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3부


  작가 지망생인 아가씨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과 상상력을 좀 보태어서 소설 한 편을 써냈다. 몇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궁리 끝에 이름 있는 작가에게 원고를 보내 보았다. 소설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행운이 따랐다. 소설은 곧 책으로 나왔다. 모국 호주가 아닌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의 출판사에서였다. 스무 살의 Miles Franklin은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소설의 제목은 'My Brilliant Career'. 소설은 꽤 잘 팔렸고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작 소설 속의 17살 아가씨 시빌라는 예쁘지도, 그렇게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시빌라는 소젖을 짜며 집안의 농장일을 돕는다. 시빌라의 어머니는 주정뱅이 남편 뒤치다꺼리하기도 버겁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입이라도 덜게 딸이 얼른 시집이나 가버렸으면 싶다. 그러던 중에 친정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온다. 시빌라의 부자 할머니가 외손녀딸을 불러들인다. 시빌라를 잘 단장시켜서 부잣집에 결혼시켜 보낼 심산이다.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인생이 망가진 딸의 전철을 외손녀가 밟게 할 수는 없다. 과연 선머슴 같은 시빌라는 결혼으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을까?

  Gillian Armstrong이 영화 'My Brilliant Career(1979)'를 찍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아홉이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영화 경력을 시작한 이 여성 감독에게 마일즈 프랭클린의 소설은 매우 적합한 텍스트였는지도 모른다. 결혼보다 직업적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빌라는 부자에다 잘 생긴 구혼자의 손길을 뿌리친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것으로 화려한 경력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대강의 줄거리만 본다면 'My Brilliant Career'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작 소설을 막상 읽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문체는 자의식 과잉에 유치하고 장황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일즈 프랭클린이 소설을 썼을 때의 나이가 십 대 후반이었다. 아름답지도, 별다른 재능도 없는 시골 촌구석 아가씨에게 대체 무슨 마성의 매력이 있는지, 결혼해 달라는 구혼자가 세 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해리는 잘 생긴데다 엄청난 부자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 맞아. 그러니 거기에 걸맞는 괜찮은 여자를 찾아봐."

  소설 속 시빌라는 그 말과 함께 해리의 구혼을 거절한다. 영화에서 시빌라(주디 데이비스 분)는 해리(샘 닐 분)에게 자신이 스스로의 길을 찾을 때까지 2년을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2년이 아닌 4년이다. 그 긴 시간을 기다려줄 남자가 있을까? 자신이 대단한 무언가를 해낼 것이라고 믿는 시빌라에게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며 날개를 꺾는 일이다. 결혼이 여자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영역이라고 믿는 할머니는 시빌라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결혼과 직업적 성공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시빌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사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이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두 가지 삶의 과제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시빌라의 관점은 1900년대 초 호주 여성이 직면한 어려움을 반영한다.

  나는 원작 소설 'My Brilliant Career'를 페미니즘 서사로 읽어내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든다. 마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을 호주 남부 여성 버전으로 살짝 비튼 것처럼 보이는 플롯은 단선적이며 성찰적인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 영화에서도 그 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관객은 왜 시빌라가 해리의 청혼을 거절하는지에 대해 명백히 납득하지 못한다. 해리는 시빌라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시빌라를 구속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도 않다. 시빌라가 장차 무얼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도 별로 없고, 글쓰기에 대한 가능성도 영화 결말부에 가서야 미약한 단서처럼 주어질 뿐이다.

  아마도 시빌라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작가 마일즈 프랭클린의 소설적 자아, 분신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프랭클린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그다지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했다. 'My Brilliant Career'의 성공 이후 작가의 길로 들어선 프랭클린은 영국과 미국에서 글쓰기로 경력을 쌓으며 보냈다. 호주로 돌아온 것은 50이 넘어서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프랭클린에게 '글쓰기'란 여성으로서의 독립적 삶을 가능케 만든 근원이었다.

