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LA 폭동을 다룬 두 편의 다큐:


LA 92(2017), Daniel Lindsay and T. J. Martin, 러닝 타임 114분
Let It Fall: Los Angeles 1982-1992(2017), John Ridley, 러닝 타임 144분(TV 방영 버전은 1시간 30분으로 축약됨)



1. 폭동의 기원: 1965년 와츠 폭동, 대릴 게이츠, LA 경찰

  2017년은 'LA 폭동(1992 Los Angeles riots)'이 일어난지 25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에 폭동을 다룬 2편의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존 리들리의 'Let It Fall'은 당시 LA 주민들과 경찰들, 사건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와 영상 자료들로 엮어졌다. 원래 ABC방송사에서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존 리들리가 폭동에 대한 다큐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사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LA 92'는 자연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National Geographic에서 만들었다. 이 다큐는 철저히 영상 자료와 사진,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자막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Let It Fall'에는 감독 존 리들리의 제작자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이 되었다. 그와는 달리 'LA 92'는 영상 연대기적 보고서와 같은 정밀함과 객관성을 보여준다.  
 
  1991년 3월 3일, 신호 위반으로 경찰 검문을 받던 흑인 로드니 킹은 백인 경찰들에게 무차별적인 구타를 당한다. 당시 길 건너편에서 홈비디오로 그 장면을 찍은 이가 있었다. 구타 장면이 방송을 타고 전해지면서 사건의 파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3월 16일에는 이른바 두순자 사건이 일어났다. 주류점을 운영하던 한인 교포 두순자는 흑인 소녀 라타샤와 시비 끝에 총격을 가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된 두순자는 징역형이 아닌,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판결을 내린 백인 여판사는 인종간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판결은 폭동의 주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들도 재판에 넘겨졌다. 1992년 4월 29일은 바로 그 재판의 평결이 나오는 날이었다. 3명의 백인 경찰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날 오후부터 South Central 지역을 중심으로 폭력과 약탈, 방화가 시작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폭동으로 기록될 사건의 시작은 그러했다.

  존 리들리는 폭동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982년부터 LA 시의 주요한 사건을 훑는다. LA는 결코 평화로운 도시는 아니었다. 마약과의 전쟁은 당시 레이건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정책이었다. LA와 같은 대도시는 바로 그 주요한 대상이었다. '천사들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LA는 마약과 갱단들의 폭력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78년부터 LA 경찰국의 수장이 된 Daryl Gates는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하는 폭압적인 검문 검색, 습격 작전을 펼쳤다. 경찰의 공권력 행사와 관련된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긴장과 불만이 높아졌다. 리들리는 이 폭동의 주요한 원인 제공자로 대릴 게이츠를 비중있게 부각시킨다. 시의회에서의 증언, TV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보이는 게이츠의 언행은 고압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당신들이 대체 LA의 범죄 문제에 대해 무얼 안다는 거지? 할 수 있다면 나만큼만 해봐'. 게이츠는 이런 식의 대답으로 뻣덴다.

  게이츠가 이끄는 LA 경찰은 흑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하고 준군사 조직의 작전을 수행했다. 'Let It Fall'은 경찰 내부에 만연한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진압, 훈련 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이 점은 'LA 92'도 동일한 관점을 취한다. 그런데 이 다큐는 폭동의 기원을 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본다. 1965년, LA에서 발생한 'Watts riots'. 음주 운전 혐의로 검문을 받던 흑인이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그 일로 흑인들의 시위와 대규모 폭력 사태가 촉발되었다. 후에 경찰국장이 될 대릴 게이츠도 당시 수사관으로 사건을 조사했다. 그의 엄혹한 경찰 병력 운용 방식은 바로 그런 경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인종 폭동인가, 계급 폭동인가?

