 최강신

공학자의 세상 보는 눈 / 유만선

코로나 인문학 / 안치용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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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22 1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좋다는 평이 많아 겁도없이 들여놨다가 머리가 굉장히 아파 잘 꽂아뒀어요. syo님의 리뷰읽고 재도전 하렵니다.ㅎㅎ 글고 책 안 써주심 걍 프린트해서 제가 책 만들래요😳ㅋ

붕붕툐툐 2021-04-22 20:41   좋아요 3 | URL
그 책 저도 한 권 신청이요~ㅎㅎ 그니까 쇼님은 그냥 여기 올린 글만 묶어서 바로 출판하심 딱인데~~

반유행열반인 2021-04-22 21:30   좋아요 3 | URL
저도 제가 뽑아서 제본해 보고 싶은 글이 너무 많아서 그냥 인쇄를 포기하고 출판을 기다린지 어언 이 년...밖에 안 됐구나...ㅋㅋㅋ

syo 2021-04-23 10:57   좋아요 3 | URL
여기서 무슨 작당모의들을 하시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 다들 흩어져요, 해산 해산! 😎

북다이제스터 2021-04-22 1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00년 동안의 거짓말> 내용 중 6장과 7장 ‘아동의 세기’와 ‘병리적 모성’이 가장 공감됩니다. 아동(자식) 관련 200년 거짓말을 현대 부모가 거짓인지 알더라도 절대 극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ㅠㅠ
그만큼 이데올로기가 무서운 것 같습니다.

syo 2021-04-23 10:58   좋아요 2 | URL
북다님 재빠르다.
전 아직 거기까지 못 읽었답니다... 어흑.

han22598 2021-04-22 22: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베이지안 통계를 읽으시네요 ????ㅎㅎㅎㅎ 진심 존경입니다. 통계학 전공자 수준이시네요 ㅎ 책 제목처럼 나도 흥미로웠나 기억해보려 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ㅠ

syo 2021-04-23 11:01   좋아요 2 | URL
아니예요, 전공자 수준이라니 무슨 말씀을 ㅎㅎㅎ
저 책 읽어보셨나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수학 수준에서 조금 더 나간 정도입니다.
공대생이었어서 확률 랜덤프로세스 이런 거 배웠었거든요.
기억이라는 게 남아 있다면 저 정도 귀여운 책은 읽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똥멍충이라서 그만....

감은빛 2021-04-25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나요? 기후위기 때문에 앞으로 점점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없어질텐데요. 그냥 사랑타령만 주구장창 하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긴 여름과 겨울에도 syo님의 사랑타령을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syo 2021-04-26 10:13   좋아요 0 | URL
네, 여름과 겨울이 맞붙는 한이 있어도 저는 사랑타령 하면서 잘 살아보겠습니다 ㅎㅎㅎㅎ
 

 

모양의 모양 7

 

 

 

목련도 남았는데 라일락이 다 피었네요. 오르막길에 향이 온통 어지러운 계절입니다. 바람도 따라 걷는 산책길이 빗방울에 젖으면 또 무언가 향기 나는 것들이 자라나겠지요. 비가 자주 들릅니다. 좋은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마음은 잘 있습니다. 나는 늘 잘 있는 마음입니다. 약속하지 않는 마음에는 실망도 없는 법이어서 나는 여전히 기대하기보다 기대면서 삽니다. 내일은 잘 모르겠어요. 알 수 없는 것들을 당신은 미워했는데 그 미움이 용케도 나를 향한 미움이 되지 않도록 이 악물고 뭔가를 지켜냈던 그때의 당신을 가끔 생각합니다.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그 이 악문 마음을 생각합니다. 지키려는 마음을 지켜주지 못했던 마음을 생각하고 기대려는 마음에 기대지 못하게 했던 마음도 생각합니다. 왜 그런 생각은 오르막을 오를 때만 하게 되는지, 내리막에서 우리는 왜 내려가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하지 못하는지, 나는 늘 궁금합니다. 하지만 답 없는 질문은 모든 것이 답인 질문이나 마찬가지라서, 질문하는 마음이 더욱 어지러운 계절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잘 있습니다. 끼니를 잘 챙기고 커피를 줄였습니다. 미운 것들은 아무래도 알 수 없어서, 그런 마음에 기대지 않고 사는 삶을 생각하지요. 쌀을 안칠 때는 잡곡을 많이 섞으려고 합니다. 크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수록 작게 실망하니까, 실망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파와 달걀을 아낌없이 써서 상을 차리고, 다 먹으면 바로 일어나 삼십 분쯤 걷습니다. 마을을 에우는 길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다 있어서 잠깐을 걸어도 나는 오르락내리락해야 합니다. 오늘부터는 내려가는 길 위에서도 내려가는 것 말고 무엇이든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리막에도 이 봄은 묻었겠지요. 비가 또 그쳤습니다. 라일락이 다 피었는데 목련도 남았네요.


