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사실이란 없다, 다만 해석들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현대의 사유 방식에서 중요한 이유이다. 소위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은 사실상 독자들의 가치관이 이미 개입된 선별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231쪽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살면서 요즘처럼 깊었던 때가 있었을까? 어른의 개인적인 가치관이 아이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가능하면 바른 쪽으로 전하고 싶다는 게 일반적인 부모의 바람일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 너는 뭐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한 번 대놓고 물어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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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집에 비해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을 빨리 재우는 편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이와 초등 고학년인 아이가 자는 시간이 평균 아홉시 반에서 열 시이고, 이제 유치원 졸업을 코 앞에 둔 막내는 여덟시 반이면 잠잘 준비를 한다. 삼십 분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홉 시경에 잠드는 셈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쭉 읽어주었던 책들을 목록을 만들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간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든다. 무슨 책을 읽어줬을 때 셋 중 누가 어떤 반응을 보였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런 것까지는 일일이 다 기록해두기 힘들었더라도 제목 정도는 그때그때 적어놓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제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때늦었다.

 

아무튼...

 

위의 두 아이들은 이제 엄마가 책 읽어주는 걸 들으려고 일찍 들어와 눕기보다는 저희들끼리 수다 더 떨다가 자러 들어오는 걸 선호하는지라, 이제 이 책 읽어주는 일도 몇 년 안 남은 호사(이걸 불과 일 년 전까지도 노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선배들이 '좋은 시절이다'라고 말하는 심경을 좀 알겠다 싶어지니 호사라고 느끼게 됐다)가 되어 책을 좀 더 신중하게 고르게 되었다. 주로 그림책을 골랐었는데, 일주일 쯤 전부터 막내는 '엄마, 그림책 말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눠 읽는 그런 긴 책 읽어줘'하고 똑부러지게 요구해왔다. 뭘 읽을까, 고민하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반가운 책을 골라봤다.

 

사실 내가 읽었던 것은 이 에디션이 아니다. 나남출판에서 나온, 아마 최초 번역본이지 않았나 싶은 책인데 기억으로는 번역하신 분이 원서로 읽었다가 너무나 감동을 받으셔서 직접 번역에 나서셨다더라, 그런 썰이 있는 책이었다. 새로 나온 이 깔끔하고 사랑스러운 장정의 워터십 다운도 너무 예쁘지만, 첫 번역본과 달리 토끼들의 이름이 영어 그대로 나와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봐야 지금도 말할 수 있는 애들은 개암이, 더벅머리, 그리고 토도방정 정도지만. 그땐 몰랐고 이제서야 아! 싶은 건, 뭔 이름이 이래, 싶었던 토도방정은 아마도 토끼+오도방정의 합성어가 아니었었을까 싶다는 거 정도. 그런데 우리말로 옮겨놨던 그 이름들이 기억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건지 원래의 이 이름들이 당최 입에 붙지를 않는다. 엘-어라이라도, 어쩐지 그 옛날의 엘-어하랄롸가 더 익숙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절 출판사 판의 훌륭한 점이라면 역시 충실한 번역이(리라 믿음...)겠다. 총 767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인데, 아무래도 예전 버전은 다이제스트판이었겠구나 하는 의심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총 페이지수가 거의 두 배 분량에 달한다!! 무엇이 잘려나갔던건지 이제와서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아이에게 읽어주다보니 좀 알 것도 같은 게, 묘사가 어마무지하다. 이쯤 되면 디테일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냥 문장으로 모든 것을 다 해설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음. 어지간한 인내심으로는 읽어내기 힘들겠구나 (그래서 큰애들이 다들 듣다말고 도망갔나) 싶은 정경묘사는 한 술 더 뜬다.

강둑을 따라 무슨나무 숲이 깊은 어둠을 품고 블라블라블라. 학교도 아직 안 들어간 어린 남자아이가, 이걸 참고 듣고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책을 읽다가도 아이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면 계속 읽으라고 눈짓을 한다. 과연 이해할까, 이게 뭘 묘사하는 건지 알고 있는걸까 의심하면서도 느낌으로는 알 거라고 믿으면서 계속해서 읽는다.

