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다소 혼란스러운 도입부로 시작한다. 어린이집 교사인 앤은 부산스러운 애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앤의 모습과 교차 편집된 장면은 절친의 'Bachelorette Party(결혼을 앞둔 신부와 친구들이 하는 파티)'로 스카이다이빙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헝클어진 금발머리처럼 앤의 표정이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들뜨고 불안정해 보인다. 캐나다의 감독 Kazik Radwanski의 2019년작 'Anne at 13,000 Ft.'은 불안한 젊은 여성의 삶을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존 카사베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핸드 헬드 카메라는 시종일관 거칠게 흔들린다. 관객은 그 화면 속 앤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곧 알아챈다. 앤은 뜨거운 커피는 아이들에게 위험할 수 있으니 치우라는 동료 교사의 충고를 받는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앤은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고는 컵을 상대방에게 던진다. 동료 교사는 질책하지만, 앤은 빈 컵을 보여주려는 것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런가 하면 친구의 결혼식에서는 축사를 하다 말고 울어버린다.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에서 하층 계급 여성의 내면을 옥죄는 알콜 중독은 이 영화에서 조울증으로 대체된다. 앤은 친구의 결혼 피로연에서 진창 퍼마시고는 화장실에서 구토하고 주정한다. 이는 카사베츠의 'Husbands(1970)'에 나오는 친구들의 화장실 구토신과 닮았다. 어쩌면 감독 카직 라드완스키는 카사베츠 덕후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사베츠의 즉흥적이고 자연적인 연출 방식도 흉내낸 것일까? '13,000 피트의 앤'에서 라드완스키는 출연자의 일상을 계속 따라잡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카메라처럼 앤의 모든 것을 근거리에서 담아낸다.    

  집을 얻어 이제 막 독립한 이 젊은 여성의 삶은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다. 결혼 피로연에서 만나 사귀게 된 매트와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매트를 엄마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느닷없이 약혼자라고 말한다. 매트는 어떻게든 앤을 도우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보육원에서도 아이들을 보살피는 교사라기보다는 매우 불안해 하는 어른 아이 같다. 앤의 근무 태도는 동료들과 상사에게 비판받는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 지나친 자기 중심성, 기이한 유머 감각, 앤의 모든 것은 정상에서 벗어나 있다.

  카사베츠가 정서적 불안정성을 계급 문제와 결합시켜서 보여주었다면, 라드완스키는 오로지 젊은 여성의 내면에만 집중한다. 아이들을 보살피던 앤이 갑자기 압도되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드러누워 버릴 때, 관객은 이 여성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좋은 동료, 걱정하는 엄마, 이해심 많은 남자 친구, 그 누구도 앤을 도울 수 없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약물 처방을 받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앤은 하늘로 향한다.

  스카이다이빙이 앤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자의식 과잉의, 감정의 양극단을 오가는 앤의 모습은 입안의 돌가루처럼 서걱거린다. 냉소적인 관객이라면 '그래서 뭐 어쩌라구?', 하고 반문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심드렁하게 러닝타임 75분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긴장된 표정의 앤은 맨 마지막 순서로 낙하한다. 카메라는 텅 빈 비행기 안에서 앤이 사라진 창공을 응시한다. 하강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앤의 불안정한 내면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기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13,000피트 고도의 압력을 떠안고 시도하는 스카이다이빙처럼, 앤은 불확실한 삶의 여정을 향해 뛰어든다. 나는 비로소 이 젊은 여성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존 카사베츠의 영화 '남편들(Husbands, 197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husbands1970-melancholia2011-national.html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glenn-miller-story-1954-too-late-blues.html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 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opening-night-19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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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몬태나(Hostiles)'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영화 'Hostiles(2017)'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892년은 이제 인디언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이다. 이미 1890년 12월에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로 250여명의 라코타족이 죽었고, 남은 부족민은 황량한 보호구역에 유폐되었다. 영화의 주인공 블로커 대위(크리스찬 베일 분)는 오랫동안 인디언 전쟁의 제일선에 있었던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서로 대립하는 집단이 같은 방식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양상을 마주한다. 로잘리의 가족을 습격한 코만치 인디언은 활과 총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칼로 머리가죽을 벗긴다. 인디언 소탕 작전에 나선 블로커는 여자와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가혹하게 잡아들이고 그들을 짐승 취급한다.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에는 오직 적의(hostile)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 질기고 오랜, 피비린내 나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영화는 처참한 전쟁의 뒤안길을 응시한다. 로잘리의 가족을 도륙한 코만치 인디언들처럼 블로커가 속한 미 연방군 또한 도살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블로커에게 오직 처단해야할 적으로 상정된 인디언들은 죽거나 보호구역으로 보내져 더이상 찾기도 어렵다. 오랜 세월을 군에 몸담아온 블로커가 퇴역을 결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 때 그의 부대원들에게 가차없는 죽음을 안겼던 추장 옐로우 호크도 늙고 병들었다. 그럼에도 블로커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인디언들에 대한 적의가 들끓는다.

