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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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1989년에 출판된 『Dancing at the Edge of the World: Thoughts of Words, Women, Places』 의 번역본이다. 동시에 국내 나온 작가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앞서 나온 두 권의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2017)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2016)보다 이른 시기에 쓴 글들이 묶여 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 점점 더 과거의 방향으로 출간되고 있는 셈이다.


책에 실린 글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의 것들이다. 이 시기는 『헤인 시리즈』, 『어스시 연대기』로 작가적 명성을 얻은 직후다. 작가의 주요 소설들이 출간된 시점을 훑어보니 이 산문집에 실린 글을 쓴 기간 동안 소설출판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 기간은 작가에게 변화의 시간이었던 듯하다. 초기에 "남성적 글쓰기의 여성 작가"라는 평을 받았던 르 귄의 페미니즘 성향이 이후 강렬해졌다. 책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SF·판타지 작가로 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수록한 글은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단순한 배치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하니 마음 변화의 연대기랄까 윤리와 정치 분위기에 대한 반응의 기록이며, 특정한 문학 개념들의 영향이 변화한 데 대한 기록이자, 생각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 되어 준다.

p.9, 들어가는 말 中


작가의 변화는 책의 형태에도 반영돼 있다. 10년간의 글을 모아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검토하면서 작가는 과거의 글을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과거와 달라진 출간 당시의 생각을 더해 자신의 변화를 독자에게 알렸다. 책에 파란색 작은 글씨로 인쇄된 글을 보면 글쓴이가 스스로에게나 독자에게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 느껴진다.


예전 글을 심하게 수정하는 건 옳지도, 현명하지도 않아 보인다. 마치 예전 글을 없애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거쳐야 했던 길의 증거를 숨기는 것 같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 주고, 그 변화 과정을 남겨 두는 것이…… 그리고 어쩌면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껍질을 열지 않는 조개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더 페미니스트답다.

p.22


작가는 친절하게도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이 지향하는 바를 첫머리에 기호로 알려주고 있다. "원하는 글을 찾고, 원치 않는 글을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작가의 '친절한' 고안물이다. ♀(여성)은 페미니즘 관련, ○(세계)는 사회적 책임 관련, □(책)은 문학과 글쓰기 관련, →(방향)은 여행과 관련된 글이다. "특정 경향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이 피해 가"라고 남긴 표시지만 관심가는 주제에 더 주의를 기울이기 위한 표시가 될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엔 문학, 글쓰기와 관련된 □기호가 유익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대한 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르 귄의 아버지는 인류학자였고 어머니는 작가였다. 어머니 시어도라 크로버는 작가의 꿈을 자녀양육 이후로 미뤘다. 50대에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한 어머니는 어린이 책에서 시작해 전기 소설로 르 귄보다 먼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딸은 어머니의 도전이 늦춰진 것을 아쉬워한다.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성취를 할 수 있었으리라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어머니의 책 『내륙의 고래: 시어도라 크로버의 아메리카 원주민 스토리 다시쓰기』에 붙일 서문 <시어도라>를 쓸 때 딸로서의 르 귄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너무 늦게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후회했음을 안다. 그러나 심하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시어도라는 후회하거나 남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예전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니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나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p.249


작가는 여성이 부담해야하는 이중의 노동에 주목했다. 사회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삶을 놓지 않기 위해 여성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가. 르 귄은 주부-예술가의 고됨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작가들이 쓸 수 있는 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작가는 <여자 어부의 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인 알리시아 오스트리커를 인용한다.


여자 예술가가 어머니가 될 때의 이점은, 그 상황 덕분에 삶과 죽음과 아름다움과 성장과 부패의 원천에 직접적으로, 피할 수 없이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 그 여자 예술가가 어머니의 행위들이 사소하고, 인생의 주된 문제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문학의 위대한 주제들과는 무관하다고 배웠다면 그 배움을 잊어야 한다. 이전의 배움은 여성멸시이고, 사랑과 탄생보다 폭력과 죽음을 더 좋아하는 사고와 감정 체계를 보호하고 영속시키며, 거짓이다.

