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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Jim Abbott. 밀워키 브루워즈)가 10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치고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금세기 최고의 인간 승리로 신체장애인들의 빛나는 희망이었던 그는 오른쪽 손이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들도 도전하기 힘든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위대한 성적을 낳은 장본인. 10년간 87승 방어율 4.25를 기록했고, 93년 뉴욕 양키즈 시절에는 이름있는 실력파 투수도 평생에 한번 할까말까한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오른손이 없어도 야구가 좋았던 소년

본명이 Abbott James Anthony인 애보트는 1967년 9월19일 미시간주의 플린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오른손이 없었던 그에게 발을 사용하는 축구를 가르치며 밝게 자라주길 기원했다. 그러나 애보트는 야구에 더 재미를 느껴 6살 때 의수를 풀어 버리고 혼자서 공던지기를 즐겼다. 리틀리그에 들어간 11살 때는 팀의 투수로 활약했다.

전미(全美)대표팀의 에이스

애보트가 공을 뿌린뒤 지금처럼 재빨리 글러브를 왼손에 끼우기 시작한 건 고교시절부터다. 상대 타자들이 연속적으로 번트를 대는데 자극받아 맹렬히 수비 연습을 한 것. 고교 졸업을 앞두고 프로팀 가운데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그에게 입단을 제의했다. 1985년 당시 Free-Agent Draft에서 토론토는 36라운드에 애보트를 지명하고 계약금 5만달러를 제시한 것. 그러나 "지금 프로에 가면 단순히 구경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내 능력을 평가받고 싶다. 왼팔로 돈을 벌고 싶지, 오른팔로 돈벌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며 동향의 미시간대에 진학했다. 미시간대에서 애보트는 145Km의 강속구를 자랑하며 통산 26승 8패 방어율 3.03를 기록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애보트가 세계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전미대표팀의 일원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부터다. 시범경기로 치러진 이 대회에서 그는 흡사 묘기대행진과도 같은 투구모습을 선보이며 미국팀을 당당히 우승으로 이끌었다.
 
묘기와도 같은 투구 동작

포수가 던져주는 공을 왼손으로 받아 조막손인 오른손으로 글러브를 옮겨 끼고 다시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그의 동작은 너무 자연스럽고 빠르다.
먼저 공이 담긴 글러브를 오른손에 걸쳐 놓고 왼손으로 공을 빼내 투구한 후 그는 왼손으로 글러브를 끼고 수비 자세를 취한다. 글러브로 공을 받아선 글러브를 오른손에 걸치고 왼손으로 공을 빼내 던지고자 하는 곳으로 투구 또는 송구를 한다. 이런 자세로 그는 145Km대의 강속구를 뿌렸다.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꿈의 MLB 직행 그리고 노히트노런

애보트는 88년 그해의 가장 훌륭한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되는 설리반상을 받고 프로 드래프트에서 캘리포니아 엔젤스(현 애너하임 엔젤스)에 1차로 지명되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로빈 벤츄라,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그렉 올슨, 텍사스 레인저스의 몬티 파리스 등이 1차 지명 동기들이다. 그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해 4월8일 시애틀 매리너스와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 첫 게임서 패한 그는 4월28일 볼티모어 오리올즈에게 첫 승을 신고한후 첫해 12승12패 방어율 3.92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이듬해에도 10승(14패)을 올려 그의 실력이 거품이 아님을 증명한 그는 3년차때인 91년 18승11패 방어율 2.89의 성적으로 로저 클레멘스(볼티모어.18승10패 방 2.41), 케빈 타파니(미네소타.16승9패 방 2.99)등과 사이영상을 다투기도 했다.
애보트는 92년말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을까? 93시즌 애보트는 9월4일 양키스타디움서 벌어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서 대망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그해 4월7일 양키즈 유니폼을 입고 첫 출격했을 때 패배의 수모를 안겨준 바로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한 완승이었기에 더욱 값진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 기적은 막을 내리고...