  추장 옐로우 호크를 부족의 땅 몬태나에 데려다 주는 여정은 블로커에게는 어려운 시험과도 같다. 마음으로는 추장과 일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지만, 상부의 명령을 어기면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퇴역 연금도 없다. 인디언들에게 가족을 잃은 로잘리가 갖게 된 적의는 어떤 면에서는 블로커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보낸 그였지만 부대원들의 죽음만큼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옐로우 호크에게 블로커가 갖게 된 처절한 증오는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 로잘리의 고통에 블로커가 연민과 공감을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감독 Scott Cooper는 그 지점에서 평화와 공존을 말하고 싶어한다. 블로커 일행은 로잘리 가족을 죽였던 코만치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고, 어렵사리 그들을 물리친다. 거기에는 추장 일가의 도움이 있었다. 여정이 거듭될수록 블로커와 추장 사이에는 이해와 연대의 감정이 생겨난다. 마침내 블로커가 몬태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추장의 시신을 기꺼이 부족의 땅에 매장해주려고 한다. 블로커는 그 땅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매장을 허락하지 않은 백인 목장주와 목숨을 건 혈투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나면 영화가 꽤나 감동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그럴듯한 수정주의 웨스턴에는 헛점이 있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오류가 눈에 띈다. 일행이 몬태나로 향하는 여정에서 로잘리와 추장의 딸, 그리고 며느리는 모피 상인들에게 납치당해 몹쓸 일을 당한다. 미국의 모피무역은 1800년대 초반에 매우 흥했다가 1830년대에 끝물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1890년대의 서부에 등장하는 모피 무역상들은 정말이지 뜬금없다.

  거기에 덧붙여, 'Hostiles'는 역사적 과오를 피해자-가해자 구도의 개인적 차원으로 바라보는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다. 블로커와 인디언 전쟁을 함께 해온 동료 메츠는 살상의 기억으로 내면이 망가진 인물이다. 그는 추장 옐로우 호크에게 참회의 뜻을 전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미국 정부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던 인디언 절멸의 책임은 그렇게 참전 군인의 윤리적 고통과 죽음으로 해소된다. 원주민 일가족을 잔혹하게 학살한 블로커의 예전 부대원 윌스의 죽음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로잘리는 추장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어린 리틀 베어와 함께 떠난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블로커는 발길을 돌이켜 기차에 오른다. 인디언 부족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던 연방군 블로커, 가족을 인디언에게 모두 잃은 로잘리, 백인들에 의해 부모가 죽은 리틀 베어. 피와 고통의 기억도 함께 실은 기차는 서서히 멀어진다. 어쩌면 그 기차가 향하는 곳은 목적지 시카고가 아닌 그들이 살아갈 새로운 20세기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해소되지 않은 적의가 미국의 현대사에 선명하게 스며듦을 보여주는 묵시적 예언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다룬 PBS 8부작 미니 시리즈 Ken Burns: The West(199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pbs-8-ken-burns-west1996-8.html


***수정주의 웨스턴 Hombre(1967)와 Valdez Is Coming(197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hombre1967-valdez-is-coming1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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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과도 같은 순간,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2021)'


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2021)

조지아어 표기 제목 რას ვხედავთ როდესაც ცას ვუყურებთ?

