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화 몹시 나 있어

 

 

1

 

가끔 야한 꿈을 꾸는데, 좋다. 자는 것도 좋은데 꿈까지 그래주면 그저 땡큐지. 스노클링하다가 전복 줍는 기분이 된다.

 

 

 

2

 

그렇지만 어쩐지 꿈에서는 역사가 완결되는 일이 잘 없다. , 지금 내가 63빌딩을 짓고 있구나, 보아하니 여기는 45층이구나, 50층이구나, 55층이로구나, 신난다. 가자, 60……아슈발꿈.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3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대체 왜 이런 꿈을 꾸었나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 듯.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이유 따윈 생각하지 않지. 생각해봤자 득될 건 하나도 없고, 까딱하면 스스로의 밑바닥을 목도하고 비참해질 위험도 있다. 그런 건 필요없다. 나는 그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눈을 떴는가를 곰곰 생각해볼 뿐이다…….

 

 

 

4

 

그러니까, 분명히 내가 왼손으로 쓸어내리던 것이 내 허리에 감겨 있던 그 사람의 오른쪽 허벅지였거든, 그래서 내가…… --- 자체 검열 --- ……되고 말았으니 그쪽 입장에서는 웃음이 터질밖에. 근데 또 그 웃음소리가 섹시한 거라, 돌연 나는…… --- syo는 방송심의규정을 준수합니다 --- ……잡았지. 그러자 손 틈새로…… --- 메롱 --- ……는 찰나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랬으니 모닝커피를 마시는 내 표정이 좋았겠냐고.

 

 

 

5

 

꿈에서 이거 정말 꿈 같아라는 대사를 치고 그 즉시 깨어본 적이 있다.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나는 현실에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좀 꿈 같다 싶으면 이런 말을 할 생각이다. “, 이거 정말 현실 같다.”

 

 

 

 

--- 읽은 ---



114.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케이코리아 / 2015

 

스토너의 삶이 조용하고 담담한 국면에서는 소설의 문장도 조용하고 담담하다. 그가 격정의 터널을 통과할 때, 문장도 뜨겁고 거세어진다. 그런 일체감이 아름답다. 이야기가 아름답거나 문장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뭉쳐져 한 권의 책으로 아름다워지는 데는 또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스토너가 스토너의 삶을 사는 동안, 작가 역시 그 삶을 함께 살았겠다- 그런 추측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같은 것.

 

 

 

115. 일도 사랑도 일단 한잔 마시고

권용득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

 

요즘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은 술을 참 좋아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남자놈들이야 술 잘 못 먹으면 등신 취급 받는 10~20대를 지나쳐 왔으므로 자기최면으로라도 기어이 술 좋아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고, 여자들은 여자가 술 안 즐길 거라는 편견과 싸우는 일을 일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들처럼 마셔댄다. 막 남자보다 술- 을 외친다(그러나 남자들은 절대 여자보다 술-을 외치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저는 술을 싫어해요. 술도 싫고 술자리 분위기도 싫어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딱 1명 만나봤다. 그게 나다. syo.

 

뭔가를 저렇게 즐긴다는 것, 기쁜 마음으로 매일 꾸준히 해나간다는 일이 있다는 건 그게 술이건 뭐건 대단한 일이고, syo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 >>>>> > 술 아닙니까…….

 

제목을 대충 읽으면 오해한다. 일이나 사랑보다 일단 술이라는 것은, 술을 위해 일과 사랑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사랑을 술로 버무린다는 뜻에 가까웠다. 특히 사랑을. 사랑하는 김혼비 선생님의 대작 <아무튼, >에서도 그렇고, 김민철 선생님의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도 그랬지만, 진짜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짜 술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술과 술로 점철된 사랑을 술술 이루어나간다. 그 지점은 아무래도 내가 도달할 수 없겠다. 부럽기도 하고 안 부럽기도 하고 하여튼 희한한 감정이다.

 

술 싫어하는 사람 구해요…….

 

 

 


116. 니체에게 길을 묻다

알란 페르시 지음 / 이용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3

 

니체 책이 제일 많다. 마르크스도 프로이트도 꽤 있지만, 아무래도 니체는 이길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로는 힐링스러운 책을 만들기가 영 어렵가 때문이다. 힐링은커녕 읽을수록 이래저래 뭔가 참담해지는 기분만 든다. , 이놈의 세계는 왜 이렇게 신산하며, 나의 내면은 또 왜 이렇게 산만한가. 반면 니체는 그런 방식으로 소모하기 썩 괜찮다. 니체의 말, 니체와 함께 어디 놀러 가기, 니체한테 듣는 인생 매뉴얼, 이런 걸 제작하기 수월하도록, 니체 당신이 그렇게 철학을 했다. 그래서 니체의 아포리즘을 가지고 만든 책의 옥석을 가리기는 너무 어렵다…….

 


 

 

117. 일 잘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 생각한다

오가와 히토시 지음 / 조은아 옮김 / 팬덤북스 / 2020

 

클라우드라는 게 있다. 이러이러하다. 그런데 철학자 들뢰즈가 제창한 용어 가운데 리좀이라는 게 있다. 그게 참 클라우드랑 닮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클라우드를 이용해야 하고, 사고방식도 클라우드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상위 1%가 될 수 있다!

 

시종일관 이런 식이다. 각 분야에 해당하는 낱개정보는 간단한 검색으로도 얻을 수 있는 수준이라서 버무리기라도 잘해야 하는데, 이건 뭐 조합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그냥 배치’, ‘옆에 둠수준이다. 칸트와 3D프린터의 배치는 그냥 어거지고 ‘3D프린터적 사고’=‘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실제로 만들면 얼마나 기쁠지 상상해보는 것이라는 도식은 혀를 차게 만드는데, 그 결과 태어난 칸트적 사고 ->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실제로 만들면~’ 라는 괴물은 어떻게든 책을 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 이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 읽는 ---

꼭 같이 사는 것처럼 / 임현정

설민석의 삼국지 2 / 설민석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 텐진 갸초

새로운 공부가 온다 / 안상헌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 / 이효원

인생을 바꾸는 결혼 수업 / 남인숙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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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8-29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맥주랑 사과주랑 합쳐서 오백밀리 먹고 얼굴 새빨개져서 꿈없이 지금껏 푹 잤어요. 그거 말고는 술이 장점이 없네요. 오늘의 꿈은 완결편(?)이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꿈 자체가 원래 되게 파편적 아닌가요...완결편 꾸고도 일어나면 부분부분 까 먹고...

syo 2020-08-29 10:20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완결이 났다면 완결이 났다는 사실만큼은 까먹지 않을 겁니다....
야한 꿈이라는 게 그런 장점이 있잖아요.
자주 꾸는 편은 또 아니라서 다음 차례는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감은빛 2020-08-29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야한 꿈보다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인데, ,루시드 드림이라고 부르는 그 자각몽도 자주 꾸는 것 같아요. 악몽을 꾸는 중에 흐름 상 이거 꿈인 것 같아 라고 느끼는 경우가 잦은 듯해요.

