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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의 글은10월 8일 회계법인 KPMG뉴욕본사에 초청되어 연수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시카고 화이트 삭스 팀에 있는 이만수코치입니다.

남의 나라인 미국 땅에서 이렇게 많은 한국분들을 뵈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내가 아직 너무 젊다고 생각했는데 작년에 애리조나에 있는 유학생이 저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극구 사양했지만 내가 벌써 그런 부탁 받을 나이가 되었나?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자리도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과연 여기 계신 분들께 분야도 너무 다른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고민 많이 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못올 것 같다고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팀이 2위를 하는 통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습니까???

제가 유명해서였거나 성공해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명해서 라고 하기에는 저는 참 오래전 선수입니다. 요즈음 저보다 더 유명한 선수 너무 많지요.

그러면 성공해서 입니까?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저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사람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착한 이곳 미국에서 아직도 언어와 문화의 이질감 때문에 힘든 점이 많고 지도자로서도 초보단계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에 도달하기에는 앞이 깜깜할 때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 자리에 초대받았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이 나이까지 30년 넘도록 야구밖에 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긴 시간을 운동장에서 공을 던지고 치고받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3번 바뀔 만큼 긴 시간을 야구를 해오면서 느끼고 얻은 것 중에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저도 여러분도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이기 때문에 공감가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저는 프로선수로 16년간 선수생활을 했고 이곳에서도 프로팀에서 6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82년도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로 입단했을 때 구단주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저를 불러 “ 프로란 무엇이냐? “고 개인적으로 물어보셨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프로팀이 처음으로 생긴 때여서 프로가 되니 돈 많이 준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던 초창기시절이라 우물쭈물 하며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선수시절 내내 나에게 따라다닌 귀중한 질문이었습니다.


프로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교육이나 트레이닝이 요구되는 직업이나 경력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저 사람은 프로다” 할때는 그 일을 잘 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자주 씁니다.

저 사람은 노래솜씨가 프로야 , 축구실력이 프로야 , 심지어 고스톱도 프로야 할 때 쓰게 되지요.

이와 반대로 그 일에 숙달되지 못하고 잘하지 못할 때 “ 저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돈이 생기냐 안생기냐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프로는 그 일에 익숙하고 그 일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 재능도 필요하고 , 성실도 필요하고 , 인내도 필요하고 등등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할껍니다.

저는 제 프로야구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여러가지 조건 중에 가장 기본으로 꼽고 싶은 것이 있다면 < 고집과 섬세함 >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집이라고 하면 독불장군이나 내 것만 맞는다고 우기는 것이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내가 말하는 고집은 <기본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겁니다.


요즈음은 팔방미인이 환영받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야구선수는 야구를 열심히 해야 하고 정치가는 정치를 열심히 해야 하고 음악가는 음악을 열심히 해야 하는 그런 < 고집 >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은 이렇게 해야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하니까 나도 슬그머니 저렇게 해 버리는 경험을 사회생활 속에서 하게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왕따가 될까봐 두려운 마음도 생기고 전통을 깬다는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아서 기본을 져버리고 대세에 휩쓸릴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때로는 주변 사람들한테 “고집쟁이”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프로선수 생활을 하다보면 야구보다 야구외적인 일 때문에 에너지가 낭비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언제나 기본인 야구에 충실한 것이 우선이라는 < 고집 >을 가지고 16년간 선수생활을 해왔습니다.

프로 초창기에는 프로의식이 없는 선수들이 밤새워 술 마시고 다음날 경기에 술냄새 무지하게 풍기며 비몽사몽간에 경기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신문을 보니 프로야구 역사가 20년이 넘어가는 요즈음에도 심심찮게 선수들이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걸리는 것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운동선수의 기본은 뭡니까?

건강한 신체 , 건전한 정신이 경기력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의 경우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현역선수 시절동안 운동에 방해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예를 들면 술 , 담배 , 잡기 등입니다.

“ 새나라의 어린이 “ 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에 신경을 썼습니다.

부상의 위험이 있는 어떤 스포츠종목도 취미로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즌이 끝나 겨울이 되어서 가족들과 스키장에 해마다 가도 한번도 발목 부상의 위험이 있는 스키화를 신어보지 않았습니다.

운동선수의 < 기본을 지키고 싶은 고집 >입니다.

그런데 미국 메이저리그에 와보니 이미 선진야구에서는 모터 싸이클이나 스카이다이빙 등 부상의 위험이 있는 여가 활동은 문서로도 금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선수들까지도 몸값이 끝 간 데 없이 올라가서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금쪽같은 몸을 보호한다고 BMW , 벤츠는 타면서 운동선수가 지켜야할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뭔가 한참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본에 대한 고집 >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유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학한 중학교에는 유도부가 없어서 운동을 좋아하던 나를 아버지께서 야구부에 밀어 넣으셨습니다.

국민학교때부터 야구를 하던 친구들 틈에 끼어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물주전자 심부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체격에 성실한 훈련 태도 덕분에 경기출장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자 코피를 흘려가며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따라다니는 많은 별명 가운데 “ 연습 벌레 “ “ 독종 “ 도 있었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교까지 11년간을 거의 4시간 이상 자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연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칭찬 들어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이곳에서 메이저리그 지도자들을 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선수들의 단점을 고쳐주기보다는 장점을 개발하고 격려해서 단점을 묻히게 하는 지도 스타일입니다.

나는 현역시절 단점을 고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연습하던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효과적이지 못한 때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 지금 와서의 생각입니다.

우리 팀에 카를로스 리라는 파나마 선수가 있습니다.

