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Merry)


  "메리야, 오늘도 한번 나가볼까? 이리 와봐. 아줌마가 옷 좀 입혀줄게."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릅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그 목소리에는 가식이 없는 친절도 담뿍 담겨있어요. 그래서 아주머니의 손님들도 물건을 잘 사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아주머니는 솜이 누벼진 겨울옷을 나에게 입혀줍니다. 빨간색 원단으로 누벼진 내 옷의 가장자리에는 보글보글한 양털이 덧대어져 있어요. 그래서 겨울바람도 잘 막아준답니다. 나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나는 아주머니가 입혀준 옷을 입고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갑니다. 아파트 출입구에는 아주머니의 전동카트가 있어요. 아주머니가 파는 야쿠르트가 있는 카트입니다. 네, 우리 아주머니는 야쿠르트를 배달하고 판매합니다. 아주머니는 새벽 6시쯤에 지점에 가서, 자신의 카트에 물건을 담아 돌아옵니다. 그리고 가족의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7시 반, 아저씨와 아들 형석이가 일어나서 아침을 먹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시금치 된장국과 계란말이, 엊그제 손님이 김장했다면서 건네준 겉절이군요. 아주머니는 내 밥그릇에도 사료를 부어줍니다. 오늘 먹을 물도 새로 갈아주고요.

  "오늘은 바람도 그렇게 불지 않고, 낮에도 그리 춥지 않대. 밖에서 지내기 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는 초록색의 예쁜 목줄을 나의 목에 조이지 않게 묶어줍니다. 아주머니는 작은 바구니에 나를 넣습니다. 흰색의 요크셔테리어인 나는 몸집이 자그마해요. 그래서 그 바구니에도 어렵지 않게 들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아주머니와 오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오전의 일과는 물건을 배달하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아파트 2개 단지가 아주머니의 구역입니다. 아주머니의 야쿠르트를 받는 손님들의 집에다 물건을 걸어둡니다. 아주머니는 걷고, 또 걷습니다. 급하다고 뛰지는 않아요. 언젠가 그렇게 뛰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아주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요.

  대략 30집 정도를 배달하고 나면, 아주머니도 잠시 쉽니다. 보온병에 담아온 물로 커피믹스를 한 잔 타서 마셔요. 나한테도 개껌 하나를 주고요. 아주머니가 늘 카트를 세워두고 쉬는 장소가 있어요. 아주 삐딱하게 휘어진 커다란 소나무 아래 주차장입니다. 그 소나무는 너무 휘어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작년에 관리사무소에서 단단한 철 받침대를 세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지요. 아주머니가 이번에 사 온 개껌의 맛은 바베큐 맛인데, 좀 별로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만 씹다가 그냥 놔둡니다. 이러면 아주머니가 다음에는 이 개껌을 사지 않을 테니까요.

  "언니, 나왔구나. 나 늘 마시는 걸로 하나만 줘 봐."
  "자, 여기 있어. 오늘은 알바 안 나가?"
  "아휴, 나 그 일도 그만둘까 봐. 그 집 애들이 워낙 말도 안 듣고 까탈스럽게 구네."
  "애들이 많이 힘들게 해?"
  "내 자식이 울고 떼쓰는 것도 짜증나는데, 남의 자식은 뭐 말할 게 있어? 언니, 그 있잖아.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사람. 그 집 애들이 그렇다니까. 큰 아이는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작은 애는 툭하면 울고. 아, 진짜 돌겠더라니까. 게다가 그 애들 엄마는 어떻고? 등하원 도우미를 무슨 지가 부리는 파출부쯤으로 생각하나 봐. 애들 샌드위치 만들어서 먹이세요, 학용품도 사다 놓으세요, 이러는 거야. 샌드위치는 자기가 알아서 만들어 놔야지. 나더러 음식까지 만들라고? 나 원 참."
  "그건 좀 그렇다. 간단한 간식 챙겨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만들어서 주라니."
  "하여간, 요새 젊은 엄마들 사고방식이란 게 그렇더라고. 돈을 좀 주면, 사람 마구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등골까지 빼먹으려고 들어. 말하자면 상식이란 게 없어. 기본적인 상식."
  "남의 돈 버는 일이 쉽지가 않지."
  "그래, 언니. 그거라도 좀 해서 애들 학원비라도 보태려고 했는데."
  "얇게 입고 나왔네. 날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언니도 오늘 하루 고생해."

  3단지의 슬비 엄마입니다. 나는 우리 아주머니한테 '언니'라고 불러서, 진짜 동생인가 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주머니의 손님인 줄 알게 되었지요. 손님들이 아주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다양해요. 저 할머니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부르나 들어보세요.

  "야쿠르트 여사님, 왔어?"
  "어르신,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응, 그냥 대충. 늙으니까, 입맛도 없어.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번잡스러워."
  "그래도 잘 챙겨서 드셔야죠. 오늘은 날도 추운데, 털모자하고 장갑 챙기신 건 잘하셨어요. 밖에 나오실 땐 꼭 그렇게 하세요."
  "우리 손녀딸이 꼭 현관 신발장에다 놔둬."
  "그런 손녀가 있어서 얼마나 좋으세요."
  "갸도 이제 짝을 만나서 결혼하니까."
  "아, 그래요? 언제요?"
  "내년 봄에. 이제 손주들도 다 여워버리면, 내 죽을 날만 남은 게지."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제가 사탕 하나 드릴게요. 이거 커피 사탕인데, 맛있어요."
  "고마워. 난 야쿠르트 사 먹지도 않는데, 이런 것도 주고."
 
  고향이 해남이라 해남 할머니로 불리는 저 할머니는 매일 저렇게 아주머니를 찾아옵니다. 전동 휠체어를 힘겹게 끌고요.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사는 일은 없지만, 아주머니는 늘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챙겨서 드려요.

  "아줌마, 나 커피 하나만 줘 봐."

  어휴, 저 중년 남자는 정말 재수 없어요. 반말지거리에다가 차에서 돈을 휙, 던지는 거 하며. 나 같으면 도로 돈을 내던지겠지만, 우리 아주머니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얼른 주워요. 그리고 커피하고 거스름돈을 공손히 건넵니다.

  "찬 음료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많이 팔아!"

  나는 저런 인간들을 보면요, 뭔가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아요. 막돼먹은 인간이잖아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아주머니가 겉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런 사람들한테 물건 팔고 나면 꼭 내 머리를 쓰다듬으세요. 부드럽게, 하지만 거기에는 이상한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져요.

  "형석 엄마! 나, 오늘 정말 기분 좋다. 우리 민우가 코뿔소에 붙었거든."
 
  근데 저 민우 엄마가 말하는 '코뿔소'가 무엇일까요? 내가 보잘것없는 작은 강아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코뿔소가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의 동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민우 엄마가 말하는 코뿔소는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아닌 것 같고.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요.

  "정말 잘 됐다. 거기 들어가기가 그렇게 힘들다면서."
  "아휴, 그러게. 오죽하면 코뿔소 붙으면 명문대 입학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그러겠어."

  아, 이제 알겠어요. 저 코뿔소는 아마 어디 대단한 입시학원쯤 되나 봅니다. 민우 엄마는 자기 아들이 거기 붙었다고 저리도 자랑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저 이야기를 듣는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네요.

  "이제 민우 엄마도 마음이 좀 놓이겠다. 다른 사람들은 준비를 많이 해도 떨어졌다 그러던데. 민우가 잘했나 보다."
  "우리 애가 아빠 머리 보다 내 머릴 닮아서 그래. 민우 아빠는 돈 버는 머리만 있지. 아우, 아무튼 기분 정말 좋아. 우리 민우 먹이게 제일 비싸고 기운 나는 걸로 한 10개만 줘."

  어휴, 저 말본새하고는. 아무튼 저 여자는 참 재수가 없어요. 남편은 돈 잘 벌고, 자기는 머리 좋다고 자랑 늘어지게 하고. 아주머니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비닐봉투에 음료 10개를 담습니다. 여자가 가고 나서, 아주머니가 또 내 머리를 아주 많이 쓰다듬었어요.

