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컬이코노믹스

 

 

 

1

 

백수에게 연휴란 휴일이 아니라 노동의 중첩이었다. 은 명절 연휴를 맞아 대구가 아닌 성남행을 택했고, 덕분에 syo는 혼자 있을 때보다 두 배 이상의 요리와 두 배의 설거지와 세 배의 빨래와(얜 왜 이럴까) 일곱 배 정도의 인간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했다. 아오, 저 가부장가장 새끼. 심지어 두부는 나중에 니 혼자 먹어라-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바람에, 신에게는 아직 3kg의 두부가 남아 있사옵니다…….

 

사람 난 자리는 몰라도 든 자리는 안다더니. 진짜 자립해야 돼. 내가 돈만 있었으면 저런 화상이랑 같이 안 살 것을. 우리 관계는 입장 바꿔서 내가 돈을 벌고 얘가 살림을 해도 내가 빡치는 불평등 구조다. 아주 가끔 생색이라도 내듯 설거지를 하긴 하는데 세척이 끝난 프라이팬을 검지 손가락으로 주욱 밀어보면 십중팔구 손끝에 기름이 맺힌다. 세탁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을 테고, 내가 허공에 수건을 탁탁 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방안의 그는 기척이 없다. 결국 나 혼자 두 명분의 옷과 수건과 속옷을 다 널고 이제 남은 양말들(나는 백수라 나갈 일이 없어서 양말 빨래는 100% 그의 것이다)을 얹으려는 찰나, 방문을 스윽 열고 나오더니 양말 두어 개 건조대에 띡 걸쳐 놓는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그러고는 괜히 널려 있는 수건의 균형을 맞추는 척, 팬티들의 각을 잡는 척 건조대 근처에서 십몇초를 머물더니 나와 슬쩍 눈을 마주치고는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노동량은 최소화, 양심에 밥 주기는 최대화하는 그의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마인드는 정말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뿐이랴. 물건 쓰면 제 자리 두는 법이 없다. 벨트를 풀어 아무 데나 던져놓고, 드라이를 하고 드라이어를 아무 데나 던져놓는데, 그 두 아무 데나가 또 기가 막히게 겹치는 바람에 벨트가 완벽한 위장술을 발휘해 드라이어 선 속에 숨었다. 그걸 끝내 못 찾고 자는 나를 깨워 내 벨트를 빌려서 차고 출근한다. 치우고 정리하는 사람은 늘 따로 있는 법이다. 지가 무슨 엔트로피의 화신인 줄 아나보다. 같이 회사 다니던 시절, syo10시까지 야근하고 11시에 집에 돌아와 보면 테이블 위에 라면 먹은 흔적들 그대로 올려놔서 온 집에 라면 냄새가 진동을 한다. 보면 방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자고 있다. 겁나 지치고 짜증 난 목소리로 야- 한 음절 내뱉으면, 주인마님 드실 수정과에 침 뱉다가 걸린 삼쇠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아, 치운다는 게 그만 깜빡 졸았네- 운운하며 느릿느릿 고무장갑을 낀다. 누운 건 존 게 아니지, 적극적으로 잔 거지. 퇴근하고 7시에 라면 먹었는데 11시가 깜빡은 아니지, 질 좋은 수면이지. 그리고 삼쇠 놈이 씻은 그릇과 냄비는 어차피 내가 쓰기 전에 다시 설거지를 하게 될 것이다…….

 

연휴가 끝나면 이혼이 급증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통계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통계도 필요 없게 되었다. 바로 여기, 내가 온몸으로 그 주장을 뒷받친다…….

 


 

  공갈협박범 딜레마의 결론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비합리적인 상대에 맞서 합리적으로 싸우는 것은 종종 비합리적이다.

  2. 비합리적인 상대에 맞서 비합리적으로 싸우는 것은 종종 합리적이다.

  3. 이 게임(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상황들)을 숙고해보면, 게임에 임하는 합리적 방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심지어 '합리적'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4. 입장을 바꿔 생각하며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과 상대는 결국 다른 사람이다. 상대가 어떤 것에 반응하고 왜 반응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주어진 상황에서 남들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_ 하임 샤피라, n분의 1의 함정

 

타인과 함께 사는 일은 서로의 생활 습관,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인식과 시선의 차이를 알아차리면서 화들짝 놀라는 일이 아닐까. 놀란 뒤 필요한 건 서로에게 맞춰 가려는 의지와 노력이다. 병아리의 말처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정! !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노동이라면, 정말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 열심히 노동하겠다는 의지와 같은 말이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감정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의 다양한 노동을 어느 한쪽만 감수해선 안 된다. 사랑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노동이 서로를 살아 있게 하니까. 제발 함께 사랑(노동)해 주세요.

_ 홍승은,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2

 

syo는 많이 읽는 편이다. 권 수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많이 읽건 적게 읽건 이미 독서의 양에 집착 중인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주제는 언급 거리 자체가 되지 않는다. syo는 그냥 읽는데, 어떤 날은 많이 읽는데도 더 많이 읽고 싶고, 어떤 날은 면적을 줄이고 줄여서 점처럼 뾰족한 독서를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 걸로 보면 어떤 날은 권 수에 집착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떤 날은 그러지 않는 것도 같다. 집착은 있는 것 같은데 집착 자체에 대한 집착은 없는 듯. 그럼 뭐, 건강한 축이다.

 

syo는 부지런히 쉬운 책을 읽는다. 원전을 사 놓고도 개론서를 읽고, 가끔 쓰레기를 만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에세이를 장복 중이며, 뭘 다뤘건 만화라면 일단 펼쳐는 본다. 깊이 있는 책은 깊겠지만 행복은 깊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 지금 너무 좋다, 그냥 좋다, 행복하다, 하는 순간적인 감정 상태를 자주 만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은 깊이 있는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물론 읽어도 좋겠지만.

 

읽으면서 내가 읽는 방식과 목적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는 일은 좋다. 그건 무조건 이득이다. 심지어 읽는 시간을 좀 깎아서 생각하는 데 쓰더라도 너끈히 남는 장사다. 이게 무슨 말인지, syo가 뭐 어떤 감정을 말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걸 굳이 말로 하려다 보니 그 표현이 얼마나 서투르고 또 부정확한지, 읽는 사람들은 다 알 거다. 그게 재밌다.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데 그걸 잘 표현을 못하네, 혹은 쟤가 표현은 잘 못하는데 그게 어떤 말인지는 알겠네. 세상에는 표현을 잘 못해내기 때문에 그 못함까지 포함하여 그 못함을 유발하는 뭔가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게 만드는 경험들이 있다. 아는 사람들끼리 넌지시 주고받는 마음. 말로 하는 데 만져지는 것 같은 것. 카오스의 시그널.

 


 

모두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이미지에 지쳐 이제는 자신만의 알맹이를 돌보고 싶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영상 콘텐츠 시장은 이제 그 기술의 정점과 함께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더 큰 기술력을 자랑하는 매체가 우리를 한순간에 장악해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시노가 서로의 삶을 바라보는 진실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글을 읽고, 서로간 격려의 말을 주고 받고, 이를 곰곰이 되새기며 명상이나 수행을 하려는 움직임도 많아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화면 속 이야기들도 모두를 구해내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우리의 시선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그럴싸한 사진과 영상을 제법 잘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은 결국 진심과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의 어여뿐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서사를 진실하게 담고 있는 책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_ ()(월간지)편집부, Chaeg 2021. 1. 2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과 방식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알 수 있게 해주면서 동시에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서부터 더 넓고 깊은 인식이 시작된다.

_ 한형식, 마르크스 철학 연습

 

 

 

3


 

여자들이 남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공적 질서 안으로 들여지는 것과, 공적 질서로부터 여자들이 배제되는 것, 이 두 가지 상황은 모순적이지 않고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존재했다면 이것들은 지금만큼 강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명제를 주장할 때, 저쪽은 두 번째 명제를 내세우며 부인할 수 있고, 우리가 두 번째 명제를 주장하면 저들은 반대로 첫 번째 명제를 들먹이며 부정할 수 있다. 우리가 두 가지 말을 하면 그들은 비논리적이라는 비논리적인 말로 도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언뜻 보면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저 두 명제가 실제로 공존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으로부터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다. 마치 적대하는 두 나라의 군부 세력들이 군비축소를 외치는 자국 시민들로부터 자신의 덩치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듯.

 

 

 

--- 읽은 ---



45. 서른과 마흔 사이

오구라 히로시 지음 / 박혜령 옮김 / 위너스북 / 2020

 

스탠퍼드 설립에 관한 일화는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지 오래지만, 책 쓰다가 구글에 한 번 때려 넣어보지도 못할만큼 이런저런 업무로 많이 바쁘셨나 보다. 출간 당시 55세였던 저자가 그때까지도 바빴다는 건 좋은 시그널이다. 저자가 시키는 대로 30대를 보내고 나면 나도 55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 있겠구나. 심지어 이런 낭설(들어만 봐도 딱 이상하다)의 진위 같은 거 확인해보지 않고 인용하는 세심하지 못한 일처리 감각을 지녔음에도 저리 바쁠 수 있다니, 작은 단점 같은 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지혜가 듬뿍 담긴 책이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긴다.

 

인생의 진검승부는 30대에 펼쳐진다. 20대에는 제아무리 빨라봤자, 또래보다 3~4년 정도 앞설 뿐이다. 하지만 30대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30대의 1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의 모두가 결정된다. 30대에도 여전히 20대의 혈기와 낭만적 생각, 구체화되지 않은 막연한 비전과 꿈을 고집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다시는 특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_ 오구라 히로시, 서른과 마흔 사이

 

그러나 30대가 다 저물어 가는 마당에 보면 이 문단은 뭔가 저주에 가깝다?

