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볼로쟈는 자신이 쓴 단편소설이 잡지에 실린다. 그의 소설에 관심을 가진 작가의 초청으로 모스크바에 오게 된 그는 공항에서 흥얼거리는 젊은 여성과 마주친다. 누굴 기다리냐고 묻자 여자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볼로쟈는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여자는 결혼을 하라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답한다. 볼로쟈는 그런 일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날 믿어요. 반드시 행복해질 거에요."

  이 영화, 온갖 긍정과 낙관의 기운이 흘러넘친다. 그저 젊은 청춘들이 모스크바 거리를 쏘다니는 것이 전부일뿐인데도, 보고나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정말 사랑스런 영화다. 영화 속 모스크바의 거리는 활기가 가득하고, 젊은이들은 사랑하는 이와 희망에 찬 미래를 꿈꾼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1964년작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Walking the Streets of Moscow)'는 소련의 '해빙기(The Khrushchev Thaw)'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볼로쟈는 지하철에서 같은 또래 콜랴와 우연히 알게 되어 친해진다. 머물기로 한 지인이 모스크바에 없다는 걸 알고 난감해 하는데, 콜랴가 자신의 집에 머무르도록 해준다. 콜랴에게는 군 입대를 앞두고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친구 샤샤가 있다. 샤샤의 결혼 예복을 사기 위해 그들은 백화점에 들른다. 그곳 레코드 가게 점원 알료냐에게 볼로쟈와 콜랴가 관심을 보이고, 콜랴는 알료냐를 샤샤의 결혼식에 초대한다. 과연 알료냐의 마음은 누구에게로 기울어질까?
 
  '젊은이들이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영화'라는 흐루시초프의 비판 때문에 무참한 검열과 삭제를 당하는 운명을 겪었던 '나는 스무 살(Мне двадцать лет, 1965)'과는 달리,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는 살아남았다. 영화는 1963-64년의 모스크바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볼료자, 콜랴, 알료냐가 밤늦게까지 쏘다니며 바라본 모스크바는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젊은 여성은 즐겁게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걷고, 우산을 든 청년은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며 여성에게 구애한다. 시민들을 위한 음악회와 신나는 놀이공원의 풍경이 모스크바의 야경을 채운다. 아마도 구 소련 시절을 엄혹한 철의 장막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놀랄만한 영화다. 

  물론 이 영화의 그런 자유로움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흐루시초프 시절의 사회 문화적 '해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제한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린 쿠치예프 감독의 '나는 스무 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1959년부터 제작이 시작되었던 그 영화는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쿠치예프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쓴 겐나디 스팔리코프는 무능하고 한심한 관료주의에 치를 떤다. 그는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소련 당국의 검열을 비판하는 장면을 은유적으로 집어넣는다. 콜랴와 함께 볼로쟈가 자신을 초청한 작가를 만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볼로쟈는 자신이 문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삶의 진실과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하자, 작가는 그런 건 죄다 쓸데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런 그의 말에 볼로쟈는 당황하는데, 그때 진짜 작가가 등장한다. 볼로쟈가 그때까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건물의 청소부였다. 자신이 관찰한 작가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흉내낸 청소부의 연기를 통해 스팔리코프는 예술에 무지한 검열 당국을 비꼰다. 그 장면이 가지는 의미를 당국은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의 초반부, 콜랴의 집 건너편 가게에서 영어와 팝송을 크게 틀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영어를 사용하는 일본인 관광객이 박물관에 가려고 택시를 타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 모스크바에 넘치는 자유와 활기는 그런 것이었다. 콜랴는 그런 모스크바를 걸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젊은 날의 기쁨과 설레임에서 저절로 나오는 찬가이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
  어느 날 나는 태평양을 건너겠지
  툰드라와 타이가(taiga)도
  흰색의 닻을 올릴 거야
  그러다 향수병이 도지면
  눈 속에서 보라빛을 찾을 거야
  그렇게 모스크바를 떠올리겠지' (번역 푸른별)