Alexandre Koberidze, 러닝타임 2시간 30분



  영화는 하교하는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끌벅적하던 교문 앞은 어느새 텅 비어있다. 참새 한 마리가 잠깐 땅에 내려앉았다가 사람의 발소리에 놀라서 날아간다. 남자와 여자의 다리 부분만 보이는 쇼트에서 두 사람은 서로 부딪힌다. 여자가 떨어뜨린 책을 남자가 주워서 건네준다. 의대생 리사와 축구 선수 게오르기는 그렇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아, 여기까지만 보면 로맨스 영화겠군,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좀 특이하다. 리사가 늘 다니던 건널목의 나무, 감시 카메라, 빗물받이, 바람은 리사에게 닥칠 악운을 걱정한다. 그들은 리사에게 그것을 경고하고 싶지만 전할 방법이 없다. 다음날 아침, 리사와 게오르기는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눈을 뜬다. 외모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그들이 가졌던 재능마저도 사라진다. 관객은 곧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목소리를 듣는다. 영화 '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2021)'에서 감독 Alexandre Koberidze는 바로 그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를 맡았다.

  밤거리의 카페에서 젊은이들은 즐겁게 담소하며 술잔을 부딪힌다. 그 시각, 리사와 게오르기는 약속한 장소인 카페에 가지만 이미 마법에 걸려 외모가 바뀐 그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약국에서 일하던 리사는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축구부에서 쫓겨난 게오르기는 길거리 공연으로 카페에 손님을 유인하는 일감을 얻는다. 가까운 장소에서 일하는 리사와 게오르기 사이에는 여전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 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걸까? 영화는 두 주인공의 운명에 무심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도시의 사람들과 풍경에 더 오래 머문다. 사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조지아의 유서깊은 도시 Kutaisi이다.

  햇살이 쏟아지는 맑은 날씨에, 사람들은 느긋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다. 도시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개들은 늘 어슬렁거리며 다닌다. 클래식과 전자음으로 조화롭게 구성된 음악은 그러한 풍경에 운율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그런 가운데에 리사와 게오르기의 운명을 바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는 감독과 제작진이 쿠타이시에 온다.

  "이 바보들은 까마귀 Guia A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대들도 까마귀의 얼굴에서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다."
  (These morons have never seen a raven Guia A. thought, but you couldn't notice anything on his face.)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도입부의 이 문장은 조지아의 작가 Reso Cheishvili의 'Guia. A'에서 따왔다.

  "나는 쿠타이시의 시장에서 허브를 팔고 있는 지오콘다를 보았다."
  (Once I saw Gioconda on the market of Kutaisi, she was selling herbs) - Levan Chelidze, 'A story forgotten by all'

  아이들이 신나게 축구 연습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공을 향해 날아간 공이 강물에 떨어진다. 그렇게 2부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글귀도 선문답 같기는 마찬가지. 도시 전체가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이고, 감독의 내레이션은 자장가처럼 계속 이어진다. 이쯤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지루함에 나가떨어질 법도 하다. 그는 도시를 배회하는 몇몇 개들의 성격까지 알려준다. 로맨스 영화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쿠타이시의 시민들과 풍광이다. 학교에서 땡땡이치고 도망치는 아이들, 밤늦게 거리에서 축구경기를 보느라 열광하는 시민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닫혀있는 대문, 흘러가는 강물... 그러니까 이 영화는 쿠타이시에 바치는 감독의 영상서사시인 셈이다.

  주인공이 있고, 사건이 벌어지며,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플롯으로 구성된 전통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2시간 반짜리 수면제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낯선 나라 조지아의 감독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 많은 일들,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 현대인들에게 '성찰'은 쓰기 싫어 미뤄두다 포기한 일기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느리고 소박한 도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새삼 자신과 그 주변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제 선문답처럼 여겨진 영화 속 문장이 이해될 것도 같다. 때론 까마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시장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얼굴에서 삶을 유추하는 일 같은 사소한 순간들이 우리의 삶에는 필요하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평화로운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50초 분량의 무성 영화 '열차의 도착'을 상영했을 때, 그것을 본 관객들이 느낀 감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독 알렉산드르 코베르제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영화적 마법을 선사한다. 도시를 대표하는 연인들 역에 캐스팅된 리사와 게오르기는 나중에 시사회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촬영된 필름 속의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리사와 게오르기가 마법에 걸린 것, 그래서 변신을 하고 기억을 잃는 일, 결국 다시 사랑에 빠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결말. 감독이 내레이션에서 말했듯 그 모든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때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건 신비이며, 아름다움이다. 창작자는 무의미하고 쓸데 없어보이는 현실의 순간을 절개해서 그 틈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빛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영화에는 그런 빛들로 가득 차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아 출신의 영화 감독 작품들 리뷰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영화, 달의 연인들(Les Favoris de la lune, 198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les-favoris-de-la-lune-favorites-of.html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유작, Ashik Kerib(198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ashik-kerib1988-power-of-dog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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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우리 아이가 당신에게 대체 뭐죠? 남편, 아님 아들?"
  (So which is he? A husband or a son?)