아득합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이 뭔지 알아? 사랑한다는 말이었어."

  "아마 다시는그 말을 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말은 뭘까?"

  "다시는 할 수 없는 말."

  "다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이란 말은 뭘까?“

_ 정영수, 우리들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물론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감각마저 잃는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

_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답은 없었다. 대단히 어렵고 풀기 힘든 질문에 인생이 던지는 일반적인 답을 제외하고는. 그 답은 이것이다. 하루하루 그날 할 일을 한다, 즉 잊는 것이다. 잠을 통해 잊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적어도 밤이 될 때까지는 귀여운 유리병 여인들이 불러주던 음악으로 되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 삶의 꿈으로 잊을 수밖에.

_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 읽은 ---



134. 나만의 사적인 미술관

김내리 지음 / 카시오페아 / 2020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을 공유하는 우리는 모두 우리 안의 고독한 미술관을 들여놓고 산다. 미술이 하는 일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마음의 어떤 공백이나 흉터, 얼룩을 작품으로 채우고 보듬고 닦아냈다면, 미술관을 들러 작품을 보고 오는 일은 내 안의 사적인 미술관에 새로운 작품을 거는 일이 된다. 미술이 미술관보다 완벽할 수는 있어도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책은 김내리 선생님의 사적인 미술관의 도면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읽어야 할 것은 그가 그 안에 지은 미술관이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의 미술관을 짓는, 혹은 이미 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 그림을 채워나가는 방법,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아래 예문은 단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미술관 역시 내게는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과 다를 게 없는 것. 나만의 사적인 미술관에 걸릴 작품들은 나의 덧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혼자서 할 일이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절망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회색빛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밤이 지나간 후에는 따스한 햇살이 반겨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어둠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럴 때 저는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그래,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다짐을 해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합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정리됩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바꿔봅니다. 내 마음만 달리 먹어야 한다니 조금은 억울한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순응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봅니다. 회색빛 밤 속에 반짝이는 별들이 이토록 크고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길 바라봅니다.

_ 김내리, 나의 사적인 미술관

 

 

 


135. 69_sixty nine

무라카미 류 지음 /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18

 

- 일독(기억도 안 나는 멀고 먼 옛날)

- 재독(기억날 듯 말 듯 한 먼 옛날)

- 삼독(210417)

 

지금 여기에다가 느낀 점을 뭐라뭐라 쓰고 있었는데, 한 서너 줄쯤 쓸 때마다, 음 이건 리뷰에 써먹는 게 좋겠군, 하면서 ctrl+x, ctrl+v로 옮기고 다시 썼다가 또 옮기고, 또 쓰고 옮기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에 쓸 말이 없어졌다. 남은 말은 재미있고 허망하다는 것. 뭐니뭐니해도 류는 역시 허망맛이지.

 

  "미안해."

  "?"

  "모처럼 데이트에서 그런 영화를 보게 해서."

  "그렇지만 명작이잖아?"

  ", 어떤 잡지에 소개되어 있더라."

  "과연 필요한 것일까?"

  ", 뭐라구?"

  "그런 명작이 필요 있을까 말이야."

  "무슨 의미?"

  "그 사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며?"

  ",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왜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영화로 만들지? 난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고?"

