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 시네마텍', 참 그리운 이름이다. 1995년에 그 영화관이 문 열었을 때, 마치 새로운 영화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동숭 시네마텍의 구조가 관객 친화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비좁은 외벽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감수하고 그곳에 갔던 이유는 단 하나, 좋은 영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거기에서 본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을 잊지 못한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머릿속에 담고 갈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아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때 상영관 좌석은 거의 매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주인공 꼬마 아마드가 달려가는 갈지자(
之) 모양의 산길,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공책에 살포시 꽂혀있는 작은 풀꽃. 진짜 그 두 장면이 다였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떴을 때, 굉장히 허탈하고 사기 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 저딴 영화가 다 있냐, 하면서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키아로스타미는 그 후로도 불호 감독이었다. 이 양반은 예술 영화를 표방하면서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이 있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체리 향기(1997)'를 챙겨서 보기는 했으나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 장면들이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나는 그 영화가 가진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 영화는 '세월의 힘'이 필요한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는 그런 느린, 매우 심심한 영화를 밀쳐두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의 유작이 된 '24 Frames(2017)'도 나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7-1569)의 '눈 속의 사냥꾼' 그림에서부터 시작한다. 풍경화를 통해 당시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주었던 브뤼겔의 이 그림이 '24 프레임'의 첫 프레임을 장식한다. 키아로스타미는 그림과 사진 같은 정지된 이미지가 순간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 그 전과 후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매혹시킨 그림을 비롯해 직접 찍은 사진을 가지고 연속된 장면을 구성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키아로스타미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쓰인 도구는 최첨단 영상 기술이었다. 첫 번째 프레임의 '눈 속의 사냥꾼'을 응시하던 관객은 그림의 중경에 위치한 집 굴뚝에서 연기가 점차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와 함께 근경에 자리한 사냥꾼 옆의 나무 위 까마귀가 우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뭐지?'하는 당혹스러움 속에 그렇게 첫 프레임이 지나간다. 영화는 이렇게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24개의 짧은 영상들을 엮었다.

  24개의 프레임은 대부분 숲과 나무,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동물들이 나오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Frame'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대상을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단일한 롱쇼트가 화면을 채운다. 각각의 프레임에서 무엇이 재료가 된 원본인지 구분해내기는 어렵다.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난 프레임은 15번째로 다리에서 파리의 에펠탑을 바라보는 무슬림 관광객들이 나온다. 어둑해지는 저녁 풍광 속에서 아마도 가족으로 보이는 그들은 관객에게 등을 보이며 서있다. 에펠탑에는 불이 켜지고, 그들 뒤로 거리의 악사와 다른 행인이 지나가면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에펠탑의 풍경에 매혹된 그들은 멈춰진 시간 속에 머문다. 무슬림, 이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던 그에게 이미지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평생의 과업이었다. 그렇게 15번째 프레임에서 나는 영화 감독 키아로스타미의 정체성을 엿본다.

  그는 이 영화를 편집하던 중에 세상을 떴다. 남은 작업을 마무리한 것은 아들 아흐마드였다. 키아로스타미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이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었음에도, '24 Frames' 곳곳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까마귀'의 존재이다. 첫 번째 프레임인 브뤼겔의 그림 속에 있던 까마귀들은 이후 여러 프레임에서 출몰하며, 그들이 내는 소리는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사냥감의 사체를 뜯어먹는 눈 속의 늑대들, 총 소리와 함께 해변가에 떨어지는 갈매기, 전기톱 소리에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두 그루의 나무,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과 이어져 있다.