  "메리야, 점심 먹으러 집에 갈까? 아줌마도 배가 좀 고픈데."

  아주머니는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갑니다. 아주머니의 집은 아주 가까워요. 아주머니는 카트를 아파트 출입구 주차장에 놓고, 바구니에서 나를 꺼냅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12층 버튼을 누릅니다.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오늘 아주머니의 얼굴은 좀 지치고 어두워 보이네요. 마침내 집에 도착했어요. 아주머니가 손을 씻고, 부엌에서 아침에 남은 국을 데웁니다. 나는 거실의 푹신한 러그에 앉아서, 거실 벽에 걸려있는 아주머니네 가족사진을 봅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형석이. 아주머니는 통통하고, 아저씨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좀 큰 편이에요. 형석이도 그런 부모님을 닮아서 살이 쪘어요. 나는 형석이의 유순하고 해맑은 미소를 참 좋아해요.

  아주머니가 국을 데우고 나서, 나한테 사료를 조금 덜어서 줍니다. 나는 밥 생각이 없어서 별로 먹지는 않았어요. 그 재수 없는 민우 엄마 때문에요. 아주머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거든요. 아주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는 드실 생각이 없는지,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나는 식탁으로 가서 아주머니 옆에 앉아있었어요.

  "밥을 차려놓기는 했는데, 별로 먹고 싶지가 않네. 메리야, 밥맛이 없는 이런 날도 다 있어. 항상 아침 배달하고 나면 배가 고픈데 말이야."

  왈왈. 나도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서 좀 소리 내 짖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짖고는 거실과 부엌을 왔다갔다했지요. 아주머니는 데운 된장국을 음식물 쓰레기통에다 넣고는,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하나를 꺼내어서 마셨어요.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오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아주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피곤하시겠지요. 아침 6시부터 계속 일을 했으니까요. 나도 아주머니 옆에서 까박까박 졸았어요.

  아주머니가 다시 집을 나선 것은 오후 1시쯤입니다. 오후에는 거리 판매를 주로 해요. 정해진 장소에서 손님들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오전에는 주차장의 소나무 아래였다면, 오후에는 아파트 스포츠 센터 앞에서 손님들을 기다립니다. 거기는 스포츠 센터 이용객들도 있고, 유동 인구도 많은 대로변이거든요. 오늘은 날도 그리 춥지 않고, 햇빛도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아마 올해의 마지막 가을날일 거 같아요. 나는 아주머니의 카트에서 거리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엄마, 아들 왔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오후 수업은 안 하고 조퇴한 거야?"
  "응, 머리가 아파. 그냥 공부하기 싫어."

  아주머니는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는 형석이를 보고 웃었어요. 형석이는 오늘도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나 봅니다. 자주 그러는 편이에요.

  "엄마, 내가 의자 가져올게."
  "엄마 의자에 네가 앉아. 엄마는 좀 서 있어도 괜찮아."
  "아냐. 그건 엄마 꺼. 나는 내 꺼 가져올 거야."
  "괜찮대도 저러네."

  형석이는 스포츠 센터 주차장으로 가더니, 거기 화단 구석에 처박혀 있는 연두색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가져옵니다.

  "엄마, 이거 봐. 이거 좋은 의자!"
 
  형석이는 기쁜지 큰 소리로 아주머니한테 말합니다. 의자를 가져오던 형석이가 함박웃음을 터뜨리자, 아주머니 얼굴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형석이는 카트 옆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습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있는 나를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어요. 나는 산책가고 싶어서, 형석이의 무릎에서 발을 좀 굴렀지요.

  "엄마, 나 메리 산책 시킬래."
  "그럴래? 스포츠 센터 뒤쪽에 공원 있잖아. 그럼, 거기에서 메리하고 좀 놀아라."
  "응. 우리 엄마 사랑해. 화이팅!"

  형석이는 두 팔로 크게 하트를 만들어 보여주었어요. 형석이가 만든 하트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왈왈, 하고 소리를 내었답니다. 원래는 아주머니가 오후에 이곳에 오기 전에 나와 산책하곤 하는데, 오늘은 좀 힘들어 보였어요. 아무튼 형석이가 일찍 와서 나도 콧바람을 쐴 수 있게 되었네요.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야호! 가을 길은 좋은 길."

  형석이는 나의 목줄을 느슨하게 하고서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었어요. 형석이와 내가 그렇게 기분 좋게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초록색 체육복에 교복 외투를 걸친 남자애 둘이 다가오더라고요. 형석이하고 같은 색의 체육복을 입었네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들인가 봐요.

  "어이, 이형석. 너 여기서 뭐 해?"

  더벅머리에 안경 쓴 남자애가 건들거리면서 그렇게 묻더군요. 나는 걔를 더벅머리라고 부를게요. 아무튼 그 더벅머리가 말하는 걸 보니, 어째 좋은 아이는 아닌 것 같았지요.

  "우리 메리, 산책시키고 있어."
  "메리? 이름도 존나 촌스럽네. 언제 적 메리냐? 지 닮은 강아지 새끼 데리고 다니는 바보 새끼."
  "내가 왜 바보야? 나 바보 아냐!"

  형석이는 그 녀석들과 맞닥뜨린 것이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어요. 그러자 더벅머리 옆에 있는 멀대같이 키가 큰 놈이 옆에 있는 단풍나무를 마구 흔들면서 그래요.

  "바보 새끼한테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꼭 저렇게 모자란 애들은 지가 바보인지 몰라. 등신같이."

  그 멀대 자식이 형석이한테 그런 말을 퍼붓자, 나는 있는 대로 화가 치밀었어요.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멀대의 체육복 바지를 물고는 마구 잡아당겼어요.

  "메리야, 안돼. 그러면 못써. 안돼, 다쳐. 하지 마."
  "야, 이 강아지 새끼가 성깔있네. 바보 주인도 지킬 줄 알고."

  멀대 새끼가 나한테 물어뜯기는 것을 보더니, 더벅머리가 나한테 달려들어서 발로 내 등을 갈겼어요. 나는 등짝이 쪼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멀대 자식의 바지를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형석이는 어떻게든 나를 구해야겠다고, 내 목을 세게 잡아당겼어요. 나는 형석이의 아귀힘이 얼마나 센지 처음 알았어요.

  "개새끼, 지랄맞기는."

  마침내 형석이가 나를 멀대에게서 떼어놓자, 멀대 자식이 그렇게 욕설을 내뱉더군요.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그냥 고래고래 있는 대로 짖었어요. 형석이는 그런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고요.

  "야, 가자. 저 바보 새끼, 지 강아지한테 물어뜯겨서 뒈지라지."

  더벅머리가 그렇게 지껄이면서, 흙바닥에 넘어진 멀대를 일으켜 세웠어요. 둘은 나와 형석이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욕을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그곳을 떠났습니다.

  "메리야, 괜찮아? 어디 아프지 않니? 형아가 호, 불어줄게."

  형석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형석이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몹시 놀랐는지, 거친 숨을 내쉬었어요. 나는 형석이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바보, 바보, 바보!"

  형석이는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더군요. 도대체 저 쓰레기 같은 애새끼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저럴 수 있을까요? 나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어요. 나의 얼굴은 침과 눈물, 땀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요.

  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어요. 나는 저녁에 밥을 먹을 기운도 없어서, 거실 러그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어요. 형석이도,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오늘은 모두 저녁을 먹지 않았어요. 아저씨는 늘 그렇듯, 아파트 공원에 운동하러 나갔어요. 형석이는 일찍 자러 들어갔고, 아주머니는 식탁에서 사탕 꾸러미를 나누어 포장했어요. 손님들에게 그렇게 소소한 선물이라도 돌려야, 요구르트 하나를 더 팔 수 있으니까요.