 

 

 


46. 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 / 2020

 

딱히 감상이라고 할 만한 게 생기지는 않는 독서였다. 책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기보다 형식이 강연 형식이라는 것, 국제정치와 관련한 지식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 뭐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 각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교양의 바운더리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국제정치에 관한 지식이 그 안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어떤 의미일까. syo의 교양나라는 국제정치보다는 양자역학에 노른자를 내주는 약간 변태 같은 곳이라서, 그냥 흐음- 흐음- 하는 독서로 마무리 되었다.

 

  저는 도덕적이라고 간주되던 세대의 정치적실패가 우리 사회에 냉소주의­무력감­패배주의를 팽배시킬까 두렵습니다. 86세대의 마지막 시대적 과제는 다음 세대에게 지옥(헬조선)을 물려주지 않는 것, 다음 세대에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렇게 기품 있게 자신의 자리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86세대 등 기성세대는 68혁명의 부재가 자신을 어떻게 기형화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세대는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적 변화에 동참하고,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인류 역사는 해방의 역사였고, 모든 해방은 자기 해방이었습니다. 흑인을 해방시킨 것은 흑인이며, 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여성이었고, 학생을 해방시킨 것은 학생이었습니다. 누구도 대신 해방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_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47. 징구

이디스 워튼 지음 /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9

 

역자 후기에 따르면 이디스 워튼은 생전에 친구인 헨리 제임스 짭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제임스 녀석도 친구가 됐으면 아니라고 해줄 법도 한데, 그런 분위기에 은근슬쩍 동조했다는 듯. 그런 정보를 모르고 읽었는데 진짜 헨리 제임스의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인물의 감정과 생각이 변화하는 한 계단 한 계단의 높이가 낮아서 어떨 때는 마치 언덕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흐름 같은 것. 흉내낸다고 될 게 아닌 이런 능력이 닮은 걸 놓고 아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헨리 제임스가 가지고 있었던 재능을 이디스 워튼도 갖고 있었던 것 아닐까. 오히려 발랄한 데가 있는 이디스 워튼 쪽이 나는 더 좋았다.

 

  “처음엔 다 그렇게 좀 아픈 법이지.”
  “아빠!”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자 예상치도 못했던 표정이 담뱃불 빛에 드러났다.

  “나도 다 겪은 일이거든.”

  “? 아빠가요?”

  “내가 말 안 했던가? 아빠도 한때 소설을 썼었어.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땐데, 의사 되기가 그렇게 싫더라. 그래, 난 천재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소설을 썼지.”

  의사가 말을 멈추자 테오도라는 연민의 정을 담아 조용히 아버지를 붙잡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미쳐 날뛰는 파도 속에서 구원의 손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빠, 아빠!”

  “일 년 걸렸어. 일 년 내내 정말 힘들여 글을 썼지. 다 썼는데 아무데서도 출판을 안 해주더구나. 그때 집으로 돌아오던 걸음이 생각나서 널 마중 나왔지.”

_ 이디스 워튼, 에이프릴 샤워

 

 

 


48.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9

 

숨만 쉬어도 고통받는 이 땅의 천만(?) 비혼/미혼인들이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 최대의 잔소리/헛소리/개소리/뻘소리/쉰소리 폭격이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다들, 무고하신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쏘쏘. 어떻게든 살아냈습니다. 이제 추석까지는 한 세월이 남았으니, 우리는 충분히 먹고 넘치도록 마시면서 최선을 다해 행복의 적립금을 쌓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수많은 다른 미혼/비혼인들의 말을 듣고 글을 읽으며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불안을, 그러니까, 내가 좀 이상한 게 아닐까, 남들 다 사는대로 못/안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아닐까, 따위의 어두운 생각들을 씻어냅시다. 모양도 꼴도 우리는 모두 어슷비슷합니다. 이렇게도 다들 하루하루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또 누구는 상대적으로 좀 더 진지하고, 누구는 또 좀 더 웃기고 그럽니다. 그러는 와중에 진지하던 사람이 좀 웃긴 일을 벌이기도 하고, 웃기던 사람이 좀 진지해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삽니다. 나는 문제 없다고 파워당당하다가도, 어쩐지 세상 행복한 저것들을 보면 괜히 얄미워 끝없이 시니컬해지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내가 지닌 넓고 시원한 자유의 촉감과 면적에 소스라치게 행복해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다들 그렇게 유사합니다.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지하철을 타고서 경기도 평택시로 내려간다. 가양역에서 9호선을 타고 노량진까지 가서, 노량진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평택역에 내린다. 노량진역 에스컬레이터, 내 앞에 선 남자와 여자가 손을 꼭 잡고 있다. 남자는 회색 코트를, 여자는 분홍색 코트를 입었다. 남자는 못생겼고, 여자는 그저 그렇다. 명절 연휴 첫날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손을 잡고 있다니. 지난달에 결혼한 모양이지. 아니나다를까 여자의 손가락에서 다이아 반지가 빛나고 있다. 여자여, 너는 시댁에 가는가. 시댁에 도착하면 너희는 붙잡은 그 손을 놓게 되겠지.

  "이제 왔니? 좀 빨리 오지 않구선."

  너는 시어머니의 빈정거림에 서둘러 분홍 코트를 벗고 앞치마를 두를 것이다. 그러고는 거치적거리는 반지를 빼내어 주머니에 넣겠지. 너의 다이아 반지는 컴컴한 주머니 속에서 빛을 잃는다. 너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 같던 남자는 이제 너의 손이 아닌 리모컨을 잡고서 네가 아닌 텔레비전을 본다. 여자여, 너 전 부치러 시댁에 가는가.

_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49. 퀀텀

로랑 셰페르 지음 / 이정은 옮김 / 과포화된 과학드립 물리학 연구회 감수 / 한빛비즈 / 2020

 

양자역학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시도는 양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어떤 철학자의 개론서보다, 양자역학을 개론하는 책이 이제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읽으면 된다. 당연히 한 권 한 번 읽어서는 모르겠고, 될 때까지 그냥 읽고 까먹고 읽고 까먹고 하다가 어 됐네, 하면 되는 것. 그 많고 많은 책 중에 그래도 빼도 될 책을 골라본다면, 아마 이 책은 절대 거기 끼지는 않을 것 같다.


감수자 네이밍 센스 지렸다.

 

우리 지구인은 삶을 평면으로만 인식합니다. 참 이상한 습성이죠. 지평선을 보며 미래를 읽으려 하고, 또 미래를 살피며 스테이크가 완벽하게 익었는지 알아내려 하죠. 머리 위에 있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린 위를 가끔 흘끗 쳐다볼 뿐이죠. 몇몇 천진한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지구의 안정적인 유한성 너머를 의구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실존적인 아찔함에 부딪치기를 꺼리죠. 그래서 자신들의 평면적 문제로 돌아갑니다. 구름, , 태양. 이 정도가 우리의 수직적인 시야와 하늘, 그 너머의 방대함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전부죠. 우리는 소우주에 틀어박혀 무한히 큰 것과 무한히 작은 것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카망베르 치즈가 투명한 덮개 속에서 숙성하는 것처럼요.

_ 로랑 셰페르, 퀀텀

 

 

 


50. 자본주의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본자본 사는 우리는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 자본주의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만 같지만 막상, 그래서 자본주의가 대체 뭔데? 하는 질문을 들으면 그, 그거슨- 하면서 꿀도 안 먹었는데 말을 먹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우리는 하루 중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빈도가 더 크고, 자본주의가 다 그런거지- 하는 말을 체념과 달관과 풍자가 섞인 현자의 말로 받아들이는데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는 것도 같다. 자본주의, 대체 그게 뭐길래?

 

이 책에 따르면, 놀랍게도 자본주의란 딱히 한 번도 제대로 정의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수많은 사람이 정의하였지만 그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늘 있어왔고, 그 포함관계를 둘러싼 싸움이 당연히 정치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기도 해서, 정의 대상이 정의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바람에, 결국 모두가 아는 듯 모두가 모르는 희한한 단어가 된 듯하다. 나는 그런 단어란 오직 사랑뿐이라고 생각했는데, , 역시 자본주의. 사랑보다 더 많이 입에 오르는 자본주의.

 

스피노자의 말처럼 어떤 것을 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것도 함께 밝히는 것이다. 이 모든 현실 자본주의체제들을 순수한 시장 경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본주의 범주에서 배제하려 든다면, 자본주의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처럼 역사에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자본주의라는 명칭으로 부르다가는 자칫하면 파시즘 경제, 소련 경제, 최근의 중국 경제까지 모두 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달게 될 위험이 있다. ‘자연적 자유의 체제로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우파 혁명의 불을 댕길 이상과 당위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경제 체제에 대한 규정으로서는 최소한 앞에서 본 것과 같은 수많은 논쟁에 휘말려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_ 홍기빈, 자본주의

 

 

 

--- 읽는 ---

잊혀진 여성들 / 백지연 외

돈의 속성 / 김승호

김상욱의 과학공부 / 김상욱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 유민석

한 번 보고 바로 써먹는 경제용어 460 / 신성출판사 편집부

비전공자를 위한 이해할 수 있는 IT 지식 / 정지훈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 / 아리엘 수아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 오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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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15 1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칙대로라면 제가 쇼님이 되어 삼씨를 미워해야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도 삼씨가 그렇게 막 밉지는 않고요. 그건 다 쇼님의 문장력과 삼씨에 대한 따뜻한 마음 때문이리니.....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syo 2021-02-15 11:0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들이 이렇게 옹호해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삼이는 한껏 당당하게 저러고 사는 중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무리 내가 너를 못나게 써도 사람들은 너를 좋아하더라고...

청아 2021-02-15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밤에 저의 ‘그‘에 관해 글을 써두었는데 언제 풀어야할지 고민하던차에 이 글을 읽으니 부담감이 좀 사그라드네요ㅋㅋㅋㅋ syo님 얄짤없으실것 같은데 의외로 봐주시는 거 같아 놀랍고 그런 와중에도 깜빡졸았다는 핑계에 대한 분석이 너무 재밌어요! 책을 빨리 내주시길 바래봅니다.👍

syo 2021-02-15 11:08   좋아요 2 | URL
관대한 것은 왜냐하면 생계비를 오직 저새끼가 대기 때문에 ㅋㅋㅋㅋㅋㅋ 참는 거라기보다 인내당하는 중이랄까요...