  예외적으로 9번째 프레임에서는 짝짓기 하는 사자 한 쌍이 나온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요란한 풍광 속에서도 무심한듯 생식행위에 몰두하는 이 사자들은 생명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총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달아나던 사슴 무리에서 끈끈한 우정을 보여주는 숫사슴도 있다. 5번째 프레임의 숫사슴은 도망치는 무리를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그 사슴이 기다리던 또 다른 사슴이 마침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을 때, 둘은 무리가 떠난 방향으로 함께 떠난다. 16번째 프레임에서는 낯선 타자와의 만남이 그려진다. 들오리는 철망으로 둘러쳐진 집오리 농장을 계속해서 기웃거린다. 집오리와 들오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탐색한다. 그러나 멀리서 지나가는 사람의 존재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야생 동물과 가축의 세계를 나눈다.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에는 어두운 창가의 책상에 켜진 노트북 컴퓨터가 중앙에 자리한다. 컴퓨터 화면에는 편집 프로그램이 떠있고,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 남녀 주인공들의 키스신이 재생되고 있다. 아주 느린 배속으로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는 주인공들과 함께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이 프레임에서 흐르는 노래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Love Never Dies'이다. 책상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노트북 앞의 여성은 가끔씩 팔과 머리를 들썩인다. 24번째 마지막 프레임의 모든 것은 부자연스럽다. 뚝뚝 끊기며 결국 키스신에 도달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비롯해 밤에서 아침에 이르는 긴 시간의 밝기 변화는 수 분 안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영화'는 그러한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 가공된 이미지들이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더이상 영화에서 '현실'과 '가상'의 이미지들을 구분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키아로스타미는 정지된 스틸 컷들의 환상적인 CGI 변환 작업을 통한 결과물을 '24 Frames'로 남겼다. 생의 끝자락에 서있던 노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의 기술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영화'의 본질은 이미지 그 자체에 대한 매혹에 있음을, 그 마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노래한다.

  3번째 프레임에서 해변가에 죽은 것처럼 쓰러진 소 옆에 까마귀가 한두 마리씩 날아든다. 파도가 들이치는 가운데 소떼가 드러누운 소 옆을 지나가고,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됨을 본다. 그러나 파도와 모래에 파묻힐 것처럼 보였던 그 소는 마지막에 벌떡 일어난다. 까마귀는 놀라 날아간다. 누워있는 소의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만을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놀라움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당 24개의 연속된 프레임으로 구성되는 영화라는 이 요술 상자에서는 기이한 마법이 펼쳐진다. 나 또한 그 마법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스러져 가는 생의 뒤안길에서 영원을 노래하는 이 영화에서 나는 뜻밖의 충만함를 발견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피터 브뤼겔 '눈 속의 사냥꾼',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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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미니 시리즈 1, 2, 5, 6편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71464

  재즈 미니 시리즈 3, 4편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29358



Jazz 7  'Dedicated to Chaos(1940-1945)' 1시간 53분         
Jazz 8  'Risk(1945-1956) 1시간 58분



  'Jazz 7편'은 2차 세계 대전 시기를 통과하는 재즈 음악계의 변화를 담는다. 1930년대를 휩쓸었던 스윙의 열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은 그 중심에서 여전히 건재했다. 그런 가운데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등장은 재즈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1940년, 미국은 대공황의 종식과 함께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의 기운이 미국을 감싼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많은 재즈 음악가들도 군인으로 복무했다. 듀크 엘링턴과 루이 암스트롱은 군대에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기에 그들은 대신 군 위문 공연을 다니며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군 부대에서 재즈 밴드가 결성되는 일도 있었다.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은 그렇게 재즈를 시작했다.