야한 꿈을 꾸신 쇼님이 부러워 제 경우를 애써 기억해보니 어떤 장면이나 행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 사랑하는 느낌을 느낀다거나, 사랑인가 싶은 묘한 감정을 깨달을 때가 오히려 기분이 짜릿해지는 야한 꿈(제 기준으로)이 아닌가 싶어요.

담에 쇼님께 야한 꿈 잘 꾸는 비결을 전수받아야겠어요. ㅎㅎ

syo 2020-08-29 10:23   좋아요 0 | URL
꿈이다 보니 더 충만해지는 뭔가가 있잖아요. 야한 꿈이 야한 일의 대체재가 될 수 없듯이, 야한 꿈 역시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그만의 즐거움이 있어서, 깨고나면 사라질 허망한 이미지인데도 즐겁습니다.

blanca 2020-08-29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놀랍죠. 그냥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 같아요. 사랑 이야기도 너무 좋고. 와, 그런데 syo님은 병렬 독서네요.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으시는 건가요?

syo 2020-09-04 07:31   좋아요 0 | URL
네. 쭈욱 깔아놓고 뒤적뒤적 읽고 있습니다. 근데 요즘 이렇게 읽으면 안되겠다 싶어졌어요....

페크pek0501 2020-08-29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꿈은 맑은 강에서 혼자 수영을 하는 거요. 물이 적당히 차가워 시원하게 물 속에서 노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무지 행복해서 마구 웃었다는...
그 이후로 안 꿔지네요. ㅋ

syo 2020-09-04 07:33   좋아요 0 | URL
꿈이 소박(?)하시네요.
보통은 꿈이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을 꼽잖아요. 하늘을 난달지, 세계정복을 한달지...

수영하는 꿈, 자주 꾸시길^-^
저도 제가 좋아하는 꿈 자주 꾸시길....

추풍오장원 2020-08-29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민석의 삼국지는 읽을만 한지 궁금하네요...^^

syo 2020-09-04 07:33   좋아요 1 | URL
그닥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추풍오장원님의 프로필 사진으로 미루어 보건대, 저 책 필요 없으실 듯 ㅎㅎㅎㅎ

공쟝쟝 2020-09-01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눌럿던 것 같은데... ㅎㅎㅎ 사람들 자기꿈 댓글 주르륵 단거 귀여버요..!

syo 2020-09-04 07:34   좋아요 0 | URL
근데 왜 쟝쟝님은 안 달았어??

공쟝쟝 2020-09-04 09:29   좋아요 1 | URL
꿈에 강동원이 로또 번호를 알려주려하는 데....
 


Good-bye, My tiny, little friends

 

 

어릴 적에, 은 이름난 곤충학살자였다. 특히 개미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syo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의 어느 날이었다. 우린 같은 반이었다. 당시 그의 별명은 노인혹은 영감이었는데, 물론 그가 매사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다니긴 했으나, 그보다 일단 기본적으로 도무지 무시가 되지 않는 수준의 노안이었다. 오히려 오늘날 더 젊어 보일 지경인데, 그렇다고 지금도 딱히 동안 취급받는 것은 아니라는 지점이 놀랄 포인트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게 바로 그의 잔인함이다. 교실에서의 은 어느 반에나 있는 조용하고 소심한 아이의 전형이었다. 애들이 할배라고 불러도 짜증 어린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아 이것은 다름 아닌 나를 부르는 소리로구나, 하며 즉각 돌아보는 아이였다. 여자애들을 놀리거나 괴롭히기는커녕 학년이 바뀔 때까지 여자라는 존재와 말 한마디 섞는 꼴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극도의 소심이 아니라 극단의 무심이라는 사실을 그때 눈치챘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요 모양 요 꼴과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래 보였다. 그런 그가 대명4동 놀이터의 3대 악마라 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반전에 나는 이미 너무 놀랐던 거라, 몇 년 뒤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임을 알았을 때 이까짓 거, 하면서 코를 파고 있었다.

 

모든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여 한 마리의 개미를 죽이는 죄와 한 명의 인간을 죽이는 죄의 무게가 같도록 세팅된 저울의 눈금을 읽어 천국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거라고 치자. 만약 그렇다면, 불지옥에서 영원히 구워지면서 , 자신의 왼쪽 옆자리에서 콧수염 단 독일(실은 오스트리아) 남자가 나란히 불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쪽 옆자리에서는 조금 더 넓은 콧수염을 단 러시아(실은 조지아) 남자가……. 하여간 물, , , , 심지어 침까지, 은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명4동 놀이터의 개미들을 살육했고, 그 생태계의 개미가 멸종됨과 동시에 놀이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대명1동 놀이터로 전장을 옮겼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으나, 실상은 그의 관심사가 드래곤 퀘스트와 어른용 비디오 쪽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사춘기가 온 것이다. 춘기가 끝난 것이다. 대명동 개미들의 혹독한 겨울을 종식시킨 것은 독립운동도 핵폭탄도 아니었다. 몇 방울의 호르몬이었다.