야구인인 내가 보기에도 수비솜씨가 너무 엉망이라 저 선수 메이저리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를로스 리 선수에게는 뛰어난 방망이 솜씨가 있었기 때문에 엉성한 수비를 탓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 반쪽선수 “ 라는 불명예가 달릴 법 한데 이곳에서는 그 선수의 방망이 솜씨를 계속 믿어주고 밀어주니 메이저 5년차인 지금은 가끔이지만 그림같은 수비를 펼치기도 하며 약점이었던 수비솜씨가 날로 좋아지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칭찬받고 자라지 못했던 제 기억을 생각하며 제 아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칭찬을 자주 해주며 키웠습니다.

대학교 2학년 , 고등학교 2학년인 두 아들들은 아직도 아빠에게 뽀뽀하고 , 여자친구 이야기까지 자세히 상담하는 착한 아이들로 자랐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가장 자주 해주는 말은 “ 아빠는 너를 믿는다 “

“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 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힘든 사춘기를 말썽한번 부리지 않고 건강하고 명랑하게 커 주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기본에 대한 고집 >외에 제가 < 섬세함 >을 중요한 부분으로 들었는데요.

우락부락한 운동선수에게 무슨 < 섬세함 >이 필요한지 뜻밖이라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저는 < 섬세함 >의 반대가 대강대강 , 대충대충 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기본이 지켜지지 않고 대충대충하면 삼풍백화점이 되고 성수대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분야의 사람은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스포츠로 정상에 선 사람들을 보면 섬세함이 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축구의 차범근 감독 , 탁구의 양영자 선수 , 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박찬호나 김병현 선수도 대단히 섬세한 친구들입니다.

박찬호 선수나 김병현 선수는 개인적으로도 자주 만날 기회가 있는데 화려한 것 같아 보이는 박찬호 선수나 괴짜 같아 보이는 김병현 선수가 야구에 관해서 만큼은 대충대충이 없는 꼼꼼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겠습니까?

생긴 것은 동네아저씨처럼 털털하게 생겼지만 제 일에 관해서는 보기와는 다르게 무척 섬세한 편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야구일지는 30년이 다된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날의 경기상황 , 느낀 점 , 보완해야 할 점 기록하고 경기 외에 일상적인 생활에서 느낀 감정들도 자세히 적습니다.

인터뷰 시간이나 경기장 도착시간 , 야구 장비나 도구의 준비 , 어웨이 경기시 준비물 등 야구에 관련된 것은 작은 것 하나라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저희가족은 여행을 자주 가는데 아내가 짐을 챙기면 여행지에 가서 잊어버리고 온 것이 한두 개는 꼭 있지만 제가 챙기는 날은 100% 라고 늘 아내가 탄복을 합니다.

내 직업인 야구를 하면서 얻게 된 꼼꼼함이 이럴 때 빛을 내기도 합니다.


야구는 다른 어느 종목보다 섬세함이 요구되는 스포츠입니다.

점과 점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도 필요하고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0.03초만에 타자 앞에 도달하기 때문에 순발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관전의 재미가 큰 경기입니다.

세계적으로 축구만큼 널리 퍼져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중국이나 유럽 쪽에서 붐을 일으킨다면 지금보다 더 활성화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메이저리그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중에 하나가 한국야구와 미국야구의 차이점이 뭐냐는 겁니다.

양쪽 나라의 야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관리야구 체제이며 미국은 자율야구입니다.

한국에서 한동안 자율야구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꽉 짜여진 스케줄을 느슨하게 풀고 선수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는 것으로는 자율야구를 정착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늘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관리야구 체제에서는 복종만이 살길이라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고 또 주어진 자유 뒤에 숨어있는 엄청난 책임감을 선수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2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야구는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구단에서 선수단 운영을 할 때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 줍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시즌과 비시즌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제가 현역선수 시절에는 성적이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가을 마무리 훈련이라는 명목아래 페넌트레이스 내내 쌓인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운동장에 불려 나옵니다.

몇 주 쉬고나면 동계훈련이 기다립니다.

추운 한국에서 동계 훈련이 끝나면 따뜻한 곳으로 전지훈련을 한달에서 두달가량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가 마치면 바로 그날로 바이 바이 하고 손 흔들고 각자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니다.

그런 후 4달이 넘는 동안 철저한 자유가 보장됩니다.

그 다음해 2월 중순에 만나게 되면 비시즌 동안 시즌을 위한 체력준비가 완전히 다 된 것으로 간주하고 바로 실전에 들어갑니다.

두달 가까운 전지훈련 동안 쉬는 날이 딱 하루밖에 없는 강행군이지만 탈락되는 선수가 없습니다.

4달간의 자유 속에서 각자 알아서 체력관리를 한 결과일겁니다.

제가 현역일 때는 12월 한달 쉬는 동안에도 헬스클럽에 출석부를 만들어 놓고 매일 도장 찍어가며 감시 아닌 감시를 당했지만 정작 실전에 들어가면 힘들어하는 선수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을 줄로 알지만 구단에서 선수들을 믿고 자율적인 휴가를 충분히 줄 수 있도록 선수들이 먼저 프로의식을 가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나라는 비싼 외화를 들여 해외전지훈련에 오면 3일 내지 4일 훈련 하루 휴식의 일정으로 스케줄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스프링 트레이닝 두달 중에 단 하루밖에 휴식이 없고 34게임 시범경기를 치러내는 강인한 체력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메이저리거들의 당연한 책임입니다.