  Home front로서 미국 본토는 전쟁 지원에 총력을 다했다. 군대에 간 30개의 재즈 밴드들을 비롯해 심지어 전시 물자에 쓰느라 악기 제조까지 중단되기도 했다. 전쟁과 재즈, 무언가 안어울릴 것 같은 이 조합은 새로운 파장을 만들어 냈다. 군대 음악으로서 재즈는 대중성을 더욱더 확장해 나갔다. 특히 유럽에서 재즈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자유와 통합, 젊음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나치는 재즈 음악이 가진 그러한 상징성 때문에 탄압하기도 했다. 토마스 카터 감독의 1993년작 'Swing Kids'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재즈는 더 많은 향유 계층과 음악적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미국 사회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가 서서히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인종 문제였다. 전시와 군대에서도 인종 차별은 노골적이었다. 흑백 분리 정책은 군대 내 재즈 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인이었던 데이브 브루벡이 있었던 밴드만은 예외였다. 브루벡은 당시 동료 흑인 음악가들이 받았던 차별을 회상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1943년, 새로운 재즈의 중심지로 떠오른 뉴욕 할렘에서는 인종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제 흑인들은 부당한 대우에 더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종 간의 갈등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가운데 재즈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엘라 피츠제랄드와 듀크 엘링턴은 흑인 음악적 감성인 블루스를 재즈와 긴밀히 결합시켰다. 유럽에서는 집시 출신의 뛰어난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가 등장했다. 그리고, '버드(Bird)'라고 불리는 찰리 파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Jazz 8편'은 재즈의 전설이 된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비밥(Bebop)'이라는 재즈의 파격적 문법을 들고나왔다. 초기의 비밥은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기존의 스윙 재즈가 춤에 최적화된 음악으로서 댄스홀을 중심으로 확장성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비밥에는 그러한 요소가 적었다. 매우 빠르고 다채로운 리듬감의 재즈는 청중들에게 낯설게 들렸다. 특히 찰리 파커가 선보인 신기에 가까운 속주(速奏)와 현란한 기교는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에 가까웠다. 그것은 분명 재즈의 혁명이었다. 파커는 새로운 세대의 재즈 음악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를 비롯한 파커의 동료들은 그렇게 비밥의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8편의 제목 'Risk'에 드리운 어두움이 곧 드러난다. '마약'이었다. 찰리 파커에게 마약은 음악 경력의 원천인 동시에 폭탄과도 같았다. 어떤 면에서 그가 보여준 놀라운 연주는 마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재즈 음악인은 고달프고 위험한 직업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 청중의 기대, 경제적인 문제, 그 모든 것들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았다. 재즈 초창기에는 술과 마리화나(루이 암스트롱은 마리화나 중독자였다)가 그 어려움을 달래는 약물이었다면, 이제는 '마약'이 주류로 부상했다. 파커를 비롯해 마일스 데이비스, 스탄 게츠, 존 콜트레인과 같은 재즈 음악가들은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특히 파커는 마약으로 인해 음악 경력 자체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음반 계약금을 마약으로 받기도 했던 그에게 재활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파커는 비밥의 독창적 경지를 만들어냈지만, 그럴수록 그 자신의 삶은 벼랑 끝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비밥의 시대에 기존의 스윙 빅 밴드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그리고 대공황 시기에도 잘 나갔던 베니 굿맨의 밴드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제 빅 밴드의 시대는 저물고, 작은 규모의 특색있는 재즈 밴드들이 등장한다. 대중의 취향은 변했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사운드의 이른바 '쿨 재즈(Cool Jazz)'가 탄생했다.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그 쿨 재즈의 산파와도 같았다. 존 루이스(John Lewis)는 'The Modern Jazz Quartet'으로, 데이브 브루벡은 'Dave Brubeck Quartet'으로 쿨 재즈에 합류했다. 브루벡은 당시에 미국에 머물던 현대 음악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의 영향을 받아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켰다. 그의 'Time Out' 음반에 수록된 유명한 'Take Five'는 그 결과물이었다.

  1950년대는 그렇게 비밥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재즈 음악이 피어나고 있었다. 1955년, 어린 딸의 죽음으로 상심한 찰리 파커의 상태가 악화된다. 오랜 마약 중독과 폭음은 파커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재즈의 심장을 차지했던 이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겨우 서른 다섯이었다. 대체불가능한 재능은 그렇게 비운의 운명 속에 사라졌다. 역시 마약 중독에 빠져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각성했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죽음과도 같은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온다. 파커의 죽음과 함께 재즈 역사의 창 하나가 닫혔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새롭게 열린 창들 사이로 재즈는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Jazz 9편'은 실험적 재즈 음악의 시대를 다룬다. 10편으로 구성된 켄 번즈의 재즈 미니 시리즈는 두 편을 남겨두고 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Charlie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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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은 프랑스 근대사에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해이다.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굴욕적인 협상으로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게 뺏긴 것이 2월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쫓겨나고 새롭게 수립된 공화정 정부의 수반은 아돌프 티에르로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전후 수습과 함께 빠른 권력 장악을 위해 국민군의 해산을 명령했다.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기간 동안 목숨을 걸고 도시를 지켰던 민병대 조직인 국민군은 반발했다.

  시작은 티에르가 시민들의 기금으로 만든 국민군의 대포 징발을 위해 정부군을 보낸 것에서부터였다.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렸던 파리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정부군의 장군 2명이 시위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이에 놀란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이유로 퇴각했다. 이후 70일 동안 파리에서는 코뮌(Paris Commune)이라는 자치 정부가 세워진다. 영국 출신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는 바로 그 파리 코뮌을 다룬 5시간 45분짜리 극영화를 만들었다. 2000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La Commune'이라는 제목에 'Paris, 1871'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파리 교외의 거대한 실내 세트장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무려 220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그들 대부분은 비전문 배우로 일반 파리 시민을 비롯해 이민자들 가운데 선발된 이들이었다.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이들을 위해 피터 왓킨스는 토론과 학습으로 이루어진 제작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 시간들을 거치면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배역을 충실히 숙고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피터 왓킨스는 'La Commune'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것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왓킨스에게 이 작업을 의뢰한 프랑스-독일의 합작 방송사 ARTE는 최종 결과물을 보고 심한 불쾌감을 표시했으며, 작품의 상영과 배급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왓킨스가 그린 파리 코뮌의 실체가 어떠했길래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La Commune'은 시작부터 독특하다. 제작 스탭들이 세트에 자리한 가운데 남녀 배우가 자신들의 역할을 설명한다. 그들은 극에서 코뮌의 소식을 전하는 방송국 기자 역할을 맡았다. 1871년이 배경인 역사극에 신문이나 종이가 아닌 '방송국'이 미디어로 등장한다. 아주 흥미롭고 파격적인 설정이라고 할 수 있는 왓킨스의 구상은 영화를 이끄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이른바 사회주의 좌파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코뮌 TV'가 파리 시민과 코뮌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어용 우파 언론도 있다. '베르사이유 TV'는 정부와 부르주아의 입장을 충실히 전달하는 방송으로 영화는 그 둘 사이의 서로 다른 보도 행태를 보여준다.

