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의 영화들: Home(2008), Sister(2012) 2부



2. 휴양지 뒷편의 숨겨진 삶, Sister(2012)

  영화는 시작부터 30분 동안 어린 시몽의 스키장 절도 행각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Pickpocket(1959)'에서 능수능란한 소매치기 기술이 이어지는 쇼트들처럼 시몽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비행(非行) 공연을 펼친다. 물 만난 고기처럼 스키장을 유유히 누비며 값비싼 스키 장비를 비롯해 휴가객들의 옷과 소지품, 싸온 음식까지 훔치는 이 아이는 고작 열두 살이다. 스키장 아래에 자리한 마을 아파트에서 누나 루이즈와 살고 있는 아이는 훔친 물건을 처분한 돈으로 누나를 '부양'한다.

  자신의 첫 장편 영화 'Home(2008)'에 출연했던 아역 배우 케이시 모테트 클라인의 재능에 주목한 우르술라 마이어는 영화 'Sister'를 구상한다. 마이어는 스위스의 스키장 근처에서 방을 얻어 잠시 지냈던 시절의 일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멋진 휴양지의 외관 뒷편에는 그곳이 잘 돌아가게끔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마이어는 그때의 관찰기를 'Sister'에 녹여낸다. '생업' 때문에 비싼 스키장 시즌권을 사서 목에 걸고 있기는 하지만, 시몽은 스키를 탈 줄 모른다. 스키 장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우유와 밀가루, 집세를 얻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시몽이 훔쳐온 외투를 입어보며 걱정을 내비치는 누나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 없어진 옷에는 신경도 안써. 새로 사고 말지."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그저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누나 뒤치다꺼리를 기꺼이 하는 시몽. 루이즈는 동생이 무슨 짓을 해서 돈을 가져오는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다. 스키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관광객 크리스틴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몽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섞여있다. 시몽에게는 엄마의 자리, 가족의 자리가 없다. 가난한, 결손 가정의 비행 소년은 생계를 위한 돈과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그것은 이 아이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랫마을에서 지내다 산 정상의 스키장에 '출근'해서 유령처럼 그곳을 배회하는 시몽에게 부유한 관광객들의 삶은 그저 바라볼 뿐인 TV 속의 장면들 같다.

  전작 'Home'에서 고속 도로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본과 계급의 문제를 은유적으로 드러냈던 마이어는 'Sister'에서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변주한다. 영화는 스키 휴양지 관광객들의 여유있는 모습과 대비되는 어린 절도범 시몽의 일상, 스키장 식당 노동자들의 거친 언사를 보여준다. 로버트 알트만의 2001년작 영화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의 화려한 귀족 저택에 비좁고 복잡한 하인들의 주거 공간이 절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처럼, 부유층의 스키장 휴양지 뒷편에서는 다른 삶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몽이 '누나'라고 부르는 루이즈의 호칭이 '엄마'여야 한다는 사실은 아이가 처한 사회적, 심리적 상황이 매우 취약함을 알려준다. 자신의 어린 아이들과 평온한 휴양지의 시간을 보내는 관광객 크리스틴에게 시몽이 투사하는 감정은 결핍된 모성에서 기인한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아야할 아이는 오히려 엄마를 보살피며,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시즌이 끝나고 눈이 녹아 진창길이 된 폐장 전날 스키장의 풍경은 루이즈와 시몽 모자(母子)의 황폐한 삶의 단면처럼 보인다. 엄마와 아들 사이이지만, 남매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앞날에 무엇이 기다릴지 관객은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작은 비중이지만 영화 속에서 관광객 크리스틴을 연기한 배우는 'X 파일'의 스컬리 요원 질리언 앤더슨이다. 앤더슨은 영화에서 영어가 아닌 불어 대사를 하는데, 의외로 발음이 좋아서 좀 놀랐다. 불어권 리뷰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어 교과서적인 발음'이라고 하니, 프랑스에서 산 적이 없는 이 배우가 가진 언어적 재능도 엿볼 수 있다. 'Home'의 어린 막내 아들에서 한 뼘 훌쩍 커진 케이시 모테트 클라인은 공허한 눈빛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소년을 연기한다. 루이즈 역을 연기하는 레아 세이두도 인상적이지만, 이 영화는 재능있는 아역 배우의 성장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우르술라 마이어는 영화 'Sister'에서 클라인을 위한 완벽한 공연 기회를 제공한다.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의 영화들: Home(2008), Sister(2012) 1부