  매우 무심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남자의 모친은 중년의 여자에게 묻는다. 남자의 이름은 마틴. 치렁치렁한 긴 머리에 둔중한 체격을 지닌 이십 대 초반의 이 청년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지적 장애에다 정서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다. 정신과 약물 치료도 받고 있다. 엄마에게 마틴은 언제나 수치심과 고통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여자 친구라면서 헬렌을 데려왔다. 엄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누가 봐도 이상한 저 아이가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진다.

  호주 감독 Justin Kurzel의 2021년작 'Nitram'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1996년 4월, 호주 태즈메니아 섬의 Port Arthur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당시 스물 여덟의 Martin Bryant. 무려 35명이 사망한 그 사고로 호주에서는 강력한 총기 규제 법안이 마련되었다. 영화는 마틴 브라이언트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의 삶을 들여다 본다. '범죄자의 심리적 해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Elephant(2003)'와 여러모로 닮았다.

  누가 봐도 좀 모자란 청년 마틴.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폭죽을 터뜨려서 주민들에게 원성을 사고, 동네 꼬마들에게는 놀림거리가 된다. 아버지는 그런 마틴을 말리고 달래느라 버겁다. 어머니(주디 데이비스 분)는 마치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 얼굴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틴은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잔디 깎지 않겠냐고 물어본다. 다들 이 괴상한 청년을 외면하지만 헬렌은 좀 다르다. 한때 배우였다는 이 여자는 여러 마리의 개와 고양이를 가족으로 여기며 산다. 마틴은 곧 헬렌의 일꾼에서 식구가 된다.

  젊은 청년과 중년의 여자. 그들 사회에서 '추방자(outcast)' 같은 존재인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헬렌에게 마틴은 반은 아들, 반은 남편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마틴은 엄마에게 헬렌이 '친구'라고 말한다. 확실히, 그 친구의 존재는 마틴에게 일종의 버팀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계는 광기를 잠재우지는 못한다. 영화는 헬렌의 집 벽에 생긴 큰 균열처럼, 점차 망가지고 무너져내리는 마틴의 내면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광인, 그것도 나중에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의 내면을 묘사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까다롭다. 자칫 잘못하면 범죄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Nitram'은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꽤 능숙하게 해낸다. 관객은 마틴의 내면에서 증폭되어가는 광기를 관찰자적 시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고장난 기계에서 나오는 소음을 듣는 것과도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사운드는 중요한 내러티브적 요소가 된다. 마틴은 집의 외벽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벌들의 웅웅거리는 소리에 매혹된다. 헬렌이 비운의 사고로 죽은 뒤에는 LP플레이어를 오작동시켜서 그 굉음을 듣는다. 수시로 폭죽을 터뜨리고, 아버지의 차에서 미친듯이 경적을 울린다. 마틴이 연주하는 피아노는 불협화음을 낼 뿐이다.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소음에 집착하는 마틴이지만, 그가 견디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 바로 'Nitram', 친구가 마틴(Martin)의 이름 철자를 거꾸로 발음하는 그 조롱의 소리는 참을 수 없다.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것, 그건 마틴이 사회에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헬렌의 죽음을 겪으며 마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진다. 총기를 무지막지하게 사모으며 사격 연습을 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틴의 엄마는 아들의 집을 찾는다.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후 집을 떠나려는 엄마는 집안을 둘러본다. 그 표정은 매우 공허하고 불안하다. 이제까지 아들이 안겨준 괴로움보다 더한 무언가가 찾아올 거라는 직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려는 그 순간에서 멈춘다. 그러한 결말은 사건의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에 대해 영화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마틴 역을 연기한 Caleb Landry Jones의 연기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하다. 말 그대로 미친 연기력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연기로 그는 2021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어떤 경쟁자라도 이 배우를 밀쳐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호주 리뷰어들은 호주식 영어 억양을 완벽하게 구사한 이 미국 배우를 칭찬했다. 여러 다양한 영화에서 조연으로 쌓아온 내공이 마치 잭팟처럼 터진다. 감독 Justin Kurzel에게 어쩌면 자신의 인생작으로 남을 영화, 'Nitram'은 치유되지 못한 광기와 불안이 비극에 이르기까지의 일그러진 궤적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총기 난사범들의 부모를 취재한 다큐 Raising School Shooter(202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barkfors-raising-school-shooter2021.html