  코뮌 TV 두 기자의 자기 소개에 이어 그들은 관객을 봉기의 진원지였던 파리 11지구 세트장으로 안내한다. 빵집 주인 부부를 비롯해 가난한 모녀가 자신들의 어려운 근황을 기자들에게 이야기한다. 프로이센군의 파리 봉쇄는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의 하층민들을 극한의 삶으로 내몰았고, 코뮌은 그러한 상황에서 탄생했다. 왓킨스는 당시 역사적 기록과 통계를 인용한 자세한 자막을 중간 중간에 넣음으로써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극영화의 형식을 취했지만, 'La Commune'은 다큐멘터리적 방식을 긴밀하게 결합시켰다. 기자들은 파리 시민을 비롯해 군인, 코뮌 정치인들과 인터뷰한다. 그를 통해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점차 뼈와 살이 붙은 하나의 실체로 다가온다. 물론, 프롤레타리아의 입장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귀족 부인도 등장한다. '탈보트 부인'은 집에서 '베르사이유 TV'를 시청하며 코뮌의 향방을 주시한다. 실존 인물이었던 그는 당시 파리에 있으면서 베르사이유의 딸에게 파리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써보냈다. 부인은 무도한 코뮌 일파를 정부군이 와서 소탕해주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중이다. 왓킨스는 부인이 편지를 쓸 때, 정면에 위치한 카메라를 자주 응시하도록 한다.

  탈보트 부인이 보여주는 이러한 인위적 응시는 영화적 재현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La Commune'에서 그런 효과를 가져오는 장치들은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역동적인 핸드 헬드로 이어지는 시퀀스들은 대개 10분이 넘고, 거기에는 즉흥성과 자연스러움이 포함된다. 엉성하게 지어진 조립식 세트의 비좁은 통로에는 군인과 시민이 뒤엉켜 서있다. 촬영장비의 길고 구불구불한 전선줄이 그대로 보이는 그곳을 관객들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1871년의 파리'라고 타협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시민들이 나누는 대화 주제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여성 연맹을 조직하기 위해 모인 하층민 여성들의 토론 장면에서 '시장 자유화'와 '전지구적 자본주의'란 단어가 나온다. 그런가 하면 젊은 군인은 부르주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영화 제작 당시에 이루어진 파리시의 조경 사업이 부유층을 위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La Commune'에서 왓킨스는 과거의 '파리 코뮌'과 지금의 시대를 사는 배우들의 현실을 접합시킨다. 일반인 배우들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경험한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으로 코뮌 시민들의 사회주의적 각성을 이해한다. 그러한 과정들은 꽤 긴 분량으로 이어지는 영화 속 토론 장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또한 배우들은 자신들이 연기한 배역에 대한 소감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왓킨스에게 1871년의 코뮌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진행되는 사건인 셈이다. 코뮌이 지향했던 목표들, 즉 노동권의 확립과 여성 인권의 향상, 보다 평등하고 나은 세상을 위한 가치는 결코 총칼에 의해 절멸될 수 없다.