1. 공간에 대한 심리적 탐구, Home(2008)

  완공되지 않은 고속도로의 끝에 집 한 채가 보인다. 그들은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부부는 세 명의 아이들과 허허벌판을 정원으로 삼고 안온한 삶을 이어가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로 공사가 재개된다.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량이 지나가면서 소음과 분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전의 평온한 삶은 박살이 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가는 차량들 때문에 길을 건너려면 한참을 걸어가 냄새나는 하수구를 기어가야만 한다. 과연 이 가족은 고속 도로변 'home'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 감독의 2008년작 'Home'은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심리적 의미에 대해 탐구한다.

  마르트(이자벨 위페르 분)에게 집은 가족의 완벽한 보금자리였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는 막내 아들의 미니 풀장과 큰딸의 선탠용 의자가 있다. 마르트는 다양한 식재료로 쓸 채소도 직접 가꾼다. 저녁에는 끊어진 도로 위에서 가족의 하키 시합이 열린다. 이제 성인이 된 큰딸 주디스가 매사에 엄마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사랑으로 뭉쳐있다. 착실한 남편 미셸, 영민한 둘째 딸 마리온, 개구쟁이 막내 줄리앙,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까지 마르트에게 고속도로 끝의 집은 평화와 행복을 선사한다. 10년 동안 멈춰졌던 도로 공사가 재개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는 그들이 어쩌다 끊어진 고속도로 옆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것이 '돈' 때문이라는 사실은 고속도로가 완공되고나서도 그들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엄청난 소음과 진동을 견뎌낼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귀마개는 무용지물이며,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들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통에 가족에게는 사생활도 없어진다. 가족들의 심신은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진다. 그러나 'The Shining(1980)'의 폐쇄된 호텔에서 지내다 미쳐버린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비극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기 전에 가장 미셸은 무작정 짐 싸서 떠나자고 하지만, 마르트는 한사코 머물겠다며 버틴다. 그곳만이 자신의 '집'이며, 다시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면서...

  시멘트 벽돌로 집을 철갑처럼 두르는 이 가족의 재건축기를 보며 관객은 가족이 처한 경제적 압박의 실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정체된 바캉스 차량의 사람들에게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이 가족은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은 더이상 '집'이 될 수 없는 그곳에서 떠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통풍을 위한 최소한의 틈마저도 봉인한 그 감옥같은 곳에서 남아 있는 것을 택한다. 가족과의 유대감이 적었고, 그 집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큰 딸 주디스는 진작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우르술라 마이어는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잘 짜여진 내러티브에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이 여성감독은 세트와 배우들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의 이사는 경제적 자유를 가졌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하층민들에게 집은 족쇄같은 고통과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영화의 어디에서도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없지만, 관객들은 'Home'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의 이면에 그것이 명백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시멘트 벽돌로 세상과 단절된 그곳은 더이상 집이 아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집은 쓰레기장처럼 변하고, 가장 미셸은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고 자게 한다. 어떻게든 살고자 했던 '집'이 '무덤'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를 비롯해 배우들 사이의 연기 앙상블이 매우 뛰어나다. 그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이는 막내 줄리앙 역의 케이시 모테트 클라인이다. 'Home'을 찍을 당시에 8살이었던 이 아역 배우의 직관적인 연기는 천부적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감독 우르술라 마이어는 이 꼬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배우로서 가진 역량을 더 끌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클라인을 위해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Sister(2012)'를 만들게 된다(cineuropa.org와의 인터뷰 참조). 