  영화는 고향 농장으로 돌아온 시빌라가 자신의 첫 소설을 완성하고 우편함에 넣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대한 평원을 바라보며 시빌라는 꿈꾸듯 그렇게 서있다. 질리언 암스트롱은 소설과는 다소 다른 결말로 시빌라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한다. 소설의 시빌라는 불확실한 미래와 가난한 현실 속에서 자연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끝난다.

  "내 무용한 삶은 그들(농부들)이 그러하듯 노고의 이 대지에 파묻히겠지. 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야. 그저 별 달리 쓸모도 없고, 작은, 시골 촌뜨기에 불과해. 무엇보다 나는 여자의 삶을 살아가야 해!(My ineffective life will be trod out in the same round of toil—I am only one of yourselves, I am only an unnecessary, little, bush commoner, I am only a—woman!)"

  소설 마지막 단락의 이 문장 하나가 'My Brilliant Career'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 작품은 프랭클린 사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페미니즘 서사로 다시금 부각되었다. 생전의 프랭클린에게 이 소설은 명성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그 시대의 독자들은 소설 속 주정뱅이 아버지를 실제 작가의 아버지와 동일시했다(소설과 현실이 달랐음에도). 프랭클린이 성장한 New South Wales 농촌 마을 사람들은 소설 속 시골의 삶이 편협하고 무지막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며 프랭클린을 비난했다. 스무 살 작가에게 소설의 제목대로 화려한 경력이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평생에 걸쳐 무거운 멍에이며 그림자였다. Miles Franklin이 이후 쓴 작품들은 모두 첫 소설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소설 'My Brilliant Career'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신중하게 채택된 텍스트였다. 질리언 암스트롱은 잊혀진 근대 호주 여성의 이야기를 1970년대 페미니즘 서사와 결합시킨다.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 일과 사랑의 양립은 고통과 희생을 수반하는 과제였다. 직업적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백마 탄 왕자를 내버려두고, 홀로 자신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영화 속의 시빌라는 분명 1900년대의 여성이 아니다. 시빌라의 시선이 향하는 먼 그곳을 당시의 여성 관객들은 함께 응시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 'My Brilliant Career'은 발굴된 호주 여성 서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광대하고 아름다운 호주 자연의 풍광 속에 아로새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작가 Miles Franklin(1879-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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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2부

호주인의 정체성과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Ken Hannam
The Last Wave(1977), Peter Weir

 


1. 노동과 삶의 현장으로서의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South Australian Film Corporation(SAFC). 우리말로 번역하면 '남호주 영화 협회'이다. 1972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호주 뉴 웨이브 영화의 산파와 버팀목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 호주 영화 산업은 고사 상태에 있었다. 호주 대륙의 풍광은 해외 제작자들에게 로케이션 장소로 눈길을 끌었다. 호주 영화 산업은 일종의 하청 역할을 떠맡았고, 제작으로 생긴 수익금은 제작사 본국이 가져가는 구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호주 정부는 영화를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지원을 해나갔다. 영화 학교를 설립해서 제작 인력을 양성했고, 국가 주도로 제작사를 만들어서 기금을 조성했다. SAFC는 그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영화들 또한 그 SAFC의 제작비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상업 영화 발전을 정부가 주도한다는 점에서 호주 뉴 웨이브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자, 이제 여러분이 SAFC의 고위 책임자라면 어떤 영화의 제작을 돕겠는가? 당연히 호주라는 국가, 호주인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영화 제작에 마음이 기울 것이다. Ken Hannam 감독의 1975년작 영화 'Sunday Too Far Away'는 그러한 취지와 정확히 부합했다. 이 영화는 SAFC의 첫 제작 작품이었다. 영화는 1956년에 일어난 호주 양털 깎기 업자(sheep shearer)들의 파업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근대 호주 양모 산업의 주축을 이루었던 그들은 열악한 노동 여건에서 저임금에 시달렸다. 잘 알려진 1891년의 파업 이후로도 shearer들의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영화는 '폴리'라는 양털 깎기 일꾼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광대한 호주 평원을 배경으로 근육질의 사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아주 간명하게도 양털 깎기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짱'은 제일 빨리, 많이 양털을 깎는 사람이다. 주인공 폴리는 어쩌다 흘러들어간 농장에서 호적수 아서를 만난다. 영화의 내용은 그 둘의 '양털 깎기 승부'와 농장주의 임금 횡포에 맞서는 파업이 주를 이룬다. 러닝타임 94분의 이 영화는 정말이지 너무 싱겁게 끝나버려서 '아니, 저게 전부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는 폴리의 로맨스와 관련된 부분이 들어갔으나, SAFC의 입김으로 상당 부분 편집되어서 상영되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꽤 큰 흥행 수익을 냈다. 당시 호주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호주인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영화였을 것이다.

