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미

 

 

1

 

어영부영 11월이 되었다. 10월까지만 막 살고 11월부터는 열심히 살아줘야지- 하는 각오가 있었다. 각오야 언제나 있는 것이긴 한데, 그래도 11월은 중요하다. 11월도 망하잖아? 그러면 12월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각오는 하지 않게 된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2019년은 망했으니 2020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하게 되면서 12월 한 달이 붕 뜨는 것이다. 내가 syo를 안다. syo가 나를 안다.

 

11월에는 평소 꼭 지식을 쌓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자꾸 포기하며 나랑 잘 안 맞는다는 사실만 재차 삼차 확인해왔던 앙숙, <경제학> 분야와의 랑데부를 성사시켜보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여기서의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을 말한다. 싫다고 모르면 몰라서 싫은 법이다. 공자님 가라사대 알아야 면장을 하는 법이니라. 그냥 독서로 끝낼 게 아니라, 아주 정석으로 수학공부 하듯 제대로 한 번 해보기로 하였다.

 

두 번째 목표는 저놈의 <2의 성>을 반드시 완독하고 말리라는 것 되겠다. 되게 어려운 책 아닌데 되게 안 읽어지는 신묘한 책이다. 이제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에 제대로 읽고, 책 박스 제일 하단 제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배를 보낼 것이다. 옆 자리에 사르트르의 책을 함께 놓아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예우겠다.

 

세 번째로, 그리스 로마의 옛 고전들을 좀 읽어볼까 한다. 이제 뭐만 읽으면 플라톤 찾는다고 투덜대기도 지친다. 그 투덜을 모아서 책을 읽었으면 플라톤 코털을 뽑았겠다.

 

마지막으로, 월간 결산 그놈을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 돌아보면 그나마 이 보잘 것 없는 서재에서 걔만이 알라딘 월드에 한줌 보탬이 되는 애였던 것 같다.

 

 

2


 

할 말이 되게 많았고, 이번에 한 번 까보까 보부아르 한 번 까보까- 하는 불타는 마음 역시 준비되어 있었지만, 역시 격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 마련이라, 비트주스 몇 잔 마셨더니 빨간 마음들이 빨갛게 배설되었다. 그리하여 말갛게 씻은 마음 고운 얼굴을 하고 그냥 한 대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자기의 자유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주체는 사물(현상속에서 자기를 모색하게 된다이것은 자기도피의 한 방법으로 매우 근본적인 경향이다어린아이는 젖을 떼고 '전체'에서 떨어져 나오면곧 거울 속이나 부모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소외된 실존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원시인들은 마나(초자연적인 힘)나 토템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문명인은 개인의 마음속이나자아와 명성소유와 작품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이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의 최초의 유혹이다페니스는 사내아이에게 '분신'의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페니스는 그에게 자기 자신인 동시에 다른 객체이다그것은 장난감이고인형이며또 자기 자신의 육체이다 부모와 유모는 그것을 마치 작은 인격처럼 다룬다이로써 우리는 페니스가 어린아이에게 '그 개인보다 보통 더 교활하고 현명하고 영리한 제 2의 자아'가 되는 까닭을 알 수 있다비뇨 기능과 그 뒤 나타나는 발기가 의지의 행위와 자연적 작용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에서즉 페니스가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쾌락의 원천이자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변덕스런 존재라는 사실에서페니스는 주체에 의해 자기 자신이면서도 자신 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페니스 속에는 종()으로서의 초월이 쉽게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그것은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페니스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는 거기에서 넘치는 생명력을 자기 개성에 통합시킬 수 있다그러므로 페니스의 길이와 오줌의 분출력발기와 사정 능력이 남자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 이해된다. (77-78)

 

아는 사람들에게는 물색없는 오지랖이 될 수 있겠으나, 우선 이야기하고 지나가고 싶은 부분은 소외라는 용어의 사용법이다. 철학에서는 소외를 일상생활의 어법에 비해 조금 더 폭넓은 방식으로 쓴다. 그 단어 안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긍정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자기 안에 자기의 부정이 있고 그 부정을 부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존재자의 성질이라고 보는 헤겔에게, 소외란 존재자가 더 풍부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까 일단 자기를 타자화하고 타자화된 자기를 지양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인데, 소외란 그 타자화를 의미하는 셈이다. 심지어 헤겔은 정신이라는 게 있어서 그 놈이 자신을 소외시킨 것이 자연이라고 보는 듯하다.  소외라는 단어는 쟤들이 나를 따돌려 엉엉 이라는 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바깥으로 꺼내어 구현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셈이다. 보부아르가 위의 문단에서 사용한 소외 역시 그런 맥락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실존철학은 주체가 늘 초월하기를 압박하는데, 주체는 타자와의 결투 속에서만 초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페니스를 소외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초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상대자, 스파링 파트너, 페이스메이커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 같다. 내 페니스가 나를 왕따시켜 엉엉, 이게 아니라. 물론 얘가 내 말을 안 들어- 정도의 일상적인 소외도 겪긴 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놀랍게도(혹은 하나도 놀랍지 않게도) 사실이다. 대학병원 비뇨기과에 앉아서 둘러보고 있자면, 중장년 남성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죽을상이다. 딸뻘은 되어 보이는 간호사를 붙잡고, 선생님 선생님 약물로는 안 되나요, 꼭 전립선에 칼을 대야 하나요, 사정사정 하는 어느 환자를 보았고, 그 환자를 심각하고 애달프고 감수성 넘치는 얼굴로 바라보는 대기실 모든 남성 환자들의 일치된 표정을 보았다. 그런 마음들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고, 남자인 syo도 역시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이 대체 어떻게 왜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증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라는 뜻인데…….