  LA 시의 고질적인 마약과 폭력 범죄 문제, 경찰 공권력의 과도한 집행은 1992년에 터질 폭동의 원재료들이었다. 거기에 1991년에 일어난 로드니 킹 사건, 두순자 사건이 더해졌다. 'LA 92'는 4월 29일부터 5월 4일에 이르는 폭동의 과정을 TV 생중계 화면과 다양한 비디오 촬영 자료들을 가지고 시간순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폭동의 현장에서 찍은 화면들은 거칠게 흔들리고, 때로 촬영자가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화면이 중간에 끊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찍은 화면 속에서는 문명화된 선진국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무법천지의 상황이 벌어진다.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며, 차량 운전자들을 공격한다. 그 지옥도의 풍경 속에서 대체 경찰은 어디 있단 말인가?

  폭동이 시작된 4월 29일부터 LA 경찰은 그 어떤 통제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저녁, 주에는 비상 사태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주 방위군과 군 병력이 투입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미 사임이 예정된 게이츠는 사태를 수수방관했고, 경찰들은 몸을 사렸다. 하층 흑인들의 주거지와 한인 상가가 밀집한 South Central은 폭동의 진앙지였다. 한인 교포들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총기로 무장한 한인 자경단이 뉴스에 등장한다. 당시 뉴스 화면 속에서 비춰지는 자경단의 모습에서는 미국 주류 언론의 삐딱한 시선이 느껴진다. 공권력 부재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한인 커뮤니티의 대응이 과도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높은 실업률과 빈곤에 시달리는 하층 흑인들에게 폭동은 계급적 좌절과 분노의 분출구였다. 일부 학자들은 LA 폭동을 인종 폭동이 아닌 '계급 폭동'으로 보기도 한다. 흑인들보다 좀 더 나은 경제적 위치에 있었던 한인 교포와 가게가 폭도들의 주요한 약탈과 방화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시카고를 비롯한 대도시에 일어난 흑인 폭동도 어떤 면에서는 순수한 인종 갈등에서 야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대이주(Great Migration, 1916-1970)'를 통해 흑인들은 차별이 극심한 남부에서 미 중서부, 북부 대도시로 이주했다. 그 지역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했던 백인들에게 새로운 흑인 이주민의 유입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갈등을 불러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1992년의 LA 폭동은 흑인들의 경제적 박탈감이 한인 교포들에게 파괴적으로 투사되었다.

  'Let It Fall'의 감독 존 리들리는 폭동과 그 여파를 매우 인종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두순자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는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또한 다큐는 끝무렵에 나오는 자막에서 폭동의 주요한 희생자가 흑인들이었다고 밝힌다. 흑인 감독으로서 그는 LA 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의 축적된 분노가 필연적이며,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측면임을 강조한다. 편향된 시각의 그의 다큐는 왜 흑인들이 무지막지한 폭력 대신에, 올바른 정치적 소통의 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어떤 식으로든 폭동을 일으킨 흑인 커뮤니티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대해 'LA 92'는 폭동이 일어나기 전, 흑인 사회 내부에서 폭동을 부추기는 잘못된 메시지들이 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저항을 촉구한다. 의회에 진출한 흑인 의원들, 그리고 당시 LA시의 흑인 시장 톰 브래들리까지 재판의 부당함을 외치며 인종적 분노의 임계점을 끌어올렸다. 그런 상황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사법 체계와 정부로 향해야할 정의에 대한 목소리는 좀 더 손쉬운 희생양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한인들은 흑인들이 분노를 쏟아낼 만만한 공격 대상이었다.


3. 폭동이 남긴 것

  "This is America!"

  비쩍 마른, 흰머리가 성성한 중년의 교포 여성은 불에 탄 자신의 가게를 가로막고, 악에 받혀 폭도를 향해 외친다. 가게 안은 이미 불에 타버렸으며 약탈당했다. 그런데도 폭도들은 더 가져갈 것이 없나 하고 몰려온 상태다. 무리들 가운데 더러는 웃는 사람도 보인다. 모든 것을 잃은 이 한국 교포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그 나라는 1992년의 그 폭동에서 재산도,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폭동은 군 병력이 투입되면서 진정세에 접어들었다. LA 전역에는 해질 무렵부터 새벽까지 통금이 내려졌다. 방화로 화염에 휩싸였던 한인 타운의 화재 대부분은 진압되었다. 로드니 킹은 울면서 기자 회견을 했다. 이제 멈추어야 할 때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정의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흑인들의 분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폭동으로 끝났다. 63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2300명이 넘었다. 경제적인 피해는 무려 1조 달러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그 피해액수의 대부분은 한인들의 자산이었다.

