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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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의 책이다. 올가 토카르축. <태고의 시간들>은 2018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인 모양이다. 폴란드 작가의 책은 생소하기도 하거니와 맨부커 상의 후광을 입고 출간된 분위기가 역력했다. 작년 수상작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출판사가 판단하기에 괜찮은 작품이었으니 90년대에 출판된 이 작품까지 번역되어 나왔으려니 생각했다. 폴란드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그린 그 나라 사람들의 삶과 생각의 모습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으로 책을 손에 들었다.


<태고의 시간들>은 하나의 굵은 줄거리가 끝까지 가는 서술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은 책이다. ‘태고’라는 가상의 마을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존재들을 통과하는 시간을 엮어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저 물건의 이야기가 나오고 다시 이 동물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저 그림이 말하는 식이다. 덕분에 초반 3분의 1정도를 읽을 때까지 사건의 배경과 인물 소개가 지나치게 길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 방식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는 이쯤에서 대체 이야기의 핵심은 언제쯤 나오는 걸까 궁금해지거나 어려운 책이라는 판단 하에 읽기를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매력은 여기서부터다. 작가는 스스로 창조한 마을 ‘태고’의 모든 개별 존재들의 시간을 끌어모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주인공이라 부를 만한 인물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 수호 천사, 성당의 성화, 동네 강아지, 신, 떠돌이 영혼, 달 등의 거의 모든 자연물이 이야기를 보탠다. 심지어 부엌 찬장속 커피 그라인더까지. 폴란드식 마술적 리얼리즘이랄까.


그렇다고 이 작품이 환상문학은 아니다. 찬찬히 읽다 보면 강대국 사이에서 굴곡진 역사를 겪은 폴란드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 1,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통과해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서 독일과 러시아에 유린당하고 사회주의 체제에 짓눌리는 민중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는 유럽 문화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을 신화적 모티브가 가득하다. 데메테르의 모성을 닮은 크워스카, 페르세포네의 운명을 복제한 듯한 루타, 길가메쉬 서사사의 엔키두를 떠올리게 하는 나쁜 인간과 창세기를 닮은 게임 설명서. 신화와 성서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더 재미있는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부분이다.


미하우과 게노베파 일가의 일대기처럼 보이는 <태고의 시간들>은 기실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크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변하는 것이 없는 듯하다. 어제를 지나온 나는 오늘 살고 있으며 내일도 아마 오늘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제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는 다르며 또 내일의 세계는 예측할 수 없다. 같음과 다름, 영원함과 변화의 관계 속에서 세계는 이루어진다. 부모인 미하우와 게노베파의 시간은 자녀 미시아, 이지도르의 시간을 지나 손녀 아델카에게로 흐른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같지만 그 시간을 채워나가는 방법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미하우가 전쟁에 징집되어 먼 동쪽으로 파병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반면 손녀 아델카는 억압적인 아버지를 피해 마을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태고’에 들른 아델카는 아버지 집 부엌에서 커피그라인더를 몰래 가지고 나온다. 미하우가 동부전선에서 들여온 전리품이 아델카의 손에 들려 마을을 떠난 것이다. 커피 그라인더를 손에 넣은 계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미하우가 손잡이를 돌리면서 느낀 ‘안전함, 커피, 집의 향기’는 딸과 손녀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책의 마지막 즈음에 도달하자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제멋대로 섞인 것 같은 <태고의 시간들> 전체가 머리 속에 그려졌다. 있을 법하지 않은 환상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었음에도 특별할 것 없는 어떤 마을에 살다 온 기분이 들었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니 읽으면서 느꼈던 환상성과 다중 화자가 등장하는 서술 방식이 올가 토카르축 작품의 특징이라고 한다. 새롭게 알게 된 작가의 매력을 조금쯤 맛보았으니 기회가 된다면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지금쯤 번역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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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으면 다 언니 - 좋아하는 마음의 힘을 믿는 9명의 이야기 : 황선우 인터뷰집
황선우 지음 / 이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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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책읽아웃>을 듣다가 김하나 저자가 궁금해졌다. 해서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었다. 그러고 나니 당연하게도 책의 공동 저자였던 황선우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김하나 작가와 집을 공유하는 사람이자 패션 잡지의 피쳐 기사를 오랫동안 써온, 필력이 장난아닌 사람으로 추정됐다. 이 사람은 언제 책을 내고 '저자'가 되려나. 기대가 무색치 않게 얼마안가 출간 소식이 들렸다. 알고 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 황선우 저자는 카카오 페이지에 인터뷰 글을 연재하며 차근히 단독 저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패션 잡지사 재직 시절에도 수많은 인터뷰 기사를 썼기 때문인지 황선우 저자의 첫 책도 인터뷰집이다. 사진 작가 정멜멜과 함께 9명의 '언니'들과 대화를 나눴고 사진을 찍었다. 인터뷰이로 선택한 '언니'들의 면면이 다채롭다. 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PD 김유라, 영화 <벌새> 감독 김보라, <월간 이슬아> 작가 이슬아, 21대 국회의원 장혜영, 피아니스트 손열음,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 전주연, 웹소설 <에보니> 작가 자야, 스브스 뉴스 <문명특급> PD 재재, 범죄심리학자 이수정이 그들이다. 인터뷰어 황선우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고유한 성취를 이루어낸 인터뷰이, 나이와 상관없이 리스펙트하고 싶은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특히 "전에 없던 방식으로 자기 길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골라 만났다. 절반정도는 아는 인물이고 절반은 생소한 이름들이다.