운동장 밖으로 나가면 일체의 개인사생활이 자유스럽게 보장되지만 내가 겪어본 메이저리거들은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도에 넘치는 음주나 외박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또 가족들이 언제든지 어웨이 경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구단에서 배려해 주기 때문에 아내나 애인들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프로 초창기에 어웨이 경기 갔을 때 밤마다 점호를 하고 코치들이 로비에서 12시까지 못 나가도록 보초를 서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메이저리거들은 평생 쓸 부와 엄청난 명예를 쥘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누가 뭐라고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관리합니다.

구단에서 관리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하거던요.

우리나라도 이제 몸값이 많이 올라갔다고 들었습니다.

이 좋은 기회 앞에서 선수들이 스스로 < 자기 일에 대한 고집과 꼼꼼함 >으로 자신을 관리 한다면 더 이상 구단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선수들의 장점은 뭘까요?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다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듣습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팀에 최대한 협조 합니다.

이곳에서는 야구보다 가족들 일이 우선일 때가 허다해서 제가 깜짝 놀란 때가 많았습니다.

삭스팀 제리 감독은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식 한다고 중요한 상황에서 3일간 빠지고 어떤 선수는 아내가 4번째 아이 출산한다고 2일씩 빠지고 외삼촌 돌아 가셨다고 3일 빠지고 외할머니 돌아 가셨다고 3일 빠지는 등등…………

부모 임종도 못보고 검은 리본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경기에 나서는 한국선수들을 보면서 운동을 한 나에게는 황당한 이유로 밖에 안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20년이 넘는 야구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야구인으로써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활성화되는 길을 생각해봅니다.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여주는 것 외에도 야구장 시설로, 팬서비스로 , 이벤트로 , 심지어는 먹거리로도 관중들을 열심히 불러 모으고 있는 이곳 메이저 리그의 야구가 국민들의 건전한 여가 선용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을 보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이제는 우리도 구장이 크든 작든 , 구장에 뚜껑이 있든 없든 팬과 선수가 함께 즐거울 수 있고, 그리고 구단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들이 야구단을 통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기업이미지를 잘 홍보할 수 있는 ( 우승만이 기업이미지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마인드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야구는 야구단운영만으로 이익을 만드는 진정한 프로스포츠단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에 미국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실정에 맞는 좋은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프로야구 1세대들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구단만 노력해서 될 일도 아니고 선수만 잘 해서 되는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나가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출발이 지역 연고 출신선수로 시작되다니 야구의 내용이나 특징보다는 내 지역선수에 대한 애착이 앞섰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앞으로 야구단이 발전하고 팬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크게는 구단을 응원하고 작게는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떤 구단이 어느 지역선수와 코칭스텝으로 구성하든지 간에 그 구단이 지향하는 목표나 팀 색깔이 팬들의 마음에 든다면 그 구단자체를 응원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가 어느 팀에서 뛰든지 그 선수의 팬이 되어서 그 선수가 속한 구단을 응원 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나라 보다 야구 역사가 훨씬 오래된 미국의 분위기입니다.

( 미국과 우리나라 야구는 출발도 다르고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른 점이 많아서 꼭 어느 쪽이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


저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선수말년에 고생 좀 했습니다.

새로 바뀐 감독이 수십년을 해오던 나의 포지션이던 포수자리에서 1루수로 바꾸며 출장 기회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야구를 하면서 팬들에게 , 내 자신에게 한 약속이 현역선수 40세까지였습니다.

무조건 오래하고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로 현상이 판치는 한국 야구계에서 선수 정년을 높이고 선수도 직업인으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선수 수명이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아까 말씀드렸던대로 야구선수로서 야구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열심히 하는 < 기본에 대한 고집 >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 섬세한 부분 >까지 꼼꼼히 챙겨서 뒤에 야구를 하게 될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내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래도 3관왕 , 홈런왕이 무색할 만큼 한 경기에서 한타석 정도의 차례가 돌아오는 벤치 생활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습니다.

관중들이 이만수 이만수를 부르면 경기에 승패가 걸려있지도 않는 중요하지 않는 순간에 마지못해 대타로 내보내주면 방망이를 들고 걸어 나갈 때의 심정은 말로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은퇴 3년전쯤 우리 팀의 단장이 나를 불러서 2년동안 미국야구연수를 권했는데 사람들은 너무 좋은 기회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30살만 넘으면 노장소리 듣고 35살 되면 완전히 퇴물취급 당하는 이런 풍토는 계속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야구를 참 좋아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는다는 고집으로 나머지 3년을 벤치에서 잘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스타선수가 절대로 알 수없는 후보선수들의 고충도 알았고 경기를 지켜보면서 직접 시합하는 것과는 다른 경기의 흐름을 읽는 것도 배웠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는 내가 한참 시합 뛸 때 공수 교대 하면서 벤치에 들어와 시원한 음료수를 찾으면 없을 때가 자주 있어서 의아 했는데 내가 벤치에 앉아 있어보니 후보선수들이 할일은 벤치에서 음료수 먹는 것뿐입디다.


나는 40살까지의 현역선수 생활이란 약속을 이루고 미국으로 선진야구를 배우러 왔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곳에 이 나이에 공부하러 오는 것이 맞나? 하는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길로 가라는 가족과 팬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현역 선수는 아니지만 지도자로서의 훈련도 역시 < 기본에 대한 고집과 섬세함 >이 필요하더군요.

나에게 주어진 일은 야구이고 야구에서 만큼은 기본을 철저히 지키고 대충하는 일이 없도록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누구보다 제일먼저 야구장에 도착해서 개인체력 훈련과 훈련일기를 쓴 것이 벌써 4년째가 되다보니 팀전체가 만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라고 말해줍니다.