  서정적인 노래와 함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촬영 감독이었던 바딤 유소프가 담아낸 유려한 모스크바 풍광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영화.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를 만나는 관객들은 영화 속 1963년의 모스크바 거리를 마냥 행복한 주인공들과 같이 걷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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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 고양이 사랑하는 이들이 보면 꽤나 속상할 영화이다. '리리(リリ, Lily)'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영화 속 여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내동댕이 처진다. 여자들이 그러는 이유는 자신들 보다 리리가 남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유일한 삶의 낙이며, 애정의 대상인 고양이 리리의 주인은 리리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는다. 지독한 마마보이인 주인공 쇼조. 그는 아내 시나코가 소박맞고 쫓겨나는데도 해변가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다. 쇼조의 엄마 오린은 지참금이 적다며 며느리를 내보내고, 부자 오빠의 딸 후쿠코를 아들과 맺어주려고 한다. 푼돈벌이 잡화점으로는 먹고 살기 힘든데다, 살고 있는 집도 오빠에게 저당잡혀 있다. 오린은 어떻게든 조카 후쿠코를 구슬려서 집도 지키고 지참금도 뜯어낼 참이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후쿠코는 오린의 속셈대로 되지 않는다. 시나코는 후쿠코에게 진정으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거든 고양이 리리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말한다. 과연 쇼조는 리리를 보낼 수 있을까?

  도요타 시로 감독의 1956년작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2017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나왔다). 1936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고양이 리리와 주인인 쇼조, 그의 두 여자 사이의 애증을 그려낸다. 이 얽히고 설킨 사각 관계의 파열음이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20분을 채운다. 생각보다 영화는 지루하지 않다. 여자들에게 눌려서 자신의 뜻대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쇼조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딱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드센 여자들이 나오는 일본 영화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소박맞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옷을 쥐어뜯고, 전처와 후처는 거센 드잡이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세 명의 여자들은 쇼조의 남성성을 거세시킨 주역들이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후쿠코 역을 연기한 카가와 교코일 것이다. 제멋대로 자란데다 파티걸로 복잡한 남성 편력을 지닌 후쿠코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돈의 위세를 믿고 시어머니 오린을 종부리듯이 부려먹으며, 고양이 리리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남편의 꼴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리리를 전처 시나코에게 보내라는 후쿠코의 뜻에 따르는 쇼조의 모습은 애잔하다. 나루세 미키오의 '안즈코(杏っ子, 1958)'에서 착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남편의 패악질을 견뎌야 했던 카가와 교코를 떠올리면, 이 영화의 후쿠코는 그 반대편에 자리한 캐릭터이다.