  "이 세상에는 잔혹한 일이 있다는 걸 난 알아. 베트남이나 유대인 수용소라든지, 그렇지만 난 일부러 그런 영화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왜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만 할까?"

  나는 할말이 없었다. 천사의 말뜻은 잘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보기 싫은 것, 더러운 것을 일부러 보여주는 것일까?' 아기사슴 같은 눈동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대답할 말을 잃고 만다.

  마쓰이 가즈코는 상냥하고, 예쁘고, 머리 좋고,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이다. <냉혈>에서 묘사된 셰게가 평화로운 생활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잠복해 있다고 해도, 또 그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천사가 한 말, "난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어"라는 것이다.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겨울 바다를 뒤로했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_ 무라카미 류, 69_sixty nine

 

 

 


136. 그때 너에게 같이 가자고 말할걸

이정환 지음 / 김영사 / 2021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곳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도 훌륭히 본업을 해나갈 수 있는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다시 나를 부르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그럴 수 있는 데에 용기와 의지 말고 다른 것이 필요치 않다면, 그걸 입증한 것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가 않아서 그럴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사실 작가 선생님도 그걸 입증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것. 아름다움까지는.

 

 

 

--- 읽는 ---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찾아서 / 존 그리빈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

화재 감시원 / 코니 월리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 이라영

걸어 다니는 어원사전 / 마크 포사이스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 아네르스 블록, 토르벤 엘고르 옌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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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8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밤의 연애편지? 남의 연애편지를 읽는건 적당히 멜랑꼴리해질 수 있어서 좋네요. ^^

syo 2021-04-18 02:06   좋아요 1 | URL
연애를 꾸준히 팔아서 적당한 멜랑꼴리를 사드리겠습니다ㅋㅋ 😂

2021-04-18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0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1-04-18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니? 가 또 문득 떠오르는 페이퍼네........... 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4-19 10:19   좋아요 0 | URL
자니 페이퍼 쓰기로 된 거 아니었어? ㅋㅋㅋㅋㅋ

수이 2021-04-19 10:21   좋아요 0 | URL
자니..... 페이퍼 안 쓴 이들 누구누구인지 체크중입니다. 제일 아련한 자니-로 당첨! 쇼님 완료 ✅ 락방님 완료 ✅ 누가 안 쓴 거 같은데....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4-18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고등학생 때 69읽고 따라한다고 학교 급식 거지 같다고 교장선생님한테 항의하는 자보 붙이고 수배됐잖아요 ㅋㅋㅋ저런 달달한 부분이 있었나 싶게 내가 뭘 읽은 건지 ㅋㅋ다시 읽어 볼까...

syo 2021-04-19 10:19   좋아요 1 | URL
그 이야기는 정말 언제 들어도 찰떡이라니까요, 반님 이미지랑.
곧고 굳건하게 잘 자라나셨네요^-^ㅋ

비연 2021-04-18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월의 결과는 어떤가요?

syo 2021-04-19 10:20   좋아요 1 | URL
좋지요~ㅎ

비연 2021-04-19 22:01   좋아요 1 | URL
굿. 8월 홧팅!

Angela 2021-04-2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뷰~~

syo 2021-04-22 18:04   좋아요 0 | URL
해발고도가 지나치게 높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뭐이래 껀덕지가 없노

 

 

 

1

 

어제가 생일이었다. 생일이 되면 치킨과 커피 같은 각종 먹거리들이 바코드 옷을 입고 쏟아져 들어온다. 카톡으로. 21세기의 힘이다. 멋진 신세계.

 

그러나 이것은 부담이기도 하다. 일단 경조사를 잘 챙길 줄 모르는 살갑잖은 성격을 베이스로 하고, 그 위에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먹튀만은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얹은 후, 마지막으로 백수라는 특수/경제적 양념을 솔솔 뿌리면, - syo의 곤란함 완성.

