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 줄 알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구!"

  자신의 추종자와 함께 총을 들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늙은 남자는 그렇게 소리친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 리스(Leith), 이곳에서는 소 방목업과 농장을 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2013년, 겨우 24명의 주민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 어느 날 흰머리에 긴 수염의 남자가 들어온다. 혼자 조용히 사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은 뜻밖의 사실과 마주한다. 남자의 이름은 크레이그 콥(Craig Cobb). 미국에서 잘 알려진 네오나치 운동의 열렬한 신봉자인 콥에게는 자신만의 꿈이 있다. 작은 마을 리스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동체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는 마을의 땅을 계속 사들이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그곳에 불러모은다. 네오나치 주의자들에게 리스는 성지가 되어가지만, 그것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마이클 니콜스와 크리스토퍼 워커의 2015년작 다큐 'Welcome to Leith'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리스 주민들의 고군분투를 그려낸다.

  마을 초입에 '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소박한 나무 간판이 있는 마을, 그곳에 콥은 폭풍을 몰고 온다. 콥의 집 마당에는 마을 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Village of the damned(저주받은 마을)'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그의 집 앞에는 온갖 종류의 나치 문양과 백인 우월 단체의 깃발이 내걸리고, 미국의 스킨 헤드족들이 리스에 집결한다. 콥은 마을 주민 회의를 장악하고 그곳의 주인이 되어 자신이 지배하는 리스를 만들려고 한다.


  네오나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 사람들은 침입자들의 정착을 막고자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리스 주민들은 콥과 그 추종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극대화하며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콥의 패거리들이 저지르는 패악을 견디다 못한 일부 주민들은 이사를 간다. 고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웃 주민들은 투쟁을 선택한다.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총기로 무장한다. 그리고 주민들은 변호사와 함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제작자 마이클 니콜스와 크리스토퍼 워커는 'Welcome to Leith'를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만들지 않았다. 다큐는 콥의 입장도 나름 공평하게 담는다. 관객들은 히틀러를 흠모하는 백발의 늙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나름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음을 본다. 유색인종과 유대인 인권 단체가 있는 것처럼 자신들은 '백인 시민 단체'이며, '백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한다. 콥과 추종자들에게 그것은 '정상적인 질서'로의 회복인 셈이다. 이 네오나치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다. 콥은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는 법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핍박받는 희생자로 부각시킨다.

  "나는 리스 마을 사람들이 개방적이지 못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를 내쫓지 못해 안달하고 있어요."

  결국 총기를 들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던 콥과 추종자는 체포된다. 지리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마을은 평화를 되찾는다. 주민들은 콥과 추종자들의 근거지를 부수고 불태우며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만, 나중에 콥의 석방 소식을 듣는다. 과연 리스 마을 사람들은 네오 나치주의자들로부터 마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큐는 콥과 마을 사람들의 대결을 서부 영화처럼 묘사한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리스 마을의 풍광, 그곳에 모여든 네오나치 주의자들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음울한 음악까지 더해진다. 그러나 'Welcome to Leith'가 보여주는 극적인 긴장감은 재판이 끝나면서 동력을 잃는다. 무엇보다 이 다큐는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한 탐구나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 미국의 수정 헌법 1조는 네오나치와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방패막이가 되어왔다. 1977년, 이른바 스코키 판례(National Socialist Party of America v. Village of Skokie)로 불리는 미국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다. 스와스티카(swastica, 卐)를 내건 시위를 허용하는 것을 두고 일어난 법적 다툼은 결국 네오나치 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Welcome to Leith'는 혐오 단체의 활동 근거가 되는 수정 헌법 1조의 문제점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으며, 공정성이라는 미명하에 콥의 이야기도 열심히 주워담는다.

  콥의 석방 소식을 들은 이웃 주민은 아내에게 사격 연습을 시킨다. 평범한 가정 주부는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쥔다. 그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관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의 자유가 총기 문제를 격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차별과 혐오의 발언,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의 대결 국면에서 총기는 효과적인 자기 방어 수단이 된다. 'Welcome to Leith'는 다인종 국가로 오늘날 미국이 안고 있는 근원적 고민을 드러낸다. 그것을 해결하는 일은 단순히 법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종적 다양성을 분열이 아닌 성장의 동력으로 만드는 일은 어떤 면에서 미국의 미래와도 이어져 있다.