2부에서 계속...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KO 영화사 시절의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의 초상 2부  


1.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노만 포스터 감독

2. Where Danger Lives(1950), 존 패로 감독

3. His Kind of Woman(1951), 존 패로 감독

4. Angel Face(1953), 오토 프레밍거 감독

5.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




3. 가장 미첨다운 것,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과 함께 한 'The Lusty Men(1953)'은 로버트 미첨이란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선사한다. 웨스턴 장르는 전쟁물과 함께 미첨의 주요한 필모그래피를 장식한다.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관객들을 미국 로데오 경기장 한복판으로 초대한다. 이름난 로데오 선수로 살아온 제프(로버트 미첨 분)는 부상으로 은퇴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애쓰는 가난한 웨스 부부와 알게 된다. 웨스(아서 케네디 분)는 제프에게서 로데오 기술을 배워 돈을 벌 궁리를 하지만, 아내 루이즈(수잔 헤이워드 분)는 위험한 일이라며 내켜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데오 경기에서 얻는 돈은 이 부부를 로데오의 세계로 자석처럼 끌어들인다. 제프의 도움으로 로데오 경기의 실력자로 부상한 웨스는 점차 거만해지고 아내에게도 소홀해진다. 급기야 수입을 나누는 동업자 제프에게 모욕을 주기에 이르고 제프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로데오 경기에 참가하는데...

  '러스티 맨'을 보다 보면 니콜라스 레이가 '이유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보여준 자동차 경주 장면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된다. 레이는 로데오 경기장의 흥분과 열기를 현장감 있게 담아낸다. 이 감독에게는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 미첨은 그 누구보다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한때는 로데오의 지배자였지만, 이제는 은퇴한 제프의 내면에는 로데오에 대한 열정이 잔불처럼 남아있다. 어쩌면 그것은 풋내기 로데오 참가자 웨스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한편으로는 웨스의 아내 루이즈에 대한 연정도 깔려있다. 니콜라스 레이는 이 상처받은 로데오의 남자 제프와 함께 로데오 경기장에 얽매인 여러 인간 군상을 다큐멘터리처럼 펼쳐놓는다.
 
  부상과 죽음의 위험이 있는 로데오 경기장을 떠나지 못하는 선수들, 경기장의 뒷편에서는 언제나 내기 도박과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진다. 엄청난 돈이 오가는 로데오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은 가난과 죽음으로 마감하는 로데오의 노장, 잘 나가는 스타 선수를 따라다니는 파티걸들, 그리고 로데오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하는 로데오 광대(rodeo clown)를 비롯해 경기장의 일거리로 먹고 사는 사람들... 그렇게 '러스티 맨'은 '로데오 경기장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로버트 미첨은 로데오에 매혹된 한 남자의 쓸쓸한 인생을 연기한다. 결국 로데오에 환멸을 느낀 웨스 부부가 정착할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달리, 제프는 돌아가지 못한다.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방랑자의 운명은 로버트 미첨이 연기하는 캐릭터들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정착과 휴식을 갈구하지만, 어느새 그는 떠나는 길 위에 서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노만 포스터 감독의 'Rachel and the Stranger(1948)'이다.


4. 낭만적인 방랑자,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레이첼과 이방인'은 미국 초기 개척사의 일부분인 'indentured servant' 제도를 소재로 한 독특한 서부극이다. '계약 하인제'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 제도는 실질적인 노예 제도나 다름없었다. 정해진 연한 동안 지불된 금액에 따라 주인에게 종속되어 일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극빈층의 백인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새경을 받고 일하는 머슴과도 같은 이들은 초창기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 정착민들에게 소중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는 점차 제도의 이탈자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흑인 노예에 대한 폭발적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indentured servant'로 일하는 여성의 경우는 노동력 뿐만 아니라 성적 착취에 대한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식민지 정착촌의 농부 데이비드(윌리엄 홀덴 분)는 아내를 잃은 홀아비로 어린 아들 데이비와 살고 있다. 그는 살림과 양육을 도와줄 여자를 찾기 위해 마을 원로의 도움을 받는다. '레이첼'이란 이름의 여성을 하인으로 쓰고자 명목상으로 결혼을 한 데이비드. 그는 오랜 친구 짐(로버트 미첨 분)의 방문을 받는데, 짐은 레이첼에게 호감을 느낀다. 레이첼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지만, 데이비드는 죽은 아내만을 그리워하고 꼬마는 자신을 돈에 팔려온 '노예'라며 무시한다. 그런 레이첼에게 짐은 자신이 돈을 지불하겠다며 함께 떠나자고 하는데...