 

그런 까닭으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는데, 어떻게든 알게 된 친구들이 늦었지만 축하한다고 난리다. 여러분, 마음은 고맙지만 넣어두세요. 아놔, 또 늙었?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생일날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설의 매콤함과 데시벨이 동시에 커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 그 다정한 성격에 지금 syo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보내고 싶어서 그냥 아주 안달복달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침이 바짝 마르는 건 알겠는데, 정중히 사양합니다. 어어, 거기 클릭하시는 분, 멈추는 게 좋을 거예요. 제 말만 듣는다면 우리는 아무 일 없이 이 순간을 지나갈 수 있어요. , 이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뒤둘아 서는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내 눈을 봐요. 그렇죠. 나를 믿어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다 잘 될 거예요.

 

인간은 인내의 동물입니다. 어떻게든 참아 보시라구요.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2

 

나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지만 syo30대고 앞자리와 뒷자리 수를 더하면 10입니다. 이런 십…….

 

 

 

3

 

매일 글 올리는 분들 멋있다. syo는 읽는 건 쉬운데 쓰는 건 진짜 어려워서, 이렇게 헛소리로 한 바닥 채우는 데만도 거의 두 시간이다. 한 편의 글을 만드는데 투입된 syo의 노동량이 사회적으로 투입된 노동량보다 크기 때문에, 결국 syo는 경쟁에서 도태되고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할 거라는 것이 마르크스 선생님의 분석이다. 저 선생님은 언제 한 번 나한테 다정하게 군 적이 없다. 근데 나는 왜 좋지? , 어쩔 거야, 수염 돼지 페티시…….

 

둥글고 빨간 얼굴은 단순하지만 눈에 띄기 때문에, 대충만 알짱거려도 사람들 뇌리에 선명하게 박히는 듯하다. 그래서 syo라는 놈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 같지만, 실은 조용한 편이다. 20174월 하순부터 알라딘에서 설치기 시작했으니 이제 만 4년인데 그간 써 놓은 페이퍼가 500개가 안 되고, 심지어 리뷰는 꼴랑 50개에 그친다.

 

그런 이유로 어제도 썼지만 오늘도 써 보려고 이러는 중인 건데, , 도무지 쓸 게 없다. 아침에 일어나 우유를 마시는데 조준을 잘못해서 나랑 티셔츠랑 반반씩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샤워하면서 봄인데 얼굴 털만 밀지 말고 다리털도 한 번 밀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밖에 안 나가면 된다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흡족했다. 떡볶이에 콩나물을 넣어봤다가 한 끼 시원하게 말아먹었고, 푸시업을 잘못했는지 힘만 주면 뒷골이 땡기는 거라 오늘은 그 핑계로 운동을 안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여전히 똥은 잘 나오고 있어서 이거 참 똥 만드는 기계로 태어난 이번 생, 건실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높아졌다. 이게 다다. 이런 인생은 대체 뭘까. 어제는 어제의 쓸 거리가, 오늘은 오늘의 쓸 거리가 생겨야 되는 게 아닐까? 아닐까요? ?

 

 

 

--- 읽은 ---



131. 에세이 만드는 법

이연실 지음 / 유유 / 2021

 

에세이 만드는 법의 장르는? 에세이다. 이 지점이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이연실 선생님은 말한다. 모든 것을 에세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에세이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에세이를 만드는 법으로 하나의 에세이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고 남기는 이 글의 장르는?

 

물론 똥.

 

똥이지만, 에세이랑 가장 많이 닮은 똥(……)이라고 해보겠다.

 

모든 것이 에세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에세이를 쓰기가 쉽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좋은 에세이를 쓰기란 굉장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소재로 누구와도 다른 글을 써내어 누구나 기꺼이 읽게 만드는 일, 그것은 물론 일차로 쓰는 사람의 일이겠지만, 일차 뒤에 이차, 삼차, 사차…… 아오. 그 여러 차차차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겉표지에 이름이 찍히지 않는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차차차를 통해 독자가 가장 편안하게 읽는 장르, 에세이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주성치 세계의 거리에선 쟁반을 손도 대지 않고 머리에 인 채 배달하는 밥집 아주머니와 앞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건을 던져 정확하게 정리하는 아저씨들이 곳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밥벌이를 한다. 맨날 화내면서 세금과 임대료를 걷으러 다니는 파마머리 아줌마는 '사자후'를 토할 줄 아는 전사고, 메리야스 입은 복부 비만 아저씨는 자신보다 약한 아이와 서민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히어로다. 전혀 우아하지도, 잘생기지도 않았고, 화면 너머로만 봐도 땀냄새 · 발 냄새 · 머릿내 풍길 것 같은 이 평범한 생활인들이 주성치 영화에서는 최고의 무림고수이자 영웅이다.

