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보고

 

 

1

 

코로나19와 임용 동기 비슷한 관계가 되면서, 공무원 생활의 첫 단추를 기이한 모양새로 채우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경로당 휴관한다는 내용을 평생의 첫 공문으로 기안한 것이 벌써 3주 전, 어느덧 syo는 쩜오에서 쩜칠이나 쩜팔이는 된 느낌이다. 과장님이 물어 보실 때마다 찾아보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눈물과 함께 남기며 돌아나가는 경우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천성이 을이다 보니 전화받기는 여전히 어렵고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민원인을 향해 연방 굽신거리는 굽syo. 그는 전화를 받고 나면 허리가 아프다.

 

 

 

2

 

알라딘에서 비벼대며 익혔던 것이 글솜씨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안하는 족족 빨간펜이다. 깨어있는 18시간 가운데 14~15시간 정도를 회사와 회사를 오가는 길 위에서 보내는 요즘이다 보니, 좋은 글에 대한 감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2월 한달 정도는 독서와 글쓰기를 포기하고 일 배우는 데만 집중하고 살아야겠다 다짐했었는데, 아무래도 3월도 그런 식으로 소비해야 할 듯. 공무원이 되기 위해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던 것처럼, 훌륭한 공무원이 되기 위해 외워야 할 것도 잔뜩이다. 우선 관내 121개 경로당의 이름과 주소지부터 싹 외워버릴까…….

 



루피누스는 쓰디쓴 어조로 이렇게 고백했다. “이 판국에 글을 쓸 정신이 있겠는가주위는 온통 무장한 적들이고보이는 건 그저 황폐해진 도시와 들판뿐인데.”

카를로 M. 치폴라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3

 

같이 사는 남자는 위생 감각이 떡이다. 이 사태가 나도록 마스크 쓰고 출퇴근하는 꼴을 본 적이 한 번 없고, 퇴근하고 돌아와도 손을 씻지 않는다. 씻으라고 하면 어어- 맞다- 이러고 있다……. 정말 재미있는 게, 이놈은 내가 아는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인간으로서, 25년을 친구로 지내면서 입에서 욕 한번 나오는 걸 본 일이 없을 정도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가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 같은 건 품을 줄도 모르는 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얘가 무해한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놈이 아무 생각이 없는 바람에 옆에 있는 친구들이 피해를 입은 경험이 결코 적지 않다. 일이 터지고 친구들이 불만을 토로하면, 미안- 몰랐지- 어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따위의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도 그때뿐, 우리는 여전히 무심함과 무식함이 반반 섞인 듯한 이놈의 행태에 이래저래 데미지를 받고 있다. 기가막힌 건, 본인은 전혀 다치지 않는다는 것.



언니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최은영손길


 

 

4

 

바지를 다리다가 손목을 다렸다. 바지도 펴지지 않았고 손목도 펴지지 않았다. 괜히 손목만 따끔할 뿐이다. 혹시 바지도 따끔할까? 아린 손목을 쥐고 바지의 심정을 상상하게 된다. 일찍 퇴근하면 별 일이 다 벌어진다.

 

 

 

5


책은 하나도 읽지 못하는 중이다. 이 아래쪽에 읽었다고 표시한 책들도 실은 읽은 지 일주일은 지난 것들이라, 한줄평을 쓰려는데 한줄도 평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큰일이다. 그래도 일단 찌끄려야 한다.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syo는 늘 졌지만, 그렇다고 대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득하게 책 읽고, 글 쓰고 싶다.



인간은 자기 환상의 노예이다그는 항상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뒤에 유령을 데리고 산다때때로 그는 그의 앞에서도 유령을 본다술에 취해 있거나눈이 눈의 역할을 하기를 포기했을 때에 말이다.

김현사라짐맺힘


 

--- 읽은 ---


27. 시민과 함께 만드는 서울 / 서울연구원 : 174 ~ 289

: 서울 시민으로 잠깐 살아 본 바, 개인적인 경험을 반추해보면 시민이 서울을 만든다기보다는 서울이 시민을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큰 도시는 그런 맛이 있고, 큰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관계를 넉넉히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이 책 속에 만들어진 서울을, 나하고 같이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서울이 나를 또 만들긴 할 것이다.



 

28. 최고의 인재는 무엇이 다른가 / 박봉수 : 175 ~ 294

: 뭣이 다른데.

 



29. 보고서의 신 / 박경수 : 132 ~ 271

: 뭣이 신인데.

 

 

--- 읽는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 96 ~ 245

엑셀 2016 바이블 / 최준선 : ~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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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2-24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응원합니다. 으랏차~~^^

다락방 2020-02-24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저는 직장생활 20년 했지만 아직도 품의서 쓰는 게 넘 어려워서 기존에 썼던 거 찾아 베껴와요.....책읽고 글쓰는 거랑 달라요, 그건.....

비연 2020-02-24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목...;;; 바지는 모를거에요, 손목의 따끔함을..ㅠㅠ 조심하삼~

페넬로페 2020-02-25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에 대한 감각자체가 아직 살아있어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syo님!
이 시국에 힘드신 공무원을 응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2-25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고가 많으셔요. 일 바쁘고 사람도 많이 대할 텐데 아프지 말고 건강히 잘 지내시길 빕니다.

단발머리 2020-02-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십니다, 쇼님~~~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바쁘시네요.
얼른 시간이 지나가, 과장님이 물어보시면 찾아보겠습니다~ 할 때가 있었지, 그런 시절 왔으면 좋겠네요. 화이팅!! 두고 갑니다^^

stella.K 2020-02-2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생존보고로군요.ㅠ
근데 양복 입고 다니시나요?
쫌 딴 얘기긴한데, 요즘엔 다리는 옷 잘 없는 것 같던데. 있더라도 귀찮아서 안 사 입구요.
저는 뭐 옷을 잘 사지도 않지만 다리는 옷은 아무리 맘에 들어도 눈물을 머금고 안 삽니다.
진짜 다리미질 못하겠더군요.ㅠ
스요님 친구 얘기하니까 저 최영은 소설 읽어보고 싶네요.ㅎㅎ
 

 

당신의 현재속도

 

 

1

 

은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syo는 컴퓨터를 뒤적거리며 아무말을 찌끄리고 있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다큐가 있거든? 그거 우동으로 만나는 일본이던가 하는 편을 받아놨는데, 볼 시간이 없어. 듣는지 마는지 그저 카레에 전념하는 이었지만, 어차피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으므로 syo는 생각나는 말을 생각나는 대로 꾸준히 이어나갔다. 카레가 대충 다 될 즈음, 전자레인지로 밥을 데우고 반찬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잠시 기다리자 이 카레가 든 웍을 테이블 가운데 냄비받침 위에 내려놓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 그럼 이제 보자. ? syo가 되묻자, 묻긴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걸어서 우동 속으로.

 

은 젓가락으로 멸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2

 

일은 쉽지 않다. 전임자가 있는 일도 있고 없는 일도 있어서, 어떤 일은 정말 바닥에 배를 깔고 헤엄치는 심정으로 해나가고 있다. 앞으로 나가질 않어. 115일까지 처리가 되었어야 하는 어떤 일의 독촉전화를 syo가 받고 있다. 나는 23일에야 첫 출근을 했는데! 이 일은 아무래도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모양이고, 입사 이후 최초의 큰 털림이 발생한다면 그건 아마 이 지점에서 시작될 것 같다. 빅털림 비긴즈.



