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일본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면서 화족(華族)제도를 폐지한다.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진 귀족 제도의 폐지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체제 정비의 차원에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요시무라 코사부로 감독의 '안조가의 무도회(安城家の舞踏會, The Ball at the Anjo House)'는 바로 그 해, 화족 제도가 폐지된 1947년에 개봉되었다. 영화는 귀족의 지위에서 평민으로 살아야하는 안조 가문의 시련을 담아냈다. 시나리오는 신도 카네토가 맡았는데, 그는 안톤 체홉의 희곡 '벚꽃 동산'을 참조해서 각본을 완성했다. '벚꽃 동산'은 제정 러시아 말기 몰락하는 귀족 가문을 그려낸 작품이다.

  안조가의 대저택은 빚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사업가 신카와는 안조 저택의 새주인이 되려는 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안조 가문의 막내딸 아츠코(하라 세츠코 분)은 이제는 운수업체 사장이 된 전직 운전기사 토야마에게 저택을 넘기려고 한다. 토야마는 아츠코의 큰언니 아키코를 오랫동안 연모해 왔다. 그러나 아키코는 토야마를 천한 신분이라며 멸시하고, 토야마는 그런 아키코에게 실망한다. 아키코의 오빠 마사히코는 탕자로 집안의 몰락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안조가의 마지막 무도회가 열리는 날, 신카와는 딸 요코와 마사히코의 약혼을 파기하며 안조 저택을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과연 안조 가문의 사람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안조가의 저택을 장식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장식품들이다. 파리 유학 시절 미술을 배운 안조 백작의 방은 온통 서양화로 가득차 있다. 아들 마사히코의 방에는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 그림이 걸려있다. 대부분 서양풍인 장식물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다. 사무라이의 갑옷이 그것이다. 토야마는 아츠코의 설득으로 저택을 사들이고 새로운 주인이 되지만 자신이 멸시받는 것을 잘 안다. 술에 취해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그가 갑옷 장식품을 쓰러뜨린다. 이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귀족 집안의 운전기사였던 그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부를 축적했다. 몰락해가는 귀족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분으로 등장한 신흥 사업가가 안조가의 주인이 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안조 백작이다. 그는 자신의 하인이 안조 저택의 새주인이 되는 것도, 귀족이 아닌 평민으로 살아나가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그가 택하려는 방식은 '죽음'이다. 그는 마치 주군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할복하는 사무라이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칼 대신에 총으로 죽으려는 그를 막내딸 아츠코가 막는다. 아츠코는 새로운 시대에 희망을 갖고 살자며 아버지를 설득한다. 하라 세츠코는 안조가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사람인 아츠코를 연기한다. 세츠코가 영화의 마지막에 발코니에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보여주는 환상적인 미소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상징한다. 그 장면은 전후 일본의 패배감을 위로하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안조가의 무도회'를 만든 요시무라 코사부로 감독은 전쟁 시기, 일본의 국책 선전 영화를 꽤나 열심히 찍었던 감독이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찬동하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담은 영화들을 찍었다. 종전 후, 그도 생존을 위해 변해야만 했다. '안조가의 무도회'는 그런 그에게 변화의 발판이 되어준 영화이다. 그는 이후 1950년대에 주로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찍으며 호평을 받는다. '안조가의 무도회'는 몰락한 귀족의 생존기에 대한 영화임에도 어떤 면에서는 요시무라 코사부로 감독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새로운 시대에 변화를 받아들이며 발빠르게 적응했던 그는 감독으로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미소에는 기이한 낙관주의가 엿보인다. 아츠코는 죽으려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거실 정면에 걸려있는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언급한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온갖 훈장으로 장식한 초대 백작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안조가는 생존을 위해 자수성가한 하인의 돈에 기대야 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과거의 황실과 제국에 있음을 보여준다. 안조가는 과거와 결별한 것이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종전 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수면아래에 가라앉았다가 1950년대의 냉전 시기를 거치며 서서히 다시 부상하게 됨을 암시하는 장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패전국의 국민으로서의 열패감은 미 군정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전후의 현실 인식은 '책임'보다는 '자존감 회복'에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어떻게든 생존해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 일본은 비참한 현실을 이겨내려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안조가의 무도회'가 보여주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내면 풍경인 셈이다.