*사진 출처: v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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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통금(After the Curfew, 1954)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내가 외국인처럼 느껴져."

  영화의 첫 장면, 어두운 밤길을 걷는 한 남자의 시선이 벽보에 멈춘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의 통금을 알리는 글이다. 4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이 끝났다. 조국은 원하는 독립을 쟁취했고, 그는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운 전사였다. 이제는 군인이 아니라 일반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스칸다르는 딱히 머물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약혼녀 노르마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하지만 그 집의 모든 것이 그에겐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부유한 노르마의 집에서 이스칸다르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노르마가 이스칸다르의 귀환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돌아온 혁명 전사는 너무나도 달라진 현실과 마주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자신의 재단(The Film Foundation)을 통해 세계 영화사에서 보존될 가치가 있는 영화들의 복원 작업을 후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영화로 그 프로젝트의 선정작이 된 영화 '통금(Lewat Djam Malam, After the Curfew, 1954)'은 2012년에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자국의 엄혹한 독재 시절을 지나며 무려 50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초창기 인도네시아 영화사의 중심 인물인 우스마르 이스마일(Usmar Ismail) 감독은 1949년 독립 직후 조국의 혼란한 상황을 영화로 기록했다. '통금'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혁명의 좌절된 이상을 제대 군인의 시각을 통해 보여준다.

  노르마의 아버지는 사윗감이 영 마뜩잖지만 딸을 생각해서 친구인 주지사의 사무실에 취직시킨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루 만에 해고당한 그는 부대원이었던 가파르를 만나러 간다. 이스칸다르는 전쟁 때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의 비명이 아직도 들린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성공한 건축업자가 된 가파르는 그저 과거를 잊고 새출발을 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전직 혁명 전사의 머릿속 세계는 아직도 전쟁터에 머물러 있다. 그는 군대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부대장이었던 구나완은 큰 회사를 차려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구나완은 이스칸다르를 경쟁자인 외국 회사 경영자를 협박하는 일에 써먹으려 한다. 실망한 그는 부대원 푸자를 만나 본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푸자는 포주가 되어 도박이나 하며 살아가고 있다.

  혁명은 끝났다(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 전쟁을 '국민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혁명의 과실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건축업자로 성공한 가파르, 사업가가 된 구나완은 지배 계층에 안착했다. 이전 시대부터 부르주아였던 노르마의 집안처럼 상류층의 삶은 혁명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노르마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모인 이들은 마치 딴세상 사람처럼 보인다. 멋진 파티복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한 여성들, 새로 산 자동차를 자랑하는 남자들, 그들은 춤과 노래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들을 보며 이스칸다르가 '외국인'처럼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단지 계층적인 위화감 때문만은 아니다. 동료들로부터 용감한 군인으로 여겨졌던 이스칸다르는 살상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전쟁은 그에게 깊은 내면의 상처를 남겼다. 가파르가 들려준 과거의 진실은 이스칸다르를 뒤흔든다. 부대장 구나완이 무고한 이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단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빼돌려 축재했다는 것이다. 이스칸다르는 자신이 했던 혁명의 행위가 실상은 구나완이 저지른 범죄의 일부분이었음을 깨닫는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으로 뭉쳤던 이들이 모두 순수하지는 않았다. 그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혁명을 이용한 저열한 이들도 있었다. 이것은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거친 우리의 역사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성공적으로 혁명 후의 세상에 적응한 가파르와 구나완, 매춘업자로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푸자, 이스칸다르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길을 잃었다. 약혼녀 노르마에게 이스칸다르는 혁명의 이상을 완수한 전사이지만, 그 전사의 내면은 죽은 자들의 비명과 죄책감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 분노와 고통으로 비틀거리며 이스칸다르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다. 과거를 잊어야 한다고 말한 가파르의 충고를 무시하고, 혁명 전사는 과거의 기억 속에 자신을 매몰시킨다. 구나완을 죽인 그는 통금 시간대에 거리를 헤매다 총에 맞는다. 이스칸다르의 시간은 그렇게 혁명의 끝에서 멈추었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구나완은 전쟁에서의 살상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명령을 수행한 이스칸다르에게 피의 책임을 돌린다. 조국의 독립과 혁명의 완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전사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과 일그러진 현실 사이에서 소멸을 택한다. 우스마르 이스마일 감독이 그려낸 이스칸다르의 초상은 혁명이 끝난 후 마주하게 되는 뼈아픈 진실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누군가는 죽음으로 댓가를 치루었고, 누군가는 그 죽음으로 승승장구하며, 누군가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간다. 영화 '통금'은 '혁명'이라는 이상 뒤에 가려진 폭력과 광기, 어리석음과 탐욕에 대해 깊이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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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Liquid Sky(1982)'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뉴욕의 신데렐라에 관한 영화죠."