행복한책읽기 2021-02-15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syo 글은 언제나 맛있음. 체하지 않으려 천천히 먹는 중 ^^

syo 2021-02-15 16:3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제 일상의 소소한 고뇌가 그나마 조금의 즐거움이라도 된다니 그것참 다행이지요ㅋㅋㅋ 그마저 아니었으면 삼이 저거 벌써 이 세상 사람 아니었을텐데...

blanca 2021-02-1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은 ㅋㅋㅋ 우리집에도 한 명 있어요. ㅋㅋㅋㅋ 저 책 마흔과 쉰 사이는 없나요? 아, 그리고 나는 syo님이 서른 언저리인 줄...글 속 에너지가 왠지 그래서요...

syo 2021-02-15 16:38   좋아요 1 | URL
1가정 1삼 이론.... ㅋㅋㅋㅋㅋ
평생 이 모양으로 좀 철없이 살 모양이에요 ㅎ 저 자신은 좀 즐기는 중입니다...ㅎㅎ

stella.K 2021-02-15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대구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다시 올라 온 건가요? 제가 요즘 스요님의 근황에 대해 너무 띄엄띄엄 아는가 봅니다.ㅠ
3.1절도 다가오는데 하루라도 빨리 스요님의 독립을 지지합니다.
스요님은 깔끔하시고, 삼님은 너무 드러분.ㅎㅎㅎ
아, 어쩐담...ㅠㅠ

syo 2021-02-15 16:4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드러운 놈이랑 같이 사는 깨끗한 놈의 스트레스도 무시할 만한 건 아니더라구요 ㅋㅋ

대구는 잠깐 다녀온 거구요 ㅎ
syo의 근황 같은 거 띄엄띄엄이라도 아시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ㅋ 그게 뭐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5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밉다밉다 하면 더 스트레스니까 사이좋게 지내요 ㅎㅎㅎ사랑하며 지내란 소린 차마 못함....오우삼님이어...

syo 2021-03-01 11:18   좋아요 1 | URL
무려 보를만에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댓글만 읽고는 제가 무슨 말을 해놨는지 기억도 못할 지경이네요.....

감은빛 2021-02-21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과 마흔 사이]를 쓴 저자가 55세에 책을 출간했단 말이죠.
근데 왜 서른과 마흔 사이를 논했죠?
마흔과 쉰 사이가 아니고 말이죠.

그나저나 백수가 되셨는데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군요. 언제?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결혼을 포함해서)은 정말 힘들고 피곤한 일이죠.
더구나 남성으로서 같은 남성과의 동거라면
(물론 당연히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럼에도)
거의 대다수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선배랑 1년, 후배랑 1년.
이렇게 약 2년을 같이 살아봤는데, 진짜 피곤한 일이었어요.
게다가 저랑 함께 살았던 후배 녀석은 syo님의 동거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게으름과 귀차니즘과 더러움을 장착했기에 삶이 고통이었죠.
당시 우리집엔 세탁기가 없어서 모든 빨래를 손빨래로 해야 했어요.
그 시절엔 지금처럼 코인 빨래방이 생기기도 전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죠.
근데 그 녀석은 그냥 빨래를 쌓아놓고 안 하더라구요.
속옷과 양말은 한 번 입고 던져 놓았다가 일주일쯤 후에 귀찮다고 그냥 버리고
내 속옷과 양말을 빌려 달라고 난리치고,
겉옷은 던져놓았다가 입을 옷이 없으면 냄새 맡아보고 그냥 다시 입더라구요.
근데 나중에 한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빨래 쌓아놓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더니,
담배 냄새로 빨래 썪어가는 냄새를 지우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1.5리터 콜라 페트병 2/3를 자른 높이까지 담배꽁초와 시커먼 액체가 가득찬 재떨이를
벗어서 던져놓은 옷들 앞에 갖다 놓았어요.

한 번은 제가 집에 다녀온다고 1주일 동안 자취방을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세상에 현관 문 앞에서부터 방까지 딱 한 사람 지나갈 자리를 통로로 남겨두고,
나머지 공간을 죄다 쓰레기로 채워놓았더라구요.
태어나서 그런 장면을 처음 보았기에 그 충격이 너무나도 컸어요.

그런 인간하고 1년을 같이 살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ㅎㅎ

얄라알라 2021-02-22 03:02   좋아요 0 | URL
감은빛 님도 [서른과 마흔 사이]를 콕 집어 이야기하셨네요?^^ 저도 syo님 리뷰들 읽으며 45번에서 동공지진이 가장 크게^^;;;이유는 굳이 말 안 할까봐요

그나저나 일종의 저장강박 성향의 친구분과 지내셨군요...참 많이 인내하셨겠어요. 휴.

syo 2021-03-01 11:22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잠적하고 공부하느라.....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양태란 정말 놀랄 정도로 다양하죠?
전 가끔 쟤는 나보다는 금수에 더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쪽에서도 저를 비슷하게 보겠지만.....

사람은 역시 같이 살아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아님 그런 거 모르고 평생 좋은 꼴만 보고 살다가 가는 것도 좋겠구요....

어쨌든 이번 동거가 끝나면 왠만하면 혼자 살아보자는 생각입니다 ㅎㅎㅎ

 

 

 

그믐

 

 

 

1

 

가만히대신에 가만가만이라고 쓰면서 차근차근 가만가만해지는 내가 나는 좋아서, 주로 밤에 글을 씁니다. 갈팡질팡하는 말끝의 긴 꼬리를 잡고 단번에 갈 수 있는 의미까지 휘휘 에둘러 도착하는 일이 나는 기껍고 때로 설레기도 합니다. 나는 나를 알 수 없어서 미칠 것만 같던 밤들을 건너는 방법으로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가는 말의 쪽배를 집어타 보기로 한 겁니다. 단어는 종종 식은 촛농처럼 내 밖의 어둠이나 내 안의 어둠이 다녀간 흔적이 됩니다. 그 긴긴 몸피에 촛농을 떨어뜨리면 따갑다는 듯 간지럽다는 듯 괴롭다는 듯 황홀하다는 듯 몸부림치는 문장을 의뭉스러운 눈을 하고 지켜보는 일이 나는 좋습니다. 이렇게 문장과 나는 서로를 괴롭힘으로써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딱지를 떼어내면서 서로를 애무합니다. 말해지는 것들이 있어야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보이겠으므로 말하고,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야 말해지는 것들이 선명하겠으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일에 관해서는 우리 둘의 생각이 같습니다. 잘 없는 일입니다. 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밤입니다. 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건 늘 밤입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쓰는 대신에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 것으로 어떤 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밤이 당신의 방 창문을 톡톡 두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지나가는 비라고 여겨도 좋겠습니다. 자꾸만 지나가겠습니다. 가만히, 아니, 가만가만 그 소리를 들어주세요. 내가 던진 말의 긴 꼬리가 서울을 크게 에둘러 당신의 몸피에 도착하는 밤이 기껍고 설렐 수 있도록, 따가움과 간지러움과 괴로움과 황홀함을 조금 준비하였으니 부디 집어타고 좋은 꿈 가득한 좋은 연휴 보내시길.

 

 



누구나 흉중에 언덕과 골짜기와 연못의 심상이 있을 겁니다만 그동안 고심이 깊어 나한테 그 어떤 선물 한번 하지 않고 살았어요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을 수 있다면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 실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게 찰랑거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연못의 감정이라고 부를까 해요

_ 안도현, 연못을 들이다부분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은 자신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그런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내가 옛날에 당신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아요?" 캐서린이 말했다. "수업시간에 앞에 서 있는 당신 모습은 아주 크고 사랑스럽고 서툴러 보였어요. 나는 당신에게서 뭔가 격렬한 것을 보고 싶다고 갈망했는데, 당신은 전혀 몰랐죠?"

  "몰랐소." 윌리엄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주 정숙한 숙녀라고 생각했거든."

  그녀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요, 정숙하고 말고요!" 그녀는 조금 차분해져서 과거를 돌아보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숙함을 던져버릴 이유가 없을 때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정숙해 보이는지!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가끔 내가 세계 최고의 헤픈 여자가 된 것 같아요. 헤프지만 열정적이고 신실한 여자. 그 정도면 정숙해 보이나요?"

  "아니." 윌리엄은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_ 존 윌리엄스, 스토너

 

 

 

2

 


텍스트에서 말하는 것만큼이나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저 그 주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주제가 말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가 훨씬 위험하다. 학자의 구력과 학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더욱 위험하다. 모든 논리는 그 가장 기저에 전혀 의심받지 않는 명제를 정초하고 그 위로 다른 명제들을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축조되기 때문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건물주는 자신의 기반이 되는 명제가 공격받는 일에 점차적으로 더 큰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100층을 쌓아올린 탑을 다시 처음부터, 혹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지어 올리라는 요청은 누군가에게는 생의 부정과 필적한 크기의 공격일 수 있다. 말하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도 없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기 위해 박아놓은 말뚝을 뽑겠다고 밝히면서, 책은 시작한다.

 

 

 

--- 읽은 ---


42. 분자 사용 설명서

김지환 지음 / 재단법인 카오스 기획 / 반니 / 2018

 

과학책은 참 잘 모르겠다. 과학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읽는 건데 쌓여 있는 지식이 없으니 읽기 어려운 건 물론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과학에서 더 그렇다. 나는 아직도 과학책을 읽을 때 주입식 교육과 성적을 받기 위한 암기 위주의 학습이 이루어지던 시절 억지로 만들어 놓은 지식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시간이 지나도 그것들은 남고 새로 읽은 과학책들은 어지간히 좋은 책들이어도 결국 다 사라진다. 뭔가 독하게 덤벼들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쉬운지 어려운지 말하기는 어려운데, 쉽게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말하기는 쉽다.