  폭동의 여진이 가라앉자 비로소 흑인 커뮤니티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빗자루를 들고 거리 청소에 나선다. 그 모습에서 즐겁고 신나게 상점을 약탈하던 폭도들의 이미지가 기이하게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흑인들은 평화와 정의를 외치는 행진을 시작했다. 한인 교포들 또한 시내 중심가를 행진하는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고 실행했다. LA 폭동이 한인 커뮤니티에 남긴 가장 큰 깨달음은 바로 그들의 뜻을 대변할 '정치적 세력'의 필요성이었다.

  'LA 92'의 마지막은 1965년의 와츠 폭동과 1992년의 LA 폭동을 교차 편집한 화면이다. 다큐는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듯 하다. 과연 인종 폭동은 1992년의 LA에서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노예제와 인종 차별. 그러한 인종 문제는 구조화된 빈곤과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나간 역사에서 과오를 들여다 보고 성찰하는 이들은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30년이 지났음에도 LA 폭동을 다룬 두 개의 다큐는 진중하고 깊이있는 울림을 가진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LA 폭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Gook(201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la-justin-chon-gook2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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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의 서울 캠프가 Benson Lee에게 남긴 것, Seoul Searching(2015)
 


  1986년 여름, 김포 공항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선다. 튀는 외모와 행동으로 공항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그들. 시드와 그레이스, 크리스는 미국, 세르히오는 멕시코, 클라우스는 독일에서 왔다. 그들을 서울로 오게 만든 여름 캠프의 이름은 이름하여 '재외교포 하계 학교'. 1973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해외 교포 자녀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되었다. 초창기에는 4백 명 정도였던 인원은 1986년에는 2천 백 명에 이르렀다(1986년 중앙일보 기사 참조). 영화 '서울 캠프 1986(Seoul Searching, 2015)'의 감독 Benson Lee는 1986년 참가자였다. 그는 당시의 기억에 상상력을 보태어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캠프 참가자들의 면면은 다채롭다. 펑크 록 가수 Sid Vicious를 흉내낸 반항적인 시드 박(Justin Chon 분), 바른 생활 사나이 클라우스, 유들유들하고 구수한 스페인식 영어를 구사하는 세르히오. 날라리 같은 옷차림에 술 잘 마시는 그레이스, 태권도 실력이 뛰어난 수진, 냉소적으로 캠프 참가자들을 바라보는 크리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외국 교포 청년들이 주최 측의 1980년대 한국식 통제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한밤중에 여학생 방에서 미팅 하기, 술 마시고 널브러지기, 그 와중에 눈맞아 연애하기 등등... 영화는 초반부 에피소드들을 전형적 청춘물의 클리셰로 처리한다.

  아마도 그렇게만 이야기가 흘러갔다면, 이 영화는 가벼운 코미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Benson Lee는 차차 조금씩 캐릭터들의 속내를 펼쳐서 보여준다. 교포 청년들에게 한국은 모국이 아니라 부모의 나라일 뿐이다. 세르히오는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김 선생의 질문에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김 선생은 질문을 바꾸어 이렇게 묻는다. 멕시칸의 의미를 말해달라고 하자 세르히오의 말문이 터진다. 서예 시간에 한국 이름을 붓글씨로 쓰라는 교사의 요구에 크리스는 한국 이름이 없다고 답한다. 크리스는 '입양아' 출신이었다. 시드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거의 말도 하지 않는다고 김 선생에게 털어놓는다. 씩씩한 태권도 아가씨 수진이 어머니와 미국으로 간 것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캠프에 왔을까? 어떤 이는 정말로 부모의 나라가 궁금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저 놀러 왔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울 캠프'에서 결국 마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크리스는 생모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긍정할 힘을 얻는다. 클라우스는 크리스를 도우면서, 자신의 부모가 치룬 희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상처를 지닌 수진은 세르히오에게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발견한다.