  영화 'Liquid Sky(1982)'의 촬영 감독 Yuri Neyman은 그렇게 대답했다(출처: modernmythology.net과의 인터뷰). 마약과 섹스,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외계인, 클럽의 네온 조명과 패션 모델, UFO와 과학자... 그 모든 요소를 다 섞어 넣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희한한 1980년대의 cult movie가 현대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면 그 대답이 얼마나 간명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소련 출신으로 1976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슬라바 추커만(Slava Tsukerman) 감독은 1982년에 자신의 아내와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5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1700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냈다. 2021년의 관객의 눈으로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영화, 대체 'Liquid Sky'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뉴욕 뒷골목의 어느 클럽을 비춰주며 시작한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특이하고 중독성 있는 신디사이저 음향이 흐르는 가운데, 클럽의 사람들은 한창 춤에 빠져있다. 패션 모델로 마약 중독자이며 양성애자인 마가렛은 동성연인 에이드리언과 같이 살고 있다. 에이드리언은 클럽에서 음악 공연을 하기도 하지만, 본업은 마약상이다. 마가렛과 비슷한 외모의 지미(마가렛을 연기한 Anne Carlisle이 1인 2역을 한다)는 경쟁 관계에 있는 남자 모델이다. 지미는 마가렛을 괴롭히며 모욕감을 준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클럽 건물의 상공에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나타난다. 이 비행체는 외계에서 온 것으로 마가렛의 집 옥상에 자리잡는다. 한편, 독일에서 이 UFO를 추적하러 뉴욕으로 날아온 과학자 요한이 있다. 그는 우연히 만난 지미의 엄마 실비아의 집에 자리잡고 UFO와 마가렛의 동향을 관찰한다. 괴비행체가 마가렛의 근처에 자리잡고 나서 마가렛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일은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쯤 지나야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Liquid Sky'는 편집이 무척 특이하다. 일반적인 헐리우드의 영화 문법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영화를 촬영한 소련 출신의 Yuri Neyman이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라고 불리는 러시아 몽타주 기법을 쓴 데에서 기인한다. 이 기법은 별개의 의미를 가진 쇼트를 연속적으로 이어붙여서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킨다. 영화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로 이어 붙인다. 예를 들면 마가렛과 지미의 대화 장면에 마약 중독자 폴과 그 아내의 이야기가 바로 이어진다. 이런 개연성 없는 생뚱맞은 편집에 대해 Neyman은 사건의 동시성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언급했다. 

  그런 편집과 더불어 외계인의 시점(외계인은 사물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한다)에서 보여지는 특수 효과 장면, 등장 인물들의 펑크 의상과 분장, 영화 전편을 흐르는 신디사이저 음악(주요 테마는 감독이 작곡가에게 직접 제시했다)은 관객의 눈과 귀를 단단히 붙잡는다. 마치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영화는 계속 출렁거린다. 주인공 마가렛은 신데렐라가 계모와 두 의붓자매에게 온갖 구박을 받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학대와 모욕, 심지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까지 당하는 마가렛. 그런데 기이하게도 마가렛과 관계한 이들은 모두 죽는다. 마가렛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혼령이 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외계 생명체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마약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외계인은 뉴욕에서 더 효과적인 에너지원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한다. 성에너지를 탈취당한 이들은 모두 죽지만, 불감증이었던 마가렛은 살아남는다.