  나는 아주머니가 깔아준 전기매트에서 졸다가,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눈을 떴어요. TV 장식장 위의 디지털시계가 11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다들 잠이 들었나 봐요. 거실에는 작은 무드 등 하나만 켜져 있었으니까요. 나는 조금은 기운을 차리고는, 거실 벽에 걸린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어딘지 모르게 그 사진에서는 가라앉은 서글픔이 느껴졌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진에 조금이라도 행복의 느낌을 불어넣고 싶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어요. 언젠가 아주머니가 알려준 내 이름이 생각났어요. 맞아요. 내 이름은 메리(Merry)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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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당(慧火堂) 보살의 그날그날 


  "여긴, 예약을 안 하고 와도 볼 수 있나요?"
  "아이구, 그럼요. 어서 들어와요."

  혜화당 보살은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면서, 손님이 신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여기는 점집 골목 제일 끝자락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대문 앞에 신선 같은 할아버지 그림이 붙어있더라고요. 그냥 그 할아버지가 친근해 보여서요."
  "아, 우리 도사 할아버지."
  "도사요?"
 
  혜화당은 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의 반응이 재밌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무슨 이상한 도인 그런거 아니야. 그림 속의 도사 할아버지는 무당한테 점괘 일러주는 신령님."
  "네, 그렇군요."
  "바깥 날씨가 좀 쌀쌀하지? 따뜻한 대추차나 한잔합시다. 대추차, 괜찮아요?"
  "주시면 고맙죠."

  혜화당은 엊그제 생강과 함께 썰어서 담근 대추차를 티스푼으로 덜어내었다. 알싸한 생강의 향이 풍겼다.

  "자, 대추차 대령이요."
  "아휴, 잘 마시겠습니다."

  혜화당은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아가씨의 안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결혼 운이 들어와 있군. 아마 남자 이야기를 하려고 왔을 거야.

  "아가씨가 오늘 내 첫손님이야."
  "아, 그런가요? 오후 4시인데, 아직 아무도 안 온 거예요?"
  "응. 그런 날도 있지. 그래도 나, 밥은 안 굶고 살아. 다 신령님들이 보살펴 주니까."
  "그렇군요."

  차를 마시는 동안 아가씨는 거실의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거실은 뭐 그냥 여느 가정집 같지. 점사는 신당에서 보니까, 차 다 마시면 얘기해요. 여기 히터도 있으니까, 몸도 좀 녹이고."
  "네."

  혜화당은 거실 유리창으로 보이는 바깥을 가만히 응시했다. 잔뜩 흐린 하늘이 꾸물거리는 것이 뭐라도 내릴 기색이었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혜화당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두통의 기운에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이건 진짜 머리가 아픈 두통이 아니라, 신이 오실 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가씨 머리가 복잡한가 보네.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아가씨 손님은 대답 대신에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날 따라 들어와요. 편하게 그냥 마음속 이야기를 하면 된다우."

  혜화당은 전안(殿內, 신령들을 모신 제단)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를 올렸다. 도사 할아버지, 오늘도 영명한 점괘 들려주시옵소서.

  "아가씨, 생년월일 말해봐요. 태어난 시각도 말해주면 좋지만, 잘 모르겠으면 할 수 없고."

  손님은 갈색 핸드백에서 작게 접은 메모지 한 장을 점사를 보는 찻상에 놓았다. 혜화당은 펼쳐진 만세력 책을 짚어가며, 아가씨의 사주를 종이에다 풀어나갔다.

  "그래, 뭐가 제일 궁금해요? 아가씨가 물어보면 내 대답을 해주지."
  "그게, 그러니까..."

  아가씨는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더니,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침묵을 지켰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플까? 지금 내 머리가 막 지끈지끈 아파. 아가씨도 머리가 아프지, 응?"
  "네. 제가 만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요. 결혼하려면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해서..."
  "그래서, 내 머리가 이렇게 아프구나. 아휴, 아주 그냥 답답해 죽겠어."

  아가씨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한 사람은 외모는 뭐 그냥저냥 그렇고, 경제적으로는 무척 안정되어 있어요. 근데 좀 말이 안 통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고요. 또 다른 한 사람은 외모는 멀끔하고 좋은데, 가진 것은 별로 없고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하고 있으면 말을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마음이 맞는 거죠. 다만, 좀 그 사람의 환경 자체가 앞이 안 보이는 그런 게 있어서..."
  "그렇구나. 한 사람이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다 가졌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서. 그래서, 머리가 좀 많이 아픈 거지."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누굴 선택하면 좋을지, 저도 마음이 오락가락해서요."

  혜화당은 쌀을 상에 가볍게 뿌려놓고, 이리저리 헤아려 보았다. 쌀점은 혜화당이 가장 익숙하게 하는 점이었다. 

  "근데 뭐 내가 할 말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이미 아가씨 마음에 결정이 내려졌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아니, 솔직하게 좀 자신을 들여다봐요."

  약간은 얼굴이 붉어진 아가씨는 무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네, 어쩌면 마음이 기울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도사 할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할아버지도 그냥 웃기만 하시는데. 내가 암만 무당이어도, 신령님이 말씀을 안 하시는데 어쩌겠어? 그런데 내가 둘 중에 누굴 택하라고 하면 할 거야?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혜화당은 아가씨의 당혹스러운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돈은 많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 그리고 돈은 없지만 말이 통하는 남자. 과연 자신이라면 둘 중 누굴 택할 것인가?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무시할 수도 없다. 서로 이야기가 좀 통한다고, 사글셋방에서 신혼살림 차리는 것을 저 아가씨가 기꺼이 택할까? 두 남자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혜화당 머릿속의 도사 할아버지는 부채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휴, 우리 할아버지도 참. 손님 앞에서 내 얼굴이나 좀 세워주지. 그래도 오늘 첫손님인데, 내가 할 말이 없어가지고. 할아버지, 말씀 좀 하세요.'

  혜화당은 삐긋이 웃고 있는 도사 할아버지의 부채를 탁, 낚아채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때 수완이 좋은 무당은 대충 둘러대기라도 할 텐데, 난 그런 걸 못 해."
  "아니에요.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제 마음이 이미 정해진 것도 같고..."
  "무당이 신령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한다우. 손님이 앞일을 물어보면 열 개 가운데 한두 개 맞을까 말까 하지. 그런데 지나간 일은 거진 다 맞추지."
  "보살님은 참 솔직하시네요."
  "응, 내가 그런 편이지. 이 나이 되고 보니, 뭘 억지로 꾸며내서 말하고 그런 건 못 하겠어. 아무래도 신령님들이 제일 무섭지, 뭐. 똑바로 그분들 말씀 전해야 하니까."
  "도사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못 듣고 가니 아쉽기는 하네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러게. 내가 복채를 안 받을 수는 없고. 바로 갈 건 아니지? 커피 시켜줄 테니까, 커피 마시고 가."
  "커피요?"
  "응, 그 있잖아. 다방 커피. 난 하루 점사 다 보고 나면, 근처 다방에서 커피 시켜서 먹거든."
  "아, 네..."

  아쉬워하던 아가씨의 얼굴이 '다방 커피'라는 말을 듣더니, 조금은 펴진 것처럼 보였다. 혜화당은 휴대폰으로 루비 다방에 전화를 걸었다.

  "응, 늘 시키는 거. 오늘은 손님이 있으니까, 한 잔 더 가져오고."

  혜화당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아가씨에게 거실로 나가자고 했다.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렇게 낮이 짧아진 것을 보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혜화당은 동지 기도를 어디로 가서 할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작년에 갔던 강화도 산으로 기도를 갈까? 거기 산은 무척 가팔랐지. 이제는 나이도 먹고 체력도 달려서, 그 가파른 산을 다시 오른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힘에 부칠 것 같았다.

  "보살님, 저 왔어요."
  "아이구, 총알 배송이네. 어찌 이리 빨리 와?"
  "오늘 장사가 영 별로여서. 그래서 보살님 전화 기다렸죠."

  루비 다방의 마담이 생글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능숙하게 보라색 꽃무늬 보자기를 풀고, 붉은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달달한 커피 향이 솔솔 풍겼다.

  "아가씨, 다방 커피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어쨌든 한번 마셔봐. 여기 마담이 커피 잘 타거든."
  "네. 고맙습니다."