  'Sunday Too Far Away'에 내포된 정서는 결국 본질적인 질문과 연결된다. '호주인은 누구인가? 호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양털 깎기 노동자들의 거칠고 남성적인 세계는 양떼와 초원으로 상징되는 호주 자연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호주 뉴 웨이브 영화들에서 그러한 호주 자연의 풍광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목도하게 된다. 호주인들에게 대륙의 자연은 자신들의 근원과도 같다. 그것이야말로 다른 영연방 국가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자연 풍광이 수려한 뉴질랜드는 호주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2. 원주민에 대한 백인 이주민의 부채의식, The Last Wave(1977)

  1988년에 KBS에서 방영된 외화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s, 1983)'를 시청했던 독자들이라면 주인공 랄프 신부 역의 Richard Chamberlain을 기억할 것이다. Peter Weir 감독의 1977년작 'The Last Wave'에는 아주 젊은 시절의 체임벌린이 나온다. 이 영화는 그가 외모 뿐만 아니라 연기 역량도 뛰어난 배우라는 점을 입증한다. 영화의 도입부, 운동장에서 놀던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이 갑작스런 소나기를 피해 교실로 들어온다. 그런데 이 비는 그냥 잠깐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주먹만한 우박과 함께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건물을 강타한다. 우박에 깨진 유리창 파편은 아이의 목에 피가 철철 흐르게 만든다. 인간의 세계를 압도하는 자연의 힘, 'The Last Wave'에서 자연은 찬미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야기한다.

  기업 세무 담당 변호사 데이비드는 법률 지원 제도에 의해 배정된 사건 하나를 맡게 된다. 원주민 4명은 동료 원주민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원주민들이 살인 혐의를 부인하는 가운데, 사건을 맡은 후 데이비드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 원주민이 나오는 꿈을 꾸고 불안 증세에 시달리던 그는 꿈에서 본 남자가 기소된 크리스(David Gulpilil 분)임을 알아차린다. 이 기이한 우연의 일치를 파고들면서 그는 살인 사건이 원주민들의 주술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는 동안 시드니에는 이례적 폭우가 이어지고, 데이비드는 그 비에서 임박한 재앙의 기운을 느낀다. 도대체 데이비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The Last Wave'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물'이다. 학교 교실에 내리 꽂히던 우박처럼 도시에 쏟아지는 폭우는 불길한 저주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틈입하며 스며드는 이 공포스러운 물은 데이비드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식사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식사를 하다 말고 이상한 느낌에 거실로 나온 그는 2층 계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본다. 물은 욕조에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수도를 잠그는 것으로 저녁의 중단된 일상은 복구된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이후 느끼게 된 불안과 두려움은 그렇게 잠글 수 없다. 관객은 그가 현실과 합리성의 영역에서 강력한 초자연과 주술의 영역으로 빨려들고 있음을 본다. 