  아들을 마마보이로 키운 오린은 또 어떠한가? 며느리를 자신의 맘대로 갈아치우며, 지참금에만 눈이 먼 이 속물적인 시어머니는 돈 있는 후쿠코에게 벌벌 떤다. 옷장에다 잔뜩 처박아 놓은 후쿠코의 속옷 빨랫감을 군말없이 세탁하면서, 어떻게든 며느리가 친정에서 돈을 가져오길 바란다. 아들을 머저리 취급하는 이 엄마는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도 나누지 않는다. 맛있는 수박도 아들 주지 않고 혼자만 먹고, 가게에서 번 돈은 아들 몰래 꿍쳐둔다. 그러니 아들은 마음 둘 데라고는 고양이 리리뿐이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 보이는 바깥의 풍경들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갈등과는 관계없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쇼조와 후쿠코가 시간을 보내는 여름 해변가의 풍경은 떠들썩한 활기가 넘친다. 댄스 파티와 음악, 멋진 양장을 한 젊은 여성들의 모습들에서는 전쟁의 그림자나 상흔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전후 피폐한 경제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키는 엄청난 호황기에 접어든다. 후쿠코가 보여주는 새로운 여성성은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1936년에 쓰여진 소설을 영화가 시대에 맞게 아주 잘 각색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요타 시로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문예 영화에 일가견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이 영화는 그가 만든 문예 영화의 수작으로 손꼽힌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만든 데에는 간사이 사투리도 한 몫을 했다. 카가와 교코를 비롯해 시나코 역의 야마다 이스즈, 쇼조 역의 모리시게 히사야는 간사이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한다. 그들 모두 간사이 지방 출신이었다(교코는 이바라키 현, 다른 두 명의 배우는 오사카 출신이다). 남자 하나 두고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거칠게 싸우는 여자들의 혈투가 있음에도 영화는 긴장감 속에 유머를 잃지 않는다. 엄마와 두 명의 여자들에 의해 남성성을 박탈당한 채 순응하며 사는 쇼조의 캐릭터는 전후 일본 사회의 새로운 방향성으로 읽히기도 한다. 군국주의 시대의 극한의 남성성은 변화된 시대에 맞추어 달라져야만 했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서 관객들은 고도성장기를 맞이하며 변화된 일본의 내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iff-j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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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추리 영화는 시작한 지 4분도 되지 않아서 시신이 나온다. 주인공 미스 마플(마가렛 러더포드 분)은 꽤 덩치가 있고, 약간 부산스럽게 보이는 할머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스 마플에게는 조수도 있다. 홈즈와 왓슨도 아닌데 이 영화 뭐지, 싶어진다. 배경도 경마 클럽이다. 분명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라는데, 내가 읽은 '장례식을 마치고(After the Funeral)'가 이런 내용이었나? 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다. 이 영화(Murder at the Gallop, 1963)는 주요한 설정만 원작 소설에서 따왔을 뿐, 나머지는 새롭게 각색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에르큘 포와로가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미스 마플로 바뀌었다. 영화 제목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경마 클럽 살인 사건'이 맞다.

  재소자 교화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하던 미스 마플은 부유한 앤더비 씨 저택을 방문한다. 같이 모금을 하던 친구 스트린저와 함께 집에 들어서자마자, 앤더비 씨는 계단을 굴러 떨어지며 숨을 거둔다. 경찰에서는 심장병을 앓고 있던 앤더비 씨가 지병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미스 마플은 시신 옆에서 발견된 작은 흙조각이 뭔가 마음에 걸린다. 자연사를 가장한 살인의 의도가 있다고 본 마플은 스트린저와 함께 앤더비 일가의 동향을 살핀다. 다음 날, 유언장 공개일에 4명의 상속인 가운데 '타살'이라는 의심을 내보인 앤더비의 여동생 코라가 모자핀에 찔린 채 발견된다. 미스 마플은 사건 해결을 위해 유산 상속인 가운데 한 명인 헥터의 경마 클럽에 머물면서 단서를 찾는다. 과연 누가 범인일까?

  그동안 여러 번 제작된 TV 시리즈의 미스 마플의 이미지를 떠올린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의 미스 마플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가렛 러더포드가 연기하는 미스 마플은 조용히 앉아서 뜨개질을 하며 사건을 추리하는 할머니가 아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단서를 수집하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 할머니, 상당히 과감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의 에르큘 포와로의 특질들을 이 영화에서는 미스 마플이 겉옷으로 두르고 연기하기 때문이다(영화 속에서 미스 마플은 두꺼운 트위드 망토를 걸치고 나온다). 촬영 당시 70이 넘은 나이로 연기했던 마가렛 러더포드는 자신만의 미스 마플을 보여준다. 나중에 클럽에서 열린 무도회에서는 어깨가 드러나는 화려한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고 트위스트까지 춘다. 영화는 그런 마가렛 러더포드의 연기력에 상당부분을 기대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들이라면 나름대로 즐겁게 보겠지만, 영화는 평범하다. 영화사 MGM에서 B무비로 만든 이 영화는 미스 마플 3부작 가운데 하나이다. 뜬금없는 각색은 원작자 크리스티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연 배우 마가렛 러더포드의 연기만큼은 마음에 들어했다. 처진 아래턱이 눈길을 끄는 이 독특한 외모의 배우는 33살이 되어서야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섰다. 늦은 데뷔에다 전형적인 여배우의 아름다운 외모와도 거리가 멀었던 러더포드는 자신의 재능을 코미디에서 발견했다. 노년이 되어 미스 마플을 연기한 세 편의 영화는 꽤 인기를 끌었다.