 

syo는 달랐다. 전형적인 까불이였고, 날쌘돌이였으며, 귀엽게 생긴 편인데다가, 공부도 곧잘 했다. 심지어 당시에는 잘 살기까지 했다. 그 결과, 반장이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이 정도면 개미 같은 건 괴롭힐 필요가 없었다. 사람을 괴롭히면 되지. 누가 봐도 얘는 이 반의 주인공 자질을 고루 갖추었다. 그리고 반장이므로 곧 정의였다. 아이들은 모두 syo를 좋아했고,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척을 하지 않으면 이 반의 생태계에서 도태될 수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syo 역시 그런 아이들의 알아챔을 알아챘다. 학교 가는 길이 천국 가는 길이었다. 하굣길에 벌써 등교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반짝 유행했던 놀이 중 하나가, 칠판 앞에서 스타트, 정렬된 책상들을 징검다리 밟듯이 밟아가며 교실 뒤쪽까지 빠르게 도착하는 경기(?)였다. 상급자들은 밟을 책상, 밟지 않을 책상을 정해놓기도 했다. syo도 그 놀이를 즐겼다. 어느 쉬는 시간, 다시 게임은 시작되었고 syo는 첫 번째 주자였다. 요이, ! 풀쩍 뛰어올라 첫 번째 책상을 쿵 밟은 syo, 다음 쿵, 그다음 쿵, 또 그다음 쿵, 그다음 찍, 그다음 쿵. 그리고 착지. 그런데 뭐, ? 찍이라고? , 찍 누구야, 나와. ……, 나야, .

 

그 찍이 다름 아닌 이었다. 그러니까 그 찍은, 게으른 이 쉬는 시간에도 교과서를 그대로 책상에 올려놓는 바람에 syo의 발에 깔려 찍 찢겨나가면서 발생한 사운드였던 것이다. , 너 뭐냐? ……미안. , 진짜 다음부터 똑바로 해라. ……그럴게. 이게 무슨 대화냐 하면,

 

s : 야 네가 네 책상 위에 다름 아닌 네 책을 네 맘대로 펴놓는 바람에 나님께서 남의 책상을 한껏 짓밟고 뛰어다닐 수가 없잖아.

: 나의 책상 위에 펼쳐진 나의 책이 감히 너의 실내화 바닥에 무단으로 종이 자국을 남겨버렸구나. 내가 안일하였어. 정말 너무나 미안하다.

 

뭐 이런 분위기였으니, syo는 곤충을 괴롭히며 살아온 역사도 그런 역사를 전개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 그 덕에 오늘날까지 비단결처럼 고운 성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가?

 

작고 미약한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야말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니까, 모든 생명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고 저마다 고귀하니까. 우주의 눈으로 보면 우린 모두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데, 수십조 분의 1의 확률을 뚫고 이 행성에 함께 태어나 살아가는 소중한 나의 곤충 친구들을 죽이다니,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잖아? 그렇잖아?

 

어제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맡에 충전해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는데, 개미가 있었다. 핸드폰 위에 한 마리, 옆에도 한 마리. 눈을 비비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책장과 벽 사이의 틈새에서 작은 개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하며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공간을 너희가 사용하고 있었구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늘 너희와 함께였어. 나는 벅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경건하게 스위치를 누르고, 검색창을 열고 한 자 한 자 때려넣었다. ㅈ ㅏ ㅂ ㅅ ㅡ 라고. 개미에는 이게 직빵이라고. 아주 멸종을 시킨다는 평이다. 멸종이라니, , 너무 설렌다.

 

오늘 택배가 도착했다. 나는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표정이었을 것.

 

지구는 인간의 것이야! 내 거란 말이다, 이 머리가슴배 그지깽깽이들아!

 

 


* 한 줄 요약 : 집에 개미 겁나 많아서 개미약 샀어.

 

 

 

--- 읽은 ---



111. 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리뷰 대회가 있었을 때, syo는 리뷰를 빙자해서 SF 단편을 흉내내보았다. 퀄리티는 그따위지만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동기들 회식도 째고 그걸 썼다. 시원하게 탈락. 탈락은 했지만 그런 짓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쓴 글이 김초엽 만큼은 못 된다 치더라도 김초엽의 절반보다는 훨씬 나아서, 반올림하면 1 김초엽 정도는 가뿐히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놓은 물건도 기대에 썩 부응했다.

 

그리고 여기 문목하가 있고, 나는 이걸 다 읽었는데, 차마 그때와 같은 짓은 할 수가 없겠다. 이건 안 되는 짓이다.

 

 

 

112. 이인

알베르 카뮈 지음 /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

 

빛이 쏟아지는 한여름 운동장에 서 있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땀이 주루룩 흘러내리는데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더운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낮게 일어섰다 몇 걸음 못 가 가라앉는 운동장에, 사람은 없고 바람만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기 때문에 좀 일렁거리는 흙더미가 자꾸만 시선을 잡아챘다. 땀이 흘러 땅에 떨어지자 흙이 진해졌다. 교문 쪽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던 것 같다. 그 소리는 들리면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돌멩이를 찾고 있었다. 돌멩이를 주워들고 학교 쪽으로 던지고 싶었다. 학교를 부수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돌멩이가 없었고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기 전에 돌멩이를 찾으면 그걸로 학교를 부숴버려야지. 저 유리창을 다 깨트려버려야지. 그런데 돌멩이가 없었다. 엄마가 등 뒤까지 도착했다. 엄마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에 겹쳐졌고, 엄마의 손이 내 어깨에 올라왔고, 집에 가자는 엄마의 말이 내 침묵에 올라탔다. , 나는 몸을 돌리고 엄마와 함께 교문 쪽으로 돌아나갔다. 학교를 향한 미움은 돌아서는 순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학교가 있으나 없으나 그 순간 내겐 다르지 않았고, 학교에 돌을 던지거나 그렇게 하지 않거나 다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태양은 쨍쨍했고, 더는 학교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날이 기억났다. 그 태양 아래 돌멩이가 아니라 총이 떨어져 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누군가는 쏘아 맞추었을 것 같다. 그냥 그런 날이 있었고, 그날의 내가 기억이 나서, 해변의 총격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모르겠다. 뫼르소를 이해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걔가 미친놈 같지는 않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미친놈들이 많아서, 이해할 수 있는 미친놈이나 이해할 수 없는 안 미친놈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귀찮다. 이방인은 네 번째, 이 판본으로는 두 번째 읽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뭐 특별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이 책은 내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113.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

 

범인이 밝혀지거나 반전이 드러나는 장면은 독자에게 뾰족한 충격을 주기 마련이라, 아무래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장면들이 될 텐데도, syo는 기이하게 그런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재독 삼독이 늘 즐겁다. 겁나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김영하가 이 주제를 아쉬울 것 없을 정도로 완전조리해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글쎄. 그래서 별로고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물어온다면, 그것 또한 글쎄. 3글쎄.