4년간의 홈경기중 작년에 단 하루 박찬호선수와 점심을 같이하고 오던중 길을 잃어버려 찬호도 나도 지각을 했는데 팀에서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늦게 올 사람이 절대 아니라며 걱정을 하고 이곳저곳으로 연락을 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메이저 일정 162경기는 미국 전역을 이곳저곳 날아다니며 해야 하기 때문에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쁘고 빡빡합니다.

짧은 영어로 이 스케줄을 놓치지 않고 따라 하려면 꼼꼼함은 필수입니다.


미국생활은 정말 멘 땅에 헤딩하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것이 이렇게 힘들 줄 상상도 못했지만 그래도 말년의 벤치생활 보다는 낫습디다.

아들뻘인 새파란 선수가 뒤통수를 건드리며 내 이름을 부를 때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 팀 내에 고약한 코치 한명이 마늘냄새 난다고 노골적으로 놀리면 보따리를 싸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내나라가 아니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을 다 잡으며 한해 한해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보고 배운 것들은 훗날 지도자가 되면 쓰이게 될 귀중한 자료기 때문에 열심히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이곳에 더 남아있게 될지 한국에 돌아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어느 곳에 있던지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와는 무척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계시지만 제가 바라기는 여러분께 주어진 일에 대해 < 기본에 대한 고집과 섬세함 >으로 여러분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가 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이 속해있는 분야가 한단계 UP GRADE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이만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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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04-09-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만수 제가 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무작정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가져가서 읽고 싶어서요. 인사도 없이 무례하지만 이해해 주시길...다음에 정식으로...고맙습니다. 추천 먼저 누르고...

sayonara 2004-09-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력과 기본의 중요성, 다 아는 내용이지만 언제 들어도 가슴 찡하죠.
저는 메이저리그에 화려하게 데뷔했다가, 몇년동안 부진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며 여러 팀들을 전전하다 최근에 다시 부활한 노모 히데오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가 동양인 메이저리거 첫선수죠.
 

[연재] 레인이의 중국이야기 13
- 눈물의 오징어볶음

2003.09.25.목요일
딴지관광청

나는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한다. 아니, 만드는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내가 만드는 요리가 제법 그럴싸한 맛을 낸다는 거다. 난 나의 음식을 먹어 줄 사람들을 생각하며 즐겁게 시장을 보고, '한 그릇 더!' 라고 말 할 사람들을 떠 올리며 밥을 짓고, '정말 맛있었어.' 라고 부른 배를 기분 좋게 두드릴 사람들을 상상하며 요리하니까...

그러니까... 내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거다.

중국에서 난 꽤 자주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초대했다. 타국 생활이란 게 원래 그런 거겠지만 한국과는 다른 야채와 양념들로 우리 입에 맞는 맛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특히 혼자 먹는 밥. 이게 정말 고역이라 멸치볶음, 김치찌개 하나를 하더래도 이사람 저사람 불러모아 함께 먹는 게 습관처럼 된 거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혼자서 밥을 먹고 있노라면 맛은 커녕 지금 내가 밥을 먹는 건지, 죽지 않을려고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입에 가져다 넣는 건지... 밥을 먹는 게 일종의 살아가기 위한 행위 정도 밖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 것 같아 스스로 처량해질 때가 많은데 여럿이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면 맛도 맛이지만 제대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우리 집엔 꽤 많은 한국 양념들과 이곳 저곳에서 구한 야채, 그리고 조선족 식당에서 공수한 각종 먹거리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순대라던가 떡볶이 떡이라던가 깻잎, 어묵 같은 것들...

순대는 내가 살던 아파트 앞에 아바이순대라는 식당에서 살 수 있었는데 조리하지 않은 순대는 팔 수 없다는 주인 아저씨를 꽤 귀찮게 군 덕에 어렵게 구할 수 있었고 떡볶이 떡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깻잎은 한국을 갔다오는 사람들이 사다주거나 가끔 한인 교회에서 파는 것을 샀다. 지금은 지천에 널린 게 한국 슈퍼들이고 그렇게 구하기 어렵던 깻잎이며 어묵이며 떡볶이며...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당시엔 구하기 쉽지 않은 정말 귀한 것(?)들이었다.

난 가끔씩 그 귀한 재료들을 풀어내어 잔치를 벌였다. 냉동실에서 또아리를 튼 채 꽁꽁 얼어 있는 순대를 조금 풀어내어 쫄면과 깻잎, 양배추와 양파, 마늘을 충분히 넣은 후 갖은 양념을 하고 얼큰하게 볶아내어 훌륭한 순대 볶음을 만들었고 빨갛고 매콤한 양념과 오뎅, 라면사리를 넣어 떡볶이를 만들었다. 돈이 좀 넉넉한 날엔 해물시장에 들러 낙지도 사고, 조개도 사고, 새우, 꽃게도 사서 해물탕을 끓이기도 했다.

그런 다음 친구들을 불러내어 함께 먹는 거다. 그러면 난 금새 그들의 천사가 되고, 엄마가 되고, 베스트 프랜이 된다.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난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들러 가방을 내려 놓고 시장갈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하지만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편한 신발과 가방을 하나 준비하는 거다. 질퍽한 시장 바닥을 헤집고 다닐려면 슬리퍼보다는 운동화가 편하고, 세상에서 제일 얇은 비닐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중국의 부실한 비닐 봉지는 가끔씩 날 중국 시장에 쪼그리고 앉게 만드는 데다가 떨어진 물건 위로 사람들이나 자전거 바퀴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기도 해서 튼튼한 가방을 챙겨야 했다.