  에세이 편집자의 작가는 도심의 카페와 집필실, 교수 연구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리에, 출근길 만원 버스와 전철에, 시장에, 가게에, 정신 없이 돌아가는 회사에, 이름도 몰랐던 시골 마을에, 세상 방방곡곡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메일함에 꽂히는 완전 원고 너머의 세계에도, 우리가 그토록 차장 헤매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걸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야 하나, 조금은 막막하기도 하고 내 힘과 노력과 용기를 조금 더 쏟아야 하는 곳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툭툭 튀어나온다.

_ 이연실, 에세이 만드는 법

 

 

 


132.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엘즈비에타 에팅거 지음 / 황은덕 옮김 / 산지니/ 2013

 

요 책은 아무래도 조만간 리뷰를 쓸 모양이다. 그래도 그 전에 간단히 말해두자면,

 

하이데거는 쓰레기처럼 연애하고 아렌트는 망한 연애를 붙들고 망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속이느라 일생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물론 이 말은 제3자의 입이니까 쉽게 튀어나오는 말이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일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연애의 중요한 특징 중 몇 가지의 표본을 만들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타인의 사랑을 비웃고 비난하지는 않겠지만, 비웃고 비난하지 않기 위해 꾹 참아야만 하는 저 사랑이 내 사랑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이런 평을 남기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이미 죽었고 이제 사랑은 살아있는 내가 할 일이니까.

 

사실 하이데거 그 양반이야 원래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 딱 고대로 연애를 했기 때문에 달리 더 실망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지만, 아렌트의 연애는 오히려 충격. 똑똑해도, 아니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오히려 멍청한 사람들이 하는 실수와 같은 실수를 하면서도 자기 같은 똑똑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게, 그런 게 있나 보다. 모르지, syo는 안 똑똑이니까. 하여간 나처럼 실망하는 사람을 위해 역자 선생님이 후기에 남긴 말.

 

아렌트의 경우, 하이데거와의 관계에서 시종일관 보여주는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자기모순은 그녀의 사상에 경외심을 품어온 독자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전체주의의 기원, 그리고 나치즘과 파시즘을 포함한 전체주의 체계를 그토록 논리적으로 비판한 이 유대인 사상가가 어떻게 나치즘 이념에 찬동하고, 12년 동안이나 나치당적을 유지한 하이데거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두둔하며,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아렌트에게는 애초에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하이데거는 사랑하는 연인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고, 철학이나 정신(Geist) 그 자체, 혹은 첫사랑이나 순수 그 자체와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_ 엘즈비에타 에팅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솔직히 그냥 하는 말 같다. 한나도 연애할 땐 우리랑 똑같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바보짓을 했다- 라고 했었으면 더 쿨하고 좋았을 것 같다. 사실 사랑할 땐 종종 바보가 되는 우리들도 저런 핑계를 댄다. 걘 달랐어. 걔는 나한테 그냥 여자가 아니었다고. 그리고 끝내 자니?’를 하곤 한다.

 

 

 


133.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

 

예전에는 참 젊은이들도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말하면 웃긴 게, 사실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역량이 그때 그 젊은이들의 몇 곱절은 된다. 요시다 슈인이 아무리 잘나 봐야 토익 치면 300도 받기 힘들 거고, 사카모토 료마가 아무리 뛰어나도 코딩 한 줄 할 줄 모를 것. 그런데도 20세 근처에서 이미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젊은이들의 시대인 100년 전, 150년 전에 비하면 요즘은 학문, 정치 분야에서 젊어 이름 날리기란 굉장히 어렵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아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도 많은 시대가 더 발전된 시대겠지만, 그래서 이게 지금 더 좋아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서술이 경쾌하고 분량 조절도 나쁘지 않아서 읽기 좋았다. 이 최후의 사무라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권으로 다룬 두꺼운 책들도 많겠지만, 사실 뭐, 바다 건너 여기서 그런 두꺼운 책들까지 읽는 건 취미가 거기에 닿는 사람들의 몫이겠지. 나는 이 책으로 만족.