 

 

 

--- 읽는 ---

다소 곤란한 감정 / 김신식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일도 사랑도 일단 한잔 마시고 / 권용득

니체에게 길을 묻다 / 알란 페르시

알수록 쓸모 있는 요즘 과학 이야기 / 이민환

설민석의 삼국지 1 / 설민석

일 잘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 생각한다 / 오가와 히토시




--- 갖춘 ---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현대 건축 : 비판적 역사 / 케네스 프램튼

건축설계 도면보는 법 / 차상모 외

지그문트 프로이트 컴플렉스 / 파멜라 투르슈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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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8-26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목하! (씨익, 웃습니다)

syo 2020-08-29 00:34   좋아요 0 | URL
요즘 뒤늦게 알라딘을 강타한 문목하!

독서괭 2020-08-26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가슴배 그지깽깽이들 ㅋㅋㅋㅋㅋ
3글쎄에 동감합니다. 잘 모르겠더라구요..
개미는 박멸되었나요?

syo 2020-08-29 00:34   좋아요 0 | URL
그게 한 주에서 두 주 정도 지켜봐야 된다고 합니다.
박멸되면 보고하곘습니다 ㅎ

단발머리 2020-08-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이방인(민음사판)으로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라는 페이퍼를 한 쪽 쓰고 있다가, 쇼님 서재 와서 이 페이퍼 읽었어요. 나 어쩔... ㅠㅠ

syo 2020-08-29 00:35   좋아요 0 | URL
우리가 같은 책의 다른 판본을 같이 읽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단발님 페이퍼도 가서 읽어야지!

반유행열반인 2020-08-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서 쌀 파먹는 바구미가 집안 가득 번진 게 너무나 미워서 수십 마리 포획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형 집행을 했습니다. 이쑤시개, 물컵, 라이터, 망치, 찰흙(응?) 등등. 삼님 자리 옆에 제 자리가 따뜻하게 데워져 있을 것 같은.,.그리고 ㅈㅏㅂㅅㅡ를 주문하셨다니 그 옆에 syo님 자리도...콧수염 아저씨들 옆옆옆옆옆. 북실거리는 수염 아저씨는 거기 없고 아직도 먼지 상태로 구천을 떠돌 듯(유물론자의 지옥)
김초엽 SF 리뷰 지금 제가 한 번 더 읽을 게요. 언젠가 친해지면 꼴밤도 때려줄게요. 울지 말아요. (나는 책갈피도 적립금도 받았지만 울지말아요...ㅋㅋㅋㅋㅋㅋ)

syo 2020-08-29 00:36   좋아요 1 | URL
...... 마지막 괄호 안의 문장을 보니, 김초엽을 만나도 꿀밤을 때리기보다는 둘이서 깔깔 웃으며 저를 놀리실 것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0-08-29 06:17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 지금 작가님과 같은 창작공간 있다는데 꿀밤 의뢰해 보겠습니다...

비연 2020-08-2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 책에 <이인> 이란 책이 있었나.. 왠만한 카뮈 책은 다 읽었는데? 하며 뒤져보니 <이방인>인 듯? 요즘 제목이 이렇게 바뀌었나요? 흐미...

syo 2020-08-29 00:38   좋아요 0 | URL
나온지 10년 다 되가는 책이라 요즘이라고 하긴 그렇고, 다른 출판사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내고 있는 모양이네요. 제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죠. 민음사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이 몸은 고양이야>라는 책을 냈는데, 그거 너무 재밌겠더라구요. 제목부터 말투 자체가 기존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하고는 다른 느낌.

비연 2020-08-29 03:07   좋아요 0 | URL
아... 십년전부터 이렇게. 세상에, 전혀 몰랐네요 ㅠ 그나저나 <이 몸은 고양이야>.. 왜이리 웃긴거죠? ㅋㅋ

Angela 2020-08-2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귀엽게 생겼다는 확인이 아직..ㅎㅎ

syo 2020-09-04 07:35   좋아요 0 | URL
그 확인 작업에는 소정의 수수료가 필요합니다 ㅋㅋㅋㅋㅋ
 

 

브레인 크라이시스

 

 

1

 

꿈을 꾸었다. 다정한 친구 한 명이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며, 설렘 반 걱정 반이라며 두려운 표정으로 자랑질했다. 유학은 내 오랜 꿈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드넓은 에이뭬리커 대륙에서 끝없이 펼쳐질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겸손하게 잘난척했다. 부러워 죽겠고 꼴뵈기 싫었다. 그리고 친구는 유학을 떠났다. 시간이 흘러, 친구로부터 첫 번째 엽서가 도착했다. 그 엽서를 읽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친구가 유학을 떠난 학교가 고등학교였다는 사실을……. 어딜 가나 결국 수학이 답인 것 같아- 엽서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정석 좀 풀고 오는 건데, 하는 후회가 끈적하게 묻어있었다. 부러움은 말끔히 소멸되었고 나는 웃었다. 으하하하, 고등학교래! 고등학생이래! 미국 고등학생이래!!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고. 고등학생이래…… 그것도 미국 고등학생이래…….

 

 

 

2

 


어제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 이름은 빨강>의 위치를 옮길 일이 생겼다. 왜냐면 이 책은 내가 3번이나 읽은 책이니까, 아직 안 읽은 책들을 전진 배치하고 얘처럼 내용 다 아는 애는 뒤로 보내야 하니까, 얘처럼 내용 다 아는 애는…… 근데 범인이 누구더라?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공포였다. 이 책을 3번이나 완독한 내가, 그러니까 북플에서 <내 이름은 빨강 1>, <내 이름은 빨강 2> 마니아 1위에 빛나는 syo가 범인이 누구인지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다……. , 나의 투명하고 청초한 뇌세포여. 연결을 두려워하는 내성적인 시냅스여…….