오랜만에 해산물 시장을 가기로 하고 집 앞에서 인력거를 잡아 탔다(시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는 건 시장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꽃 시장 때문이다. 장을 다 본 후에 꽃 시장에 들러 꽃을 한아름 사 들고 인력거를 타면 인력거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꽃 향기가 살짝 묻어나서 나를 기분좋게 간지럽혀주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해산물 시장에 갈 땐 꼭 인력거를 탔다).

물론 타기 전에는 흥정을 잊지 않는다. 난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을 나만의 규칙으로 정하고 있었다. 시장이 있는 거리를 말하고 일단 3 원에 가자고 한다. 5 원을 넘지 않는 한도내에서 흥정을 하고 그 이상을 부르면 난 깨끗이 돌아선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력거 아저씨들은 내가 다른 인력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 '커이커이(可以 keyi, 알았어.그래)' 하며 인력거 머리를 돌린다.

난 그 날도 어김없이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메고 3 원 짜리 인력거를 타고 시장엘 갔다. 먼저 한 바퀴를 쭉 둘러봤다. 이건 엄마한테 배운 건데 일단 시장을 다 둘러본 후에 어디에 뭐가 물이 좋고 싼지 파악해뒀다가 나중에 사야 절약도 하고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댔다.

오징어가 싱싱했다. 거무틱틱한 껍데기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 아주 건강해 보였다. 소쿠리에 다정하게 올라있는 다섯 마리를 다 사 버렸다. 한 번 해 먹기엔 많은 양이지만 모자라서 아쉬운 것보다는 남는 게 낫다. 이래서 난 항상 손이 크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이런 음식 사치(?)는 중국이 아니면 감히 어디서 해보겠냐는 생각에 난 항상 음식을 넉넉하게 했다. 그리고 많은 것 같아 보여도 막상 먹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고 어쩌다 음식이 남아도 서로 싸 가겠다고 해서 마음의 짐도 덜어주니 음식의 양으로 야뱍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볶음으로 정하고 야채를 사러 돌아다녔다. 한국의 것보다 적어도 5 배는 클 것 같은 중국의 고추를 1 근 사고, 구불구불 미로같은 단면이 드러난 양배추 하나와 양파와 당근 파, 마늘 등등의 갖은 야채를 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시장 끝에 연결된 꽃 시장에 들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스티블루와 카라를 한 단씩 사 들고 인력거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먼저 야채를 씻어 다듬었다. 양배추와 당근은 채 썰고 고추와 파는 어슷 썰어 놓는다. 마늘도 다진다. 오징어를 다듬기 위해 동그란 나무 도마를 꺼내고 네모난 중국식 칼을 부엌 벽 타일에 갈았다. 한국에 있을 땐 물컹한 느낌이 너무 싫어서 날 오징어는 손도 못 댔는데 이젠 혼자서 배로 가르고 내장도 손질한다(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데다가 익숙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주황색 비닐 봉투에 담긴 오징어를 하얀색 싱크대에 쏟아 놓으니 세모난 머리 다섯 개와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오징어 다리들이 제 멋대로 엉켜있다. 한 마리를 잡고 미끈거리는 배를 갈랐다. 그 다음 빨판이 징그럽게 달려 있는 다리를 잡고 한번에 내장까지 전부떼어낸다. 몸통은 얇은 뼈까지 깨끗히 제거하고 다리는 속에 감춰진 눈과 내장을 다 잘라내고 다듬는다. 그렇게 두어 마리쯤 손질을 했나보다. 오징어가 워낙 미끄러워서 조심한다고 했는데, 칼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왼쪽 검지 손가락을 조금 잘라놨다. 손톱과 그 안쪽에 붙어 있는 살이 조금 떨어져 나가고 그다지 빨갛지 않은 속살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피가 뚝뚝 흘렀다. 아픈 것보다는 도마위를 흥건히 적셔놓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의 흐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순서대로라면 이쯤에서 난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면 엄마나 친구들이 달려와서 휴지로 피를 닦아 주고, 약을 발라줘야 한다. 그들의 걱정스런 말투에 나는 더욱 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오징어 볶음은 엄마가 마무리를 해야하는 거다.

그런데, 난 혼자였다. 손도 못대던 징그러운 오징어를 씩씩하게 다듬다가 손이 베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호소할 엄마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다.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데 난 부엌에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하얗던 오징어가 빨갛게 물이 들도록...

갑자기 혼자라는 느낌이 무섭게 엄습했다. 그리고 이내 서글퍼졌다. 반창고를 갖고 달려와 줄 엄마 생각이 나는 듯 하다가 사라지고, 괜찮냐고 달려와서 피를 닦아줄 친구들 생각이 나는 듯 하다가 사라지고, 칼질을 하다가 손을 베인 나만 덩그러니 부엌에 남아 있었다.

오징어를 손질 하다가 손을 베인 작은 사건은 어이없게도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너무나 또렷하고 선명하게 각인시켜주었다. 네모나고 무식하고 무거운 중국 칼은 내 검지 손가락의 손톱과 살 뿐만 아니라 내 가슴 속의 그리움마저 도려냈다.

결국엔 울었다. 부엌 바닥에 주저 앉아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어가며 펑펑 울어댔다. 아파서 운 게 아니였다. 혼자인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워서... 그리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렸을 땐 피가 나면 조금이라도 더 나오게 일부러 짜내서 엄마한테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어..' 라며 보여줬다. 그러면 엄마는 '어머 우리 딸, 피가 왜 이렇게 많이 났어?' 하는 표정으로 날 걱정스럽게 바라봤는데 난 그런 엄마의 얼굴이 좋았다. 상처를 살피느라 이마 가운데 살짝 찌푸려진 주름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고 호오~ 하며 약을 발라줄 때 오므라진 엄마의 입술은 그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뿌듯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난 다쳐서 약을 바르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사랑받고 보호받는 행복한 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 혼자다. 이렇게 피가 많이 흘렀는데... 엄마의 동정심을 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고 날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횐데 말이다.