 

이런 대화가 있었다. 새내기 때였다. 룸메이트가 자기 과 동기 하나를 집으로 불러서 같이 보쌈을 먹자고 제안하기에 그러자고 했더니 착한 고릴라처럼 생긴 녀석이 보쌈 봉지를 들고 방문했다. 안녕, 니가 syo구나. 나는 덕이라고 해. 대단한 놈이었다. 나와 미스터(룸메)는 중-고등-'재수'-대학 동창인데, 그 말인즉슨 나와 미스터는 덕보다 한 살이 많다는 뜻이다. 내 동기들은 나한테는 반말을 했지만 나를 찾으려고 우리 하숙방 문을 두드리다 미스터와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syo 룸메 형이시죠? syo 있나요? 라고 했다. 근데 덕놈은 족보의 두 페이지를 밥풀로 붙여서 한 페이지로 만드는 데 망설임이 없는 그야말로 대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두 번째 보쌈파티에서,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복음 말씀 전하듯 덕이 말했다. 정확히 이랬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 못생기고 가난해도 남자가 떡을 졸라 잘 치잖아? 그럼 여자가 도망을 못 간다카데. 거기 앉아 중짜 보쌈을 씹어 삼키고 있는 인간들이란, 연애라 해도 될 만한 경험은 전무한 2(syo, )에다가 뭐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쓰라린 사랑의 아픔 1회가 연애사의 풀 스토리인 1, 이렇게 세 명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마치 뭐라도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상추쌈을 싸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 3명이 살며 잡아 본 여인의 손을 다 더해봤자 3개가 안 되는 준연애고자 집단에서, 그러니까 저 주제에 관해 당사자 일방인 여자의 견해를 들은 적도 들을 일도 없는 것들이, 남자의 진짜 가치는 성적 역량에 있다는, 정확히 말해 성적 역량이 나머지 모든 역량의 공백을 압도하는 진짜배기 가치라는 밑도 끝도 없고 근거도 없으며 심지어 재미조차 없는 주장을 너무도 당연한 진리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살아온 20년의 인생은 그들에게 뭘 품게 하였던 것인가.

 

위의 문단은 이런 관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실존철학의 대답이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흥미롭고 설득력도 있다. 돌아보는 지침으로 삼을 만한 지점이다.

 

 

 

3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할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그날도 필용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해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양희가 선배나 선배 사랑하는데했다양희는 그 말을 감정의 고저 없이천원이천원을 쥐어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했다필용은 당황해서 어어하고는 웃어버렸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

 

  필용은 그 짧은 순간에 양희와 하게 될지도 모를 섹스에 대해서까지 상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온몬이 축축 처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이상하게 웃음은 났다.

 "아니…… 네가 날 사랑한댔잖아킬킬킬킬…… 그 고백을 들은 거잖아지금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앞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모르죠그건알 수도 없고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그렇잖아."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오늘은 어때?"

  필용은 한 시간쯤 지나 그렇게 묻고 말았다묻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는 선배가 극을 올려요."

 "아니그것 말고."

 "별일 없는데."

 "아니그러니까 네가 어제 말한 그것 말이야오늘도 지속되고 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필용은 자신이 긴장하는 걸 느꼈다왜 긴장하나필용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렇죠오늘도."

  양희는 어제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듣자 필용은 실제로 탁자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었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불가해한 기쁨이었다.


저주가 강렬한 감정에서 발원하는 마법적 힘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강력한 저주의 주문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결코 그 말을 듣기 전과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 사랑을 깔보고 어딜 감히 니가 언감생심 나를 사랑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다.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너를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나는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해야 할 도 있다. 혹은 어떤 대답을 해야 어색하지 않게 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은데, 이렇게 버리긴 아까운 사람인데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다렸다는 듯 나도 널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을 돌려주며 환희를 느낄 수도 있다. 어두운 방에 마법진을 그려놓고 그 위에서 짚으로 만든 인형에 못질을 해대도 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절대로 무시되지 않는 말이다.

 

많이 사랑하거나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러나 사랑은 생김생김이 다 달라서,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어떻게 되는지를 뭣하러 생각하냐는 식으로 생긴 사랑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웬만해선 약자가 되지 않는다. 공은 넘어갔다. 어제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이 그물이 되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희한한 그물이다. 그 그물에 필용은 포획되었다. 이제 기어코, 필용은 양희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심한 사랑 고백의 저 막강하고도 발랄한 공격력을 좀 보라지.

 

잘 봐뒀다 써먹을 일이 있을까?

 

 

 

--- 읽은 ---

+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 박병철 : 152 ~ 270

+ 환율 지식 7일 만에 끝내기 / 박유연 : ~ 266

+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김기찬 외 : 139 ~ 264

 

 

--- 읽는 ---

- 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90 ~ 191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 101

- 철학의 신전 / 황광우 : ~ 106

- 시경을 읽다 / 양자오 : ~ 99

- 이토록 쉬운 통계 & R / 임경덕 :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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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0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 관련글 재밌어요. 히히.

syo 2019-11-01 15: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멍청함이란 재미있는 우화의 필수요소지요. 히히히.

다락방 2019-11-01 15:19   좋아요 0 | URL
11월까지 제2의성 완독하는 사람.. 없을 것 같죠?

syo 2019-11-01 15:32   좋아요 0 | URL
있을 것 같은데요?? s....

다락방 2019-11-01 15:33   좋아요 0 | URL
에이...무슨 말이에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분은 아니야.... 그 분 하위권 타입이야..... =3=3=3=3=3

syo 2019-11-01 15:37   좋아요 0 | URL
아이쿠...
s다락방님은 역시 안 되나보다....

다락방 2019-11-01 15:38   좋아요 1 | URL
s다락방은 또 뭐람? 시스터다락방 뭐 이런건가?
제 생각엔 1등은 해본 사람만 하는 것 같아요.
(냅다 튄다)

cyrus 2019-11-01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 참 빨리 가죠? 두 달 지나면 ‘원더키디’의 해네요... ㅎㅎㅎㅎ

syo 2019-11-01 20:1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미쳤어요..... 내 나이 미쳤어....

