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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 플라톤.벤야민.들뢰즈.보드리야르의 이미지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박치완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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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이미지가 서식하는 고도가 어디쯤인지 오히려 더 모르게 되었다. 이 책이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에만 국한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이것은 그저 지엽적인 의문일 뿐이겠지만, 과연 이미지는 예술과 어떤 관계일까? 저자는 거대한 이미지라는 신이 있고 그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다양한 양태 가운데 하나로 예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예술이라는 것은 이미지를 담지할 뿐, 우리가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하고 또 읽어 내고 싶어하는 진선미는 예술의 기능이 아니라 이미지의 기능이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책은 플라톤을 비평하고 들뢰즈를 비판하고 보드리야르를 비난하며, 드보르에 조응하며 벤야민에 조심하고 있는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학자들에 관해 문 밖에 있거나 끽해야 문틀에 올라선 정도의 소양밖에 없으니 저자의 관점을 비평하거나 비판하거나 비난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조응하거나 조심히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확실히 알겠다. 열정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지만.


5장에서 저자는 벤야민의 이론이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예술작품은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다는 벤야민의 선언이 틀렸다는 것을 근거로 댄다. 벤야민의 이론을 우리 시대에 맞춰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변형과 재창조가 필요하다는 점은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그 근거로 예술작품이 근본적으로 복제가 불가능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벤야민은 모방의 양태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중 '예술가 본인이 재생산한 것'이 복제인지 아닌지에 대한 나의 의견은 저자와 다르다. 저자는 194페이지에서, 예술가 본인에 의해 재생산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원본과 결코 동일한 작품이 아니라 단지 닮은, 유사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술을 보는 관점에 따라 충분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아야만 같은 작품이라고 보는 것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 1.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동일하고, 2. 말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기 위해 드러낸 이미지가 극히 유사해 몇 군데의 소소한 기계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고, 3. 관객이 같은 바를 느꼈다면, 두 작품을 같은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차피 상대적인 관점을 극단으로 몰고가면, 어떤 작품도 그 작품을 보는 관객이 누군인지, 또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기분을 가지고 보는지에 따라서 그때그때 미묘하게라도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완성이 예술가-작품-관객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견지에서 본다면, 이는 모든 작품은 하나의 작품인 동시에 서로 다른 복수의 작품이 되는 셈이다. 이런 마당에, 어떤 두 작품의 동일성 여부를 작품 자체의 외형에만 치중하여 판단하는 방식은 예술작품의 표면에만 너무 집착하는 관점이 아닐까? 


같은 장소에서 연이틀 벌어지는 같은 공연이 있다고 하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주했다고 할까. 같은 지휘자, 같은 연주자들이 같은 악보를 들고 연주한다. 평소 운명 교향곡이라면 환장하는 나는 바이올린을 맡은 친구가 준 티켓으로 1, 2회를 다 듣게 된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능숙함 때문인지, 나는 두 연주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 둘째날 공연을 마친 그 친구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데 친구가 부끄러운 듯이 말한다. 사실은 오늘 2악장에서 딱 한 부분, 틀린 음을 연주하고 말았다고.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 친구를 향해, 너 때문에 나는 다른 두 개의 작품을 듣고 말았다고, 2회차 연주는 내가 듣고 싶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아니라 다른 작품이었다고, 원본의 아우라를 모두 상실한 한낱 복제품일 뿐이었다고 비난해야 할까? 


아, 예술의 본체는 당최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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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자의 고독 - 개정판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5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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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영정 옆에 서 있는 동안에는 침묵해야 했다. 하지만 누군가 무거운 표정으로 나타나 고인의 영정 앞에 서는 순간부터는 애절하게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해야 했다. 조문객의 등장 여부에 따른 그 희한한 간극에 대해 생각하는 나를 백부는 무섭게 다그쳤다. 조문객들과 마주 절하고 나면 백부는 매번 똑같은 말을 했다. 고인의 형 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못나서 이렇게 아우를 먼저 보냈습니다, 참 면목이 없습니다, 였던것 같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백부를 모두 아는 조문객에게도 당신께서 고인의 형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 모든 과정이 우스꽝스러웠고 잘 납득이 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의아함 때문에 그나마도 크지 않던 고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나 슬픈 감정이 더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의례는 죽음을 무겁게 만들고 고인에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명목을 들어 썩 폭력적으로 부조리를 휘두른다. 엘리아스는 그러한 일종의 억압이 죽음을 삶으로부터 멀리하려는 산 자들의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죽음이 지니는 의미가 변하면 남은 자들이 고인을 기리는 방법이나 슬픔을 드러내는 방법 또한 그에 맞춰 변해야 한다. 또한 이 시간, 이 곳에 남은 이들이 더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죽음의 관념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의례의 권위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부당함과 허식을 걷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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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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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서울대 정시모집 면접 전날, 막상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말 한번 섞어 보지 못했던 고등학교 선배의 기숙사 2층 침대에 누워 선배가 던지듯이 두고 간 박노자를 처음 읽었다. 이 나라 지성의 요람중 으뜸이라는 곳의 기숙사는 상상했던 것보다 허름했고 그래서 더욱 고즈넉했다. 창 밖으로 겨울밤은 가로등이 뿜어내는 빛 위에 누워 춤추고 어디선가 찌르르- 하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불을 켜 놓은 방은 어둡고, 밤이 내린 밖은 오히려 밝다는 기분이 들었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박노자의 책도. 그리고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는 곳은 밝은 중에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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