자신 있게 즐겁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라도 꼬박꼬박 해나가는 것이 완성된 사람이 되어가는 길 아닐까게다가 나같이 소심하고 게으른 사람은 조금 불합리하고조금 지겹고조금 답답하더라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회사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응준그놈의 소속감

 

 

 

3

 

여전히 정신이 없고, 종일 일해도 돌아와 헤아려 보면 정말 한 일이 없다 싶은 느낌도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일솜씨가 조금씩 느는 중이라는 자각이 있다. 기분 좋은 일이다.

 

 


4

 

지난주는 대충 먹었더니 체중이 꽤 줄었다. 신나서 많이 먹었더니 이번 주는 체중이 꽤 늘었다. 업무에 지친 공무원이 50분을 걷고 타고 돌아올 곳이 있듯이, 체중새끼도 언제나 돌아올 곳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배를 집어넣어야 한다.

 

 

 

5

 

집에 턱걸이 기구가 도착했다. 거금 20만 원을 쏟아부었고, 조립하는 데도 60분을 투자했다. 작은 방에 넣어놓고 우리는 매달리기 시작했다. 은 이내 포기했지만 syo는 끈질겼다. 끈질기게 매달렸다. 질척거리는 남자가 되었다. 광배가 좀 뻑적지근하더니만 한 주 만에 턱걸이 한 개가 늘었다. 세 개까지는 거뜬하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6



세상이 커다란 속도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패배에 친숙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열심히 달려나갔는데 그 속도가 얼추 비슷해서 스물다섯에는 이걸 하고 스물여덟에는 저걸 하고 늦어도 서른셋까지는 그걸 하고 뭐 그런 식이었다. 너무 비슷해서 그 속도를 사회의 속도라고 불러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보폭이 세상의 보폭과 비슷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머무름 없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들이 볼 때는 내가 뒤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천천히 가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가라는 표지판이 생겼다. 속도를 제한하는 법을 모르거나 그럴 의지가 없기 때문에 제한 속도가 생겨났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나아가도 늘 뒤로만 배달되는 사람들에게 제한 속도란 건 영문을 알 수 없는 물건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겐 나만의 속도가 없다는 걸. 느리지만 나에겐 나만의 속도가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이 속도의 크기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속도의 존재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모른 척했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겐 도달해야 할 곳 같은 게 없다는 것을. 자기만의 속도로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은 멋지지만, 사실 우리에겐 대부분 정해진 도착지 같은 건 없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장소가 빡센 고행터가 아니라 적막한 보리수 아래였듯이, 우리도 달리기를 멈춘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저 알게 된다. 여기구나. 달리지 않는 사람은 늘 안다. 여기라는 걸.

 

마음속에, 너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꺾어서 쌓아 놓은 공터가 있었다. 그런 말들은 힘이 세서 꺾어도 꺾어도 완전히 꺾이지 않고 바람이 불 때면 내 안을 흔들며 쇳소리를 내질렀다. 그럴 때면 한동안 어지러웠다. 자석이 닿으면 한 방향으로 늘어서는 쇳가루처럼, 마음이 고집스레 한 방향으로 정렬되었다. 자력의 손아귀로부터 다시 놓여나기까지 적지 않은 무게의 질투와 방황과 좌절을 굴려대야 했다. 그래서 그 공터에 꺾어 놓은 말들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그게 연말이었다. 젖은 말들은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오래 버텼지만, 결국은 숯이 되었다. 재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또 어떤 바람을 만나고 또 어떤 열을 만나면 발갛게 달아올라 내 오랜 낮 오랜 밤을 태워 먹을지도 모르겠다. 늘 조심해야지.

 

그래도 오늘 밤은 조용하고, 창밖엔 얇은 비가 내린다.

 


어릴 때 "해봐해봐실수해도 좋아넌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하는 <영심이만화 주제가를 듣고 무서워했다어른 돼서 실수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어른 되기가 진짜 싫었다어리다고 이해해주고 들어준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본인 삶의 이력으로 남는다몇 살이든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같은 나이대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주목해봤자 의미 없는 비교다이런 비교는 힘들고 자존감 떨어진 날에 두 시간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매일 새로운 것을 느끼고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 취향 생각 들을 더 섬세하게 다듬을 수도 있다이러기에도 삶이 아깝다.

서한겸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그는 눈에 보이지도손에 잡히지도 않고 다만 자신을 관통해가는 시간을 주시하듯 숨죽인 겨울밤의 풍경을 오래 내다보았다.

김혜진9번의 일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황인찬부곡」 부분 


 

--- 읽은 ---



26.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 카를로 M. 치폴라 : ~ 127

: 정교한 사실을 바탕으로 직조된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 담고 있는 진리값이 가볍지 않다. 완벽한 농담이란 때로 너무 농담 같지 않아서 도리어 웃음이 나지 않기도 한다.

 

 

--- 읽는 ---

최고의 인재는 무엇이 다른가 / 박봉수 : ~ 175

시민과 함께 만드는 서울 / 서울연구원 : ~ 174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 ~ 96

보고서의 신 / 박경수 : ~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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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20-02-16 0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인이 되신 syo님의 찰진 글맛...입대 3주 남긴 예비군인은 논산에서 실컷 그 맛깔스러움을 그리워하겠습니다..

syo 2020-02-18 21:00   좋아요 1 | URL
프메님 군대가시는군요.
1개월 코스일까요? 어찌됐든 논산은 애증의 땅이지요.
화이팅 하시구요.
전투화 꽉 묶어야 발 뒤꿈치 안 까집니다. 최악이에요. 그거.

2020-02-16 0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8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2-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도서 목록 보니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요. 읽고 싶은 책이 목록에 포함되는 날도 곧 오길 진심 빕니다. 오래타는 숯 곁불 쬐는 누군가를 한참 따뜻하게 만들 수 있잖아요. 힘내세요.

syo 2020-02-18 21:01   좋아요 1 | URL
딴 이야기지만 저 안경 쓴 녹색머리 소녀 볼수록 귀엽습니다.
한 마리 키우고 싶네요 ㅎㅎ

blanca 2020-02-16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입사원 때 매일 내가 충격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시간들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ㅋㅋ syo님은 바로 적응하실 것 같다는. 여전히 바쁜 와중에도 읽고 쓰고 일하는 모습에 화이팅을 보냅니다.

syo 2020-02-18 21:02   좋아요 0 | URL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이지만 막상 끝나고 나면 해놓은 거 하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ㅠㅠ
저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말씀은 힘이되네요.
blanca님 감사합니다^-^

stella.K 2020-02-16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요님 이제 보니 사진도 잘 찍는구만요.
영국이나 프랑스의 어느 길인 줄 알았는데 표지판 보고 그만...ㅋ
이날 따라 꾸리꾸리한 날씨가 받혀 줬네요.

그래도 아직 겨울이라고 오늘은 눈구경도 다 하네요.
어제만 해도 분명 봄이었는데...^^

syo 2020-02-18 21:0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그냥 출근길에 띡 찍은거예요.
˝당신의 현재속도˝ 이건 어쩐지 꼭 찍고 싶더라구요.