2019-11-01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부분 글이 웃기네요ㅋㅋㅋㅋㅋ

syo 2019-11-01 22:51   좋아요 0 | URL
웃긴 놈들이었으니까요 ㅎㅎㅎ

Angela 2019-11-0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공감합니다. 오늘은 사랑, 내일은 아무도 모르죠^^

syo 2019-11-02 20:58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로 공감은 하지만 최소한 내일의, 아니 일주일의 사랑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면 좋겠습니다. 저건 너무 힘들죠.....
 

 

입을 다물면 작아지는 사람

 

 

흐린 밤에 우주를 올려다보는 일처럼, 세계엔 어떤 명징한 일들이 잔뜩 있지만 단지 눈이 흐려 찾을 수 없거나 언어가 궁핍하여 드러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 공대생이 있었다. 그는 눈에 맞는 안경을 만들겠다며 도서관을 들쑤셨고, 생각과 말 사이에 드리운 검은 장막을 저미어보겠다며 키보드의 날을 날카롭게 고쳐 세웠다.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다. 사물은 사물로서 존재하고 사람은 사물을 발굴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거라 여겼으니, 공대생은 유물론적 관념론자 비슷한 존재였다. 존재 자체가 모순이었다.

 

진실은 언제나 한끝, 일말이었고, 세계의 동력은 모순이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지구의 중력 때문이고 달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 역시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진실의 배후에 모순이 있었고 모순의 배후에 진실이 있었다. 밤새 걸었다고 생각한 술주정뱅이가 아침에 출발지점 근처에서 깨어나 사방에 랜덤으로 찍혀 있는 자신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아연하는 것처럼, 탐구의 길이라 생각하며 소비했던 짧은 맹목의 시간들은 지나고 나서 보니 참 같잖은 것이었다. 의미가 없어서 부러 의미를 부여해야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뭐 하나는 건졌잖소 스스로를 속여야만 좌절을 회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 다시 보건대,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대체로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사물은 단 하나도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사태로서, 견해로서 존재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자신의 무모순성을 주장하는데 모든 모순이 바로 거기서 등장했다. 모순은 존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에 존재했다. 존재와 존재의 사이가 모순으로 그득했다. 그 모순의 밀도가 너무도 농밀하여 도리어 존재가 텅 비어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세계에서 도수 높은 안경과 날카로운 키보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안경이 아니라 공양미 삼백 석과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얼마만큼을 포기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 대해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채기 하나 없는 무색무취의 정신이 두들기는 키보드가 아니라 베이고 찔린 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신음이나 비명의 기록이었다. 방에 들어앉아 책 읽는 이의 환율은 얼마나 평가절상 되어있는지. 목소리를 낮추자 그것만으로 즉시 나는 작아졌다. 지나치게 질소포장 된 과자봉지처럼 나의 존재는 예상보다 작았고, 나는 존재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허공에 흩어지고 들리기 무섭게 잊히는 그 약한 목소리보다 약한 존재라니.

 

이 아침 역시 또 한 겹의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꿈의 꿈 밖에서 무언가 불러 깨우기까지 이 꿈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찾고 해석할지 전전긍긍한다.

 

입을 다물면 더 커지는 사람, 움직임으로 세계를 노 젓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 무더기였다이사 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에 닿지 않았고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천장에 늘 별이 있어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했다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 생각하며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그러면 이상하게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이들이 곳을 지나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꼭 나만 한 크기의 몸을 뉘었을 허약한 자취생과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월급과 적금어디론가 송금할 돈의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을 젊은이들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가진 많은 이들이.

김애란잊기 좋은 이름


물결이 잠시 잠잠해지더니 파도가 다시 그들을 뒤덮었다케빈은 그녀를 세게 끌어당겼고 패티는 그 가느다란 팔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물이 다시 차오르고두 사람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둘이 다시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그의 다리에 뭔가가 걸렸다오래된 파이프였고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번 파도가 다시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한껏 높이 쳐들고 한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키터리지 선생님이 위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패티가 떠내려가지 않게만 하면 되었다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널 놓지 않을게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미친이 우스운알 수 없는 세상이여보라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밀물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등을 돌리고 서면 거기 안서호의 황혼녘에 오리들이 몇 유쾌한 직선을 그으며 나아가고 있었나니나 425호 남의 연구실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대고 그것들의 한없이 자유로운 유영을 지켜보곤 하였으나 내가 저 오리가 되기엔 너무 늙었거나 조금 일렀으며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는데그때쯤이면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오곤 해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여섯시 막차 퇴근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

이시영, <저녁의 몽상전문

 

 

 

--- 읽은 ---

+ 돈이란 무엇인가 / 에릭 로너건 : 74 ~ 214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311 ~ 501

+ 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 / 파멜라 투르슈웰 : 119 ~ 287

 

 

--- 읽는 ---

- 왜 칸트인가 / 김상환 : 153 ~ 227

- 2의 성 1 / 시몬 드 보부아르 : 34 ~ 90

-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김기찬 외 :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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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9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2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물의 저 부분은 저도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

syo 2019-10-29 11:25   좋아요 0 | URL
<밀물>하면 역시 저 부분이죠.

저 부분은 표현이나 의미도 좋지만, 형식상으로도 영화나 음악, 그림 같은 다른 매체로 깔끔하게 컨버젼하기 어려운, 소설의 특색을 잘 드러내잖아요.

너무 좋아요.
 