 

어젯밤엔 엄마가 지금껏 읽어준 분량과, 남아있는 분량을 눈으로 대강 비교해보더니 엄마, 이거 대출 얼마나 남았어? 물어본다. 글쎄 한 일주일 남았을까? 잘 모르겠는데, 왜, 하니 남아있는 기간 동안 도저히 엄마가 다 읽어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단다. 일단 반납했다 다시 빌려와도 돼, 그랬더니 누가 예약하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는데... 라면서 엄청 심각해 하길래 그럼 사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한 마디에 얼굴이 세상 편해지더니 엄마가 사줄 거지? 란다. 그래 뭐 사주지. 까짓것. 책인데. 그런데 너 재미있어하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오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권당 2~3개씩의 여유분이 서가에 꽂혀 있더라. 의기양양하게 네 권을 다 샀는데 만 몇백원 들었다. 이따 집에 오면, 좋아하겠지.

 

*

 

토끼들의 캐릭터가 분명해서 몇 번 들은 것으로도 어린 아이의 머릿속에 그 모습이 아주 또렷하게 그려지나보다. 아침에 등원할 준비를 하면서 혼자 중얼중얼, 실버는 힘이 세고, 빅윅도 힘 세고 덩치도 커. 파이버는 쬐그맣고 힘이 약해... 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엄마를 본다.

거의 이십 년 전에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었을 때 훗날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을까. 같은 책을 두고 결이 다른 추억을 쌓는 일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눈으로 읽었던 책을 귀로 다시 읽게 되면 어떤 공감각이 펼쳐지는지 알 수 있었을까. 한 번의 경험이 다른 차원으로 반복된다는 건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인 체험이 되더라. 읽어줄 수 있을 때까지, 더 많이 읽어줘야지.

 

또 뱀발.

소리내어 읽어주면 좋은 이유는, 이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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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외국을 오가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타인과의 관계에 고민이 많았다. 누군가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바람이 지나갈 자리' 정도의 거리를 둬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듣자마자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꼬집은 말이라며 무릎을 탁 쳤다. -54쪽

 

나이를 먹으면 인간관계가 쉬워질 줄 알았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나이를 먹을수록 이건 이래야지, 저건 저래야지라는 나름의 기준을 갖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더라. 이건 세상 무너져도 이래야 돼, 그런 사람과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하루의 피로도가 증가하는지... 모두가 겪어본 일 아닐까. 20대때 그런 사람과 잠깐 가까이 지냈던 적이 있다. 뭘 몰라서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줄기차게 전화해서 너 왜 전화 안 해, 우리 친구잖아. 연락도 안 하고 그러면 돼? ... 이걸 사 년을 꼬박 겪다가 아 내가 호구 등신이었구나를 그제서야 깨닫고 욕을 한바가지 얻어먹은 값으로 정리했던 그 옛날의 기억도 더불어 떠오른다.

아쉬울 때만 연락하는 얌체쟁이도 싫지만 허구헌날 전화통 붙잡고 늘어지는 분들도 사양하고 싶어지는 요즈음.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내가 뭘 굳이 이런저런 걸 다 견뎌가며 받아줘야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애들 받아주는 것만도 힘들어 나가떨어지겠는데.

 

뱀발.

이 카테고리를 죽 쓰다보니 이런 방식으로 나라는 사람이 드러나는구나를 깨닫게 된다. 우스운 건 그게 나도 몰랐던 부분이기도 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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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분야에 있어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책의 탁월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반대로 아마추어는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즉시 그 책의 분명한 장점들에 대해서도 아예 장님이 되어버린다.

 

사적 영역에 속하는 감정이란 놈을 판단의 영역에서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지 문득 궁금해지는 1人 여기 추가.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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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저항을 깨고 변화를 유발시키는 것은 즉흥 연극처럼 상당한 에너지 소모가 뒤따르는 일이고, 아이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같지 않다. 때론 교사나 부모 자신이 포기하고 싶을 만큼 깊은 좌절을 맛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그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아이는 틀림없이 변하게 되어 있다. -93~94쪽

 

저 문장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책이 두 권 있다.

 

 

 

 

 

 

 

 

 

<그 아이만의 단 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좋으니 아이를 믿고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아이는 절대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신 선생님의 글이다. 굉장히 감동적이고, 어쩄거나 아이를 키우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어른이라면 꼭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내용이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는 제목만 봤다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정적인 어투로 쓰인지라 절대 안 읽었을 책이지만 이 선생님이 출연하셨던 어떤 팟캐스트에서 발견했던 이 선생님의 진정성이랄까 안타까움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읽게 되었다. 사실 그래서 초등때 공부를 이렇게저렇게 해라, 라는 실천편에 가까운 내용보다는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응원해 준, 선생님의 그 단 한 사람이 본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짧게 쓴 앞부분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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