  주연 배우들이 대부분 한국계이고, 거의 모든 대사가 영어이며, 한국에서 촬영한 'Seoul Searching'은 미국 영화일까, 한국 영화일까? 영화는 그 두 나라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 흐르는 음악은 마돈나의 노래를 비롯해 1980년대 미국 팝송이다. 부친이 한국인인 주연 배우 Justin Chon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은 Korean American이 아니라 Asian American의 정체성을 가지고 연기한다고 밝혔다.

  '서울 캠프'를 주관했던 우리나라 정부는 교포 청년들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가길 바랬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참가자들에게 그 바람이 실현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Benson Lee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기억의 한 조각, 생각과 느낌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남았다. 그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어설프며, 전형적인 청춘 코미디 영화에 '민족적 정체성'과 '성장 서사'를 끼얹는다. 이 영화가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Seoul Searching'에는 생기가 넘쳐흐르며, 교포 2세가 바라본 1980년대 한국에 대한 문화적 성찰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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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화면 속에서 가게는 불타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흑인 소녀는 팔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다. 영화 'Gook'은 그렇게 기이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그 장면이 지나가고 나서 관객이 만나는 인물은 한국계 미국인 일라이이다. 한적한 길가에서 그는 이제 막 신발 도매상으로부터 물건을 넘겨받으려는 참이다. 그런데 멀리에서 차 소리가 들린다. 뭔가 당황한 일라이는 물건 받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한다. 지나가는 일라이를 보더니 차에 탄 남자들이 욕설을 퍼붓는다. 일라이는 다소 겁에 질린 표정이지만, 그래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한다. 차에서 내린 히스패닉 남자 둘은 일라이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자리를 뜬다.
 
  1992년 4월 29일, 그날은 그동안 미뤄졌던 로드니 킹 사건의 평결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LA는 폭력과 방화가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장소가 되었다. 한국계 미국인 Justin Chon은 바로 그 LA 폭동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배우로도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일라이 역을 연기했다. 그의 아버지도 영화 속 김씨 아저씨로 나온다. 이민자인 그의 부친은 실제로 신발 가게를 하기도 했었다. 영화 'Gook'은 여러 면에서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셈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일라이는 아무 이유없이 히스패닉에게 구타당한다. 그의 동생 다니엘 또한 길을 걷다가 흑인들에게 얻어맞고 신고 있던 운동화를 뺏긴다. 이런 장면들은 당시 LA의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인종 차별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라이가 히스패닉을 마주할 때, 다니엘이 흑인들을 지나칠 때, 그들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에게 생길 일들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제목 'Gook'은 아시안계 미국인들을 폄하하며 지칭하는 단어이다. 누군가 일라이의 차에 스프레이로 써놓은 그 글씨는 당시 LA에서 한인들이 처한 열악한 인종적 지위를 보여준다. 다른 유색 인종에게 언제든, 별 이유없이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 Justin Chon은 폭동 그 자체보다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적대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데에 주력한다.  

  일라이와 다니엘은 외진 변두리에 자리한 신발 가게를 꾸려가느라 분투한다. 가게에는 흑인 소녀 카밀라가 들러서 일을 돕는다. 이 11살 카밀라한테만은 팍팍한 표정의 일라이도, 툴툴거리고 제멋대로인 다니엘도 다정하게 대한다. 심지어 그 둘은 길 건너편 주류점 주인 김씨가 카밀라가 물건을 훔쳐갔다고 하자 욕설을 퍼붓으며 살벌하게 몰아세운다. 카밀라는 가게를 제집처럼 드나들지만, 카밀라의 오빠 키스는 이 가게 형제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썹을 치켜뜬다. 마침내 시내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키스는 친구들과 함께 일라이의 가게를 약탈할 계획을 세운다.

