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눈길을 끈다. 히치콕의 '사이코(Psycho, 1960)'를 본 이들이라면 검정 바탕에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멋지게 배열되는 오프닝 타이틀을 기억할 것이다. '새장 속의 여인(Lady in a Cage, 1964)'의 오프닝 타이틀도 그에 못지않게 강렬하다. 마치 관객들에게 앞으로 볼 이 영화에 대한 선명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잔혹성에 놀라게 된다. 1960년대에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폭력과 광기에 대해 다루었던 영화가 있었던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 영화는 기괴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부유한 힐야드 부인(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분)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골절상을 입은 후로 집에서 이동하기 쉽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그런데 아들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전기에 문제가 생겨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힐야드는 그대로 갇혀 버린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면 집밖에서 경보음으로 들리게 되어있는데, 독립기념일 행사로 시끄러운 거리에서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노숙자 술꾼 조지는 힐야드의 집을 기웃거리다 침입하게 되고, 힐야드가 갇힌 것을 보고는 크게 도둑질을 할 기회로 여긴다. 조지는 매춘부 세이디를 불러서 같이 집을 털기로 한다. 그런 그들을 불량배 3인방이 몰래 뒤따라 온다. 랜들(제임스 칸 분), 일레인, 에시는 조지와 세이디를 제압하고 힐야드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힐야드는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공중에 매달린 새장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 자신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조지와 세이디, 힐야드를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한 랜들. 과연 힐야드 부인은 이 엄청난 재앙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영화 '대부(1972)'에서 콜레오네 가문의 장남 소니로 나왔던 제임스 칸은 이 영화가 실질적인 데뷔작이다. 당시 24살의 제임스 칸은 미친 것 같은 폭력성과 잔혹성을 지닌 인물 랜들을 연기한다. 랜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스럽기 짝이 없고, 온 집안을 헤집으며 일으키는 난동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힐야드는 그런 랜들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랜들은 힐야드를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을 주면서 금새라도 죽여버릴 것처럼 위협한다. 값비싼 장식품과 귀금속에 둘러싸여서 시를 읊고, 화병의 꽃이나 신경쓰며 살아온 힐야드의 일상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모한다. 휴가를 떠난 아들, 길거리의 행인, 경찰, 그 누구도 힐야드를 도울 수 없다. 게다가 애지중지 아끼던 아들은 엄마의 지나친 애정에 더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며 편지를 써놓고 가버렸다. 랜들이 읽어준 아들의 편지는 힐야드를 극도의 공황 상태로 몰아간다.

  '새장 속의 여인'에서 힐야드 부인에게 닥친 재난은 부유한 중산층이 가진 무의식적인 공포를 형상화한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안락한 삶이 언제든 원치않는 타자에 의해 위협받고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 영화의 도입부에 보이는 이 집안의 화려한 실내 장식들은 침입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부서지고 귀중품은 노략질의 대상이 된다. 힐야드가 '짐승'과 '쓰레기'로 부르는 도둑들은 계층적으로는 맨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다. 술꾼과 매춘부, 불량배, 이들은 모두 힐야드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크게 한탕해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 그 도둑들 사이에서도 위계가 존재한다. 마치 약육강식의 세계처럼 힘없는 술꾼은 곧 죽임을 당한다. 랜들과 일레인, 에시가 저지르는 폭력과 광기의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도를 더해갈 뿐이다. 이 상황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힐야드에게 구조의 손길은 멀기만 하다.

  조화롭고 안온하게 보이는 일상의 삶이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를 당시의 미국인들은 이미 겪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의 위험을 상기시켰다. 그런 정치적 사태에 더해 1964년에 있었던 키티 데이비스 사건은 일상 속에서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새벽에 귀가하던 여성이 주택가에서 칼에 찔려서 죽어가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35분 동안의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상당수 불이 켜진 집에서 그 누구 하나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타자에 대한 극단의 공포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루터 데이비스는 대낮의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성이 당한 범죄 사건에서 설정을 따왔다. 일상은 언제든 범죄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지옥으로 변할 수 있음을 당시의 사람들은 체감했다.