  마담은 아가씨 쪽으로 커피잔을 천천히 밀어놓았다.

  "보살님, 오늘은 좀 어땠어요?"
  "오늘? 여기 아가씨 손님 하나야."
  "아이구, 세상에. 보살님도 오늘 영업이 파이구먼요. 호호호..."
  "그래, 파이다, 파이여. 그래도 어제가 좀 괜찮았으니까. 자, 오늘 입금할 돈 35만 원."
 
  혜화당은 마담에게 돈과 은행 카드를 건넸다. 그걸 보더니, 아가씨가 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은행에 입금하는 일을 시키세요?"
  "응. 돈 입금도 시키고, 또 빼 올 때도 시키고."
  "네? 아니, 그걸 직접 안 하시고 왜..."
  "아, 귀찮아서. 여기 마담이 심부름 잘해주거든. 난 신령님 심부름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혜화당은 허허롭게 웃었다.

  "근데, 이분이 보살님 돈 가지고 어디 먼데 가버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아가씨는 이제는 좀 친해진 느낌이 들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다방, 전에 있던 마담 애가 그렇게 내 돈 천만 원 가지고 날랐지."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응, 그렇대두. 하하..."

  혜화당의 웃음소리에 아가씨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마담 언니는 믿으세요?"
  "믿으니까, 돈을 맡기는 거지. 얘 얼굴 좀 봐봐. 어디 돈 가지고 튈 애처럼 보이나."
  "우리 보살님이 그렇게 날 믿으신다니까요. 호호호..."

  아가씨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혜화당과 마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당이라고 다 자기 앞일을 알지는 못해. 신령님이 하나하나 다 알려주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우리 아가씨가 좀 속았다, 이렇게 생각하려나?"
  "아니요. 그냥 재밌는데요. 보살님이 솔직하신 것도 좋구요."
  "아가씨, 돈 많은 그 남자하고 결혼할 거지?"
  "네, 아마 그렇게 될 거 같아요."
  "내가 그래서 말을 안 했어."
  "알고 계셨군요."

  아가씨가 이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보살님 이름이 왜 혜화당이에요? 혹시 서울 혜화동과 무슨 인연이라도..."
  "인연은 무슨? 난 인천에서 나고 자란 여기 토박이인걸. 내 이름 혜화는 지혜의 불을 밝힌다는 법명(法名)에서 따왔지. 나한테 오는 손님들, 마음의 짐이나 좀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아가씨는 혜화당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그 사람하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살아보고, 힘들면 또 와서 물어보면 되지. 다들 그렇게 해."
  "네. 그렇게 해야겠네요."

  혜화당은 도사 할아버지의 부채가 부드럽게 팔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밖에는 초겨울 저녁의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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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逆流)


  "어, 이게 뭐지?"

  소변을 보고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던 기영은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불어터진 살덩어리에 붙어있는 것은 분명 손톱이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기영은 눈을 비벼보았다. 변기의 물이 거의 채워지면서 그 이상한 덩어리도 천천히 움직였다.

  "기중아, 좀 일어나봐. 일어나 보라고. 변기에 사람 손가락이 있어!"
  "아, 무슨 일이야?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 뭔 손가락이야?"

  기중은 기영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짜증이 잔뜩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좀 일어나 보래도. 저거 진짜 사람 손가락이라고."

  기중은 기영의 다그치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마루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새벽 5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휴, 더 잘 수도 있은 걸 깨워서. 대체 뭔 일이야, 응?"
  "야, 이거 봐라. 이게 사람 손가락이잖아."

  기영은 동생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화장실 변기 안쪽을 가리켰다.

  "아니, 저게 뭔 손가락이야? 저거 옛날 사루비아 과자 같네. 막대 과자 불어터진 거잖아. 나 원 참."
  "아니라고, 손톱이 달려있다고. 과자 아냐."
  "형, 안경 좀 쓰고 잘 봐봐. 형 안경 안 쓰면 나도 못 알아보잖아. 안경 좀 써보라고."
 
  기중의 말에 기영은 책상 위의 안경을 찾아서 썼다. 그러고 나서 변기 안을 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는 조금씩 형체가 풀어지고 있었다. 기영이 보았던 손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아파트가 하도 오래되었잖아. 40년 된 아파트 아냐. 그러니까 변기 물 내려가는 것도 시원찮고, 뭐 어디서 역류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중은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기영은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멋쩍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까 또렷하게 본 손톱의 잔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헛것을 본 것인가? 차라리 헛것을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 사람의 손가락이라면, 그건 더 끔찍한 일이 아닌가? 후우, 기영은 새삼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기이한 일 때문이었는지, 그날 오후에 있었던 졸업시험에서 기영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졸업시험은 통과해야만 했다.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국문과를 택한 자신의 스무 살이 그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국문과를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골의 부모님은 어디서 들었는지 경영학과를 가야 취직이 잘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영은 국문과를 선택했다. 시와 소설, 그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의 울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좋다는 느낌만으로 직진하기에는 너무나 거칠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기영이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듬해,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기영과 기중 형제는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시골의 얼마 되지 않은 땅뙈기와 낡은 집을 팔아서, 지금의 16평 아파트에 들어온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서울시 변두리의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도 기영이 사는 복도식 아파트는 더 낡고 열악하게 보였다. 적은 평수에다, 월세가 그나마 싸서 이 아파트에는 하층민과 외국인 노동자 이주민들이 꽤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중국, 몽골,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기영이 처음에 그들의 얼굴을 볼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과 자주 마주칠수록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0대 중반의 몽골 남자는 기골이 장대했는데, 팔뚝에 과녁과 화살 문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필리핀 여자는 무척 뚱뚱했다. 여자는 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영어로, 때로는 본토의 언어로 시끄럽게 전화했다. 기영의 이웃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아니, 무슨 졸업시험을 사법고시 출제하듯이 내냐. 난 음운학 문제는 하나도 못 풀겠더라. 기영이 넌 어때? 잘 본 거야?"
  "나도 그렇지 뭐. 그래도 떨어지기야 하겠어? 그래도 1차 시험은 쉬웠으니까, 그거하고 이번 거하고 합산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긴, 교수들이 졸업생 인생 망칠 일 있냐. 졸업은 하게 해주겠지."

  동기인 민철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강의실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력서 낸 건 소식이 있어? 난 이번 주에 출판사 면접이 있는데, 모르겠다. 붙으면 정말 좋을 텐데."
  "온라인 서점에 내봤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또 부지런히 써서 뿌려봐야지."

  국문학을 전공해서 책 장사라도 하면 다행일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온라인 서점에 이력서를 내보았다. 하지만, 기영이 낸 세 군데 모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책을 파는 것도 장사니까, 경영학 전공자가 더 낫겠지. 기영은 국문학보다 문예창작과가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국문과나 문창과나 굶어 죽기는 마찬가지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예의 그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졸업시험을 치느라 진이 빠져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오는 기영의 다리는 조금 후들거렸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 걸어오는 그 10분 거리가 30분처럼 느껴졌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는 사람처럼, 기영은 걸음걸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집에 가서 좀 쉬면 낫겠지. 마침내 아파트 출입구에 도착했을 때, 몽골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늘 줄담배를 피워댔다. 담배꽁초는 아무데나 내던졌고, 가래침도 연신 내뱉었다. 기영은 그런 남자가 꼴 보기 싫어서, 좀 더 걸어서 다른 출입구로 들어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엘리베이터 붙잡고 애새끼들이 장난이라도 치나. 기영은 자신의 집이 4층에 있다는 것에 그나마 안도했다. 다시 한번, 있는 힘을 쥐어짜 내어 계단을 올라갔다. 번호 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쏴아쏴아..."