  왜 흑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의 무죄 평결에 대한 분노가 한인들에게 쏟아졌는가? 폭동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축적된 분노와 불만의 출구가 한인들을 향하도록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LA 경찰들은 일련의 폭력과 방화를 방조했으며, TV로 생중계된 화면 속 공권력 부재 현장은 약탈자들에게 일종의 '신호(signal)'가 되었다. 시의 경찰 병력은 백인 부유층 거주지로 가는 진출입로는 철저히 막았지만, 약탈 대상이 된 한인 상점가 밀집 지역에서의 출동 요청은 묵살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인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자경단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속에서 김씨 아저씨는 자경단의 일원으로 순찰을 돌다가, 얻어맞고 길을 헤매는 다니엘을 태워준다. 그의 차 안 무전기에서는 교신하는 한인들의 한국말이 흘러나온다. 김씨는 한국어로, 다니엘은 영어로 계속 말하는 대화 속에서 관객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이들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김씨는 형제의 부친과 친구 사이였다. 이민 1세대와 2세대가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장면은 서글픈 울림을 준다.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일라이도 한국말을 하는 김씨에게 영어로만 말한다. 이러한 세대 간 언어 장벽은 이민자 2세대들의 정체성이 '한국인'이 아닌, 'Asian American'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다니엘이 힙합 뮤지션이 되기를 꿈꾸며 노력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영화 'Gook'에서 1992년 LA 폭동 사건은 거친 배경적 윤곽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감독 Justin Chon의 영리한 책략이기도 하다. 사건의 실체에 대해 섣부르게 접근하는 대신, 그는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폭동에 대한 미시사적 사유를 시각화한다. 카밀라가 일라이와 다니엘 형제의 이복 여동생이라는 점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카밀라의 존재는 흑인과 한인 이민자들이 서로 연결된 가족 공동체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 두 집단이 갈등과 대립이 아닌 공존을 모색해야하는 동반자여야 한다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카밀라가 비운의 사고로 죽자 일라이는 스스로 자신의 가게에 불을 지른다. 이제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 갖는 의미가 명확해진다. 이미 숨을 거둔 카밀라가 화염에 휩싸인 일라이의 가게 앞에서 추는 춤은 '죽음의 무도'로 형상화된 LA 폭동이다.

  LA 폭동에 대한 좀 더 실제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관객들에게 영화 'Gook'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PBS의 5부작 다큐멘터리 Asian Americans(2020)의 'Episode 5 - Breaking Through(1980s-2010s)'는 그 사건에 대한 개관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또는 그것을 다룬 영화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 거기에는 왜곡과 오류가 포함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오히려 그런 기대를 갖기 보다는, 그런 영화들을 마중물로 삼아 책을 비롯한 다른 매체들로 탐구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낫다. 'Gook'은 나에게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LA에서 일어난 일들을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감독 Justin Chon의 이 영화는 작지만 의미있는 표지판처럼 여겨진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한국계 미국인 감독 앤드류 안(Andrew Ahn)의 영화들, Spa Night(2016)와 Driveways(201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ndrew-ahn-spa-night2016-driveways2019.html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Minari, 2020)'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minari-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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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니스는 어떤 사람이죠?"
  "그가 누군지 넌 잘 알고 있잖아?"
  "난 아직도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요."

  인터뷰를 위해 엄마의 집을 찾은 아들 Bing Liu는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데니스는 그의 계부였다. 그는 계부가 자신을 자주 때린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엄마에게 묻는다. 이젠 다 지난 일이잖니, 엄마는 이야기를 돌리려 애쓴다. 이 다큐, 시작은 스케이트보드 신나게 타는 어린 친구들을 보여주더니 어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뭔가 심각해진다. 중국계 미국인 Bing, 백인 하층민 Zack, 흑인 Keire, 이 세 친구는 나이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스케이트 보드 하나로 친구가 되었다. 다큐 'Minding the Gap(2018)'은 세 친구가 어른의 삶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변화를 담는다.   