 

  계가 복잡할수록 그 계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해가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구체적인 경우를 각각 생각해야 합니다. 화학과 생물이 다루는 세계는 물리가 다루는 세계에 비해 복잡하고 따라서 단순화한 몇 가지 법칙과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명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없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_ 김지환, 분자 사용 설명서

 

 

 


43. 루소와의 1시간

이명곤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

 

루소는 너무 예전에 읽어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거대한 명망에 비해서 책 자체는 무릎을 탁 칠만큼 좋은 데가 없었던 것 같다. syo의 소양의 문제이거나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추후 다른 책을 통해 그의 인생사 역정 스토리를 주욱 읽으면서 루소는 더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되었다. 그냥 힙한 찌질이 같았다. 그 와중에 글은 잘 쓰는.

 

루소가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에 분노를 느낀 것은 바로 절대적 상대주의아래 그 근거가 되고 있는 윤리적 이기주의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성찰이 없이 교육에 대해서, 도덕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다양한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이론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그 밑바탕이 되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하다면, 이 이론들은 한갓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_ 이명곤, 루소와의 1시간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한 철학자가 짜장면이라면, 루소는 삼선간짜장곱빼기라고 해도 좋겠다. 심지어 저도 무지한 주제에 그 무지를 모를뿐더러(곱빼기), 타인의 무지까지 비웃고 있다(삼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지만, 그 자연상태에 대해서는 그냥 자기 머릿속으로 이럴 것이다 하고 추측해본 것에 불과하다. 그래놓고 또 데카르트를 깐다.

 

논리, 없다.

 

자연인다른 동물들과의 비교에서 루소가 내린 결론은 자연인은 다른 동물과 평등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에 비해 나약하다고 하는 것도, 반대로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월하다고 하는 것도 사실상 이 둘 모두를 동시에 고려해 보면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자연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사실은 공평한 것처럼사자가 사슴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더거나, 참새가 올빼미보다 더 나쁜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모두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에 불과하다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연 안에서의 모든 생명체와 평등한 것이다. 이는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기 이전의 원시 상태에서의 일종의 이상적인 생태공동체를 가정하게 한다.

_ 같은 책

 

1. 인간이 이런 부분은 강하지만 저런 부분이 약하니까 퉁-

: 이건 사실 논리도 뭣도 아니다. 그냥 자기 생각.

 

2.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니 모두가 평등

: 누가 평등을 저렇게 정의하나. 평등은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이 똑같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선명히 존재하는 곳에 필요하다. 평등의 옳고 그름, 얼마만큼 조절해야 진정한 평등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자는 게 아니라, 평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전제 조건 자체에 대한 인식이 틀렸다.

 

3. 모든 생명체가 사실은 공평하고 사자/사슴, 참새/올빼미의 조건 비교는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 모든 생명체가 사실은 공평하다면, 조건 비교는 당연히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사실 공평하다는 것이 루소라는 인간의 주관적 편견일 때, 이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4.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기 이전의 원시 상태에서의 일종의 이상적인 생태공동체

: 평등에 관한 헛소리에 가까운 정의 덕분에 이런 희한한 결론이 나온다. 늑대가 인간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을 권리와 인간이 늑대의 아가리에 횃불을 쑤셔 넣을 권리가 공평하게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상적인 생태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놀라울 정도다. 아니면, 루소의 책을 읽은 늑대가, 아 그렇구나, 우리는 이상적인 생태공동체니까 내가 인간 너희들에 목덜미를 물지 않을게, 너희도 내 입에 횃불을 집어넣지 않을 거지? 하며 가만히 옆에 서 있는단 말인가.

 

재미있는 건, 루소는 시종일관 여성을 남성과 다른 존재, 달라서 다른 일을 해야 하고, 남자가 하는 공적인 일에는 손을 대서는 안 되며, 남자와 다르게 끓어 넘치는 그 성적 욕망을 억제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자와 사슴과 참새와 올빼미는 퉁치고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자의 행태치고는 놀랍다.

 

물론, 원전을 읽으면 이렇게까지 허술한 이야기를 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 속의 루소가 택도 없는 개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읽던 당시에도 들지 않았으니까. 이제부터 다시 한 번 루소의 책들을 읽어보긴 할 텐데, 뭐랄까, 큰 기대는 없다. 솔직히 말해서, 루소는 죽은 것 같다. 1789년을 위해서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에는 뭐랄까, MS-DOS 같은 느낌이다. 없었으면 안 될 한 획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획의 끝자락이 이젠 여기서 너무 멀게 느껴진다.

 

 

 


44. 죽음의 선고

모리스 블랑쇼 지음 / 고재정 옮김 / 그린비 / 2011

 

잘 나가는 사람들이/만 인정해서 더 힙하게 느껴지는 작가나 책 같은 것들은 늘 있다. 범인들은 그 존재조차 잘 모르고, 그게 또 잘 나가는 사람들한테는 더 열심히 사랑할 이유가 되는. 나만 아는 맛집이 있는데 지금 네게 이 맛집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실은 나는 네가 이 맛을 알기를 원하지 않고 그저 내가 이 맛을 안다는 사실만을 네가 알기를 원하는 그런 맛집이랄까. 워낙 맛집이라 한번 읽어보기 전에는 힙한 척 나대면 안 된다는 소문이 쫘악 퍼지기 전의 벤야민이 그랬듯, 모리스 블랑쇼가 그렇다. 그래서 막 선집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알만한 사람들만 환장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syo는 블랑쇼를 까맣게 몰랐지만 다행히 블랑쇼 블랑쇼 거기 맛집인데- 외치는 철학자 몇 사람에 대한 개론서를 읽는 중이어서, 죽은 지 10년도 안되서 따끈따끈한(?) 이 프랑스 작가가 내 있어빌리티 구축을 위한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책이 나오자마자 사 놓았는데 그게 벌써 10년이다. 지금의 syo는 그때의 어리석은 syo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역시 어리석음이란 상대적인 것이라, 10년 전의 syo가 보기에 똑똑하다 못해 후광이 비칠 정도인 오늘의 syo는 블랑쇼가 보기에는 해파리냉채하고 구분이 잘 안 되는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읽었는데, , 읽었는데. 그밖의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네.

 

그 이야기들을 하는 데 나는 극도의 어려움을 느낀다. 이미 여러 차례 그 사건들에 글의 형태를 부여하려고 시도를 해보았다. 내가 몇 권의 책을 쓴 것은 그 책들을 통해서 이 모두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설들을 썼지만 그 소설들은 말이 진실 앞에서 뒷걸음치기 시작하던 순간에 태어났다. 진실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다. 비밀을 누설할까 봐 두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은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취약했고, 훨씬 교활했다. 이 교활함이 일종의 경고임을 나는 안다. 진실을 조용히 내버려두는 편이 더 품위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 편이 극도로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곧 끝을 내기를 원한다. 끝을 보는 것, 그 또한 품위 있고 중요한 일이다.

_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 읽는 ---

여자들의 무질서 / 캐럴 페이트먼

물리 오디세이 / 이진오

글이 만든 세계 / 마틴 푸크너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 이주윤

서른과 마흔 사이 / 오구라 히로시

n분의 1의 함정 / 하임 샤피라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 고병권

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돈의 속성 / 김승호

에티카를 읽는다 / 스티븐 내들러

홉스 /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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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0 21: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즐겁고 행복 가득한 설명절되십시요!ㅎ 맛나고 영양높은것도 마니 드시고, 두부 억지로 드시지 마시구요!ㅎ

syo 2021-02-11 16:51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도 평화로운 고단백 명절 보내소서....

반유행열반인 2021-02-10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꿈 가득한 좋은 연휴 보내시길.

syo 2021-02-11 16:51   좋아요 2 | URL
꿈보다 좋은 현실 가득한 좋은 연휴 보내시길.

행복한책읽기 2021-02-11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부로 명절 준비 다 끝내고 섣달 그믐날에도 바지런히 읽고 쓰는 syo님. 루소는 죽은 것 같다!! 에 완전 동의👐👐 죽은 자 자꾸 부활시키지 말고, 산 자랑 알콩달콩한 명절 보내시와유~~~~ 그믐날의 syo는 사랑이네요. 사랑꾼 syo님이 갖은 양념 버무린 사랑시를 한껏 뿌려 놓았네요. 이 몸은 그대 글의 황홀함에 올라타 꿈꾸러 갑니다~~~^^

syo 2021-02-11 16:5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두부는 아직 첩첩산중입니다.....
루소는 제 서재에서 정기적으로 야금야금 때려볼까 생각 중입니닿ㅎㅎㅎ
읽기님도 안온하고 뜨끈뜨끈한 명절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1-02-11 0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오늘 서문은 약간 황정은풍의 느낌 물씬입니다. 저는 황정은작가를 아주 좋아하므로, 그러므로 syo님의 오늘 서문도 굉장히 좋습니다. ^^ 스토너는 저도 읽었는데 왜 저는 저런 대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거죠? 이러다간 어디가서 읽었다 소리도 못하겠어요. 내일부터 설연휴 시작이네요. 부디 좋은 시간 되시고 새해에는 복도 듬뿍 받아 하고 있는 공부가 결실을 맺기를 기원합니다.

syo 2021-02-11 16:54   좋아요 1 | URL
풍이라도 황정은풍이라니 영광입니다. syo는 그 누나를 사랑하여 자주 몸부림칩니다....
저는 스토너가 되게 귀엽게 야한 책이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거 늦게 알아가지고 열심히 하는 귀요미 스토너.....
늘 감사합니다. 모래요정님도 축복 가득한 명절 보내세요^^

유부만두 2021-02-12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소 싫어요. 이렇게 루소 책이나 이름만 나오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싫어욧! 하는 제가 루소 보다 더 찌질할지도 모르지만 아 루소 싫어요. 그런데 syo님은 안 싫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급 미소)

syo 2021-02-15 09:48   좋아요 0 | URL
이렇게 명절이 끝나고 나서야 댓글을 다네요.....
루소의 찌질함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ㅎ 유부만두님도 새해 복 잔뜩잔뜩 받으소서!
 