  기영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앞 베란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다용도실에 세탁기를 두고 쓰게 되어있지만, 일부 입주민은 자기들 편한대로 우수관이 있는 앞 베란다에다 세탁기를 두고 썼다. 역겨운 세제 냄새와 오수 때문에 관리사무소에서 세탁기 사용을 금지한다고 공고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탁기 물 내려가는 소리인가 보네. 저 물소리를 수시로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쨌든 좀 참으면 되겠지. 기영은 피곤을 느끼며 삐걱거리는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기영이 눈을 뜬 시간은 오후 6시였다. 3시에 집에 왔으니, 3시간을 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여전히 계속 들렸다. 무슨 빨래를 저렇게나 할까? 오늘은 다들 빨래하는 날인가 보네. 기영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일어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중은 한 달 뒤면 군대에 들어간다. 기영은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동생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벌써 마음이 허전해졌다.  

  이른 저녁을 대충 챙겨 먹고, 기영은 컴퓨터 앞에서 자기소개서 작성에 매달렸다. 사실 자기소개서에 쓸만한 인생의 그 무언가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고, 군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부모님은 불운하게 일찍 돌아가셨다. 그나마 남겨주신 재산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작은 아파트 한 칸이나마 남겨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도시에서 집이 있다는 것은 생존의 동아줄을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다. 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쏴아쏴아..."

  밤 11시가 넘어서도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좀 이상한 일이었다. 물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무슨 집중호우 때 내려가는 빗물 소리 같았다.

  "아, 오늘도 피곤하네. 형, 별일 없지?"
  "왔냐? 근데, 앞 베란다에서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가만있자, 내가 3시에 집에 왔거든. 그러니까 8시간째야. 도대체 뭔 일일까?"
  "뭐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에서 쓸 수도 있지. 정 신경 쓰이면, 내일 관리사무소에 전화라도 해봐."
  "그래야겠네."

  기중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는, 곧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기중이 조그맣게 코 고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기영은 그런 동생이 안쓰러워졌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세찬 물소리가 들려도 잠에 곯아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그런 기중과는 달리 기영은 물소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잠을 자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여다보는 것도 진력이 났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야지.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기영은 아파트 분리수거대를 지나, 등나무 퍼걸러(pergola)로 향했다. 거기 벤치는 이 아파트 흡연자들의 안식처였다. 기영 또래의 젊은 남자 하나가 스마트폰으로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기영은 자신이 포커 게임은 물론 고스톱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런 것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그저 인생의 낭비일 뿐이다. 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수익률이 별로잖아."

  기영이 담배를 다 피웠을 무렵, 또 다른 20대 초반의 남자가 담배를 피워물고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저 친구는 택배 일을 한다. 언젠가 택배기사 옷을 입고 자신의 집에 택배를 놔두는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체구는 작았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무거운 짐들이 쌓여있는 카트를 능숙하게 끌고 다녔다. 기영은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의 피곤함에 절은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저 친구도 뭔 증권 투자나 코인이나 그런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죽여!"

  기영이 담배를 피우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어눌한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말소리 뒤로 둔탁한 소리도 났다. 뭔가를 내던지는 소리 같았다. 2층의 필리핀 여자일 것이다. 여자는 50대의 늙은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주 싸웠다.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었다.

  "쏴아쏴아..."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소리는 거침이 없이 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봐야겠네. 기영은 감기지도 않은 눈을 억지로 꼭 감고는 잠을 청했다.

  "아, 수고하십니다. 205동 입주민인데요. 좀 불편한 것이 있어서요. 앞 베란다에서 어제부터 계속 물소리가 들리거든요. 여기가 몇 라인이냐 하면..."
  "선생님, 거기 6라인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어제부터 민원 전화가 계속 와서요."

  그렇구나. 이 물소리에 자신만 신경쓰는 건 아니었구나. 기영은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신경을 쓰는 주민이 여럿이라면 관리사무소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 할 것이다.

  "그게요, 12층 입주민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그럼, 13, 14, 15층, 이렇게 3집이 남잖아요. 가서 초인종을 눌러봤는데, 13층과 15층은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요. 남은 집은 14층인데 문을 안 열어줍디다. 인기척은 들리는데."
  "참 이상한 일이네요. 대체 뭔 물을 그렇게나 써대는지."
  "아무튼 저희도 문제를 알고 있고, 해결하려고 하니까요. 좀만 기다려 주시지요."

  젊은 남자 기사의 대답을 듣고, 기영은 찜찜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14층이란 집구석은 대체 뭘 하는 집구석인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들리고 있었다. 기영은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변기의 물을 내리는데, 희멀건 뭔가가 다시 또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제 새벽에 본 그 덩어리였다. 분명히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손톱의 색깔은 붉었다.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저것은 결코 사루비아 과자가 아니다. 기영은 그 손가락을 찍어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전화기를 찾으러 나갔다. 가방에 놔둔 전화기가 책 때문에 잘 빠지지 않아서, 힘을 주어서 억지로 빼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다시 갔을 때, 그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중에게 이 이야기를 다시 했다가는, 형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오후 강의 내내, 기영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로 옥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제부터 들리는 물소리와 사람의 손가락.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 물소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손가락은 무엇인가? 자신의 감각에 문제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살인사건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인자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사흘 밤낮 물을 썼다던가. 강의가 끝났는데도, 기영은 오금이 저려서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사흘째 되던 날, 오후 4시가 좀 넘어서야 들리지 않았다. 기영은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물소리 때문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관리사무소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고, 물소리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아, 이제는 안 들리더라고요. 사흘 동안 이게 뭔 일인지, 원."
  "오늘 14층에 다시 가봤더니, 거기 주인이 문을 열어주더구만요. 남자가 어디 목수 일을 다니나 본데, 먼 데 갔다가 와서 보니까 세탁기 물이 틀어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하네요."
  "아무튼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기사님도 수고하셨어요."
  "또 불편한 일 있으면 연락을 주시고요."

  어쨌든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기영의 마음속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 변기의 괴이한 손가락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나을 것 같았다. 기영은 두 눈을 가볍게 비벼보았다. 앞 베란다 앞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조그만 애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놀고 있었다.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이상한 것은 그 손가락이다.

  어쩌면 살인마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 자신과 동생은 그런 곳에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가 갑자기 싫고 무서운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하층민이 사는 이 변두리 외곽의 복도식 아파트에서는 살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낡은 나무 창틀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미어지듯 들어왔다. 만약 집수리할 돈이 있다면 새시부터 했을 것이다. 실리콘이 경화된 낡은 알루미늄 새시는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겨울바람이 새시 틈새로 들어왔고, 그 바람이 나무 창틀을 흔드는 소리를 내었다.

  "방풍 비닐을 붙여야 할 때가 왔군."

  마치 번데기가 누에고치를 짓듯, 겨울에는 베란다 쪽의 문만 놔두고 모두 덕지덕지 방풍 비닐을 붙였다. 방풍 비닐로 바람은 막을 수 있겠지만, 아파트 곳곳에서 풍겨나오는 가난과 몰상식의 냄새는 막을 수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베란다로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를 내던졌다. 관리사무소에서 아무리 안내 방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을 참아내는 것도 고역인데, 이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음습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의 여자는, 아니 남자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 사람은 손가락을 잃은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어쩌면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영의 생각은 곰팡이의 포자처럼 끝 간 데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서울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생명의 동아줄 같은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변기에서 보았던 그 손가락이 기영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뒤흔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보잘것없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일 뿐이지 계층의 이동은 될 수 없을 터였다. 별 볼 일 없는 대학의 국문과 졸업생으로 취업은 애당초 막혀있고,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지도 막막했다. 민철이 이력서를 냈다는 출판사에 사실은 기영도 이력서를 진작에 냈었다. 하지만 기영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취업 준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답답한데, 잘린 손가락까지 보게 되니 기영의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 이제 물소리 안 나는데."

  밤늦게 들어온 기중이 앞 베란다를 쓱 들여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낮에 관리사무소에서 다녀갔었다. 14층에서 외출하면서 모르고 세탁기 물을 틀어놨었대. 참 한심한 인간이야. 어떻게 물을 틀어놓고 모를 수가 있어?"
  "글쎄.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형의 기준에서는 이상한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둔하게 사는 사람이겠지."

  기중은 식탁 위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것들을 펼쳐놓았다. 망고 요구르트, 티라미수 케이크, 딸기 우유, 캔 커피. 모두 소비기한이 지나서 폐기해야 하는 식품들이었다.