  그리 뛰어난 미모가 아니었던 또 다른 배우가 이 영화에서 등장한다. 주요한 배역인 밀크리스트 부인을 연기한 플로라 롭슨이다. 개성적이고 강인한 인상의 롭슨은 나에게는 'Fire Over England(1937)'에서의 엘리자베스 여왕 역으로 기억된다. 그 영화에서 롭슨은 유능하고 강단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보여준다. 마가렛 러더포드처럼 롭슨은 외모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연기력으로 영화 경력을 쌓았다. 그 두 배우들 모두 영화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 부터 여성 기사 작위 Dame을 받았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원작자 애거서 크리스티도 Dame 작위를 받았으니, 이 B무비에는 무려 3명의 여성 기사들이 등장하는 셈이다. 원작을 색다르게 각색한 이 영화는 크리스티 추리 소설의 폭넓은 변용을 보여준다. 미스 마플의 특별한 변신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찾아볼 법하다.  



*사진 출처: tcm.com 미스 마플 역의 마가렛 러더포드. 그 옆에 자리한 스트린저 역을 연기한 스트린저 데이비스는 러더포드의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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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현관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나가봤더니 광고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보통 전단지를 붙이는 이들은 평일 오후에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붙여야 했던 전단지는 새로 생긴 전자 제품 판매점 광고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문앞에 붙어있는 전단지가 그리 많지 않았었다. 유례없는 전염병 시대에 판매업과 서비스 업종도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주말을 앞두고 배달음식 전단지들은 끊이지 않고 붙여졌다. 놀랍게도 2군데의 헬스장과 요가 학원이 개업해서 열심히 광고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전단지 광고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분리수거를 위해 스카치테이프를 떼어내면서 테이프의 길이를 보니 2cm정도였다. 나는 테이프 길이를 보면서 전단지 붙이는 이들의 경력을 가늠해 보곤 한다. 언젠가는 손가락 길이만큼 붙어진 테이프를 떼낸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전단지 붙이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오래된, 대단한 고수는 단 1cm정도의 테이프로 전단지를 붙이기도 한다. 종이가 떨어지지 않을만큼, 그리고 아주 경제적으로 테이프를 썼다. 스카치테이프 같은 소모품도 돈이 드는 것이니 최대한으로 아껴 쓰려고 그리한 것이다.

  그들은 대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나다닌다. 입주민의 눈에 띄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다. 한번은 밖을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이제 막 앞집 문앞에 전단지를 붙이고 있던 사람과 마주쳤다. 그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로 비쩍 마른 몸에 아주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낡은 청바지와 빛 바랜 흰색의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할 일을 하고 편히 지나갈 수 있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느 날은 키 작은 중년의 여자가 전단지를 붙이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그들을 직접 본 것은 단 두 번 뿐이었지만, 그 일이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닌듯 했다. 자주 다니던 사이트 게시판에 전단지 붙이는 일을 하는 이의 경험담이 올라왔었다. 이십 대인 그는 그 일을 부업이 아니라 본업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는 다른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했었는데,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전단지 붙이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단지 일감이 주어지는 경로, 일당, 자신이 하루종일 일하면서 걷는 거리 등,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로만 보아도 그 노동의 정도와 힘듦이 팍팍하게 전해졌다. 댓글에는 건강을 챙겨가면서 무리하지 말라는 격려의 글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 이는 댓글에서 과외하는 알바도 세금을 납부하는데, 이런 이들이 받은 수입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적었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직업의 또 다른 세계와 그 삶의 고단함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세금과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 그런 댓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현직 변호사가 정리하는 댓글을 달아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세금이 부과되는 것이 맞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일하면서 이런 경우를 문제 삼는 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도 법리를 따지는 일로 먹고 살고 있기는 하지만, 힘든 여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연민과 공감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썼다. 나도 솔직히 세금 운운하는 댓글에 적잖이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그 세금 댓글에 놀라고 실망했던지, 글을 썼던 이는 얼마 안가 자신의 글을 삭제하고 사이트를 탈퇴해 버렸다.      