  '안조가의 무도회'는 그런 면에서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가족 드라마는 아니다. 안조가는 비록 자신들의 저택을 신흥 자본가에게 넘겼지만, 그들의 정신과 정체성까지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후 일본의 역사적 여정과 맞닿아 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재부상, 우익들의 세력 확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츠코로 분한 하라 세츠코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마지막의 그 환한 미소에는 어쩌면 그 서늘한 미래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amebl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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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자신의 첫 영화를 보기좋게 말아먹었다. 낙담하고 있는 그에게 한 영화인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것을 제의한다. 남자의 재능을 알아본 그 사람 덕분에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쓴 초고에 자신의 경험을 잘 섞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첫 영화가 망해버린 탓인지 제작비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마침내 시작된 영화 촬영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서로 친해진 주연 배우들은 숙소에서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자동차 경주 촬영 장면을 찍다가 스태프 2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기껏 영화를 찍었더니, 제작비를 대준 영화사는 어째 흥행이 안될 것 같다며 TV용으로 돌리자는 말을 꺼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 대박이 터졌다. 제작비의 무려 18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을 낸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은 한 방'이라는 것을 남자는 입증해 보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지 루카스, 그와 함께 영화를 제작한 사람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이 영화로 역대급의 수익을 올린 영화사는 유니버설 픽처스다.


  바로 그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는 네 명의 고교 동창생들이 보낸 하룻밤의 여정을 담아냈다. 내일이면 대학이 있는 도시로 떠나는 모범생 커트(리처드 드라이퍼스 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여자 친구와의 이별에 고민하는 스티브(론 하워드 분), 자동차 경주에 목숨을 거는 존(폴 르 맷 분), 여자를 사귀고 싶어서 안달이 난 토드(찰스 마틴 스미스 분)는 하룻밤 동안 모험의 여정을 떠난다. 그들의 여정에는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자동차와 신나는 로큰롤 음악, 그리고 디스크 자키 잭 울프의 라디오 방송이 함께 한다. 그 여정이 끝날 때 즈음, 네 명의 친구들은 새로운 '발견'과 '성장'을 이루어 낸다.


  루카스는 자동차광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이 영화에 아낌없이 드러낸다. 온갖 종류의 클래식카들이 등장하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동차를 매개로 대화하고 소통한다.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차는 필수적이다. 차가 없는 토드는 스티브가 빌려준 차를 가지고 비로소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도발할 때 이루어지는 대화들도 창문을 연 차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마음속 깊은 고민과 감정들을 토로하는 장소도 차 안에서이다. 이쯤되면 자동차는 금속덩어리 기계가 아니라,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자동차가 영화의 시각을 지배한다면,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했던 로큰롤 음악은 관객의 청각을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시대의 노래들은 이 영화의 주요한 뼈대를 이룬다. 영화의 포스터 문구 '1962년에 여러분은 어디 있었나요?'라는 문구가 꽤나 흥미롭다. 신나는 로큰롤 음악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관객들이라 하더라도 영화 속 그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사운드트랙 음반도 대박을 터뜨렸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지나간 바로 이전 시대에 대한 복기()와도 같았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이후에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약물에 절은 히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청춘 낙서'속의 네 명의 친구들 이야기는 마치 그러한 혼란과 격동의 시대 직전에 찍은 인물 사진 같다. 그들이 보여주는 온갖 객기와 자유로움은 1962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 좋았던 시절의 끝을 가리킨다. 작가가 된 커트, 보험회사 외판원이 된 스티브, 자동차 사고로 죽은 존, 베트남전에서 실종된 토드. 청춘의 낙서가 흐릿해지는 10년 후의 이야기는 그러했다. 이 영화의 대단한 흥행 기록은 어쩌면 과거의 향수로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려고 했던 당시 관객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춘 낙서'의 대성공으로 루카스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비로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루카스의 '스타워즈'시리즈는 이 영화의 성공 위에 쓰여졌다.


  이제는 50년의 나이를 먹어버린 영화 '청춘 낙서'는 오늘날의 관객이 보아도 흥미롭고 새롭다.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또한 할리우드 대스타의 아주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즐거움을 준다. 이십대의 풋풋한 리처드 드라이퍼스(그는 100명의 오디션 경쟁자들을 제치고 캐스팅되었다)와 함께 진짜 젊은 해리슨 포드(당시에 그는 목수일과 배우를 병행했다)가 나온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조지 루카스다. 이제는 디즈니의 대주주가 되어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의 진정한 인생 역전은 이 영화, '청춘 낙서'에서부터였다. 