  이 작품을 왓킨스에게 의뢰한 발주처 ARTE는 5시간이 넘는 긴 상영 시간을 포함해 미디어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싫었을 것이다. 'La Commune'은 미디어가 가진 권력의 남용, 사건을 바라보는 편향적 시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파 언론 '베르사이유 TV'는 사실이 아닌 날조로 시청자들을 선동한다. 앵커와 정치평론가는 코뮌의 수뇌부를 외국인 불순분자들이 차지했다고 비아냥거리면서, 코뮌이 외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처럼 보도한다. 그런데 반대 진영의 '코뮌 TV'도 자기들 입맛에 맞는 소식만 전하는 것은 마찬가지. 코뮌 내부의 문제점을 어물쩍 덮으면서, 나팔수처럼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한다. 코뮌이 무너지는 마지막 '피의 일주일'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는 분노한 시민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이딴 쓸데없는 보도 따위는 집어쳐. 이런 거 할 시간에 여기 와서 싸우라고!'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틀어 'La Commune'을 뛰어넘는 파리 코뮌 영상물은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대적 접근과 함께 미디어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영화를 보려고 생각 중인 이들은 긴 러닝타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좋은 영화란 '좋은 흐름'을 가진 영화이다. 'La Commune'을 관통하는 그 흐름은 관객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는 코뮌의 정신은 체제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서로 다른 처지의 개인이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에 맞서 각자의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으로 이어짐을 깨닫는다.   



*사진 출처: carpenter.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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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동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세 편; Aquarela(2018), Gunda(2020), Stray(2020)



1.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다큐들, Aquarela(2018)와 Gunda(2020)

  오래전, 러시아 영화사 수업 시간에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나는 쿠바다(Soy Cuba, 1964)'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찍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롱쇼트는 마치 카메라가 공중을 유영하듯이 특이하게 찍은 장면이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놀라운 쇼트여서 수강생들끼리 저거 어떻게 찍었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러시아에서 영화를 전공한 선생님이 당시 촬영 스탭으로 참여했던 이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대답을 안해줬다고... 선생님은 아마도 건물들 사이에 밧줄을 걸고 카메라를 미끄러지게 해서 찍은 것 같다고 추측했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Viktor Kossakovsky)의 2018년작 다큐 'Aquarela'의 마지막 부분은 탄성과 함께 '나는 쿠바다'를 보며 던졌던 질문을 하게 만든다.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코사코프스키는 'indiwire.com'과의 인터뷰에서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랬다. 목숨 걸고 찍은 필름의 비밀을 알기란 쉽지 않다.

  '수채화'란 뜻의 'Aquarela'라는 제목의 다큐는 말 그대로 물과 얼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자연 다큐이다. 1시간 3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채운 물의 다양한 형태, 그 힘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된다. 다큐의 시작은 바이칼의 얼음 호수에 빠진 자동차를 끌어내는 장면에서부터이다. 러시아 태생의 코사코프스키 감독의 여정은 기후변화로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그린란드, 광포한 폭풍우가 들이치는 바다, 기록적인 피해를 기록한 허리케인 Irma가 지나가는 마이애미의 한복판, 그리고 마지막 여정인 베네수엘라의 앙헬 폭포에 이른다. 깎아지른듯한 수직 절벽의 위와 아래에서 찍은 앙헬 폭포의 장관은 지상의 물이 주인공으로 펼치는 극한의 서커스처럼 보인다. 폭포의 물보라 속에 만들어지는 무지개를 포착한 장면은 'Aquarela'가 성취한 시적 미학을 입증한다.

  코사코프스키가 'Aquarela'를 찍을 당시에 동시에 진행하던 작업이 있었다. 농장의 동물들을 찍는 다큐였다. 'Gunda(2020)'는 자연주의적 방목을 하는 농장의 돼지와 소, 닭의 모습을 1시간 23분 동안 보여준다. 'Gunda'라는 이름의 돼지가 다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동물 다큐에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내레이션도, 음악도 없다. 오직 자연의 소리로만 채워진 다큐는 어미 돼지 'Gunda'가 농장의 헛간에서 새끼들을 낳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정확한 숫자를 세려다 번번이 실패하는 열 마리가 넘는 새끼 돼지들은 맹렬하게 어미의 품을 파고들며 젖을 찾는다. 그 와중에 짚더미에 깔려서 세상 구경을 못할 것 같았던 새끼 한 마리는 어미의 도움으로 겨우 눈을 뜬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농장에서 어미 돼지는 새끼들과 농장 근처 숲을 자유롭게 탐색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소들은 축사가 아닌 들판에서 풀을 뜯고, 달려드는 파리떼들을 내쫓느라 애를 쓴다. 다리가 하나 뿐인 닭은 비틀거리면서도 자유로운 세상을 만끽한다. 노르웨이와 스페인, 영국에서 찍은 이 동물들의 모습은 공장식 축사에서 사는 대부분의 가축들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처지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다큐 속에 나오는 돼지와 소, 닭이 결국에는 사람의 식탁에 오를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새끼들을 보살피며 어미 돼지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만, 어느 날 Gunda의 헛간 앞에 세워지는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내는 소음은 불길함을 내뿜는다. 시동을 건 상태의 트럭 뒷편에서 새끼들의 비명이 들린다. 잠시 후 트럭이 떠나고 Gunda가 홀로 남는다. 영문을 모른 채 한참을 서있던 어미 돼지는 새끼들을 찾으려 이리 저리 헤맨다. 마치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Gunda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새끼들과 함께 지냈던 헛간을 들어가려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밖을 둘러보던 어미는 결국 홀로, 힘겹게 헛간으로 들어간다.