  이 괴상망측한 독립 SF영화는 1970년대에 활성화된 미국의 심야 영화관(주로 컬트 공포 영화를 상영)에 내걸리면서 꽤 짭짤한 흥행 수익을 냈다. 어떤 면에서 'Liquid Sky'는 그러한 'Midnight Movie'의 끝물을 화려하게 장식한 영화였다. 1982년에 만들어졌으나 영화는 그 시대를 한참이나 앞질러간 유행 감각을 보여준다. 특히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등장 인물들은 이 영화가 지닌 비주류적 감성을 드러낸다. 물론 마약과 외설스런 장면에 거부감을 지닌 관객들에게는 시간의 힘도 그것을 누그러뜨리기는 어렵다. 영화의 제목 'Liquid Sky'는 헤로인을 칭하는 비속어이다. 슬라바 추커만 감독은 이민자로 자신이 관찰하고 탐구한 뉴욕의 하위 문화를 극한의 방식으로 영화에 재현한다.

  이제, 영화의 촬영 감독 Neyman의 설명이 조금은 와닿을지 모른다. 'Liquid Sky'는 1980년대 뉴욕 클럽의 펑크 신데렐라 마가렛이 호박마차(UFO)를 타고 왕자님(외계 생명체)과 함께 떠나는 이야기이다. 제작비의 압박 때문에 호박마차로 쓰인 UFO는 크게 만들 수가 없었다. 큰 접시 크기의 비행체를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관객의 영화적 상상력은 언제나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이 '선 넘은' 신데렐라 스토리는 거칠고 소란스러우며, 뒤틀리고 특이한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에서 수수께끼로 사람들을 낚길 기다리던 스핑크스처럼 'Liquid Sky'는 오늘도 자신의 관객을 기다리는 중이다. 



*사진 출처: newtimesslo.com  영화 속 지미와 마가렛을 연기한 Anne Carlis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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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The Sleeping City(1950)'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The Sleeping City'는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주연 배우인 리처드 콘테가 영화 속 사건과 실제 뉴욕시의 벨뷰 병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 영화가 배경이 된 뉴욕시와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의 평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시장의 입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뉴욕 벨뷰 병원의 인턴이 의문의 총격을 당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사 당국은 병원 내부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형사 프레드(리처드 콘테 분)를 의사로 잠입시킨다. 그는 주변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해 나간다. 프레드는 곧 매력적인 간호사 앤, 사교적인 엘리베이터 기사 팝과 친해진다. 그러던 중에 같은 방을 쓰는 동료 의사의 자살 사건이 일어난다. 동시에 프레드에게도 어둠의 손길이 다가온다. 팝에게 진 도박빚 때문에 한두 번 써주기 시작한 마약 처방전은 계속 늘어난다.

  조지 셔먼 감독의 'The Sleeping City'는 명백히 줄스 다신 감독의 'The Naked City(1948)'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두 영화 모두 Universal Pictures에서 제작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다루고 있으며, 대도시의 풍경 속에 '밤'이 아닌 '대낮'에 범인과의 추격전이 이루어진다. 일종의 도시 탐구 필름 느와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벨뷰 병원의 내부 모습을 포함해 1950년대 뉴욕의 풍광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멋진 외관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의 양상은 은밀하고 복잡하다. 영화 속 '의사'는 직업적 스트레스 때문에 도박과 우울증, 약물 중독에 취약한 상황 속에 놓여있다. 오늘날에도 의사들의 약물 중독은 민감한 문제로 다루어지는데, 1950년대의 상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영화의 내용이 '사실 무근'임을 알리는 도입부 내레이션은 외부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것이다.