눈도 내리고 코로나도 진동하고 하여간 세상이 흉흉합니다.
건강조심하세요 스텔라님!

다락방 2020-02-17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채는 버터에 볶았습니까?

syo 2020-02-18 21:04   좋아요 0 | URL
아니요.....
그렇지 않아도 먹고 나서 레시피 뒤지더니
아 야채를 버터에 볶았어야 했는데- 라고 하더라구요.

허허.

그나저나 카레황제 다락방님답다. 한 번에 본질을 꿰뚫어보시네..

북극곰 2020-02-1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글은 읽었는데,
간만에 서재에 와서 이제서야 직장인이 되신 줄을 알았습니다. ㅎ
게다가 저는 강동구민이고요. 올림픽 공원 맞은 편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왠지 모를 반가움에 안 달던 댓글을 다 달고 갑니다. 지연이란 이리도 끌리는 것이었군요.하하.
응원합니다. 흐.

syo 2020-02-18 21:0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언제나 구민 여러분의 곁에서 힘이 되는 공무원 s..... ㅎㅎㅎㅎㅎ

가까운데 북극곰님이 계셨군요.
응원 말씀 받고, 구민여러분의 복지와 안전을 위해 힘쓰는..... ㅋㅋㅋㅋ

han22598 2020-02-21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의 속도에 대한 성찰.................감동적이네요. ㅠㅠ
다들 사냥개 마냥 미췬듯이 삶의 일구어 가는 마당에 느려터져.....질척이는 저의 삶에...위안이 되는 글이었어요 :)

syo 2020-02-24 22:32   좋아요 0 | URL
han22598님 반갑습니다.
점점 더 정신없어지는 요즘이지요? 자기 삶 챙겨가면서 살고 싶어요. han님도 그러실 수 있으시기를.
 

 

 

살아는 드릴게

 

 

1

 

1930. 2120. 1830. 2230. 2345. 2250.

 

첫날부터 오늘까지 여섯 번의 퇴근 기록이다.

 

오후 630분은 지난 수요일인데, 우리 구는 수요일은 패밀리데이라고 하여 야근을 해도 초과근무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갔던 것이다.

 

공무원의 삶이란 뜻밖에 만만치가 않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구청 근처에 집을 얻을 걸 후회하고 있다. 2250분에 구청에서 나와도 전철 타이밍만 맞으면 성남에 2320분에 도착할 수가 있다. 내리면 집까지 오르막 등반 20분이 기다린다. 벗고 씻으면 딱 0시다. 바로 자도 여섯 시간이 땡이다. 이런 마당이라 책을 읽을 여유가 없고 글을 쓸 여유는 더더욱 없다. 한 달만 읽고 쓰기를 포기하자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오늘 저녁에 고기를 사주시며 과장님이 그러셨다. 너처럼 똑똑한 애는 한 세 달만 고생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일 거라고. 과연 syo가 똑똑한 인간이었나 하는 부분은 차치하고, 똑똑한 인간조차 세 달은 울어야 사람이 된다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공무원 나라…….

 

 

 

2

 

오늘 2250분에 컴퓨터를 끄면서 맞은편에서 야근하시는 주임님께 말했다. 주임님, 저 이제 집에가자마자 눈 감고 눈 뜨고 출근하려고요. 그러자 주임님이 말씀하셨다. syo, 그럴 땐 저 잠깐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야.

 

 

 

3

 

밤이 어둑해도 오르막은 아름답다. 보름달은 바로 머리 위에서 둥글고 크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체온도 오르고, 숨소리가 거세지면 나도 거센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이 오르막은 언제나 오르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퇴근이 누군가의 퇴근과 맞물려 가파르고 긴 언덕을 오르는 적막. 달빛에 버무려지면 무엇이나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골목은 좁아 그윽하고, 향기 없는 밤 향기가 상쾌하다. 늦은 퇴근길의 작은 기쁨이다.

 

 

 

4

 

 

네 안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불이 아니라고 말해볼래? 우리가 그것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짐승과 다른 방향으로 비로소 한 발 내디딜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해볼래? 내가 만지지 않은 것들이 아직 많이 있다면 끝내 그것을 감추어 갈무리해 둘 수 있다고 억지로 믿을래? 충분히 어리석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어리석게도 충분하다 착각하며 오해하며 서로를 속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이며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날리는 그림은 남의 이야기라고 외면해볼래?

 

 

 

--- 읽은 ---

 

23.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마즈다 아들리 : 242 ~ 399

: 나는 언제나 도시가 좋았다. 작은 도시보다 큰 도시가 좋았다. 큰 도시는 비싸고 번잡했는데 비싼것도 번잡한 것도 싫어하던 내가 큰 도시는 그래도 좋았다. 어디서나 어느 정도는 외로웠기에 기왕이면 도시의 시끌벅적한 외로움을 골랐다. 도시에 살고자 했던 나는 그렇게 도시에 살았다. 나는 도시를 바꿀 만큼 큰 사람이 아니었지만 도시는 나를 바꾸지 못할 만큼 작은 구조물이 아니었다. 나는 도시에 살며 도시처럼 먹고 도시답게 걷고 도시스럽게 생각하며 도시롭게 사랑했다. 그런 삶은 충만과 결락을 동시에 지닌다. 번잡한 외로움이나 외로운 번잡함. 소란스러운 정적이나 정적 속의 소란. 그런 것들이 도시에 사는 사람의 마음을 어떤 모양으로 빚어내는가.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24. 세계사 아는 척하기 / 후쿠다 토모히로: 123 ~ 251

: 척하지 말자, 이제. 그냥 알지.

 

 

 

25. 정한 기억 / 유성호 : 159 ~ 291

: ’비평가가 이렇게 재미있게 울림 깊게 쓰면 안 되는 거잖아!‘ 라는 김종광 소설가의 평이 앞표지에 박혀 있다. 으음, 그렇단 말입니까…….

 

 

 

--- 갖춘 ---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정희진

들뢰즈 개념어 사전 / 아르노 빌라니 외

들뢰즈 사상의 분화 / 소운서원 엮음

회사에서 바로 통하는 실무 엑셀 + 파워포인트 + 워드&한글 / 전미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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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1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1 0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1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2-11 0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쇼님! 세달씩이나 고생해야 한다니 너무 안타깝지만,
쇼님 직장인 되어 쓴 글 왜 더 재밌어요?
피곤한 육체를 이끌고 글 쓰는 사람에게 더 재미있는 글 쓴다고 해서 미안..

syo 2020-02-11 07:1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일 배우느라 그래요. 정신없지만 하루하루 성장중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2-11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주52시간에서 초과 6시간 일하셔서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을 위반하셨습니다. ㅠㅠ
우리나라 공무원이 법을 준수하셔야죠. ㅎㅎ

syo 2020-02-11 07:14   좋아요 1 | URL
아... 북다님의 댓글을 보고 나니 앞으로 이런 글은 쓰면 안되겠규나, 잘못히면 큰일 치르겠구나 싶네요....