  이 영화에는 언제든 폭발할 것 같은 엄청난 폭력성이 시종일관 흘러내린다. 관객들은 엘리베이터 속에 갇혀서 무기력하게 그 폭력과 광기를 목도하는 힐야드 부인이 된다. 1964년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묘사의 수위는 충격적이었고, 그 때문에 '새장 속의 여인'은 결코 호평을 받는 작품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이 영화를 TV 방영은 물론 극장 개봉도 하지 않았다. 무려 36년 동안 모종의 금지 조치가 이어졌다(indiwire.com 기사 참조).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극대화된 폭력의 정서는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독 윌터 그라우만은 일상을 틈입하는 범죄가 가져오는 충격과 공포, 두려움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것은 계층적 갈등과 충돌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중산층의 하층 계급에 대한 은밀한 멸시와 두려움은 침입과 상해, 파손과 같은 형태로 구현된다. 마침내 구조된 힐야드 부인의 흐느낌과 절망스런 표정 위로 찍히는 'The End'는 그 악몽과도 같은 일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음에 대한 역설적인 각인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binged.com 힐야드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온몸을 내던지는 열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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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영화 관련 기사를 읽다가 웨스 앤더슨이 추천하는 영화 목록을 보게 되었다. 관심있는 감독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감독의 영화 취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져서 살펴보았다. 그가 추천한 10편의 영화 가운데 내가 아는 영화는 하나 밖에 없었다. 'Winter Kills(1979)'도 목록에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찾아보니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냥 안좋은 것이 아니라 혹평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안보는 것이 낫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죄다 형편없다고 말하는 걸까 싶었다.

  영화의 원작은 리처드 콘돈이 쓴 동명의 소설이다. 콘돈은 영화 'The Manchurian Candidate(1962)'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는 주로 정치 소설을 쓴 다작 작가였다. 소설 'Winter Kills'는 그가 1974년에 발표한 소설로 케네디의 암살을 소재로 여러 음모 이론을 접합시켰다. 이것을 윌리엄 리처트가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감독까지 했다. 영화는 정말이지 초호화 캐스팅에 돈을 엄청 들인 티가 난다. 주연 배우로는 제프 브리지스, 존 휴스턴, 앤서니 퍼킨스가 나온다. 거의 단역에 가까운 배역임에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가 나온다. 갑자기 집사 역으로 등장한 미후네 도시로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미후네 도시로는 일본에 본인의 제작사가 있어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도 출연료 욕심이 났던 걸까? 몇 마디 안되는 영어 대사 하려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까지 왔나 싶었다. 뭔가 처량하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마찬가지. 테일러는 대사도 없다. 짧은 장면 등장하는데 그것도 크레딧에 올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이 영화가 1983년에 재개봉되었을 때 겨우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윈터 킬'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대통령이었던 이복형을 암살로 잃은 닉 키건(제프 브리지스 분)은 암살범을 자처하는 인물의 죽기 전 고백을 듣게 된다. 암살범은 암살 현장 근처에 사용한 총기를 숨겨두었다면서 그 장소를 닉에게 알려준다. 자신의 친구와 현장을 찾은 닉은 총을 찾아내는데 그 직후에 그의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아버지(존 휴스턴 분)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고, 파 키건은 닉에게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유력 인사들을 소개해 준다. 그러나 닉이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과거 암살과 관련된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사건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진다. 과연 닉은 암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성과가 없는 일이다. 원작자 리처드 콘돈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온갖 음모 이론을 총집합해 놓았고, 영화는 그것들을 정신없이 나열한다. 그냥 늘어놓기만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감독 윌리엄 리처트는 상당히 튀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릴러에 코믹적인 요소를 더한다고 애를 썼다. 영화는 실패한 코미디에 얼척없는 서사가 겹쳐서 그야말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리처트의 시도는 처참한 흥행 실패로 끝났다. 엄청나게 끌어다 쓴 제작비를 갚지 못해서 제작자 한 명은 개봉을 앞두고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마약 관련 범죄로 기소당했다. 영화의 판권은 조각나서 팔렸다. 리처트는 나중에 어떻게 돈을 모아서 자신이 영화의 저작권을 사들여 재개봉했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영화다.