  주인공 프레드는 기숙사 룸메이트 스티브가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또한 가난한 간호사 여자 친구 캐시가 있다. 스티브의 자살은 캐시에게 큰 충격이 되는데, 캐시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잘 모른다. 이 가련하고 순수한 간호사 아가씨는 추악한 범죄의 연결 고리에서 동떨어진 희생자로 묘사된다. 이와는 달리 프레드와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며 애인처럼 가까워진 앤은 전형적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모습을 보여준다. 앤은 영화 초반부 총을 맞고 사망한 인턴을 비롯해 스티브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암시된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앤은 새로운 먹잇감이 될 프레드에게도 접근한다. 프레드는 앤이 도박 자금을 의사들에게 빌려준 댓가로 마약을 얻어내는 팝과 공모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앤의 돈에 대한 갈망은 자신이 유혹한 남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물론 앤에게도 사정은 있다. 이혼녀로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 앤에게 돈은 목숨과도 같다. 그렇게 일그러진 모정은 범죄에 스며든다.

  앤과 함께 의사들의 약점을 이용해 마약 유통 범죄에 끌어들이는 엘리베이터 기사 팝은 늙고 추악한 얼굴의 악인을 보여준다. 그가 영화의 마지막에 프레드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장소는 병원의 거대한 지하실이다. 크고 구불구불한 파이프들이 뱀처럼 끝없이 이어진 공간 속에서 형사와 범죄자는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최신식 병원의 지하 공간은 마치 욕망의 하수구처럼 묘사된다. 'The Naked City'의 살인범이 백주의 도시의 다리 맨 꼭대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처럼, 팝은 병원 옥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곳에서 보이는 한낮의 도시 풍경은 정물화처럼 평온하게 흐르고 있다.

  이 영화는 필름 느와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병원'이라는 의외의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범죄 사건을 담았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조지 셔먼 감독은 프레드가 병원에 부임해서 의사들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련의 과정을 짜임새 있게 제시한다. 수술방에 들어간 프레드는 학술회의 참가자처럼 동료 의사의 수술 장면을 참관한다. 의사들이 무리지어 내려가는 수직의 계단을 부감 쇼트로 찍은 장면은 '병원'과 그곳에서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권위를 그 자체로 드러낸다. 영화는 병원이라는 공간 속에 내재된 구조적인 문제들이 인간적인 결함과 결합했을 때, 어떻게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건조하게 묘사한다.

  'The Sleeping City'가 보여주는 병원은 결코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 아니며, 환자들의 고통이 깔리는 배경 뒤에 돈에 대한 집착과 뒤틀린 욕망, 그로 인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이 감춰진 장소이다. 영화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프레드가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가운데, 거대한 성처럼 서있는 병원을 비춰주며 끝난다. 그 성채의 위엄을 손상시킨 범죄자는 제거되었다. 빠지고 부서진 부품을 교체하듯 새로운 사람들이 그곳의 일원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도시 속 인간의 삶을 탐구한 작은 보석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pinter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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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기차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학생 이와가키와 그의 친구 마키타의 삼촌은 고향 와카마츠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와가키는 2년 만에 고향 친구들과 재회한다. 친구들은 각자의 삶을 버겁게 살아내고 있다. 여관집 아들로 가업을 잇고 있는 미네무라, 어머니의 술집 일을 도우며 바텐더로 일하는 마키타, 목공예 장인인 아버지에게 일을 배우는 마스기, 몰락한 무사 집안의 자손으로 노조일에 앞장서는 테시로기, 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이와가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곧 이 친구들의 우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1959년작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은 와카마츠 현의 시골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젊은 세대의 불안한 초상을 그려낸다.