  결국 그가 자신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공포의 실체와 마주하기 위해 가는 곳은 거대 도시 시드니의 지하 하수도이다. 잘 정비된 하수 시스템의 숨겨진 영역에 원주민들의 비밀 성소(聖所)가 있다. 마치 버려진 마야 원주민의 유적지처럼 허물어진 돌 무더기와 고대 벽화들, 기괴한 석상(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과 비슷하다)들 가운데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발견한다. 그 장면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에 속하는 데이비드가 원주민 주술사의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지하에서 빠져나온 그가 해변가에 서있다. 그곳에서 그는 대지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를 본다. 그것이 실재의 파도인지, 상상의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 'The Last Wave'는 호주라는 국가의 탄생에 자리한 원죄와 부채의식을 부각시킨다. 원주민과 자연은 백인 이주민들에게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림자이다. 백인의 외양을 하고 있으되, 영적으로는 그 땅의 초자연적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존재. 영화 속 데이비드는 자신과 닮은 가면을 지하에 두고 도망쳐 나온다. 낯설고 두렵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디디고 서있는 땅의 모든 것은 이미 뿌리처럼 무의식을 파고 들며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피터 위어는 호주인의 내적 심연을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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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1부
 
Walkabout(1971), Nicolas Roeg



  자신이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원주민과 작업한 감독이 있다. Nicolas Roeg. 그의 1971년작 영화 'Walkabout'에는 원주민 David Gulpilil이 나오는데, 촬영 당시 그는 전혀 영어를 하지 못했다. Gulpilil은 단순히 몇 장면 나오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었다. 그런데도 영화의 완성도가 괜찮은 것은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 모두 좋았기 때문이다. 이 원주민은 이후 배우의 길로 나선다. 다음 편에서 다룰 'The Last Wave(1977)'에서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영화 'Walkabout'은 여러모로 흥미있는 작품이다. 뢰그는 정해진 시나리오도 없이 대부분의 장면을 즉흥적으로 촬영했다(촬영 감독 출신으로 그는 이 영화를 직접 찍었다). 물론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기는 했다. James Vance Marshall이 1959년에 발표한 소설은 비행기 사고로 사막에 조난당한 남매와 원주민의 만남을 다루었다.

  원작 소설을 기본 뼈대로 뢰그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살로 붙여 나갔다. 영화가 시작되면 낮게 깔리는 기이한 구음
(口音)이 들린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발성 훈련을 하고 있다. 마치 낯선 야생에서 들리는 동물들의 소리처럼 들리는 이러한 사운드는 영화 전체를 통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백인 중산층 가족과 만난다. 아버지는 시드니 근교 사막으로 십 대의 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자신의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고 놀란 딸은 장난인 줄 아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황급히 숨는다. 딸은 아버지가 차에 불을 지른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본다. 이것이 영화 시작 10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이후 영화에서 남매의 사막 여행기가 이어질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원작의 비행기 사고는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으로 대체되었다. 갈증과 더위에 시달리던 남매는 원주민 소년과의 만남으로 겨우 살 길을 찾는다. 뢰그는 이야기 중심의 내러티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문명과 대비되는 날것 그대로의 야생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것이 영화 전체의 이미지를 아우른다. 도마뱀을 비롯해 고슴도치, 캥거루, 독수리와 같은 호주 사막의 야생 동물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제시된다. 동물 사체에 들러붙는 파리와 구더기들, 사막에 쌓여있는 동물 뼈들...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으로 시작된 남매의 여정은 문명에서 야생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정장 구두에 단정한 교복을 입었던 소녀에게 옷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그들은 원주민 소년을 통해 거친 자연에서 생존하는 법을 하나씩 배워나간다.