  '윈터 킬'이 절대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미국인들의 근원적 정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명백히 케네디의 암살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그 비극적인 사건은 한심하고 조잡스러운 추측과 음모 속에서 쓰디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미국인들에게 케네디는 미국의 이상과 꿈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을 두고 '윈터 킬'은 마구잡이로 난도질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도 실패한 작품이다. 소수 컬트팬들의 호응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구제불능에 가까운 이 영화에 구원의 빛을 드리우지는 못한다. 

  그나마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 보기를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존 휴스턴의 연기 재능도 확인할 수 있고, 아주 젊은 날의 제프 브리지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앤서니 퍼킨스의 짧지만 강렬한 연기도 좋다. 그런 배우들의 좋은 연기들이 이 처참한 영화 속에서 갈려나간다. 'Winter Kill'은 겨울의 추운 날씨에 호수나 강의 얼음이 두껍게 얼어 물고기들에게 필요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서 죽는 현상을 가리킨다. 영화의 제목처럼 '윈터 킬'은 그 어떤 장점도 영화 속에서 질식해서 죽은 상태라 찾기가 어렵다. 이런 영화를 자신의 이름을 건 추천 목록에 올린 웨스 앤더슨은 정말 독특한 영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zekefilm.org 파 키건 역의 존 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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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길을 걷다가 갑작스런 여름 소나기를 만난다. 건물 처마밑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 그러나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들이치는 비에 옷이 젖는 것도 난감하다. 마침 서있던 남자 하나가 자신의 외투를 우산 삼아 쓰라고 건넨다. 여자는 고맙다고, 옷을 꼭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자리를 뜬다. 영화 초반부에 이런 설정이 나왔으면 옷을 돌려주는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뭐 이런 이야기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말렌 쿠시예프(Marlen Khutsiev) 감독의 1967년작 '7월의 비'는 그런 관객의 기대를 크게 비켜간다. 남자가 전화를 하긴 했다. 그런데 여자는 마침 일하던 중이라 남자에게 다시 연락달라고 하고서는 끊는다. 그러고서 그 남자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 상당히 특이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남다르다. 길거리의 사람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배경음으로 깔리는 것은 주파수가 바뀌면서 들리는 라디오의 다양한 채널 소리다. 클래식 음악부터 스포츠 중계에 이르기까지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흘러 나온다. 지나가는 일반인들이 카메라를 낯설게 응시하는 장면도 찍힌다. 그러는 가운데 주연 여배우가 등장한다. 그런데 배우가 카메라를 자꾸 의식하면서 여러 번 바라본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인데...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가 보인다. 이 영화에는 동시대의 영화 사조인 누벨바그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공 레나의 집은 공동 주택인데 복도에 전화가 있다. 레나가 남자 친구의 전화를 다른 날 여러 번 받는 장면에서는 점프컷으로 연속해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말을 싣고 가는 트럭을 보여줄 때는 말 울음소리에 맞추어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에 나오는 캉캉 음악이 흘러나온다. 스윙글 싱어즈(Swingle Singers)의 'Jazz Sebastian Bach', 루이 암스트롱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장밋빛 인생'도 나온다. 음악도 아주 감각적으로 잘 썼다.