  이와가키를 집안이 운영하는 여관에 머물게 한 미네무라는 친구들의 술자리에 게이샤들을 불러 환대한다. 게이샤 미도리는 비감한 백호(白虎)춤을 선보인다. 영화 속에서 이 '백호'의 노래와 이야기는 주요한 테마가 된다. 1868년, 존황양이파와 막부파의 결전이 아이즈 번에서도 일어났다(아이즈 전쟁, 会津戦争). 막부파의 호위 부대였던 아이즈 번의 무사들(白虎隊, White Tiger Unit)은 처절하게 싸웠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끝까지 저항한 19명의 청년 사무라이들은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무사도를 보여준 이들의 이야기는 '신선조(新選組)'와 함께 일본 대중 문화에서 자주 다루는 이야기로 자리매김한다. 미도리가 추는 백호춤을 보며 청년들은 좋았던 과거와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함께 떠올린다.

  '봄날이여 안녕'에는 전후 청년 세대가 당면한 현실적 갈등이 드러나 있다. 백호춤과 노래는 전통적 가치와 과거의 향수를 상징한다. 영화 속 다섯 명의 친구들은 '우정'이라는 가치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각자가 처한 현실은 그 우정이란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며 영속되기 어려운 것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대학생 이와가키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지만, 실상 그는 사기꾼이 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정을 이용하기까지 한다. 가장 가까운 친구 마스기에게는 훔친 카메라를 전당포에 대신 맡겨달라고 하고, 미네무라에게도 학비에 쓴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마키타는 마음에 둔 요코를 두고 친구 테시로기와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테시로기는 몰락한 무사 가문의 자손으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 부잣집 딸 요코와의 혼담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순수한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전후 세대의 물질적 욕망을 자신의 영화들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바람 앞의 등불(風前の灯, 1957)'과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이 그런 작품이다. 역시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처한 경제적인 어려움들이 드러난다. 사기꾼이 된 이와가키는 말할 것이 없고, 가난한 테시로기는 노조 운동의 대의명분에 투신하고 있지만 결혼을 가문의 위신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술집 여주인의 사생아 아들 마키타, 여관집 아들 미네무라는 계층적으로는 주류에 진입할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 이들 보다 더 안좋은 처지에 있는 이는 마스기이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마스기는 부친의 칠기 공예일을 잇고 있다. 값싼 중국산 목기가 수입될 것이라는 소식은 마스기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그려낸 전후의 풍경은 어둡고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폐병을 앓는 마키타의 삼촌은 게이샤 미도리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그는 하루종일 누워만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새출발을 꿈꾸며 연인들은 다시 만난다. 한밤중, 백호대 비석이 있는 산 중턱에서 남자는 백호춤을 추는 연인을 위해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할복으로 죽음을 택했던 백호대 사무라이들의 비극적 최후와 겹쳐진다. 마키타는 삼촌과 미도리의 동반자살 소식을 듣는다.

  "인생에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은 없어. 우정 보다 생존이 중요한 거야."

  테시로기의 신고로 이와가키는 체포되고, 친구들은 이를 두고 말다툼을 벌인다. 그들의 변질되고 조각난 우정은 회복될 수 있을까?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그 청년들에게 쉽사리 장밋빛 미래를 선물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마스기는 이와가키가 선물해준 붉은 목도리를 내팽개친다. 미네무라는 그것을 주워서 건네지만 목도리는 다시 한 번 땅바닥에 버려진다. 그래도 그 목도리는 결국 친구의 손에 들려있다. 버려지지 않은 목도리는 롱쇼트 속에서 붉은 점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결코 버릴 수 없는 희망의 한 조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후 청년 세대의 불안을 그려낸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봄날이여 안녕'이 인상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영화의 초반부, 마스기는 이와가키가 왔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여관에 달려 온다. 온천탕에 벗은 채로 있는 이와가키를 마스기는 열렬하게 끌어안는다. 그 장면은 남자들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치고는 뭔가 생경한 느낌을 준다. 학창 시절, 몸이 불편한 마스기를 괴롭히는 아이들과 이와가키는 많이 싸웠다. 둘 사이는 친구 이상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이와가키가 마스기에게 건넨 붉은 목도리가 마치 연정의 징표처럼 보일 정도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동성애자였다. 영화 속 두 친구가 보여주는 관계 묘사를 두고 일본의 평론가들은 감독의 '영화적 커밍아웃(coming out)'으로 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퀴어 영화의 범주에 두기 보다는,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내면적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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