올시즌 2승8패 방어율 6.91.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성에 차지 않는 성적을 남긴 애보트는 밀워키로부터 방출 통고를 받자 이렇게 말했다. 그의 나이 32세. 애보트는 은퇴를 결심했다. 96년 캘리포니아 엔젤스에서 2승18패로 무너진뒤 마이너리그를 거쳐 98년 5승을 올리며 재기하는 듯 했으나 40만달러를 받고 밀워키로 옮겨온 올시즌 다시 부진에 빠지자 은퇴를 공식 발표한 것. 지난 10년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 팔만으로 10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기대했던 팬들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10년간 통산 87승108패 방어율 4.25를 남긴 그는 아마야구 최고의 좌완 투수와 올림픽 금메달, MLB 노히트노런 등 야구선수로서 누릴수 있는 영예는 어쩌면 다 누린 셈인지도 모른다. 특히 지난 6월15일 시카고 커브스전에선 4회에 한손으로 안타를 치며 타점까지 올리는 진기록을 남겼다.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그의 회상에서 이제 기적은 막을 내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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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부터

아래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도 안내됐지만 우리 사이트와 제가 운영하는 또 다른 까페 `권영설의 모든 직장인은 경영자다`(cafe.daum.net/bizandlife)에서 MT를 떠납니다.이름도 거창합니다.`나를 찾아 떠나는 기차여행`.실제로 기차를 탑니다.인원 제한이 있으니 참고하셔서 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휴가 중에 책을 몇권 샀습니다.대부분 실망스러웠지만 그 중 비교적 괜찮았고 읽을 거리가 많은 것이 움베르토 에코의 `미네르바 성냥갑`이었습니다.지금도 읽고 있습니다.신문인가에 연재된 칼럼이라 제가 전혀 알 길없는(물론 주는 달려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름이 마구 나올 때는 짜증도 났습니다.그중에 눈에 띄는 글이 `글을 잘쓰는 방법`이란 칼럼입니다.본문은 에코가 장난기를 발동해 지나치게 반어법으로 썼기 때문에 제가 다시 인용할 때는 제 식으로 권유체로 바꾸었습니다.많은 분들이 까페나 블로그에 스스로들 글을 쓰고 계시기 때문에 참조가 될까해서 올립니다.물론 정답은 절대 아닙니다.제 생각과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그저 참고하세요.(권영설)

글을 잘 쓰는 방법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

상업적 기호나 약자를 사용하지 마라.

괄호는 담론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말없음표(...)의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가능한한 따옴표를 적게 사용하라.

일반화하지 마라.

외국어는 멋진 스타일을 만들지 않는다.

인용을 줄여라.

과잉 설명을 하지 말라.

저속한 말을 사용하지 말라.

언제나 구체적이도록 하라.

단 하나의 단어로 문장을 만들지 말라.

지나치게 과감한 은유를 조심하라.

쉼표는 정확한 곳에 넣도록 하라.

간략하게 하라.

과장하지 마라.

외국어 이름은 정확하게 쓰라.

언급하는 저자나 등장인물은 완곡하게 표현하지 말고 직접 지명하도록 하라.

글의 첫머리에 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감사의 표시를 하도록 하라.

철자를 자세하게 확인하라.

반어법은 지겹다.

너무 자주 문단을 바꾸지 마라.

`우리는`이라는 권위적인 1인칭 복수를 (주어로) 절대 쓰지 말라.

원인과 결? 倖?혼동하지 마라.

논리적으로 결론이 전제에서 도출되지 않는 글을 쓰지 마라.

옛날 표현이나 이례적인 어휘를 너무 많이 사용말라.

너무 장황하지 않도록 하라.

미완성 문장은 피하라.

(1997년에 쓴 칼럼인데 인터넷식 글쓰기가 범하는 오류들을 비교적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쓰면 지금 보다는 훨씬 품위있고 발전가능성 많은 문장쓰기를 버릇들일수 있다는 생각입니다.그러나 저 자신은 `글 잘 쓰는 법`이란 칼럼을 쓸 자신이 없습니다.에코 나이 정도는 돼야 가능할까요? 에코?32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일흔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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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상담을 하면 젊은 부부이든 나이든 부부이든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미주알고주알 결혼생활 내용을 듣게 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혼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수 있는 현상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작은 말, 작은 행동에서 서로 상처를 받고 신뢰를 잃어 갈등의 골이 깊어져 있다.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주장만 하려고 할 뿐, 상대방의 느낌과 생각에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부부갈등 적은것에서 시작 그런데 부부사이에서 발생하는 작은 갈등은 서로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커질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갈등을 줄이는 대화방법으로 ‘나’(I) 전달법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나 전달법은 말하는 사람이 메시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하는 말이다. 이는 상대방의 행동을 가치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나 전달법으로 말을 하면 상대방에 대한 불만을 보다 정확하고 덜 도전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반면 ‘너’(You) 전달법은 듣는 사람에 대한 판단, 즉 그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내포하게 된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 판단할 자격이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되어 아무리 그 판단이 옳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지게 한다.나 전달법은 상대방의 행동, 그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 나의 느낌, 그리고 그 행동이 내게 미치는 결과를 구성요소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두가지 요소만으로도 나 전달법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나전달법과 너 전달법이 각각 어떻게 갈등을 달라지게 하는지 보자.토요일 오후, 아내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점심약속이 있다고 외출을 하였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어두워져서 집에 돌아왔다. 그러자 남편은 현관에들어서는 아내에게 굳은 얼굴로 “당신 뭐하고 다니는 사람이야? 점심 한끼 먹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남편의 말이 못내 서운하고 속이 상한다. 살림 하느라고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미리 약속사실을 알리고 남편이 집에 있으니 아이들 걱정할 일도 없어서 편한 마음으로 좀 늦었기로서니, 내 마음을 그렇게도 이해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만약 이때 남편이 나 전달법으로 “왜 이렇게 늦었어? 연락도 없이 늦게오니까(상대방의 행동) 걱정이 되잖아(나의 느낌). 아이들도 엄마만 찾아 힘들었단 말이야(결과)”라고 말했다면 갈등은 훨씬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늦게 와서 걱정했다는 자신의 마음도 전달하였고, 아이들로 인해 힘들었다는 자신의 어려움도 알렸다. 이런 남편의 말에 아내는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 것이다.