 

RaTOFU‘tin

 

  


그러니까 그게 이틀 전이었지. 쿠팡에서 장을 봤어. 난 분명히 두부를 주문했거든. 근데 두부 가게가 통째로 도착한 거야.


아무래도 클릭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다들 잘 알겠지만, 더블 클릭이라는 게, 그게 되게 섬세한 작업이잖아어쨌든 두부 6kg의 위용은 대단했지. 얇게 잘만 저미면 우리 집 거실을 통째로 도배할 수도 있겠더라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


하지만 내가 어릴 적부터 테트리스에 꽤 소질이 있었거든. 갖가지 모양으로 요렇게 조렇게 잘라서 둥근 플라스틱 통에 물을 채워 담은 후 결국 냉장고에 다 쳐넣을 수 있었지. 냉장고가 콩장고가 되고 말았지만.


근데 어떡하지?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에 든 두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쩐지 포르말린에 담아놓은 라스푸틴의 페니스가 자꾸 떠오른단 말이야. 난 이제부터 저걸 먹어야 하는데. 아무리 늦어도 연휴까지는 다 먹어야만 하는데…….

  



스스로의 허술함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가 발 담그며 살아가는 곳이 실패에 그리 관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_ 김상민, 아무튼, 달리기

 

경험을 해석한다는 말은 모든 경험에 이름표를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뚜렷하게 정해진 답이나 결말은 없다. 우리는 다만 시간과 사건의 끝없는 연속성 안에 존재하고, 순간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품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글도 서둘러 끝낼 필요 없다.

_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코브 씨가 내 동행이에요. 정말 근사한 동행이죠, 코브 씨는. 이렇게 세심하거든요. 맨정신일 때는 어떤지 꼭 보세요. 나도 이 사람이 맨정신일 때 한번 보고 싶네요. 이 사람이 맨정신일 때 누군가는 꼭 봐야 돼요. 기록이라도 남겨두려면 말예요. 그래야 역사의 일부분이 될 테니까, 섬광처럼 짧은 그 순간이 금방 세월 속에 묻혀버려도 영원히 기억될 테니까요. 래리 코브가 맨정신일 때도 있긴 있었다고.“

_ 레이먼드 챈들러, 빅 슬립

 

 


--- 읽은 ---

40.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스티븐 내들러 지음 / 김호균 옮김 / 글항아리 / 2014

 

스피노자는 철학자 가운데 누가 뭐래도 단연 syo의 최애캐다. 이 사람은 멋진 구석이 겁나 많지만, 역사 속 그 누구 못지않게 풍성하고 넉넉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소규모 친구들과 철학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골방에서 렌즈도 갈아가면서 자급자족 어떻게든 안 죽고 살아냈다는 점이 압권이다. syo 같은 나부랭이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스피노자를 최애로 생각하는 훌륭한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그 내새끼 박해부심을 품고 있다. 그 증거로 스피노자를 다루는 모든 책에는 반드시 그 유명한 그의 파문 판결서(?)가 첨부되어 있다. 읽어 보자.

 

스피노자는 파문당하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추방당해야 한다. 천사의 법령과 신성한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서, 축복의 근원인 신의 승인과 신성한 전체 공동체의 승인을 받아서 그리고 613개의 계명이 쓰여 있는 이 신성한 두루마리 앞에서, 우리는 바뤼흐 드 에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추방하고, 저주하고, 비난한다.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율법 책에 쓰여 있는 모든 징벌로 저주한다. 낮에도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나갈 때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 저주받을 것이다. 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주의 분노와 질투가 그를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쓰인 모든 저주가 그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주가 하늘 아래로부터 그의 이름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모든 저주에 따라, 주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로부터 악에 속한 그를 떼어놓을 것이다.

_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저 문서는 조금 더 이어지다가 , 너네 이제부터 스피노자 걔랑 놀면 가만 안 둘 거야! 스피노자랑 이야기하거나 쪽지 주고받다가 걸리기만 해!”라는 위협으로 끝난다. 가히 못된 말 보습학원 다니는 사람들 솜씨라 하겠다. , 혹시 원장님이세요?

 

낮에도 밤에도, 누울 때 일어날 때, 나갈 때 들어올 때대목은 리듬마저 지렸다. 그야말로 주옥같다. syo도 종종 응용하는 구절이다. 나는 낮에도 먹을 것이며 밤에도 먹을 것이다. 나는 누울 때 책을 지를 것이며 일어날 때 책을 지를 것이다. 너는 나갈 때 못생겼더니 들어올 때 역시 못생겼구나.

 

사람이 역시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 독한 말을 일삼는 인간들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되는지 정말 선명하게 보여주는 문서가 저거라고 하겠는데, 패기 넘치게 그리고 주가 하늘 아래로부터 그의 이름을 없앨 것이다라고 질러본 게 무색하게도 이제는 지구가 뽀개진들 스피노자의 이름은 살아남아 하늘 꼭대기에 똥침이라도 놓을 기세인 반면, 세상 당당하게 깝쳤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그저 스피노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인간들이라는 명찰을 단 먼지 뭉치 비슷한 것들로 남아버렸다…….

 

그러나 내 최애는 아주 쿨하게, 그러냐? 그래라- 했던 듯. 그리고 너희가 애는 쓴 것 같지만 그 정도 박해로는 나의 거대한 그릇을 다 채울 수 없노라며 열심히 집필에 매진, 또다시 거한 박해 한상차림을 받았는데, 그 정황이 아래와 같다.

 

  16705월에 쓴 글에서 독일의 신학자 야코프 토마시우스는 근래에 익명으로 출판된 어떤 책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 책은 국가 전체에서 즉각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사악한 문서"라고 그는 주장했다.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이며 토마시우스의 네덜란드인 동료인 레흐니르 만스벨트는 새로 나온 그 책은 모든 종교에 해로우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학적인 성향을 지닌 네덜란드인 무역상 빌럼 판 블레이엔뷔르흐는 "이 무신론적인 책은 () 이성적인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증오로가 가득 차 있다"고 썼다. 그 책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어떤 비평가는 그것을 악마가 쓴 "지옥에서 꾸며진 책a book forged in hell"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관심의 대상은 바로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라는 제목이 붙은 책과 그 책의 저자였다.

_ 같은 책

 

스티븐 내들러의 이 책이 바로 신학-정치론의 개론서입니다.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책들은 늘 너무 좋아요. 나는 가끔 스피노자가 지옥에서 와이파이로 내들러 조종하는 건 아닌가 한다…….

  

 


41. 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

 

기억 속의 정영수 선생님은 이름 앞뒤로 아무런 수식어가 붙지 않는 그냥 정영수였다. 정영수 읽어봤어? 몇 개. 어때? . ? . 좋아?/그저 그래?/별로야? . 그런 식이었는데, 이게 무슨 조홧속인지 첫 작품 우리들부터 좋아서 몸부림을 쳤다. 심지어 이건 처음 읽는 것도 아니다. 지난번 읽었을 때는 분명 이게 정영수네였는데, 왜 이번에는 이게 정영수네! 가 되었는가.

 

뒤이은 작품들도 좋았다. 다 몸부림 수준은 아니었지만, 정영수네!가 쓴 중 가장 별로다 싶은 작품조차 정영수네가 쓴 가장 나았던 작품보다 나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syo는 혼란 속에 리뷰를 준비하고 있다.

 

그날 밤 우리는 사랑을 나눈 뒤에 속옷만 대충 걸치고 침대에 누웠는데, 나는 한동안 잠에 들지 못해 뒤척였다. 우리는 처음에 몸을 포개어 누웟다가 곧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조금 떨어져 누웠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녀가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몸을 틀지 않고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어쩌다 헤어졌을까?" 나는 그 말에 대답하려다, 곧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냥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나는 새삼스레 내가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창가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점점 아득해졌고, 나는 문득 끝나지 않을 시간에 갇혀서 텅 빈 공간을 떠다니고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왠지 그 밤은 영영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내게 앞으로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을 무수히 많은 행복한 시간들과 외로운 시간들의 징후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스듬히 누운 채 아직 잠들지 않았을 지원의 윤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유령들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_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이런 것. 길고 평탄하여 어딘가 빼도 될 문장이 있을 것만 같은 문단인데, 막상 작품을 다 읽어보면 저 가운데 뭐 하나 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읽는 ---

생활 속 법률 상식사전 / 김계형, 이재호

무엇이 예술인가 / 아서 단토

만화 재무제표 모르면 주식투자 절대로 하지 마라 / 사경인

죽음의 선고 / 모리스 블랑쇼

물리 오디세이 / 이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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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2-08 07: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읽고 보니 뺄 문장 없는데 난 밑줄 그을 때 센스 없이 툭 끊어먹었다...역시 어느 분야든 끈질기고 꾸준하게 버티면 뭐든 되나 보다 싶은 사례를 자주 마주하는 요즘입니다 ㅎㅎㅎ

syo 2021-02-08 09:49   좋아요 3 | URL
같은 책 같은 시기에 읽게 된 건 오랜만이네요.... 처음인가? 정영수에 대한 재평가 의지를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아요 ㅎㅎ

막시무스 2021-02-08 0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설명절에는 단백질 풀 충전하시겠습니다!ㅎ 따뜻하고 행복한 한 주되십시요!

syo 2021-02-08 09:51   좋아요 2 | URL
단백질 풀충전!! 어디서 들어본 단어긴 한데ㅋㅋㅋㅋㅋ
막시무스님도 복되게 살찌는 명절 되세요 으흐흐흐

유부만두 2021-02-08 09: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적 있어요. 모기약 9캔 받아봤고요, 알배추 8통 받았고요. 동생이랑 엄마 드렸더니 좋아했어요.