(…)

출산과 육아가 문학에서 주된 자리를, 성교와 낭만적 사랑이 500년간 차지해 온 것과 비슷한 자리…… 아니면 전쟁이 문학이 시작된 순간부터 차지해 온 것과 비슷한 자리를 점한 문화에서 산다는게 어떤 의미일지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pp.405-406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해야한다는 연설문 <어느 공주 이야기>에는 자신의 경험을 담았다. 쉽게 밝히기 어려운 낙태 과정과 그것이 자신의 일생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1982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결정이다. 이름있는 작가가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일을 공개한다는 건 보통의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르 귄은 소설 집필 외에서 다양한 저작 활동을 했다. 강연을 하고 에세이와 서평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얼마나 많은 책의 서평을 요청받고 또 받아들였는지에 놀랐다"고 밝히고 있다. 유명 작가들에 대한 비평이 흥미로웠다. 『다크 타워』를 출판한 전기 작가 월터 후퍼가 "잘못 생각했"다며 C.S. 루이스에 대해 "혐오가 많았고, (…) 자기 신념에 독선적"이라고 평가했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중 「미지와의 조우」를 본 후에는 "일부러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나 보다고 믿기에는 충분하다"며 "거의 모든 면에서 비합리적"이라고 혹평한다. 조지 루카스의 수많은 팬들을 고려해보면 르 귄의 솔직함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책 제목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캘리포니아 원주민 노랫말이다. 작가 르 귄은 “미래를 만들려면 과거가 있어야만 한다”며 그 세계는 잃어버린 세계일 수도 있고, 그래서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추게 된다고 적었다.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잃어버린 세계”는 무엇일까. 여성이 지워진 세계가 아닐까. 여성의 지워진 존재 끝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추는 춤은 그녀의 책이 계속 나오는 한 계속될 것이다. 솔직하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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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카멜레온을 막아라! 괴짜 박사 프록토르 3
요 네스뵈 지음, 페르 뒤브비그 그림, 장미란 옮김 / 사계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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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카멜레온을 막아라!』는 ‘괴짜박사 프록토르’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 요 네스뵈는 유럽 최고의 범죄 소설 작가 중 한 명이다. ‘괴짜 박사 프록토르’ 시리즈는 요 네스뵈 작가가 딸에게 들려주려고 쓴 어린이 책이다. 어린이 책 그림 작가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페르 뒤브비그가 삽화를 그렸다. 화가 페르 뒤브비그의 그림은 『달 카멜레온을 막아라!』에 등장하는 개성 넘치는 인물들만큼이나 독특하고 색다르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달 카멜레온을 막아라!』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2월의 밤, 눈이 녹아 흘러들어간 하수도 세상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인다.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하수구 물이 꿀렁거리는 소리, 시궁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그리고 몹시 운이 나쁜 사람이라면, 거대한 아나콘다의 입이 수영 튜브만 하게 쩍 벌어지는 소리와 침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그런 다음 귀청이 찢어질 듯 딱! 하고 입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뒤로 불운한 사람 앞에는 완전한 침묵만이 있겠지. 하지만 운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면 이 밤에 다른 소리들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깜짝 놀랄 만한 소리들. 와플 기계가 철컥 닫히고 버터가 지글거리는 소리와 나직하게 두런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다시 와플 기계가 열리는 소리. 잠시 뒤 조용히 우물우물 먹는 소리.

pp.9-10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소리들이 그치고 새로운 날이 밝은 후, 눈 속에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동물의 발자국이 찍혀있고 행진 악대 플래카드의 글자가 바뀌었다 다시 돌아오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리세와 불레는 프록토르 박사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박사는 말을 하려다 딴청을 부린다.