  영화가 시작되면 로버트 미첨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면서 등장한다. 사냥꾼의 복장으로 등장하는 그가 들려주는 노래는 가수 뺨칠 정도로 감미롭다. 그는 영화 속에서 로레타 영이 연기한 레이첼과 함께 노래를 몇 곡 더 부르는데, 그런 장면들은 그가 가진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입증한다. 짐은 홀아비와 꼬마에게 냉대받는 레이첼에게 인간적인 온기를 선물한다. 레이첼의 낡은 옷을 보고 옷감을 끊어와 새옷을 만들어 입게 한다. 친구 데이비드에게는 레이첼을 그렇게 내버려둘 거면 자신에게 넘기라고 호기롭게 말한다.

  물론 레이첼은 두 남자가 자신을 사고 파는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레이첼은 신분적 제약에 갇혀있는 여성이기는 하지만, 자존감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 강인한 식민지 시대의 여성은 거친 정착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총 쓰는 법을 연마한다. 가축을 노리는 야생 동물과 원주민 도적단에게 당당하게 맞선다. 레이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한 가족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데이비드는 마침내 레이첼을 아내로 받아들이고, 꼬마 데이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레이첼에게 순종한다. 거기에 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는 방랑자로서 다시 길을 떠난다. 원주민 토벌대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짐의 뒷모습과 함께 영화는 끝을 맺는다.

  정착민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원주민에 대한 악의적 묘사가 있기는 하지만, '레이첼과 이방인'은 꽤 흥미로운 영화보기의 경험을 제공한다. 헐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배우들의 멋진 공연이 있고, 무엇보다 로버트 미첨의 낭만적인 방랑자 연기가 돋보인다. 미첨의 RKO 시절은 1955년, 휴즈의 영화사 매각과 함께 끝난다. 무려 7년에 걸친 편집증 제작자의 난동은 미국 영화사에 기이한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 시기의 RKO 영화사에서 미첨이 쌓은 필모그래피는 재능있는 배우의 흥미로운 궤적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The Lusty Men(1953)'


**사진 출처: tcm.com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KO 영화사 시절의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의 초상 1부  


1.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노만 포스터 감독

2. Where Danger Lives(1950), 존 패로 감독

3. His Kind of Woman(1951), 존 패로 감독

4. Angel Face(1953), 오토 프레밍거 감독

5.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




1. 하워드 휴즈가 로버트 미첨에게 안긴 곤혹스러움, 'His Kind of Woman(1951)'과 'Where Danger Lives(1950)'