두부 얼릴 수도 있어요. 그럼 나중에 드실 땐 색다른 식감을 즐기실 수도 있고요. (백ㅈㅇ 두부 검색 추천) 또..., 네. 그만 할게요;;;;

syo 2021-02-08 09:5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저 연필 12다스 경험 있는데 ㅋㅋㅋㅋㅋ
세상에 나같은 사피엔스 많아서 외롭지 않네요 ㅎㅎ

Falstaff 2021-02-08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감싸고 있는 그림자가 뿔 달린 메피스토펠레 같습니다. 으시으시....

syo 2021-02-08 09:56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그러네요. 과연 지옥에서 온 인간 취급받은 자에게 걸맞다....

레삭매냐 2021-02-0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쿠팡에서 두부도 파나 보네요...
진짜 아마존처럼 별 걸 다 파는가 봅니다.

스피노자 책은 아주 땡기네요.
주저하다가 또 절판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해 봅니다.

syo 2021-02-09 19: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종이 질 때문에 주저하다가 스피노자 평전 사지도 못했는데 절판..... ㅠ

blanca 2021-02-08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우, <내일의 연인들> 그제 도서관에서 몇 번 만졌다가 말았는데 그걸 빌려왔어야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드는 페이퍼네요.

syo 2021-02-09 19:1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조만간 다시 만나시겠지요. 즐거운 독서 시간 되실 거예요. 저는 재미가 꽤 있었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2-08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난 syo님 올리는 책 눈팅만 하고 갈랬더니, 스피노자 파문판결서에 홀딱 반해 액정을 마구 두드리는 중.^^ 앤드루얀 코스모스서 스피노자 곁눈질만으로도 멋져부러 본격 탐색 궁리 중이었건만 syo님 비롯, 무수한 팬들을 거느린 그 시대 아닌 이 시대 셀럽이셨군요^^
두부 가게 차린 syo님. 명절맞이 장을 어쩜 이리 화끈하게도 보심. 스피노자만큼 멋져부러. 해피 설~~~~^^

syo 2021-02-09 19:14   좋아요 0 | URL
저런 악착같은 글귀 좋아하시는구나 ㅎㅎㅎ 저두요 ㅋㅋㅋㅋ
읽기님도 즐거운 연휴, 즐거운 읽기 되세요!

감은빛 2021-02-21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부(단백질)를 많이 드셨다면 운동을 하셔야!! ㅎㅎ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저는 가끔 밥 대신 두부 한 모를 먹기도 해요.
잘게 잘라서 프라이 팬에 구워서 그냥 먹는데,
간을 따로 하지 않아도 맨 두부만 먹어도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아무튼, 달리기]는 어떤가요?

syo 2021-03-01 11:26   좋아요 0 | URL
그 좋은 기회에 두부를 먹기만 하고 운동을 하지 않았더니 배가 두부가 되었습니다......
아니, 두부가 배가 된 것일까요....

[아무튼, 달리기] 괜찮습니다. 내용도 괜찮고, 글도 꽤 재밌습니다. ㅎㅎ
 

  

작가들

 



 

 

나는 현수를 만나고 돌아온 후로 우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글 또한 끊임없는 다시 쓰기의 과정만 거칠 뿐 도무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그러고 있는 중이지만, 그 일이 나에게는 도움이 된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글을 완결 짓게 된다면(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이지만) 나는 그걸 연경에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좋은 생각인지 알 수 없어졌다. 이미 그 일들은 연경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그러나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고독한 일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글을 쓰다가 어쩌면 내가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게 문득 참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_ 정영수, 「우리들」

 

모든 사랑은 언젠가 한 번은 서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 번 열린 서술은 종료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랑은 꼭 시작만 있지 끝은 없는 이야기 같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침표 속에 우주가 있다. 우주처럼 요동치는 물음표도 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사랑이 비워놓은 자리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고인다. 어떤 먹먹한 날 편지지 위에 눌러 쓴 미련과 회한으로, 또 어떤 맑은 겨울날 탄식처럼 흘러나온 이름이 흩어지는 입김으로, 이야기는 이런저런 모습을 하고 그렇게 갑자기 왔다가 떠난다. 그리고 약간 다른 얼굴로 다시 온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갑자기. 우리는 그 차이와 반복 속에서, 차이와 반복으로, 완결되지 않을 이야기를 완결하기 위해, 완결하고 싶은 마음도 없이, 혹은 완결하고 싶은 동시에 그 순간을 영원토록 이어나가고 싶은 불가해하면서도 이해 가능한 마음으로,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네가 들으면 좋겠지만 듣지 않아도 좋겠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하지만 벌써 내가 알아들었고,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색과 향이 달라져서 이야기하면 할수록 도리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랑을 자꾸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진행 중인 모든 사랑은 그저 씨앗을 빚는 일. 사랑을 종료함으로써 그 씨앗을 땅에 심는 것.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리를 맴돌며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접붙이고, 가끔은 오래도록 방치하기도 하고, 그렇게 끝나지 않을 뭔가가 진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사랑은 서술되기 위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에 관한 글을 읽고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에겐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 읽은 ---



38.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손기은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월급날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는 대신 따박따박 체중이 줄었다. 좋았다. 월급에 버금가는 소득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한 게 딱히 없고, 밥 시간이면 남이 차린 음식을 남의 돈으로 사서 최대한 열심히 많이 먹고 즐기는데도 매달 한 근씩 체중이 감소하니, , 이건 복지야- 했던 것. 그렇게 8개월 남짓 포인트 모으듯 적립식으로 총 3.5kg의 체중은 퇴사 후 두 달 만에 기적처럼 원상복구 되었다. 먹는 것을 워낙 좋아하고 또 먹으면 많이 먹는 편이라 힘들 때도 먹고 즐거울 때도 먹는다. 힘들 때는 먹어도 감량되고 즐거울 때 먹으면 살이 붙는 걸로 봐서, 즐거움이 칼로리가 높은 것 같다. 즐거움을 좀 줄여야 하나.

 

일을 안 한다고 힘든 게 없진 않다. 그렇지만 내가 머저리같이 굴면 딱 내 인생 하나만 머저리 되는 상황에만 살면 기본적으로 마음도 가볍다.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아주 가끔은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던 그 시절 자동체중복지 시스템을 떠올린다.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라는데, 힘들 일이 없으면 내가 일류인지 뭔지 알게 뭐야. 사람은 좀 힘들어야 하는 건가? 나는 사실 다시 힘들고 싶은 건가?

 

에라이 모르겠다, 치킨이나 시키자.

 

성취욕이 최고로 치달았을 때는 체력이 밑바닥을 칠 때가 많다. 몸은 노곤노곤한데 기분은 팔랑팔랑하고, 소주가 눈앞에서 출렁출렁하는 밤이면 이보다 더 적절한 건 없다 싶다.

_ 손기은,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39. 뇌가 섹시해지는 추리 퀴즈 1단계

팀 데도풀로스 지음 / 박미영 옮김 / 비전비엔피 / 2016

 

2단계는 보지 않기로 했다.

 

퀴즈나 퍼즐 풀기는 실로 오래된 인류 공통의 오락거리다. 우리가 아는 모든 문화권에서 여가시간에 문제 풀이를 하고 있으며, 고고학자들은 문명 초창기부터 퀴즈와 퍼즐이 있었다는 기록과 흔적을 발견했다. 지성을 이용하여 문제를 푸는 것은 우리 인류를 지금에 이르게 한 독특한 특성이므로, 그것이 우리의 기본 속성이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_ 팀 데도풀로스, 뇌가 섹시해지는 추리 퀴즈 1단계

 

 

 

--- 읽는 ---

내일의 연인들 / 정영수

여자들의 무질서 / 캐롤 페이트먼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 스티븐 내들러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김민섭 외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 박정호

지식의 세계사 / 육영수

지속가능한 삶을 모색하는 사피엔스를 위한 가이드 / 김선우

크로스 사이언스 / 홍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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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2-0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9번 책은 33번 책 같은 책 아니죠? (‘_‘ )??

syo 2021-02-05 15:08   좋아요 1 | URL
전혀 다른 책입니다. 두 작가님이 마주치면 서로를 좀 한심하게 생각할지도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05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영수 저도 읽는 중인데 소설마다 편차 심해요 ㅎㅎㅎ수상 이후 공들여 고친 소설들은 전에 읽었던 거랑 같은 소설 맞나? 싶게 좋고 ㅋㅋㅋ아닌 건 아 그래 이게 내가 알던 영수ㅋㅋㅋ이러고... 조만간 다 읽고 리뷰 써야겠어요. 거의 다 연애소설이긴 하네요.

syo 2021-02-05 15:25   좋아요 4 | URL
ㅎㅎㅎㅎ 정영수에 대한 저의 편견을 내다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려 했더니 ㅋㅋㅋㅋ
 

  

호부호S

 

 

 

1

 

33번 책이 일으킨 자그마한 요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지난 페이퍼에 읽은 책 마지막 꼬다리로 집어넣은 이 책. 이 책의 정식 제호는 <섹스를 위한 내 몸 사용법>이다. 댓글을 달아주신 총 아홉 분의 이웃님 가운데 여덟 분이 이 책에 관해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따지자면 저 책의 댓글 점유율이 88.888888%인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그 누구도 저 책의 제호를 언급하신 분이 없었다. 다들 33번 책이라고…… 홍길동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싱어게인도 아닌데, , 왜 말을 못해요. , …….

 

 

 

2

 

난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지, , , 그거.

 

 

 

3

 

섹스에 관련된 책을 앞으로 열심히 찾아서 읽고 짧은 평을 남기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좋아할 기회가 없어서 좋아하지 못하시는 것 같으니, syo가 총대를 메겠습니다. 으하하하.