 

 

 

1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의 편이다. 아닌 척 할 수는 있어도 아닐 수는 없다. 모두를 위로할 순 있어도 결국 곁에 가서 함께 서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를 둘로 쪼개 두 어깨를 다 결을 순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선명하고 벌써 명백하다. 그냥 그 위에 이런저런 덧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기술이고 동시에 사회보존의 기술이다. 꼭 필요한 아름다운 셈법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법은 아니다.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다른 장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발을 떼면, 반드시 그 발은 어느 한 군데로 디뎌지게 되어 있다. 그때는 망설여서는 안 된다. 망설일 이유가 없고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명백하고 벌써 선명하다. 충분하다.

 

 

 

2

 

가장자리부터 말라가는 것이 아니다. 말라가는 곳부터 가장자리다.

 

 

 

3

 

그 곁에 서고 싶다.

 

 

 

계속 살아가기로 했으니까요세상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살기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저는 다른 사랑을 발명했어요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사람이 적어요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어요혐오를 사랑할 수는 없어요혐오하는 사람들한테 우린소음이나 먼지나 비닐 같은 것밖에 안 되겠죠.

윤이형님프들


새 길을 여는 시도는 항상 어떤 다른 길은 닫거나 잊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그리고 어떤 해결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항상 현실을 단순하게 만들 위험 또한 안고 있다그래서 분석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사유의 폭을 넓힘으로써 현실의 좁은 돌파점을 찾는 일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돌파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세상은 꽉 짜여 있는지를 세밀히 살펴야 한다그리고 그것을 서로 겹처진 시간의 리듬 속에서 다시 쌓아보고거기서 균열의 틈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백승욱생각하는 마르크스 

 

이런 잡문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순간의 열기로 휘갈겨 쓴 글들이 잠깐 동안은 그럴 듯하게 보일지 모른다하지만 내일이 되면아니 오늘밤에 벌써 상하고밍밍하고낡아 보인다그리고 항상 버려지고 마는 불에 익힌 붉은 대하 껍질과는 달리그 껍데기가 길을 가는 당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니체는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피로 쓰고 피로 말한 것을 책장을 넘기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책장이나 들춰보고 화면이나 스크롤하는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 하는 말이다진리에 베인 적도 없으면서 진리란 날카로운 것이라고 폼 잡으며 말하는 사름들문구용 칼에 베여본 아이도 그것을 기억할 때는 얼굴을 찡그리는데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무런 통증도 없이 말해왔다.

고병권묵묵

 

 

--- 읽은 ---

+ 작심 3일 파이썬 / 황덕창 : ~ 259

+ 서서비행 / 금정연 : 258 ~ 394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77 ~ 168

+ 작은마음동호회 / 윤이형 : 233 ~ 354

 

 

--- 읽는 ---

-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 ~ 107

- 왜 칸트인가 / 김상황 : ~ 153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 노명식 : ~ 56

- 돈이란 무엇인가 / 에릭 로너건 : ~ 74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169 ~ 311

- 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 / 파멜라 투르슈웰 :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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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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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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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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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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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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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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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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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늘 작은 마음이 있어

 

 

1

 

왜 책을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런 질문도 어지간할 때 받는 건가 보다. 요즘도 책 많이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요즘도 책 많이 읽지? 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해주면, 몇 권쯤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냥 굉장히 배부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우린 한 권도 안 읽지만 너라도 읽어서 우리 그룹의 평균 독서량은 언제나 든든하구나야- 하는 표정 같다. 좋은 책 좀 추천해달라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장르나 주제를 정하지 않은 채 포괄적으로 던지는 책 요청은 상당히 귀찮고, 번거롭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공짜로 해주기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아예 저런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쪽이 현명하다. , 최근에 벤야민하고 아도르노 1928년부터 40년까지 주고받은 서간들을 모아 놓은 책이 한 권 나왔어.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꽤 흥미로울 것 같지 않아? 꽤 흥미로울 것 같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이야기는 재빨리 주택청약 가점과 관련된 주제로 전환되었다. syo는 유유히 커피를 마시며 속웃음을 지었다. 그게 지난 8월이었다. 석 달 가까이 되어 다시 만난 친구들은 더는 책 추천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차피 뭘 불러줘도 너희는 읽지 않을 것이고, 뭘 불러줘도 그 이상을 나는 읽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이렇게 얄팍한 방식으로 자존심을 세워가며 친구들을 만나 왔다. 나도 뭐 하나 남다른 구석이 있어. 자본이 그것에다 가격은 매겨주지 않지만, 헛살지 않았음을 증명할 뭔가를 나도 하나쯤 쥐고 있어.

 

생각해보면 참 좋은 애들이다. 어차피 진짜로 책에 관심이 있어서 저렇게 물어오는 게 아니라 그저 가진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나 기죽지 말라고, 어깨 펴라고, 당당하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잘난 척 한 번 시원하게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안다. 내 친구들은 이렇게 어른이다. 나만 얼른 어른이 되면 된다.

 

 

나의 일기장이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내가 사랑하는 것들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일기에 적고 싶다나의 열망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가을을 향해 가지만아직은 따뜻한 태양과 봄기운 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새싹과 같다비록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나 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여물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그러나 느끼고만 있을 뿐 그 정체를 알 수는 없다단지 땅이 기름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지금이 나에게는 파종기다이제 싹을 틔어도 좋을만큼 충분히 오래 땅속에 묻혀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는지가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다만 길의 끝에서 나부끼는 깃발종착지에 대한 거창한 소문들이 지금의 걸음걸이를 얼마나 망쳐 놓았는지 알 것 같다급작스레 찾아온 노안처럼 먼 데를 보다가 정작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먼 데 소문에 귀를 기울이느라 옆에서 소매를 붙들고 말 건네는 존재가 있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병권묵묵

 

 

 

 

2

 