  'Gunda'가 보여주는 농장의 가축들은 그 자체로 자연친화적이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그러한 풍경은 그 가축의 최종 소비자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고 복잡한 축산업 연결망의 일부분임이 드러난다. 젖으로 불어터진 Gunda의 몸이 새끼들을 싣고 떠난 트럭의 자취를 찾을 때,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죄책감을 느낀다. 차라리 기계적으로 도축되고 포장되는 육류 가공 공장의 생산 현장을 보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과연 인간이 가축의 삶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에는 얼마만큼의 정당성이 있을까? 어떤 관객에게 이 다큐는 채식주의로 내딛는 하나의 전환점일 수도 있다.


2. 떠돌이 개의 시선으로, Stray(2020)

  홍콩 출신의 엘리자베스 로(Elizabeth Lo)는 터키 이스탄불의 떠돌이 개들에 대한 다큐를 찍었다. 'Stray'란 제목의 이 다큐는 사람이 아닌, 개들이 만들어 가는 내러티브로 진행된다. 로는 Zeytin, Nazar, Kartal 이란 이름의 유랑견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이스탄불시는 거리의 개들을 포획하고 안락사시키는 대신에, 인식표를 달아주고 중성화수술을 시켜 시민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외국인의 눈에는 어찌보면 혼란스럽고 불결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스탄불의 독특한 풍광이 'Stray'에 펼쳐진다. 감독 엘리자베스 로는 철저히 개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담아내려고 애썼다.

  다큐가 시작되면, 우리나라의 누렁이와도 비슷하게 보이는 큰 덩치의 Zeytin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떠돌이 개에게 이름을 붙여준 이들은 시리아 난민 소년들이다. 시내의 버려진 건물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는 소년들은 개들과 느슨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개들은 밤이 되면 소년들의 은신처에서 잠이 든다. 굶주린 소년들은 유독한 본드를 흡입하며 거리 생활을 이어가지만, 개들에 대한 애정만은 남다르다. 엘리자베스 로는 난민 소년들이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띄엄띄엄 집어넣는다. 관객들은 그 대화에서 소년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개'에게 맞춰져 있다. 항구 주변의 물가에서 하염없이 물이 들이치는 것을 보고 있는 Zeytin의 모습은 바닷가에 앉아서 파도를 보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개의 영혼이 사람보다 저급한지는 알 수 없으나, Zeytin은 굽이치는 물결을 응시하며 반응한다. 길에서 만나는 다른 개들과 인사하고 교감도 나눈다. 개들은 에르도안 정권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탁심 광장의 시위 현장에도 나간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짝짓기를 시도하는 개들은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노파는 그런 개들을 역겹다며 내쫓지만, 대체적으로 이스탄불의 시민들은 개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무엇보다 덩치가 큰 개들이 지들끼리는 먹이와 영역을 두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유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엘리자베스 로는 이스탄불의 떠돌이 개들이 뛰어난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filmmakermagazine.com과의 인터뷰 참조). 

  떠돌이 개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감독의 기록에는 중간중간 행인들의 대화가 들어간다. 부부의 내밀한 문제들, 젊은 남녀의 연애 고민 같은 이야기들은 개를 찍는 외국인 여성 감독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 이들이 무심코 나눈 대화들이 포착된 것이다. 길거리 개들이 인간들의 일에 무관심한 것처럼 감독은 수시로 전환되는 내러티브의 방향성을 빠르게 개들에게 고정시킨다. 이스탄불 외곽의 유적지에서 떠돌이 개들은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자유롭게 활보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목적도, 구속도 없다.