“양말 도둑에 언어 장애라, 그렇다면 혹시 달 카…….”

p.36


리세와 불레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동물들》이라는 책에서 프록토르 박사가 말하려다 만 것이 달 카멜레온이라는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세상에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혹시 운 나쁘게 환한 대낮에 달 카멜레온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엄청나게 끔찍한 일. 정확히 말하면, 어마어마하고 엄청나게 끔찍한 일. 아니 완벽하게 총체적, 절대적으로 초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종말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p.90~91


그 무렵 할바르 테노레센이라는 스웨덴에서 온 노래하는 척추 지압사가 지휘하는 합창단이 노로비전 방송국 합창 대회 결승전에서 우승한다. 할바르 테노레센은 시청자들에게 전화로 투표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할바르 테노레센은 국왕을 유배 보내고 덴마크에 전쟁을 선포한다.

리세와 불레는 프록토르 박사, 로즈마리 스트로베 선생님, 그레고르 갈바니우스 선생님과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다섯 명의 저항 운동가들의 이름은 ‘최후의 승리자들’이다.


“승리자요. 그게 바로 정확한 요점이에요. 우리는 패배할 수도 있어요. 천하무적도 아니고요. 그래도 우린 싸울 거예요. 최후까지. 바로 그래서 우리가 위대한 거죠!”

p.187~188


요 네스뵈 작가의 『달 카멜레온을 막아라!』에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은 천하무적도 아니고 패배할 수도 있지만 최후까지 싸우는 사람이다.


“그것은 단지 몸집이 작거나 맞춤법을 잘 알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몸집이 크거나 맞춤법에 서툴러도 되는 권리를 위해 싸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똑같을 권리도 있고 다를 권리도 있으니까요.”

p.382


저항 운동가들이 싸운 이유는 ‘똑같을 권리와 다를 권리’를 위해서라고 리세와 불레는 말한다. 이것이 요 네스뵈 작가가 『달 카멜레온을 막아라!』를 통해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최후의 승리자들’은 승리한다. ‘최후의 승리자들’이 기발한 방법들로 위기를 헤쳐 나가며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하다보면 388쪽이 금세 넘어간다.


책을 읽다보면 개구리왕자, 신데렐라, 삐삐 롱스타킹의 주근깨와 빨강 머리, 피터팬의 시계를 삼킨 악어 등 여러 동화가 떠오른다. 다른 동화의 패러디를 찾아가며 읽는 재미가 있다. 『달 카멜레온을 막아라!』는 묘사가 풍부하고 아이디어가 기발하며 특히 구성이 탄탄하다. 조금 더러운 캐릭터와 설정을 참아낸다면 괴상한 어른들, 이상한 발명품, 어리석은 장난과 무모한 도전이 가득한 유쾌한 모험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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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시스터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9
김혜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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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와 주나는 자매지만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다르다. 언니 이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평온하고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나 속으로는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성격이다. 키우던 거북이가 죽은 일을 자책하며 불면에 시달린다. 열다섯 살 주나는 하고 싶은 말은 다해야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코앞에 닥쳐야 일을 한다. 주나는 어릴 때 심장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은 안 아프다.

늘 붙어 있고 항상 함께 무언가를 했던 이나와 주나는 작년부터 서로 서먹해져서 사이가 멀어졌다. 이나는 주나를 피하고 주나는 이나의 눈치를 보지만 이유를 묻지 못한다. 이나와 주나가 여름방학을 앞두고 엄마는 치앙마이로 아빠는 베를린으로 한 달 동안 떠나게 된다. 주나가 베를린을 골라서 이나는 엄마와 치앙마이로 간다. 주나는 베를린에 온 지 5일째 되는 날 헤어진 남자친구 이서준과 제일 친한 친구 라임이 사귀는 것을 알게 되고 화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언니 이나에게 메일을 보낸다. 이렇게 시작된 메일로 자매는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두세 줄로 끝나던 메일은 어느새 서로에게 하지 못 했던 긴 이야기가 된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메일 메시지의 분량과 내용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또 그에 따라 자매의 마음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느껴보는 재미가 있다.


“고등학생에게 취미 미술은 사치죠.”

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 학원을 다니지 못해 걱정인데. 취미라니, 욕심이다.

“인생을 항상 절약하며 살 필요는 없잖아요. 아껴서 뭐 하게요.”