 

메이지유신은 그 자체로도 혁명사의 흥미로운 사례다. 거대한 변혁을 수행하면서도 기존사회의 어떤 부분은 잔존시켰고 연속성을 중시했다. 천황제의 온존은 대표적이다. 그 과정은 격렬하지만은 않았고 매우 타협적이었다. ‘연속하면서 혁신한 것이다. 본격적인 계급투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고, 외세와의 전쟁도 광범한 내전도 회피했다. 민중 대다수는 변혁 과정을 관망하는 데 그쳤고, 막부는 서양 열강과 전쟁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

  한편으로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한계와 약점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 강렬한 일본우월주의는 끊임없이 주변 국가인 조선, 중국과 마찰을 일으켰고, 끝내는 전 세계를 적으로 돌려 자멸했다. 우월주의는 콤플렉스의 다른 면이다. 천황에 대한 맹신은 사회 전체를 체계적으로 권위주의화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근대 일본의 눈부신 성취에 비해 아직도 일본 사회에서 초라한 존재다.

_ 박훈,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읽는 ---

나만의 사적인 미술관 / 김내리

그때 너에게 같이 가자고 말할걸 / 이정환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찾아서 / 존 그리빈

69 / 무라카미 류

비유물론 / 그레이엄 하먼

한국 산문선 7 / 박지원 외

흥미로운 베이지안 통계 / 윌 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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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4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4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4-14 15: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syo님 나이를 공개한거임??? ㅋ 축축축~~~~하해용~~~~ 같이 늙어가니 넘 좋아용. 젊은 그대에게 늙어간다 해 미안해용. 근데 이리 쓰니 기분이 좋아져서리^^;;;;
웃긴 글. 잼난 글. 시적인 글. 잘 쓰는 syo도 멋있다요. 글이란 칼을 어쩜 이리 자유자재로 휘두를까나. 늦었지만 케익 투척🎂🍰🧁아스크림도🍧🍨🍦

syo 2021-04-14 16:04   좋아요 4 | URL
살 엄청 찌겠는데요? 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젊은이는 안 늙나요 어디. 3살짜리도 같이 늙어가는 게 물리 법칙입니다.
어차피 늙는 거 초롱초롱하게 늙어가자구요.

청아 2021-04-14 15: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났지만 생일 축하드림요!!🎂
주성치 말이 나왔으니 영화에 나온 사탕 어렵게 구했어요!🍭 요기요^^* 이거 드시고 앞으로도 많이많이 써주시길 바람요!🙋‍♀️

syo 2021-04-14 16:05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왜 이렇게들 단 거를 투척하시지? 요즘 살이 자꾸 쪄서 큰일인데.
미미님도 지금처럼 열심히 꾸준히 써주셔요. 저는 어떻게든 살아보겠습니다....

