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면 거기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시간은 주로 밤. 유리창 너머로 저 아랫동네의 불빛이 반짝이며 넘어온다. 노랗고 붉은 불빛들이 주는 위안, 저 멀리 불을 밝힌 창에서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오늘도 잘 살았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94쪽

 

매일같이 그날의 하루와 안녕하면서 베란다 바깥쪽을 내다보면 초롱하게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과 먼 아파트의 점점이 들어온 불빛들이 힘들었던 하루치 마음을 위안한다고 느낀 적이, 나도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쓴 단어벌레님의 마음을 감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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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 가운데는 어른의 눈에 들지 않는 그림인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 얼마만큼 풍부하게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가'이지, '귀엽다' '색이 밝고 예쁘다'가 아닙니다. 이야기 표현력이 가장 강한 그림의 요소는 모양입니다. 색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때문에 색이 없는 편이 그 이야기를 더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색은 저 쪽에서 내 쪽으로 뛰어드는 것이지만, 모양은 반대로 내 쪽에서 저 쪽으로 주목하고 인지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즉, 색은 내 눈을 잡지만 모양은 내 눈이 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온 산이 타는 듯한 단풍을 보고 사람들이 "와, 곱다!"라고 감동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잖아요. 그러나 계곡의 거암, 기암인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것은 거북이 같다 또는 사자를 닮았다고 함ㄴ서 거북바위 사자바위 등의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이 차이지요. 색의 지각은 직접적, 즉각적, 수동적인 데 비해 모양의 지각은 간접적, 추상적, 적극적이지요."

-161쪽

 

결정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TMI와 조언자 역할에 부족함 없는 레퍼런스는 어디에서 운명이 나뉠까? 판단기준 중 하나는 출처의 신빙성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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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옹을 잃어버렸어요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 1
가브리엘 뱅상 글.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황금여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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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서를 한 권 제대로 읽어볼 시간도 없을만큼 일상에 치어 바쁜데, 어린 아이를 위해서 뭔가 부모교육같은 거라도 한 번 다녀와야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 날 읽어보면 좋겠다. 너무 ‘이상적‘이지만, 그래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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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쩌면 10년 전에 지자체에서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돌길을 깔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1년 9개월 3일 전에 문정이 지나가는 말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136쪽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신중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무심결에 튀어나온 습이 순간의 선택권을 가져가는 횟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썩 괜찮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것을 유념하고 살겠다는 결의가 있어도, 마음길은 늘 가던 길로 가려고 한다. 작가가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 것 같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

주변에 누군가 나쁜 일을 당하면 사람은 누구나 내가 그 때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자책하게 될 수밖에 없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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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2세인 큰아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사춘기가 찾아오지 않아 여전히 세상에서 최고 좋은 사람이 엄마이고, 간혹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 엄마가 다 저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더불어 함께 믿고, 엄마하고 수다 떠는게 너무 즐겁다고 말해주는 아이이다. 이 애의 특이함(??)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그 중 흉은 아니지만 화제로 올리면 재미난 것 하나만 말하자면 입맛이 너무너무 토속적이라는 거다. 주위 어른들이 아이 입맛을 두고 한 마디로 딱 잘라 표현하는데 그 말이 재미있다. 기사식당. 기사식당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그 메뉴가 바로 이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의 식단이기 때문이다. 그 별난 입맛이 이미 두 살때 증명됐는데, 그것도 순대국밥집에서였다. 어른들이 먹고 있는 시뻘건 국물을 보고 입맛을 다시더니, 식사를 마쳐갈 즈음에는 저는 안 준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혼 좀 나봐란 심정으로 매운 국물에 밥을 말아 입에 넣어줬더니 코를 박고 그릇을 핥았던 역사가 있다.

 

초콜릿을 입이 달다고 한 조각 이상 못 먹고, 케이크는 생일날 한 번 먹으면 족하고, 고기는 한두 점 먹으면 됐으며(몹시 질이 좋은, 숯불에 구운 소고기는 예외로 하고), 최고로 치는 반찬은 유채나물 무친 것이다. 요즘 아이 치고는 나물 맛을 썩 잘 구별한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은 이유는 오늘 아이가 한 말이 너무 기억에 남아서인데, 그 말이 나온 배경과 말이 타고 나온 목소리의 결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하려면 그 입맛을 설명하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도록 저녁엔 또 뭘 해먹어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알배추를 뜯어넣어 멸치육수에 된장과 마늘, 대파만 좀 풀어넣고 배추가 흐물거리도록 국을 끓이고 매운 코다리조림을 만들었다. 점심에 떡볶이를 과하게 먹어서 속이 안 좋다던 아이는 저녁 밥상을 보고 반색을 하더니 축 늘어진 배추를 호로록 호로록 연달아 건져먹었다. 그러고선,

 

엄마, 5학년때 학교에서 순우리말로 맛을 표현하는 여러 종류의 단어를 배우거든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랬었구나, 근데?

거기에 달보드레하다는 말이 나와요.

아, 엄마도 그거 알아. 어감도 되게 예쁘지.

근데요, 지금 이 배추 맛이 딱 그거예요. 설탕 같은 걸 넣어서 낸 인공적인 단맛은 하나 먹으면 끈적거려서 더 먹기 싫거든. 근데 배추가 되게 달아. 이게 바로 달보드레한 이야.

그러고선, 엄청스레 행복한 얼굴로 한 그릇을 싹 비웠다.

 

올 겨울방학에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이미 정해놓고 열심히 독서하고 있지만, 오늘 있었던 작은 일로 사전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어졌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멋진 책도 있고,

 

사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쓴 훌륭한 책도 있다.

 

아래의 두 책은 지금 나이로 읽기엔 여러가지로 어렵거나 조금 이르거나 한 구석이 없지 않아서 좀 나중으로 미뤄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저녁 먹으면서 네가 했던 짧은 한 마디로, 이런 책들을 또 이렇게 얼기설기 모아봤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어쩌면 질린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고, 엄마 정말 못말려 하면서 피식 웃을지도 모르고. 설마 이걸 나더러 다 읽으라는 건 아니지? 할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엄마는 오늘 네가 관념의 세계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단어 하나를 현실로 만난 순간의 감동을 아주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라는 걸 깨닫고 얼굴에 함박미소를 떠올린 네게 이런 행복한 배움이 많아지기를, 학교에서, 책에서 머릿속에 심어 준 많은 씨앗들이 실제로 떡잎을 내미는 때는 바로 이런 순간들이라는 걸, 이게 진짜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현실에서 진짜를 발견하는 그 기쁨을, 너도, 다른 아이들도 많이많이 누릴 수 있기를. 그건 아이들의 특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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