꽤 많은 양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양파를 잘랐던 칼에 베어서 그런지 손이 점점 화끈거려왔다. 난 얼른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다친 부위를 물로 씻어내고 약을 발랐다. 반창고를 붙여도 계속 새어나는 피 때문에 다시 붕대를 칭칭 감고 왼쪽 손에 고무 장갑을 꼈다. 칼 반대편에 붙어있는 내 조그마한 살점을 떼어내고 다시 오징어를 손질했다. 손이 아려왔지만 그보다 내 요리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 얼굴이 더 아른거렸다.

피로 빨갛게 물들은 오징어를 버릴까 하다 물로 씻어보니 깨끗해지길래 그냥 넣고(사람의 피가 배인 거라 더 맛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손질해 둔 야채와 갖은 양념으로 매콤하게 오징어볶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레인 : 야야!! 오늘은 오징어볶음이야. 열라 맛있으니까 얼릉 와..
                   니가 다른 얘들한테 전화 하구...

         친구 : 응.. 와아~~~~! 콜라 사 가꾸 갈께.

십 분도 안되서 친구들이 몰려왔다. 큰 접시에 오징어볶음을 한 가득 담아내고 커다란 공기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식탁에 올려놨다. 늘 그렇지만 별다른 반찬은 없다. 우린 항상 일품요리였다.

나까지 총 네 명의 여자아이들이 오징어 다섯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여전히 '맛있네, 맛있어.' 를 연발해 주는 친구들 덕에 난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맛있게 먹은 것 같다.

그런데, 한 친구가 상을 치우다가 붕대를 감고 있는 내 검지손가락을 발견했다.

         친구 : 야~ 너 손 왜 그래? 다쳤어?

         레인 : 아하하. 응. 이 바보들..

         친구 : 왜? 왜 그랬어?

         레인 : 오징어볶음 맛있었어?

         친구 : 왜 다쳤냐구 물으니까.. 그건 왜 물어? 왜 그랬냐니까?!

         레인 : 맛있었냐구!!! 대답이나 햇!

         친구 : 응. 맛있었어. 왜?

         레인 : 푸하하하.. 너네 그게 왜 맛있는 줄 알어?
                   내 피에 물들은 오징어를 넣어서 그래. 아하하하.. 웃기다.

         친구 : 너 손 다쳤구나?

         레인 : 응... 오징어 손질하다가 베었어.

         친구 : 어디바바.. 많이 다쳤어? 아직도 피가 베어나오네...

         레인 : 아이씨~ 괜찮어.

         친구 : 어디 풀러바.

         레인 : 괜찮대두. 아.. 그만해. 우리 후식이나 먹자. 콜라 가져 와!

         친구 : 많이 다친 거면 병원 가자. 응?

         레인 : 너네 자꾸 왜 그래..? 흐흑....

결국 또 한 번 울었다. 사실은 너무나 아팠다고...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그게 더 맘 아팠다고... 상을 치우다 만채 바닥에 주저 앉아 붕대에 칭칭 감긴 검지 손가락을 펴 들고 울어 버렸다. 오징어볶음을 맛있게 먹은 친구들은 이 어이없는 눈물 앞에서 잠시 당황해하는 듯 하더니 금새 같이 눈물을 떨구었다. 모두들 오징어만큼 만한 아니, 잘려진 손톱만큼 만한 그리움을 참아내고 있었나보다.

그날 저녁 우린 오징어볶음 먹고 터져 버린 매운 눈물 주머니 덕분에 보고 싶은 엄마, 아빠 얘기에서 맨날 싸우던 언니, 오빠, 동생 얘기, 한국에 두고 온 여자친구, 남자친구, 중국 올 때 헤어진 애인, 집에 있는 강아지 얘기와 한국의 그리운 것들에 대한 얘기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에서 붕대를 다 풀어낼 때까지 친구들은 나 대신 밥도 해 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가끔은 세수까지 시켜줬다.

우린 그 일을 '오징어눈물대사건' 이라 칭하고 가끔 웃었다. 사실은 그때 배가 너무 불러서 눈물이 난 거라고... 네가 울길래 따라 운 것 뿐이라고... 오징어볶음이 너무 매워서 눈이 빨개진 거였다고...

배불리 오징어볶음을 먹고 난 네 명의 여자애들이 하나의 검지손가락 때문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통곡한 일은 사실 슬프다기보단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검지 손톱 끝자락에 조그맣게 흉터를 남기고 자라지 않는 손톱을 볼 때마다 그날의 허전함이 떠 오른다.

그래서 난 오징어를 보면 가끔 외로워진다. 그리고 아주 가끔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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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경 아줌마의 속시원~한 수다]

얼마전 일어난 미국 테러사건의 피해자들이 죽음 직전 가족과 친구에게 남긴 말은 한결같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라는 것. 평소 우리는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량한 자존심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이 다음에 해야지’ 하는 게으름 때문에. 그러다보면 그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 수도 있다. 오늘이라도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관심을 표현해 보자. 당장 내일 죽지 않는다 해도 아쉬울 건 없지 않은가.

한 명상가가 수련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생명이 1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 1개월 동안 당신이 꼭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람들은 진지하고도 고통스럽게,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마지막 소망을 종이에 적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노모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다 생을 마감하겠다는 중년의 남자. 늘 자기를 나무라는 권위적인 상사에게 눈을 부라려보겠다는 소심한 샐러리맨, 자신의 전재산을 정리해 카리브해 호화유람선을 타보겠다는 20대 처녀.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겠다는 주부.