  주인공 레나는 서른 즈음의 여성으로 인쇄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비슷한 나이의 남자 친구 제냐는 국영 연구소에 근무하는데, 친구들이 많은 그는 자주 모임을 갖는다. 레나도 제냐를 따라 모임에 참석한다. 영화는 7월에서 이듬해 5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담는다. 여름비가 쏟아지던 7월, 레나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 가을, 그리고 남자 친구의 청혼을 거절하는 봄에 이르기까지 레나의 마음은 그렇게 일렁거린다. '7월의 비'에는 극적이라고 할 만한 서사가 없다. 제냐의 친구들 모임에서 쏟아지는 여러 대화들은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다. 그들이 강 근처 교외에서 고기 구워 먹는 장면에서는 케밥(kebab)의 기원이 어디냐를 두고 티격태격한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독화살촉에 쓰는 개구리독 큐라레(curare)이야기며, 끝말잇기 놀이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영화는 그렇게 무의미하게 넘치는 대화들 속에서 진정으로 소통하기 보다는 이리저리 부유하며 외로워하는 현대인의 마음 속 풍경을 보여준다.

  말렌 쿠시예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위적인 것 대신에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 세트 촬영을 배제하고 대부분 야외 촬영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도 보인다. 실제로 쿠시예프 감독은 '자전거 도둑(1948)'을 처음 보았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모스크바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전차와 버스가 오고가는 장면, 거리의 사람들, 어느 대사관 앞에서 찍은 장면은 각국의 외교관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풍경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시를 살았던 러시아인들은 1966년의 모스크바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그 시절은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해빙기의 끝무렵이었다. 흐루시초프 집권기였던 1953년에서 1964년에 이르는 시기는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른바 '해빙기'라고 불리던 시대는 수구적인 브레즈네프의 등장으로 서서히 막을 내린다. '7월의 비'는 녹았던 얼음이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7월의 비'는 소련 당국에 의해서 무분별하게 서구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반동적인 작품으로 매도되었다. 영화 산업을 국가가 관리 감독하던 시대에 이 영화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짧은 개봉 기간에 이어 영화사 창고에 처박히는 운명을 맞았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장면이었다. 주인공 레나는 화창한 봄날의 전승절(5월 9일, 2차 대전에서 소련이 독일에 승리를 거둔 날로 가장 큰 국가적 경축일이다) 행사가 치뤄지는 거리를 걷는다. 참전 군인들은 서로 얼싸안으면서 기쁨을 나누는데, 그에 반해 젊은 세대들의 얼굴 표정은 다소 심드렁하게 보인다. 젊은이들은 떠들썩한 전승절 행사에 별 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 사이로 소년이 얼굴을 수줍게 내미는 장면이 영화의 끝을 장식한다. 말렌 쿠시예프는 서로 다른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화합이나 희망의 메시지 보다는 단절과 무관심을 담아냈다. 그 장면이 소련 당국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이 영화는 한동안 차가운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   