  국회방송에서 내가 챙겨서 보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극한 직업'이다. 주로 제 3세계 빈국들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엊그제는 방글라데시 편이 나왔다. 그 나라에서는 혼수물품으로 금 장신구를 해가는 전통 때문에 금 세공업이 발달했다. 금 세공업 거리의 극한 직업은 이런 것이었다. 세공업자들이 화장실 갈 때마다 미세한 금가루가 떨어지는데, 그곳 하수구의 오물들을 걸러서 그 금가루를 모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수구에 모인 오물들을 큰통으로 퍼서 작업장으로 가져와 거른다. 마침내 남은 금속 찌꺼기들에서 금가루를 채취하는데, 여기에는 유독 물질인 수은과 세정제가 사용된다. 3명의 작업자가 일해서 얻은 금의 양은 말그대로 작은 팥알만 했다. 예전에 경기가 호황이었을 때는 그 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단다. 지금은 세공 산업이 많이 위축되다 보니, 나오는 금의 양도 적어서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한다고 했다. 집에서 그는 아내와 딸이 하는 쇼핑백 조립일을 도왔다. 딸은 학교를 다니다 그만 두었다. 아직 어린 아들 둘은 학교에 보내서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어제 밤늦게 TV를 틀었더니, 'AI 시대와 새로운 직업'이라는 강연이 나오고 있었다. 외국의 전문가가 AI를 이용한 공유 경제가 새로운 직업들을 창출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참이었다. 나는 강연을 좀 듣다가 껐다. 나의 세대들은 AI와 공존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세대들을 바라보면서 늙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공지능이라는 변수는 직업의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집 근처 스포츠 센터의 주차장에는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주차료를 징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요금이 자동으로 결제되는 주차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전단지를 붙이는 이들의 일감도 떨어질지 모른다. 종이의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의 광고가 그들의 일을 대체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 힘들고 열악한 노동 여건의 일용직으로 밀려나게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직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법과 의료 분야에서도 AI는 점점 더 어렵고 까다로운 일들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예술 영역도 마찬가지다. AI가 써낸 시들과 시인이 쓴 시들을 구분해 보라는 과제들에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글을 쓰는 작가, 비평가들이 AI와 경쟁하게 될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그런 미래는 우리의 발밑까지는 다가오지 않았다. 오늘도 전단지를 붙이는 이들의 일감은 남아있고,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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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대학 시절,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련 과목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다 당국에 검거되어 자퇴를 강요받았다. 학교를 그만 두고 무얼 할까 생각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극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걸로는 먹고 살 방도가 안될 것 같았다. 영화를 하면 밥은 먹고 살겠지 싶은 마음이 들어서 영화사에 들어갔다.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그는 종전 후에는 도호 영화사에서 인정받는 감독이 된다. 그러나 공산당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그는 미군정 하에서 뜻밖의 시련을 겪는다. 도호 제작사는 사회주의 영화인들의 노조와 충돌한다. 이른바 '도호 쟁의'라고 불리는 그 사건으로 영화사를 나와야 했다. 빙수 장사를 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마침 영화사에서 분쟁 보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영화를 한 편 찍는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그 돈을 가지고 제작사를 차린다. 감독 야마모토 사츠오의 이야기다. 그에게 제 2의 영화 인생을 열어준 작품은 '폭력의 거리(暴力の街, 1950)'였다.