인터뷰는 각자 나름의 성취를 이뤄낸 과정과 그 일을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일반적인 성공스토리와 다르게 느껴진 점은 인터뷰이들이 가진 자신의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마음이었다. 김유라 PD는 함께 일하는 파트너인 할머니의 평안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고 이슬아 작가는 부모님을 목표 독자 삼아 글을 쓴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클래식의 대중화 작업을 할 때 자신의 동생들처럼 평범한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고 말한다. 재재 PD는 <문명특급>의 성공에서 동료들의 비중을 여러번 강조했다. 이들은 김보라 감독의 말처럼 "도움을 받거나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둠으로써 자신의 성취가 가능했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혼자라고 느끼지만 자신을 덜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도움을 받거나 같이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서요.

pp.92-93, 김보라


출발 자체가 수익보다 할머니가 좋은 경험을 하고 행복하게 해드리기 위해 시작한 채널이었으니까. 계약 조건도 할머니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깨지 않는 게 우선이었어요.

p.41, 김유라


저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도 제 음악을 편견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딱 제 동생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이 기준인 것 같아요.

p.201, 손열음


제 입장에서도 사실 커피보다 우리 회사를 좋아하다 여기까지 온 거예요. 우리 회사가 커피 회사니까 잘해야 하고, 그래서 커피를 공부하는 거죠. 다른 곳에서 커피를 공부하는 것은 저에게 별로 의미가 없게 느껴져요.

p.282, 전주연


인터뷰이를 꼼꼼하게 연구한 인터뷰어의 노력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화에서 드러났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인터뷰이들의 친근하면서도 솔직한 태도는 인터뷰어의 신뢰감에서 비롯했을 게다.


수많은 질문과 답이 매끄러운 문장으로 화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김하나 저자는 황선우 저자의 집필 과정을 "방망이를 깎기"에 비유했다. 이 책도 역시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고, 끝까지 퇴고를 거듭했음이 분명하다. 여느 책에서 한 개 이상 당연히 보이는오탈자가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인터뷰이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이슬아 작가다.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남달랐다. 이슬아 작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써봐야 한다"며 못하는 과정 또한 공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용기와 패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이슬아 작가의 책들을 찾아 봐야겠다.