  솔직히 나는 '7월의 비'를 보면서 1967년에 소련에서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 있었다는 데에 놀랐다. 말렌 쿠시예프는 당대의 사조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작가적 관점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무척 매력적이고 도전적이기도 했다. 창작의 자유가 여유롭게 넘쳤던 평화로운 시절은 끝나가고 있었다. 주인공 레나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슬퍼할 때, 같은 층에 사는 소년이 사과 한 알을 건네는데 레나는 그 사과에 깃든 위로를 고마워 한다. 전승절 날, 레나는 노점상에서 산 사과를 먹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곧 따뜻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 '7월의 비'는 다시 시작될 춥고 긴 겨울의 날들 앞에 선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바쳐진 시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newlit.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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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최근에 남동생을 잃었다.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인간은 경찰이 사고사로 결론내렸다며 뻔뻔하게 나온다. 남자는 분노의 눈물을 삼키지만 별 다른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놈이 찾아온다. 남자에게 자신의 복싱 스승이 되어달라고 간청한다. 남자는 전직 복서로 체급 챔피언의 자리에 있었으나 갑작스레 시합을 포기하고 복싱을 그만 두었다. 아내와 딸도 버리고 오직 도베르만 한 마리만을 돌보며 산다. 전단지를 붙이며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사는 삶. 그런 그가 원수 같은 놈을 위해 그 청을 수락할까? 테라야마 슈지 감독의 1977년작 '복서(The Boxer)'는 기이한 복싱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1976년에 개봉한 영화 '록키(Rocky)'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수익을 냈다. 일본에서도 크게 흥행한 이 영화를 보고, 도에이 영화사는 비슷한 권투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감독은 테라야마 슈지, 주연 배우로는 당시 일본의 떠오르는 인기 배우였던 시미즈 켄타로, 야쿠자 영화에서 이름을 떨치던 스가와라 분타가 낙점되었다. 과연 이 조합은 성공적이었을까? 영화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테라야마 슈지는 원래 시나리오를 쓴 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시나리오를 전면 재수정했다. 일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문학, 연극, 영화에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한 테라야마 슈지가 제작사의 뜻대로 상업성에 촛점을 두고 썼을까? 천만에, 이 영화는 결코 일본의 록키 영화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사고로 남동생을 죽게 만든 텐마의 복싱 스승이 되기로 한 하야토는 열심히 복싱을 가르친다. 그가 텐마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가난하고 신체적인 핸디캡(텐마는 발목에 문제가 있었다)을 가진 텐마가 복싱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벽보나 붙이며 살아가던 이 전직 복서는 갑자기 생의 활기를 되찾는다. 이 기이한 관계의 스승과 제자는 차근차근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다. 마침내 텐마가 챔피언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시합의 날이 왔다. 경기 중 텐마의 고질적인 발목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 과연 텐마는 승리할 수 있을까? 하야토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지러움증을 느끼며 텐마의 경기를 지켜본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전형적인 하층민들이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술에 절어 사는 하야토. 텐마를 응원하는 동네 음식점의 단골들은 또 어떤가? 길거리 매춘부, 담배 피우는 어린 꼬마, 너절한 하류 인생들의 면면들이 모인다. 하야토는 텐마에게 복싱은 증오하는 자만이 하는 것이라면서, 무엇을 미워하느냐고 묻는다. 텐마는 부모와 세상 전부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신체적인 결함을 가진데다,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루저로서 텐마는 자신의 존재를 복싱을 통해 증명하고 싶어한다. 하야토는 그런 텐마와 한 팀이 된다. 테라야마 슈지는 이 기묘한 스승과 제자에게 승리를 안겨줄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유독 특징적으로 보이는 쇼트들은 부감 쇼트이다. 하야토의 방에서 수직으로 높게 내려다 보는 쇼트를 비롯해 등장 인물들은 전지적 존재의 관점에서 압도당하는 보잘 것 없는 약자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텐마의 스승인 하야토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과거가 있다. 그는 정상의 자리에서 갑자기 시합을 포기한다. 스스로 패배를 선택한 것이다. 텐마는 하야토에게 왜 분명히 이길 수 있었는데 경기를 포기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하야토는 대답 대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일본 복싱 챔피언들의 이름들을 줄줄이 나열한다. 하야토의 삶에는 그 어떤 목적도 없다. 그리고 그가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텐마를 가르치는 이유도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텐마가 하야토의 고등학생 딸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음에도 하야토는 텐마를 용인한다. 심지어 복싱으로 최고가 되고 싶다는 텐마조차도 정말 치열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되는대로 사는 진흙탕 속의 삶. 그들은 모두 인생이라는 사각의 링에 갇힌 낙오자들처럼 보인다.
 
  테라야마 슈지는 제작사 도에이에 일본의 록키 영화 대신 테라야마 슈지 표 복싱 영화를 선물했다. 흥행은 실패했다. 강동원의 젊은 시절 미모를 빼닮은 시미즈 켄타로의 인기에 기댔던 제작사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사실 감독 자신에게도 이 영화는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을 듯하다. 제작사의 상업적 요구와 뭔가 어정쩡하게 타협한 티가 나는 애매한 서사는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복서'에는 테라야마 슈지의 작가적 관점이 드문드문 각인처럼 찍혀있음을 보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가혹한 인생을 복싱의 링에 비유한 테라야마 슈지는 그 갇힌 공간에서 이탈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하야토의 가출한 딸은 가방을 들고 끝없이 펼쳐진 해변을 걷는다. 시름시름 앓던 하야토의 도베르만은 기력을 찾고서는 주인을 떠나 한없이 기찻길을 따라 간다. 결코 승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루저 인생들에게 이탈과 방랑만이 유일한 삶의 출구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마지못해 제작을 허락했던 도에이의 사장은 분명 후회했겠지만,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관객은 독특한 복싱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acuview.aucf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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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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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EBS 클래스e에서 조영남 선생이 강의한 '중국 엘리트 정치'를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집단 지도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을 보면서 중국의 집단 지도 체제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은 소련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공산주의 혁명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의 근대 100년사를 다룬다. 제목만 들으면 꽤 어렵고 읽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인문서적 같다. 그 선입견을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가볍게 깨버린다. 그는 복잡하고 딱딱한 혁명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서 들려준다. 총 20개의 챕터로 나누어진 작은 주제의 이야기들은 독자를 러시아 혁명의 역사 한 가운데로 초대한다.