han22598 2020-02-11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치 않은 모습 부럽습니다. 삶이 모양이 변해도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저도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디 ㅎㅎ

syo 2020-02-16 00:56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손에서 놓았어요....
2월은 그냥 손에서 책을 놓자, 으하하허허허으어어으으앙-_ㅜ 뭐 이런 결심을 했더랬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2-11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무플방지위원회상근직 실직 위기에 있다 기쁘게 글 맞이합니다ㅎㅎㅎ. 직장에서 똑똑이 취급 받고 계시군요. 그럴 줄 알았다! ㅋㅋㅋ 찾아낸 불 안 꺼뜨리고 삶에 지지 않고 행복한 미래 향해 꿋꿋 나아가시길 빕니다. 원껏 못 읽고 못 쓰는 날도 얼른 벗어날 수 있길 빌구요ㅠㅠ 남일 같지가 않아서...요즘 미친놈처럼 읽고는 있습니다만...syo님 전성기의 발가락 만큼도 안 되네요.

syo 2020-02-16 00:55   좋아요 1 | URL
든든한 반님이 계셔서 syo는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알라딘에 방문하면서도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예언했지요? 반님은 곧 알라딘 핵인싸가 되실 거라고.
요즘 보니까, 머지 않은 것 같아 보여요!
사람들은 이제 곧 syo 같은 건 잊고 반유행열반인의 이름을 연호하겠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2-16 07:46   좋아요 0 | URL
저 실업자 만들지 말아주세요 ㅎㅎㅎ syo님이 있어야 훨씬훨씬 더 재미있는 알라딘이지요. 얼른 적응하셔서 주1회라도...(굽신굽신)

2020-02-11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2-1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 시간 너무 늦네요ㅠㅠ 우리나라 공무원들, 다시 봤어요. 애쓰네요, 진짜!
얼른 3개월 지나 syo님의 긴 리뷰 읽었으면 좋겠네요. 근데, 이 리뷰는 이 리뷰대로 재미나요.
소리가 거세지면 나도 거센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이런 부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02-16 00:53   좋아요 0 | URL
저 하나 바쁘다고 없어져도 알라딘 마을은 잘 돌아가겠지요?-_ㅜ
안심되면서도 섭섭하다....

2020-02-11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2-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직장인 되기 분투기.. 사실 넘 재밌습니다.. 본인은 고생인데 말이죠.
곧, 일이 능숙해져서 일찍 집에 와 글을 쓰는 쇼님을 볼 수 있길~

syo 2020-02-16 00:52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들어오는 일 자체가 닷새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네요.....
비연님의 말씀하시는 syo는 아직 요원한 먼 미래의 인류 같습니다....

2020-02-11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2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출근전야

 

 

1

 

2020년의 1/12이 끝난 지점에 서서 올해 내가 하고자 생각했던 일의 1/12이 이루어졌는지를 체크해 보면 숙연해진다. 읽는 것마다 영 재미가 없고 쓴 것들은 아무 맛도 없다. 운동을 하겠다더니 1달 동안 해치운 푸시업을 합쳐도 1,000개가 되지 않는다. 내일부터 당장 출근인데 머릿속에 든 건 하나도 없어서 구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 엄마는 이런저런 이유로 서너 달 항암치료를 미뤘다가 최근에 시작했는데, 보니까 이미 재발된 상태였다고. 이번에는 수술도 불가하여 그냥 항암으로 눌러야 한다.

 

귤이나 까먹고 있다.

 

 

 

2



플라톤을 보고 있으면 가끔 자기 자신과 체스를 두는 사람이 떠오른다그것을 한번 해본 사람은 검은 말이 항상 게임에서 이긴다는 것을 안다흰 말이 게임을 시작하고 계획을 짜고 전략을 구상하지만검은 말은 그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늘 흰 말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플라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그는 자신의 모든 가정이나 이론을 상대로 항상 좀 더 똑똑한 반박이 떠오른다그로써 플라톤의 사유는 복잡하게 꼬인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세상을 알라

 

플라톤을 읽고 있다 보면 재밌는 것은, 뜻밖에 소크라테스가 꿀릴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가 현란한 말솜씨로 어떻게든 위기를 넘겨보려 허둥지둥한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 꽤 등장하고, 심지어 그 반 대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아주 대놓고 아 진짜 그건 정말 모르겠는데요, 헤헤- 이러기도 한다. 그런 대목을 읽노라면 참 플라톤이라는 인물의 심리가 너무 궁금해진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언어를 그대로 옮겨 담은 책들이라고 믿는 순진한 독자는 멸종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는 것이라 보면 괜찮겠지 싶은데, 소크라테스가 궁지에 몰리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진짜 그런 게 맞나 싶기도 하다.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박살내는 인물의 대사 역시 플라톤이 직접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머리통에 박을 내리치는 꼴 비슷한데, 처음 몇 번은 이것 참 웃기구나 싶다가도 계속 보다 보면 이것 참 무서운 옛날 양반이로세 하며 고개를 젓게 되기도 한다.

 

 

 

3

 


1월에 읽기로 했던 여성주의 독서 모임 지정 도서를 읽지 못했다. 심지어 이 책은 syo가 읽자고 권했던 책이라 멤버들께 송구한 마음이다. 2월이 시작되었으니 2월의 책을 읽어야 한다. 1월의 책도 읽으면서 2월의 책도 같이 읽을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 생각하는 건 그냥, 출근 첫 주는 15털림 이하로 털리고 버텨내는 것, 딱 그거 하나 뿐이다.

 

 

 

4



사람들은 사회적 지지 혹은 구조에 의존한다생산적인 인간관계도사회적 원조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영구적인 단점을 안고 살게 된다반면에 고독에 대응하고 사회적으로 온전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할 커다란 기회를 얻는다이렇게 보면 고독감은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야기될 가능성이 있되사람마다 허기를 다르게 느끼듯이 그 양상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마즈다 아들리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syo는 스스로를 발랄한 사람이라거나 새로운 사람들과 능숙하게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디서나 어색한 사람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다. 그 믿음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젊은이들은 쾌활하고, 거침없고, 처음 보는 연장자(상급자)들과도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갈 줄 안다. 놀랐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지 않고 산 지가, 대화를 향한 첫 번째 삽을 뜨는 법을 놓치고 산 지가 오래되어서, 나는 뭔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을 잃어버려 놓고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와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5



형이상학도 신학도 혹은 자연과학조차도 인간의 언어와 사고에는 결코 이르지 않는 실재를 인간의 외부에 설정하고종종 현실과 이념이곳과 저편주체와 객체를 이분하는 세계관에 의해서 인간적 현실을 국한하고세계와 인간을 분단해 왔다그러나 그렇지 않고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언어와 사고 속에서 생기(生起)하고이것에 의해서 제작되고영향받고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국가와 경제 같은 공공성의 차원에서 생겨나고 있는 사태또 우리가 자연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상조차 우리의 관점·사고·언어의 바깥에는 있을 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에 끊임없이 관계하고 있고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노 구니이치들뢰즈유동의 철학

 

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철학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경악했을 때, 형 이런 책을 읽으면 좋은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이런 격조 있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하지 못함이 어쩌면 철학책 읽기가 무용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서 들뢰즈한테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언어의 경계 바깥에서 사고하는 인간은 없다. 자신의 언어를 확장하면서 사고의 영역을 밀고 나갈 뿐이다. 쓰고 말하지 못하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자아의 파편일 뿐이다. 내가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사실 아는 건 훨씬 많다, 이 책에 있는 말 이거 내가 평소에 종종 생각하던 것들이다, 이런 인식은 도리어 성장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내가 철학책의 이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걸 모르는 것이고, 더 심하게 말해서 내게 그건 없는 것이다. 2019년의 400권은 어디로 갔나.