  1948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른바 '파라마운트 판결'이라고 하는 역사적 재판의 결정을 내린다. 헐리우드 제작사들의 제작, 배급과 관련해 수직계열화를 독과점으로 규정하고 이를 분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자사 제작 영화를 자체 소유 극장을 통해 배급하면서 얻은 막대한 이득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영화사들은 매각되거나 지분이 쪼개지는 경우도 생겼다. RKO는 유명한 재벌 하워드 휴즈의 손에 넘어갔다. 다양한 필름 느와르를 비롯해 B Movie의 보고와도 같았던 이 영화사가 휴즈와 같은 기인에게 넘어간 것은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정서적인 문제가 있었던 휴즈는 1946년의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더욱 괴팍스러워졌다. RKO를 소유하게 되면서, 제작되는 영화들에 대한 그의 간섭과 집착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 배우 선정에서부터 완성된 영화에 대한 수정 요구까지 모든 면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들었다. 'His Kind of Woman(1951)'같은 영화는 그 폐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존 패로 감독(배우 미아 패로는 그의 딸이다)이 찍은 이 영화에는 로버트 미첨과 제인 러셀(휴즈의 연인으로 유명한), 빈센트 프라이스가 나온다. 그런데 휴즈는 빈센트 프라이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부각시키기 위해 영화 전체를 뜯어고쳐 다시 찍을 것을 감독에게 요구했다. 패로가 완강히 거부하자 대타로 불려나온 사람은 리처드 플라이셔였다. 플라이셔 감독은 고용주의 뜻에 따라 억지로, 마지못해 영화를 재촬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흥행 대참패로 이어졌다.

  추측컨대 패로 감독이 찍은 원본이 훨씬 더 영화의 완성도가 높았을 것이다. 나중에 B급 공포 영화의 아이콘이 된 빈센트 프라이스는 정말로 B급의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인데, 후반부 40분 정도가 빈센트 프라이스를 위해서 할당되었다. 주연 배우인 로버트 미첨이 이 영화에서 당한 수난은 참으로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전문 도박사 댄은 5만 달러의 돈을 받고 멕시코 휴양지에서의 일감을 떠맡는다. 댄은 휴양지 호텔에서 수수께끼같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무려 40분이 지나는 동안 주인공 댄을 비롯해 관객도 도무지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방된 마피아 두목은 체격이 비슷한 댄을 이용해(성형 수술을 시켜서) 미국 밀입국 시도를 하려고 한다. 댄은 마피아에게 잡혀서 강제로 페이스 오프 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그걸 빈센트 프라이스가 눈부신 활약으로 구해낸다.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로 영웅 흉내를 내는 빈센트 프라이스의 모습에 휴즈는 정말로 만족했을까? 추가로 투입된 제작비는 이 영화가 낸 엄청난 적자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댄을 연기한 로버트 미첨은 개연성 없는 이 영화에서 얻어맞고 나뒹굴며 고군분투한다. 아마도 나중에 자신의 계좌에 들어온 출연료가 유일한 위로가 되었을 듯하다.

  미첨은 이미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1950년에 찍은 'Where Danger Lives'가 그러했다. 주로 주먹 세계와 가까운, 하층민의 역할을 맡았던 미첨은 이 영화에서 '의사'로 나온다(솔직히 말하자면 안어울린다). 제프는 자살 시도로 입원한 환자 마고를 돌보다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마고가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프가 마고의 남편과 다투는 과정에서 마고의 남편이 죽는다. 마고는 머리를 다쳐 판단력이 흐려진 제프를 부추겨 멕시코로 도피한다. 과연 이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휴즈의 파티에서 눈에 들어 그의 연인이 된 페이스 도머그(Faith Domergue)가 미첨의 상대역에 낙점되었다. 별다른 재능도 없는 이 여배우가 생기있게 보이는 순간은 비명을 지를 때이다. 정말로 소름끼치게 비명을 지르는데, 놀랍게도 그 재능을 바탕으로 여배우는 자신의 후기 경력을 채우게 되었다. 도머그는 나중에 B급 공포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각광을 받았다. 연기를 못하는 상대 여배우에게 맞춰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미첨의 모습은 애잔해 보일 정도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미첨은 잘못된 사랑으로 인생의 나락에 떨어지는 비운의 남자를 실감나게 연기해낸다. 