 

근데 이러다 북플 마니아에 섹스마니아 1번 될까봐 겁나네. 좋아하긴 하지만서도 마니아는 좀…….

 

사실 알라딘 주제 분류법에는 성생활이라는 세부 카테고리가 있긴 합니다만, 북플 마니아 카테고리는 그런 세세한 곳까지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 책의 분류를 보면 국내도서 > 가정/요리/뷰티 > 결혼/가족 > 성생활인데, 이 분류는 문제적이네요. 성생활이 결혼/가족의 하위 카테고리라니, 여기가 혼전순결공화국입니까……. 심지어 제 친구 중에는 가족끼리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녀석도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이런저런 현장의 실태(?)가 반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결국은 갖가지 시간 때우기의 퇴적이라면, 틈틈이 몰두할 수 있는, 혹은 몰두한 척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_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그래서 줄곧 나의 일은 맛 칼럼니스트나 음식비평가와는 하는 일도,품은 마음도 아예 다르다고 우물우물 설명해왔다. 새로 문을 연 음식점에 대해 글을 쓰다가도 갑자기 그 집 막내딸이 이걸 보면 기분이 어떨는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다시 문장의 맨 앞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걸 철학이나 소신이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여튼 그런 차원은 전혀 아니다. 나는 지인들도 학을 떼는 식어버린 달고나 같은 정신력의 소유자다. 살면서 둥근 칭찬만 받고 싶은 작은 사람. 그래서 그냥 내가 잘할 줄 아는 것만 한다.

_ 손기은,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이 세계를 분명하게 볼수록,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기묘하게도 그의 입을 다물고 있게 된다.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

_ 제임스 설터, 스포츠와 여가

 

 

 

4

 

계속 한심해 보였지만 근래 유독 더 그래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대체로 그렇듯 본인은 본인이 하고 다니는 짓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그를 떠올리며 <사람 구실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이라는 간단한 도식을 우리 집 화이트보드에 그려 보았는데, 그에게 전해주려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뜻밖에 자기반성이 되는 시간이어서 썩 괜찮았다. 방금 그 도식을 줄글로 풀어서 좀 길게 써 봤는데, 그냥 지웠다. 낭비다.

 

자기애와 자기맹신이 같이 가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유년시절을 보낸 걸까. 좋아하는 사람이 꼭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신뢰하고 싶은 것이지. 같은 의미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나를 정말 좋아해서, 나는 내게 좀 더 믿을 만한 인간이고 싶다.

 

내가 매일 나를 흔들어야 한다. 열심히 흔들고 정성껏 흔들리자. 최선을 다하자.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파커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난 어떤 의미에서는 용감했다고 보는데." 진심이었다. "주위에서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 말이야."

  "난 슬프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파커가 말했다. 우리는 누구도 반드시 그런 식으로 용감해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함께 입을 다물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광대한 하늘 아래에서 그가 힘없이 별을 헤아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것, 즉 중요한 문제는 누가 날 해치거나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용감해졌다.

  중요한 문제는,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나의 일부가 있음을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_ 토머스 페이지 맥비, 맨 얼라이브


 

 

 

5

 

그나저나 1월이 끝났다. 뭐지, 이 스피드


그러나 이 와중에 평균 1일 1권은 어떻게든 지켜지고 있다. 목표를 위한 책 선정 과정에서 개수작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이 시간 창 너머로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빗소리 들으며 자겠구나.

 

 

 

--- 읽은 ---



34. 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

 

그간 syo가 아는 챈들러라고는 시트콤의 클래식 프렌즈의 주연 중 하나인 챈들러 빙(매튜 페리 분)가 전부였다. 그 시트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농담에 능한 편이었지만 그 중 챈들러의 말재간이야말로 대단했다. 10개 시즌을 일주일 만에 몰아보던 대학 1학년의 새싹syo는 나중에 자라서 챈들러가 되고 싶었지만 조금도 자라지 않아서 망했다. 운 좋으면 스물다섯까지도 자란다고 해서 기다려보았지만 익히 알고 있던 나의 불운함만 재확인했을 뿐. 더 자라지 않는다는 걸 알고부터는 나중에 자라서~’라는 비현실적인 가정법 대신 다음 생에는~’이라는 한결 나은 표현으로 선회했는데, 그때는 이미 프렌즈에 대한 애착이 식어 있어서 챈들러는 되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다음 생에 되고 싶은 새로운 챈들러가 나타났으니…….

 

물론 이 모든 건 말재간에 한정된 이야기고, 꼭 한 번만 더 태어날 수 있다면 물론 벼락부자나 떼부자나 코인재벌이나 주식재벌 뭐 그런 게 되고 싶지…….

 

  "두 따님이 같이 잘 다닙니까?"

  "아닐 거요. 둘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따로따로 파멸의 길을 걷는 듯싶소. 비비언은 버릇없고 모질고 똑똑하고 인정머리라곤 없는 편이지. 카멘은 파리 날개를 뜯어내기 좋아하는 어린애고. 둘 다 도덕관념 따위는 고양이만큼도 없소. 나도 마찬가지지만. 스턴우드 집안은 다 그렇지. 계속하시오."

_ 레이먼드 챈들러, 빅 슬립

 

 

 


35. 단단한 지식

나가타 가즈히로 지음 / 구수영 옮김 / 유유 / 2020

 

생각해 보면 갑자기 세상에 홍수처럼 꼰대가 범람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이제 그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범람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꼰대의 범람도 무섭지만 꼰대라는 말의 범람도 역시 무섭다. 꼰대라는 말이 쉬워지면서 꼰대 딱지를 붙이는 일 역시 점점 쉬워지고 있다. 몇 년 전 같았으면 그냥 고개 몇 번 끄덕이고 넘어갔을 정론에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아 이거 꼬온…… 하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어가 이렇게나 위험한 것입니다…….

 

정론이고, 좋은 이야기 많다. 고풍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좋은 이야기를 잘 듣고 좀 낡았다 싶은 것들은 내 안에서 혁신하는 일에 꼰대 딱지 부착 공정을 거칠 필요가 없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syo, 이 험한 세상에.

 

  언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받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품고 있는 사전적 정보 자체를 보내는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보내는 사람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아날로그의 디지털화는 대부분 충분치 않을 때가 많다. 특히 복잡한 사고나 애매한 감정 등은 디지털화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채 전달된다.

  따라서 전달받는 쪽은 언어를 단순히 디지털 정보로서 그 사전적 의미만 읽어 낼 것이 아니라, 디지털 정보의 틈새로 새어 나간 상대방의 마음이나 감정을 자신의 내부에서 재현하는 노력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만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방이 언어화하지 못한 ''을 읽어 내려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디지털 표현의 아날로그화이자 달리 말해 '헤아림'이라 할 수 있다.

_ 나가타 가즈히로, 단단한 지식

 

 

 


36.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김봄 지음 / 걷는사람 / 2020

 

유시민 선생님의 추천사를 보노라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정치적 입장차가 첨예하게 형성되어 있는 가운데 그래도 어떤 노력과 슬기를 통해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들어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작가님의 표현 방향이 그런가, 막상 읽고 있노라면 그냥 평범한 느낌. 뭐랄까, 그냥, 그래 봐야 어쩔 수 없잖아, 싸워 봐야 별 수 없잖아, 어차피 가족이라는 게 그렇잖아, 적당히 삐걱거리고, 적당히 상처를 주고받지만, 그럼에도 어떤 눅눅한 아름다움이 있는 그런 거잖아- 이런 느낌을 받았달까. 책 안에 들어있지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통과해온 작가님과 그 가족만의 역사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 책 속 가족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너무 따뜻한 사람들이라 정치적 견해 차이 따위는 한낱 에피소드 정도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요는, 그냥 따뜻하고 훈훈한 가족 에세이로 제 몫을 다한 책인데도, 유시민 선생님의 추천사에 낚여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읽었다가 그런 게 없어서 괜스레 억울해졌다는…….

 

  몇 번을 떠올려도 너무 슬픈 기억이다.

  싸움의 기억이라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남자를 알고,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많은 책임과 가책을 함께 하는 것인지, 도저히 말로는 옮겨지지 못한 많은 감정들이 쏟아지고 쏟아져, 깨지고 상하고, 문드러지고 휘발되어버리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사랑을 나누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사랑을 믿어서인지도 모르겠다.

_ 김봄,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37. 육식의 성정치

캐럴 J. 아담스 지음 /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

 

쉬운 책이어서 이틀 만에 완독했지만 쉽지 않은 책이어서 한 달이 다 가도록 완독을 못했다. 이런 모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 내 모순에 대한 적실한 표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이 하는 말이 어거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젠더 감수성 관점에서 논해볼 문제라기보다 언어(언어는 가끔씩 문화의 상위 카테고리가 되기도 한다. 육식이 언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의 침투성 대한 인식 부족일 수 있다.

 

부재 지시 대상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나는 부재 지시 대상이라는 용어를 빌려와 저자가 하고 싶어하는 말의 거의 대부분을 수월하게 이해했고, 이해한 것의 대부분을 수월하게 동의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저 용어 자체가 저자의 주장을 모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부재 지시 대상이라는 기표가 원래 있던 영역에서 가리키던 기의(1), 저자가 부재 지시 대상이라는 기표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하는 기의(2)와 충돌하는 지점이 있고, 따라서 저자는 기표를 빌려오기보다 새로운 기표를 선언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내 의심은 그야말로 지엽적인 것이고, 이 책은 자체 훌륭한 책이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별 다섯 전혀 아깝지 않다.

 

당신이 인간의 신화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논의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그러나 신화에 관한 어떤 고양되고 의식화된 자각이 있다면그런 논의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물론 우리가 말하는 신화는 낯선 무엇이 아니라어느 날 갑자기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는 순간까지 살아오면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배운 통념이다그러나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는 순간사실은 모순이 된다.