(…)

“아끼면 똥 된대요.”

p.51


역사는 이미 지난 과거가 아니라 그 시간들이 현재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생각하니 주나는 뭔가 좀 뭉클했다. 주나의 삶이 좀 특별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주나의 이번 여름방학도 그렇겠지? 한국에 돌아가서 언젠가 주나는 베를린을 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의 경험이 주나의 삶 속에 쌓여 있겠지. 주나는 그 시간 위에서 또 살아갈 거다.

p.157


“이모가 살아 보니까 잘하는 거 없어도 인생 사는 데 아무 문제 없더라. 그런데 좋아하는 게 없다? 그건 진짜 문제야.”

이모는 결국 삶을 지켜 주는 건 좋아하는 무언가라고 했다. 좋아하는 게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살아 낼 수 있다며 말이다. 

p.180


『디어 시스터』에는 이나와 주나가 서로에 대해 알지 못 했던 것을 알아가며 고민과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이 치앙마이와 베를린의 생활담에 녹아있다.


두 도시가 그리워 이 글을 쓰게 되었기에 이번 소설은 인물이나 사건보다 배경이 먼저 시작됐다.

p.72


브란덴부르크 근처에 낮은 비석들이 죽 늘어선 장소가 있었다. 축구장 두 개 크기 공간에 2000개가 넘는 비석이 있는 것을 보고 주나는 적잖이 놀랐다. 도심 한복판에 자기들의 잘못을 알리는 공간을 설치했다니.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것을 말한다.

p.156


주나는 천천히 베를린 장벽을 더 둘러보았다. 언젠가 주나도 한국에서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지금 빈센트는 북한에 가서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지만, 주나는 진짜 평양냉면을 먹지 못한다.

p.157


식민 경험이 없는 태국의 치앙마이와 제국주의 전범국가인 독일의 베를린과 일본의 식민피해와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분단국가가 된 대한민국의 서로 다른 역사가 『디어 시스터』의 특별한 배경이 된다.


2차 세계대전으로 현재 대한민국 전체인구만큼이 사망했고 그 중 민간인 사망이 67%였다는데 독일이 반성하는 것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일까 세계대전으로 민간인이 사망한 것일까 문득 궁금하다. 독일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전범국가로서의 반성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디어 시스터』는 주인공 자매 이나와 두나가 고민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지만 태국의 치앙마이와 독일의 베를린 여행기로 읽어도 흥미롭다. 읽다보니 땡모반과 커리부스트와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진다.


김혜정 작가의 전작 『헌터걸』이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판타지물이었다면 『디어 시스터』는 현실 이야기를 다루는 청소년물이다. 작가는 상상 속 이야기도 현실에 바탕한 이야기도 맛깔스럽게 써낸다. 『헌터걸』에 대한 기대로 손에 든 책이었다. 뜻밖에도 선명한 사실적 스토리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소재의 넓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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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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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힘이 세다. '넷플릭스 방영'이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출판되는 책이 자주 보인다. 출판시장 자체의 힘만으로는 웬만해서 얻을 수 없는 홍보 효과를 '넷플릭스'라는 이름에 기대어 볼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영상물 덕에 절판됐던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반길만 한 일이다. 넬라 라슨의 『패싱』이 그런 경우다.

『패싱』은 2006년 출간 후 절판됐고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면서 출판사를 바꿔 다시 독자를 만나게 됐다. 그것도 무려 두 곳의 출판사에서. 2006년 판 서숙 번역자의 손을 거친 책이 민음사에서 7월에 나오고 이어 8월에는 다른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도 출간됐다. 원작의 의미와 가치도 있지만 이름있는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 재출간의 가장 큰 동력이 되었을 듯 하다.