사랑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사랑이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그 진실을 궁금해 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 때, 터진 사랑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건 빠를수록 좋다. 사랑의 말은 파괴의 말이다. 어쨌든 사랑이 말을 시작하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관계는 한 번은 반드시 부서진다. 내 사랑이 말로 당신을 겨냥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된다. 우주의 에너지는 반드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계는 머지않아 반드시 이것 혹은 저것이 되고 만다. 사랑의 주인이 젊고 노련하지 못할수록 사랑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의 일을 사랑에게 내맡기는 것은 대개 실패 쪽으로 길을 잡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묶어 말이라고 하자. 말과 말을 둘러싼 정탐, 실험, 정교한 예측이 필요하다. 말과 사랑의 변증법이 이렇다. 사랑 없는 말은 빈약하거나 사기다. 말 없는 사랑은 섣부르거나 위험하다. 사랑 없는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말 없는 사랑은 하면 안 될 때 멍청한 말을 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나 실패다. 단지 유예되는지 즉시 도착하는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랑이 할 말이 없을 때, 말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을 때, 말로 하여금 사랑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문정희미친 약속〉 부분 

 

 

3



자꾸만 실수를 한다자꾸만 잊어버린다재윤이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를너는 저쪽이니까너를 응원한다고 애써 선의로 건넨 것이앞질러버린다잘못 짚어서오히려 건드려버리고 만다재윤은 이제 달라졌으니까 어떤 건 겪지 않아도 될 거라고 나는 자꾸 생각해버렸지만그렇지 않았다재윤은 '달라지는 중'이었고거기에는 이쪽과 저쪽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나는 어떤 것들이 재윤에게 괜찮고 어떤 것들이 괜찮지 않은지 여전히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몰랐다.

윤이형마흔셋

 

다른 것들, 모르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게 두드리려는 태도, 그 열심, 단단한 의지 같은 것들이 빛난다. 소설 쓰기는 어쩌면 이름 모를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하는 데 의미가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쓰는 이들은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자기 손끝에서 만들어 자기가 가지는 혜택을 부여받은 사람들 같다. 쓰기 전의 윤이형과 쓰고 난 후의 윤이형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나는 끝내 그것을 잘 모를 것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모를 것이다.

 

 

 

--- 읽은 ---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258 ~ 400

+ 지적 생활의 설계 / 호리 마사타케 : ~ 255

+ 사서 / 옌롄커 : 383 ~ 538

+ 마르크스 철학 연습 / 한형식 : 82 ~ 163

+ Do it! 점프 투 파이썬 / 박응용 : 215 ~ 356

 

 

--- 읽는 ---

-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 조관희 : ~ 79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 169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 77

-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의 초대 / 박병철 : ~ 152

- 작은마음동호회 / 윤이형 : 130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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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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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5 2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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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2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다 비밀댓글 뿐일까요?

syo 2019-10-25 23: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개인적으로 비댓이 스타일이신 분과, 비행기를 너무 쎄게 태우려다보니 민망해서 비댓으로 돌리신 분이 계세요. 비밀이지만 아름다운 댓글들입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9-10-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술 마셨게요 안마셨게요?

syo 2019-10-25 23:51   좋아요 0 | URL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어요?? ㅎ

stella.K 2019-10-2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전 이제 누구한테 책 선물하는 게
좀 어색하더라구요.
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강요하는 건 아닐까.
좋아할까, 시간 뺏는 건 아닐까, 이미 아는데 또 선물하는 건 아닐까 등등으로 해서.
하긴 남한테 하는 선물은 항상 고민스럽더군요.

syo 2019-10-27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책 선물 하는 일 자체가 잘 없지만,
할 때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하는 편입니다.
어차피 상대가 이 책을 읽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지 않거든요.
읽은들, 제가 좋을 일도 아니고 남아도 읽는 사람한테 남는 건데요.
팔자소관이지요......

2019-10-29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의식의 85가지 얼굴 - 후설 현상학의 주요 개념들
조광제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안녕, 친구들? 철학 꼬꼬마들을 위한 숨은 명저 소개 시간이야. 나는 알라딘에서 분노의 포도알갱이를 맡고 있는 syo라고 해. 사람들은 나를 미친 개론서 덕후, 줄여서 미개덕이라 부르나 봐. 미개하고 좋은 별명이야. 신난다.

 

오늘 syo가 여러분에게 팔아먹을, 아차차, 소개할 책은 바로 조광제 선생님의 2008년 작, 의식의 85가지 얼굴이란다! 어때? 제목부터 섹시하지? 해리 포터 쌈 싸먹을 아광속으로 전 세계를 돌며 실컷 팔아먹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아? 하지만 슬프게도 그 책과는 달라. 달라도 너무 다르단다. 조금이라도 비슷했다면, 그레이처럼 5페이지마다는 아니더라도 한 50페이지 정도에서 한 번이라도 해줬(?)으면, 그랬다면 친구들아, 친구들도 알았겠지, 이 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근데, 친구들, 어때? 몰랐지? 처음 보지, 이 책? 각설하고,

 

제목을 보면 무슨 심리학책이거나 정신분석학을 다룬 책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은 현상학이라는 철학 분야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 대한 개론서야. 현상학이란 말, 다들 한 번씩 들어봤지? 이런, syo가 우리 친구들을 너무 무시했구나. 이런 쪼다같은 질문이나 던지고. 당연히 다 알겠지, 현상학. 상식이잖아? 초등학교에서 구구단 9단까지 다 배우고 나면 선생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9단까지 외웠으니 이제 현상학을 배워볼까? 하면서 다 가르쳐주시잖아. 구구단 배우고 현상학 배우고 나눗셈 배우잖아. 그 다음에 분수 배우고…… 표정들이 왜 그래? 내가 무슨 천하의 개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 안 돼. 농담이었어. 돌아와 친구들아! 각설할게…….