저도 못 쓴 글은 공유하기 싫은데, 글은 써야만 늘잖아요. 근데 쓸 때는 마감이 코앞이고.(웃음) 잘 못하는 과정까지 다 마감에 포함되어야 하니까 천천히 성장하는 과정을 마감과 함께 들킨다는 느낌이에요. 지금까지도 그렇게 자라온 거 같고.

p.131, 이슬아


황선우 저자의 인터뷰집은 일하는 방식에 대한 대화다. 인정받는 결과에 대한 상찬이 아닌 결과가 나오기까지 들어간 노력과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9명과 나눈 대화가 그보다 많은 사람들을 들여다 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고 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직업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인지 쉽게 규정되거나 오해받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을 말해주는 건, 무슨 일을 하는가를 드러내는 타이틀 뒤에 그 일을 해내는 방식이다.

p.285


"젊은 여성들에게 소중한 영감과 참조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던 애초의 목표는 초과 달성한 듯 보인다. 젊은 여성의 시기를 한참 지난 나에게까지 책이 도착했으니. 황선우 저자가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에세이가 됐든 또 다른 인터뷰집이 됐든 그녀의 글을 접하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누리는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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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2-3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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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교수의 이름이 많이 들리는 가운데 '타이포그래퍼'라는 다소 낯선 직업을 대중에게 알린 유지원 교수와 공동 작업을 했다 하여 관심이 간 책.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라는 부제도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래픽디자이너가 저자여서 책의 편집도 나름의 독특함이 있다. 예를 들면 인쇄면의 상단 여백을 좁게 두었다던지 두 작가가 번갈쓴 각 장의 폰트를 다르게 썼다거나.


특별한 점을 찾자면 여럿이겠으나 무엇보다 강한 이 책의 소구점은 예술가와 과학자가 함께 썼다는 대목이다. 상이한 분야의 두 전문가가 같은 키워드를 두고 어떤 교집합과 차별점을 보여줄 것인가가 기대됐다. 유지원 교수는 "어느 시대에든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들은 서로 연결되어 왔"다며 "'예술과 과학과의 만남'이니 '융합'이니 하는 구호들이 새삼스럽다"고 썼다. 독자로서 이 책에 대한 나의 기대는 너무 '올드'한 것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과학을 감동적인 예술로 설명하거나 예술을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풀어 서술한 책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독자로서는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라는 부제에 끌릴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글 잘쓴다는 소문을 들은 저자들의 책이라면 더욱더.


경향신문 연재를 모아 낸 책은 각 저자가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로 떠오르는 생각 또는 상념을 풀어냈다. 전문가들의 상념이니 일상을 벗어난 지식들이 점점이 박혀 있어 흐린 반딧불처럼 반짝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평이한 서술들이었다. 애초에 "하나의 주제에 대해 과학자는 예술적으로, 예술가는 과학자적으로 써보자"는 의도는 과학자가 예술을 소재로 물리를 설명하고 예술가는 키워드와 관련된 과학 지식을 (약간) 활용하는 정도로 표현됐다.


예술에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도 있지만, 순수형식주의적이고 작가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다. 세상을 보는 확장적인 방식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생생하게 체함하게 해 준다. 인식의 구속과 오류로부터 자유를 탐색하고, 왜곡되었을지 모를 구태의연한 시선에 대해 보다 나은 방식을 제안하려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들은 개인의 자립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결국 공공체를 각성하게 하며 치유하는 사회적인 효과를 가진다. 인간이 세상과 더 잘 지내고자 하는 도정인 것이다.

pp.182-183, '가치'를 키워드로 한 유지원의 글


키워드 또한 특정한 맥락없이 파편적이다. 목차는 키워드를 몇 개씩 묶어 "관계맺고 연결된다는 것", 현상을 관찰하고 사색하는 마음", "인간과 공동체의 탐색"으로 분류했놓았다. 그러나 각 분류에 들어가는 키워드들이 모여 상위 제목에 걸맞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부 키워드와 소제목의 연결성이 부족하다.