2. 필름 느와르에서 찾은 광채, Angel Face(1953)

  RKO 계약 배우로서 로버트 미첨이 각광받았던 장르는 필름 느와르였다. 자크 투르니에 감독의 '과거로부터(Out of the Past, 1947)'는 매우 잘 알려진 RKO 시절 작품이다. 진 시몬스와 1953년에 찍은 'Angel Face' 또한 수작으로 꼽힌다. 나에게 진 시몬스는 아름답지만 그다지 인상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 시몬스는 자신의 배우적 재능을 입증해 보인다.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연출 역량이 돋보이는 이 영화에서 로버트 미첨은 진 시몬스와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구급 요원 프랭크(로버트 미첨 분)는 부유한 사업가의 저택에서 일어난 가스 중독 사고 현장에 출동한다. 사업가의 딸 다이앤(진 시몬스 분)은 계모의 중독 사고에 매우 흥분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랭크는 다이앤의 뺨을 때리는데, 뺨을 맞은 다이앤은 프랭크를 똑같이 때린다. 서로 뺨 한 대를 주고 받으며 시작된 사랑의 감정(!)은 예기치 않은 행로로 흘러간다. 다이앤은 프랭크에게 보수가 적은 구급차 요원 일 대신에 집안의 운전기사 일을 제안한다. 다이앤의 저택에서 일하면서 프랭크는 점차 이 천사같은 얼굴의 아가씨에게 어두운 면모를 발견한다. 다이앤의 계모에 대한 적개심은 급기야 사고사로 위장한 살인으로 이어진다. 사건의 공모자로 의심받는 프랭크, 그는 이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토 프레밍거 감독은 청순한 매력의 얼굴을 가진 진 시몬스에게서 사이코패스적인 냉혹함을 끌어낸다. 사랑과 범죄는 기이하게 얽히며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아찔한 수직 절벽에서 찍은 자동차 사고 장면은 관객을 극한의 긴장과 불안 속에 몰아넣는다. 로버트 미첨은 이 영화에서 결코 유약하거나 여성 캐릭터에게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프랭크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의지에 따라 그것을 바꾸려고 시도한다. 굴복하지 않는 남자, 미첨이 가진 강인한 면모는 부드럽게 절제되어 있다. 이것은 'Where Danger Lives'에서 그가 연기한 의사 제프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사고 판단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남자는 자신을 조종하려는 여자의 의지에 압도되지 않는다.           


2부에서 계속...



*사진 출처: tcm.com   'His Kind of Woman(1951)'의 로버트 미첨과 제인 러셀


**사진 출처: tcm.com    'Where Danger Lives(1950)'의 로버트 미첨과 페이스 도머그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리얼리즘 영화인가 착취 영화인가, Pixote(1981)

  브라질의 헥토르 바벤코(
Héctor Babenco) 감독의 '피쇼테(Pixote)'는 2018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월드 시네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복원된 작품이다. 복원된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재단을 통해 기금을 지원했다는 자막이 뜬다. 복원판은 원래 영화에 프롤로그로 들어가는 바벤코 감독의 내레이션 부분이 없다. 그 부분은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약 2분 가량의 영상에서 감독은 빈민촌(Favela로 불리는)을 뒷배경으로 브라질의 심각한 빈곤과 그로 인한 아동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 도입부 장면에서 주인공 '피쇼테'를 연기한 실제 파벨라 출신의 페르난도 라모스 다 실바의 모습도 보인다.

  영화 '피쇼테'는 꽤 착잡하고 괴로운 영화 보기의 경험을 선사한다. 고아 피쇼테가 거리의 아이로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겪는 일은 영화가 아니라 진짜 현실처럼 느껴진다. 강간, 폭행, 학대, 협잡과 은폐가 횡행하는 복마전 같은 소년원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탈출한다. 그러나 피쇼테를 기다리는 것은 더 깊은 범죄의 수렁이다. 소매치기를 시작으로 마약 밀매, 포주 노릇과 협박, 결국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 고통스런 피쇼테의 범죄 인생 수업기는 영화적 표현으로서의 리얼리즘과 아동 연기자에 대한 착취(exploitation)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아동이 강간과 성행위를 목격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브라질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다큐멘터리적인 미학을 성취하기 위해 최하층 빈민가 출신의 아동 배우를 그런 식으로 소모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피쇼테'를 보는 내내 그런 질문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공허한 눈빛을 가진 주인공 피쇼테. 자신의 삶을 연기하는 것 같았던 페르난도 라모스 다 실바는 19살의 나이에 경찰의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출연이라는 행운은 문맹과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로 이어지지 않았다.