수이 2021-04-14 15:4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쇼 오빠 열네살 수연이라고 합니다 쇼오빠도 나이 까서 저도 나이 깠습니다. 친구가 쇼오빠 생일인데 선물 줘야하지 않을까 하고 어제 연락이 왔는데 제가 그걸 깜박 못 보고 오늘 아침 느즈막히 확인을 하고 어떻게 해 했답니다. 근데 하루 지났으니까 그냥 쌩까 했어요 너무 몰인정했나요;; 그랬더니 아니야 줘야 할 거 같아 하더니 주었나봐요 넌 쇼오빠 생일인데 뭐 안 주니 그래서 아 난 그냥 쌩깔래 오빠도 내 생일에 그냥 생일 축하해 하고 말았던 거 같아 했죠 하지만 오빠 실은 제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거 잘 아시죠. 내년 오빠 생일에는 제대로 챙겨줘야겠다 싶어서 달력에 커다랗게 쇼 생일 해놨어요. 이러고 또 내년에 깜박할지 모릅니다만 내년에는 근사한 선물을 드릴게요. 오빠는 할 일이 참 많을텐데 대체 언제 이렇게 책 읽고 글 쓰고 공부하시고 그러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말해봐, 넌 쇼가 아니지?) 그럼 오빠 한살 더 나이 잡수셨으니 몸 건강에 더 신경쓰시고 슬럼프도 얼른 내다버리시고 (슬럼프 왔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그래도 읽고 쓰고 다 하시네요 거짓말은 참) 유쾌하고 상쾌하고 밝은 쇼 할아버지 아니 오빠가 되시기 바랍니다. 해피뻘스데이투유!!!!

syo 2021-04-14 16:24   좋아요 8 | URL
안녕, 열네 살 수연아? 우리 수연이 오빠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참 어려서 오빠 당황했네? 원 녀석.....

오빠가 100일만에 걷어차인 첫사랑 말고 그 다음 사랑이랑 한 2년쯤 만나고 결혼했으면 지금쯤 수연이 만한 딸이 있을 건데, 오빠가 말 놔도 되지? 어른이 말하면 안 되도 그냥 되는 걸로 하렴. 그게 조선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우선 오빠 생일은 딱히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단다. 오빠는 앞으로 한 80년 정도 더 살 작정인데, 매번 생일 챙겨 먹을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진저리가 나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내년에도 대충 그냥 뭉개면 된단다. 뭐 사는 게 다 그런건데, 우리 수연이도 좀 자라면 알게 될 거야.

오빠가 수연이 생일에도 그냥 축하해 하고 넘어간 게 미안해서 몇 가지 좋은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니까 새겨 들으렴.

우선 우리 수연이가 내년이면 열다섯이 될 거고, 아마 그때쯤 되면 세상 모든 게 다 틀려먹은 것 같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삐뚤어지고 싶고 겁나 이상한 시가 쓰고 싶어지기도 할 거야. 어른들은 그걸 중2병이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수연아, 너도 10년쯤 지나보면 알게 되겠지만, 틀려먹은 건 열다섯의 너고 열다섯의 너를 스물다섯의 너조차 이해하지 못할 거란다. 써놓은 시는 겁나 쪽팔릴 거니까 절대 인터넷 같은데 올리지 말고 일기장에 고이 적어놨다가 불싸지르렴.

그리고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이제 고등학생이 될 텐데, 학생의 본분은 공부란다. 연애 같은 건 대학가서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오로지 공부, 공부 뿐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줄게. 이거 남들 잘 모르는 건데. 바로 국영수를 중심으로, 교과서 위주로 하는 거란다! 놀랍지? 우리 수연이 오빠 말 듣고 공부 열심히 하려무나. 안 그럼 한 20년 뒤쯤에 오빠처럼 백수 된다?

마지막으로,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 오빠 때는 말이야, 엄마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었어.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단다. 항상 엄마 아빠 말씀을 잘 따르는 청소년이 되려무나. 너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렴.

오빠가 말이 너무 많았지?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운 마음에 말이 길었네. 앞으로는 우리 수연이 말대로 유쾌하고 상쾌하고 밝은 와중에 닥칠 때 닥칠 줄 아는 쇼 할아버지가 되도록 할게. 그럼 안녕.

라로 2021-04-14 17:42   좋아요 3 | URL
아이 이거 뭐야! 페이퍼보다 더 재밌어.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암튼, 생일 축하해 (왕누나라도 반말로 하면 안 되지요?) 직접 만나서 축하해 주고 싶은데 우리 달덩이처럼 하얀 이쁜 토비님!!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syo 2021-04-14 17:22   좋아요 2 | URL
이런, 라로님 사람 잘못보셨네요.
저는 하얗고 이쁘지 않구요. 굳이 따지자면 거무튀튀한 편입니다.
그치만 약간 둥글긴 한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로 2021-04-14 17:43   좋아요 2 | URL
댓글 달았다가 삭제하고, 달았던 것도 좀 수정했어요.. 무례한 것 같아서,, 물론 토비님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syo 2021-04-14 17:46   좋아요 2 | URL
응? 반말이 존댓말이 됐네 ㅎㅎㅎㅎ 뭐하러!
원래 삭제한 댓글은 보지도 못했어요.