캐럴 J. 아담스육식의 성정치

 

 

 

--- 읽는 ---

추리소설 읽는 법 / 양자오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 스티븐 내들러

물리 오디세이 / 이진오

Chaeg 2021. 1.2 / ()(월간지)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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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01 0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3번 관련 글들을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는 끝까지 지조와 일관성을 지켜 33번이라 지칭하겠습니다. 흠흠.....아 꼰대같다구요. 그냥 이런 꼰대도 있으니 견디세요. ㅎㅎ
34번은 제가 별로 안좋아하는 책이고 35번은 쇼님 글 읽어도 관심이 안가고 36은 관심있었는데 쇼님 글보고 식었고, 37은 꼭 읽어야 될것같은 느낌 팍팍입니다. 일관된 바람돌이였습니다. 2월에도 많은 책소개 잘 부탁드립니다. ^&

syo 2021-02-01 02:54   좋아요 1 | URL
원 아웃 원 스트라이크 원 볼 상황에서 원 히트네요. 이 정도면 이번 타석에서는 성공적이었다 ㅎㅎ

다음 타석도 진지하게 들어서겠습니다 ㅎ

비연 2021-02-01 04: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하. <프렌즈>의 챈들러! ㅎㅎ 같은 챈들러인데 주는 느낌이 이리 다르네요. 물론 한 사람은 성이고 한 사람은 이름이지만. <프렌즈>에선 로스 좋아했는데 이젠 할배...ㅠ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311/0001226870

유부만두 2021-02-01 08:36   좋아요 1 | URL
아 다들 프렌즈에 추억 한꼭지를 두고 있군요. 전 그 ‘pretty (but) dumb‘ 조이를 좋아했고요.
챈들러의 유우머는 살짝 갑분싸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syo님의 재치와 번득임이 그를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syo 2021-02-01 09:12   좋아요 1 | URL
역시 저마다의 프렌즈가 있는 법이군요ㅎㅎㅎ
유부만두님의 칭찬말씀은 냠냠냠 잘 먹었습니다^-^

2021-02-01 0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1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아 2021-02-01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 읽는법>표지가 재밌네요ㅋ.ㅋ몇몇 책들은 느낌이 ㅎㄷㄷ합니다.🙄👍

syo 2021-02-01 09:14   좋아요 1 | URL
표지도 재미있지만 내지도 재미있습니다 ㅎㅎㅎㅎ 양자오 선생님 다른 책에서와 달리 이 책에선 유독 신나셨내요.

고양이라디오 2021-02-04 11:08   좋아요 1 | URL
<추리소설 읽는법> 재밌게 읽었던 거 같은데ㅎ 양자오 선생님 책들 좋아합니다ㅎ 유독 신나셨군요ㅎㅎ

단발머리 2021-02-01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팬입니다. 33번 책 이전에도 팬이었거든요. 33번 책의 요란함 이후에 열렬팬이 될까 합니다^^

syo 2021-02-01 09:14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아이 수줍다 🙈

수이 2021-02-0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심하다) 저...저도 실은 33번 책이 궁금해서...... 빌려 읽을까 하다가..... 아 부끄러워...... 표지만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단단한 지식을 읽도록 하자! 죽림에 살고 있으니까! 응?;;;;

syo 2021-02-05 15:07   좋아요 0 | URL
읽고 나서 저 책이 시키는 대로 뭔가를 해본 다음에 성과를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운동 책을 운동 안 하려고 읽는 사람이라 ㅋㅋㅋㅋㅋㅋㅋ 으하하하...

오거서 2021-02-01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3 번 책. 삼삼하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이런 것도 부재 지시 대상에 해당될런지요. 지금 육식의… 책을 읽고 있는데 부재 지시 대상 부분에서 헤매다가 페이지를 넘겼어요. 쉽지 않은 책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어요.

syo 2021-02-05 15:0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어서 지금쯤 오거서님의 독서가 끝났을 수도 있겠네요.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부재 지시 대상이라는 용어를 데리고 저자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현란하게 드리블 치는 걸 일일이 따라가려고 하면 더 헤매실 수도 있더는 거네요.....

파이버 2021-02-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6번 좌파 고양이… 가족들이 기본적으로 너무 따뜻한ㅋㅋㅋ 공감 1000퍼센트입니다. 그래도 가족끼리는 정치얘기 하지 않는게 진리…
물리오디세이 저도 읽었는데 약간 문제집 같은 느낌이지만 쉽게 풀어줘서 저는 좋았어요ㅋㅋㅋㅋ

syo 2021-02-05 15:04   좋아요 1 | URL
정치 이야기는 뭔데 이렇게 하기만 하면 덜커덕거릴까요 ㅎㅎㅎㅎㅎ 이게 오히려 이야기를 많이 해야되는 주제인데도...

물리오디세이 괜찮네요 ㅎㅎㅎ 귀엽기도 하고, 작가님이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2-01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번호는 읽은 권수였단 겁니까. 난 것도 모르고. 번호는 왜 있나 하는 어수룩함에 머물러 있었음요. 젊은이들 못따라가겠다요. 하루 한 권. 뒷생도 현생도 그래본 적 없고 앞생도 그럴 일 없을 것 같은 지는 저 책들 하나도 안 읽고 syo님 글로나 어디 가서 아는 척 할테요.^^;; syo의 33번류 문어발 확장과 마니아 도전을 열렬히 응원함다

syo 2021-02-05 15:02   좋아요 0 | URL
젊은이들이요? ㅎㅎㅎㅎㅎㅎ
알라딘 마을에서는 아직 젊은이 축이네요.....
나가면 아재아재바라....
아재 개그가 절로 나오네요. 깊은 사죄 말씀 드리구요.

읽기님께서 읽는 책의 난도를 좀 낮추면, 저처럼 하루 한 권 수월하게 읽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하지만 권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저보다 훨씬 알찬 독서 중이시잖아요.

stella.K 2021-02-01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호를 다 쓰려니 너무 길고 귀찮기도 해서 33번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ㅋㅋ
근데 오래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건 알라딘은 무슨 근거로 마니아를 부치는지 모르겠어요.
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마니아 된 거 많아요.
근데 스요님한테 섹..마니아하면 그렇긴하겠네요. 어쩌나...ㅎㅎㅎ

syo 2021-02-05 15:00   좋아요 1 | URL
마니아를 붙이는 ‘근거‘는 저도 모르겠지만,
마니아 점수를 주는 산정 기준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마니아 된 것이 특정 책을 말씀하신 거라면, 그건 스텔라님이 그 책을 읽고 별점을 4개 이상 매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책의 마니아에서 빠지고 싶으시다면 별점을 3개 이하로 수정하시면 아마 빠지실 수 있을 거예요.

근데 특정 책이 아니라 작가나 분야에 대한 마니아라면, 그건 스텔라님이 페이퍼나 리뷰에 그 작가의 책이나 그 분야의 책을 집어넣는 순간 채점되는 것이라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전 섹.... 분야의 마니아도 사실 사양하지 않습니닼ㅋㅋㅋㅋ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시켜주면 하죠 뭐 ㅋㅋ

감은빛 2021-02-01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3번 책의 후폭풍이 어마어마하군요. ㅎㅎ
그나저나 올해 벌써 33권 이상 책을 읽으셨다니! 다락방님의 3개월 구매액수 만큼이나 후덜덜이군요.

부재 지시 대상이란 단어의 기표와 기의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 궁금해요. 예전에 학부생 시절에 어렵기만한 전공책 읽다보면 무슨 용어가 그리 많은지. 그냥 설명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특정 용어로 새롭게 정의내리는 것이 오히려 더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syo 2021-02-05 14:56   좋아요 0 | URL
다음에 다시 읽고 차근차근 글을 써볼까 하고 있어요.

책을 읽고 나서 행동거지가 바뀌었나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아서, 그냥 마음만 조금 더 불편해진 정도?
아예 마음이 하나도 안 불편하거나 행동이 바뀌거나 하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끼어 버렸네요 ㅎㅎㅎㅎㅎ

han22598 2021-02-04 0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전 아직 [육식의 성정치]를 다 읽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로서는...작가가 주장하는 바에 완전동의하지 못하는 면이 있긴해요. 그게..젠더 감수성 부족이 아닌 언어 침투성에 대한 인식부족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신데....과연 언어 침투성은 무엇일까???? 이러고 헤매고 있어요 ㅠㅠ

syo 2021-02-05 14:55   좋아요 2 | URL
다 후려치고 거칠게 말씀드려서, 육식 -> 여성혐오로 가는 고리를

1. 육식이나 육식을 둘러싼 언어 표현들이 사람에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혐오의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
2. 동물에 대한 혐오의 관념이 여성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의 연쇄로 봤을 때, 2에 동의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1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거랑 비슷한 뜻에서 쓴 말입니다 ㅠㅠ 별 것도 아닌데 뭐 별 거처럼 써놔서 혼란을 야기해드렸네요. 죄송합니다...


han22598 2021-02-06 03:40   좋아요 0 | URL
아하! 이런 의미였군요. 물어보길 잘한 것 같아요. 저 스스로는 저런 생각 절대 못햇을 것에요. 그리고 언어의 침투성이라는 용어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거였다니...세상에나... syo 님 친절한 설명 감사해요 ^^ 죄송하다니요. 덕분에 one 무식이 타파되었습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1-02-0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잭스... 33번 책 궁금하네요. syo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syo 2021-02-05 14:49   좋아요 1 | URL
고라님 ㅎㅎㅎㅎ
우리 1월에 인사했잖아요ㅎㅎ

여전히 잘 지내시죠? ^-^

고양이라디오 2021-02-06 23:35   좋아요 0 | URL
제 댓글에 답장달아주셨군요. 방금 확인했습니다. 저는 나쁘지않으니 잘 지내는 거 같습니다ㅎ

2021년 syo님에게도 찬란한 한 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