  "오늘은 좀 괜찮은 것들이 나왔어. 형 배고플 때 먹어. 난 별로 생각 없어."

  착한 녀석. 기영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는 기중의 마른 어깨를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과연 자신이 형으로서 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동생에게 기대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도 버거울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내 앞가림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막막함이 기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통장에는 부모님의 마지막 농지를 처분하면서 받은 돈 500만 원이 있을 뿐이었다. 취업이 늦어지고, 그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로 전환된다면 과연 자신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가? 그런 생각에 이르자, 기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도 끊어야지. 이것도 돈 드는 습관이니까."

  기영이 벤치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화살 문신의 몽골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아, 또 저 인간이네. 기영은 기분 나쁜 껄끄러움을 느끼며 담배를 비벼서 껐다. 기영은 아파트 출입구 쪽으로 걸으면서, 집집마다 외부로 나와 있는 보일러 연통을 바라보았다. 과연 150 세대 가운데 이 초겨울 밤에 난방하는 집은 몇 집이나 될까? 난방을 틀게 되면, 보일러 연통으로 연기가 나오게 되어있다. 기영은 주의깊게 흰 연기가 나오는 연통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이른 저녁에 난방을 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영이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렇게 세어보아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난방을 거의 틀지 않았다. 기영의 집 보일러의 난방 설정 온도도 17도에 맞춰져 있었다. 기영은 하층민에게 절약이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내재된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이미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기영은 식탁에 동생이 펼쳐놓은 간식들을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생명의 양식이네.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 생명의 양식도 동생이 군에 입대하게 되면 끝이었다. 화수분 같은 간식도, 저렇게 코 고는 소리도 없는 이 집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기영은 새삼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쏴아쏴아..."

  기영이 물소리에 잠이 깬 것은 새벽 3시가 좀 넘어서였다. 아, 또 저 물소리야? 기영은 앞 베란다 문을 확 열어제꼈다. 물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14층 놈은 분명 범죄자야. 살인을 저지른 게 틀림없어. 변기에서 내가 본 그 손가락도 저놈이 죽인 여자일 거야. 기영은 분노와 공포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면 또 화장실의 변기에 그 손가락이 둥둥 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영은 화장실의 불을 켰다. 다행히도 변기에는 물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영이 화장실의 불을 끄고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언젠가 요리하다가 손을 크게 베였을 때 맡았던 피 비린내였다. 기영은 다시 화장실의 불을 켰다.

  "아니, 저건..."

  변기의 물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맴돌았다. 기영은 곤하게 자고 있는 동생을 차마 깨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변기의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손가락이 사라졌고, 물도 맑아졌다. 기영은 화장실 문을 닫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그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자. 기영은 자신의 첫 단편을 쓸 생각이었다. 글쓰기가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의 탈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역류(逆流)'

  깜박거리는 커서가 기영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처럼 움직였다. 저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계속해서 세차게 들렸다. 타닥타닥, 기영이 두들기는 자판의 소리가 차가운 집안의 공기 속에서 음표처럼 떠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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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이게 다 뭐예요?"
  "제사 지낼 거."
  "인테리어 박씨네?"
  "야, 인테리어 박씨가 뭐냐. 이제는 새아버지로 인정 좀 해주면 안 되냐?"
  "난 못해요."

  양손에 장 본 것을 잔뜩 들고 온 엄마를 보니,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남의 집 제사를 지낸다고 왜 저 난리인가? 인테리어 박은 엄마의 남자친구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제는 남편에 근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엄마는 3년째 그 아저씨의 부모 제사를 지내고 있다.

  "네가 인정을 하든 못하든, 어쨌든 그 아저씨하고 엄마는 같이 살 거야. 그리고 올해는 너도 그 제사에 참석해야 해."
  "엄마, 지금 그 말 진짜야? 내가 미쳤어? 내가 왜 박 씨 집 제사에 가? 엄마,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냐?"
  "빌어먹을 자식. 네가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냐?"
  "아니, 엄마 말이 웃기잖아. 나는 김민수야. 김 씨 집 자손이라고. 그런데 박 씨 집 제사에 가라고 하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건 네 입장이고. 어쨌든 올해 제사는 너도 지내."
  "어쨌든 난 안 갈 거니까, 엄마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내 방에 들어와 버렸다. 아무리 남자한테 정신이 팔려도 그렇지. 남의 집 제사 지내주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식한테 그 집 제사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논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저런 엄마하고 내가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 이제 고등학교 1학년, 앞으로 3년을 버틸 수 있을까? 나에게 '독립'이라는 말은 서슬 퍼런 일제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님들이 느꼈던 막막함과 맞닿아 있다. 대학은 갈 수나 있을까? 아니, 갔다고 해도 졸업을 할까? 스무 살이 되었다고 무조건 집을 나와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 나하고 좀 얘기나 하자."

  스마트폰 테트리스 게임의 블록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인테리어 박이 내 방문을 열었다.

  "아저씨, 노크 좀 하시죠?"
  "가족끼리 무슨 노크냐. 아무튼 좀 나와 봐."
  "싫어요. 그냥 여기서 말해요."
  "어휴, 쟤가 버릇이 없어서 저래."

  부엌에서 장 본 것을 정리하던 엄마가 참견하는 소리를 했다. 나는 박씨 아저씨보다도 저렇게 말하는 엄마가 더 얄밉고 짜증스러웠다.
 
  "이번 제사는 가족의 화합 차원에서도 중요하니까, 너도 참석해야 한다. 알았지?"
  "무슨 가족이요? 아저씨 가족은 인호잖아요. 뭐 보니까, 엄마는 곧 가족이 될 거 같고. 난 빼주시죠?"
  "아니, 이 자식이."
  "나가요. 나가라구요."

  내가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지르자, 박씨 아저씨는 못 이기는 척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저 남자가 싫다. 너무나도 싫다. 나한테서 엄마를 뺏어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기가 내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있다. 나는 저 남자의 경박스러움과 뻔뻔스러움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만다. 저 사람의 재수 없는 상판대기와 성질머리를 똑 닮은 아이가 인호이다. 나와 동갑인 그 자식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것도 같은 반이다. 부모는 이혼했고, 새아버지가 될 남자의 아들과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다니다니. 이건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린 인생이다.

  엄마가 나한테 아저씨네 제사에 참석하라고 하는 소리를 보니, 아마도 이제는 진짜 같이 살 모양인가 보다. 하긴, 지금도 같이 살고 있기는 하다. 박씨 아저씨와 인호는 1층에, 엄마와 나는 2층에 산다. 이 2층 양옥은 박씨 아저씨의 집이다. 그러니까 나와 엄마는 엄밀히 말하자면, 박씨 아저씨에게 얹혀살고 있다. 뭐랄까, 나에게 있어 박씨 아저씨, 인테리어 박은 엄마의 남자 친구이며 집주인인 셈이다. 엄마는 이제 세입자 노릇 그만하고 진짜 안방마님이 될 심산인 것이다. 안방마님이라고 하니까, 인테리어 박이 돈푼깨나 있는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인테리어 박이 알짜배기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테리어 박은 오래전에 파주의 비닐하우스 농지를 사뒀는데, 거기에 아파트가 곧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나는 맨날 후줄근한 점퍼나 걸치고 다니는 그가 그런 큰돈을 만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닌 허풍이겠지.     

  "너, 우리집 제사에 오지 마라."

  내가 밤늦게 마당에서 줄넘기하고 있을 때, 재수 없는 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야, 나도 박씨 집 귀신이 먹다 남길 음식에는 관심 없다."
  "자식, 말하는 본새하고는. 가만 보면 말이지, 넌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야,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네 아빠 닮아서 사람 긁는 게 취미 아니냐?"
  "어이, 동생. 말 좀 조심하지. 이제 내 아빠가 동생 아빠도 될 건데."
  "웃기고 있네."

  나는 인호 녀석의 속 긁는 말에 태연해지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서 곧 줄넘기를 멈추고 말았다.