두 저자가 책 한 권 내내 각자의 생각을 펼쳤다면 책 말미쯤 한 번쯤은 대담이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장애'라는 하나의 주제를 다뤘다는 면에서 유사한 예로 보기 어려울 수 있지만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변호사의 공동 저서 『사이보그가 되다』의 경우를 참고할 만하다. 김초엽, 김원영의 경우에도 연재한 글을 모아 책을 냈다. 두 저자가 번갈아가며 한 장 안에 서너 개의 꼭지를 담았다. 어떻게 보면 '장애'라는 주제에 대해 서로의 경험과 지식이 나열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마지막에 두 저자가 만나 책 전반을 정리하는 대담을 싣고 있다. 공동 집필하며 아쉬웠던 점, 더 다뤄야할 부분 그럼에도 이 작업이 의미있는 이유 등을 읽고 나니 각 저자가 앞에서 따로따로 했던 서술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뉴턴의 아틀리에』를 마무리하는 저자 당 7줄의 에필로그로 400여쪽을 갈무리하기엔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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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 외 7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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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해서 읽은 듯 착각하게 되는 책 중 하나가 지킬 앤 하이드다. 뮤지컬로 자주 공연되어 이미지에도 익숙하고 어린이용 책으로 종종 접하다보니 원작이 따로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사정으로 이제야 이 책의 원제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이고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단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소설은 변호사 어터슨를 묘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먼 친척 리처드 앤필드와 산책을 하던 중 어떤 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다. 앤필드는 어느 날 밤 인근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그 때 만났던 흉측한 사람에 대해 말한다. 보는 사람이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추악한 몰골의 범인은 이유없는 폭력을 휘둘러 놓고도 태연자약했다. 그가 두 사람 앞의 문 안에 살고 있다는 거였다. 하이드의 등장이다. 


미스터리 분위기를 풍기는 도입부가 흥미롭다. 소설은 내내 누군가 저지른 범죄를 추척하는 형식을 취한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든지 인간 보편의 추악함을 묘사한 서술이 대부분이리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알고 있는 서사라도 플롯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술은 3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두 장에서 서간체 형식을 띤다. 지킬 박사의 친구가 남긴 편지 '래니언 박사의 이야기'와 지킬 본인이 사건의 모든 전후를 설명하는 '헨리 지킬의 진상 고백서'가 그것이다. 래니언의 편지에서 지킬과 하이드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마지막 지킬 박사의 편지에서 모든 진상이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순서대로 설명된다. 앞쪽에서 파편적으로 보였던 단서들이 한 줄로 꿰어진다. 내용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상당히 흥미진진한 읽기가 될 만한 대목이다. 


지킬은 내면의 선과 악의 공존을 모색하지 못한 채 둘을 분리해서 서로에게 책임이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지킬의 이성은 자신 내부에서 들끓어대는 반사회적 욕망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처럼 사회적 지위가 번듯한 사람에게 그런 추악한 내면이 존재한다는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악을 풀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선을 잠재운 악을 말이다. 세상에 눈 뜬 악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약물의 도움 없이도 지킬을 제압할 지경에 이른다. 처음 지킬에게서 분리됐던 악은 왜소하고 작은 모습이었다. 악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강해졌고 하이드의 몸집도 불어났다. 악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빨리 자라고 합리적 이성은 그에 비례해 쪼그라든다. 선의 억제가 따르지 않는 악은 파멸로 귀결된다.


고뇌하는 선에 대한 묘사보다 변화한 하이드에 대한 묘사가 화려하다. 악의 상태에서 영혼은 자유를 느끼고 "와인처럼 기운"이 넘친다. 악의 유혹은 이처럼 강렬하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느낌이었는데, 그 새로운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기분을 맛보았다. 몸이 좀 더 젊어지고, 가벼워지고, 만족스러워졌다. 내면에서는 무모함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고, 환상 속에서는 감각적 심상이 물방아의 물줄기처럼 무질서하게 흘러가고 의무의 속박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순수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가 찾아왔다. 이런 새로운 삶을 얻고 처음으로 숨을 쉴 때부터 나는 이 삶이 예전의 내 모습보다 열 배는 더 사악한, 근원적인 악에 노예로 팔려 버린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 생각은 나를 와인처럼 기운 나게 하고 기쁘게 했다.

p.92


원작 읽기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시기가 이르면 이를 수록 좋겠다. 많은 정보에 노출되지 않은 채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아슬아슬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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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구하라! 괴짜 박사 프록토르 5
요 네스뵈 지음, 페르 뒤브비그 그림, 장미란 옮김 / 사계절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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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구하라!』를 쓴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그는는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이자 유럽 최고의 범죄 소설 작가 중 한 명이다. ‘괴짜 박사 프록토르’ 시리즈는 작가가 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딸은 아빠에게 ‘이야기 속에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나와야 하고, 남자아이는 여자이이보다 키와 몸이 작아야 한다’고 했다.