"개인, 단체나 국가간 따위에서 '열외(列外)' 취급을 당하는 경우를 빗대어 이르는 말"을 뜻하는 '패싱'은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는 단어다.(근래 정치 뉴스에서 많을 들렸었다.) 넬라 라슨의 책에서는 '패싱'은 다른 의미다. '백인 행세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종 분리 정책을 고수하던 시대 미국에서 백인의 외모를 한 흑인 혈통의 사람들이 했던 '짓'을 말한다.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고 나서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노예무역 시기 7세대에 걸친 아프리카 흑인 역사를 다룬 소설 『밤불의 딸들』에 밝은 피부의 흑인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재능 많은 흑인 여성과 결혼하지만 백인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가정을 버린다. 어느 날 길에서 백인 여성과 걷던 그는 흑인 아내와 아들을 마주친다. 그 때 그의 얼굴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어린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감정들이 강렬하게 느껴졌었다. 혈통을 감추고 이뤘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순간의 공포 그리고 그 이면에 서렸을 자신의 본질을 부정해야하는 수치심. '패싱'은 단순히 '행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소설 『패싱』에는 '백인 행세하기' 속에 잠재된 의미들을 드러낸다. '백인의 외모'는 그 시대 흑인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낙인이 될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흰 피부의 흑인 클레어는 자신의 외모를 발판 삼아 상류사회 진입에 성공한다. 그녀는 단지 사람다운 "한 사람으로 살"고자 했다.


동정의 대상도 골칫거리도 아니라, 심지어 불량한 함의 딸도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살려고 말이야. 그리고 난 정말 많은 것들을 욕심냈어. 내 외모가 나쁘지 않고, 충분히 백인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pp.50-51


그러나 클레어의 남편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였고 그와의 생활은 끊임없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클레어의 친구 아이린 역시 백인의 외모를 가졌지만 흑인으로 살기를 선택한다. 아이린은 백인 행세를 하면서도 흑인의 삶을 동경하는 클레어와 거리를 두려하지만 같은 인종으로서의 유대감을 버리지 못한다.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 어째서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까? 왜 거기에 클레어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클레어는 그녀나 그녀가 속한 인종을 배려하지 않는데 말이다. (…) 그녀는 사람들을 인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고, 그녀 자신을 클레어 켄드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p.200


'패싱'에는 다차원의 문제거리다. 흑인 사회에서는 백인의 외모를 가진 이들을 동경하면서도 흑인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피부색을 수단으로 백인 사회에 진출한다는 것은 더 나은 생활, 더 수월한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기의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패싱을 선택한 사람은 흑인 사회와 단절해야하고 자신의 근본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그들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 어느 쪽에서도 정체가 탄로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부가 밝은 흑인들은 때때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남의 눈을 피해 '패싱'을 감행한다. 아이린은 백인 전용 찻집을 이용한다. 혼잡한 거리를 피해 택시를 잡아 탄 아이린에게 기사가 백인 전용 호텔 루프탑을 권하자 그 "호텔이 좋겠어요"라고 자연스럽게 응한다. 그러면서도 "백인 행세" 하는 클레어를 경멸한다. 마치 용인될 수 있는 '백인 행세"의 범위가 있다는 듯이.

아이린은 안정을 추구했다. 자신의 가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녀의 꿈은 클레어의 욕망으로 흔들리는 것처러 보인다. 클레어는 애써 얻은 백인 사회의 자리를 벗어나 흑인들의 세계로 돌아오려 한다.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을 이용해서. 아이린은 자신이 바라는 안정과 그에 따르는 희생에 대해 생각한다.


'안정'은 그저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행복, 사랑, 또는 그녀가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본능적인 기쁨 같은 것들을 희생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변치 않기를 바라고 믿는 것은 다른 기쁨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p.216


소설은 아이린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한다. 그녀는 상황을 판단하고 결심하고 우발적인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사건이 종료됐을 때 비로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아이린의 눈을 통해서 본 일들이 그녀의 판단 그대로였을까. 아이린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봤다고 한다면 그녀의 시각 안에 갇혀서 독자가 간과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닫힌 듯 열려 있는 소설의 결말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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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서평단 모집] 그 여름, 멀고도 가까운 자매의 걸스토크 <디어 시스터>


그 여름, 우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가장 가까이 있었다!

청소년소설 베스트셀러 작가 김혜정 신작
태국과 독일을 잇는 판타스틱 걸스톡크


https://blog.naver.com/jamo97/222473117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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