  영화는 '도조'라는 소도시에서 벌어진 부정부패 사건을 다룬다. 도조로 발령받은 신참 기자 키타는 지역 유지 오니시와 경찰, 검찰 간부의 유착 관계를 알게 된다. 오니시는 직물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데, 암거래로 물건을 빼돌려 큰 돈을 벌고 있다. 관공서 뿐만 아니라 야쿠자와도 결탁한 오니시는 도시의 권력자로 군림하며 온갖 횡포를 부린다. 키타가 오니시에 대한 고발 기사를 내자, 앙심을 품은 오니시는 검찰 신청사 개관식에서 키타를 폭행한다. 키타는 굴하지 않고 그에 맞서 신문사의 동료들과 함께 도조 시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기사로 써낸다. 그들의 뜻에 동참한 시민들은 범죄 추방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오니시와 야쿠자, 부패한 경찰과 관리들은 회유와 협박으로, 나중에는 폭력을 휘두르며 저항한다. 과연 도조 시에 정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폭력의 거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극영화임에도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마치 뉴스 보도 화면처럼 중간 중간 내레이터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해 준다.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들은 몽타주 기법으로, 야쿠자들이 과거에 저지른 폭력과 범죄 행위는 재연 장면으로 제시된다. 재미있는 장면도 있는데, 신문사 편집장이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의 신뢰도를 평가하는 부분이다.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은 등장한 인물들의 얼굴 위에 커다란 흰색의 가위표(믿을 수 없음)와 세모(판단 유보)로 표시해 놓는다. 그런가 하면, 나중에 시민들이 주최한 대규모 집회는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를 연상케 한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주면서 의견을 말하게 하는 장면은 영화에 사실성을 더한다(물론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이들은 출연 배우들이다). 이것은 영화의 끝부분에 실제로 도시에서 개최된 마츠리 촬영분을 넣은 것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 영화를 '재미'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당시에 어떻게 크게 흥행했는지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밋밋하고, 서사는 극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재미' 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진실'이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1948년에 있었던 '혼조 사건'이 그것이다. 아사히 신문기자가 사이타마 현 혼조 시의 부정부패와 폭력 범죄 사건을 취재하면서 겪은 것을 1949년에 책으로 펴냈다. 그리고 '폭력의 거리'는 사건의 그 도시 혼조에서, 주민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촬영되었다. 1950년까지도 혼조의 상황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영화 제작은 야쿠자들의 방해를 받는 가운데에서 강행되었다. 그러니까 영화 속 집회 장면의 사람들은 동원된 엑스트라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온 실제 주민들이었다. '폭력의 거리'의 사실성은 그런 상황에서 획득한 것이었다.

  '폭력의 거리'는 종전 후, 공권력 부재의 상황에서 토호와 범죄조직이 결탁한 소도시의 비극을 그려냈다. 미군정 하의 일본 사회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혼조 사건'은 일본 정부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는 GHQ(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GHQ가 개입하고 나서야 사건이 대강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상영이 되자, 경찰을 비롯한 관료 조직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겉으로는 영화가 시민들의 공권력 불신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속내는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데에 대한 열패감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은 당시 일본의 공권력과 관료 조직이 진정으로 자정 능력이 있었는가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부패한 사업가와 야쿠자들은 자리를 잃지 않았다. 미군정 하에서 좌익 세력과 공산주의자 색출의 선봉에 선 야쿠자들은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시민들이 거둔 승리가 불완전하고 잠정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근절되지 못한 범죄와 폭력의 뿌리는 이후 일본 사회에 단단히 자리잡게 된다.



*사진 출처: 100satsuoyamamoto.com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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