***마틴의 모친을 연기한 주디 데이비스 출연작 My Brilliant Career(197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ustralian-new-wave-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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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The Green Knight(2021)'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 이상한 녹색과 죽음의 붉은색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를 그린 그림에 그런 문구가 써져 있다. 그림의 제목은 '이미지의 배신(The Treachery of Images)', 그림을 그린 이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이다. 영화 'The Green Knight(2021)'를 보고서 나는 그 그림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원작은 14세기 Gawain Poet 라는 별칭이 붙은 무명 작가의 장시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이다. David Lowery는 그 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해석이라는 것이 정말로 기괴하다. 원작의 시를 읽은 독자라면 로워리의 이 영화에 'The Green Knight'란 제목을 붙이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를 알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사창가에서 눈을 뜬 한 남자와 만나게 된다.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그는 삼촌이 주관하는 성탄 만찬에 참여한다. 그런데 잔치에 초대받지 않은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Green Knight'라고 불리는 거대한 장신의 남자는 게임을 제안한다. 자신의 목을 베는 기사에게 녹색의 도끼가 선물로 주어지며, 그 기사는 1년 후에 같은 방식으로 참수의 일격을 돌려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원탁의 기사들 모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가웨인이 앞으로 나온다. 그는 그린 나이트의 목을 단칼에 벤다. 놀랍게도 녹색의 기사는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서 웃

으며 성을 빠져나간다.

  이 초반부의 시퀀스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왜 'Green Knight'는 녹색이 아닌가? 시인이 묘사한 기사의 모습은 피부색과 의상을 비롯해 말 그대로 녹색 그 자체이다.

  All of green were they made, both garments and man:
  a coat tight and close that clung to his sides;

  (원문 출처: J.R.R. Tolkien 번역, HarperCollins 출판사)

  남자와 그의 옷은 온통 녹색이었습니다.
  그는 몸을 꽉 조이는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그린 나이트의 색깔은 매우 우중충한 회색에 가깝다. 아주 너그럽게 봐주어서 어두운 녹색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계속해서 원작의 싯귀에서 이탈해 나간다.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약속을 지키는 일은 사실 '죽으러 가는 길'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서 걸어나갈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의 그린 나이트와는 달리 가웨인은 필멸의 인간일 뿐이다.

  가웨인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과 두려움은 그린 나이트를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점점 커져간다. 숲에서 그는 썩어져 해골이 되어버린 시신의 모습을 환영(幻影)으로 마주한다. 운 나쁘게 산적들에게 걸려서는 가진 것을 빼앗기고 겨우 목숨을 건진다. 가는 도중에 버려진 오두막에서는 Winifred란 젊은 여자를 만나는데, 알고 보니 산 사람이 아니라 목이 잘린 유령이다. 유령은 가웨인에게 샘에 던져진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이 여정의 모든 이야기는 원작시에는 없는, 데이비드 로워리의 상상력에서 나왔다.

  성녀 위니프레드(
Saint Winifred)는 7세기 경에 순교한 웨일스의 성인이다. 수도자가 되겠다는 성녀의 결심에 분노한 구혼자는 그 목을 베었다. 위니프레드 성녀의 이야기는 민간에서 전승되다가 12세기에 이르면 영국에 널리 퍼진다. 전설에서 성녀는 은총에 의해 잘린 목이 다시 붙으면서 소생했다. 웨일스의 이 성인전에 '참수' 테마가 있다는 점이 로워리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에서 위니프레드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샘에 뛰어든 가웨인은 물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그 '붉은색'은 예고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불길한 암시이다. 그리고 그는 '해골'을 건져서 나온다.