 

용의자 세 명이 그러니까, 토끼, 순무, 엘레강스였던 건 확실해.

 

펼쳐보니 나비, 황새, 올리브였다. , 세상에 확실한 것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내 이름은 빨강>, 좋은 책. 엘레강스한 책.

 

 

 

3

 

syo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글 잘 쓰는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책을 씹어먹어서 이 사람들처럼 쓸 수만 있다면 남은 평생 종이만 씹으며 살 수도 있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먼저,


 

세상은 가장자리에서그리고 깊은 곳에서 푸르다이 푸름은 사라진 빛이다빛 스펙트럼에서 푸른색 쪽 끝에 있는 빛은 태양에서 우리에게 오는 길을 끝까지 다 오지 못한다그 빛은 공기 분자에 부딪혀서 흩어지고 물에 부딪혀서 산란된다물은 원래 무색이고그래서 얕은 물은 어떤 색이든 그 밑에 잠긴 것의 색을 똑같이 띠지만깊은 물에는 이 산란된 빛이 가득하고더 깨끗한 물일수록 푸름이 더 깊다하늘도 같은 이유에서 푸르다하지만 지평선의 푸름하늘로 녹아드는 듯한 땅의 푸름은 그보다 더 깊고 더 몽환적이고 더 멜랑콜리한 푸름우리가 몇 킬로미터나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장소에서도 제일 먼 영역을 물들인 푸름먼 곳의 푸름이다이 빛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빛우리에게 도달하는 거리를 끝까지 다 오지 못하는 빛사라지는 빛이 빛이 우리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안겨주며세상의 아름다움은 정말로 많은 부분이 그 푸른빛 속에 있다.

 

예전부터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 있는 푸름에 마음이 움직였다지평선의 색먼 산맥의 색무엇이 되었든 멀리 있는 것의 색인 푸름에그렇게 먼 곳의 그 색은 감정의 색이고고독의 색이자 욕망의 색이고이곳에서 바라본 저곳의 색이고내가 있지 않은 장소의 색이다그리고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의 색이다.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51-52


 

다음은, 좀 길지만,

 


'이 성당은 1612년에 지어졌다'라는 진술처럼 하나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이 성당은 바로크 건축의 훌륭한 예이다'와 같은 가치판단의 표출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그러나 내가 외국인 방문자에게 영국을 구경시키면서 전자와 같은 종류의 진술을 했을 때 그가 상당히 놀랐다고 해 보자그는 왜 나에게 이 건물들의 건립날짜를 말씀하시고 계십니까왜 기원에 이렇게 신경을 쓰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그는 계속해서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것을 전혀 기록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건물들을 북서향이냐 남동향이냐에 따라 분류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아마 이것은 나 자신의 기술적(記述的)인 진술들의 기저에 있는 무의식적인 가치판단체계의 일부분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그러한 가치판단은 '이 성당은 바로크 건축의 훌륭한 예이다'와 반드시 똑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아무튼 가치판단임은 분명하며 내가 하는 어떠한 사실발언도 그러한 가치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사실진술도 결국은 '진술'이며 이 '진술'이란 것은그 진술들은 할 가치가 있다아마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할 가치가 있다나는 그 진술들을 할 권리가 있고 아마도 그 진실성을 보증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당신은 나의 진술을 들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그 진술을 함으로써 어떤 유용한 것이 성취된다라는 등등의 문제성 있는 많은 판단들을 전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전혀 사심이 없는 진술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 물론 성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를 진술하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는 그 건축술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중립적인 행위로 여겨지지만또한 전자의 진술이 후자보다 더 많이 '가치를 적재한것이 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크'와 '훌륭한'은 다소 동의어가 되었을 수도 있는 반면에우리들 중 고집스런 잔당만이 건물이 건립된 일자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어 나의 진술은 내가 이 잔당의 일원임을 알리는 암호화된 방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진술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가치범주들의 그물조직 속에서 움직이며 실로 그러한 범주들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우리가 사실적 지식(factual knowledge)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다시 특별한 이해관계나 판단에 의해서 왜곡된다는 것만이 아니다물론 이것도 분명히 가능하지만그보다도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이는 아예 지식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이다왜냐하면 어떤 것을 굳이 알려고 애쓸 이유가 없을 테니까이해관계는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요소이지 지식을 위태롭게 하는 한갓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지식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 22-24


 

 

다가가면 멀어지는 욕망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늘 있었는데 그 욕망은 내가 다가가면 멀어지기만 했다. 내게서 멀어져서 솔닛 쪽으로 갔나보다.

 

또한 이글턴의 저 말은, 내가 늘 하고 다니는 말이지만 그 말로 누구도 설복시킬 수 없었다. 근데 이글턴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 읽은 ---

 


108.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지음 / 그린비 / 2010

 

맑스주의 역사라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지. 사실은 맑스 전기, 레닌 전기, 스탈린 전기, 등등 각종 사상가의 전기를 다 갖춰놓고 읽으면 그게 최선이요, 하다못해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랄지 하는 두껍한 역사책을 꼼꼼히 읽어보는 것이 차선이겠지만, 세상에 관심 둘 데가 얼마나 많은데 어지간하면 그러긴 힘들다. 그럴 때 짠, 하고 읽기 좋은 책이고, 그렇게 짠, 하고 몇 번 읽었으니 나는 이제 이 책을 팔고 차선이나 최선을 향해 달려나가야지.

 

 


109.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

 

망했다. 나의 감이 더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말았는가…….

 

 


110.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9

 

마라톤 완주가 버킷리스트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난 너랑 함께할 수 없어. ! 너의 육신은 총체적으로 비루하지만 그 와중에도 무릎은 비루를 넘어 비참에 도달했거든. 나는 잠깐만 울고 쿨하게 마라톤을 보내주었다. 안녕, 잘 가. 그래, 너도 나 같은 목표는 깨끗이 잊고, 너랑 더 잘 맞는 목표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아니, 싫은데? 난 너 끝까지 안 잊고 죽을 때까지 까고 욕하면서 살 건데? ……와 저런 새끼 버킷에 들어있었다니 소오오름.