  스케이트보드로 자유롭게 거리를 질주하는 일은 즐겁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Zack은 여자친구 니나의 갑작스런 임신으로 덜컥 애아빠가 된다.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전전하는 Zack, 그런 변화에 적응하기가 영 쉽지 않다. Keire는 음식점 서빙일을 하며 진로를 모색하는 중이다. Bing은 14살 때부터 만져온 카메라로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다. 그 과정에서 Bing은 친구들의 상처와 마주한다. 성장 과정에서 계부의 폭력을 경험했던 Bing처럼 Zack도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고 고백한다. Keire도 마찬가지. 그들이 살고 있는 일리노이주의 도시 Rockford는 오랜 경기 침체로 낙후된 곳이다. 또한 높은 범죄율로 늘 불안과 폭력이 공존한다. 그곳에서 세 친구가 경험한 가정 폭력과 가난.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아마도 스케이트보드는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세 친구는 '남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거멀못과 같이 내면을 옥죄고 있는 어그러진 남성성과 마주한다. Zack은 아이 아빠, 남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심지어 니나에게 폭력을 휘두른 정황도 포착된다. Keire는 세상을 뜬 아버지가 남긴 학대의 상처와 함께 흑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것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Bing은 모친을 인터뷰하면서 가정 폭력이 남긴 어둡고 긴 그림자와 대면한다. 다큐는 마치 그 세 친구들을 위한 영상 치료 같다. 그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치유와 독립의 여정이 시작된다.

  다큐 'Minding the Gap'은 세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하층 계급 내에서 순환되는 폭력과 상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인종 문제도 살짝 접혀져 있다. Keire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대부분의 백인 친구들과 흑인인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얼핏 내비친다. 물론 백인이라고 해서 미국 사회 주류에 모두 다 들어가는 건 아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가 'Asian Niggers, White Niggers'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들은 함께 웃는다. 감독 Bing Liu는 다큐를 만들고 나서 Zack이 트럼프 지지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chicagotribune.com과의 인터뷰 참조). 백인 하층민,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을 가진 Zack과 같은 이들에게 트럼프의 정치적 수사학은 잘 먹혀들었다. 하층 백인들에게 유색 인종들과의 연대나 동일시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Bing Liu는 비주류 청소년들의 성장담에 '스케이트보드'라는 독특한 소재를 결합시켰다. 그 자신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촬영한 영상은 Parkour(도시의 지형 지물을 이용한 신체적 이동 기술) Skateboarding의 속도감과 질주감을 선사한다. 그러한 배경 화면 속에 다큐는 제목처럼 인종과 계층, 폭력과 가난이라는 사회적 간극을 성찰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다큐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세 명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아기가 제법 의젓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Zack은 니나와 아이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린다. Keire는 덴버에서 일자리와 프로 스케이트보더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찾았다. 그리고 Bing은 스케이트보드 말고 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소질을 발견했다. 'Minding the Gap'은 그런 그가 카메라로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들려주는 목소리인 셈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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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on Zürcher의 영화적 수수께끼, The Strange Little Cat(2013)
 


 시작은 'www.lecinemaclub.com'에서 본 이번 주 상영작 'Reinhardtstrasse(2009)'에서부터 였다. lecinemaclub은 단편을 위주로 다양한 영화들을 일주일에 한 편씩 선정해서 무료로 상영한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젊은 영화 창작자들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꼭 챙겨 본다. 상영작들은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고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라인하르트 거리'도 그러했다. 러닝타임 34분 동안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드는 희한한 영화였다. 그러고 나서 어쩌다 고른 영화가 'The Strange Little Cat(2013)'. 이 영화도 기이했다. 그런데 기막힌 우연으로 그 두 작품을 만든 이는 '라몬 취르허'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양이가 식당 밖에서 닫힌 문을 긁고 있다. 그런데 여자 아이의 괴성이 들린다. 이 집의 막내딸 클라라가 내는 소리이다. 아무도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관심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엄마 제니는 식탁에 앉아있는 클라라를 바라본다. 이 가족, 정말 뭔가 이상하다. 엄마 제니는 얼마 전 영화관에서 겪었던 황당한 일을 이야기한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이야기에서 제니는 옆자리의 낯선 남자가 자신의 발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마 제니의 말에 남편을 비롯해 큰딸 카린도 무덤덤하다. 제니는 밥먹는 고양이 머리를 눌러버리려는 것처럼 천천히 발을 내리려다가 큰딸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다. 도대체 이 영화, 장르는 무얼까...