2. 팔레스타인의 오늘, Mayor(2020)와 200 Meters(2020)

  데이비드 오싯 감독의 2020년작 다큐 'Mayor'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임시 수도 '라말라'의 시장이 주인공이다. 이스라엘 서안 지구(West Bank)에 자리한 라말라의 무사 시장은 시에 산적한 여러 문제들을 비롯해 정치적인 난제들과도 마주한다. 온화한 성품의 시장은 매사에 합리적이고 명료한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애쓴다. 업무를 위한 시청 직원들과의 소통을 비롯해 주민들의 민원에도 동네 아저씨처럼 직접 가서 살펴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팔레스타인의 행정력이 미치는 라말라는 겉으로는 매우 평화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은 곧 그 평화가 잠정적이고 유동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2017년 12월, 트럼프가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다큐는 국제적인 정치 역학이 라말라에 그대로 반영되는 모습을 담아낸다. 네타냐후 정부는 트럼프의 선언을 계기로 서안 지구 정착촌 건설에 더욱 공격적으로 나선다. 성탄절을 앞두고(라말라의 주민 25%는 기독교 신자이다) 축제 분위기에 있었던 라말라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진입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시청사 앞까지 진출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쏘아대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시장은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라말라가 팔레스타인의 영토가 아닌 이스라엘의 '점령지'임을 명백히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서안 지구는 지역에 따라 A, B, C로 나뉜다. 팔레스타인의 지배적 행정력이 미치는 A 지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동 관리하는 B 지역, 이스라엘 단독 관리 지역 C. 라말라는 A 지역에 속하지만, 그것이 팔레스타인 주민의 온전한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서안 지구에 고립된 섬처럼 흩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들로 가기 위해서는 늘 이스라엘군의 검문소를 거쳐야만 한다. 라말라의 시 주변 곳곳에도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고, 인접한 정착촌 때문에 라말라 주민들은 수질 오염과 같은 불편을 겪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서 무사 시장은 어떻게 하면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치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독일 외교 사절단과의 회담에서 보여준 시장의 모습이었다. 사절단은 정치적 의사 표명에 난색을 표하면서 실질적인 민간 교류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러자 시장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엄성(dignity)'을 지키는 데에 서방 세계의 정치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아민 나이페 감독의 2020년작 '200 미터'는 바로 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예루살렘과 서안지구를 가르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가족은 나뉘어 살고 있다. 남자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아내는 아이들과 예루살렘에서 지낸다. 두 집의 사이는 장벽 하나를 두고 고작 200 미터 정도이다. 왜 그들은 그렇게 따로 살게 되었을까? 예루살렘에서 2개의 부업을 뛰며 일을 하는 아내에게는 거주권이 있지만, 남편에게는 없다.

  자본과 일자리가 넘치는 예루살렘에 가서 돈을 벌기 위해 남자는 수모에 가까운 검문 검색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엑스레이 촬영, 지문 검색, 신분증 제출에 걸리는 시간은 2시간에 가깝고 겨우 그렇게 가서 막노동을 한 다음에 밤늦게 다시 돌아온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매일 겪는 일상이다. 영화는 갑작스런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은 남자가 급하게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비합법적인 루트를 이용하는 과정을 그린다. 총격전과 테러 장면이 나오지 않는데도, '200 미터'가 보여주는 예루살렘 진입기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으로 채워져 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단편적인 국제 뉴스만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현실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영화 '200 미터'는 오늘을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다큐 'Mayor'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분쟁 지역의 현실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국외자 관객들에게 국제 정치의 역학과 그 이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진 출처: janusfilms.com



**사진 출처: wikipedia.org



***사진 출처: tehrantimes.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