상대공격 대신 내 느낌 표현 나 전달법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표현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쉽다.또한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도록 도와주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직하게 나타낼 수 있다. 아울러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표현함으로써, 이것들을 생략하고 자신의 판단만을 말했을 때 듣는 사람이 하게 될 오해와 상상을 방지할 수 있다. 따라서 오해하기 쉽거나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을 때 나 전달법을사용한다면 갈등을 원만하게 줄이거나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행복은 작은 것에서 온다고 하지 않던가. 나 전달법으로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아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연말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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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18.월
영국 특파원 장조림


자 이제 가자
우리 저기 먼 곳으로
더 이상 여기서
땀을
눈물을
흘리지 말자

땀박아지 노동으로 흘린만큼
받고자고 더 이상
돈없고 빽없고 힘없어도 살 수 있는
그곳을 만들자고 더 이상
날밤까며 얘기하며
그날이 올 것이라 더 이상

해가 떠도 우리 곁엔 널부러진 빈소주병
쓰린 속 그것처럼
너도
나도
여기도, 아무것도
변한건 없다 변하지 않는다

자 이제 가자
우리 저기 먼 곳으로
더 이상 여기서
땀을
눈물을
흘리지 말자

비행기를 타기 얼마 전 저는 이 글을 쓰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약 3년 전, 기명사미 대통령은 결국 명동 성당에 까지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자 시위는 무산되었으며 한총련은 와해되었고, 그들의 쇠파이프를 손에 쥔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했죠.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살인도구다. '

정권이 바뀐 지금도 악습은 계속 됩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부도를 냈으며 그날부터 김 사장님 아버지는 김 씨로 전락하며 노가다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워낙 성실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노가다를 하시면서도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건설 공부를 하셨습니다. 사업을 하시던 기질을 발휘해서 몇 년 뒤 부터는 조그마한 건설업체를 다시 설립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설날이나 추석에도 일터에 나가셨고 일년 중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아마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던 얼마간의 기간이 몇 년 동안 유일하게 가진 휴식의 기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건설 붐으로 저희는 약 12년 만에 그 동안 진 빚을 모두 갚을 수가 있었고 빚쟁이들에 시달리던 악몽의 세월을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우리 부자는 함께 소주를 마셨는데 노가다를 다니실 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보이셨죠. 이제 고통은 끝났다면서 버는 일만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큰 공사를 따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성실성을 높이 산 한 분이 무명의 중소 건설 업체에게 엄청난 금액의 빌딩 공사를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두계약이 끝나고 공사 준비를 하던 중 한 건설 대기업이 그 사이로 들어와 건설비만 받고 이윤을 남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건물주의 마음을 돌려 버렸습니다.

전화상으로 계약 취소를 알리는 전화를 받으시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셨죠. 결국 그 회사가 건물을 완공하고 얼마 후에 부도로 문을 닫더군요. 그런데 워낙 부실공사를 해서 건물 입주 단 한달 만에 여기저기 물이 새고 난리 였죠. 그 건물주는 다시 아버지를 찾았고 아버지는 화가 나긴 하셨지만 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수공사를 하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씀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신 아버지께서는 얼마 후 다른 공사를 시작을 하셨는데 또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조그만 관급 공사였는데 감독하던 감독관 몇 명이 돈봉투를 요구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당시 50대 중반이셨고 그 감독관들은 이제 삼십도 안 된 사람들이었죠.