  영화의 초반부에서부터 관객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소리'임을 알아챈다. 개수대 옆에서 혼자 저절로 돌아가는 빈병이 내는 기괴한 소리, 커피 머신의 굉음, 그 소리에 반응하는 클라라의 괴성,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소리,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모형 전동 비행기가 작동하는 소리... 그런 사물들이 내는 소리는 인물들의 대화에 계속해서 틈입하며 때론 대화를 중단시킨다. 사실 이 가족이 나누는 이야기는 대화라기 보다는 '독백'에 가깝다. 제니의 영화관 이야기처럼 가족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하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엄마 제니는 감독자 내지는 방관자처럼 가족을 바라본다.

  집에는 방문자들이 계속 들어온다. 고장난 세탁기를 고치러 제니의 오빠와 조카가 온다. 나중에는 제니의 노부모가 식사를 하기 위해 집에 온다. 그렇다면 가족 영화인가? 이 특이한 가족 영화에는 따뜻한 관심, 애정, 소통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라몬 취르허는 프레임 안에 인물을 가두고 대화와 소리가 프레임 밖에서 흐르도록 만든다. 이 영화에서 소리가 내러티브의 주요한 요소인 것처럼 사물도 그러하다. 티백이 넣어진 찻잔, 주방의 흰벽에 붙어있는 나방, 플라스틱 병들이 담겨진 천가방,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세탁물, 담배곽, 노란공... 그렇게 사물들을 비추는 싱글 쇼트들이 영화 중간중간에 들어간다. 인물, 대화, 소리, 사물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이 영화는 마치 정교하게 구성된 서커스를 보는 느낌이 든다.   

  'The Strange Little Cat'은 결코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영화가 아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기괴하고 난해한 실험 영화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많은 비평가들에게도 이 영화는 다소 골치아픈 숙제처럼 여겨졌다. 취르허가 첫 장편으로 내놓은 이 영화를 분석하기 위해 카프카를 비롯해 영국의 현대 극작가 해롤드 핀터(
Harold Pinter, 1930-2008)까지 동원되었다.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로 본다면 핀터의 'Dumb Waiter'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취르허 자신은 카프카의 '변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짧게 언급했다. 우리는 커다랗고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를 기억한다. 가족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카프카의 부조리하고 초현실주의적인 소설 속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이다.

  취르허가 만들어낸 이 독특한 가족들도 식당과 비좁은 복도, 방들을 오가며 이야기를 하고 시선을 맞추지만 결코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소통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닫혀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억압된 분노와 적대감이 느껴진다. 그러한 단절 속에서 검정색 개, 그리고 영화의 제목을 당당하게 차지하는 노랑색 고양이도 분투한다. 개와 고양이는 닫힌 문을 긁고, 비우호적인 가족들 사이를 오가며, 때로 내쫓김을 당한다. 이 집에서 파생되는 관계의 불협화음은 수시로 제시되는 짧은 테마곡 'Pulchritude'의 분위기와 일치한다. 

  취르허는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첫 관람에서 놓친 부분을 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출처 cineuropa.org와의 인터뷰). 아니, 이 괴상한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보라고? 그런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시 영화를 보았을 때, 이 감독이 세밀하게 설계한 이미지와 소리의 세계가 나의 눈에 비로소 들어왔다. 심지어 단편 'Reinhardtstrasse(2009)'를 한 번 더 보았다. 이 단편에는 '이상한 작은 고양이'로 나아가기 위한 취르허의 청사진이 들어있다. 떠나는 룸메이트(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음)를 위해 세 명의 친구들은 작별 파티를 준비한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들은 계속 끊기고, 다양한 소리와 사물들이 유기적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이상한 작은 고양이'를 보고 나면 이 단편은 더 쉽게 이해된다.

  때로 어떤 영화는 '좋거나/나쁘거나'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라몬 취르허의 영화는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 기이한 매혹을 선사한다. 그것을 느끼려면 다소 번거로운 탐색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취르허가 낸 수수께끼들을 푼 관객들은 영화적 발견의 기쁨 누린다. 나는 그의 2021년작 '소녀와 거미(The Girl and the Spider)'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단편 'Reinhardtstrasse(2009)'는 이번 주 동안 lecinemaclub.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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