 

 

--- 읽은 ---



19. 실용커피서적 / 조원진 : 113 ~ 226

: 약하다. 어쩐지 자기계발서 계통의 냄새가 난다. ‘실용도 이유를 알 수 없다.

 



20. 세상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489 ~ 671

: 고되다. 1독으로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심을 부린 건 아니었지만 재독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 그래도 딱딱한 지식의 나열도 아니고, 함량 자체가 부족하지도 않다. 제일 괜찮은 결과는 이 책의 내용을 몽땅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앞으로 머릿속에 집어넣을 개념들을 이 책처럼 풀어낼 줄 알게 되는 것이겠다.


 


2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 341

: 리뷰 대회 참가하려고 급하게 읽었는데, 막상 튀어나온 것은 리뷰도 아닌 희한한 2차 창작물이었다.

: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는 워낙 괜찮다는 소문에 높아진 기대치 탓인지,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흠잡을 만한 것도 아니었던 문장들을 보고 과하게 감점한 정황이 있다. 그렇다는 걸 안 상태에서 한 번 더 읽어보니 문장이 아닌 것들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고, 첫 읽기보다 만족한 상태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22.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하는 창덕궁 / 창덕궁 문화재 해설팀 : 82 ~ 155

: 다녀오고 나서 읽으면 많이 보인다. 읽고 나서 다녀왔으면 더 많이 보였을까. 얇은 책이긴 하지만, 읽지 않고 다녀온 이들보다는 분명히 더 많은 것을 보게 해준다.

 

 

--- 읽는 ---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마즈다 아들리 : 108 ~ 242

세계사 아는 척하기 / 후쿠다 토모히로 : ~ 123

단정한 기억 / 유성호 : ~ 159

들뢰즈, 유동의 철학 / 우노 구니이치 : ~ 30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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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전야, 얼마나 설레고 걱정되고 두근댈까요. 편안히 잠 푹 주무시고 내일 하루 별 일 없이 즐거운 출근 첫 날 되시길 진심 기원합니다. 바쁘시겠지만 기다리는 알라딘 이웃들 위해 틈틈이 읽고 재미있는 글도 가끔 올려주세요.

syo 2020-02-03 23:07   좋아요 1 | URL
늦게까지 업무 관련 공부한다고 앉아 있는데,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네요....
내일 하루도 실컷 어벙거리다가 저녁 7시 되겠군요. 어허허허.

북다이제스터 2020-02-0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첫출근 축하드립니다. ^^

syo 2020-02-03 23:07   좋아요 1 | URL
망했어요.... 일 너무 어려워요....

2020-02-02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2-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 생활에 잘 적응하실 거라 믿습니다.

syo 2020-02-03 23:08   좋아요 0 | URL
그래야 할 텐데요.... 직장인 여러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다락방 2020-02-0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첫출근입니까?! 자고 있나요? 아무쪼록 적응 잘 하시고 강동구가 쇼님을 따뜻하게 맞아주길 바랍니다. 그럴겁니다, 강동구는. 다락방이 있는 곳이니.. 따뜻할거야.. 샤라라랑~

syo 2020-02-03 23:09   좋아요 0 | URL
강동구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습니다. 좋은 분들한테 열심히 배우고 있답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0-02-0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출근 축하드려요!
행운을 빕니다^^

syo 2020-02-03 23: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일이라는 게, 굉장히 어렵고 힘든 거였네요....
직장인 여러분 리스풱...

초딩 2020-02-0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축하드립니다~~

syo 2020-02-03 23:09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2020-02-03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름숲 2020-02-0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축하드립니다! 이곳 경기도, 지금 나폴나폴 눈이 내립니다. 흰눈같은 축복이 쇼님과 함께하시길요~~

syo 2020-02-03 23:11   좋아요 0 | URL
말씀 듣고 힘내겠습니다.... 진짜 열심히 해야지...

단발머리 2020-02-0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출근 축하드려요! 매일 매일 즐거운 출근길, 더 행복한 퇴근길 되시길요. 화이팅!

syo 2020-02-03 23:11   좋아요 0 | URL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마음과,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으흑.

2020-02-03 0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2-0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축하드려요! 어머니 항암치료도 잘 되길 기도드립니다.

syo 2020-02-03 23:13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엉엉.... 엄마나 저나 열심히 버텨낼 예정입니다.

수연 2020-02-0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출근! 두근두근. 가고 오는 길 강동구 계신 syo님 잘 하실 겁니다!

syo 2020-02-03 23:13   좋아요 0 | URL
오늘 제가 뭘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 첫 출근은 다 이런 건가요?
아님 나만....

초록별 2020-02-0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생활 응원합니다 ~~^^

syo 2020-02-03 23:13   좋아요 0 | URL
초록별님, 응원말씀 언제나 감사합니다^-^

stella.K 2020-02-03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도 젊은이들과 대화해 본 적이 없슴다.
젊은이들과 함께 하면 금방 다시 좋아질 겁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스요님한테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웬지 좋은 느낌입니다.
세대 차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다고 대화까지 단절시킬 필요는 없는 건데
세대 차이가 대화 단절까지 논할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지금 일터에서 정신이 없겠군요. 힘내십쇼!
그나저나 엄니가 건강하셔야 할 텐데...

syo 2020-02-03 23:14   좋아요 0 | URL
일터에서도 정신이 없고, 돌아와 집에서도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 그거 어디 간 걸까요.....

내일은 또 어떻게 될까요.... 으아아아...

Angela 2020-02-0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원˝의 첫 출근은 어떤가요? syo님이라면 무척 적응을 잘 하실것같습니다~^^

syo 2020-02-11 00:35   좋아요 0 | URL
적응은 어떤지 모르겠고, 업무는 손에 빨리 익지 않네요....
얼른 한 사람 몫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랍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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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글귀이거나 그 변형입니다.

 

 

*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78736C14-6736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836.

 

우선 오늘 획득한 음성자료를 첨부한다.