  저자는 자세하고 방대한 역사적 사실에 주요 인물들의 개인사를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역사적 인물들의 서간과 전기, 자서전에서 발췌한 자료들은 이 책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자칫 건조하고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런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재미를 더한다.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제정 러시아 말기의 상황을 설명할 때, 니콜라이 2세와 황후, 라스푸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흥미있게 펼쳐진다. 레닌과 스탈린 체제를 설명할 때는 그 두 사람의 인간적 특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정치 상황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기술한다. 이런 미시사적 관점이 개입된 역사 서술은 이제는 역사 관련 서적에서 부인할 수 없는 대세인듯 싶다.

  책의 초반부에는 니콜라이 2세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정치적 관점이 어떻게 혁명의 불쏘시개로 작동했는지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좀 더 유연하고, 민중을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면 러시아는 급진적 혁명에 이르는 대신에 입헌 군주국의 형태, 또는 좀 더 유화적인 정치 체제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 말기부터 축적된 여러 문제들이 터지는 비등점의 시기를 포착했고, 그 기회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러시아 민중들과 이루어낸 혁명의 과정에는 단지 러시아 내부의 요인만 작동하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외적 요인이 혁명의 위기 상황을 넘기는데 기여했다. 그것은 레닌의 사후에 권력을 용의주도하게 차지한 스탈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2차 세계 대전이었다. 스탈린은 국내 정치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전쟁'이라는 외적 요인으로 돌려서 소련 국민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저자는 스탈린 사후에 권력을 차지한 흐루시초프의 명암도 세밀하게 조명한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스탈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소련 국민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변덕스럽고 전문성이 결여된 정치 능력은 집단 지도 체제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1964년, 브레즈네프가 흐루시초프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는다. 그는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열망과는 동떨어진 수구적 인물이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시장 경제의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도, 그 시기를 놓침으로써 소련은 기나친 경제 침체에 들어간다. 나에게 다소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왔던 부분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소련의 주류(보드카)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부분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해, 그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정치는 소련 사람들의 일상에 술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치는 러시아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저자는 그 한계도 명확히 지적한다. 고르바초프는 그 모든 변화와 개혁의 정책을 '소련'이라는 국가 체제 안에서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문제였다고 본다. 기존의 소비에트 연방 체제는 이미 수명이 다했는데도, 고르바초프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미봉책으로 급격한 체제 붕괴를 가져왔다. 그 시기는 또한 공산당원과 지배 계층들이 국가 자산을 심각하게 유용함으로써 경제적인 혼란과 부정부패가 시작된 때이기도 했다. 탐욕스럽고 무능력한 옐친은 운좋게 그 혼란기를 틈타 러시아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러시아를 보여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러시아 혁명의 100년사를 다룬다. 푸틴은 피와 절망, 실패들로 얼룩진 혁명사의 맨 나중에 등장한 인물로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고나면 오늘날 러시아에서 어떻게 푸틴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지 그 기원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제정 러시아 말기의 민족주의와 스탈린의 공포 정치를 절묘하게 결합한 자신만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고, 그것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왜 대다수 러시아 국민들은 푸틴을 반대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늘 궁금했다. 이 책은 그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러시아 혁명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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