*사진 출처: cinemu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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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나서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아주 형편없거나, 반대로 매우 좋거나 하는 경우에는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그저 그런, 딱히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영화들은 뭔가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브라질 출신의 감독 알레 아브레우가 2013년에 만든 이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보이 앤 더 월드(The Boy and the World)'는 150여개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47개의 영화상을 받아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존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되는 색감과 작화가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도 묵직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 감명은 받지 못했다. 솔직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소년 쿠카는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낀다. 농사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쿠카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쿠카는 아빠를 그리워하다 아빠를 찾으러 집을 나선다. 그러니까 '보이 앤 더 월드'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면 '아빠 찾아 삼만리'가 되겠다. 알레 아브레우는 쿠카의 여정 속에 브라질의 근현대사를 펼쳐놓는다. 가난한 농민을 수탈하는 지주,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나는 공장 노동자들,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주의자들, 민중을 억압하는 군부와 독재자... 확실이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느 상영회에서는 이걸 보다 아이가 무서운 나머지 울었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아이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어렵고 상징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4년이 걸렸다는 제작 과정은 애니메이션의 작화 과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다.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색감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들의 묘사는 정말 빼어나다. 그런데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꽤 무겁다. 특히 감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 강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면직물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묘사되고 있다. 자동화 기계를 들여오는 자본가는 악인처럼 등장한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가는 장면에는 무수한 컨테이너와 소비와 향락을 조장하는 TV 광고들이 교차 편집된다. 삼림을 불태우고 자연을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실사 자료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결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 아니며, 복잡한 정치적 서사를 품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매우 무미건조하게 펼쳐진다. 어른들을 위한 본격 잔혹 동화 같다.

  나는 그쯤에서 작은 의문을 품는다. 저렇게 독창적이고 눈길을 끄는 작화 속에 왜 그토록 딱딱한 이야기들을 끼워넣었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에 많은 구조적 불평등과 잘못된 정치 체제, 자본의 횡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보이 앤 더 월드'는 그걸 요약해서 그림으로 보여준다. 뭔가 다 아는 이야기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만들었다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에서 원하는 것은 꿈과 희망이지, 고통스럽고 너절한 현실이 아니다. 적절히 순화되고 가공된 현실, 그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그 기대를 깨버린다. 무겁고 과도한 정치적 메시지가 그림을 압도해 버린다.    

  아빠를 찾아 길을 떠났던 쿠카는 노인이 된 모습으로 자신이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집 밖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자연 속에 머물고 있다. '보이 앤 더 후드'는 어린 쿠카가 바라본 절망과 부조리가 가득찬 현실에 그렇게나마 희망의 씨앗을 던지며 끝낸다. 이 맥아리 없는 애니메이션 대신에 '이웃집의 토토로(1988)'를 한번 더 보며 아련한 추억과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commonsense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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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사람 키만한 커다란 우체통이 설치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북경의 우편배달부 샤오두는 상사로부터 새로운 구역의 배달 업무를 부여받는다. 전임 집배원은 배달해야할 편지들을 몰래 뜯어본 혐의로 체포되었다. 매우 내성적이고 다른 이들과 그 어떤 교류도 하지 않는 샤오두는 결혼한 여동생 부부와 살고 있다. 여동생은 신혼집을 구해놓고도 오빠를 떠나지 못한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뜬 후로 둘은 어린 시절부터 의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뜯어서 보게 된 편지 한 장을 시작으로 샤오두는 몰래 남들의 편지를 뜯어서 보는 것이 일과가 된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편지의 사연을 읽고 자신의 맘대로 답장을 위조해 보내기도 한다.

  '포스트맨(郵差, 1995)'은 중국 6세대 감독 허지엔준의 2번째 장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촬영은 중국에서 했으나, 후반 작업은 해외에서 해야만 했다. 중국 정부의 검열에 걸려서 작업을 더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영화는 9년이 지난 2004년이 되어서야 해금되어서 자국에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 '포스트맨'은 매우 불편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샤오두가 배달해야할 편지를 몰래 뜯어서 읽는 행위 자체도 문제가 있는데, 편지의 인물들과 내용들도 예사롭지가 않다. 매춘부의 사랑 이야기, 동성애자들의 마약 중독 문제,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중국 정부 당국이 진짜 열받을 만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한 편지들은 샤오두를 점점 더 비윤리적인 행동에 둔감하게 만든다. 죽은 아들의 소식을 모르는 노부부에게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편지를 써보낸다. 편지의 사연으로 여자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것을 알고는 스토킹을 하기도 한다. 관음증은 타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샤오두는 여동생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까지 품게 된다. 감독 허지엔준은 정말 갈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었을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불쾌함과 혼란을 안겨준다. 거기에는 불친절하고 모호한 서사도 한몫을 한다.