  "아, 달도 밝다. 동생, 운동 더 하다 들어가라고. 이 형님은 이제 자야겠다."

  나는 저런 녀석한테 동생 운운하는 소리를 듣게 만든 엄마가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와서 문을 여니,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저녁 내내 제사 음식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이제서야 대충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저녁 내내 뺀질거리면서, 부엌일이나 좀 도와주지 않고."
  "내가 말했잖아요. 난 김씨 집안 자손이라고. 엄마나 박씨 집안 일 열심히 하세요."
  "야, 너는 자식이 되어가지고 엄마 좀 위해주면 안 되냐!" 

  비아냥거리는 내 말을 듣고는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러는 엄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대머리에다 키도 작은 박씨 아저씨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래? 그 파주에 있다는 금싸라기 땅 때문에? 정말 돈 때문에 그런 거야?"
  "넌 그게 네 엄마한테 할 소리냐? 그런 돈 되는 땅 있으면 자기 자식 주지, 아무리 좋아도 날 주겠냐? 너는 사람이 살면서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 인테리어 박이 엄마가 의지할 만한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양반이냐고. 인물이 좋아? 지금 확인된 재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낡은 2층 양옥집, 동네에 있는 인테리어 가게. 그게 전부잖아."
  "인물 좋은 건 네 아빠 하나로 족해. 적어도 인호 아빠는 나하고 너, 밥은 굶기지 않을 거다. 남자는 모름지기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나는 엄마의 그 말에 새삼스럽게 기억 속의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아빠 얼굴을 못 본 지도 벌써 5년째다. 아빠가 부산의 어느 변두리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다.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던가, 어쩌면 나에게는 이미 배다른 동생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나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낙제점이었던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큰 키와 번듯한 외모뿐이다.

  "그런데 엄마, 그 밥을 안 굶긴다는 인테리어 박이 왜 엄마가 아파트 청소 나가는 것은 안 말려? 엄마는 지금도 청소일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철딱서니 없는 거야. 어쨌든 내가 너 대학은 보내야 할 거 아니냐? 그런 돈을 인호 아빠한테 달라고 하냔 말이지. 넌 내가 낳은 자식이고, 네가 대학가는 건 내 책임이야."
  "엄마, 난 그딴 대학 안 가도 괜찮아. 그러니 제발 나한테 박씨네 제사에 참석하라느니, 그런 말 좀 하지 마. 난 그 집 사람들, 너무나 싫으니까."
  "그럼,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서 네 힘으로 밥 먹고 살든가.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며 신발은 누가 사준 거냐? 그리고 네가 살고 있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구냐? 좀 대가리를 굴려 보라고. 어떻게든 살살 비위 맞추면서 네가 살아갈 방도를 생각해야지."

  나는 엄마의 그 말에 화가 나서, 손에 든 줄넘기를 현관문 앞에다 팽개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인테리어 박과 인호가 싫은 것은 내 감정의 문제일 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이다. 17살인 내가 스스로 독립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인테리어 박에게 '아저씨'라는 호칭 대신에 '새아빠'라든지, 아니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굴욕적이다. 거기에다 인테리어 박의 아들 인호 녀석은 또 어떤가? 그 자식은 느물거리는 말투로 사람의 속을 벅벅 긁어댄다. 그런 녀석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는 한편으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가족이란 게 뭘까? 어떤 면에서 지난 3년 동안 이 낡은 이층집에서 보낸 시간들은 인테리어 박과 인호를 생판 남으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상한 가족이군.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이, 김민수. 요새 잘 지내냐? 내가 어제 화장실 낙서에서 재밌는 거 읽었다. 너 윤슬이랑 사귄다며?"
  "네가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어라."
  "아, 이 자식은 뻗대는 것도 멋있단 말이야. 저러니, 여자애들이 맨날 따라다니지."
  "나도 그 낙서 봤어."
 
  내가 '멀대'라고 부르는 저 재수 없는 녀석은 이산호다. 유도부에 들어갔다는 것만 내세우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한심한 놈에 지나지 않는다. 저런 자식 옆에서 발바닥 비비는 파리처럼 인호가 붙어있었다.

  "이산호 넌, 박인호하고 사귀냐? 너희 둘이 맨날 붙어 다니던데."
  "너, 말조심해라. 아침부터 열받게 하지 말고."
  "그러니 너무 붙어 다니지 말라고."
  "야, 산호야. 네가 참아라. 저게 겉멋이 들어 그래."
 
  나는 멀대 자식보다 그 옆에서 빌빌거리는 인호의 상판대기를 보는 것이 더 싫고 역겨웠다. 왜 저 녀석은 저러고 살까? 저런 모자란 놈 옆에 있으면 더 바보처럼 보인다는 걸 모르나? 근데 윤슬과 내가 사귄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나는 윤슬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짧은 숏커트 머리에 늘 생콩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아이에게 나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왜? 한 달 전쯤인가? 운동장에서 윤슬이 달리다가 넘어졌을 때, 내가 일으켜 세워준 적은 있지.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별로 기억나는 일이 없다.

  "있다 1층에 내려와라. 너도 제사에 참석하는 거야."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제사 음식을 2층에서 1층으로 막 나르던 참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제사에 참석할 것인가? 아니면, 엄마가 난리를 치든 말든 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버틸까? 어떤 면에서 엄마에게 이 제사는 박씨 집안 사람이 되는 공식적인 절차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래서 나더러 제사에 참석해 자기 얼굴이라도 세워주라는 것이다. 왜 박 씨 집안 제사에 김 씨 자손인 나의 참석이 구태여 필요한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러했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려고 줄넘기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여간, 우리 동생은 체력 단련에는 진심이야. 얼굴도 잘생겨, 운동도 잘해."
 
  내가 한참 줄넘기를 하고 있을 때, 인호가 어느새 다가와 이죽거리며 말했다.

  "박씨 집안 아드님, 이제 조상님 오실 텐데 제사 준비나 잘하시죠."
  "뭐 제사 준비는 댁의 어머님이 잘하고 있고요. 그나저나 너 윤슬이하고 사귀는 거 맞아?"

  나는 아침에 들은 그 이름을 또 들으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윤슬이한테 별 관심도 없어. 왜 자꾸 걔 이름을 꺼내는 거야?"
  "이 자식 봐라. 너 걔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네."

  멀대 녀석이 봤다는 화장실의 낙서가 그래서 나온 건가? 나는 인호의 그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 혹시 네가 걔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 윤슬이를 인호 네가 좋아하는 거 맞지?"
  "내가 그런 선머슴 같은 애를 왜 좋아해? 걔는 예쁘지도 않다고."

  인호는 성질이 났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예쁜 애가 너를 좋아할 리는 없지."
  "너는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생긴 게 나중에 여자들 등이나 처먹을 관상이야. 이 재수 없는 놈아."
  "진짜 윤슬이를 좋아하는 게 맞네."

  나는 신이 나서 더 짖궃게 인호를 놀려댔다.

  "김민수, 너 말이야. 네가 기억해야 할 게 있는데, 너하고 네 엄마는 우리집에 얹혀살고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아? 네 엄마가 우리 아빠 돈 보고 저러는 거."
  "이 새끼가 진짜..."

  나는 줄넘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인호의 멱살을 잡았다. 체구가 작은 인호는 팔랑거리는 바람개비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빠, 민수 자식이 날 죽이려 들어!"

  인호의 악다구니에 곧 인테리어 박과 엄마가 놀라서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대체 뭐 하는 짓들이야!"

  나는 인테리어 박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큰소리에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인테리어 박의 옆에 있던 엄마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민수, 넌 2층으로 올라가라. 오늘 저녁은 내 눈에 띄지 말어."

  인테리어 박은 바닥에 널브러진 인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 나서는 다친 곳이 없는지 인호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저런 머저리한테도 아빠가 있다. 그런데 왜 지금 내 곁에는 아빠가 없는가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딱, 딱, 딱."

  2층에서도 1층 제사상에서 두들기는 젓가락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박 씨 집 귀신들이 김 씨 집 며느리가 차린 음식을 배터지게 먹겠군. 내 심사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아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테트리스 게임을 계속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층 마당에서 지방(紙榜)을 태우는지, 매캐한 연기가 창틈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김민수, 자냐?"