공사장에는 관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간의 돈봉투가 오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 거나하게 저녁을 접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아버지는 술을 사셨죠. 오십이 넘은 분이 이제 이십대 후반의 그들에게 감독님, 감독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요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봉투 주는 게 어렵다면 함께 현장에 가서 고스톱이나 치자는 것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계속 잃기만 해라. 그러면 결국 봉투를 준 게 아니라 놀이에서 돈을 잃은 것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결국 격분한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던 다른 50대 아저씨는 참지를 못하고 20대, 30대의 감독관 서너 명과 말 다툼 끝에 편싸움을 벌이셨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가보니 가건물인 현장 사무소는 난장판이 되어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유리는 깨어지고 집기는 부숴져 있고... 그날 아버지와 소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한 만큼 얻을 수 없는 이 나라가 이젠 싫다. 너는 이런 곳에서 살지 마라.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일한 만큼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떠나라....이곳은 젊은이들이 살만한 그런 곳이 아니다. 그리곤 다시는 돌아 올 생각을 하지 말거라.. "

대충 이런 말씀을 하시곤 아버지는 다시 우셨습니다. 내 나이 오십에 당신 자식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과 싸움박질이나 하는 자신이 정말 부끄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영국으로 왔습니다. 거의 3년 전 입니다.

저는 이 곳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불법으로 일하다가 경찰이 가게로 들어와 뒷문으로 도망친 적도 있고, LA특파원처럼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주인 몰래 봉투에 넣어서 집에 와 행여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볼까 봐 방문을 잠그고 깨끗한 부분을 골라내 먹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너무 배가 고파 식당에서 버리는 음식을 먹다가 그걸 본 주인이 나중에는 저를 위해 따로 음식을 해주곤 했습니다. 제가 국가 망신을 시켰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어떻게든 일해서 자리잡고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부 유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대부분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지만 소수의 유학생들은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를 몰면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들 중 꽤 유명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한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구조조정에 관한 문제였는데 학자들이 하는 말의 복사판 이었습니다. 일단 회사를 살려야 나중에 다시 고용인원을 재창출 할 수 있으니 짤린 사람들은 억울하겠지만 나중을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쉽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귀국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사회 지도층 인사'란 말을 들을 수가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 명문대 석사 출신에 다시 영국의 명문대에서 학위를 공부하고, 게다가 재력있는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이천 오백 파운드 (그 사람과 만났을 당시는 우리 돈으로 사백만원이었고 지금은 약 칠백만원입니다)가 생활비인 그를 생각하고, 대학 중퇴인 저를 생각했습니다.

미래에 사회지도층 인사가 될 그를 생각하고 그 아래서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을 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런 사람 밑에서 당하고 살 수만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무리인 줄 알지만 작년부터 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말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 결국엔 좋은 성적을 받고도 학비가 없어 다음 학기를 등록하지 못해 귀국한 형님도 계셨고 끝까지 버텨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들,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 글을 올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저의 개인사를 올린 것은 결코 내세울 것도 없는 제가 잘났다거나 아버지의 삶을 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힘없는 우리 모두 아버지들의 모습이며 제가 살아오고 선택한 길 또한 여러분 모두의 삶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아마도 '그렇다. 내 아버지의 모습, 나의 모습이다.' 라고 공감을 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떠들고 한탄을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이번 IMF 시대에 약자의 설움 속에서 많은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력함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술에서 깨어나고 낙심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다가올 돈 없고, 빽 없고, 힘 없는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사는 그 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자 이처럼 긴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들과 또한 우리가 흘리는 그 눈물을 후손들에게는 그대로 안겨주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들 스스로가 그 눈물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국 특파원 장조림 ( k2001@hani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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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4-08-0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엔 장조림이란 이름에 장난글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가슴이 저리네요.

sayonara 2004-08-0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공무원의 실수(또는 음모)로 10억빌딩을 날린 노부부, 겨우 3번밖에 만난적 없는 의붓아들이 이라크에서 죽었다고 수십억을 요구하는 부모, 학생을 개패듯이 패고서도 멀쩡히 교사생활 하고있는 선생...
답답한 일들이 많지요.
 