 

내적 극장에서 벌어진 셰익스피어 뺨치는 연극의 결과 어쨌든 syo는 달리기에 대한 애정의 5할을 상실하였으니, 그러고 다시 이 책을 보았을 때 예전에 받았던 감동의 5할은 상실되고 그 자리를 부러움과 아니꼬움과 너잘났네좋겠다야 마음이 차지하였으니, 아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

 

 

 

 

--- 읽는 ---

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문학이론입문 / 테리 이글턴

돌이킬 수 있는 / 문목하

헤겔에 이르는 길 / 미타 세키스케

칠레의 밤 / 로베르토 볼라뇨

이인 / 알베르 카뮈

성의 변증법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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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2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오 성의 변증법을 읽는구나 우리 쇼님이! 만세 만세 만세!!!!!!!!!!!!!!!!

문목하는 리뷰 갑니까? (초롱초롱)

syo 2020-08-25 09:02   좋아요 0 | URL
김초엽 이후 SF 리뷰는 손 뗐습니다..... 부질없던 고생의 시간이 트라우마로 남았어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8-2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지 말고 걸읍시다. 뚜벅뚜벅.

syo 2020-08-25 09:03   좋아요 1 | URL
폴짝폴짝 정도가 좋겠습니다.

stella.K 2020-08-24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연락 끊어진지 10년 바라 보는 후배가 꿈에 보이던데
그것도 아줌마 모습으로. 겁나서 연락 못하겠더라구요.
뭐 연락만 그렇고 걔 마지막 모습 본 건 그래도 아직 젊음이 남아 있을 땐데
내내 연락 없다 네가 꿈에 보여서 하고 전화하기도 뭐하잖아요.
그냥 언제가 됐든 천국에서나 보자하고 있어요.

책을 세 번 읽는군요. 정말 좋은 책은 그쯤 읽어줘야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스요님 세 번 읽고도 투명하고 청초한 뇌세포면 저는 다섯번쯤 읽어야할 것 같아요.ㅠㅠ

syo 2020-08-25 09:04   좋아요 0 | URL
정해놓고 세 번 읽는 것은 아닌데, 그 책은 어떻게 읽다보니 세 번이 되었어요.
청순한 뇌의 장점은 저런 미스테리 스릴러물을 읽을 때 부각되지요.
분명히 전에 읽었는데 범인이 기억이 안 나서 읽을 때마다 신선한.....

난티나무 2020-08-2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요즘 느끼는 ‘언어’에 대한 막연한 감정이 언급하신 <문학이론입문>에 나오는군요. 어려워 보여요. 그런데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syo 2020-08-25 09:0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문학이론입문>은 물론이고, 테리 이글턴의 모든 글을 추천합니다. 꼭 한번 읽어보셔요.

추풍오장원 2020-08-2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의 기억법 읽었는데 기억이 안납니다...^^

syo 2020-08-25 09:05   좋아요 0 | URL
지금 하신 말씀이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의 대주제입니다 ㅋㅋㅋ

얄라알라 2020-08-2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8권 동시다발 읽고 계시는 책 모두 제목도 처음이요. 세번 읽으셨다는 책 제목도 처음^^ 이름을 기억하시며 읽으려하나봐요. 저는 애시당초 외국어의 경우 다 포기

syo 2020-08-25 09:05   좋아요 1 | URL
기억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 번쯤 읽어줬으면 예의상 기억 좀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이 예의없는 뇌세포야- 뭐 이런 기분이랄까요.....

AgalmA 2020-08-25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리 이글턴은 정말 어떤 책을 봐도 왜 이렇게 말을 잘 하시죠ㅜㅜ! 비탄이 나올 정도죠👍
움베르코 에코, 빌 브라이슨은 좀 어르신 느낌이라면 테리 이글턴은 청중년 느낌이라 그런가? ㅎㅎ;

syo 2020-08-25 09:0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어쩐지 적절한 배치네요. 어르신-청충년.
역시 한 말빨 하는 지젝은 어디에 데려다 놓으면 좋을까요.

AgalmA 2020-08-25 20:03   좋아요 1 | URL
지젝도 지성미 뿜뿜이긴 하죠. 일반 시사 다룰 땐 가독도 전달력도 좋긴 한데 개념에 개념이 꼬리를 무는 책은 독자 호응을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어요. 독자가 철학 베이스가 넓으면 공감하며 흡수하기 쉽지만 철학 베이스가 미흡하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 굉장히 똑똑한 거 같아 하며 글자만 따라가기 십상ㅎㅎ
한국에서의 지젝 열풍은 좀 과장되었다 싶은데요. 그의 책을 읽은 독서보다 그의 문장 인용들을 보며 혹한 사람들이 더 많은 거 아닌가 싶고요. 테리 이글턴의 비유들은 문학적인 재미인데, 지젝은 유머도 철학적 맥락에서 꼬기 때문에 즉각적인 재미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지젝은 대기권 너머 말발이라고 해야😅 러셀도 어려워한 비트겐슈타인 비슷한 상황 아닌가 싶어요.

han22598 2020-08-26 0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요님도 글 잘 쓰시시는데......제 세상과 스요님 세상의 기준 차이가 있긴 하지만 ㅎㅎ

syo 2020-08-26 20:00   좋아요 0 | URL
헙.... 몸둘바.... ㅎㅎㅎ
 


조우

 

 

1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지나쳐온 것들이 모여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만 잔뜩 심어놓은 숲을 바람은 잠깐 흔들고는 이내 떠나버리고 그저 아쉬운 몸짓만이 남았다. 전하지 못한 말들이 묻어 그늘의 귀퉁이는 늘 축축하고 그 안에서 버섯처럼 몰래 자라는 마음. 제때 들어야 할 말들을 듣지 못한 이들이 추억의 얼굴을 하고 마음의 뒷문을 열어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겨우 알았다. 아무것도 훔쳐내지 않을 도둑들이라 차마 매섭게 쫓아내지도 못하고 나는 멍하니 웅성거림을 듣고 섰다. 방 밖에는 아무도 없는 나밖에 없어서 나는 문턱에 발을 올리고 주춤댄다. 차라리 장작을 가져다 줄까, 쟤네들 춥겠는데. 그렇지만 이제 와 따뜻하다고 해도 하지 못한 말들이 시간을 거슬러 갈 것은 아니어서,

 

책을 빌리러 갈 시간에 좋아하자. 다툴 시간에 책을 읽자. 하지만 그리워할 시간에는 그리워하고, 글을 쓸 시간에는 글을 쓰자. 그리움에 대해서 써야 할 시간을 미루지 말자. 오늘의 그리움은 어제의 그리움이 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가 아무리 그리워도 오늘이 되지 않듯이.