  니콜라스 뢰그는 그 사막의 여정을 영화적 감각으로 계획하지 않고 찍었다. 'Walkabout'에서는 마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기술법(automatic writing)'에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원주민 소년이 창을 들고 캥거루 사냥을 하는 장면은 역동적인 핸드 헬드로 찍었다. 소년이 사냥감을 해체하는 장면은 도시 정육점의 고기 절단 장면과 교차 편집한 몽타주로 제시된다. 뢰그가 그려내는 야생성에는 먹고 마시는 생존에 더해 성적인 본능도 들어간다. 카메라는 관음증적인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아주 짧은 교복 치마를 입은 소녀(Jenny Agutter 분, 영화에서는 이름이 없다)가 절벽을 오를 때 의도적으로 속옷이 보이는 것을 포착하는 장면이라든가, 계곡에서 나체로 수영을 하는 장면을 꽤 긴 분량으로 찍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한 성적인 에너지는 곧 이들 사막 여행자들의 여정에 변화를 만들어 낸다. 원주민 소년은 소녀를 향해 자신만의 구애 의식을 하고, 그것은 소녀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원주민 소년이 왜 사막을 배회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원작에는 거기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소년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루게 되는데, 8개월 동안 홀로 사막을 여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니까 영화 속 사막은 남매와 원주민 소년 모두에게 성장의 통과 의례가 되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두 문명의 만남은 예기치 못한 파국을 가져온다. 소년의 갑작스런 죽음, 남매는 나무에 축 처진 채 걸려있는 소년의 시신을 발견한다. 원작에서 소년은 남매와 함께 지내다 병에 걸려 죽는 것으로 나온다. 백인들의 질병에 면역력을 갖지 못한 원주민들이 겪는 비극이었다. 'Walkabout'에는 문명/야생의 구도 뿐만 아니라 백인/원주민, 정복자/식민지인의 대립적 구도도 포함되어 있다. 남매는 여행 도중 마을을 지나친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은 백인이 만드는 조악한 석고 기념품 제작하는 일을 돕는다. 백인 남자는 원주민 아이의 몸에 흰색 페인트를 문지른다. 이러한 식민지성에 대한 표현은 영화 곳곳에 널려있다.

  영화에서 백인들은 냉담하고 오만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백인 여자는 원주민 소년과 남매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친다. 길을 잃었다며 도움을 청하는 소녀에게 늙은 백인 남자는 집 마당의 어떤 것도 만지지 말라며 내쫓는다. 남매에게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법을 알려주고 사냥한 고기를 나누어 먹은 원주민 소년과는 다르다. 그 백인들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소녀는 다시 구두를 신고, 교복을 입는다.

  영화의 마지막, 귀가한 남편을 맞이하는 한 여자가 보인다. 여자는 남편과 이야기 하다 말고 어떤 생각에 빠진다. 사막에서의 기억이다. 낯선 자유로움을 만끽했던 야생의 기억은 살아있었다. 그 장면은 소녀의 내면에 각인된 야생성과 자연에 대한 감각이 일종의 향수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향수는 호주 이주민 백인이 원주민과 그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영화에서 소녀를 연기한 Jenny Agutter는 2016년 The Guardian
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내가 경험한 그 세계(호주의 사막)는 진짜였죠. 자연, 사람들, 그곳의 삶을 포함해서요. 영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모든 게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아마도 내 자신이 좀 야성적으로 변했던 것 같아요(It really became our world, our community, our life. Coming home from Australia, everything felt completely alien. We’d all gone a bit feral)."

  16살 소녀 배우에게 '진짜'라고 각인된 광대한 호주 대륙의 자연은 놀라운 체험의 공간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와 유사하게 'Walkabout'은 백인 이주민, 정복자의 시선으로 이상화된 자연을 투사한다. 니콜라스 뢰그는 도시의 삶에 결여된 야생성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한다. 그러나 결코 찬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백인들과 지내다 목숨을 잃는 원주민 소년은 '정복자/문명'이 가진 힘의 우위를 입증한다. 그 힘의 대결에서 오는 긴장과 불안을 그려낸 'Walkabout'은 침체된 호주 영화 부활의 신호탄이 된다. 그렇게 '새로운 물결(Australian New Wave)'이 밀려들고 있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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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배우다, Pig(2021) 

  니콜라스 케이지. 몇 년 동안 그 배우의 이름을 내가 본 곳은 헐리우드 가십란이었다. 시끌벅적한 이혼과 재혼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나는 케이지가 아직까지 배우로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1995)'가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영화였다. 그러다 2021년작 영화 'Pig'에서 케이지를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었다.
   