 

그럼 우리, 현상학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 볼까? 현상학이란 말이야, 현상에 관한 학문이야. , 친구야, 지금 노려봤어? 더 말해 줄게. 현상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가 우리 의식에 뿅! 하고 등장한다는 뜻이야. 아야, 던지지 마. 더 말해 줄까? 그렇다면 Insert Coin…… 역시 농담이었어. 이제 안 가는구나? 그럼 우리 의식에 뿅! 하고 등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뭘 배워야 하는 걸까? 그게 현상학의 핵심 질문이지. 예를 들어, syo가 코를 잘 파서 둥글고 노릇노릇한 코딱지 하나를 꺼냈다고 생각해 봐. 물론 실제로 파지 않았어. 믿어 줘. 못 믿겠다고? 맞아. 못 믿을 노릇이야. 내 앞에 파놓은 저 코딱지가 진짜 코딱지야? 코딱지라 부르기 위해 응당 갖춰야 할 것들은 무엇이지? 이 코딱지의 윗면, 아랫면, 좌우 측면을 확인할 수는 있는데, 코딱지의 전체적인 실체는 한 번에 지각할 수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의식하는 코딱지와 지금 눈앞의 코딱지가 일치할까? 코딱지를 판다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이지? 내 의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방금 코딱지를 판 놈이 지금 나하고 같은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지? 뭐 이런 것들이 현상학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질문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라고 할까. 재미없었지? 재미없으면 각설하자.

 

후설 선생님 같이 배운 분이 저런 고민들을 해결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걸 보면, 뭐랄까, 식자우환이랄까, 무서워서 코도 함부로 못 파겠어. 손가락에 묻은 코딱지를 보며 세 시간씩 사색에 잠기는 모습을 상상해 봐. 차라리 못 배우고 고민 없이 살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까지 해. 그렇지만 뜻밖에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저런 질문들은 수천 년을 이어온 핵심질문들이었나 봐. 그 질문들에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만든 철학자들이 모여 하나의 분야를 이루거든. 구조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분석철학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것들 있잖아. 그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이 후설 쌤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하니, 엄청 위대한 사람 아니겠어? 데리다라는 사람 알아? 그거 아주 무서운 인간이야. 읽다 보면 책을 완전 해체해버리고 싶게 만들거든. 그 사람이 학위논문 겸 최초 저작으로 낸 책이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라는 제목이야. 레비나스라고 들어봤어? 데리다보다 한 세대 정도 위의 철학자인데, 이 사람은 실제로 후설쌤 밑에서 배웠나봐. 이 사람은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이라는 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 사르트르라는 또 다른 유명한 사람이 있지. 어느 날 친구 레몽 아롱이랑 여친 보부아르랑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는데, 이노무 레몽 아롱새끼아차, 미안 미안, 이 친구 레몽 아롱이가 자기보다 먼저 현상학이라는 것에 대해 배우고 거들먹거리더래. 자존심이 상해가지고 아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점에 달려갔다지. 현상학에 관한 책을 싹 다 내놓으시오! 그랬더니 점원이 뭐지 이 찐따는, 하는 표정으로 서점을 뒤지고 뒤지더니 꼴랑 레비나스의 저 책 하나 주더래. 사르트르는 그 후 1년을 꼬박 현상학에 목을 맸대나 봐. 어지간히 지기 싫었나 봐. 헤겔, 후설과 함께 3H(반드시 3 Hell의 약자일 거야)이라 불린 하이데거가 후설의 조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명하지. 후설 쌤의 위상이 뭐 이 정도야. 근데 우리 친구들은 후설 쌤을 잘 모르잖아. 그치? 헤겔이나 하이데거는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거야, 그치? 그런데 3H로 함께 묶인다는 후설 쌤은 왜 이렇게 인지도가 떨어지는 걸까? syo도 그것이 알고 싶어. 각설하기 전에,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말야, , 이제 내가 철학에 관한 책도 좀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 때가 오잖아. 그런 기분, 한두 번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있지만, 마주칠 때마다 점점 더 큰 부담으로 다가 오고 그러지 않아? 그러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울며 겨자 먹기로 철학책 서가를 기웃기웃 거리게 되는데 말야, 책 고르기가 너무 어렵잖아! 철학자 고르기도 너무 어렵고! 누구를 읽으려면 누구를 읽어야 한다는데, 그 계본지 족본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 그럴 때 친구들아, 너희들의 곁에는 알라딘의 미개덕, 누가 미더덕이래? 알라딘의 미개덕, syo가 있잖아. 알려 줄게.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큰 관심은 없다, !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시간은 없다, !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의지는 없다, !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기본 소양이 없다, ! 손든 친구들아, 개론서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해. 한국에서 개론서로 공부하기 좋은 철학자 세 명을 알려줄게. 바로 마니프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순서대로,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지. 마니프에서 시작하렴. 얘들 관련해서는 정말 배운 거 하나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해도 꽤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많은 책들이 나와 있거든. 수준별 단계별 학습도 가능한 실정이야. 물론 이 세 명을 권하는 것이 단지 개론서가 많다는 이유 때문은 아냐. 자체로 중요한 사람들이거든. 철학사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위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세 명이지. 그래서 개론서도 많은 거고. 알겠지? 이 세 명에서 한 명을 더 덧붙인다면 우선 푸코를, 그리고 한 명 더 권할 기회를 준다면 후설 쌤을 추천할게. 푸코는 뜻밖에 푸코만 가지고도 웬만큼 읽어지고, 후설은 앞이 없거든. 후설이 시작이야. 현상학의 시작. 선행학습이 없어도 되는 철학자라는 게, 야매로 철학공부 하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메리트 있는 특징이거든.