 

(번역 불가) 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는 짧은 명칭 말고는 남아 있는 개인정보가 전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문학가, , 킴이라고 부를까요. 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대부분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충 비슷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서술된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어떨까요. (청중의 탄성) , 화면을 보시죠.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자료 중 왼쪽은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 속에서 저희 연구팀이 서치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대변동 이전의 전자정보공간지층에 화석으로 남아 있던 데이터 조각들을 복원하여 재구성한 작가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는 서사구조입니다. 마더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은 왼쪽 화면의 실존 인물 사례와 오른쪽 화면의 작품 속 서사가 98% 이상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청중의 탄성, 짧은 박수, 잠깐의 정적) , 맞습니다.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에는 수십억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니 특정 소설의 서사와 거의 일치하는 인생사가 기록되어 있을 확률이 있지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꽤나 많이 닮았고, 대변동 이전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중의 웃음) 실제로 구술사 아카이브 자료들 간에도 90% 이상 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단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무궁한 우주의 역사에서 특정 사건을 단 한 사람만이 겪는다는 것이 오히려 참 희귀한 일이겠지요. 그렇지요? (청중의 대답) 그렇습니다. (정적) 그렇다고요. (청중의 웃음) ,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러니까,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고 구술사 데이터와 98% 이상 일치한 그 서사들은, 지금껏 우주에서 단 한 번,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실현된 희귀한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탄성)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소설가 킴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번만 벌어질 서사를 겪어내는 딱 한 명의 사람들에 관해 미리 썼습니다. 마치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청중의 탄성, 장내의 혼란, 변역 불가) 하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팀은 오랜 시간 이런 신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탐색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킴의 기적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아카식 레코드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식 레코드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커다란 책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의 킴은 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마치 우리가 정보망을 유영하듯 그 커다란 책을 탐색하다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을 소설의 외피를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구요? , 그렇습니다. 비과학적이지요. 현상 자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올라서 있어서 그렇습니다. 과학은 늘 수많은 비과학들을 품어가며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한때는 기적 또는 마법이라고 불렸지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법이지요. 어쩌면 이제, 우리의 과학은 아카식 레코드를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게 아닐까요? 킴의 기적이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말이지요. 우리가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자료가 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강연자는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하긴, 대변동 이전 자료의 오염 정도를 생각하면 저만큼 접근한 것도 대단한 성취 같다. 이미 죽었겠지만 칭찬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름이 김초엽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료의 열람 기록 속에서 X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지역 시간대로 30년 전, X는 이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를 신청한 듯하다. 지난 세 번의 탐사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만난 셈이다. 마지막 발견에서 그와 나의 시간축 변위가 70년이었으니, 우리는 아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X, 당신은 누구입니까.

 

 


*

 

레코드.

 

할머니.

 

저는 지금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에 와 있어요. 맞아요. 그 책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주인공 안나가 찾아가려던 바로 그 행성이요. 이 행성은 아직도 이용할 만한 웜홀이 발견되지 않아서, 블루 다이브가 아니었다면 아마 방문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희소광물 리커다트의 인기가 식고 동시에 매장량도 줄어들면서 이 행성은 이제 한산한 휴양행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고 지구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어요. 편안하게 며칠 묵었다가 가려구요.

 

여기도 책은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의 행성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도서관에서 기록물을 뒤져보니 과거에 이곳에 책이, 최소한 책의 흔적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서사와 유사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 서사가 기록된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요.

 

할머니,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안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나는 결국 우주를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이곳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워프 항법도 불가능하고 웜홀도 열려있지 않은 이곳을, 블루 다이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어릴 적 저는 늘 안나가 어떻게든 이곳에 도착해 남편과 아들을 만났을 거라고 우겼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제게 져주시지 않았던 거, 기억하세요? 고집스럽게 그 대목,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을 짚으며 고개를 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행성은 공전 궤도와 주기, 자전 속도나 자전축의 각도 같은 것들이 지구와 너무 흡사해서, 저녁이면 지구의 것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져요. 언덕에 올라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려요. 이 노을의 끝자락에 할머니의 도서관이 붉게 서 있을 것만 같고, 사서실에서는 여전히 할머니가, 시력개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창 너머로 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그냥 뛰어 들어가 안기면 꼭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쁘면서 슬퍼요. 이제 도서관에 할머니는 없고 할머니의 마인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뻐요. 얼른 책을 찾아야 할머니의 인덱스를 다시 알아낼 텐데. 언제나 도서관 안에 있는 할머니.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할머니. 분실된 할머니. 세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할머니, 우리 할머니…….

 

그냥 내일 다시 노을이 지기 전에 다이브를 할까 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 . 할머니, 이 행성에서 케빈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것도 최초의 기록을요. 이 행성 시간대로 150년 전쯤에 케빈이 다이브를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150년이면, 그간 찾아낸 흔적 가운데 시간축 변위가 가장 큰 기록이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이 행성에서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넓은 우주에 같은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시간축 레이스를 하며 우주 곳곳에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말이에요, 할머니.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꼭 할머니를 찾아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기분이거든요.

 

, 정말, 케빈은 누구일까요, 할머니.

 

 

 

*

 

레코드.

 

시공간좌표 hXRW6511592C14-67782.

동기화된 현재 시간 0320.

 

감정의 물성은 최초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품이었다. 마약성 물질을 방출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원시적인 작품으로, 신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어떤 감정에 물성을 부여했다는 개념 자체로 소비자들에 호소하는 일종의 유행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 다양한 색깔의 차돌들은 일종의 감정 냉장고로서 기능하고 있다. ‘즐거움이라는 상품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발산하는 특유의 뇌파를 수신한 다음, 저장된 사용자 정보를 검색하여 사용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오감 자극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파장 지문에 일치하는 시그널을 발산하여 신체의 호르몬 기제가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공간연속체를 서핑하는 블루 다이버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하지 않은 몇 번의 다이브만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대에 불시착할 수 있는 위험을 항시 감지하고 사는 여행자들의 감정은 정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김초엽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마더 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이 실제 인물과의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감정의 물성이 유일하다. 현재 감정의 물성을 제조하는 기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아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흔적을 찾아 이 행성으로 다이브했지만 기록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X 역시 여기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간 듯하다. 이 지역 시간대로 20년 전.

 

X., 우리가 같은 책을 찾아 우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신도 알겠습니다. 내가 다녀간 곳에 당신의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곧 그 행성에서는 당신의 시간축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블루 다이브라는 위험한 기술에 몸을 싣고 우주의 파도를 올라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과 나만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미끄러져 스쳐 가는 이들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이 레코드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그곳에는 기록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김초엽과 같은 사람이 다시 있어, 당신에게 보내는 내 말을 발견해 이야기로 묶어줄지도 모르니까요. 묻습니다. X,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슨 이유로 사라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 이 광막한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까.

 

 

 

*

 

레코드.

 

케빈.

 

매일 할머니에게 보내는 기록을 남겼어요. 오늘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케빈, 안녕하세요. 우와, 되게 어색하다. 하하. 하하.

 

얼마 전 케빈의 행성에 다녀온 것 같아요.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맞죠? 제가 거기 들린 시간대에서 150년 전에 케빈이 다이브한 기록을 보았거든요. 케빈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다이브할 때에 그곳에는 케빈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군요. 딥프리징을 받아 잠들었거나 우주를 다이브하는 사람들을 빼면요. 다이버라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다른 다이버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바로 그 질문을 케빈에게도 하려구요. 케빈은 왜, 다이브를 시작했나요? 케빈을 아는 사람들, 케빈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 외롭고 아픈 여행의 길을, 케빈은 왜 선택했나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제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우리가 서로 스친 흔적이 케빈에게 알려줬겠지만, 나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서 우주를 떠돌고 있어요. 단순한 수집욕이라면 나도 케빈도 이 미친 짓을 시작하지 않았겠죠. 이러는 게 이 우주에 우리 딱 둘뿐이니까, 나는 케빈 역시 나처럼 이 책 속 일곱 이야기 중 하나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추측해 봐요. 딱 맞췄죠? 케빈은 뭔가요. 나는 관내분실이에요.