  포틀랜드의 숲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롭(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송로버섯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롭에게는 버섯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는 돼지 한 마리가 있다. 그저 돼지에게 가끔 말을 건넬 뿐이지만, 롭에게 돼지는 사업 파트너이면서 친구 같은 존재이다. 아미르는 그런 롭에게 가끔 들러 버섯을 매입해 가는 유일한 방문자이다. 어느 날 저녁, 롭의 오두막에 침입자들이 들이닥친다. 부상을 입은 채 깨어난 롭은 돼지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이대로 녀석을 잃을 수는 없어! 롭은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돼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데...

  영화 속 롭의 모습은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출연자를 연상케 한다. 노숙자 같은 외모에 장발의 머리와 수염, 사람들과의 교류를 단절한 채 오로지 돼지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는 그는 속세를 등진 사람임이 틀림없다. 어쩌다가, 왜 그는 그런 삶의 방식을 택했을까? 관객은 그의 여정을 통해 롭의 지난 인생 역정을 하나씩 알게 된다. 그는 과거 아주 잘 나가는 셰프였으나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그에게 잃어버린 돼지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부서진 삶을 견디게 해주는 작지만 소중한 조각이었다.

  'Pig'는 돼지를 찾아나선 롭의 여정을 통해 상실의 고통과 마주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롭이 회피와 은둔의 방식을 택했다면, 아미르의 부친 다리우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상실에 맞선다. 그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아내를 외면하고 부인한다. 그리고 그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물질적 욕망을 향해 내달린다. 롭이 돼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다리우스를 설득하는 방식은 진심이 담긴 '요리'이다.

  영화는 꽤나 진지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속은 텅 비어있다. 도시의 지하 세계에서 롭이 맞닥뜨리는 내기 격투 장면,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장삿속으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를 질책하는 장면 같은 것들도 그다지 감정적 울림을 주지 못한다. 이 영화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딸을 구하기 위해 무자비한 복수의 여정에 나선 리암 니슨의 '테이큰(Taken, 2008)'과 완고하고 냉담한 이들을 요리로 감화시키는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1987)'의 합본이다. 롭이 구하려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돼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부박하고 공허해 보이는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이다. 그의 존재감은 영화를 압도하며, 관객을 무작정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케이지를 주연으로 쓸 수 있었던 신인 감독 마이클 사르노스키(Michael Sarnoski)에게는 결정적인 행운이었던 셈이다. "나는 배우다!" 'Pig'에서 관객은 오랫동안 그 존재감을 잊고 있었던 한 배우의 포효를 듣는다.


2. 소박하지만 빛나는 영화적 시원성(始原性), Pebbles(Koozhangal, 2021) 

  영화가 시작되면 잔뜩 성이 난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학교 교실에 들이닥친다. 겁에 질린 아이가 끌려나온다. 이 남자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아내는 그가 휘두르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남자는 아들을 앞세우고 아내의 친정 마을로 가볼 참이다. '자갈(Pebbles)'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인도의 P. S. Vinothraj 감독이 2021년에 선보인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인도 영화'하면 흔히 떠올리는 화려한 춤과 노래는 나오지 않는다. 건조하고 황량한 풍경 속에 아버지와 아들의 고통스런 여정이 펼쳐진다.

  'Pebbles'의 내러티브를 꽉 채우는 것은 이미지와 정서이다. 표면적으로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길에서 만나는 가난한 이들의 삶의 단면을 주의깊게 포착한다. 버스에서 우는 아기를 안고 아무런 표지판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린 젊은 엄마의 표정에는 무거운 고단함이 베어져 나온다. 먹을 것이 없어서 흙먼지 날리는 평원에서 들쥐를 잡아 구워먹는 할머니와 손녀딸의 모습도 보인다.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소녀는 날개가 달린 씨앗들을 주워서 허공에 날려보내며 즐거워 한다. 그 씨앗들은 느리게 흩어지며 반짝이는 보석처럼 화면을 채운다. 그렇게 비노트라지 감독이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 인도 내륙 지역의 시골 풍경은 아름다움과 가슴저린 아픔이 공존한다.