2. 기사(士) 가웨인과 필부() 가웨인 


  원작에서 가웨인은 길을 떠나기 전에 성안의 여자들이 7년 동안 짠, 정성이 담긴 옷 위에 빛나는 갑옷을 입는다. 그 옷의 색깔은 '붉은색'이다. 시인은 가웨인의 출정길에 생명의 '붉은색'을 입힌다. 그와는 달리 로워리는 가웨인을 죽음의 핏물에 담근다. 이쯤 되면 감독의 데이비드 로워리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그는 14세기 '그린 나이트'의 이야기를 철저히 비틀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도배하기로 결심한다. 원작에서 묘사된 가웨인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 근심하지만 겁쟁이는 아니다. 그런데 로워리는 가웨인을 품위있는 '기사'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애욕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한다. 가웨인은 산적에게 목숨을 애원하며, 위니프레드에게는 잘린 목을 찾아주는 댓가에 대해 묻는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영화 속의 가웨인은 자신을 환대한 영주의 부인과 관계를 맺는다. 원작에서 가웨인은 영주 부인으로부터 세 번의 유혹을 받는다. 그는 두 번은 입맞춤으로, 마지막에는 '녹색 허리띠'를 받는 것으로 기사도를 어렵게 지켜낸다. 영주는 가웨인이 성 안에서 얻은 것과 자신이 사냥에서 얻은 것을 교환하기로 내기를 한다. 가웨인은 두 번의 입맞춤은 돌려주지만, 목숨을 지켜준다는 녹색 허리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원작에서 가웨인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부분은 바로 그 장면이다. 시인은 기사도와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웨인의 내적 투쟁을 우아하고 격조있게 묘사한다.

  로워리에게 시인이 그려낸 가웨인의 내적 여정은 진정성 없는 가식으로 여겨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원작의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의 도끼 앞에서 의연하지만, 영화의 가웨인은 겁을 먹고 도망친다. 그는 성으로 돌아와서 아서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다. 왕녀와의 결혼, 전투에서의 패배, 아들의 죽음...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기사의 거대한 덴마크 도끼(Dane Axe)에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동안, 가웨인의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이었다. 가웨인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고, 기사는 목을 치겠다고 응답한다.

  정말로 가웨인의 목은 잘렸을까? 영화의 이 모호하고 열린 결말은 원작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시인은 녹색의 기사가 가웨인의 목에 약간의 상처를 남기고 목숨을 돌려주도록 만들었다. 그린 나이트는 아서왕의 이복 여동생 모건 르 페이가 가웨인의 기사도를 시험해 보기 위해 마법으로 그 모든 것을 꾸몄음을 알려준다. 이 중세의 기사도 로맨스는 문학의 틀에서 이루어진 이교도 신앙의 기독교적 수용을 보여준다. 굳은 신앙심과 기사도 정신을 지닌 가웨인의 선함은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보답을 받는다. 그와는 달리 로워리는 가웨인에게 직접적인 죽음을 선사한다. 영화가 참수의 일격을 예고하는 그린 나이트의 '말'에서 끝나기는 했어도, 결국 가웨인이 죽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3. 진짜 그린 나이트는 어디에

  영화 'The Green Knight'에서 원작의 플롯, 상징적 의미, 인물들 사이의 관계, 그 모든 것은 뒤틀리고 바뀌었다. 그 점은 영화에서 가웨인을 그린 나이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여우'의 존재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영주는 떠나는 가웨인에게 입맞춤과 함께 살아있는 여우를 선물로 준다. 원작에서 영주가 사냥한 세 번의 사냥감 가운데 마지막이 '여우'였다. 로워리는 가웨인이 영주에게 해야할 입맞춤을 영주가 가웨인에게 하는 것으로, 그리고 죽은 여우는 살려서 가이드로 만들어 버린다(원작의 가이드는 사람이다). 그렇게 영화와 원작은 마치 거울의 이미지처럼 반대의 위치에 자리한다. 14세기 시인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이 영화를 원작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보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14세기부터 전승된 장문의 영시는 그렇게 와닿지도 않는, 케케묵은 고전 문학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로워리는 원작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대신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린 나이트'를 그려냈다. 중요한 것은 원작의 의미를 잘 살려냈느냐일 것이다. 나는 데이비드 로워리의 시도가 그렇게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뇌하는 기사 가웨인의 다층적인 로맨스는 매우 인간적인 필부 가웨인의 허섭스러운 무용담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 글의 처음에 언급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림에 쓰인 문구는 타당하다. 영화 'The Green Knight'는 '그린 나이트가 등장하는 영화'일 뿐이다. 진짜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는 여전히 활자로 된 텍스트 속에서 존재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 '그린 나이트'가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고 느낀다면 데이비드 로워리의 영화적 말발에 매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출처: variety.com   



**그림 출처: en.wikipedia.org   르네 마그리트 The Treachery of Images(1929)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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