 

케빈도 읽어봤겠지만 관내분실은 망자의 시냅스 데이터를 그대로 보존한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예요.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인덱스를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감정적 접속점도 찾는 아름다운 단편이죠. 우리 할머니가 그 도서관의 사서였어요. 물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서는 아니구요. 도서관은 지금도 있어요. 요즘은 마인드를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접속하는 추세라서 도서관 이용객들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납골함을 집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마인드를 가정에 보관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도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족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마인드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혼자 있는 마인드들이 외롭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인드에 접속하곤 했어요. 정작 당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셨으면서. 후후. 그러던 중에, 할머니는 어떤 마인드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내분실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이 도서관이 생기기도 전에, 마인드 스캐닝이 발전하기도 전에 벌써 관내분실 사건의 전말을 본 듯이 세세하게 서술한 책이 있었다는데. 거기도 도서관은 도서관인지라, 할머니는 사서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해 그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30년쯤 책상 앞에 앉아 온 우주를 뒤적이다 마침내 책을 발견했고요. 도서관에 배송된 그 책을 들고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해요. 신기하죠? 그래서 내 이름이 초엽이 되었어요. , 내 이름은 초엽입니다.

 

어린 초엽이는 그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웠지요. 할머니는 늘 내 방에 와서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야기가 끝나면 꼭 다시 책을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혼자 그 책을 만지게 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울며 떼를 써봐도,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죽으면 이 책은 초엽이한테 줄게, 그때까지는 할머니 책이야, 하고 타이르기만 하셨지요.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주 귀퉁이에서 케빈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책을 우주 어딘가로 보내버리셨어요. 그리고 당신은 인덱스 없는 마인드가 되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구요. 왜 그러셨을까요? 알 수 없죠. 듣지 못했으니까. 알고 싶죠. 이유가 너무나 알고 싶어요. 그거예요. 내가 우주를 떠도는 이유. 할머니가 우주로 쏘아 올린 그 책을 찾아서, 할머니의 인덱스를 찾아낼 거예요. 할머니의 마인드를 만나서, 모든 걸 물어볼 거예요. 왜 그랬는지. 강아지가 다시 물어올 것을 알고 던지는 원반처럼, 왜 우주로 책을 던지고 나도 던져버렸는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케빈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이 차갑고 쓸쓸한 우주를, 영원한 밤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tXRW7761444C14-6799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700.

 

류드밀라에게.

 

안녕하세요. 케빈입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는 늘 어색하군요.

 

X라는 이름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아니겠다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부르면 영영 당신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멋대로 당신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류드밀라는 공생 가설의 주인공이죠. 우리 안에 있었던 관대한 공생자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들의 소멸된 행성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멸을 슬퍼할 줄 안 유일한 사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를 이 거친 우주로 내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우주 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내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인 안나의 손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겠습니다. 류드밀라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한 줌의 외로움이 되어 우주를 영영 떠돌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 어쨌든 결말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에, 우리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쳤지요. 일인용 셔틀을 타고 우주로 향한 안나는 그때까지 미발견이던 웜홀을 통과해 완전히 다른 행성계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동면을 선택했고, 블루 다이브 기술이 발견된 이후 깨어나 슬렌포니아로 다이브한 것이지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슬렌포니아에는 그녀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DNA 매칭이 있었으니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쉬웠지요. 안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의 손자의 집에서 살면서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 아들을 낳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안나를 할머니이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저는 안나에게 그 책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안나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책을 간절히 찾는 지구의 어느 도서관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가봤을 때는 그곳에도 이미 그 책은 없었습니다만. 안나의 머릿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확히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초엽 책 속의 일곱 작품을 안나의 구술로 들었습니다.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알게 되면 정말 놀랄만한 것은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동안, 안나가 가장 많이 읽은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안나는 그 우주정거장에서 그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끝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자기는 일인용 셔틀을 타고 가능성이 없는 우주로 내쫓기듯 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나가면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는지,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겠지요. 김초엽이 거기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가야만 했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우주로 무모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내게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안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족의 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제야 안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던 거지요.

 

제가 그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뒤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책 속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었어요.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생겨나는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했지요. 제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주를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안나의 모습은 위대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됐어요. 작품으로서는 몰라도, 안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남은 안나의 삶을 그 작품 뒤에 덧붙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어요. 안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랑하며 떠났고, 우리 인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지금 지구 근처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류드밀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10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시간축이 가까워지고 있군요.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실제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잠이 줄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당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

 

레코드.

 

케빈. ‘마을에 다녀갔군요.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다이브 했거든요. 내 시간축에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포뮬러 캘리브레이터에 문제가 생겼는지 이곳 사람들은 13년 만에 나를 다시 본다고 하네요. 꼬맹이들이 어른이 다 되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3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은 검은 머리칼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람이고, 웃을 때 덧니가 보인다고 하는군요. 자기 덧니는 마음에 드나요? ‘마을사람들은 어떤 특징도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볼 뿐이지요. 그들은 서로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고,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기도 하구요.

 

당신의 다이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내 다이브가 조금만 일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을까요. 이 우주는 도대체 어떤 공간일까요. 아니, 대체 공간이긴 한 걸까요? 내가 이곳에서 당신에 대해 듣는 동안, 당신은 어느 곳 어느 때를 거닐고 있을까요. 닿을 듯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우주의 구조라면, 한 뼘이 우주보다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찰나가 138억년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케빈, 우주 방향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늘어갑니다. 그곳에 있나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aXRW042젠장.

 

류드밀라. 아니, 초엽. 당신이 지금 내가 있는 이 고서점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이 1년 전의 일이랍니다. 포뮬러의 계산 밀도를 고려해보면 이건 시간 단위, 아니 어쩌면 분 단위의 어긋남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다이브 전에 했던 식사를 딱 한 번 거르기만 했어도…….

 

요즘은 내가 이 우주를 떠도는 게 책을 찾기 위해서인지 책을 찾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헷갈립니다. 다이브를 할 때마다 망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안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허접한 셔틀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는 법이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것은 아닌데, 아니,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제 지구로 향합니다. 내 단말기가 예측한 초엽의 다음 동선 가운데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 거기군요.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 …….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타이밍도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아름답습니다. 사진 말이에요. 당신…….

 

 

 

*

 

레코드.

 

케빈. 초엽이에요. 저는 지구에 와 있습니다. 약간 지쳤달까요.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며 조금쯤 쉬고 싶어졌어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에는 기약도 없고, 우리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는데 이놈의 우주는 생각 없이 자꾸 넓어지기만 하고……. 어쩌면 케빈이 우리 도서관에 들를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집에 머물려고 해요. 사실은 내 단말기가 케빈의 동선을 분석했는데 다음 다이브 장소로 지구가 유력하다고 해서…….