명상가가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망을 왜 지금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겁니까?”

물론 이 이야기는 왜 지금 당장 할 수도 있는 일을 나중에, 이 다음에, 늙은 다음에, 죽기 전에로 미루며 자유의지대로 살지 못하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우리에게 남은 생명이, 한달 아니 불과 몇분뿐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은행 통장을 정리하는 걸까, 아님 배부르게 잔뜩 먹는 걸까, 아니면 평소 미워했던 이들을 찾아가 따귀라도 때려주는 걸까.

얼마전 일어난 미국의 테러사건을 보면서 난 미국과 테러범들과의 관계나 정치적 문제, 혹은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걱정하기보다 그 사건으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과 그 가족들이 안쓰러워 가슴이 아팠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그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1백층 이상의 고층빌딩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비행기 납치범에 의해 인간폭탄 재료가 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인종도, 나이도, 직업과 성격도 모두 다른 이들이지만 그들이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화나 핸드폰으로 남긴 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았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더 살고 싶다는 애원이나 복수를 해달라는 저주가 아니었다. 그들의 마지막 말은 한결같았다.

“내가 당신을(엄마를, 아빠를, 언니를, 친구를) 사랑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가까우면 너무 가까워서, 거리가 좀 멀면 멀어서 우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알량한 자존심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이 다음에 해야지’ 하는 게으름 때문에.

얼마전에도 그랬다. 우리 부에 아르바이트 학생이 들어왔다. 20세, 만으로는 18세라고 하는데 노랑머리에 야한 옷차림, 그리고 눈빛도 약간 불안했다. 일도 별로 성의있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전형적인 요즘 아이구나’ 하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아이가 얼굴빛이 달라져서 조퇴를 했다. 물어보니 가족 사이에 문제가 좀 많은 것 같았다. 고등학생인 동생은 끝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부모도 그렇고. 그 불안한 눈빛의 이유를 알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가정환경이 어려워도 가출도 안하고, 원조교제도 안하고 착실하게 사무실에 일하러 나왔다는 것만으로 그 아이를 돕고 싶었다. 조용히 불러내서 집안 이야기도 듣고 도와줄 일이 없는지도 알아보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해외출장을 다녀와보니 그 아이는 이미 회사를 그만둔 후였다. 연락도 잘 안된다고 했다.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진작 조금만 더 빨리 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고 뭔가 같이 고민했으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내가 ‘이 다음에’하며 말을 아끼는 사이에 그 아이는 이젠 나와 인연이 없어져버렸다.

 ‘다음에’라고 미룬 사이 관심을 보여줄 기회는 사라지고 말아

또 얼마전에는 초등학교 동창생이 국내 명문의대 교수가 된 걸 알았다. 후배의 아기가 수술을 할 예정이어서 무심히 그 이야기를 하는데 담당 주치의가 그 동창생이었다. 그 친구가 의대에 들어간 후 만난 적은 있지만 20여 년을 소식을 전하지 않은 사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친구를 처음 본 후 난 혼자 끙끙거리며 짝사랑을 했고 마음속에서 그 아이를 어린 왕자로 곱게 키웠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만났을 때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제 40대 막가파 아줌마가 되었고 나름대로 이미 다 정리된 ‘과거 완료형’의 감정이었기에 교수명단에서 그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메일을 보냈다. 나를 기억하냐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널 무지무지 짝사랑했다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답장이 왔다. 다른 내용은 없고 “네가 날 좋아했었다니 굉장히 충격적이다”라는 말,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건강하길 바란다”는 말뿐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섭섭하고 부끄러웠다. 20여 년 만에 친구가 편지를 보냈는데 예의로라도 “언제 한 번 만나 차나 마시자” 하고 제안할 줄 알았는데 “놀랐다”는 말만 반복하고 건강하라고 기원만 하다니. 하지만 그에게 좋아했었다는 말을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때가 늦긴 했어도 그 애를 좋아했었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뒤늦게라도 누군가 자기를 좋아했다고 하면 불쾌하거나 억울하지는 않을 테니까.

요즘은 매일 밤 엄마를 씻겨드리고 재워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 오늘도 살아계셔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엄마가 치매에 걸리기 전, 건강하고 무슨 말이건 다 들어주셨을 때는 엄마에게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을 잘 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뭐 해달라, 섭섭하다 등등만 강조했다. 엄마가 건강하셨을 때 더 많이 안아 드리고 더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참 미안하다.

내 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 딸이니까 사랑하는 게 너무 당연하지만 그 아이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표현못할 때가 많다. 그 아이의 미소가 얼마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지, 그 아이가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지는지를 알려줘야겠다. 내 사랑을 알면 딸아이는 절대로 가출도 안 할거고 나쁜 유혹에도 빠지지 못할 것이다. 당장 내일 죽지 않는다 해도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 손해볼 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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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09-09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즉각즉각 표현하기도 참 쑥쓰럽죠.
"엄마 잘할께요"하는 박카스 CF도 왜 그리 어색한지.. ^_^;;;
 

[세계일보 2004-02-04 09:48]

다국적기업들에서 일하는 제3세계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대해 도덕적 의분을 토하는 인사들은 그 노동자들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사용자인 다국적기업들이 그들에게 과거보다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는 그 도덕적 십자군들 중에 비교적 합리적인 일부 인사는 다국적기업들이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나은 보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부유한 다국적기업들이 어째서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 선진국 노동자들과 좀더 비슷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경제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이유이다. 경제적 이유는 제3세계 노동자들의 시간당 산출량, 즉 생산성이 미국과 같은 서방 선진국 노동자 생산성의 몇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성을 무시한 보수 인상은 비록 그것이 제3세계에 대한 ‘착취’를 중단하는 것이든 미국 노동자들에게 ‘생활급’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든 사실상의 실직보장서일 따름이다.