『크리스마스를 구하라!』의 그림은 어린이 책 그림 작가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페르 뒤브비그가 그렸다.


크리스마스이브 5일 전, 노르웨이 오슬로 카논 거리에 눈이 수북이 내리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 있는 저녁, 국왕이 크리스마스를 트라네 씨에게 팔았다는 긴급 뉴스가 발표된다. 트라네 씨는 지금 이 순간부터 트라네 백화점에서 만 크로네(약 130만원) 어치의 선물을 구입한 사람들만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캐럴, 그리스마스 쿠키, 호랑가시나무 가지,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 크리스마스 예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 등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것은 전부 금지된다. 이를 어기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것이라 한다.


“크리스마스는 최고의 휴일이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p.37)


크리스마스를 구하기 위해 리세와 불레는 프록토르 박사와 함께 국왕을 찾아가 트라네 씨가 국왕을 속인 것을 밝히지만 국왕은 이들을 쫓아낸다.


“산타라는 직업의 가장 나쁜 점이 뭔지 아니?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물론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들, 내가 전해 준 작은 선물들을 간직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암울해졌지.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선물을 주고받기 시작했지. 내가 가져다주던 선물보다 더 크고 비싼 것으로.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란 존재의 유효 기간은 끝났구나. 이젠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p.112)


리세와 불레와 프록토르 박사는 25년 전 산타클로스를 그만두고 ‘외로운 묘비 술집’에서 죽치고 있는 스타니슬라프에게 크리스마스를 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우리가 가엾은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면 어떨까요? 그날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만한 걸로요.” (p.59)


리세는 불레와 프록토르 박사에게 산타클로스가 되어 만 크로네 어치 물건을 살 수 없는 사람들 모두에게 선물을 주자고 한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일. 리세와 불레와 프록토르 박사는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선물을 배달할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 휴일은 어떻게 될까?


작가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촘촘히 엮어 『크리스마스를 구하라!』를 구성이 탄탄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범죄 소설 작가답게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크리스마스를 구하는 중요한 단서로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다만, 어린이들이 재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가득한데도 『크리스마스를 구하라!』는 많은 설정들이 진부하다. 그래서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과 발명품들이 요란하게 느껴지고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문뜩문뜩 지루하다. 이를테면 연인인 프록토르 박사가 유레카를 외칠만한 발명을 하는 사이 프랑스에서 온 멋쟁이 줄리엣은 등장하는 내내 부엌에서 쌀죽을 끓이며 가사노동을 한다. 여자아이 리세는 카논거리에서 가장 착하고 똑똑하며 사령관 같이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설거지를 돕고 곤경에 빠진 친구를 돕는 조력자 역할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왜 리세에게는 산타 설매를 운전하여 하늘을 날아오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불레가 ‘시간 여행으로 1922년 파리의 물랭루주로 돌아가 캉캉 무용수들의 공연을 보는’ 것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할 때, 왜 리세는 자신을 위한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원하는 대신 가엾은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지내기를 소망할까? 여자아이도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선물을 원할 수 있고, 개인적인 소원을 가진다고 해서 착한 아이가 아닌 것도 아닌데. 세계 평화나 봉사나 타인의 행복 같은 남자아이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거들떠보지도 않을 공동체를 위한 소원 말고 말이다.


리세가 『크리스마스를 구하라!』에 가득 펼쳐지는 신나고 재미있는 모험을 누리지 못하고 착한 아이 역할만 해야 하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안타깝다. 아무튼 2021년 12월 25일이 평일이 아니고 토요일인 것은 아쉽다. 최고의 휴일이 아니더라도 공휴일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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