  잘 차려입은 여성이 데리고 나온 흰색의 작은 강아지가 Zeytin에게 관심을 보이자, 주인은 자신의 강아지에게 물릴 거라며 주의를 주고 황급히 줄을 당긴다. 더럽다고 무시당하고 내쫓김을 당하는 개들의 처지는 그들을 아껴주는 시리아 난민 소년들의 모습과도 겹친다. 제대로 된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도시를 배회하는 난민 소년들은 개들 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이다. 다큐는 모스크의 기도문 소리에 맞추어 크게 하울링을 하는 Zeytin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Stray'는 이스탄불의 'outcast'인 떠돌이 개들을 통해 인간과 공존하는 도시 속 동물의 또 다른 삶의 양상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사진 출처: allocine.fr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사진 출처: dogwoo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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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장례식; Great Farewell(1953), State Funeral(2019)


1. Lullaby(1937), 58분
2. Great Farewell(1953), 1시간 5분
3. State Funeral(2019), 2시간 15분


(1번과 2번 작품은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자막은 제공되지 않는다)


  1937년, 러시아 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는 '자장가(Lullaby)'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러닝타임 58분의 이 다큐멘터리는 품에 안은 아기를 어르는 젊은 엄마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큐는 러시아 혁명의 위업을 이어받는 새로운 세대의 희망을 노래한다. 러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산업과 교육, 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이 다큐는 '러시아'라는 국가가 지닌 생명력, 모성에 대한 찬양을 드러내고자 베르토프 특유의 몽타주 기법으로 정교하게 편집되어 있다.

  정치적 선전물인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로서 '자장가'에는 당시 국가 원수였던 스탈린이 부수적인 이미지로 삽입된다. '부수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다큐에서 스탈린이 등장하는(초상화 장면까지 포함해) 부분이 10여 분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다큐에서 스탈린은 권위적인 국가 지도자가 아닌 '자애로운 아버지'의 이미지로 강조된다. 생명과 희망을 대변하는 위대한 모성으로서의 러시아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아버지 스탈린이 자리한다. 베르토프의 필모그래피 끝자락에 위치한 이 다큐는 발표 직후 5일만에 영화사 선반에 얹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도 이 작품에 대한 스탈린의 비호감이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후 베르토프는 경력의 내리막길에 접어들며 쓸쓸히 영화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세르게이 로즈니차(Sergei Loznitsa) 감독의 2019년작 다큐 'State Funeral'을 보고 있노라면, 스탈린이 소련 인민들에게 차지했던 '나라의 아버지'로서의 위상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했다. 당시 소련을 대표하는 영화계 인사 6명이 스탈린의 장례식을 기록하는 영상물 촬영 책임을 맡았다. 세르게이 게라시모프(러시아 국립 영화 학교 VGIK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를 비롯해 지가 베르토프의 아내 엘리자베트 스빌로바, 에이젠슈타인의 초기 공동 작업자인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가 그 책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러시아 전역을 비롯해 동유럽 공산권 국가, 중국, 북한에서 스탈린을 추모하는 장면이 흑백과 컬러로 촬영되었다. 이것은 'Great Farewell(1953)'이란 제목의 1시간 5분 정도의 기록 영화로 남았다.

  그러나 스탈린 우상화에 대한 반감과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소련의 지도부는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마자 황급히 봉인해 버린다. 그렇게 'Great Farewell'은 1988년까지 어둠 속에서 잊혀졌다. 로즈니차 감독은 Krasnogorsk에 자리한 러시아 국가 영화 사진 기록 보관소에서 그때의 촬영 필름들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그 영상 자료들에 로즈니차 감독은 강하게 매료되었다. 그는 그것을 '보물을 찾았다'는 말로 표현했다(mubi.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 보물을 가지고 로즈니차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편집한 '스탈린 장례식' 다큐를 만들었다.

  러닝타임 2시간 15분에 달하는 'State Funeral'을 보는 관객들은 엄청나게 선명한 과거 자료 화면의 화질에 놀랄 것이다. 당연하게도 당시에 최고 품질의 필름과 우수한 촬영 인력이 투입된 기록물 작업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특히 독일에서 개발된 아그파 컬러 필름(Agfacolor)의 진가는 스탈린의 관 색깔인 빨강색에서 드러난다. 로즈니차는 흑백과 컬러를 절묘하게 이어붙이면서 수시로 색상 전환을 시도한다. 다큐는 소련 전역에서 시민들이 스탈린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성대한 모스크바의 장례식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고 촘촘하게 직조해 나간다.