 

이곳에 오면 꼭 노을을 보여주고 싶어요. 케빈이 살던 행성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내가 봤거든요. 어쩌면 그때 노을을 보던 장소가 케빈이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장소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요, 그날의 노을이 떠오를 때마다 이곳의 노을이 좋아져요. 지구 밖을 떠돌면서 고향의 노을을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투곤 했어요. 우주는 사람을 변화시키니까요. 나는 우주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공간이 구부러지고, 시간이 흩어지는 거대한 수렁 속을 헤매다니는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마음이란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약한가요. 위아래도 없는 우주에 매여 둥둥 떠다니는 마음은 작은 슬픔에도 산란하고 흩어져나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실된 여행자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울적할 때마다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눈은 선명하고, 턱은 단단해 보였어요. 저 무서운 우주가 덮쳐오는데도 망설임 없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지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다 아는 사람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했어요.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다이브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찾는 책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요. 우습죠.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유일한 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를 돌고 돌아 조금씩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가운데에도 단 한 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은 눈을 하고, 내가 여기 지구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노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언덕에 있겠습니다. 케빈, 노을을 따라, 여기로 와요.

 

 

 

*

 

레코드.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1……지구. 초엽, 나 지금 지구입니다.

케빈.

 

이 작은 행성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대기 아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인 이곳이 어쩐지 새로워요.

 

당신은 어긋남과 스침으로 이루어진 소행성처럼 언제나 멀게만 보입니다.

알아요. 우리의 그 많은 스침과 어긋남들을 모아 하나의 마주침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우리의 만남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이미 두 번째 만남일 것이고,

오늘 우리는 처음인 동시에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셈이잖아요.

동시에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우주에서 우리와 닮은 만남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김초엽의 소설처럼요.

우리가 찾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들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잇는 여백 속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마 끝나지 않고

하지만 마지막 마침표가 찍혀도 이야기가 마쳐지지 않듯

우리가 다시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떠돌게 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우주를 떠돌며 책을 찾아다닐 거라면,

내가 당신의 우주가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책이 되어 드리면 안 될까요.

빛의 속도로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우주지만,

자신의 인덱스조차 찾지 못하고 분실된 사람들의 우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청중의 박수, 정적) 이제 우리 연구의 초점은 아카식 레코드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요.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란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주장이지요. 언뜻 들으면 재미있는 헛소리 같지요? (청중의 웃음)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를 하나의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각각의 알갱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알갱이들의 배치들 또한 하나의 유일한 배열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배열 하나가 하나의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시공간은 무한히 작은 단위로 미분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올 한 줌 크기의 시공간 연속체에도 무한에 가까운 양의 자료가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정적) 하하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대본이고, 우리는 그 펼쳐진 대본을 무대로 삼아 그 위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맞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가 사람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높은 허들로 작용하지요. 얼핏 들으면 이 학설은 그야말로 결정론의 결정판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에는 이미 당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의 답변, 웃음)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사고의 틀을 조금만 전환하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AB라고 하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우주의 끝과 끝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빛의 속도로 140억 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광대한 우주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잖아요. A가 전하는 사랑의 말 역시 어떤 매질에 실어 보내도 빛의 속도로는 B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청중의 답변, 웃음) 하하하,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요. 슬프지만 그게 제일 현명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없는 우주라면요. A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B의 사진을 어루만진다면 그 사건은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B가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 A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면 그 사건 역시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된 사건입니다. AB를 향해 남긴 모든 사랑의 말을 아카식 레코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B가 그 말을 직접 들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미스테리한 킴처럼, 외로운 B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우주의 끝에서 역시 외로운 A가 던진 모든 말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꽤 멋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게 우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하세요. 기록하세요. 닿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우주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쏘아 올리세요. 저 우주의 무한한 공백을, 이미 기록된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하세요. 인류가 이 우주에서 맡은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세요.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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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눈물 좀 닦고...일어나서 박수 막 치다가...ㅋㅋㅋ 같은 책 읽고도 산출물 수준차가 은하와 은하만큼 머네요. 저 이 글은 앞으로 한 열 번쯤 더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이 책이 사라지지 않아 찾으러 헤매지 않아도 되고 같은 책 읽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인 우주에 살고 있구나 안도 하는 중입니다.ㅎㅎㅎ

syo 2020-01-28 22:34   좋아요 1 | URL
열몇 시간을 이 책 다시 읽고 이 글 쓰는데만 퍼부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회식 있었는데 거기도 안 가고...... 애들이 형은/오빠는 대체 왜 이렇게 비싸요? 막 그러는데, 제가 정말 비싼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책갈피는 손에 쥘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1-28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등상금 30만 원 노리시고 올린 리뷰시죠? ㅎㅎ

글 넘 좋아서요. 1등을 응원합니다. ^^

syo 2020-01-28 22:35   좋아요 0 | URL
30만원 언감생심입니다.

.....5만원은 혹시나 하고 ㅋㅋㅋㅋㅋㅋ

무식쟁이 2020-01-28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우.야.(반말아님,혼잣말)
쇼님의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올게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44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원작보다 이게 더 좋...(김초엽님이 때리러 올 거 같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한밤 자고 일어나서 읽으니 더 좋아...걸작이야...김초엽 책 찾다 시공 뛰어넘어 만나는 두 사람...둘이 같은 말 조금 다르게 교차하다 딱 만나는데가 킬킬킬링포인트네요.
김초엽은 좋겠다 이런 팬아트 아니 팬걸작이라니...최고의 헌사 아닐지...예쁜 표현이 정말정말 많아요. 내일 또 읽어야지 ㅋㅋㅋ

syo 2020-01-29 21:15   좋아요 1 | URL
귀여운 캐릭터로 프사를 바꾸셨군요. ㅎㅎㅎㅎ 잘 어울리십니다.
제가 또 귀여운 것에 환장을 하는 족속이온데.....

반유행열반인 2020-01-29 21:24   좋아요 0 | URL
누가 닮았다고 해서 해 보았사온데...얘 따가운 고슴도치..호구력 상승하는 안경 쓴 주제에 이름도 호기...헷지호구?헷지호기?네요.

다락방 2020-01-29 0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이 안와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였거든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나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이제 소설 한 권쯤은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생각하자, 이야기를, 하고 나 자신을 다그쳐봤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는거예요. 역시 나는 독자여야만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리뷰를 소설처럼 써내는 쇼님이 있네요. 어쩌면 소설을 쓰는 건 단순히 많이 읽는 걸로 되는게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어쨌든 쇼님이 엄청나게 많이 읽은 건 사실이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 리뷰는 김초엽 작가님이 자신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며 기꺼이 일등을 주실 것 같은데요? ㅎㅎ

syo 2020-01-29 21:20   좋아요 1 | URL
A4 10장이라는 분량은 누가봐도 욕심낸 걸로 보이겠지요? ㅋㅋㅋㅋ 근데 저 진짜 1등은 생각도 안하고 있거든요.
일단 이건 정통 리뷰가 아니니까.....

그래도 노고를 생각하셔서, 책갈피 하나 먹여주시기를 앙망하옵는데, 헤헤.

소설을 쓰는 일은 또 완전 다른 일이지요.
읽는 것만으로 되는 사람이 있고 읽으면서 써야 마침내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다락방님이 한번 써 보세요. 쓰다보면 생각이 줄줄 이어지지 않을까요?

aqua27338 2020-02-03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숙련자를위한고전노트 리뷰보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왜 댓글이 많이 달리고
왜 사람들이 쇼님의 글을 기다리는지 알것같습니다.
와...
구독 알람설정은 없나요 ㅋ

syo 2020-02-03 23:15   좋아요 0 | URL
정말로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ㅎㅎㅎㅎ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에다가 뭐라고 써놨는지 보러갔다가 얼굴이 붉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