  영화는 구조적인 빈곤, 폭압적인 가부장제의 어두운 일면을 주정뱅이 아버지와 학대받는 아들의 여정 속에 시적인 방식으로 포개어 놓는다. 아이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을 그저 묵묵히 감당해낼 뿐이다. 아내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남자는 제 성질을 못이기고 버스표를 찢어서 폭염의 날씨에 아이를 걷게 만든다. 살을 태우는 듯한 더위와,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을 잊기 위해 아이는 바짝 마른 입에 자갈을 넣는다. 작은 돌멩이를 굴리는 동안 입안에는 침이 고이고,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깨어진 거울 조각을 주워 햇빛에 반사되는 빛으로 주변 절벽과 아버지의 등 뒤에 비추는 장난을 하기도 한다.

  관객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 집 나간 여성의 존재를 기억해야만 한다. 현실 속 소년의 엄마와 같은 처지의 많은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남편의 폭력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영화는 인도를 비롯해 제 3세계 빈곤 국가의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명백히 각인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깨끗한 우물이 없는 곳에서 흙탕물을 긷는 여인네들이 쪼그리고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이 가슴먹먹한 가난과 고통의 시적 서사는 비노트라지 감독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것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아동 노동자로 일해야 했던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영화에 대한 매혹은 그가 DVD 대여점 직원으로 일할 때 시작되었다. 아마도 그 시절을 통해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습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Pebbles'에는 영화가 지닌 소박한 시원성(始原性)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미지, 그리고 그것으로 촉발되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 정서.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탄생한 기원이며 중요한 뼈대를 이룬다. 'Pebbles'는 창작자의 내면에 고인 영화에 대한 열정이 지역색과 자본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떻게 세계의 다국적 관객에게 호소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screensl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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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현실 세계가 아니에요. 우린 '거품' 속에서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But it is not the real world. We live in a bubble)." 
 
  플로리다주에는 미국 최대의 은퇴자 마을이 있다. 'The Villages'. 1980년대 초반에 부동산 업자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이곳의 주민은 초창기 800명에서 이제는 약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큐가 시작되면 관객은 카메라가 비춰주는 '빌리지'의 풍광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50개가 넘는 골프 코스로 연결된 주거지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센터를 비롯해 쇼핑몰과 병원,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하는 수많은 클럽까지. 열정적으로 연습하는 할머니 치어리더들이며 휴양지의 옷차림으로 일광욕을 하는 노인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종종 이곳은 '은퇴자들의 디즈니랜드'로 불리기도 한다.

  Lance Oppenheim의 2020년작 다큐 'Some Kind of Heaven'은 관객을 'The Villages'로 안내한다. 노인들이 꿈꾸는 천국처럼 보이는 곳. 과연 빌리지의 삶은 행복할까? 물론 그곳의 주민이 되려면 안정적인 재정은 필수이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온갖 편의시설과 안락함은 '돈'에서 나온다. 빌리지 주민들은 2016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었다. 주로 백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거주하는 그곳은 인종적,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구 구조를 갖고 있다.

  랜스 오펜하임은 처음에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 형식으로 빌리지의 삶을 담아내려 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의 존재는 흥미있는 외지인으로 늘 주목을 끌었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러운 촬영이 쉽지가 않았다. 1년의 시간을 두고 그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결국 그는 인간적인 유대를 맺은 일부 주민들의 이야기를 찍었다(harvardmagazine.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 인물들을 통해 다큐는 매일매일이 휴양지의 삶 같은 빌리지의 반짝거리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거기에도 숨겨진 이면이 있다.