  국가가 제작했던 'Great Farewell'이 뉴스릴의 내레이션 방식을 채택한 것과는 달리, 로즈니차는 'State Funeral'에서 일체의 설명을 배제했다. 오직 장례식에 쓰인 클래식 음악(모짜르트의 레퀴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그리그의 '오제의 죽음'을 비롯해 장송곡 음악)만으로 다큐는 그 흐름을 이어간다. 당시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관객들에게 로즈니차의 다큐는 매우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장례식을 주도하는 소련 정치인들의 면면을 비롯해 주요한 정보는 제시되지 않는다. 또한 로즈니차는 스탈린 장례식과 관련된 자료를 소련 국내로만 한정해서 편집했다. 이는 각국의 조문 사절단을 비롯해 공산권 국가(동유럽, 중국, 북한, 몽골)에서 이루어진 추모 장면을 상세히 설명하는 'Great Farewell'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로즈니차 감독은 왜 그런 방식을 채택했을까? 그는 'Great Farewell'이 강조한 스탈린 장례식의 정치적 장엄함 보다는, 당시 소련 민중이 스탈린의 죽음에 반응하는 것에 더 촛점을 맞추고 싶어했다. 'Great Farewell'에서 장례식 조사를 낭독하는 소련 권력의 핵심 인사들은 'State Funeral'에서는 하나의 뭉뚱그러진 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흐루시초프,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의 순서대로 낭독된 'Great Farewell'의 공식 장례식 장면은 그들 사이에 내재된 정치적 긴장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로즈니차의 관심사는 정치권력 보다는 민중에 있다. 자발적 비통함, 그것이야말로 로즈니차가 의문을 품고 파고드는 지점이다. 다큐 전체를 압도하는 스탈린에 대한 추모의 감정은 절대로 강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피의 숙청으로 도살장의 짐승처럼 죽어나갔고, 스탈린 치하에서 발생한 기아는 거의 학살에 가까운 범죄와도 다름없었다. 그 모든 것을 주도한 독재자의 죽음에 당시의 소련인들은 진정으로 애도했다. 끝도 없이 바쳐지는 꽃과 추모의 행렬은 마치 잘 연출된 한 편의 거대한 장례식 영화를 연상케 한다. 아마도 어떤 이들에게는 로즈니차의 이 다큐는 스탈린의 장례식을 미화한 텍스트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그러나 'State Funeral'은 결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며, 그와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물음을 던진다. '왜 그들은 저렇게 비통해 하는가? 독재자 스탈린은 과연 저런 성대한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어도 합당한가?'

  'Great Farewell'은 스탈린이 공산권에서 가진 절대적인 위상을 강조한다. 마오쩌둥은 천안문 광장에서 직접 추모식을 집전하며, 2인자 저우언라이를 사절단 대표로 보냈다. 북한의 추모 행렬 또한 비중있는 장면으로 들어간다. 소복을 입고 조문하는 여성들을 비롯해 변경 군인들의 추모 장면들은 꽤 인상적이다. 몽골 초원에서 애도하는 유목민의 모습도 편집되어 들어간다. 그와는 달리 로즈니차가 다큐에 사용한 자료 화면을 소련 지역으로만 한정한 것은 소련 인민들과 스탈린의 관계를 부각시켜서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다큐 속의 소련인들에게 스탈린은 위대한 소련의 아버지처럼 보인다. 그들은 지도자이며 아버지인 사람을 잃었다.

  명백하게 독재자이며 살인마인 사람을 추모하는 이 무시무시한 사기 협잡극 같은 장례식을 보는 이들은 착잡한 감정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State Funeral'은 독재자의 화려하고 장엄한 장례식을 가능하게 한 것의 토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한 장례식을 기획한 것은 스탈린의 정치적 수하들이었지만, 소련 인민들은 그것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로즈니차는 독재자의 철권 통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 민중들이며, 장례식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침내 구슬픈 '자장가(Matvey Blanter 작곡, Mikhail Isakovskiy 작사)'가 흐르는 가운데 스탈린이 매장된 영묘를 보여주며 다큐는 끝난다. 자신의 아기를 잠재우며, 그 어떤 슬픔과 두려움도 맛보지 않을 거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이 자장가는 베르토프의 다큐 'Lullaby(1937)'와 기이한 댓구를 이룬다. 'Lullaby'에서 인자로운 국부(國父)를 태연하게 연기했던 독재자는 과연 무덤에서 아기처럼 평화롭게 잠들 수 있을까? 방부처리되어 레닌 영묘에 합장되었던 그의 시신은 1961년에 꺼내어져 매장되었다. 'State Funeral'은 이제는 땅에 묻힌 독재자가 드리운 길고 음울한 역사적 그림자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cineuro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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