▲이민 가려다 달러 폭등으로 재산 2배=1997년 김태공씨는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작정했다. 당시 37세.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미국으로 이민 가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에 있는 친지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소액투자이민을 소개해줬다. 당시에도 3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둘 재산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장만했던 아파트도 팔았고,별 재미를 못 봤던 주식도 처분했다. 장롱도 팔고,가재도구도 거의 다 팔다 못해 친지들에게 마구 나눠줬다. 마지막으로 차까지 중고차시장에 내다 팔고 나니 통장에 들어온 돈은 3억5,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모두 달러로 바꿨다. ‘가서 슈퍼마켓이나 세탁소에서라도 일하자’는 생각으로 비자수속을 밟고 있을 때였다.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국가가 외환대출을 받는다는 뉴스가 귀에 들어왔다. 97년 11월의 일이었다. 나라가 무슨 전쟁 나는 기분처럼 불안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도 외환위기는 계속됐고,급기야 대 달러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민을 가려던 입장이었던 김씨로서는 환율에 민감했다. 달러 급등세는 멈추지 않았고,1달러당 830원에 매입했던 달러는 이듬해 1,400∼1,500원을 넘어서더니 마침내 1,800원대마저 올라섰다.

이쯤 되자 김씨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 이거 봐라. 내 재산이 두 배로 늘었네. 내가 왜 이민을 가. 여기서 잘 살 수 있겠네”라며 다시 눌러앉기로 하고 모든 달러를 내다 팔았다. 좀더 오르지 않겠냐는 가족의 얘기에도 “됐다. 이 정도면 복받았다”라며 모든 달러를 정확히 1,900원에 팔았다. 거의 8억원에 가까운 현금이 손에 들어왔다.

▲직장에서 가까운 아파트 샀더니 또 2배=편안하게 한국에 눌러 살기로 마음 고쳐먹고 나니 살 집과 직장을 골라야 했다. 살 집은 돈이 있으니 고르면 되는데 직장이 문제였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하루 아침에 부도나서 문을 닫는 형국이었다. 운이 좋은 걸까. 아는 선배가 하는 병원에 취직됐다. “평소 인간성이 좋구 봐야 돼”라며 자만에도 빠졌다. 어쨌든 생각보다 쉽게 직장을 구했으니 그동안 얹혀 살던 동생 집에서 나와야 했다.

집은 당연히 직장과 가까운 아파트를 선택했다. 오래 된 아파트이긴 했지만 경제위기가 겹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앞다퉈 집을 내다 팔았고,그 때문에 집값도 반토막난 게 수두룩했다. 급매물로 나온 서울 강남구 소재 34평 아파트를 2억원이 조금 안 되는 값에 샀다. 그때는 나오는 물건마다 대부분 ‘급매물’이었다. 그런데 그럭저럭 3년여가 지나자 아파트값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경제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재건축 얘기가 나오며 급등했다. 김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노래가 절로 나왔다. 10억원 자산에 도달한 김씨의 그때 나이는 41세. 지금 그 아파트의 가격은 7억5,000만원이 넘는다.

▲안정적인 금 투자로 꾸준한 수익=김씨는 그 이후 하루 일이 끝나면 낚시터를 즐겨 찾는다.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낚시에 푹 빠져 산다. 다만 라디오를 통해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 듣는다. 그는 ‘불경기’라든가 ‘시국 불안정’이란 뉴스에 귀가 쫑긋한다. 뭔가 불안정하면 금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김씨는 역시 친구의 권유로 금을 사고 판다. 정확히 말하면 ‘골드바’(Gold Bullion Bar)다. 그렇다고 골드바,즉 금괴를 갖고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의 사설금고에 골드바 몇 개를 넣어두고 시중에서 증서만으로 거래한다. 김씨가 거래하는 골드바는 보통 500돈짜리. 1돈에 3.75g이니까 약 1.875㎏ 정도가 된다. 1돈에 요즘 5만5,000원(소매가 6만8,000원) 정도 하니까 보통 골드바 하나면 약 3,000만원이 된다.

물론 ‘급’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세계 최고급 골드바인 스위스은행의 금괴는 1개에 11만5,000∼13만달러니까 한화로 환산하면 1개당 1억3,800만∼1억8,000만원에 이른다. 이른바 벽돌 모양의 골드바다. 김씨의 투자기준은 대략 1돈에 도매가 기준으로 5만원에 사서 6만원선에 파는 거다.

금은 안정적인 투자수단의 대명사. 가격이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때가 되면 알아서 올라준다. 금 주화,금메달 유사품 등 금 관련 제품들의 수요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금 투자의 가장 큰 장점은 양도소득세 등이 없다는 점이다. 또 매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금 투자의 장점이다. 김씨는 올 초 이라크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평소보다 많이 벌었다. 최대 20% 가까운 수익률을 올렸다. 금은 한 방에 크게 버는 일은 없지만 꾸준한 수익을 올려주는 투자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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