  샤오두가 읽는 편지의 사연들은 특정되지 않은 여러 목소리들로 재생된다. 관객들은 편지의 인물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편지 훔쳐읽기에 중독된 그는 점점 더 대담해진다. 매춘부와 게이의 집을 직접 찾아가보는 패기까지 보이는데, 샤오두의 방문을 받은 그들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마약 중독자 게이는 샤오두에게 마약의 느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포스트맨'은 마치 북경이란 도시의 더럽고 음침한 지하 하수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 도시 사람들의 비밀을 보여주겠어요, 그건 말이죠... 허지엔준은 '편지'라는 소재로 관객들을 그 비밀의 미로로 안내한다. 관객들은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일그러진 면면을 확인하게 된다.

  1995년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는 이 영화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포스트맨'은 같은 해, 데살로니키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싱가포르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촬영과 사운드는 저예산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며, 서사는 파편화되면서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중국 정부의 검열 정책에 맞서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와 맞닿아 있다. 그 점만이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상사는 샤오두에게 배달 업무를 잘 해냈다며 다른 구역을 더 맡긴다. 그곳은 새롭게 지어진 번화한 상업지구이다. 영화의 처음처럼 마지막도 샤오두가 설치하는 우체통이 보인다. 도시는 커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더 많이 모일 것이다. 어쩌면 샤오두가 설치하는 우체통은 차마 말하지 못한 은밀하고 고통스럽고, 더러운 욕망들의 집합소를 상징하는 것인지 모른다. 허지엔준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본 시대의 음울한 내면을 '포스트맨'에 담아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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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보면 허술하고 우스운 부분도 있겠지만, 의외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면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공자우의 자객들이 심야의 공터에 장기판을 그려놓고 부홍설과 연남비를 장기 두는 것처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 부홍설은 자객들의 꽤 공들인 장기판 세팅을 그리 어렵지 않게 무력화해버리기는 한다.

  이 영화에서 또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노파 자객의 등장이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노파 자객의 활약은 생각보다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와호장룡(卧虎藏龙, 2000)'에 나오는 푸른 여우의 선구적 캐릭터처럼 보일 정도다. 무협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약하고 울기나 하는, 때로는 짐짝처럼 귀찮은 존재처럼 그려질 때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여성 자객들도 여럿 나온다. 또한 음흉하기 짝이 없는 기생 명월심 캐릭터도 있고, 지고지순한 추옥정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빈약한 서사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대결-이동-대결-이동'에 좀 지칠 무렵, 부홍설은 공자우의 근거지에 들어간다. 가면을 쓴 공자우와의 대결에서 이기고 보니, 상대가 연남비였다. 그는 가짜였다. 진짜 공자우는 명월심을 보내 부홍설에게 자신의 밑에 들어오면 부와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부홍설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강호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고향과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 방랑의 세월을 보냈던 그에게 돈과 권력, 여자는 먼지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는 마치 도인처럼 행동한다. 영화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초연한 부홍설의 과거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그가 엄청난 무공을 가졌다는 것과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만난 가난한 창녀에게 밥을 사주고 여비를 건네는 모습은 상남자 그 자체이다.

  다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천애명월도'는 칼의 이름이 아니다. '천애(天涯)', 이승에 살아있는 핏줄이나 부모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명월(明月)'은 그가 한 때 마음을 주었던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기생 명월심을 가리킨다. '도(刀)'는 칼 하나에 의탁해 강호를 떠도는 부홍설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이라는 고독한 검객의 방랑 서사를 일컫는 제목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의 내적 여정은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오직 그의 출중한 무공만을 펼쳐서 보여준다. 과감한 물량 공세가 돋보이는 대결 장면들에 비해 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적룡의 능수능란한 무술 연기와 다양한 장치들이 등장하는 대결 장면들을 보는 것으로도 나름대로 즐겁다. 적룡이 휘두르는 검이 특이한데, 팔에 끼운채 회전이 가능하며 쇠줄까지 장착된 검이다. '천애명월도'는 강대위와 더불어 쇼브라더스 무협 영화의 주역이었던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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