현대의 대다수 선진국에는 최저임금법이 있다. 그러나 고액 최저임금제나 추가적인 노동자 수당을 규정하고 있는 국가들은 실업률이 높은 나라들인 경향이 있다. 예컨대 독일은 정부가 의무화하는 가장 많은 노동자 수당을 제공하고 있다. 이 수당 가운데 퇴직수당은 너무나 높아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은 비경제적인 조치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이 같은 수당 비용은 미국 사용자들이 제공하는 수당의 약 두 배나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만약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노동자들이나 다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높은 노동비용과 해고의 어려움은 심지어 경기가 좋을 때에도 사용자들에게 더 많은 종업원을 고용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미국인들은 실업률이 6%에 이르면 경악하지만, 독일에서는 두자릿수의 실업률이 통례이다.

과거 한때 스위스나 홍콩에는 최저임금법이 없었다. 지난해 영국 시사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스위스의 실업률이 2월에 5년 만의 최고 기록인 3.9%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최저임금법이 있는 대다수 국가의 경우 실업률 3.9%는 비록 전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마 5년 만의 최저 기록이 될 것이다.

과거 홍콩이 영국 식민지 하에서 임금 수준이 수요와 공급 원칙에 의해 결정될 때 월스트리트 저널은 홍콩의 실업률이 2% 이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중국이 홍콩을 인수하고 각종 노동자 수당을 의무화함으로써 노동비용과 임금 수준이 상승하게 되자 홍콩의 실업률은 8%를 넘어섰다.

이러한 실업률은 유럽 기준으로는 높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홍콩에서는 유례없는 일이다.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

그런데 부유한 다국적기업들은 어째서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생산성보다 더 많은 보수를 지불하는 데 따른 비용을 스스로 흡수할 수 없는가. 다국적기업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매출액 수십억달러의 다국적기업들은 억만장자들의 소유인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그 다국적기업들은 대개 수백만명은 아닐지라도 수천명의 주주들의 소유이며, 이 주주들 대다수는 억만장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 주주들 가운데 일부는 다국적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하는 연금기금에 투자함으로써 직·간접으로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교사와 간호사, 기계공, 사무원, 여타 유사 계층의 사람들일 수 있다.

실제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모든 주식투자자들의 평균 소득은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보수를 지불하는 데 따른 비용을 다국적기업들이 흡수해 주기를 바라는 지식인들과 정치인 및 여타 인사들의 평균 소득 수준보다 전혀 더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교사들과 간호사, 기계공, 사무원들이 정년퇴직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수락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뉴욕 타임스의 기자나 일류 대학 교수들, 영화배우 혹은 도덕적으로 의분을 토하는 다른 인사들은 어째서 제3세계에 대해 그들과 유사한 기부금을 내놓지 않는 것인가.

그 이유는 도덕적으로 의분을 토하는 인사들에게 있어서 제3세계를 지원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용을 내도록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 자신들이 비용을 내야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워싱턴 타임스

정리=권화섭 한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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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병일의 경제노트, 2004.8.31)

해외 언론은 한민족의 혈맥 속에 활 쏘는 민족의 DNA가 존재한다고 믿기도 함.
하지만 한국 여자 궁사들의 성공은 결코 타고난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치밀한 전략과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물이었음.

외국 선수들은 하루 100발 정도로 연습, 소속팀이 없는 선수나 일정한 직업이 있는 선수의 경우 일주일에 하루 연습하는 수준이나 한국 선수들은 하루 300~500발 이상을 연습하고, 올림픽 때는 1000발씩 연습함.

야간에 서치라이트까지 켜놓고 훈련을 하기도 하며, 어떤 선수는 밤에 공동묘지에서 혼자 촛불을 켜놓고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음.

이장균의 '한국 여자양궁 신화와 기업 경영 전략' 중에서 (현대경제연구원, 2004.8.30)


1984년 LA올림픽 이후 이번 아테네올림픽까지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석권한 한국 여자양궁 선수들.

한 경제연구소는 이 여자 양궁선수들의 경쟁력을 분석, 기업경영에 주는 시사점을 다음 7가지로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1. 잘하는 것에 집중하라
2. 시장을 지배하고 표준을 선도하라
3. 어떠한 환경의 변화에도 위협받지 않는 핵심역량을 갖춰라
4. 핵심인재 그룹을 형성하고,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라
5. 차세대 리더를 키우고 세대교체에 성공하라
6. 조직내 학습 및 R&D에 역량을 집중하라
7. 내부의 적을 관리하라

연구소의 지적대로, 이들의 성공은 결코 타고난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치밀한 전략과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수백발의 활을, 시합을 앞두고는 1000발의 활을 쏘며 연습했습니다.
보통 100발을 쏜다는 외국 선수들에 비하면, 살인적인 연습량입니다.

그들을 또 상대가 잘못 쏘기를 기대하게 되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되어 오히려 자신의 점수가 나빠진다고 생각, 경쟁자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활쏘기에 집중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 자신을 이기겠다는 자세로 매일 1000발의 활을 쏜 그들.
진정한 '인생의 금메달리스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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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09-02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광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있습니다.
1000발이라... 역시 한계를 넘는 노력이 필요하긴 한가 봅니다.
마지막 구절, 저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