 

물론 눈을 가늘게 뜨고 찾아보면 후설 앞도 있어. 현상학을 똑바로 이야기하려면 후설에 앞서 브렌타노라는 사람을 이야기해야 한다더라. 브렌타노라니, 들어는 봤어? syo는 미취학 아동일 때 그런 이름의 상표가 붙은 티셔츠를 입었던 기억이야. 노랑색 갈색 줄무늬였는데, 참 아끼던 티셔츠였지……. 브렌타노 검색하면 책 한 권 나와. 의미 없다는 이야기야. 그게 의미 있는 사람들한테는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한테는 그 사람들조차도 의미가 없는 게 현실이야. 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어? 또 플라톤이야? , 생각해 봐. 내가 내 여친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단군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싸그리 사랑하는 게, 과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겠냐고. 각설하고,

 

사실 후설에 대해 땅바닥부터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야. 후설 냄새 좀 맡아본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은 생각보다 탄탄하게 구비되어 있어. 심지어 후설의 자신의 저작은, 헤겔이나 하이데거보다 훨씬 더 많이 번역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 주저라 할 만한 것들은 거의 다 번역이 되어 있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까? 그 많은 후설의 저서들을 이종훈 선생님이 거의 도맡아 번역하고 있다는 거야. 검색해서 이걸 찍어도 이종훈, 저걸 찍어도 이종훈, 이종훈, 이종훈, 이종훈이야. 사물과 공간이라는 책만 빼면 전부 이종훈 선생님의 이름을 달고 있지. 이종훈 선생님께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 올리고 싶은 심정이야. 왜냐고? 그 이유는 더 놀라워. 바로 후설이 범인이지. 후설은 생전에 4절지 크기 4만장의 원고를 남겼대. ~ 4만 장. 하루에 한 장 쓰기도 빡센데. 229일은 쉬어주고 하루에 한 장씩 쓰면 4만 장 쓰는데 109.589년이 걸리지. 심지어 4절지는 한 장 넓이가 A43장도 넘어. 심지어 잡소리 없이 철학적 내용을 담은 원고로만 그랬대잖아. 지금 이 A4 3장정도 되는 뻘소리를 쓰기 위해서 syo가 얼마나 낑낑대고 있는지, 친구들아 아니? 지금도 세계 모처의 어둠 속에서 후설 전집이 30권인지 40권인지를 돌파하고 계속 간행되고 있대. 하늘이시여, 제발 이종훈 선생님의 120살 생신잔치에 축하 떡을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각설하고 다시,

 

사실 후설에 대해 쌩판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기에 좋은 책들이 그다지 없는 실정이야. 이 책 역시 그런 면이 있어. syo에게는 말야, 국내 출간된 이런저런 개론서들을 뒤지고, 그러다 개론서한테 뒤지고, 이해가 안 되는 개론서들을 내동댕이치고, 그러다 이해가 안 되는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정신이 들면 다시 또 읽고, 그러다 정신이 나가면 다시 또 울고, 이런 애달픈 반복을 통해 근본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확보해 놓은 후설에 대한 선이해가 있었어. 그 덕에 이 책 의식의 85가지 얼굴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를 느낄 수 있었지. 이 책은 후설의 개념들을 따박따박 개념 단위로 설명을 해 주거든. 뭐랄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참고서 같달까? 철학 분야에는 뜻밖에 그런 식으로 다소 유치할 정도로 조목조목 알려주는 개론서가 드물어. 일본에서 건너온 애들이 그런 건 잘하지.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만 알면 5분 안에 철학사를 정리해서 발표할 수 있다! 이걸로 당신은 승진과 사랑을 모두 쟁취할 수 있다! 뭐 그런 멘트들이 표지나 띠지에 떡 박혀있는 책들 말이야.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어디서 약을 팔어 팔긴- 싶으면서도 사실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거든. 잘 모를 때는 더욱 그렇지. 이 책은 당연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후설이 사람 이름인줄도 몰랐던 친구들에게는 이 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일거야. 그런 친구들은 준비운동이 조금은 필요해. 도서관에 가면 한 권에 여러 명의 철학자들을 짧고 간단하게 다루는 종류의 철학책들이 많아. 그런 책들에서 후설이나 현상학에 관련된 꼭지들을 발췌해서 읽으면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 거야.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잠깐씩 시간을 내서 한 꼭지 읽고 돌아오는 여유를 부리면 어떨까? 지금 이 글이 페이퍼였으면 그런 책들을 주욱 나열해 줄 텐데, 이 모양 이 꼴이라도 이게 지금 리뷰란다. ~~ ~~

 

이 글에서 후설의 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론해주기를 바랐던 친구들이 있다면, 반성의 댓글을 달도록 해. 그러지 않을 거야. 개론서를 개론하는 건 슬픈 일이거든. 그게 가능하다면 개론의 개론의 개론도 가능하겠지. 개론의 개론의 개론의 개론도 가능할거야. 그러다 결국 딱 한 줄로 줄어들어 버리면 좋을까? 아마 싫을 걸? 봐봐. 현상학이란 말이야, 현상에 대한 학문이야. 어때? syo가 아까 이렇게 말했을 때 친구들, 날 죽일 듯이 노려봤잖아? 이 말을 사전이 그러는 것처럼, 현상학은 세계와 그 내부의 다양한 실재적 또는 상상적인 대상의 존재를 세계가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과 그 구조를 통해서 연구해가는 학문이다- 라고 길게 말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친구들아. 나아지려면, 우리가 읽어야 해.

 

오늘은 이쯤에서 각설할까? 하도 여기저기 각설했더니 각설이라도 된 기분이야. 앞으로는 미개덕보다 각설이라고 불러줘도 좋겠다. 별명이 많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잖아? 야구판에는 별명이 하도 많아서 별명이 김별명인 선수가 있는데 말이야, 각설할까?