 

설거지할 때 접시의 옆면도 닦아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 깜빡 잠깐 문을 열어두면 따릉따릉 소리로 알려주는 냉장고를 가지게 되었어. 외국인이 호텔로 가는 길을 물어오면 당황하지 않고 가르쳐주고 싶어. 옥상에는 여전히 자주 올라가지만, 멀리 보이는 산 너머를 상상하는 시간의 절반을 아껴서 여기 화분을 가져다 놓으면 어떨까, 고추 같은 걸 심어봐도 좋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써.

 

여전히 뭔가를 쓰면서 살아.

 

 

 

2

 

일하는 동안 바빠서도 그랬지만, 의식적으로 드라마를 딱 끊어내고 살았는데 <비밀의 숲2>의 공습경보가 울리자마자 방공호 속에 숨어 <비밀의 숲1>을 정주행하고 말았다.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드라마 자체보다 OST 한 곡에 꽂혀 오래 머무는 중. 끝없이 흥얼거리다보니 가사까지 다 외워버렸다. 양치질하다가 갑자기 칫솔을 뱉으며 슬프게 소리 내며 붉게 변해간 노을은 그대의 인사였나요”. 아 다 튐. 똥을 싸다가도 어딜 가나요 날 두고 가지 말아요으윽잠깐 쉬었다 다시 힘주며 잠시라도 있어줘요오옥끄흥차으아아아름다운 그대흐으윽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언젠가 어느 곳에서 나는 이 노래를 부를 건가 봐…….

 

 

 

--- 읽은 ---


 

105. 혼밥생활자의 책장

김다은 지음 / 나무의철학 / 2019

 

아씨, 이래저래 기죽는다…….

 

 

 


106. 미셸 푸코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

 

예전에 한참 푸코를 파고들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때가 있었다는 거랑 푸코가 대머리라는 것만 기억나고 특별히 남아 있는 게 없는 실정이다. 담론이니 지식-권력이니 하는 뻔한 말이야 읊조릴 수 있겠지만, 철학은 잘난 척하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니까. 예전에는 철학으로 잘난 척하기 참 좋았는데, 요즘 그랬다간 이상한 놈만 된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잘난 척하지 말고 잘난 놈 되자. 그래!

 

라고 원대한 포부를 드러내기엔 얘 너무 쪼꼬미 요약서잖아…….

 


 


107.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 니체와 고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스타북스 / 2020

 

니체의 말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반 고흐의 그림을 다 아는 것도 아니어서, 니체가 했음직한 말(했다)에 반 고흐가 그렸음직한(그렸단다) 그림이 매칭되어 있는 페이지를 착착착 넘기는 재미는 있었다. 허허. 반 고흐 화집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고, 니체의 말로 만든 잠언집은 천지에 깔렸으니, 과연 이 책은 무엇인가.

 

 

 

--- 읽는 ---

맑스주의 역사강의 / 한형식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너 자신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유행의 시대 / 지그문트 바우만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 갖춘 ---

젠더는 패러디다 / 조현준

전복적 스피노자 / 안토니오 네그리

패턴 랭귀지 /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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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8-2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의 숲 OST 찾아 들으며...
들을 노래 예습 🤗

syo 2020-08-23 08:50   좋아요 0 | URL
거기라고 말 안했는데?? ^ㅂ^

수이 2020-08-2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를 씻고 경건하게 오에스티를 듣고 있습니다, 저도 예습중

syo 2020-08-23 08:50   좋아요 0 | URL
예습으로 끝난 공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공쟝쟝 2020-08-2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복적 스피노자...?

syo 2020-08-23 08:51   좋아요 0 | URL
바로 캐치하는구나, 역시 전복꾼!

반유행열반인 2020-08-23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닦다가 응가하다가도 이별 노래 부르는 노래장인...음성 지원은 괜찮은데 시각 지원은 더러워.... ㅋㅋㅋㅋㅋ1,2글 온도 차 뭐에요ㅎㅎㅎ

syo 2020-08-23 08:51   좋아요 1 | URL
음성지원도 못지 않게 더러운데? 끄흐으응차 이런거 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8-23 09:04   좋아요 0 | URL
난 또 그런 노래가사가 있는 줄 알았죠...

다락방 2020-08-2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어느 곳에서.....

syo 2020-08-24 15:19   좋아요 0 | URL
다들 왜 언제 어디인지를 아시는 것처럼 이러지???

비연 2020-08-2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제가 기대가 되는 거죠? ㅋㅋㅋㅋㅋ

syo 2020-08-24 15:19   좋아요 0 | URL
전 도대체 영문을 모르곘는데요....-ㅂ-?

stella.K 2020-08-23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의 숲에 노래가 나오나요? 난 예고편에 흐르던 음악만 기억나던데...ㅋ
비밀의 숲2는 1 때 보다 딱히 흥미가 나지 않더라구요.
조승우 때문에 보려고 하는데 갈등 중.
오늘이 4회찬데 이렇다할 게 없으면 그만 볼까 생각 중.
역시 형만한 아우가 없는 건지 원...

드라마라는 게 그렇긴 해요. 영화와 달라서 마음에 들면 어쨌든 끝까지 봐야하는 부담이 있어요.ㅠ

syo 2020-08-24 15: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마음에 들면 끝까지 보는데 부담이 없죠.
마음에 안 드신 것 같은데?