  결혼 47주년을 맞이하는 Anne과 Reggi 부부는 오랜 세월 소통의 단절로 서먹서먹한 상태이다. 거기에다 남편 Reggi는 약물 남용(마리화나와 마약) 혐의로 기소된 상태이다.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잘못된 방식을 택했고, 그것이 부부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간절하게 연인을 찾는 과부 Barbara도 있다. 남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집을 팔고 빌리지에 정착한 바바라는 남편이 세상을 뜬 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눌러 앉았다. 원래 살았던 곳으로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빌리지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비를 벌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외로움이야말로 바바라가 해결하고 싶은 중요한 문제이다.

  아마도 이 다큐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라면 Dennis일 것이다. 낡은 승합차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빌리지에서 돈 많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꿈이다. 지인들에게 돈 좀 꾸어달라며 호기롭게 전화를 돌려대는 데니스의 모습에서는 번지르르한 말발이 나이와는 상관없음을 알게 된다. 가진 거라곤 그저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로 들어찬 비좁은 차 한 대 뿐이지만, 데니스는 당당하다. 과연 81세의 노인은 부자 애인을 만나 늘그막의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을까?

  'Some Kind of Heaven'을 보고 있노라면 에롤 모리스의 'Gates of Heaven(1978)'과 'Vernon, Florida (1981)'를 떠올리게 된다. 그 두 개의 초창기 에롤 모리스의 다큐는 장차 독창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될 그에게 흥미로운 습작이었다. 'Gates of Heaven'은 애완 동물 묘지 사업을 하는 특이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어진 'Vernon, Florida (1981)'에서는 플로리다의 버논 마을에 사는 기이하고 괴상한 주민들과의 인터뷰가 주를 이룬다. 모리스는 원래 그 마을을 횡행하는 신체 절단 보험 사기에 대해 찍으려 했으나, 촬영에 반감을 가진 주민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을 겪은 후 포기했다(그는 정말로 기분 더러운 경험이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1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모리스는 촬영의 방향을 바꾸어서 마을의 '괴짜들' 이야기를 다큐로 찍었다. 그는 미국의 공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찍는 다큐의 인물들을 일부러 찾거나 조사한 적은 없어요. 대개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들이 나의 눈에 들어옵니다."

  랜스 오펜하임이 포착한 다큐 속 빌리지의 주민들은 그곳을 대표하지도,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들도 아니다.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좀 더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주민들로 선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다큐는 엄밀히 말해서 '빌리지'와 '빌리지 피플'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 인물 다큐로 보는 편이 맞다. 다큐 속 인물들은 독특하고 흥미있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애인을 찾길 바라는 바바라는 골프 카트 판매자 린과의 만남에서 강렬한 연애 감정을 느낀다. 린이 다른 여자와 춤추는 것을 보고 매서운 눈빛으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청춘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제비족 영감이라고 할 수 있는 데니스는 또 어떤가? 그의 속보이는 뻔뻔스러운 수작은 애잔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다큐는 은퇴자들의 천국 '빌리지' 안에 만화경과 같은 세상이 있음을 보여준다. 정서적인 어려움을 가진 Reggie가 약물 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는 장면은 빌리지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이들의 주거지로만 적합한 곳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중간 중간 제시되는 열정적인 교회 부흥 설교자들의 강연은 역설적으로 그곳 주민들의 영적인 갈망과 내면의 빈곤을 부각시킨다. 바바라는 돈 때문에 그곳에 묶여 자신이 원하는 이전의 인간 관계망을 복원하지 못한다. 바바라에게 빌리지는 즐거운 디즈니랜드가 아니라 외로움을 강제하는 족쇄일 뿐이다.

  과연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큐 속 인물들은 노년에도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유대에 대한 욕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안락한 삶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와의 만남이 단절된 채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제공하는 휴식에 안주하는 삶은 건강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거품처럼 터져버릴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이다. 'Some Kind of Heaven'은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라는 영화의 성찰(retrospection)적 측면을 제공한다. 이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언젠가 다가올 노년의 날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진 출처: variety.com    

부자 애인을 만나는 것이 꿈인 Dennis


노년의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Barb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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