‘야이새끼야‘ 안 했죠? 그럼 딱히 무례한 거 아니었을 거야 ㅋ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4-14 1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syo님 어제 생일 잘 보내셨나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syo 2021-04-14 16:19   좋아요 5 | URL
ㅎㅎㅎㅎ 자기 손으로 미역국 끓여서 잘 먹고 잘 보냈다고 합니다^-^

2021-04-14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4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04-14 1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게 잘쓰시는 syo님~저도 늦었지만 생일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글 잘 읽겠습니다 ㅎㅎ

syo 2021-04-18 01:36   좋아요 0 | URL
제 쪽이야 말로 늦었네요 ㅎㅎㅎ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1-04-14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하루 늦었지만 저도 생일 축하드려요!!단 건 많이 받으신 것 같으니 전 꽃으로 🌺🌸🌼🌻
syo님 꼰대빙의 넘 자연스럽네요 ㅋㅋㅋㅋ

syo 2021-04-18 01:37   좋아요 1 | URL
하루 늦은 댓글에 3일 늦은 대댓글을 달았으니 저야말로 오랑캐놈입니다. 용서하소서 ㅎㅎㅎ
누구나 저 정도 꼰대쯤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거 아니었나요? ㅋ

바람돌이 2021-04-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말로만 생일 축하드려요. ^^ 읽는 건 쉬운데 쓰는 건 어려운 사람은 4년동안 이런 페이퍼 500개 못써요. ㅎㅎ 저처럼 신변잡기로 얼렁뚱땅 갖다 붙이는것도 아니데 말이죠. 생일 맞아 자신감 충천 레이저 빔 쏩니다. ^^

syo 2021-04-18 01:37   좋아요 0 | URL
사흘이나 지나서 댓글 확인하네요. 자신감 충전 레이져빔 다 식었겠다..... 그래도 냠냠 맛있게 먹었습니다.
모래요정 님 늘 감사합니다요^-^

psyche 2021-04-15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드려요! 저는 맨날 syo님 읽으시는 책의 양에도 놀라지만 어쩜 이렇게 글을 재미나게 잘 쓸 수 있을까 놀라는데 이런 겸손의 말씀을!

얄라알라 2021-04-15 14:50   좋아요 0 | URL
syo님의 글을 읽다보면 이상한 나라 앨리스 모험 다녀오는 기분, 짧은 시간 이상한 나라에 휘릭^^ 정말 어찌 이렇게 글을 잘 쓰실 수 있을까, 이 많은 알라디너들 홀릭시키시는 syo님 생일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syo 2021-04-18 01:38   좋아요 1 | URL
과찬의 댓글에 과과찬찬의 대댓글이 더해져서 저의 몸둘바가 소멸되었습니다.
3일이나 늦게 확인했는데도 부끄러움이 식지 않고 뜨끈뜨끈하네요.

프님도 북사랑님도 감사합니다^-^

감은빛 2021-04-25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잔인한 달이라고 불렀던 4월에 태어나셨군요. 유난히 슬퍼해야 할 일이 많은 4월인데, syo님께선 또 한 해 늙었다는 슬픔을 겪으셨네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가족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생일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곤란함을 피하고 있어요. 내가 누군가의 생일을 챙길만큼 부지런하지 않고 살가운 성격이 아니니, 누군가가 내 생일을 챙기지 못하게 만들어 서로 안 챙기는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죠. ㅎㅎ

syo 2021-04-26 10:16   좋아요 0 | URL
오, 속깊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비공개 전략을 택할까 봐요.

그러나 또 쓸 거리가 없다보면 생일이라도 팔아서 쓰려고 하겠지요..... 나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