  방문 밖으로 인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 너 볼 일 없다."
  "아까는 내가 좀 심했어."
  "듣기 싫다고. 가라고."

  나는 짜증이 치밀어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 갈게, 간다고. 근데 말이야. 난 너도 아줌마도 싫지는 않아. 뭐랄까, 가족 같거든."
  "가족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넌 박 씨고, 난 김 씨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나는 문밖의 인호를 내쫓지도 못하고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너 같이 잘생긴 동생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고는."
  "나, 간다."

  그렇게 인호가 내려가고 나서도 내 귓가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키가 작고 대머리인 새아버지, 나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른 비실비실한 의붓형, 그리고 엄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 이상한 가족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겨울 소슬바람이 후드득, 낙엽을 쓸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조금씩 조금씩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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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마에게


  젬마, 내가 일하는 원목실의 창문으로 커다란 벚나무가 보여요. 그 벚나무의 잎들이 노랑과 주황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문득 '마지막 잎새'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요,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 말이에요. 늙고 보잘것없는 화가 베어만은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완성하고 죽지요. 그가 그린 담벼락의 잎사귀 하나를 보고, 중병을 앓던 젊은 아가씨는 삶의 희망을 되찾고요. 어쩌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도직도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병원에 입원한 아픈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어주는 일.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내 능력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내가 원목실 소임을 맡기 전에는, 해남에 있는 수녀원 농장에서 농사짓는 사도직을 했어요. 농사일이란 게, 해보니까 참 재밌어요. 물론 힘들지요. 그런데 그 일이 내 적성하고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씨를 뿌리고 열심히 풀도 매요. 그렇게 가꾸다 보면 어느새 수확하는 거예요. 토실토실하게 자란 예쁜 고구마들이며, 속이 꽉 찬 배추들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렇게 수확한 것들을 수녀원 공동체에 나누어서 보낼 때는 마치 먼 곳에 자식 보내는 심정이 되기도 하고. 그런 말이 좀 우습게 들리나요? 하지만 나는 농사일하면서 참 행복했어요.

  그런 농사일에 비하면, 이곳 병원에서의 사도직은 좀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아요. 아픈 사람들은 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니까, 잘 들어줘야지요. 환자들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요. 그게 싫고 귀찮다기보다는... 내가 그분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더라고요. 젬마한테 내가 어떻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줄지 생각해 보았어요. 그게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늙은 화가 베어만이 마지막 잎새를 그리듯 이런 편지라도 쓰고 싶었답니다.

  젬마가 무단으로 외출해서 하루 동안 연락이 안 되었었잖아요. 그때, 내가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혹시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젬마의 언니한테 내 휴대전화 번호를 남기면서 늦게라도 좋으니, 젬마 소식을 알려달라고 했었지요. 밤 10시에 언니가 젬마를 찾았다고 연락했을 때,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군요. 부모님을 모신 추모 공원이 꽤 먼 곳이었는데, 그 아픈 몸으로 어떻게 젬마가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젬마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을 거예요.

  젬마하고 같은 병실에 있었던 로사 자매 기억나요? 50대 중반으로 체격이 꽤 큰 아주머니 환자요. 그 자매는 난소낭종으로 난소와 자궁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나중에 들으니, 낭종의 무게가 무려 7kg이나 되어서 수술팀이 다들 놀랐다고 해요. 그런 큰 수술을 받았는데도, 로사 자매는 아주 쾌활했어요. 이제 그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일도 없고, 오히려 가볍게 살 수 있다고 하면서요. 로사 자매는 동대문 시장에서 이불 장사를 30년 넘게 했어요.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에 세 명의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자기 돌볼 틈도 없었다고 해요. 어느 날부터 자꾸 배가 나오고 속이 불편해서, 소화기내과를 갔대요. 거기에서 내시경을 해보고는 문제가 없어서, 의사가 부인과 진료를 받아보라 했다는군요. 그러고 나서야 그게 난소낭종인 걸 알게 된 것이지요. 낭종이 커지기 전에 일찍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래도 그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 자매의 의연함이랄지, 어쩌면 그것은 나이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어요.

  로사 자매와는 달리, 어떤 의미에서 젬마에게는 스물넷의 젊음이 고통으로 다가오겠지요. 젬마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그렇게 물었었지요.
 
  "수녀님, 여자로서 제 인생은 이제 끝난 거죠? 정말 그렇죠?"

  초췌한 얼굴로 나에게 묻는 젬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내가 그 어떤 말로 위로를 한다고 해도, 젬마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젬마의 그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젬마, 내 이야기를 좀 할까요? 나에게는 아주 착하고 예쁜 조카가 있었어요. '있었다'라고 말하는 건, 그 아이, 지수가 이제는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수는 혈액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떴어요. 지수의 나이 여덟 살 때에요. 그때가 나의 인생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때였지 싶어요. 그 어린아이의 죽음이 나의 신앙과 삶을 온통 뒤흔들었으니까요. 왜 아무 죄도 없는 그 아이가 죽어야만 했을까요? 나는 하느님께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어요. 도저히 지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왜 그런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왜 그 아이가 그토록 고통받다가 죽어야 했는지, 어떻게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거든요.

  그 가느다란 팔에 혈관을 찾지 못해서 여러 번 주삿바늘을 찌를 때, 지수가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요. 동생이 그러더군요. 저걸 보느니, 아이가 그냥 얼른 가버렸으면 한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지수가 눈을 감았을 때, 우리 가족은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어요. 지수가 더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지수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었어요. 지수의 하나뿐인 소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요. 나는 젬마의 퇴원을 보면서, 젬마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했어요. 젬마, 젬마는 집에 가서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하고 싶은가요? 어쩌면 한 달 동안 쓰지 못한 책상의 먼지를 닦아낼 수도 있고, 이제 계절이 바뀌니까 옷장의 옷들을 살펴볼 수도 있겠네요. 나는 무엇보다 젬마가 식탁에 앉아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 좋겠어요. 

  젬마, 젬마가 나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 이제는 내가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로서의 삶,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로서의 삶은 사라진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젬마에게 여전히 펼쳐진 길이 있어요. 한 인간으로서의 길 말이에요. 그 길 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젬마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러니 한번 걸어가 보는 거예요.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그 길을 젬마가 잘 걸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것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주치의 선생님에게 들으니, 다행히도 주변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되지 않았다고 해요. 만약에 전이가 되었으면, 힘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안하게 되었으니까요. 병원에 다니면서, 계속 정기적으로 추적 관찰하면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요. 지금은 큰 수술을 받고 힘든 상태니까, 모쪼록 몸조리 잘하면서 지내는 것이 중요해요. 앞날의 일을 생각하는 건 잠시 미뤄두고요.

  병원에 오게 되면 원목실의 나를 찾아주어요. 어쩌면 젬마는 나를 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도 같아요. 원목실에서 5년을 있어 보니 알겠더군요. 병원에서 힘든 투병 생활을 했던 환자들이나 그 가족들은 병원을 시련의 장소로 기억한다는 사실을요. 마치 전쟁터의 병사가 자신이 치열하게 싸웠던 그곳을 찾는 것을 꺼리듯, 병원이 불안과 공포의 장소로 각인되는 것이지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편의 임종을 본 아주머니가 나중에 나에게 그런 말을 내게 하더군요. 이 병원의 모든 것이 끔찍하게 싫다고요. 그래서 병원도, 이곳에 있는 수녀님도 다시는 찾지 않게 될 것 같다고 말이지요.

  젬마, 나를 다시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내가 젬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젬마에게 일어난 일을 '왜'라고 물으면서 구태여 그 답을 찾지는 않았으면 해요. 나도 지금까지 지수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났을 뿐이다. 왜 나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그런 생각에 이르자, 하느님을 원망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더군요. 여전히 고통의 하늘은 열려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날들이 남아있어요. 젬마가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젬마의 살아온 그날들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사랑을 담아, 베로니카 수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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