 

그럼 철학 꼬꼬마 친구들, syo는 다음 시간에 다른 책을 팔러, 아니아니, 소개하러 다시 돌아올게.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각설이처럼. , 인사할까? 친구들, 안녕~~~~~


 

나라고 해서 이렇게 살고 싶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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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과도기 2019-10-2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설의 이름은 철학 입문서에서 두어번 접한 적이 있습니다만, 후설의 철학적 위상을 이토록 간명하게 이해시켜 주시다니... 정말 탁월한 글이어서 다른 읽을 책을 제쳐두고 도서관에서 언급하신 책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문체와 글의 흐름이 너무 맛깔나고 자연스러웠서 좋았습니다. 유튜브 클립을 보는 듯한!

(쓰고 보니 낄끼빠빠 못하는 비평가처럼 적었습니다만... 그만큼 좋은 syo님의 글 중 유독 좋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syo 2019-10-23 08:50   좋아요 0 | URL
과도기님 과찬이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겉핥기 정보를 잔재주로 부풀려서 쓴 리뷰예요. syo의 글이 언제나 그렇듯이요 ㅎㅎㅎㅎㅎ

좋은 책인데, 폐가 아닐지ㅎ

반유행열반인 2019-10-23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기립 박수 치고 눈물 닦고...) 출판사님, 무덤에 계신 후설 선생님, syo에게 입금하세요. 계좌는 이 아래에 달릴 겁니다.
(지금 수많은 알라디너가 주문하기를 누르고 절판 서적을 찾아 도서관으로 달려가 후후후후후설이요! 를 외치고 있습니다. 판매 인센티브 좀 떼 줘야죠)

syo 2019-10-23 08:51   좋아요 1 | URL
후설 쌤이 보면 입금은 커녕 현상학적으로 혀를 찰 겁니다ㅋㅋㅋ
우리 철학 꼬꼬마 친구들이 꼬꼬마라서 넘 다행이야 ㅎㅎ

수이 2019-10-23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_ 짱이야. 철학 꼬꼬마 아줌마는 막 물개 박수 쳤잖아요, 아침부터.

syo 2019-10-23 08:52   좋아요 0 | URL
아침 나절에 작은 미소 한 방 실어 나를 수 있었으면 된 거죠 ㅎㅎㅎ

페넬로페 2019-10-2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샘!
철학 꼬꼬꼬마 학생인 저!
강의 잘 들었어요^^
다시오는 각설이~~
기다릴께요**

syo 2019-10-23 08:53   좋아요 0 | URL
사실 아무도 안 만들어주는 별명 지가 스스로 만들어서 퍼뜨리네요ㅎㅎㅎㅎ
각설이는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10-23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다..

그리고 나 미더덕하고 각설하고 가지고 댓글 쓸랬더니 쇼님이 다 선수쳤네요? ㅎㅎ

syo 2019-10-23 08: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예상 범위 안에 포획되셨어요? 사실 미더덕은 놓칠 뻔 했습니다.....

bookholic 2019-10-23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소개하지 마시고
책을 쓰시라니까요^^

syo 2019-10-23 08:56   좋아요 1 | URL
북홀릭님 오랜만입니다 ㅎㅎㅎ
아차, 생각해보니 이건 북홀릭님 리뷰스타일을 훔쳐낸 셈이군요.....

다락방 2019-10-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거 공부한 종이... 너무 좋다. 나는 저런 사진에 페티쉬 있어요, 진짜.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syo 2019-10-23 08:59   좋아요 0 | URL
공부한 종이라기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종이에 가까워요. 정신차려보니 똥그란 얼굴 막 그리고 있더라니까.....

다락방 2019-10-23 09:02   좋아요 0 | URL
저거 사진이 옆으로 누워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저거 사진 클릭해서 막 고개를 구십도로 꺽고 읽으려고 시도했다. 몇 번이나..
수학 문제였으면 저는 벌써 기절했을거에요.. 너무 멋져서.........

syo 2019-10-23 09:05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사진을 자꾸 제 맘대로 돌려요. 무조건 옆으로 긴 사진만 올라가나봐.... 다음 번에는 수학 푼 거 올려 볼까? 구몬 수학이지만.....

단발머리 2019-10-23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 너무 쉬운 여자인가. 첫 줄부터 웃음보 터져 버렸어요. 끝까지 읽으면서 줄어드는 문단들이 넘넘 아쉽네요.
얼른 다시 돌아와요, 각설씨!!!

syo 2019-10-23 22:09   좋아요 0 | URL
각설이 never die.....

stella.K 2019-10-23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리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군요.
철학 특히 현상학 공부 안 해도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데
스요님이야 말로 알라딘을 넘어 진정한 독서계의 미개덕이로군요.
그런데 이 책이 품절이라니.
이달의 리뷰로 점 찍고 싶은데 과연 알라딘이 품절된 책에 그런 영광을 주기도 할런지
그걸 잘 모르겠네요. 암튼 훌륭합니다!!

syo 2019-10-23 22:11   좋아요 0 | URL
안 하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있는 게 세상에 뭐가 있을까요 ㅎㅎㅎ
요즘은 어떻게든 밥은 먹고 살아지는 세상이잖아요.

이 책이 품절이었다니, 몰랐네요.
사 놓길 잘했지......

스텔라님이 재밌게 읽으셨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이달의 리뷰 그런 거, 각설할게요.

2019-10-2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0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니 철학관련 글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syo 2019-11-01 22:5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재미를 위하여 내실을 포기했으니까요!!

추풍오장원 2019-12-0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서평 읽고 책 사려고 보니 품절이길래 인터넷 검색해보니 한권 남은데 있어 구입했어요. 당장 읽는책이 있어 나중에 읽어야겠지만 기대됩니다^^

syo 2019-12-08 17:13   좋아요 0 | URL
하필 제가 품절된 책에 뽐뿌를 넣었군요..... Comandante님께서 책을 입수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소양이 깊으시니, 후딱 읽고 넘기실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