왜요 저는 이제 슬슬 재밌어지겠다 싶은데요.
사람도 죽었겠다, 대기업 경영권 이야기도 나오겠다, 수사권 조정 이야기도 나왔겠다,
이제 이 따로 노는 듯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 소쿠리에 담아 버무려줄지만 기다리면서 보면 되겠던걸요 ㅎ

stella.K 2020-08-24 16:28   좋아요 0 | URL
ㅎㅎㅎ 드라마의 법칙이 있지요.
3회안에 시청자를 사로잡아라 안 그러면 시청자를 잃을 것이다.
어제까지 4횐데 별로. 경검만 가지고는 봐주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어요.
본다면 조승우 땜에 봐주는데 그렇지 않아도 시청자들 무슨 내용인지
아리까리 한데 조승우와 배두나 땜에 본다나 어쩐다나...ㅋㅋ
 

 

괄호

 

 

1

 

창밖은 난세다. 이 정도의 대혼란을 겪은 적이 없는 것 같다.

 

 

 

2

 

건넛집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침잠이 없는데 마침 귀도 어두우셔서, 매일 아침 거세게 틀어놓은 TV 뉴스로 상쾌한 하루를 열어젖히신다. 덕분에 보수단체 지도자 아줌마가 확진 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또랑또랑한 앵커 목소리에 고막을 아주 신명나게 얻어터지며 syo의 하루도 강제 열림 당했다. , , , 하는 할아버지의 뾰족한 추임새. 끈적끈적 몸에 붙어있던 꿈의 파편들이 사운드 폭격을 맞고 일거에 소각되었고,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저 눈만 껌뻑거린다. , 진짜, 오랜만에 겁나 야한 꿈 꾸고 있었는데!

 

 

 

3

 

엎어져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두 시쯤 잠든 모양이다.

 

 

 

4

 

나에게 무엇을 해 주며 한 주를 또 건너왔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한다고 사랑하는데 생각만큼 사랑이 쉽지가 않다. 남을 사랑할 때만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나를 사랑할 때도 이런 걸 보니 갈 길이 참 멀다. 오래 만난 여자친구는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귀기 전에도 그렇게 말하고 사귀고 나서도 한동안 그렇게 말했다. 그 말과 별로 상관없는 이유로 헤어졌지만 어쨌든 헤어지고 나니 그 말이 제일 끈질기게 기억에 남았다. 철 지난 화두가 맛있게 익었다. 늦었지만 따서 입에 넣고 천천히 궁굴려 보는 중.

 

 

 

5

 

읽히지 않는 책은 그냥 미루어두기로 한다.

 

 

 

6

  

그때 괄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무슨 말이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약정된 침묵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어차피 차선이란 없는 거였고, 거짓말은 재고자산, 상상은 부채, 차변과 대변은 서로 합을 맞출 생각도 없고. 그냥 쏟아버리는 게 제일이야, 싸는 게 답이야, 어차피 자고 나면 또 나오는걸. 샤워기의 생명은 수압이지, 식은 죽도 먹어 본 놈이 잘 먹고 죽어 때깔 좋은 법이지, 구더기 무서워 못 담근 장맛 변하면 그땐 가게 접어야지. 들은 게 많아서 이러나 벌어진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나방들, 팔랑팔랑 중력 속에 희미해진다. 별로 고음도 아닌데 삑사리는 나고. 취소 버튼 누른 줄도 모르고 탬버린을 쳐대는 내가 그래도 리듬감은 있지 않니? 새우깡은 대답이 없네, 초조하다. 노래방 새우깡이라 그런가. 농심이 아니어서 그런가. 중국 OEM이라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바이브레이션은 좀 늘지 않았니? 가사는 좀 외웠어. 1절만 하는 게 매너니? 매너가 사람을 만드니? 사람은 좋은 마이크가 만들지. 박수가 만들지. 그거 알아?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면 원숭이는 바나나가 밥숟가락인 줄 안대. 이런 말을 듣고도 박수를 쳐주는 게 매너니. 내가 들고 있는 게 마이크니 바나나니 밥숟가락이니. , 그건 새우깡이야. 내가 누른 건 간주점프야. 나방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동안 네 입에서 나온 건 구더기야. 그건 먹고 죽어도 때깔이 보장되지 않지. 수압의 생명은 보증금이야. 그리고 네가 하는 모든 말은 분식회계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할 거야?

 

그때 괄호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읽은 ---


 

10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

 

젊은 날의 나는 왜 그리도 집요하게 김영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결과 지금도 김영하무감각증을 앓고 있는데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거지. 지루한 사변과 메마른 섹스가 버무려진 이런 소설을 내가 아는 20대의 syo라면 당연히 사랑해마지않았을 것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프랑스 문학잡지 정도로 보이는 리르라는 곳에서 나온 한줄 평이 책 뒤표지에 인쇄되어 있는데 ‘1990년대 서울의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언급한다. 그런가보다 싶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반반치킨이 만능 키처럼 작동하던 시절이 길었다. 얼핏 요즘은 조금 덜한 것 같아 보여도, 어떤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도착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 키로 열린다.

 

 


104. 생쥐 혁명

민지영 지음 / 장춘익 감수 / 곰출판 / 2019

 

시도는 대단했다.

 

 

 

 

--- 읽는 ---

맑스주의 역사강의 / 한형식

미셸 푸코 / 양운덕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 니체와 고흐 /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혼밥생활자의 책장 / 김다은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나 자신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갖춘 ---

스피노자의 철학 / 질 들뢰즈

홉스 /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헤겔에 이르는 길 / 미타 세키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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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0-08-2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밥생활자의 책장 팟캐스트 재미있습니다. 책은 안 읽어봤는데 어떤지 궁금하네요. 주말 무사히 보내세요~

syo 2020-08-22 21:54   좋아요 0 | URL
책도 좋아요.... 업자답게 글도 좋고 너무 좋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8-22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 보는데 왜 갑자기 코인노래방 가고 싶죠...(눈치 없음) 코로나 꺼지면 언젠가는 ㅋㅋㅋ

syo 2020-08-22 21:54   좋아요 1 | URL
코노.... 내 영혼의 옹달샘이여...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8-23 05:22   좋아요 0 | URL
영혼의 생명수 퍼올리러 가 봅시다...김혼비 책 읽다 아 진짜 다음에 가면 봄날은 간다 부를 거야! 헸어요. 코로나새끼 춤추는 지금은 말구요ㅠㅠ

공쟝쟝 2020-08-22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통과해 도착한 오늘의 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